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모던 - 새로운 중국 도시 문화의 만개, 1930-1945
리어우판 지음, 이현복 외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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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니스쿠의 논의를 재해석하여 동아시아 근대성 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린 노작. 올드 상하이를, 근대도시 홍콩을, 그리고 다시 상하이가 초근대도시로 도약해가는 현재적 상황에서 많은 영감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건 저자의 힘일까, 아니면 상하이라는 도시의 마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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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적 사회질서의 기원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78
나루사와 아키라 지음, 박경수 옮김 / 소화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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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현대 일본의 사회질서現代日本社会秩序>이다.

원제에는 나오지 않는 <기원>이라는 단어를 번역본에 붙인 이유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조금 더 풀어쓰고자 하는 역자의 의도가 깔려 있는 듯 하다..

 

저자는 근대 일본적 질서형성과정의 특징으로

1)원형 질서가 형성되는 속도가 현저히 빨랐다는 점.

2)새로운 질서가 도입되었을 때, 가족, 사찰, 신사, 동업자 단체, 지역공동체 등 '전통사회'의 해체와 재편에 대한 저항이 약했다는 점.

3)군대와 학교가 맡았던 역할이 비교적 컸다는 점.

4)'질서화'가 목적합리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 즉 <과잉질서화>

5)이 질서는 내면화된 '제도'로서 사람들의 행동을 지배하고 사회를 상대적으로 안정시키기도 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며, 그 특징을 시간, 공간, 신체, 인간관계 등의 변화에서 찾는다..

나아가 2부에서는 이러한 질서가 형성된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다. 아마 많은 논자들이 그 기원을 근대 주체와 규율권력에서 찾는데 비해, 이 책이 갖는 새로운 점은 이를 무가 사회, 근세 에도라는 도시의 질서, 선종 사회의 생활 규율과 같은 일본 사회의 전통에서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이는 새로운 시도이고 또 흥미로운 사례들도 많이 있기는 한데, 아쉬운 점은 그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정교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유사하다, 혹은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근대주체와 식민지규율권력>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국의 상황보다는 분명 몇 수 위인 것도 씁쓸하지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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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민중반란 -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그리고 조선 민중의 내셔널리즘
조경달 지음, 박맹수 옮김 / 역사비평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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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에 대해 이 정도의 통사를 썼다는 것만으로 저자의 노고는 치하할 만하다. 갑오농민전쟁 자체가 제대로 된 사료집성이 불가능한 역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독특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제대로 된 국내 역사학계의 개설서가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의 가치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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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과 순수성 -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30
프라센지트 두아라 지음, 한석정 옮김 / 나남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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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사흘에 걸쳐 읽다. 구미의 중국사연구의 수준을 보여주는 책. 특히 만주를 바라보는 제국일본과 중국의 시각을 <순수성>의 문제로 분석하는 대목은 탁월. 아쉬운 점은 가독성. 난해한 저자의 글을 이만큼 번역해준 데는 감사를. but 원음표기 고수가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꿍찬당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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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됭의 마귀들림 - 근대 초 악마 사건과 타자의 형상들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6
미셸 드 세르토 지음, 이충민 옮김, 이성재 감수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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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읽어야 할 책은 카를로 긴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되던 시절만 해도 아직은 미시사에 대한 소개글 정도만 나왔을 정도라 국내의 참고문헌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근 10여년이 지나니 이제는 만만치 않게 축적되었다..

긴즈부르크의 책만 해도, <마녀 베난단티와 밤의 전투>(아쉽게도 절판된 상태다)와 <실과 흔적>이 번역 출간되었다.. 

여기에 뤼시앙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문제>(이 책 역시 절판이구나)나 미하일 바흐찐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이 책도..), 그리고 그 원저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리엘>을 함께 읽어둘 필요가 있다.. 그리도 종교적이던 중세 사회가 왜 100년도 채 안 되어 <무신앙>이 일반적인 사회가 되어버렸을까..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은 이 무신앙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책들을 한권씩 한권씩 꺼내읽는다면 6월 한 달을 녹녹히 보낼 수 있을텐데..

아쉽게도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 이런 책들은 양로원에서나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본격적으로 긴즈부르크에 들어가기 전에, 뭔가 다른 책을 읽어두고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서가에 꽂혀 있던 미셀 드 세르토의 <루됭의 마귀들림>을 꺼내든다..

 

세르토는 푸코와 부르디외를 열심히 읽었던 이라면 낯설지 않은 저자이다.. 부르디외의 주저인 outline of theory of practice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그 무수한 부르디외 번역본 중 이 책이 목록에 없다는 점도 참 기괴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왠지 메타포로 사용되는 듯한 감이 있는 practice에 대한 또 다른 깊은 사유와 천착을 보여준 이가 바로 세르토이다.. 그의 주저는 이 출판사의 인문 라이브러리 기획으로 번역된다 하니 그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물론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찌됐건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루됭의 마귀들림>이라는, 우리에게는 친숙치 않은,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것처럼 보이는) 한 사건에 대한 다성적(multi-vocal) 목소리들을 너무나 매혹적으로 복원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원 작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이 사건에 대해 켜켜이 쌓인 <문서고>(archive)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료만 있다고 복원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그 자료들을 꼼꼼이 읽어내고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복원해낼 수 있는 프랑스 역사학계의 두터운 내공이 깔려 있다..

사실 이 책들을 읽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밤의 전투(2)를 쓸 때 밝히기로 한다..

 

일단, 이 책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은 삽화와 해설로 이루어진 짧은 프로이트적 서론을 보고나서 판단하면 된다..

거짓말과 진실 사이의 전투, '이다'와 '아니다' 사이의 전투는 강박적이 되고 바로크적이 된다. 열린 무덤이나 파괴된 제국을 중심으로 끝없는 싸움이 벌어진다. 속담이 말하기를, '다들 틀렸으면서 다들 자기가 옳다고 여긴다.'

가히 이 책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문장이다..

 

이 책에서 한 수 배운 점이 있다면..

1. 마귀가 들러붙는 것obsession과 마귀에 들리는possession 것은 다르다는 것.. 17세기(1643년)의 문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들러붙음obsession과 마귀들림possession의 기본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들러붙음에서 악마는 들러붙은 사람에게 외적으로만 작용한다. 즉 그 사람이 좋든 싫든 그 사람의 눈 앞에 빈번히 나타나고 그 사람을 때리고, 그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본래 성격, 기질, 능력의 폭을 현저히 넘어서는 기이한 감정과 동작을 자극한다. 반면 마귀들림에서 악마는 마귀들린 사람의 정신능력과 신체기관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래서 악마는 그 사람이 적어도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스스로 할 수 없는 행동을 그 사람 내부에 일으킬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다.

왜 이 시기 들러붙음이 아니라 <마귀들림>이 중요한 현상이 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그 차이는 중요해진다.. 이제 현장에서 발견된 모든 재료가 형태를 얻어 하나의 담론이 되는 것이다.. 푸코에게 경의를 표하며 세르토는 이 절에 <말과 사물>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2. 또 하나는 공간이 사람들의 정신을 진정으로 '홀리는'posession 것은 오직 냄새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냄새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2차원의 물체들을 우리가 들어가 있는 3차원의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이러한 냄새의 마법은 17세기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후각은 시각에 그 우위를 내주게 되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여기서 할 수는 없지만, 푸코의 <광기의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향수>의 그르누이가 그렇게 냄새에 집착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이에 대해서는 쥐스킨트의 <향수>에 간략한 리뷰를 단 적이 있다..)

냄새는 어떤 탈시간적 시간, 후각, 상상력, 즉각성이라는 준엄하고 억눌린 법칙을 따르는 시간을 위한 영토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점유possession하며, 배석자들과 배우들을 ‘점령’occupation한다. 냄새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2차원의 물체들을 우리가 들어가 있는 3차원의 공간으로 바꿔놓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공간이 언어나 몸짓으로 묘사되기 이전에, 일련의 스펙터클이 최초의 ‘마법’을 보여주거나 확장시키기 이전에 후각적 인상들이 그 공간을 공간으로 인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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