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 역사 인물 찾기 13
알리스 셰르키 지음, 이세욱 옮김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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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상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저작에 있지만, 파농은 성격이 좀 다르다. 그의 사상이 전개되는 무대는 책상(그리고 빽빽한 레퍼런스)이 아니라 전장이기 때문이다. 파농의 후반부 정치적 무대였던 <혁명 알제리>를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미 그 가치를 증명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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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 우리는 왜 비현실적인 것에 주목해야 하는가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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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산만하고 현학적이지만 <청년> 아감벤은 훨씬 친절하다. 호모 사케르 연작의 씨앗을 확인할 수도. 1, 2부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령이론, 스토아철학과 의학의 프네우마 이론의 결합을 장황히 소개하며 유령론의 계보를 추적해가는 3부는 난해하기보다는 생경하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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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의 사상사적 연구 논형 일본학 8
후지타 쇼조 지음, 최종길 옮김 / 논형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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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모두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출간소식이 들리면 사지 않을 수 없는(더구나 현재 한국의 인문 사회과학계의 출판상황에 비추어 2쇄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책들을 보면서,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는 것은 <언젠가>에 대한 바람 때문이기도 하다..

 

사상의 과학 연구회편, <공동연구 전향>(상, 중, 하)도 그런 책들 중 하나이다..

1200페이지가 넘는, 그것도 빽빽한 활자로 지면이 가득 채워져 있는(현재의 편집으로 바꾼다면 2천 페이지는 족히 될) 이 세 권의 책을 전문연구자가 아닌 이상 통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전향>이라는, <먹물>들에게는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항상 어딘가 모를 부채가 남아 있었다.. 더구나 김소진의 소설들을 최근 다시 읽은 뒤였고.. 또 전향이 터부시되는, 그래서인지 전향 선언(고백)이 없는 기묘한 전향이 난무하는 한국 지식사회에서 <전향>의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과제를 최근 떠맡고 힘겨워하던 처지에, 그 전초전으로 지난 주말 <공동연구 전향>의 옆에 꽂혀 있던 후지타 쇼조의 책,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를 꺼내들었다..

 

후지타 쇼조의 이 책은 <공동연구 전향>에 실려 있는 서문격인 3편의 글과 한 편의 보론을 이후 출판한 것이다.. 출판사는 저자가 그렇게 꺼려하던 (일본 학계의 현 실태를 대표하는) 유명한 이와나미..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마루야마를 경유하여 후지타 쇼조의 세계로 들어가겠지만, 후지타의 사유는, 그리고 문체는 말 그대로 독자들을 질식시킬 듯한 치열함이 특징적이다.. 대상에 접근하는 데 있어 조금의 나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과 그 분석의 칼끝을 글을 쓰는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들이대는 성실함이 그런 사유를 빚어내는 힘일 것이다.. 여기에는 마루야마가 종종 구사하는 <유머>가 들어설 여지도 없다..

 

만주 사변 이후인 쇼와 8년(1933), 중일전쟁 개시 이후인 쇼와 15년(1940), 그리고 패전 직후인 쇼와 20년(1945), 피의 노동절 탄압 이후인 쇼와 27년(1952)이라는 일본 사상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이 세 시기에 출현한 전향의 양상을 시계열의 변화에 따라 추적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해내는 작업은 말 그대로 엄청난 스케일과 개인 사상가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다(왜 서력이 아닌 연호를 썼는가에 대해서는 후지타가 성찰적으로 고백한 바 있으니 생략한다).. 

이상의 연구는 도저히 한 개인이 감당해낼 작업이 아니다.. 후지타에게 부여된 임무는 그 사상적 정황을 큰 그림으로 스케치하면서 연구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작업이었다.. 사상의 과학 연구회의 일원도 아니었던 그에게 <객원 연구원>이라는 신분을 부여하면서까지 이 엄청난 작업을 맡긴 츠루미 슌스케의 혜안(기획)도 놀랍지만, 1933년 맑스주의자들의, 37년 이후 자유주의자들의, 그리고 1945년 이후 국가인과 제도인의, 그리고 1952년 다시 맑스주의자들의 전향이 갖는 성격들을 유형화하고 이를 <전향>이라는 큰 틀 속에 자리매김하는 작업에 말 그대로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 일본 지식사회의 이러한 성실성은, 역시 과거 자신들의 사회를 짓누르던 파시즘, 군국주의에 (지식인으로서)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자기성찰, 그리고 부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물론 <전후>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를 안타깝게 날려버리고 지금은 극소수의 집단으로 전락해버렸지만, 자신들의 패배의 기록을 성실히 써내려감으로써 이후 세대들에게 계승하고자 하는 그들의 성실성은, <승자의 도취>에 빠져 화려하게 전향해버린 한국 지식사회의 그 황량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다.. 물론 그런 엄혹한 시절을 거치지 않은 후대의 우리가 <전향>을 평가하는 자리에 서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자세는 우리들보다 앞선 시대의 전향에 대해 기술함에 있어 결코 동시대의 비전향자의 위치에 자신을 두고 판단, 평가하려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시점에서 전향의 문제를 사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룰의 문제인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지식사회에도 이러한 <공동연구 전향>과 같은 작업들을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전향이 명백함에도 이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러한 기획이 과연 시도될 수 있을까.. 그 <언젠가>를 기다리며, 후지타의 그 치열한 사유를 한줄한줄 읽어내려간다..

 

만주사변에서 일본군 전승사진이 들어간 보도를 보고 마치 우리가 국제대항경기에서 일본선수가 승리하는 장면을 보고 있을 때와 같은 흥분을 느끼기에, 그렇게까지 커다란 장애물을 신체 내부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전쟁의 '안마'적 기능에 의해 애써 문화교양의 세계주의에 빠지려고 한 지식인의 상당수가 응어리를 풀고 일본인의 감각으로 복귀한다. ....

간헐성의 감각적 세계관이 다시금 자각되었을 때, 그것이 본인에게는 꽤나 깊은 실감이었겠지만, 밖에서 보면 일본 사회에 대한 공감에 지나지 않고, 이것에 의해 일본 사회에 가입하는 비의식적 의식을 행한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리하여 여기서 실감의 의미가 명확히 전환된다. 더 이상 실감은 공감에 대결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복귀해야만 하는 이 때의 공감은 개인의 실감에 의해 부정적으로 매개되는 것으로서, 내부에 대립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상황에 지향되는 하나의 감정이다. 여기서 만약 근대정신이라는 것이 '분열하는 의식'이고 따라서 에너지의 자가발전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공감구조는 근대정신을 지탱하는 감성구조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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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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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프리모 레비의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정좌를 한 상태로 계속 책을 읽는다.. 왠지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그의 책을 읽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여전히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을 헤쳐 나온 후, 그가 그렇게도 바랬던 인간으로서의 가치, 존엄성에 대한 인정 같은 것들이 점점 헌신짝처럼 내팽겨쳐지는 <사회?>에서 모른 척하며, 하루하루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책에 집중하는 것을 더욱 가로막는다.. 

 

<휴전La tregua>.. 그의  두 번째 작품 <휴전>이 출간된 것은 1962년이다.. (전작과 이 작품 사이에 16년의 시간이 걸린 이유는 그의 연대기에 충분한 설명이 나와 있으니 생략한다). 왜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의 고향 토리노까지 장장 8개월에 걸친 여정을 기록한 이 책에 <휴전>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일까.. "전쟁은 끝났잖아요"라는 레비의 말에 "전쟁은 늘 있는거야"라고 응수하는 모르도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반론으로는-감히 일반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 부족하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레비는 마지막 장에서, 기차가 이탈리아 국경으로 진입하면서, 힘든 귀환의 여정이 드디어 그 막을 고하는 시점에야 비로소 이야기해준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의 지도가 선명하게 보여주듯 이들을 태운 그 기차가 왜 그리도 이상한 궤적을 그렸는지-그것은 어떤 <의지>의 작동인지, 아니면 당시의 혼란이 초래한 우연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물론 알 수 없다.

 

레오나르도와  나는 기억으로 가득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출발할 때의 인원 650명 중에 단 세 명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20개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되찾게 될까? 우리 자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침식당하고 꺼져버렸을까? 돌아가는 우리는 더 풍요로워졌을까 아니면 더 가난해졌을까, 더 강해졌을까 아니면 더 공허해졌을까?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집의 문턱에서, 결과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판가름이 날 하나의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을 미리 상상하고 있었다. 혈관 속에서, 기진맥진한 피와 함께 아우슈비츠의 독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서 우리가 다시 살아나가기 위한 힘을, 버림받은 집집마다 텅 빈 둥지마다 그 주위로 아무도 없는 동안 저절로 자라나는 울타리와 장벽들을 허물기 위한 힘을 끌어올린단 말인가? 조만간, 내일 당장,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밖에 있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적들에 대항해서 싸움을 시작해야 할 텐데, 무슨 무기로, 무슨 기력으로, 무슨 의지로 한단 말인가? 1년간의 잔혹한 기억들에 짓눌려 우리는 공허해지고 무장해제되고 수백 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막 지나간 달들은 문명의 언저리를 서성이던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의 휴전으로, 무한한 자유로움의 막간으로, 하늘이 내려준 그러나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운명의 선물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잔혹한 기억들에 짓눌리지 않았다.. 귀환한 오딧세우스처럼, 그는 집으로 돌아간 다음 해(1946년) "저절로 자라나는 울타리와 장벽들을 허물기 위한 힘을 끌어올려" 초인적인 열정으로 <이것이 인간인가>를 집필한다. 그에게 아우슈비츠 경험을 쓴다는 것은 바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들>, <메두사의 머리를 보아버린 자들>, 즉 <가라앉은 자들the drowned> 대신에, 대리인으로서 말한다는 의미에서 <증언>이었다. 그리고 그 증언은 <인간으로서>를 넘어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생존자인 자신들이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해자인 인간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이 주는 부끄러움.. 그래서 어떤 비평가는 이 부끄러움의 감정이 "인간으로서 부끄럽다"는 인간주의적 언표를 초월한 하나의 극한의 언표가 되며, 어떤 고유문화적 속성이 아닌, 보편적인, 굳이 말하자면 "보편"적 이상의 "보편"성을 넘어서는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부끄러움을 잃어버린(후안무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희망은 다시금 머나먼 것이 되어버렸지만.. 

 

레비는 1987년 토리노 자택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자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몸소 체현했던 그가 왜 68세의 나이에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못한 자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가 남긴 글 속에서 그를 항상 따라다니던 죽음의 그림자를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때고 불현듯 엄습해오는 몸서리쳐지는 공포의 소리를.. <브스타바치>

 

간간이, 때로는 자주 때로는 드물게, 공포로 가득한 꿈이 여전히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세부적으로는 다양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가지인, 또 다른 꿈 속에 든 꿈이다. 나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거나 일터에 있거나 푸른 전원에 가 있다. 그러니까 외관상으로는 긴장과 고통이 없는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 속에 있다. 그럼에도 미묘하고도 깊은 불안감을, 닥쳐오는 위협에 대한 뚜렷한 느낌을 갖는다. 아닌 게 아니라 꿈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또는 돌연히 매번 다른 식으로, 장면과 벽들과 사람들과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흐물흐물 해체된다. 그리고 불안감은 더욱 짙어지고 명확해진다. 모든 것은 이제 카오스로 변한다. 나만 홀로, 온통 잿빛의, 무감한 무의 한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항상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내가 다시 라거 안에 있고, 라거 밖에 있는 그 무엇도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가족과 꽃이 핀 자연과 집은 짧은 휴가 또는 감각들의 속임수, 곧 꿈이었다. 이제 안의 꿈, 즉 꿈 속의 꿈은, 평화의 꿈은 끝이 난다. 차갑게 계속되는 바깥의 꿈속에서 나는 익히 알려진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고압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짧고 낮은 한마디다. 아우슈비츠에서 들려오는 새벽의 명령 소리, 두려워하면서 기다리는 외국어 한마디, '브스타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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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노스탤지어 - 근대 일본이라는 역사 경험의 근원을 찾아서
이소마에 준이치 지음, 심희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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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노스탤지어>를 다시 읽다..

예전 일본의 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제목이 주는 매혹 때문이었다..

상실과 노스탤지어..

 

하지만 이 책이 번역되리라는 생각까지는 못했다..

일본 지성사에서 <종교>라는 영역은..

어찌됐건 제국 시기 <국가신도>라는, 사람들의 내면을 통제하는 강력한 장치를 가진 사회였고..

그래서 그 주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식인들의 사투가 <종교사상사>라는 독특한 학풍을 만들어내는 등,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간주되어 온 반면..

한국 사회에서는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중요성(동학, 식민지의 종교통제, 샤머니즘, 각종 신흥종교의 발흥)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이들은 한줌에도 지나지 않는 상황이니까..

안타깝지만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는/걸어가야 할 역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책에 대한 구체적으로 내용으로 들어간다면..

적어도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만큼은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

종교라는 기존 개념이 담아내지 못하는 우리 내면에 깃든 종교성-막연한 죽음의 불안이나 죄악감, 이에 대한 갈등과 희구에 어떠한 언어를 부여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담론의 동질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나는 <여백>을 다시 담론 내부에 기입할 수 있는 표현의 공간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저자는 호미 바바나 사카이 나오키의 이론틀을 빌려서 나름 성공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야스쿠니의 제사나 야나기다 쿠니오의 조령제사론과 같은 기존의 담론들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이 이론틀은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마루야마의 사상사적 논의를 근대 일본의 종교라는 장으로 옮겨 놓은 듯한 <내면을 둘러싼 항쟁>과 같은 장은 그 자체로 훌륭한 (비록 오리지널리티는 떨어지지만) 연구이다.. 하지만 문제는 논의가 항상 여기서 그친 채, 기존 자신의 문제의식을 선언처럼 반복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과거의 거장들, 카미시마 지로나 야스마루 요시오 등과 같이 민중들의 종교적인 실천이 내포하는 긴장과 모순, 전망과 한계의 착종된 상에 대한 정치한 분석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차라리 이 책의 부제를 원제 그대로 <근대 일본의 여백>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근대 일본이라는 역사 경험의 근원을 찾아서>라는 번역서 부제의 무게를 이 책은 견뎌내지 못한다.. 출판사의 선택이었을까..

이 글을 읽으면서 사상사의 고야스 노부쿠니의 글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겹침이 일본 학계의 어떤 트렌드를 반영하는 것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면, 때때로 인용되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 등의 소설의 한 대목들은 일반 젊은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저자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기존의 논의에 녹아들지 못한 채 너무 생경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래서..

별은 세 개 반을 주기로 했다..

네 개에는 못 미치고, 세 개는 아쉽다..

그런데 3개 반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앞서 리뷰를 쓰신 분이 5개를 주셨으니 3개를 줌으로써 균형을 맞추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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