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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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마지막 날, 꽤나 무리해서 막상 <마의 산> 정상까지 올라와보니 왠지 모를 허무함이 엄습해왔다..

 

우리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를 무려 7년간이나 이 곳에 머무르게 만들었던 이 곳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잘 보아주더라도 <암흑의 핵심>의 커츠의 현현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식민주의자 페퍼코른에 대한 한스의 집착도 이해하기 어렵고, 페퍼코른이 형상화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150여 페이지를 써내려갔던 만의 동기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이 아무리 20세기 초의 산문정신의 정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역시 그 정도의 분량이 필요했을까 싶지만) 페퍼코른의 자살 이후, 자살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었건 간에 베르크호프의 미묘한 균형이 깨지면서 요양원의 사람들이 축음기나 심령술에 빠지거나 카드점에 마음을 쏟는 등 점차 무감각이라는 이름의 악마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그리는 대목은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이 대목을 20세기 초 유럽사회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어내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세계 정세가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 프리메이슨 단원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발칸 동맹이 성사될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 양반. 내가 수집한 정보로 미루어 보아 확실합니다. 러시아는 동맹을 실현하려 혈안이 되어 있고, 동맹의 창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 내가 무엇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지 알겠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빈을 말할 수 없이 증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고귀한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에 빠뜨리려고 하는 사마르티아인의 전제 정치를 정신적으로 지원해야 할까요? 한편, 만일 나의 조국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 외교적으로 협력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나는 명예가 훼손되는 느낌이 들겁니다. 그것은 양심의 문제입니다, 말인즉..."

"7과 4" 한스 카스토르프가 말했다. "8과 3. 잭, 퀸, 킹입니다. 이거 괜찮은데요. 당신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세템브리니 씨."

이탈리아인은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검은 눈이 슬픔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느꼈지만 한동안 계속해서 카드를 늘어놓았다.

...

세템브리니는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그러자 홀로 남은 청년은 카드 점을 그만 두고 손으로 턱을 괸 채 흰 방의 한가운데 있는 식탁에 마냥 앉아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하고 비뚤어진 상태를 마음 속으로 끔찍하게 느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무감각'이라는 이름의 악마와 요괴가 히죽히죽 웃는 가운데 세계가 그러한 상태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았고 세계가 속수무책으로 고삐 풀린 이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이 모든 것이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며 파국이 임박해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하지만 그런 냉철한 현실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수수방관하고 있다.. 그가 이 곳에 머물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프리메이슨주의자인 세템브리니나 예수회 수도사인 나프타, 그리고 힘에의 의지를 체현하고 있는 페퍼코른으로부터 제 1급의 교육을 받아가며 교양을 쌓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페퍼코른은 자살했고, 나프타 역시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청한 세템브리니와의 결투장에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쏜다.. 아무리 보더라도 그것은 임박한 파국을 앞둔 상황에서 세계를 설명해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구세대들의 피로감, 좌절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파국, 즉 전쟁은 <청천벽력>과 같이 도래한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내용을 담은 신문들이 속속 배달되고 숨 막히게 하는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순간, 한스 카스토르프는 <마의 산>의 저주에서 풀려난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자신의 힘으로 풀려난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외부의 힘에 의해 내쫓긴 것임을 한스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하산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플랫폼에서 세템브리니와 이별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비극적 시대인식을 한층 고양시킨다.. 마지막 이별에서 우리의 계몽주의자 세템브리니는 서구 문명 사회의 일반적 호칭인 '당신', 7년의 교제 동안 고수했해오던 '당신'이라는 호칭 대신에 한스를 '너', 그리고 조반니라고 이름으로 부르면서 한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드디어 돌아가는군." 그가 말했다. "이제야 떠나는군! 잘 가, 조반니! 네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떠나길 바랐는데. 하지만 그게 다름 아닌 신의 뜻이라면 어쩌겠나. 나는 네가 일하러 가기를 바랐는데, 이젠 네 형제들 틈에서 싸우겠지. 아, 우리의 소위가 아니라 네가 싸우게 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조화란 말인가. 피로 맺어진 편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게! 이제 더 이상 무얼 할 수 있겠나. 하지만 우리나라도 정신과 이기심이 명하는 편에 서서 힘껏 싸우도록 나에게 남겨진 힘을 다 쓰더라도 나를 용서해주게나. 잘 가게!"

 

그리고 소설은 포탄이 난무하는 1차대전의 전장에서 말없이 쓰러진 전우들 사이를 뚫고 비트적거리며 슈베르트의 <보리수>-그 죽음의 세계를 노래하는 가곡!-를 나지막히 흥얼거리며 앞으로 계속 전진해 가는 한스의 뒷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 대단원의 장에는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교양주의, 즉 괴테 이후 유럽 근대가 만들어왔던 자부심이 단 한순간에 이렇게 파멸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이 시대 지식인의 심정이 너무나 절절히 묻어나온다.. 이제 세계는 변해간다.. 그리고 더 이상 교양주의로는 변해버린 이 시대를 통과할 수 없다.. 그 무력감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어제의 세계>라는 자서전에서 그려낸 바로 그 절망감과도 같은 것이다..

 

잘 가게나. 한스 카스토르프. 네가 살아 있든 그대로 사라지든 말이야! 너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을 거야. 네가 말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에서 앞으로 몇 년간은 죄 많은 춤을 출 것이기 때문이지.. 네가 살아 돌아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네. ... 너는 예감에 가득차 '술래잡기'에 의해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을 체험했어. 온 세상을 뒤덮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 

마의 산, 독일, 교양주의, 토마스 만, 제 1차세계대전, 결핵, 은유로서의 질병,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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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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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등정이 끝나가고 있다..

6월 초에 꺼내들고, 6월말까지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여러 복병들을 만나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근 3주만에 다시 집어들었는데, 달력을 보니 벌써 내일이면 6월도 끝이 나는구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벌써 뉘엿뉘엿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것이다.. 중간 캠프로 내려가야 할까, 아니면 용기를 내서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일까..

<마의 산>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사전에 꼼꼼히 계획을 세워서 언제까지 등반을 마치고 하산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듯 싶다..

 

한동안 서가에 고이 모셔져 있던 이 책을 꺼내들게 된 계기는, 지난 달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 나온 특공영화들을 리뷰하는 글을 쓰면서였다.. 그닥 흥미가 없는 영화들을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것은 꽤나 지겨운 일이었지만, 그런 도중에 만난 작품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 <바람이 분다>(2013)였다. 물론 이 작품은 엄밀히 특공 장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주력전투기이자, 특공기로 활용되었던 제로센의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일대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내 맘대로 <특공 관련> 영화로 구분해버렸다.. 뭐,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이 작품에 대해서는 개봉 이후 한국에서 꽤 많은 악평들이 쏟아져나왔고, 미야자키 감독 작품으로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흥행에 참패한 영화라, 한국사회에서는 정말 바람처럼 지나가버렸지만-정말 앗하는 순간에 개봉관에서 막을 내려 보지 못한 기억이-, 그렇게 치부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평을 쓸 의도는 없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겠지만, 이 작품에 대해 그 정도의 이해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어쨌거나 이 작품에서 뜬금없이 <마의 산>을 떠올렸던 이유는, 결핵에 걸린 히로인이 요양차 머무르던 별장과 같은 그 곳이 마의 산의 중심무대인 <베르크호프>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곳곳에서 <마의 산>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이나, 당시 요양 환자들의 치료법에 대한 상세한 묘사, 또 <마의 산>에서 나왔을 법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것을 보노라니, 미야자키가 작품을 구상하면서, <마의 산>에 꽤나 경도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20세기 초 독일 문학/문화의 일본 수용사의 독특한 양상, 또 <결핵>이라는 질병의 사회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겠지만, 이 역시 곁가지 이야기이니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이 작품의 무대인 베르크호프가 1차 대전 직전의 유럽 사회에 대한 하나의 <은유>일 것이라는 해석은 이 작품을 당대의 시대에 대한 만의 <개입>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하나의 통로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분명 매력적인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의 유럽인들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보이며, 또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파국 앞에서 아무 것도 못한 채 요양원에 틀어박혀 있는 그들의 모습은 교양주의자인 소설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대정신은 중부유럽에서 더욱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를 이 시기 유럽 사회의 전형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듯 하다..

cf. 국가, 사회, 경제를 둘러싸고 프랑스, 미국, 그리고 그 당대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이후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기틀을 제시한 20세기 초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학파가 설계하고 있던 또 다른 통치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인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참고할 것..

 

2차 대전 이후 유럽 사회에서 토마스 만이 그다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만이 견지한 교양주의, 즉 근대 부르주아들이 그렇게 공들여 구축했던 <교양주의>는 양차 세계대전을 통과하면서 산산히 부서져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미 100여년이 지난 우리는 그 사실을 알기에 만의 이 작품에서 비극성을 느끼는 것이지만, 당시의 만에게 이 두터운 거작을 집필하는 것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필사적인 <개입>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한 긴장감은 당대의 칼 슈미트, 막스 베버 등의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반드시 간취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파국에 맞서 정책을 제시하는 사회과학자가 아닌, 문학가인 만에게 그 개입이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페퍼코른> 장에서 페퍼코른의 입을 빌려 우리 시대의 용서할 수 없는 죄로 <무기력에 대한 공포>를 역설하는 대목은 꽤나 절절한 것이었다..

 

삶은, 이보시오, 여성입니다. 그것은 탐스럽게 붕긋 솟아 있는 유방, 툭 튀어나온 엉덩이 사이의 펑퍼짐하고 부드러운 배, 날씬한 팔과 부풀어 오른 허벅지, 반쯤 눈을 감고 살며시 누워 있는 여성입니다. 패배한다는 게, 이보시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삶에 대한 감정의 패배, 그것은 불충분함입니다. 그것에는 어떠한 은총도 동정도 자비도 없으며, 그것은 가차없이 코웃음 받으며 내팽개쳐질 뿐입니다. 끝장나고, 이보시오, 침이 뱉어질 뿐입니다. 이러한 파멸과 파산, 이러한 견디기 힘든 치욕에는 수치나 불명예라는 말로는 턱도 없이 불충분합니다. 그것은 종말이자 지옥 같은 절망이며 세상의 멸망입니다.

 

사실, 그 이외에도 우리의 프로메이슨주의자인 세템브리니와 예수회 수도사인 나프타의 격렬한 논쟁, 또 <발푸르기스의 밤>의 에로틱한-물론 현대 사회와 같이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본다면 평가가 양분되겠지만- 묘사,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라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을, 아시아, 동양인에 대한 그의 께름칙한 묘사에 대해서도 할 말은 너무 많지만 오늘은 여기서 그친다.. 아무래도 오늘은 곁가지만 이야기하다 끝이 나려나보다..

 

하지만 마의 산 정도의 봉우리를 등반하면서 한 번에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일단 숨을 고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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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 창비세계문학 1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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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낭만파 작가들에 조예가 깊은 이가 아니라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라는 작가의 이 작품을 무심코 지나쳤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작가를 알게 된 것 역시 오에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은 후였다.. 오에의 작품 속에 삽입되어 있던 <미하엘 콜하스>는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그래서 비록 허구이지만 오에가 상상했던 M프로젝트, 즉 <미하엘 콜하스>라는 작품을 일본과 한국이 동시에 영화화하는 기획이 실제로 성사되었다면 하는 뜬금없는 공상을 해보기도 했다.. 미하엘 콜하스의 봉기와 근세 일본 사회의 잇키, 그리고 19세기 한국사회의 민란과 농민전쟁을 아래로부터의 시각에서 그려낼 수 있다면, 매우 야심찬 국제적 <봉기와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꾸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오에 정도라면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쪽 카운터 파트는 누가 좋을까.. 아쉽게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에가 기대했던 김지하는 예전의 김지하가 아니다.. 황석영 역시 믿음이 가지 않는다.. 홍명희 선생 정도라면 기대해봄직 하지만.. 임꺽정에서 장길산으로의 궤적이 상상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후퇴라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16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클라이스트가 살았던 18세기 말~19세기 초 유럽 대륙의 <혁명적 분위기> 아래 구상되었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루터와 콜하스의 긴장감 넘치는 논쟁은 사회계약론의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콜하스의 행위를 <불의>라고 꾸짖는 루터의 방문이나 콜하스와의 논박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면서도, 아래로부터의 농민들의 요구에는 지극히 냉담했던 보수적 성직자의 전형으로서의 루터의 성격은 잘 표현하고 있지만, 자신의 행위를 <정의>로서 정당화하는 콜하스의 논변 밑에 깔려 있는 망탈리테는 무엇이었을지 여전히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즈부르크 등의 미시사가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16세기 유럽의 민란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뒤따랐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클라이스트는 역사가가 아니다.. 또 아마 그랬다면, 미하엘 콜하스와는 전혀 다른 개성의 인물이 나타났을 것이다.. 콜하스와 같이 16세기를 살면서, 지배층의 횡포에 대해 분노하던  사람들은  어떠한 논리로 생각하고, 행동했을까 하는 공상을 해보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에 읽은 텍스트의 등장인물과 겹쳐 보더라도 메노키오나 뮌처 정도이다.. 16세기의 인간과 21세기의 인간 사이에는 공통점만큼이나 많은 차이점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오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왜 클라이스트는 예언을 하는 집시여인이라는 소설 전체의 플롯에서 본다면 다소 위태로운 인물에 집착했던 것일까.. 집시여인이 점술로 작센의 멸망을 예언하는 대목은 클라이스트의 역사적인 정치사상의 발현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낭만주의적 이야기의 일반적 장치인 것일까.. 그럼에도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작센 선제후가 보는 앞에서 그를 몇번이고 혼절시켰던 그 문제의 쪽지를 꿀꺽 삼켜버리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신의 한 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18세기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흡인력과 시의성을 갖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원자력 마피아, 해피아, 철피아 등 권력의 부조리한 야합은 만연하고 여전히 무책임의 체계가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제가 인간 사회에서 추방당한 게 아니라면, 제가 인간 사회와 벌이고 있는 전쟁은 악행입니다. ... 제가 말하는 추방당한 자란, 콜하스는 종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를 뜻합니다! 저는 그 보호를 받아야만 평화롭게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습니다. 그 보호를 믿었기에 모은 재산을 다 들고 이 사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보호를 해주지 않는 것은 저를 황야의 야수들에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지키라고 제 손에 몽둥이를 쥐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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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섬들
마셜 살린스 지음, 최대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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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살린스라는 이름은 인류학을 전공하지 않는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나마, 1990년대 중후반 미시사, 문화사 붐이 일었던 시기, 개론서에서 클리포드 기어츠의 <발리 닭싸움> 사례와 함께 살린스의 쿡 선장의 사례가 잠시 다루어졌던 것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 기억력에 경의를 표해야 하리라.. 또 혹시 오래 전에 <문화와 실용논리>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책의 저자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눈치챈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보르헤스가 푸네스에게 붙여주었던 호칭을 부여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기억의 천재!!> 천하의 로자님께서도 이 책은 빠트리셨을 정도니까..

물론 전작인 <문화와 실용논리>는 흐릿한 번역만큼이나 국내에 미친 파장은 흐릿했던 것 같다.. 참고로 역시 절판이다..

 

이 책은 사례의 흥미로움과 이론적 치열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보기 드문 연구서이다.. -이 정도면 최상의 찬사이다. 물론 이 때 이론적 논의의 수준은 80-90년대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그 컴팩트함에 있어서는 1981년에 출간된 전작, Historical Metaphors and Mythical Realities(역사적 은유와 신화적 현실)이 훨씬 훌륭하지만, 이 책은 아쉽게도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만약, 이론적 논의를 가능한 패스하고 싶은 일반 독자라면, <제 1장 쿡 항해기 보유, 또는 야생의 산술>과  <제 4장 제임스 쿡 선장, 또는 죽어가는 신>을 먼저 읽어도 내용 이해에 커다란 무리는 없다.. 저자는 여기서 쿡 선장의 살해가 하와이섬의 신화구조 속에서 연출된 것임을 굉장히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가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입증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커다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여기서 거기까지 다룰 이유는 없을 것 같고, 다만 그 입증불가능성, 하지만 이해가능성을 둘러싼 끝없는 대화의 시도가 인문사회과학의 매력이 아닐까 하는 소견 정도만 덧붙인다..

 

 이 책이 제시하는 이론적 메시지는 생각보다 훨씬 단순명쾌하다.. 아주 거칠게 요약한다면,

우리가 흔히 이항으로 생각하는 역사와 구조, 현재와 과거, 체계와 사건, 혹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등 다양한 물화된 대립들을 탐구하여 그 상호구조, 즉 진실에 더 가까운 합명제를 찾는 것.. 이를 저자는 브로델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빌려오면서, 국면의 구조라고 개념화한다.. 조금 더 <가오를 잡는다면> 특수한 행위자와 그의 경험적 문맥의 환원불가능성을 직시하는<상징적 삶의 현상학>적 탐구, <문화적 범주의 상황적 사회학> 뭐 다 같은 말이다..

 

이미 번역자가 후기에서 충분히 자세히 요약을 해주셨으니, 여기서 중언부언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역사학 전공자가 왜 이 책을 번역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살린스는 서문에서 현대의 과제는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경험으로써 역사 개념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는 오만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족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에. 물론 여기서도 다시 결과는 일방적이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경험이 인류학의 문화 개념을 깨뜨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번역으로, 역사학과 인류학이 다시 한 번 그 재현을 둘러싸고 생산적인 논의들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과연 한국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지.. 그럼에도 번역의 질은 차치하고라도, 역사학 연구자가 쉽게 옮기기 어려운 이 책을 번역해주었다는 사실에 한국의 인류학계는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하와이인들에게 쿡은 인간을 위해 대지가 열매 맺도록 하는 신이었다. 평화와 농경의 기술을 수호하는 생산의 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 쪽에서 볼 때도, 그는 ‘애덤 스미스의 이상을 세계 차원에서 실현하는 대리인’으로서, 마찬가지로 시장의 평화적인 ‘침투’의, 즉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문명을 전해주고 전 세계에 부를 가져올 전도양양한 상업적 팽창의 영혼의 화신이다. 쿡은 그 길을 개척하여 경로와 자원과 시장을 결정할 터였다. 따라서 팍스 브리타니카의 선구자였던 쿡은 동시에 부르주아 로노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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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섬들
마셜 살린스 지음, 최대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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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번역이 되었다고 말할수 밖에 없다. 역사인류학의 고전. 그리고 이 책이 불러일으킨 논쟁은 그대로 구조와 역사, 타자의 재현에 대한 교과서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전작인 <문화와 실용논리>, 치데스터의 <새비지 시스템>과 함께 읽으면, 그 진가가 더욱 뚜렷이 드러날텐데. 모두들 절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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