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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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빅토리아 사회에서 빨간 약을 먹고 현실이 매트릭스임을 깨달아버린 여성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이었을까. 자신을 에워싼 높고 두터운 벽에 막혀버린 말년의 오스틴의 쓸쓸함과 비애가 잘 묻어나는 작품. 어쩌면 가장 최소한의 설득을 통해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꾸고 싶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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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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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에 걸쳐 꼬박 읽다.. 놀라운 흡입력이다.. 19세기 초 미국 남부사회의 숨막히는 암흑과 같은 현실을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를 통해 재현해낸 것은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자질.. 그 밀도는 가히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에 견줄만하다.. 그리고 나무랄데 없는 번역도 몰입도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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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 황현이 본 동학농민전쟁
황현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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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본업인데도 불구하고.. 

요새 책을 읽을 때마다 어딘가 뜨끔뜨끔한 느낌이 들어 책을 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얼마 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금 한국사회의 풍경이 흡사 신소설의 풍경과 유사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매천의 <오하기문: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을 읽노라니 19세기 구한말의 풍경과 지금의 시국이 겹쳐지면서 자꾸 한숨이 나오게 된다..

 

몸과 마음이 내려앉아서 더 이상 글쓰기가 쉽지 않다.. 다만 글을 읽다가 또 뜨끔한 대목이 나와 잠시 적어둔다.. 예나 지금이나 궁궐에 계신 분들은 우주의 기운을 받기를 좋아하나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임오년(1882, 고종 19년) 변란 당시에 왕비는 충주에 머물면서 요사스러운 한 무당과 자주 왕래했다. 그 무당은 길흉화복을 기막히게 알아맞혔다. 왕비가 몇 월 며칟날 복위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다. 왕비는 그 무당에게 홀딱 반해, 마침내 서울로 불러들여 북묘에 살면서 기도를 주관하게 했다. 무당은 왕비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를 쓰다듬었는데, 그 손길을 따라 통증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잠시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왕비는 그 무당을 '언니'라고 불렀으며, 때에 따라서는 '진령군' 또는 '북관부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무당은 궁중을 출입한 지 겨우 1년밖에 안 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윤영신, 조병식, 이용직 등이 그 무당과 의형제를 맺고 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그녀의 도움으로 관찰사 자리를 꿰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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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8-04-2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시감이라니 놀랍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그레이트북스 83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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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나 아렌트H. Arendt󰡔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고 있다. 물론 이 번역본이 몇번째 판본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477페이지에 달하는 초판이 2차대전이 끝난 지 6년 후인 1951년에 나왔다는 점, 그리고 이 저작을 쓰게 된 동기가 잘 알려진 것처럼 나치의 유대인학살에 대한 소식을 <풍문으로> 접하게 된 것 때문이라는 점은, 독일계 유대인이자, 조국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한(그리고 한동안 무국적자로 살았던) 한나 아렌트에게 있어 이 저작이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 대한 실존적 물음, 그리고 유대주의를 둘러싼 온갖 언설들과의 격투의 산물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또 이 저작이 그 평가가 어찌됐건 이후 전체주의와 권력론을 이야기하는 많은 논자들에게 일종의 <텃밭>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뜬금없어 보이는 절대주의 시대의 <인종주의>에 대한 푸코의 강의에서부터, <호모 사케르>에 대한 아감벤의 논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그림자는 짙게, 그리고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아니, 조금 더 강하게 말한다면 <호모 사케르>연작은 아렌트에 대한 주석에 다름 아니다.

 

2. 일단 이 방대한 저서의 1부에 해당하는(2부와 3부는 각각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반유대주의>에서 흥미로운 대목.

2-1.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이유로 이야기되어왔던 두 교리-<희생양이론><전통적 반유대주의>-의 허구를 지적하면서, 근대의 반유대주의를 국민국가의 발전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틀 속에서 규명한 점. ,19세기 말 제국주의, '승리 아니면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선택지가 되던 순간, 전쟁의 실제 목표가 적의 완전한 분쇄가 되고, 국민국가 체제가 급작스럽게 붕괴하면서, 한 번도 국민국가에 속해 본 적이 없던 유대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설명이 주는 참신함.

2-2, 또 하나, 반유대주의의 원천을 지난 세기 동안 유대인이 수행했던 역할에서 규명하고자 한 점. 특히,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사회에서, 특히 독일에서 유대인이 수행해온 역할에 대한 신랄한 지적은, 이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고발되는 유대민족 내부의 카스트--그리고 심지어 아우슈비츠와 같은 죽음의 수용소로 보낼 유대인들을 분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한 계층이 바로 동족인 상층 유대인(그 많은 수가 랍비)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단초라는 점에서도 주지해둘 필요가 있다. 그녀는 <유대민족의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안온한 입장을 처음부터 거부했던 것이다.,

 

3. 이렇게 적어두었던 것이 일주일 전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책을 다 읽지 못했다. 집중하며 책을 읽기에 이래저래 하찮은 일들로 너무 바빴고, 또 날씨도 나빴다. 무엇보다, 반유대주의에서 보여주었던 놀라운 통찰력에 비해 호흡이 너무 길어져버린 후반부의 장들이, 두꺼운 볼륨의 책을 강도 있게 볼 수 있게 만드는 <긴장감>을 저해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3-1. 하지만 2부의 마지막 장인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은 예외이다. 이 장에서 그녀는 미국으로의 망명 후 한동안 <무국적>으로 살아야했던 자신의 체험을 곰씹으면서-물론 자신도 인정하듯, 그녀의 무국적 경험은 무수한 무국적자들 중에서 예외에 해당하는 <정치적 망명>에 해당하는 것이긴 하지만- 유럽 사회에서의 <무국적>의 출현과 이의 전후 버전이기도 한 <난민> 개념, 그리고 <인권>의 원천을 역사적으로 추적해낸다. 역사적 권리에서 자연권으로 간주되었던 인권이, 현재는 <인류> 자체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그녀의 결론은 인간의 삶의 조건에서 정치적 공간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다(이 논리가 그녀의 후기저작인 <인간의 조건>에서 더욱 발전하는 것인가?).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인권의 상실에 함축된 역설은, 한 사람이 일반적인 인간이 되는 순간-직업도 없고 시민권도 없으며, 의견도 없고 그의 정체와 고유한 점을 알려줄 행위도 없는- 그리고 그 자신만의 절대적으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면서 일반적으로 차별화 되는 순간 그런 상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개성은, 하나의 공통된 세상 안에서 표현되고 그 위에서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면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4. 오늘 다시 3부인 <전체주의>를 읽으면서, 왜 그녀가 몇백 페이지에 걸쳐 전체주의 운동에 대한 지루한 서술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녀가 이 3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강제수용소>라는 장치의 <예외성>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그 강도가 프리모 레비나 장 아메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특히 수용소의 <회색지대>적 성격에 대한 레비의 통찰은 아우슈비츠라는 체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한 자가 아니라면 결코 쓸 수 없는, 인용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지는 기술이다. 그것이 한동안 한국 역사학계에 불어닥친 <회색지대론>에 대한 나의 불신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녀로서는 결여된 체험에 기인하는 것이자, 어디까지나 그녀의 본업은 <정치학>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해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강제수용소의 절망적 상황에 대해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토해낸다.

 

나치 돌격대의 맹복적인 야만성의 배후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더 나은 사람들, 그러나 이제 자신들의 야만적인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깊은 증오와 적개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중에도 수용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이 적개심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마지막 유물처럼 느껴진다.

 

5. 언젠가 다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은 문구만을 끄집어내면서 글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서구 세계는 가장 어두운 시기에도 이제까지 살해한 적에게 기억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강제수용소는 죽음 자체를 익명으로 만들기 때문에(어떤 수감자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 지 결코 알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죽음에서 완성된 삶의 종말이라는 의미를 빼앗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한 개인의 고유한 죽음조차 앗아가버렸다.

도덕적 인격이 살해되었을 때 인간이 산 송장이 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개인의 차이, 즉 그의 유일무이한 정체성이다. 그런 개성은 불모의 형태로 끝없는 금욕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체주의 지배 아래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권리도 양심도 없는 인격의 절대적인 고립 속으로 도피했고 매일매일 도피하고 있다. 인간 인격의 이 부분은 본질적으로 자연에 의존하고 또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존하기 때문에 분명히 가장 파괴하기 힘들다(파괴되었다 해도 가장 쉽게 복구할 수 있다).

이런 개성의 말살은 법적, 정치적 인간의 분노와 도덕적 인간의 절망보다 훨씬 강렬한 전율과 공포를 야기한다. 비로 이 공포가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은 야수라고 하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허무주의적 일반화를 등장시킨 장본인이다. 실제로 강제수용소의 경험은 인간이 인간적 동물종의 표본으로 바뀔 수 있으며, 인간의 '천성'은 인간에게 극히 부자연스러운 것, 즉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한에서만 '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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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vs. 자이니치 - 대결의 역사 1945~2015
이범준 지음 / 북콤마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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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라는 존재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입문이 되기에 충분한 책. 평이한 언어로 글을 쓰면서도 시종일관 진지함을 잃지 않는 보기 드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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