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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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등정이 끝나가고 있다..

6월 초에 꺼내들고, 6월말까지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여러 복병들을 만나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근 3주만에 다시 집어들었는데, 달력을 보니 벌써 내일이면 6월도 끝이 나는구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벌써 뉘엿뉘엿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것이다.. 중간 캠프로 내려가야 할까, 아니면 용기를 내서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일까..

<마의 산>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사전에 꼼꼼히 계획을 세워서 언제까지 등반을 마치고 하산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듯 싶다..

 

한동안 서가에 고이 모셔져 있던 이 책을 꺼내들게 된 계기는, 지난 달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 나온 특공영화들을 리뷰하는 글을 쓰면서였다.. 그닥 흥미가 없는 영화들을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것은 꽤나 지겨운 일이었지만, 그런 도중에 만난 작품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 <바람이 분다>(2013)였다. 물론 이 작품은 엄밀히 특공 장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주력전투기이자, 특공기로 활용되었던 제로센의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일대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내 맘대로 <특공 관련> 영화로 구분해버렸다.. 뭐,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이 작품에 대해서는 개봉 이후 한국에서 꽤 많은 악평들이 쏟아져나왔고, 미야자키 감독 작품으로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흥행에 참패한 영화라, 한국사회에서는 정말 바람처럼 지나가버렸지만-정말 앗하는 순간에 개봉관에서 막을 내려 보지 못한 기억이-, 그렇게 치부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평을 쓸 의도는 없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겠지만, 이 작품에 대해 그 정도의 이해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어쨌거나 이 작품에서 뜬금없이 <마의 산>을 떠올렸던 이유는, 결핵에 걸린 히로인이 요양차 머무르던 별장과 같은 그 곳이 마의 산의 중심무대인 <베르크호프>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곳곳에서 <마의 산>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이나, 당시 요양 환자들의 치료법에 대한 상세한 묘사, 또 <마의 산>에서 나왔을 법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것을 보노라니, 미야자키가 작품을 구상하면서, <마의 산>에 꽤나 경도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20세기 초 독일 문학/문화의 일본 수용사의 독특한 양상, 또 <결핵>이라는 질병의 사회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겠지만, 이 역시 곁가지 이야기이니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이 작품의 무대인 베르크호프가 1차 대전 직전의 유럽 사회에 대한 하나의 <은유>일 것이라는 해석은 이 작품을 당대의 시대에 대한 만의 <개입>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하나의 통로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분명 매력적인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의 유럽인들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보이며, 또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파국 앞에서 아무 것도 못한 채 요양원에 틀어박혀 있는 그들의 모습은 교양주의자인 소설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대정신은 중부유럽에서 더욱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를 이 시기 유럽 사회의 전형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듯 하다..

cf. 국가, 사회, 경제를 둘러싸고 프랑스, 미국, 그리고 그 당대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이후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기틀을 제시한 20세기 초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학파가 설계하고 있던 또 다른 통치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인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참고할 것..

 

2차 대전 이후 유럽 사회에서 토마스 만이 그다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만이 견지한 교양주의, 즉 근대 부르주아들이 그렇게 공들여 구축했던 <교양주의>는 양차 세계대전을 통과하면서 산산히 부서져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미 100여년이 지난 우리는 그 사실을 알기에 만의 이 작품에서 비극성을 느끼는 것이지만, 당시의 만에게 이 두터운 거작을 집필하는 것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필사적인 <개입>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한 긴장감은 당대의 칼 슈미트, 막스 베버 등의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반드시 간취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파국에 맞서 정책을 제시하는 사회과학자가 아닌, 문학가인 만에게 그 개입이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페퍼코른> 장에서 페퍼코른의 입을 빌려 우리 시대의 용서할 수 없는 죄로 <무기력에 대한 공포>를 역설하는 대목은 꽤나 절절한 것이었다..

 

삶은, 이보시오, 여성입니다. 그것은 탐스럽게 붕긋 솟아 있는 유방, 툭 튀어나온 엉덩이 사이의 펑퍼짐하고 부드러운 배, 날씬한 팔과 부풀어 오른 허벅지, 반쯤 눈을 감고 살며시 누워 있는 여성입니다. 패배한다는 게, 이보시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삶에 대한 감정의 패배, 그것은 불충분함입니다. 그것에는 어떠한 은총도 동정도 자비도 없으며, 그것은 가차없이 코웃음 받으며 내팽개쳐질 뿐입니다. 끝장나고, 이보시오, 침이 뱉어질 뿐입니다. 이러한 파멸과 파산, 이러한 견디기 힘든 치욕에는 수치나 불명예라는 말로는 턱도 없이 불충분합니다. 그것은 종말이자 지옥 같은 절망이며 세상의 멸망입니다.

 

사실, 그 이외에도 우리의 프로메이슨주의자인 세템브리니와 예수회 수도사인 나프타의 격렬한 논쟁, 또 <발푸르기스의 밤>의 에로틱한-물론 현대 사회와 같이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본다면 평가가 양분되겠지만- 묘사,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라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을, 아시아, 동양인에 대한 그의 께름칙한 묘사에 대해서도 할 말은 너무 많지만 오늘은 여기서 그친다.. 아무래도 오늘은 곁가지만 이야기하다 끝이 나려나보다..

 

하지만 마의 산 정도의 봉우리를 등반하면서 한 번에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일단 숨을 고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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