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 손창섭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2
손창섭 지음, 조현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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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한국 전후문학의 놀라운 성취..

비평가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린다면, "손창섭은 <비오는 날>이라는 작품 하나만으로도 전후 작가로서의 존재 의의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음.. 과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소설의 첫구절을 읽은 이후로, 장마철이 되면 가끔씩 그 빗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 이미지는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적어도 내게 <비오는 날>은 50년대 한국 사회의 원풍경을 시각적으로, 또 청각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쟁과 학살이 초래한 파국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부패하고 타락한 전후 한국의 심부를 도려내는 듯이 보여준다. 그것은 벤야민이 거쳐갔던 <멜랑콜리>의 위대한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작가가 아닌 생활자로서 손창섭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손창섭은 멜랑콜리의 검은 구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4.19, 5.16, 그리고 욕망이 약동하는 60년대로 진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는 최인훈과 김승옥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잉여인간>은 어쩌면 심연으로 빠지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 준비한 동앗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동앗줄은 손창섭의 음물함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끊어졌다.. 그것이 저 빈약한 한국문학사에서 커다란 손실인지 아니지 평가할 능력 같은 것은 내게 없다..

 

하지만, 화창한 초여름 주말 오후 그의 소설집을 다시 꺼내 읽노라니, 그가 그려낸 그 황량한 전후 한국사회의 풍경, 좀비들의 세계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가라앉은 자들>, <메두사의 머리를 보아버린 자들>의 세계다.. 이러한 네크로필리아적인 세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다시 서로를 사랑하고, 또 욕망하면서 <사회>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지금 우리 사회의 가식들을 한꺼풀 벗겨내면 바로 <인간동물원초>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元求에게는 으레 東旭과 그의 여동생 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東旭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元求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元求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東旭과 東玉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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