전향의 사상사적 연구 논형 일본학 8
후지타 쇼조 지음, 최종길 옮김 / 논형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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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모두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출간소식이 들리면 사지 않을 수 없는(더구나 현재 한국의 인문 사회과학계의 출판상황에 비추어 2쇄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책들을 보면서,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는 것은 <언젠가>에 대한 바람 때문이기도 하다..

 

사상의 과학 연구회편, <공동연구 전향>(상, 중, 하)도 그런 책들 중 하나이다..

1200페이지가 넘는, 그것도 빽빽한 활자로 지면이 가득 채워져 있는(현재의 편집으로 바꾼다면 2천 페이지는 족히 될) 이 세 권의 책을 전문연구자가 아닌 이상 통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전향>이라는, <먹물>들에게는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항상 어딘가 모를 부채가 남아 있었다.. 더구나 김소진의 소설들을 최근 다시 읽은 뒤였고.. 또 전향이 터부시되는, 그래서인지 전향 선언(고백)이 없는 기묘한 전향이 난무하는 한국 지식사회에서 <전향>의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과제를 최근 떠맡고 힘겨워하던 처지에, 그 전초전으로 지난 주말 <공동연구 전향>의 옆에 꽂혀 있던 후지타 쇼조의 책,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를 꺼내들었다..

 

후지타 쇼조의 이 책은 <공동연구 전향>에 실려 있는 서문격인 3편의 글과 한 편의 보론을 이후 출판한 것이다.. 출판사는 저자가 그렇게 꺼려하던 (일본 학계의 현 실태를 대표하는) 유명한 이와나미..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마루야마를 경유하여 후지타 쇼조의 세계로 들어가겠지만, 후지타의 사유는, 그리고 문체는 말 그대로 독자들을 질식시킬 듯한 치열함이 특징적이다.. 대상에 접근하는 데 있어 조금의 나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과 그 분석의 칼끝을 글을 쓰는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들이대는 성실함이 그런 사유를 빚어내는 힘일 것이다.. 여기에는 마루야마가 종종 구사하는 <유머>가 들어설 여지도 없다..

 

만주 사변 이후인 쇼와 8년(1933), 중일전쟁 개시 이후인 쇼와 15년(1940), 그리고 패전 직후인 쇼와 20년(1945), 피의 노동절 탄압 이후인 쇼와 27년(1952)이라는 일본 사상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이 세 시기에 출현한 전향의 양상을 시계열의 변화에 따라 추적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해내는 작업은 말 그대로 엄청난 스케일과 개인 사상가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다(왜 서력이 아닌 연호를 썼는가에 대해서는 후지타가 성찰적으로 고백한 바 있으니 생략한다).. 

이상의 연구는 도저히 한 개인이 감당해낼 작업이 아니다.. 후지타에게 부여된 임무는 그 사상적 정황을 큰 그림으로 스케치하면서 연구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작업이었다.. 사상의 과학 연구회의 일원도 아니었던 그에게 <객원 연구원>이라는 신분을 부여하면서까지 이 엄청난 작업을 맡긴 츠루미 슌스케의 혜안(기획)도 놀랍지만, 1933년 맑스주의자들의, 37년 이후 자유주의자들의, 그리고 1945년 이후 국가인과 제도인의, 그리고 1952년 다시 맑스주의자들의 전향이 갖는 성격들을 유형화하고 이를 <전향>이라는 큰 틀 속에 자리매김하는 작업에 말 그대로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 일본 지식사회의 이러한 성실성은, 역시 과거 자신들의 사회를 짓누르던 파시즘, 군국주의에 (지식인으로서)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자기성찰, 그리고 부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물론 <전후>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를 안타깝게 날려버리고 지금은 극소수의 집단으로 전락해버렸지만, 자신들의 패배의 기록을 성실히 써내려감으로써 이후 세대들에게 계승하고자 하는 그들의 성실성은, <승자의 도취>에 빠져 화려하게 전향해버린 한국 지식사회의 그 황량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다.. 물론 그런 엄혹한 시절을 거치지 않은 후대의 우리가 <전향>을 평가하는 자리에 서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자세는 우리들보다 앞선 시대의 전향에 대해 기술함에 있어 결코 동시대의 비전향자의 위치에 자신을 두고 판단, 평가하려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시점에서 전향의 문제를 사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룰의 문제인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지식사회에도 이러한 <공동연구 전향>과 같은 작업들을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전향이 명백함에도 이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러한 기획이 과연 시도될 수 있을까.. 그 <언젠가>를 기다리며, 후지타의 그 치열한 사유를 한줄한줄 읽어내려간다..

 

만주사변에서 일본군 전승사진이 들어간 보도를 보고 마치 우리가 국제대항경기에서 일본선수가 승리하는 장면을 보고 있을 때와 같은 흥분을 느끼기에, 그렇게까지 커다란 장애물을 신체 내부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전쟁의 '안마'적 기능에 의해 애써 문화교양의 세계주의에 빠지려고 한 지식인의 상당수가 응어리를 풀고 일본인의 감각으로 복귀한다. ....

간헐성의 감각적 세계관이 다시금 자각되었을 때, 그것이 본인에게는 꽤나 깊은 실감이었겠지만, 밖에서 보면 일본 사회에 대한 공감에 지나지 않고, 이것에 의해 일본 사회에 가입하는 비의식적 의식을 행한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리하여 여기서 실감의 의미가 명확히 전환된다. 더 이상 실감은 공감에 대결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복귀해야만 하는 이 때의 공감은 개인의 실감에 의해 부정적으로 매개되는 것으로서, 내부에 대립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상황에 지향되는 하나의 감정이다. 여기서 만약 근대정신이라는 것이 '분열하는 의식'이고 따라서 에너지의 자가발전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공감구조는 근대정신을 지탱하는 감성구조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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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착의 사상 - ‘오키나와 문제’의 계보학과 새로운 사유의 방법
도미야마 이치로 지음, 심정명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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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에게 선물로 받은 책이니, 빨리 읽은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압박감으로 다가왔지만, 어느새 3주가 흘러버렸다.. 역시나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도미야마 선생의 책이라, 역자도 양해해 주리라 믿고, 조금 늦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인상을 잠깐 남긴다..

 

도미야마의 세 번째 책이 번역되었다.. <전장의 기억>, <폭력의 예감>, 그리고 이번에 나온 <유착의 사상>이다.. 역자는 심정명.. 도미야마 선생의 수제자니만큼 번역은 믿고 보기로 했다.. 실제로 전작의 번역에 비해 훨씬 깔끔하다.. 도미야마의 원서를 본 이들이라면 이 말이 역자에게는 굉장한 칭찬이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아마 그러한 문체가 도미야마에게 다가가는 것을 어렵게 하는 장벽이기도 하다.. 실제로 도미야마의 책은 그 내용의 깊이에 비해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여전히 읽기 녹녹치 않은 도미야마의 문장을 오랜만에 따라 읽으면서, 선생 생각이 나서 잠깐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도 했다.. 꿈을 꾸듯 몽롱하게 느릿느릿 이야기하면서도, 사유의 끈을 결코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사유를 다른 언어로 확대시키는 그의 이야기는 듣는 이들에게 예리한 통찰력과 함께 자신의 사유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곤 했다.. 그건 촌철살인의 직선의 언어가 아닌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는 곡사포의 언어다.. 말에 대한 집착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말이 진정 짊어져야만 하는 영역은 여기에 있다. 정치는 역시 말로 표현되어야만 하며, 말로써 이를 짊어지려고 하는 작업을 포기한 순간 세계는 무조건적인 폭력으로 뒤덮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미야마의 사유가 갖는 힘을 충분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의 문체가 하나의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같다. 그의 사유는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가끔씩은 그 진행형이 너무나 어지럽게 전개되어 있어, 독자들을 종종 미궁에 빠뜨리곤 하는 것이다.. 이제 50대 중반에 이른 그의 사유는 조금 더 간결한 문체를 장착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의 경험과 관련된 언어의 층위에 주목하는 그의 성향은 종종 아포리아에 자신의 논의를 의존하는 듯 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스피박의 언어를 빌려 말하듯, "아포리아는 딜레마나 패러독스와 같은 논리적 카테고리와 구별된다. 경험이 전제와 구별되듯 말이다. 아포리아 자체는 뚫고 나갈 출구가 없는 상태를 말하지만, 뚫고 나가고 있다는 경험 속에서 알게 된다. 이렇듯 그것은 마성 속에서 펼쳐지며, 그러므로 불가능한 것의 경험이다."

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래서 그는 논리적으로 정식화된 이론보다는 미래를 찾는 말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자 한다. 개인화되고 타자화되어 파일에 보관된 이들의 침묵을 깨고 다시금 말하기 시작하는, 또 다른 말의 수맥에, 자연화된 이들이 "적의를 품은 자연, 근본적으로 반역적이어서 감당할 수 없는 자연"으로 표정을 바꾸는 가운데 생겨나는 말들이 '위험한 계급'의 말로서 작동하는 것에 그는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죽은 넋이나 산 넋의 말을 계급의 언어로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절대 동의.. 하지만 이 말을 논리적으로 정식화하는 작업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섬광처럼 오는 말들을 어떻게 다시 <산문화>할 수 있을까.. <광기의 역사> 이래 푸코가 고민했던, 그리고 너무나 투명하게 보여주었던 그 언어를, 도미야마는 아직 자신의 장(오키나와와 일본)에서 찾아내는 중인 듯하다.. 그래서 그의 글은 그 치열한 격투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지만, 그래서 불완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나는 도미야마의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그건 사유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고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성실한 격투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언어를 단련하는 것.. 왜 언어인가라는 질문에는 <어느 책 읽고 글쓰는 일개 노동자>인 나 역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역시 말로 표현되어야만 하며, 말로써 이를 짊어지려고 하는 작업을 포기한 순간 세계는 무조건적인 폭력으로 뒤덮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까지..

왜 <流着의 사상>인가에 대해서는 또 다음 기회에..

호기심에, 혹은 다른 이유로 이 책을 꺼내든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고 그의 사유의 정수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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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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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비의 <지금이 아니면 언제?>(1982)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해보더라도 이채로운 작품이다..

여기에는 <이것이 인간인가?>(1947)로부터 <휴전>(1963), 그리고 <주기율표>(1975)로 이어지는 그의 아우슈비츠 체험에 토대한 회고가 아닌, 그 역시 가담했던, 하지만 <이것이 인간인가>의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별다른 활동도 하지 못한 채 붙잡혔던 <유태인 빨치산>의 이야기가 중심 테마로 그려져 있다.. 왜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이전과 같은 아우슈비츠 체험을 담은 자전적 이야기가 아닌,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그것도 빨치산의 이야기를 쓴 것일까.. 책을 읽어가다보니 그 의문이 조금씩 풀리는 듯 하기도 했다..

 

이 책의 절창은 무엇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유태인 빨치산의 노래이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노래가사는, 한 유태인 빨치산 대원이 나치에 체포된 후 처형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만든 노래였다고 한다.. 그가 부르던 풀룻을 만지작거리던 특수보안사 간부는 그에게 말했다..

첫째, 빨치산은 교수형이고,

둘째, 유태인은 총살형이다. 이 중 하나를 선택하라.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교수형을 당한 후 총살형에 처해진다. 이 노래가사는 그가 마지막 소원으로 받은 30분 동안 종이에 남긴 것을, 이후 그의 부대원들이 복수한 후 되찾은 것이다.. 두 번의 처형을 앞둔 상황에서, 나의 목숨이 소중하지만, 또 내 목숨만을 바란다면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냐고 묻는, 그리고 유태인 빨치산이라는 가장 힘든 길을 선택하면서,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절절해서, 잠시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부르는 노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전 조선인 특공대원에 대한 글(<조선인특공대원이라는 물음>)을 쓰면서, 특공으로 출격하기 직전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히고 아리랑을 불렀다는 한 청년의 내면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학문적으로) 그 내면을 읽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물음표로 남겨두었지만, 그 특공대원의 심경을 생각하면서, 왠지 김산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죽음을 예감하며 불렀던 <아리랑>이 떠올랐던 것은 왜일까.. 노혁명가로서, 패배로 일관해온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도 결코 혁명에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김산이, 죽음을 예감하면서 불렀던 <아리랑>.. 그것은 분명 유태인 빨치산이 처형 직전 몽당연필로 종이에 남겼던 <지금이 아니면 언제>와 서로 연결될 수는 있어도, 조선인 특공대원의 <아리랑>과 만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부르는 노래에 깃든 처절함, 그리고 이러한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 상황을 넘어서고자 하는 힘에 대한 처절한 갈구라는 점에서는 서로 공통되는 것이 아닐까..  

 

 

 

2.

이 작품은 유태인 빨치산들이 걸었던 길La strada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 빨치산들의 삶은 가혹했다.. 하물며 유태인 빨치산의 처지야.. 그들은 정규군뿐만 아니라 다른 빨치산 조직들에도 배척을 받았다.. 믿을 수 없는 유태인이라는 낙인은 저주처럼 그들을 따라다녔다.. 유랑은 그들의 운명이었다.. 그들은 그 운명에 괴로워하면서도, 어떤 경우는 이에 순응하면서(<유태인 풍자극>의 그 씁쓸한 풍자를 보라), 또 어떤 때는 그 운명을 거부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다.. 그 길은 20-30년대 만주 지방을 유랑했던 조선인 빨치산들의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전쟁이 끝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종전을 마음놓고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적 나치는 사라졌지만, 이제 소비에트 군대가, 또 연합군 군대가 또 그들의 적이 될 지 모른다..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운명이므로.. 그들을 아군으로 받아들이기는 커녕 무장해제를 명했던 소비에트 장교의 다음과 같은 선고는 유태인 빨치산의 험난한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어느 빨치산이든 모두 소비에트 빨치산 연맹에 소속되어 있다. 그런데 유태인만의 독자적인 빨치산 부대에 관해서는 아직 들은 바가 없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여기에 머무르면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리 알기 바란다.

 

이후 그들의 길은 실로 유랑의 길이다.. 그 길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이후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겪어야 했던 또 하나의 유랑의 길(<휴전>)과도 겹쳐 있다..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팔레스타인은 정말 그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잠정적인 목적지인 이탈리아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주인공 멘델은 자신(들)의 미래를 떠올려본다.. 그것은 이 책의 또 다른 테마인 <디아스포라>의 사유이기도 하다..

 

이제 멘델은 혼자였다. 여인도 없고 목적지도 없고 고향도 없었다. 친구들마저 모두 사라진 것일까? 아니 그건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동고동락한 동지들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동지들은 그의 공허감을 채워주었다. 열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고난의 여정도 모두 끝났다. 그럼 이제 그에게 무엇이 찾아올까? 그는 과연 어떤 존재로 살게 될까? 그토록 기다렸던 약속의 땅에서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설령 그곳에 간다고 하더라도 고난의 전투와 행군을 다시 해야 할 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그의 운명이라면 마땅히 수용해야겠지만....

첫 작품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여기에는 메두사의 머리를 보아버린, 가라앉은 자들, 무셀만들까지도 포함된다)의 비참한 삶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외쳤던 레비가 자신의 마지막 소설을 유태인 빨치산의 이야기로 끝맺었다는 것은, 그의 작품세계가 인간의 존재의미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궤적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레비는 일단 여기서 멈춰 섰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았을 지도 모른다.. 여행은 끝난 것일까..

 

하지만 여기서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이 세계가 가라앉은 자들과 남은 자들이라는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레비는 증언자로서 그 고통스러운 길을 남은 자들이 함께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절박한 요구였다..  

 

그 절박함에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는 것..

 

cf. 그런데 품절이라니.. 레비로의 여행을 떠나려는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출판사 측이 충분한 고려를 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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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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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프리모 레비의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정좌를 한 상태로 계속 책을 읽는다.. 왠지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그의 책을 읽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여전히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을 헤쳐 나온 후, 그가 그렇게도 바랬던 인간으로서의 가치, 존엄성에 대한 인정 같은 것들이 점점 헌신짝처럼 내팽겨쳐지는 <사회?>에서 모른 척하며, 하루하루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책에 집중하는 것을 더욱 가로막는다.. 

 

<휴전La tregua>.. 그의  두 번째 작품 <휴전>이 출간된 것은 1962년이다.. (전작과 이 작품 사이에 16년의 시간이 걸린 이유는 그의 연대기에 충분한 설명이 나와 있으니 생략한다). 왜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의 고향 토리노까지 장장 8개월에 걸친 여정을 기록한 이 책에 <휴전>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일까.. "전쟁은 끝났잖아요"라는 레비의 말에 "전쟁은 늘 있는거야"라고 응수하는 모르도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반론으로는-감히 일반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 부족하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레비는 마지막 장에서, 기차가 이탈리아 국경으로 진입하면서, 힘든 귀환의 여정이 드디어 그 막을 고하는 시점에야 비로소 이야기해준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의 지도가 선명하게 보여주듯 이들을 태운 그 기차가 왜 그리도 이상한 궤적을 그렸는지-그것은 어떤 <의지>의 작동인지, 아니면 당시의 혼란이 초래한 우연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물론 알 수 없다.

 

레오나르도와  나는 기억으로 가득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출발할 때의 인원 650명 중에 단 세 명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20개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되찾게 될까? 우리 자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침식당하고 꺼져버렸을까? 돌아가는 우리는 더 풍요로워졌을까 아니면 더 가난해졌을까, 더 강해졌을까 아니면 더 공허해졌을까?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집의 문턱에서, 결과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판가름이 날 하나의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을 미리 상상하고 있었다. 혈관 속에서, 기진맥진한 피와 함께 아우슈비츠의 독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서 우리가 다시 살아나가기 위한 힘을, 버림받은 집집마다 텅 빈 둥지마다 그 주위로 아무도 없는 동안 저절로 자라나는 울타리와 장벽들을 허물기 위한 힘을 끌어올린단 말인가? 조만간, 내일 당장,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밖에 있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적들에 대항해서 싸움을 시작해야 할 텐데, 무슨 무기로, 무슨 기력으로, 무슨 의지로 한단 말인가? 1년간의 잔혹한 기억들에 짓눌려 우리는 공허해지고 무장해제되고 수백 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막 지나간 달들은 문명의 언저리를 서성이던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의 휴전으로, 무한한 자유로움의 막간으로, 하늘이 내려준 그러나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운명의 선물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잔혹한 기억들에 짓눌리지 않았다.. 귀환한 오딧세우스처럼, 그는 집으로 돌아간 다음 해(1946년) "저절로 자라나는 울타리와 장벽들을 허물기 위한 힘을 끌어올려" 초인적인 열정으로 <이것이 인간인가>를 집필한다. 그에게 아우슈비츠 경험을 쓴다는 것은 바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들>, <메두사의 머리를 보아버린 자들>, 즉 <가라앉은 자들the drowned> 대신에, 대리인으로서 말한다는 의미에서 <증언>이었다. 그리고 그 증언은 <인간으로서>를 넘어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생존자인 자신들이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해자인 인간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이 주는 부끄러움.. 그래서 어떤 비평가는 이 부끄러움의 감정이 "인간으로서 부끄럽다"는 인간주의적 언표를 초월한 하나의 극한의 언표가 되며, 어떤 고유문화적 속성이 아닌, 보편적인, 굳이 말하자면 "보편"적 이상의 "보편"성을 넘어서는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부끄러움을 잃어버린(후안무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희망은 다시금 머나먼 것이 되어버렸지만.. 

 

레비는 1987년 토리노 자택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자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몸소 체현했던 그가 왜 68세의 나이에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못한 자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가 남긴 글 속에서 그를 항상 따라다니던 죽음의 그림자를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때고 불현듯 엄습해오는 몸서리쳐지는 공포의 소리를.. <브스타바치>

 

간간이, 때로는 자주 때로는 드물게, 공포로 가득한 꿈이 여전히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세부적으로는 다양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가지인, 또 다른 꿈 속에 든 꿈이다. 나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거나 일터에 있거나 푸른 전원에 가 있다. 그러니까 외관상으로는 긴장과 고통이 없는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 속에 있다. 그럼에도 미묘하고도 깊은 불안감을, 닥쳐오는 위협에 대한 뚜렷한 느낌을 갖는다. 아닌 게 아니라 꿈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또는 돌연히 매번 다른 식으로, 장면과 벽들과 사람들과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흐물흐물 해체된다. 그리고 불안감은 더욱 짙어지고 명확해진다. 모든 것은 이제 카오스로 변한다. 나만 홀로, 온통 잿빛의, 무감한 무의 한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항상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내가 다시 라거 안에 있고, 라거 밖에 있는 그 무엇도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가족과 꽃이 핀 자연과 집은 짧은 휴가 또는 감각들의 속임수, 곧 꿈이었다. 이제 안의 꿈, 즉 꿈 속의 꿈은, 평화의 꿈은 끝이 난다. 차갑게 계속되는 바깥의 꿈속에서 나는 익히 알려진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고압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짧고 낮은 한마디다. 아우슈비츠에서 들려오는 새벽의 명령 소리, 두려워하면서 기다리는 외국어 한마디, '브스타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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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 백년 전 한국의 모든 것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 / 살림 / 1994년 8월
평점 :
절판


그럼에도 비숍 여사가 구한말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냉정한 관찰자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당대 서구인이 지니던 편견과 문화상대주의적 입장이 혼재된 시선으로 그녀는 몰락해가는 한 왕조국가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충실하게 기록한다. 그것은 분명 구한말 우리 자화상의 한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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