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친척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정신지체아>로 태어난 첫째 아이.. 그리고 정상으로 태어난 둘째 아이를 가진 여인..

여인은 자신이 첫째 아이를 맡고, 둘째를 남편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이혼을 했다.. <장애아>의 탄생이 자신에게 어떤 <속죄>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그 <속죄>를 위한 생활에 남편과 정상아인 둘째 아이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만의 오붓한 생활을 꾸려나가던 도중, 둘째 아이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그 여인은 (둘째 아이의 사고로 다시 이혼을 하게 된 남편에 대한 사랑이 그다지 없음에도) 다시 남편과 장애아가 된 둘째 아이를 끌어안는다..

그런데 어느날 두 아이가 실종되어 주검으로 발견된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첫째 아이가 바다 위 절벽 낭떠러지에서 자진하여 떨어지자, 둘째 아이 역시 휠체어를 스스로 밀고 첫째 아이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 소설은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의 지인이었던 소설가이자 역시 장애아의 아빠로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것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공감하는 오에 겐자부로는 그녀가 혼란을 겪어나가면서도 말 그대로 <완전한 인간>으로 회복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요며칠새 동네 도서관에서 세월호 관련 지난 기사들을 리뷰하면서, 새삼 <망각>의 힘에 놀라워한 적이 있다..  지난 4, 5월 연일 티비나 인터넷에서 세월호 뉴스를 보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또 아이들을 버린 선원들과 아무리 봐도 비상식적인 구조로 일관했던 해경과 언딘의 유착, 그리고 책임 회피에 급급한 관료들과,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는 듯 관련자들을 경질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VIP에 이르기까지 무책임의 체계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얼마나 분노했는가.. 아직은 너무나도 어린, 꽃다운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보며 몇 번이나 <미안해.. 절대 잊지 않을께..>하며 한숨을 쉬었는가..

 

하지만 정상적인 애도/상의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이 사건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도 교묘한 미디어의 프레임의 정치에 우리는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무기력한 멜랑콜리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의 이야기들을 다시 보면서,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그리고 여전히 실종상태인 아이들의 가족들을 새삼 떠올렸던 것은 바로 이들이야말로 결코 이 사건을 잊지 않을 유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들의 아픔을 감싸안으며, 또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나이브하고 무책임한 말인가.. 이 시스템의 동조자이자 방관자인 우리들이 과연 이들의 아픔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구조작업의 차질이 빚어낸 총체적 난국으로, 또 현재 (너무도 부조리해 보이는) 재판과 국정조사로 2차, 3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의 타들어가는 마음에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위로의 말을 던질 수 있을지 실로 막막하기만 하다..

 

트라우마에 대한 책을 들여다보고, 또 애도에 대한 논의들을 떠올려봐도 입이 얼어붙는다.. 오에의 이 소설을 읽었던 건 어쩌면 일종의 도피였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감당해내기 어려운 그런 아픔을 겪고서도 치유가, 아니 회복이 가능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그 메시지는 비록 문학이지만, 아니 문학이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아무리 해도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없을 때에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 전부 받아들이도록 하면 된다, 속죄받을 수 없는 후회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재 순간에 병행시켜, 다시 한 번 그 사건을 기억하는 훈련을 하면, 무산, 미치오와 행복하게 살던 현재도, 거기에 겹쳐져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마라! 그것에 의해 적어도 세 종류의 현재가 자신의 경험이 된다, 하고 조언해준 것입니다. 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신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의 고통으로서, 고통스러운 채로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마치, 정신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듯한 회복의 과정인 <기억과 애도>, 그리고 <연결과 복구>의 과정을 그녀는 <집회소>에서의 생활을 통해 밟아나가고 있다.. 물론 그것으로 외상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정신분석의가 말하는 것처럼 외상의 완결에는 종착지가 없고, 따라서 완전한 회복이란 없다., 따라서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인생의 친척Parientes de la vida>은 멕시코의 한 농민공동체에서 성녀와 같은 삶을 살며 주위의 칭송을 받던 그 여인이 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후, 자신의 마지막 생을 담은 기록영화의 제목으로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피가 통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살아가며 고난을 함께 하는 동안, 인디오나 혼혈 여자들이 진짜 친척처럼 자신을 진정한 친구이자 동료로서 받아들여 주었던 것에 대한 기쁨이자 만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 하지만 오에는 소설의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어떤 처지의 인간에서도 따라다니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인생의 친척'으로서, 슬픔을 이야기하는 플루타르코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섣부른 해석을 경계한다.

 

어쩌면 오에가 말한 것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로서 인간 세계를 표현하는 일, 그것을 intelligible한 것으로서 자신이 파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니 곧잘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아마 레비가 말한 <증언>의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잔여remnants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자가 말한 것처럼, 결국 작가의 글쓰기는 마리에의 아픔을 감지한, 즉 "나 자신의 이야기로서 납득한" 행위이자, 인간의 아픔을 감지하는 능력을 보존하기 위한 <기도>와 같은 것이라는 해석은 일견 타당하다..

 

그런데, 바로 그 역자가 요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라니.. 도대체 그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감지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정말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씌어진 글이 결코 자신의 사상/마음을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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