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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하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평점 :
6월의 마지막 날, 꽤나 무리해서 막상 <마의 산> 정상까지 올라와보니 왠지 모를 허무함이 엄습해왔다..
우리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를 무려 7년간이나 이 곳에 머무르게 만들었던 이 곳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잘 보아주더라도 <암흑의 핵심>의 커츠의 현현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식민주의자 페퍼코른에 대한 한스의 집착도 이해하기 어렵고, 페퍼코른이 형상화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150여 페이지를 써내려갔던 만의 동기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이 아무리 20세기 초의 산문정신의 정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역시 그 정도의 분량이 필요했을까 싶지만) 페퍼코른의 자살 이후, 자살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었건 간에 베르크호프의 미묘한 균형이 깨지면서 요양원의 사람들이 축음기나 심령술에 빠지거나 카드점에 마음을 쏟는 등 점차 무감각이라는 이름의 악마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그리는 대목은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이 대목을 20세기 초 유럽사회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어내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세계 정세가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 프리메이슨 단원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발칸 동맹이 성사될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 양반. 내가 수집한 정보로 미루어 보아 확실합니다. 러시아는 동맹을 실현하려 혈안이 되어 있고, 동맹의 창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 내가 무엇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지 알겠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빈을 말할 수 없이 증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고귀한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에 빠뜨리려고 하는 사마르티아인의 전제 정치를 정신적으로 지원해야 할까요? 한편, 만일 나의 조국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 외교적으로 협력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나는 명예가 훼손되는 느낌이 들겁니다. 그것은 양심의 문제입니다, 말인즉..."
"7과 4" 한스 카스토르프가 말했다. "8과 3. 잭, 퀸, 킹입니다. 이거 괜찮은데요. 당신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세템브리니 씨."
이탈리아인은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검은 눈이 슬픔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느꼈지만 한동안 계속해서 카드를 늘어놓았다.
...
세템브리니는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그러자 홀로 남은 청년은 카드 점을 그만 두고 손으로 턱을 괸 채 흰 방의 한가운데 있는 식탁에 마냥 앉아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하고 비뚤어진 상태를 마음 속으로 끔찍하게 느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무감각'이라는 이름의 악마와 요괴가 히죽히죽 웃는 가운데 세계가 그러한 상태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았고 세계가 속수무책으로 고삐 풀린 이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이 모든 것이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며 파국이 임박해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하지만 그런 냉철한 현실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수수방관하고 있다.. 그가 이 곳에 머물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프리메이슨주의자인 세템브리니나 예수회 수도사인 나프타, 그리고 힘에의 의지를 체현하고 있는 페퍼코른으로부터 제 1급의 교육을 받아가며 교양을 쌓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페퍼코른은 자살했고, 나프타 역시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청한 세템브리니와의 결투장에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쏜다.. 아무리 보더라도 그것은 임박한 파국을 앞둔 상황에서 세계를 설명해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구세대들의 피로감, 좌절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파국, 즉 전쟁은 <청천벽력>과 같이 도래한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내용을 담은 신문들이 속속 배달되고 숨 막히게 하는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순간, 한스 카스토르프는 <마의 산>의 저주에서 풀려난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자신의 힘으로 풀려난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외부의 힘에 의해 내쫓긴 것임을 한스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하산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플랫폼에서 세템브리니와 이별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비극적 시대인식을 한층 고양시킨다.. 마지막 이별에서 우리의 계몽주의자 세템브리니는 서구 문명 사회의 일반적 호칭인 '당신', 7년의 교제 동안 고수했해오던 '당신'이라는 호칭 대신에 한스를 '너', 그리고 조반니라고 이름으로 부르면서 한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드디어 돌아가는군." 그가 말했다. "이제야 떠나는군! 잘 가, 조반니! 네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떠나길 바랐는데. 하지만 그게 다름 아닌 신의 뜻이라면 어쩌겠나. 나는 네가 일하러 가기를 바랐는데, 이젠 네 형제들 틈에서 싸우겠지. 아, 우리의 소위가 아니라 네가 싸우게 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조화란 말인가. 피로 맺어진 편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게! 이제 더 이상 무얼 할 수 있겠나. 하지만 우리나라도 정신과 이기심이 명하는 편에 서서 힘껏 싸우도록 나에게 남겨진 힘을 다 쓰더라도 나를 용서해주게나. 잘 가게!"
그리고 소설은 포탄이 난무하는 1차대전의 전장에서 말없이 쓰러진 전우들 사이를 뚫고 비트적거리며 슈베르트의 <보리수>-그 죽음의 세계를 노래하는 가곡!-를 나지막히 흥얼거리며 앞으로 계속 전진해 가는 한스의 뒷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 대단원의 장에는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교양주의, 즉 괴테 이후 유럽 근대가 만들어왔던 자부심이 단 한순간에 이렇게 파멸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이 시대 지식인의 심정이 너무나 절절히 묻어나온다.. 이제 세계는 변해간다.. 그리고 더 이상 교양주의로는 변해버린 이 시대를 통과할 수 없다.. 그 무력감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어제의 세계>라는 자서전에서 그려낸 바로 그 절망감과도 같은 것이다..
잘 가게나. 한스 카스토르프. 네가 살아 있든 그대로 사라지든 말이야! 너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을 거야. 네가 말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에서 앞으로 몇 년간은 죄 많은 춤을 출 것이기 때문이지.. 네가 살아 돌아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네. ... 너는 예감에 가득차 '술래잡기'에 의해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을 체험했어. 온 세상을 뒤덮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
마의 산, 독일, 교양주의, 토마스 만, 제 1차세계대전, 결핵, 은유로서의 질병,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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