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 아우슈비츠에서 온 네 장의 사진 미학과 정치 총서 1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오윤성 옮김 / 레베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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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까지 읽은 소감은, 큰 무리는 없지만 역시 번역이 조금 안타깝다는 느낌. 물론 쉽지 않은 책임엔 분명하지만 이미 번역된 <반딧불의 잔존>에 비한다면 많은 부분이 걸려요. 이미 번역이 된 많은 문헌들-레비,아감벤, 벤야민 등-을 참조했다면 훨씬 깔끔하게 번역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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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 - 미국이 낳은 열병의 정체
모리모토 안리 지음, 강혜정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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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홉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 2부를 읽고 나니, 책을 처음 읽고 썼던 리뷰때보다 별 하나를 빼야 할 듯. 기본적으로는 홉스태터에 의지하면서도, 그 논의의 핵심인 근대성에 대한 반란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탐구가 빠지면서, 논지가 모호해져버렸다는 느낌. 홉스태터가 번역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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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데올로기 동아시아 라이브러리 2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윤여일 옮김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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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 이데올로기>가 번역 출간되었다..

이런 시대에 다케우치에 대한 글을 계속해서 번역해내고 있는 역자에게 우선 경의를 표한다.. 과연 어느 정도의 독자들이 다케우치의 글에 내재하는 아포리아를 읽어내는데 그 바쁜 시간을 할애하려 할까.. 분명히 다케우치의 글은 그다지 '친절한' 글이 아니다.. 더구나 전후 일본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의 글은 왜곡될 소지도 다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은 그의 맹우였던 마루야마 마사오가 도달한 정도의 '보편성'을 획득해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상'이라는 영위에서 다케우치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가 있다..

만약 다케우치 요시미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첫 문장을 이렇게 쓰고 싶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다루기 힘든 사상가이자, '위험한' 사상가이다..

-여기서 '위험한'이라는 형용사는 물론 다케우치 자신이 오카쿠라 텐신이라는 근대 일본의 사상가를 논하는 글의 첫문장에서 텐신을 평하면서 썼던 형용사이기도 하다. 물론 이 형용사가 다케우치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일지도 모르겠다-

그 '위험함'은 바로 그가 '일본 낭만파', '아시아주의', '근대초극론' 등 전후 일본이 팽개쳐놓은 금단의 영역 내부에서 사고했던 사상가라는 데서 나온다..

"'사이비 문명'을 허위화해 가는 작용은 사이비 문명의 내부에 있는 자만이 담당할 수 있으며, 밖에서 힘을 빌려와서는 할 수 없다"는 감각은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찾기 힘든 다케우치 특유의 독특한 자리이다..

 

예를 들어 전후 일본에서 파시즘의 한 갈래(公娼)로 비판받는 일본 낭만파에 대해, 다케우치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전후에 출현한 문학평론들이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 일본 낭만파를 불문에 붙이고 있는 양상은, 특히 일본 낭만파에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까지 알리바이 제출에 바쁜 양상은 조금 기묘한 일이다."라는 감상을 피력하면서 "비판대상의 발생근거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비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근대 초극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1942년에 열린 몇 차례의 좌담회에서 유래한 이 논의는 전후 일본에서 <대동아전쟁>의 악명높은 이데올로기이자 주술로 간주되곤 했다. 물론 근대의 촉극 좌담회는 분명 1942년이라는 시점에서 보더라도 시대착오적이고, 또 그다지 깊이 있는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는 다소 '허술한' 논의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다케우치는 전후에도 이 논의가 다시 소환되고 회고되는 상황을 주시하면서 "사상으로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묻혀 있는 기억이 아직 살아남아 곳곳에서 원한과 회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은 이 책 <일본 이데올로기> 역시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민중은 바보라서 도조(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총리이자, A급 전범)에게 속았고, 내버려두면 또 속을테니 "정말이지 위험"하다고 마쓰모토는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과연 민중은 도조에게 속을 만큼 바보였다. 그러나 속은 덕분에, 도조를 대신한 '민주주의' 지도자를 함부로 믿지 않을 만큼은 바보가 아니게 되었다. 또 속는 게 아닐지를 의심할만큼 영리해졌다. 그렇게 영리해진 게 지도자의 눈에는 반대로 "도조의 재탕"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속는 데 넌더리가 나서 의심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렇게 의심하는게 나쁘다며 바보 취급하니 민중은 속상하다. 결국 지도자라는 건 모두 못됐다고 여길 것이다. 나는 그리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민중의 진정한 각성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민중이 지도자들만큼 도조를 무조건 신봉한 것은 아니다. 민중의 비협력은 도조조차 알고 있었다. 그 저항이 성장해 오늘의 '민주주의'를 불신하게 되었는데, 그 저항의 계기를 붙들지 않고 도조에게 굴복한 권위주의의 면만을 바라보고서 '민주주의'를 위에서 내리 눌러 저항을 뭉개려 한다면 도조의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확실히 이런 문체로는 보편성을 획득하기 힘들다.. 아니 문체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런 위치 감각은 전후 일본에서든, 아니면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아마 어느 '진영'에서든 제대로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사상이라는 '영위' 자체가 원래 그렇게 고독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감각은 결코 정치가가 가끔씩 침바르듯 말하는 '선의'와 같은 그런 수준의 깊이가 아니다..

다케우치의 아포리아가 아포리아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우리가 저 머나먼 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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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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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를 넘길 것 같아, 리뷰로 대체한다..

100자평으로 후기를 남기는 것의 오만함을 경계하면서..

800페이지가 넘는 책에 대해 100자평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꼬박 사흘에 걸쳐 끝까지 읽다.

이 정도의 집요하면서도 치열한 사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젊은 연구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일본 사상계의 풍요로움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이는 무엇보다 번역된 텍스트들을 어느 정도 신뢰하면서 인용할 수 있는 수준의 풍토가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적 경지이다.. 

예전에도 어딘가에 쓴 바 있지만, Dits et ecrits가 번역된 사회와 번역되지 못한 사회의 차이는 분명하다. 푸코의 텍스트들을 시계열적으로 논할 수 있는 학문적 풍토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라는 저자의 '비범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더구나 르장드르의 저작 한 권 번역되지 못한 사회에서 어찌 논의가 전개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책에서 사사키가 가장 몸을 낮추고 글을 쓰고 있는 장 역시 르장드르를 다루고 있는 2장이다.. 아직 2차연구들이 많이 소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사키 역시 그의 논의를 충실히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후기 푸코의 아포리아에 대한 집요한 추궁은 이제 우리가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수준의 결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도 가치가 있다.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권력을 시계열순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푸코의 강의록이 출간되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공유된 것 같다.. 통치성의 문제의식도.. <다이어그램, 장치, 몽타주>에 대한 절 역시 르장드르의 몽타주론(?)을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면 참 쉽지만, 이 논의를 끌어내기 위해 푸코의 텍스트들을 시계열순으로 꼼꼼이 읽어나가면서 추리소설을 쓰듯이 집요하게 추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라캉, 르장드르, 푸코라는 사실 어느 하나 범접하기 어려운 세 저자를 묶어내면서 저자가 이끌어내는 결론은 힘이 조금 많이 떨어진다..

그래.. 블랑쇼를 인용하며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야전과 영원>이라고 붙인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왠지 그 가벼움은 역사의 진공상태, 무풍지대와 같은 전후 일본사회라는 토양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상이 정말 <강철같은 페시미즘>을 거친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상(?)이 진정 투쟁의 무기였던 사회에서는 이러한 가볍고 안이한 결론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도 사상은 종종 무미건조한 교조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치열한 현실을 견뎌낼 수 없는 지적 유희로 치부되어 등한시되어버린다.. 우리는 아주 가끔 사상이 원석처럼 빛을 발하는 시기를 이후에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18세기 중반, 혁명 전야의 프랑스나 19세기 중후반의 러시아 혹은 20세기 초의 빈과 같은.. 하지만 사상은 그 위험함 때문에 혁명 이후, 혹은 반혁명을 거치면서 가장 극렬하게 탄압을 받았다..

과연 사상 자체를 위해서는 어떤 사회가 더 나은 사회일까.. 물론 그것은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도 아주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아시아 침략을 용인해버린, 나아가 전시체제에 협력해버린 자신들의 나약함을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전개되던 시기가 있었다..

왠지 후지타 쇼오조오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를 읽고 싶어졌다..

 

cf. 저자의 논의를 둘러싼 격투는 서평과 같은 <장치>가 아닌 다른 개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저자가 바라는 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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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3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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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3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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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사무소 - 인간의 운명과 정치적인 것의 자리 현대의 지성 164
김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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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 벤야민, 아감벤의 연쇄에 흥미를 갖는 독자라면 입문서로 많은 도움이 될 듯. 카테콘의 위상에 대한 주석 역시 흥미롭다. 하지만 <종말론사무소>라는 타이틀, 그리고 서론의 강렬한 문제의식을 일관되게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논문집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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