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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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프리모 레비의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정좌를 한 상태로 계속 책을 읽는다.. 왠지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그의 책을 읽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여전히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을 헤쳐 나온 후, 그가 그렇게도 바랬던 인간으로서의 가치, 존엄성에 대한 인정 같은 것들이 점점 헌신짝처럼 내팽겨쳐지는 <사회?>에서 모른 척하며, 하루하루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책에 집중하는 것을 더욱 가로막는다.. 

 

<휴전La tregua>.. 그의  두 번째 작품 <휴전>이 출간된 것은 1962년이다.. (전작과 이 작품 사이에 16년의 시간이 걸린 이유는 그의 연대기에 충분한 설명이 나와 있으니 생략한다). 왜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의 고향 토리노까지 장장 8개월에 걸친 여정을 기록한 이 책에 <휴전>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일까.. "전쟁은 끝났잖아요"라는 레비의 말에 "전쟁은 늘 있는거야"라고 응수하는 모르도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반론으로는-감히 일반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 부족하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레비는 마지막 장에서, 기차가 이탈리아 국경으로 진입하면서, 힘든 귀환의 여정이 드디어 그 막을 고하는 시점에야 비로소 이야기해준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의 지도가 선명하게 보여주듯 이들을 태운 그 기차가 왜 그리도 이상한 궤적을 그렸는지-그것은 어떤 <의지>의 작동인지, 아니면 당시의 혼란이 초래한 우연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물론 알 수 없다.

 

레오나르도와  나는 기억으로 가득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출발할 때의 인원 650명 중에 단 세 명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20개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되찾게 될까? 우리 자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침식당하고 꺼져버렸을까? 돌아가는 우리는 더 풍요로워졌을까 아니면 더 가난해졌을까, 더 강해졌을까 아니면 더 공허해졌을까?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집의 문턱에서, 결과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판가름이 날 하나의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을 미리 상상하고 있었다. 혈관 속에서, 기진맥진한 피와 함께 아우슈비츠의 독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서 우리가 다시 살아나가기 위한 힘을, 버림받은 집집마다 텅 빈 둥지마다 그 주위로 아무도 없는 동안 저절로 자라나는 울타리와 장벽들을 허물기 위한 힘을 끌어올린단 말인가? 조만간, 내일 당장,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밖에 있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적들에 대항해서 싸움을 시작해야 할 텐데, 무슨 무기로, 무슨 기력으로, 무슨 의지로 한단 말인가? 1년간의 잔혹한 기억들에 짓눌려 우리는 공허해지고 무장해제되고 수백 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막 지나간 달들은 문명의 언저리를 서성이던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의 휴전으로, 무한한 자유로움의 막간으로, 하늘이 내려준 그러나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운명의 선물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잔혹한 기억들에 짓눌리지 않았다.. 귀환한 오딧세우스처럼, 그는 집으로 돌아간 다음 해(1946년) "저절로 자라나는 울타리와 장벽들을 허물기 위한 힘을 끌어올려" 초인적인 열정으로 <이것이 인간인가>를 집필한다. 그에게 아우슈비츠 경험을 쓴다는 것은 바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들>, <메두사의 머리를 보아버린 자들>, 즉 <가라앉은 자들the drowned> 대신에, 대리인으로서 말한다는 의미에서 <증언>이었다. 그리고 그 증언은 <인간으로서>를 넘어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생존자인 자신들이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해자인 인간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이 주는 부끄러움.. 그래서 어떤 비평가는 이 부끄러움의 감정이 "인간으로서 부끄럽다"는 인간주의적 언표를 초월한 하나의 극한의 언표가 되며, 어떤 고유문화적 속성이 아닌, 보편적인, 굳이 말하자면 "보편"적 이상의 "보편"성을 넘어서는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부끄러움을 잃어버린(후안무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희망은 다시금 머나먼 것이 되어버렸지만.. 

 

레비는 1987년 토리노 자택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자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몸소 체현했던 그가 왜 68세의 나이에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못한 자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가 남긴 글 속에서 그를 항상 따라다니던 죽음의 그림자를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때고 불현듯 엄습해오는 몸서리쳐지는 공포의 소리를.. <브스타바치>

 

간간이, 때로는 자주 때로는 드물게, 공포로 가득한 꿈이 여전히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세부적으로는 다양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가지인, 또 다른 꿈 속에 든 꿈이다. 나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거나 일터에 있거나 푸른 전원에 가 있다. 그러니까 외관상으로는 긴장과 고통이 없는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 속에 있다. 그럼에도 미묘하고도 깊은 불안감을, 닥쳐오는 위협에 대한 뚜렷한 느낌을 갖는다. 아닌 게 아니라 꿈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또는 돌연히 매번 다른 식으로, 장면과 벽들과 사람들과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흐물흐물 해체된다. 그리고 불안감은 더욱 짙어지고 명확해진다. 모든 것은 이제 카오스로 변한다. 나만 홀로, 온통 잿빛의, 무감한 무의 한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항상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내가 다시 라거 안에 있고, 라거 밖에 있는 그 무엇도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가족과 꽃이 핀 자연과 집은 짧은 휴가 또는 감각들의 속임수, 곧 꿈이었다. 이제 안의 꿈, 즉 꿈 속의 꿈은, 평화의 꿈은 끝이 난다. 차갑게 계속되는 바깥의 꿈속에서 나는 익히 알려진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고압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짧고 낮은 한마디다. 아우슈비츠에서 들려오는 새벽의 명령 소리, 두려워하면서 기다리는 외국어 한마디, '브스타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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