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토피아
미셀 푸코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공간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역사를 갖는다. 서구의 중세, 그것은 국지화의 공간을 구성했고, 17세기에서는 연장延長이, 그리고 오늘날에는 배치emplacement가 연장을 대체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규정 자체는 <말과 사물>의 저자, 즉 에피스테메의 이론가 푸코 특유의 구도이다.. 정말 구체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지만, 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논리..

 

그리고 배치가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 푸코는 현재적 배치의 중력장에서 자유로운 <바깥의 공간>espace du dehors을 상정한다. 우리가 그것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의해 우리 자신의 바깥으로 이끌리는 공간, 바로 우리의 삶, 시간, 역사가 침식화되어가는 공간, 우리를 주름지게 만들고 부식시키는 공간, 즉 그 자체로 <불균질한 공간>말이다.. 이 공간들은 어떤 면에서는 다른 모든 배치들과 관계를 맺지만, 동시에 그것들에 어긋난다. 거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유토피아>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다른 하나가 바로 본 책(강의)의 주제인<헤테로토피아>다. 그 공간은 사회 제도 그 자체 안에 디자인되어 있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이자, 우리가 사는 공간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제기contestations를 수행하는 공간이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거울이라는 메타포를 제시한다. 거울, 그것은 장소 없는 장소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이다(거울 안에서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있는 나를 본다). 하지만 거울이 실제로 존재하는 한, 그리고 내가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그것이 일종의 재귀 효과를 지니는 한 그것은 헤테로토피아이다. 왜냐하면 거울은 내가 거울 안의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절대적으로 현실적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서어 푸코는 그답지 않은 친절함으로 헤테로토피아의 원리를 차근차근 제시한다(저서가 아닌 강의가 갖는 힘이기도 하다). 번호를 매겨 정리해본다면,

(1) 헤테로토피아는 어느 사회에나 있다. 문제는 생물학적 헤테로토피아, 위기의 헤테로토피아는 점점 사라지고 일탈의 헤테로토피아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

(2)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존의 헤테로토피아는 완전히 흡수되거나 소멸되기도 하고, 새롭게 조직되기도 한다.

(3) 헤테로토피아는 양립불가능한/할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들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다. 정원이 그러하고, 소설 역시 그러하다.

(4) 헤테로토피아는 시간의 독특한 분할과 연결된다. 그것은 묘지, 도서관과 같은 영원성의 양식이기도 하고, 축제, 시장, 마을의 공터와 같은 한시성의 양식이기도 하다.

(5) 헤테헤토피아는 언제나 그것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

(6) 헤테로토피아는 나머지 공간에 대해 어떤 기능을 갖는다. 한펴으로 그것은 과거의 <매음굴>과 같이 환상공간을,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와 같이 완벽하고 주도면밀하고 정돈된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하다.

 

푸코가 그의 첫 저서 광기의 역사 첫 장에서 제시한 <광인들의 배>는 헤테로토피아의 한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급자족적이고 자기 폐쇄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지만 바다의 무한성에 숙명적으로 내맡겨져 있는, 장소 없는 장소이자 떠다니는 공간의 조각인 배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혹은 아이들이 기원의 몽상과 위반의 쾌락 속에서 파고들기 좋아하는 부모의 <침대>를 떠올려도 좋다. 드페르는 바로 그 침대에서 곤잘레스-토레스의 <무제Untitled>라는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침대, 그리고 어쩌면 연인 푸코와 자신이 사랑을 나누었을 그 침대를 상기한다. 그것은 역자의 말처럼 <애도>mourning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푸코는 왜 1966년이라는 시점에서 헤테로토피아라는 이미지/실천을 도입한 것일까. 한 가지 가능한 대답. 유토피아의 결안에서 펼쳐지는 지배 담론에 고랑을 파기.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지배 권력에 맞서 일종의 대항공간을 만들어내기. 드페르가 지적하듯이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푸코는 도시연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1972년부터는 가타리가 주도한 제도교육 및 연구센터Cerfi와 더불어 병원과 같은 집합시설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이나 1800년에서 1850년 사이의 주거양식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이 시기부터 주거 공간은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개입의 대상이 되었고, 주거 양식은 질병, 일자리, 상수도, 전기, 통풍시설 등의 가정화, 그리고 공공장소와 관련된 법제화의 발전들의 교차점에서 구축되었다는 것이 연구팀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이후의 저작인 <감시와 처벌>의 패러다임인 파놉티콘Panopticon 역시 이러한 <건축 기계들architectures machines>을 탐구하면서부터였다

 

권력들의 독특한 역사를 정관사 권력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공간들의 역사라고 한다면, “권력의 비-장소는 무한한 헤테로토피아적 지대들의 중심에 놓여 있게 된다라는 슬로건 아래,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 운동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수용한다. 하지만 헤테로토피아가 바로 자유나 해방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푸코가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자유의 행사를 보장하는 것은 결코 사물의 구조/질서에 내재할 수 없다. 자유의 보장은 자유일 뿐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해방기계liberating machine>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배 권력의 의지가 관철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축과 도시공학 역시 얼마든지 자유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푸코가 언급한 배의 이미지를 헤테로토피아의 한 표상으로 상상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이미 세월호는 자본에 의해, 그리고 여기에 기생하며 또 한편으로 공조하고 협상하는 행정 권력들에 의해 포섭된배이다. 따라서 문제는 개념의 이해가 아니라 그것의 수용, 그리고 전투를 위한 실천적 무기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헤테로토피아라는 상상력은 또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고 이용use될 수 있을까. , 지금부터의 사유는 우리의 몫이다..

 

------------------------------------------------------------------------------------

 

cf. 별은 하나를 빼서 네 개를 줬다.. 그것은 이 책의 가격 때문이다.. 푸코의 책이 나왔으니 살 수밖에 없는 독자들을 감안한 가격이리라(이번에는 감사하게도 세미나 공동구매로 받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 내용이 훌륭하더라도, 저작이 아닌 번역서에 현재의 가격을 책정한 것은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물가를 고려했을 때, 현재의 가격이 <정상>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이 다른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쎈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이 책은 푸코의 저작이기에 앞서 강연집인 것이다.. 아무리 번역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 뒤에 오는 것들 - 상실과 트라우마 그리고 슬픔의 심리학
조지 보나노 지음, 박경선 옮김 / 초록물고기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어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이 책이 화제가 되었다..

이 책 어때?

글쎄요.. 제가 보기엔 좀 가벼운데요.. 뭔가 집중하려 하다가 다시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빠져버리는 느낌..

나는 심리학이 왠지 싫어..

왜요?

왠지 심리학은 우리 시대의 <사제>들이 하는 것 같아서 (맘에 안들어)..

....

 

선배의 마지막 말에 동의하면서도, 어쨌거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심리 상담사들로부터 <도움>을 얻고 있다면, 그 나름대로 심리학의 역할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시시한 결론을 내리며 화제는 딴 곳으로 옮겨갔지만.. 솔직히 심리학에 대해서는 거부감은 나 역시 가지고 있다.. 그건 아마 우리 시대의 정신의학에 대한 푸코의 비판kritik에 대한 공감이기도 하고, 또 왠지 지극히 미국적 느낌이 나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비틀린 거부감이기도 하다..

 

보나노의 책 역시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이미 명확한 타겟을 가지고 있다.. 기존 프로이트 학파의 애도 이론, 그리고 퀴블러 로스의 상실에 대한 단계 이론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 서서 그가 자신이 모은 경험적 사례들을 통해서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연적 회복력>이다.. 즉, 인간은 본래 해법을 스스로 지니고 태어났으며, 언제까지고 계속 슬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경험은 왔다가 간다, 즉 진동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은 필요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주기가 길어지고 점차 균형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갖는 보편성을 입증하기 위해 중국 사회의 장례문화로까지 연구 영역을 확장시켜간다.. 저자가 눈여겨보는 것은, 중국 사회에는 상실을 개인 수준이 아닌 가족/친족/지인과 같은 공동체의 수준에서 극복하게 하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죽은 자에 대한 정교한 의례ritual가 있다는 것이다.. "의례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인류학자 제임스 왓슨의 논의에 그는 깊은 공감을 표한다..

 

물론 <grief>라는 감정이 지극히 서구중심적인 것이라는 점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중국과의 비교문화적 연구는 그에게 매우 <유익>한 경험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중국 사회의 망자 의례를 서술하는 대목은 지극히 유형론적고 인상주의적인 것에 머무르고 있어, 중국 사회의 망자 의례가 갖는 실천적 측면 자체가 사상되어 있다.. 이는 그가 주로 중국 사회의 상례가 아닌 제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소중한 사람이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이 어느 사회에 사는 누구에게건 슬프지 않겠는가.. 그 파토스를 표출하는 방식 자체가 문화적으로 다를 수는 있겠지만, 슬픔은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감정이고 또 매우 강력한 힘power을 가진 것이다.. 자칫하면, 그는 예전 로살도가 비판한 것처럼, 중국 사회에는 <울기 의례>weeping rite가 있다는 매우 유형화되고 건조한 해석에 빠질 우려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회복력에 대한 보나노의 확신은 비탄에 빠진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부여잡고 싶은 믿음이다.. 보나노는 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딸을 잃은 한 어머니의 말을 잠시 인용한다.. 죽은 아이의 기억은 희미해져가지만 절대 꺼지지 않는 빛과 같다는 것.. 그 불이 사그라든 뒤에 남은, 반짝이는 작은 불씨와도 같아, 늘 그 작은 불씨를 지니고 다니다가 죽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 아주 부드럽게 입김을 불어주면 다시 환하게 타오르는 빛과 같다는 것이다..

 

너무도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우리 부모들의 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이 이렇게 회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러한 회복은 이 사회가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주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침몰 80여일이 지난 후 우리 사회, 그리고 정치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눈을 감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 소개된 트라우마 서적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충실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 임상치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되는 외상의 변증법에 맞서기 위해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 대한 통합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소중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이런 책을 낼 수 있는 학문적 풍토가 부러울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의 친척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어떤 작품을 집어들어도 결코 실망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 역자 때문에 별 한 개를 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의 친척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정신지체아>로 태어난 첫째 아이.. 그리고 정상으로 태어난 둘째 아이를 가진 여인..

여인은 자신이 첫째 아이를 맡고, 둘째를 남편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이혼을 했다.. <장애아>의 탄생이 자신에게 어떤 <속죄>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그 <속죄>를 위한 생활에 남편과 정상아인 둘째 아이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만의 오붓한 생활을 꾸려나가던 도중, 둘째 아이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그 여인은 (둘째 아이의 사고로 다시 이혼을 하게 된 남편에 대한 사랑이 그다지 없음에도) 다시 남편과 장애아가 된 둘째 아이를 끌어안는다..

그런데 어느날 두 아이가 실종되어 주검으로 발견된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첫째 아이가 바다 위 절벽 낭떠러지에서 자진하여 떨어지자, 둘째 아이 역시 휠체어를 스스로 밀고 첫째 아이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 소설은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의 지인이었던 소설가이자 역시 장애아의 아빠로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것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공감하는 오에 겐자부로는 그녀가 혼란을 겪어나가면서도 말 그대로 <완전한 인간>으로 회복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요며칠새 동네 도서관에서 세월호 관련 지난 기사들을 리뷰하면서, 새삼 <망각>의 힘에 놀라워한 적이 있다..  지난 4, 5월 연일 티비나 인터넷에서 세월호 뉴스를 보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또 아이들을 버린 선원들과 아무리 봐도 비상식적인 구조로 일관했던 해경과 언딘의 유착, 그리고 책임 회피에 급급한 관료들과,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는 듯 관련자들을 경질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VIP에 이르기까지 무책임의 체계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얼마나 분노했는가.. 아직은 너무나도 어린, 꽃다운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보며 몇 번이나 <미안해.. 절대 잊지 않을께..>하며 한숨을 쉬었는가..

 

하지만 정상적인 애도/상의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이 사건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도 교묘한 미디어의 프레임의 정치에 우리는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무기력한 멜랑콜리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의 이야기들을 다시 보면서,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그리고 여전히 실종상태인 아이들의 가족들을 새삼 떠올렸던 것은 바로 이들이야말로 결코 이 사건을 잊지 않을 유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들의 아픔을 감싸안으며, 또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나이브하고 무책임한 말인가.. 이 시스템의 동조자이자 방관자인 우리들이 과연 이들의 아픔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구조작업의 차질이 빚어낸 총체적 난국으로, 또 현재 (너무도 부조리해 보이는) 재판과 국정조사로 2차, 3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의 타들어가는 마음에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위로의 말을 던질 수 있을지 실로 막막하기만 하다..

 

트라우마에 대한 책을 들여다보고, 또 애도에 대한 논의들을 떠올려봐도 입이 얼어붙는다.. 오에의 이 소설을 읽었던 건 어쩌면 일종의 도피였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감당해내기 어려운 그런 아픔을 겪고서도 치유가, 아니 회복이 가능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그 메시지는 비록 문학이지만, 아니 문학이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아무리 해도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없을 때에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 전부 받아들이도록 하면 된다, 속죄받을 수 없는 후회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재 순간에 병행시켜, 다시 한 번 그 사건을 기억하는 훈련을 하면, 무산, 미치오와 행복하게 살던 현재도, 거기에 겹쳐져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마라! 그것에 의해 적어도 세 종류의 현재가 자신의 경험이 된다, 하고 조언해준 것입니다. 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신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의 고통으로서, 고통스러운 채로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마치, 정신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듯한 회복의 과정인 <기억과 애도>, 그리고 <연결과 복구>의 과정을 그녀는 <집회소>에서의 생활을 통해 밟아나가고 있다.. 물론 그것으로 외상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정신분석의가 말하는 것처럼 외상의 완결에는 종착지가 없고, 따라서 완전한 회복이란 없다., 따라서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인생의 친척Parientes de la vida>은 멕시코의 한 농민공동체에서 성녀와 같은 삶을 살며 주위의 칭송을 받던 그 여인이 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후, 자신의 마지막 생을 담은 기록영화의 제목으로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피가 통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살아가며 고난을 함께 하는 동안, 인디오나 혼혈 여자들이 진짜 친척처럼 자신을 진정한 친구이자 동료로서 받아들여 주었던 것에 대한 기쁨이자 만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 하지만 오에는 소설의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어떤 처지의 인간에서도 따라다니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인생의 친척'으로서, 슬픔을 이야기하는 플루타르코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섣부른 해석을 경계한다.

 

어쩌면 오에가 말한 것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로서 인간 세계를 표현하는 일, 그것을 intelligible한 것으로서 자신이 파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니 곧잘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아마 레비가 말한 <증언>의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잔여remnants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자가 말한 것처럼, 결국 작가의 글쓰기는 마리에의 아픔을 감지한, 즉 "나 자신의 이야기로서 납득한" 행위이자, 인간의 아픔을 감지하는 능력을 보존하기 위한 <기도>와 같은 것이라는 해석은 일견 타당하다..

 

그런데, 바로 그 역자가 요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라니.. 도대체 그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감지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정말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씌어진 글이 결코 자신의 사상/마음을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