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르, 뚜르 -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0
한윤섭 지음, 김진화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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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대체로 반갑습니다. 외국을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외국에서 외국인이 한국인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기분이 어떻든가요? 아마 일본이나 중국인이냐고 질문을 받을 때가 더 많았을테죠. 만약 누군가가 한국인이냐고 물어보았는데 한국인인 저는 그 사실이 몹시도 부끄러웠다면 그건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런데 만약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사연이 있었다면 그건 더 슬픈 이야기 아닐까요. 여기 같은 민족이면서 한명은 일본인, 한명은 한국인인 두 소년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프랑스어로 같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나라말로 친구가 되었을까요...

저는 세상에서 맨 처음 이별이라는 슬픔을 피부로 체감한 그날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바로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오면서 친구들과 헤어진 그날이었어요. 그때 나누었던 동심의 순정이라는 것이 이젠 기억하고 싶어도 막연한 그리움으로만 남은 나이가 되었지만 오늘 잠시 두 친구들 덕에 어른임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상 어느 나라에 살건 나는 한국인이지만 같은 민족일지라도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어른이 된 것, 그리고 한국인이 된 것, 그럼으로 한국의 어른이 되 버린 것이 많이도 슬펐습니다. 이 작품을 만나는 한국의 어른들은 저처럼 서러운 그리움에 복받칠 것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많은 것이 미안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누군가 몹시도 미웠습니다. 우리 민족은 언제쯤이면 모두 온전한 한국인으로서 세상 어느 나라에도 보란 듯이 자랑스러워 질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오기는 할까요....? 

 

              

                                                     <한윤섭 글, 김진화 그림 / 본문 삽화 중에서>


어른이 어린이 동화를 읽고 눈물을 훔친다면 철이 덜든 탓인지 철이 든 탓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오늘 이런 감정을 자신의 소중한 기억과 만나게 한 작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최근에 우리 어른들만의 작품을 읽고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진 적이 없었기에 저는 작가가 유학할 때 살았다는 프랑스의 도시 뚜르가 애꿎게도 그리워 지더군요.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관광엽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성아래 위치한 마을과 은빛 강물, 그리고 집을 비추던 달빛까지 너무나 낭만적인 그곳에서 시작된 동화속 이야기가 적어도 거짓말 같았다면 그래서 저 먼 곳 지구 반대편 다른 나라의 훈훈한 이야기로만 느껴졌다면 좋았을텐데요. 어쩌면 우리 처한 현실이라는 지금과 이곳이 참으로 거짓말 같기 때문에 누구나 다 아는 오랜 거짓 하나쯤은 부러 꺼내어 확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요? 우린 항상 바쁘고 열심인데 '민족'이나 '분단' 혹은 조금 더 분명한 '북한'이라는 실존적 명제는 이제 지난 세대의 아픈 역사이거나 다음세대와는 거리가 먼 미래인 걸까요? 전쟁이나 이산가족, 북한 문제는 적어도 우리 다음 세대까진 이어지지 않을 자연스레 소실될 사회적 현상일 뿐일까요...이 무겁고도 외면하고픈 주제를 프랑스라는 제 3의 장소에서 따스한 동화로 옷을 입힌 작가의 깊은 마음에 고개를 숙여봅니다. 


 
  < 프랑스 뚜르의 언덕위에 위치한 쉬농성과 그아래 마을, 루아르강의 정경 >


 


<봉주르, 뚜르> 의 배경이 된 도시를 그려봅니다. 옛날 프랑스 왕족들이 너도나도 성을 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성관광지가 되었지요. 작가는 뚜르의 고성지대 아래 회색빛 지붕이 올망졸망한 예쁜 주택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이라는 루아르 강물을 바라보며 오래된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요. 저는 언젠가 파리의 세느강을 바라보며 우리의 한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옹색한 물줄기와 또 우리의 한강다리에는 반절도 훨씬 못 미치는 퐁네프 다리를 확인하고 얼마나 실망을 했던지요. 적어도 파리의 세느강을 목격하고 지하철을 한번이라도 타본 분들은 우리의 한강과 지하철이 얼마나 대단한 결과였는지(물론 규모와 청결면에서만요....)우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답니다. 유학생이 아닌 그 누구라도 다행히 세느강이 아닌 루아르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침실을 비추던 별빛과 달빛에 젖어보았다면 오래된 그리움...혹은 타지에서의 외로움이 더 사무치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렇게 매일 비추던 달빛에 이 작품의 주인공 봉주는 자신의 방 책상 모서리에 적힌 낯익은 글씨를 발견한답니다. "사랑하는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그리고 한뼘 떨어진 곳에 마치 답장이도 되는 듯 놓여있던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살아야 한다."


그만 한눈에 보아도 우린 저 낙서가 낙서만이 아닌 절실한 맹세이거나 혹은 소망이거나 아니면...유서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곤 이내 약속이나 한 듯이 반사적으로 우리의 조국과 우리의 가족...그리고 살고 있으면서도 살아야 한다고 적을 수 밖에 없는 아니 그렇게 적어가면서라도 꼭 살아있어야 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절실함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일 것임을 깨닫습니다. 프랑스어 인사말인 봉주르와 같은 이름의 봉주라는 똑똑한 우리의 아들이 이 낙서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습니다. 비록 이름은 프랑스 적이지만 머리에 노란물을 들이는 건 유럽이라는 염색약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다는 봉주가 아니던가요? 엄마와 벼룩시장에서도 일본말로 인사하는 상인에게 이곳에 사는 동양인은 모두 일본인이 아니라 말하는 코레앙이 아니던가요?

아...저는 작품속 봉주가 우리 한국인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언젠가 프랑스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하신 분이 같은 동양인이지만 자신은 베트남이나 일본인,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주려고 여기 한국에서보다 더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더 깔끔하게 하고 다녔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프랑스같은 유럽에선 자기네들이 보기에 한국이나 일본, 중국이 그저 같은 부류의 동양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고 우리 한국인들은 누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굳이 일본인과 중국인과는 다르다는 걸(무엇이 되었건)밝히고 그것을 인정 받고 싶어 한다고 말입니다. 아마 그것은 우리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조금은 달라져 있을거라 믿지만 애국을 강요당한 우리 세대들은 문화적 우월감이 하늘을 찌를 듯한 프랑스 하늘에 우린 굳이 자랑스런 한국인이라 말하고 싶네요. 어떤가요? 한국이라는 나라의 아픈 과거를 실감하지 못하는 봉주에게도 그 핏줄이 이어졌을 것이겠죠? 그전에 바라보지 않았던 달님이지만 열 두살, 프랑스에서 보는 첫달이 비추던 조국과 민족, 삶에 대한 강렬한 문구가 자신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일 것이라 어렴풋이 감지 했겠죠?

봉주가 낙서아닌 밀서를 발견한 후 그 비밀을 좇아가는 그리고 마침내 비밀이 추억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오래된 강물이 흘러가듯 잔잔히 펼쳐집니다. 낙서아닌 밀서의 주인공을 찾아가는 봉주의 여정이 속상하게도 많이 현실적입니다. 유럽에서 동양인을 바라보는 시각, 외국에서 우리가 일본인을 이야기 하는 속마음,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이슬람권 민족을 바라보는 시선, 같은 민족이지만 남한인으로서 북한인을 바라보는 태도...봉주와 친구들을 비롯한 등장인물간의 대화 속에서 작가가 프랑스에서 살면서 접해본 많은 일상들을 어렵지 않게 겹쳐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덮고 호기심에서 비롯된 '낙서의 주인공 찾기'가 우리 조국과 우리 민족, 결국은 우리의 삶에 대한 위치 찾기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자기가 태어난 나라, 부모의 나라'인 조국은 같으나 '통치권이 미치는 집단'인 국가는 달랐던 토시와 봉주의 우정이 그들이 성장함과 같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은 한국의 발전이자 한국인의 성장이자 한국문제의 미래일 것입니다. 이 작품은 동화로서 가질 수 있는 문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분단된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 분단되지 않은 외국에서 남한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게 함과 동시에 우리 윗세대들이 겪었고 우리 세대가 외면한 분단이라는 현실이 우리 다음세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교훈이 아닌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려내었다는 점에서 감동의 박수를 보내고자 합니다. 



              < 토시네의 일본 식당이 자리했다는 플뤼므로 광장의 노천 카페 >



                  <회색빛 지붕과 베이지색 주택들로 이루어진 뚜르의 마을 풍경>


이제 우린, 프랑스로 여행을 간다면 굳이 고성여행을 핑계로 뚜르를 방문할 지 모르겠군요. 루아르 강변을 산책하며 공원과 광장에 들러 슬며시 외국인으로서의 감상에 젖어 있을 즈음 누군가 한국인이냐고 물어온다면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파리의 세느강 보다는 이곳 루아르 강을 더 좋아한다'고 말해보고 싶은데요. 그때 그들이 이미 우리에게 북한에서 인지 남한에서 인지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고성여행이 더 뜻 깊을 것 같습니다. 우린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인사할지 모르겠어요, '봉주르, 뚜르 !!' 우리도 여기보다 멋진 한강이 있어, 그치만 오늘은 이곳 뚜르가 최고야! 우리에겐 소중한 추억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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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7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사람님의 글을 읽게 되면 감성이 자극되는거 같고
읽고난 뒤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뭐라고 해야 되나..^^;;
마음이 짠하면서도 애틋한 여운이 강하게 남습니다.
조금 있으면 야간 일하러 가야하는데
하루가 끝나가는 즈음에 이런 멋진 글 한 편 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ㅎㅎ
입에 발린 소리로 보실지도 모르겠지만 진심이랍니다ㅎㅎ
좋은 글, 멋진 사진들 잘 봤습니다^^ㅋ

한사람 2010-10-07 23:28   좋아요 0 | URL

글을 쓰시는 분들은 남의 글 밑에다가
절대로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걸 잘 압니다..
아예 침묵하거나..하게되면 거짓을 말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요^^

cyrus 님의 덧글이야 말로 잔하게 여운이 남는걸요~
아마도 아예 서평 쓸때 제마음에 남지 않았던 책들은 웬만해선(의무가 있는 책을 제외하고)
평을 안하기 때문인거 같습니다..

하루가 끝나갈 시점에 이런 칭찬..정말 감사해요 !!

해라 2010-10-15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 님:) 추천 꾸욱!!!^^

한사람 2010-10-15 10:53   좋아요 0 | URL

해라님 ~~~~~
반가워요 !!!!
 
굿 바이 - 다자이 오사무 단편선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박연정 외 옮김 / 예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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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짜피 저 세상 사람들이지만 돌아가는 방법이 자살이었던 작가의 글은 마침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읽을 경우엔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자살한 작가들은 거의 유서 쓰듯 작품을 집필한다고 생각하기에 실은 유서를 읽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문학이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문학이 죽음으로 이끄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평범한 독자인 내가 이해하기엔 여전히 힘겨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궁금했다. 혹시나 마지막 작품을 읽으면 혼자만 안고 갔을지 모를 연유에 가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한가닥 실마리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전혜린의 글을 읽고 이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었겠구나...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다자이 오사무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굿바이』를 덮고 난 지금 이 사람은 죽는 것이 더 나을 수 도 있었겠다는 공감과 연민으로 가득하다. 이번 소설집은 그가 작품을 발표한 시간 순에 따라 총 여섯 편을 모아 구성한 것이었는데 여섯 편이 모두 집필 당시마다 죽음을 늘 예견하고 있던 사람이 마치 죽음의 이유를 찾고 정당화하는 작업의 결과물로 느껴졌다. 각 편 마다의 무게감이 막중하여 십대의 유서, 이십대, 삼십대의 유서를 차례로 확인한 것 같은 서글픔은 이 작품집의 집요한 의도인 것일까. 무르익어 가는 가을과 함께 가슴깊이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살을 정당화했고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권장했으며 카프카는 자살로 해방을 얻을 수 있다했으며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자살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그러했으니까.

 ...자의식의 역행


  - 비교적 젊은 시절의 고흐 자화상-

다자이 오사무는 그야말로 시골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나 식사를 할 때 하녀가 옆에서 부채로 더위를 식혀주는 귀족생활을 해온 왕자님이었다. 7남 4녀 중 10번째이면서 아들로는 여섯 번째 였으니 30명이 넘었던 대가족 집안에서는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남동생과 함께 가장 막내격 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14살에 작고하고 유모의 젖이나 숙모의 가슴을 만지며 자란 것으로 보아 부모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잘난 형과 누나가 많았던 덕에 그들로부터 극심한 열등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얼굴이나 신체등 외모컴플렉스도 심했다고 한다. 자살한 일본 작가들이 어린 시절 모성이나 부성이 부재한 경험과 성장하면서 병약한 신체를 지니게 된 점은 이제 하나의 공식과도 같아 보인다. 정서적 불안감은 곧 신체적 나약함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다시 정신적 문제로 확산되는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문학은 구원이 아닌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거나 결국 유혹이나 협력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이들의 순로였다는 것을 그를 보며 다시 한번 인정해야 했었다.

청소년 시절까지의 가족관계와 고향에서의 추억을 서술해낸 <추억>은 오사무가 자의식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유년시절부터 바깥의 세상과 대립하며 자신이 느끼는 자아에 대해 그 나이답지 않게(필요이상으로) 생각이 많았던 것으로 보였다. 부모와의 거리는 소원했다 해도 당시 집안환경이나 교육조건, 주변 인물들로 보아 얼마든지 활달하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적어도 청년기까지는) 스스로에 대한 요구치가 지나치게 높아 자신을 반성하거나 다그치는 시간들이 혼자 있는 시간의 주를 이룬 것은 다분히 타고난 기질적 요인에 있었다고 느껴진다. 오사무는 자신의 천성적인 나약함과 평생을 투쟁해 왔다고 생각되며 어쩌면 그 나약함을 이기려고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사무는 부모님과의 기억은 없었지만 막내 동생, 숙모, 하녀들과는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며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낡은 앨범속의 빛바랜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예닐곱 살에는 책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던 하녀로부터 방화범, 거짓말, 지옥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대해 편향적인 이야기를 듣고 미신적인 공포를 체험한다. 소학교에서 글짓기에 진실을 담아 쓰면 결과가 좋지 않고 거짓을 쓰거나 표절을 하면 항상 칭찬을 받았던 경험은 많은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실제 일상에서도 솔직하게 진실을 전해야 하는 것과 남들이 좋아할 거짓을 선택하는 것 사이에서 혼란스런 학창시절을 보낸다. 형제들 중에서도 잘생긴 형이나 동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처럼 못생긴 누나와는 애틋했으며 어릴 때부터 병약했기에 옷차림과 자세, 이마와 머리모양, 건강과 피부색깔에 관한 남들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열등감과 자존심 때문에 공부했으며 관심있는 여자에게는 절대로 먼저 접근하지 않는 소극성을 우월감으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굳어지며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없었던 공허한 몸부림은 창작이라는 도피로 이어지며 사실상 그때부터 작가라는 외로운 길을 걸었다고 보여진다. <추억>의 마지막은 자신이 짝사랑하던 고향집의 하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자 그녀와 어머니, 숙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숙모와 닮은 하녀를 발견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수록작인 <추억>을 읽으면서 하찮은 멸시를 받으면 죽어버리려 결심했다고 하는 그의 극단을 꽤 어린 시절부터 접하고는 결국 자살은 인간관계에서 혼자 연민하고 혼자 판단하며 혼자 결론짓는 삶의 습관을 형성해온 자의식의 과잉때문 이었다는 것을 일찌감치 감지 할 수 있었다.

제 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 될 뻔 하였던 <역행>이라는 작품 역시 젊은 시절의 팽창된 자의식의 흐름을 시간의 역순을 따라 보여주며 독특한 서사를 선보였다. 만약 이 작품이 차석이 아닌 1등의 수상을 했다면 어떠하였을까. <추억>과 <역행>은 이미 두 번의 자살을 기도하고 반제국주의 학생운동을 하다 자수와 함께 완전히 발을 뺀 직후에 쓰여진 작품들이었다. 특히나 동반자살에서 카페 호스티스는 죽었고 자수역시 그의 죄책감을 극대화하는 상처였을 것인데 그 시기에 자신이 우상으로 여기던 작가의 이름으로 제정된 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면 얼마간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마땅한 전환점을 찾지 못한 오사무는 그 이후에도 같은 상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며 자신의 문학적 행로에 있어 아쿠타가와상에 대한 의미를 세상과의 화해로 생각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은 있어 보이나 사생활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심사평은 그를 더욱 세상과 단절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끝내 상을 수상하지 못한 오사무에게 자살에 대한 정당성을 굳히는 문학적 테러였다고 생각된다. 

<역행>은 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물다섯을 넘긴 노인의 임종을 묘사한 '나비'를 시작으로 도쿄대 학생으로서 시험을 치는 날의 풍경과 식당에서의 에피소드를 그린 '도적', 술집에서 농사꾼 남자를 무시하다 결투까지 하게 된 '결투', 마을을 방문한 곡마단에서 재주를 부리던 검둥이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동일시 해보던 소년의 추억을 그린 '검둥이'의 짧은 이야기가 단편속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야기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역행>이라는 묶음만 없었다면 연결고리가 없는 개별적인 작품으로도 인식될 수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동인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음이다. 네 가지 이야기를 공통으로 관통하던 감정은 자신을 향하던 지독한 냉소였다. 그다지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소한 생각과 행동들에 쉽게 상처 받고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 결국 화살을 자신에게 쏘고 마는 결말은 청춘이 가지는 자기파괴의 특권이라 생각하기엔 그 골이 너무 깊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긴 생애에서 거짓이 아닌 것은 태어남과 죽음, 단 두가지 뿐이라는 그의 결론은 너무 완벽해 보여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음이다.

자의식은 내면을 향한 냉철한 의식이지만 자의식에만 빠질 경우 외부와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과 그로인한 병적인 망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오사무는 그토록 과잉된 자의식 속에서도 자신을 가치있는 인간으로 인식하는 자각은 평생 해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인 오사무는 절망으로 막을 내렸지만 문인 오사무는 바로 청춘의 '분열과 팽창'을 상징하는 문학의 희망으로 남았다. 오사무가 일본문단에서 작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했을 젊은 시기의 글들을 보면서 아마도 다음 세대의 일본 작가들은 오사무의 청춘의 분열과 팽창을 자신의 질료로 삼아 작가적 소양을 갖추어 나간 문인들이 많았을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폐허의 기억


  -공허한 심연이 표현된 고흐의 자화상-

오사무의 작품 이력에서 커다란 계기가 되는 역사적 사건은 태평양전쟁과 그 패배였다. 이 작품에 실린 <망치소리>와 <아침>은 전쟁 패배 직후(1947)에 집필, 발표된 작품들이었다. 문단 초창기 이후 또 한번의 동반자살기도도 있었지만 모친은 별세하고 자신은 오랜 병마와 싸우면서 청춘의 열정을 거의 소진한 상태라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앞선 <추억>과 <역행>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날카롭고 예민한 감정상태보다는 슬프고 무의미한 자신의 감각을 나지막히 읊조리는 듯한 분위기는 전후에 폭격으로 소실된 자신의 고향집을 연상케 하며 점차 죽음의 그림자가 더 크고 더 깊게 드리워져 가고 있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망치소리>는 스물 여섯 살의 청년이 어느 소설가에게 자신의 고민을 고백하는 내용의 편지글이다. 화자는 태평양 전쟁에 참여해 일본이 항복한 후 고향에 돌아와 우체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평범한 젊은이였지만 군대에 있을 당시 전쟁의 패전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과 해산을 명하는 상사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시점에 쇠망치 소리를 동시에 들었던 기억을 무의식에 저장해둔 '상처 입은 청춘'이었다. 비장하거나 엄숙하지 않고 차분해지던 그때의 충격은 그 이후로 화자가 생의 열정을 감지 할 순간마다 여지없이 의식을 두드리며 찬물을 끼얹는 '탕탕탕'의 불청객이 되고 만다. 화자는 이 환청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자신의 고민거리를 소설가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망치 소리는 일, 사랑, 인간관계 모두를 잠식하며 결국엔 '허무의 열정'마저 무너뜨려 자신마저도 지각할 수 없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외상증후군이었다. 작품자체는 소개된 어느 작품보다도 매끄럽고 감상적이었지만 만약 현실에서도 비슷한 환청에 시달린다면 더 이상 삶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으로 무의미한 현실을 견뎌내는 반복된 습관으로도 인식되었다.

<아침>은 수록된 작품 중에서 가장 짧은 분량의 소설로 작가로 보이는 화자가 집중을 위해 마련한 비밀사무실에서의 일상을 촛불과 교차시키며 자신의 심리를 전달한다. 비밀사무실에는 애인도 연인도 아닌 친분이 있는 여성이 살고 있고 나는 만취한 상태에서 그녀와 같은 하룻밤을 지내게 되지만 촛불을 밝히고 그 촛불이 꺼질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시각각 촛불이라는 소품에 자신의 시선과 심리를 투영시키며 불꽃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대화의 기운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촛불이 꺼지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각오를 다져보지만 다짐과 동시에 그만 아침이 되어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촛불이 켜져 있을 동안만 열정이 불살랐으며 그 열정을 실천하려 함과 동시에 촛불이 사라지고 어둠이 사라지는 것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결론일 것이다. 촛불이 꺼진 것은 아쉽지만 더 이상 번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볼 수 있고 죽음이 아침인 것은 곧 절망만이 희망인 것을 의미하기에 이 역시 반복되어온 오사무의 일상적 고뇌를 일상의 편린으로 표현하였다는 생각이다. <망치소리>와 <아침> 두 작품은 전후 폐허가 된 일본사회에서 심리적으로 그 어떠한 열정도 다시 불태우기 쉽지 않았던 오사무의 절망을 직접, 간접적으로 드러내었기에 그 안타까움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고백과 농담


- 자학과 조롱으로 연민에 호소하는 자화상-
 
 

이번 소설집에서 (모두 솔직하지만)특히 오사무의 가공없는 솔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작품은 <내 반생을 말하다>였다. 그런 면에서 <굿바이>는 평소에 자신이 잘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아마도 죽기 전에 한번 세상을 향해 웃기는 소리를 내뱉고 가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작품은 모두 오사무가 다섯 번째 자살시도에서 드디어 성공하기 바로 직전에 쓰여졌고 <내 반생을 말하다>는 거의 직접적인 유서로 보아도 무방해 보였음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그동안 자신이 세상에 적응 할 수 없었던 이유들을 고이 정리하여 '나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세상과 이별하고 싶었고 나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사람들로부터 잘난 체 한다는 비난으로 돌아왔고 문학에 입문하게 된 것은 어떤 큰 뜻을 품고 이룬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들판 한가운데 서게 되었고 안톤 체홉, 푸시킨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좋아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괴짜로 부르기에 도덕적이지 않다고 오해를 하지만 실은 기독교적인 삶의 태도, 프롤레타리아 적인 의식으로 무장된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싫어하면서 학대하는 것은 곧 상대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살할 수밖에 없는 태도임을 깨달았다...그래서 술을 마셨고 가정은 파탄이나 빈곤함을 면치 못하고 결국 처자식을 부양하기엔 너무나 형편없어 죽어야만 할 것 같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 그의 반생...에 대한 고백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많은 이유를 열거하는 반성문과도 같았음이다. 그런데 아직 나의 전생이 아닌 반생인 것을 보면 죽음을 결심하지는 않은 단계로도 보였다. 실은 그것조차 남은 반생에 살짝 유보한 상태였겠지만 이야기적으로 죽어야 할 이유는 참으로 마땅해 보였기에 그 역시 아무런 토를 달수 없는 글이었다. 그는 왜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고민하며 글을 남기지 않았던가.

완성을 다 하지 못한 <굿바이>라는 유작은 완성을 하지 않은 사실 자체가 그 작품의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이 작품을 집어들 때 신문에 연재분을 넘겨놓고 자살 무대로 달려가는 그의 심리가 퍽이나 궁금했다. 몇 회만 더 작성하면 마무리를 볼 수 있었는데 완벽주의자였던 오사무가 자살하는 마음 한 켠에 미완의 원고를 남겨두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보였기 때문이다. 그 많던 정부들과 소설속이긴 하지만 헤어지기 미안했던 것일까. 주인공은 그동안 큰 의미없이 만남을 지속해오던 정부들과 어느날 갑자기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이별통보를 위해 '까마귀소리'라는 비현실적 캐릭터를 앞세운다. '까마귀소리'라는 여성과 정부를 한명 한명 찾아가기까지의 농담 따먹기와 찾아간 순간의 웃긴 상황, 어설픈 이별을 하고 난 뒤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또 다음 정부를 찾아가는 서사가 핵심인 이 작품은 사실은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과의 불공평한 인연을 정리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마음약한 자신에 대한 대단히 웃긴 조롱으로 느껴졌다. 그 작품을 마무리 한다는 것은 아마도 작가로서 상당한 만족감을 주었을텐데, 작가는 그러한 상황을 예견했는지 행운이나 열정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던 것으로 해석된다. 어짜피 다시 열정을 느껴보아야 그것을 채 느껴버리기도 전에 다시 사그라들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아예 모든 희망과 절망조차 미리 차단해버리는 심리는 우울증의 핵심이다.

결국 자신이 답습해온 삶의 패턴대로 여인과 투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에 대한 벌이었을까. 더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동반자살의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나머지 여성들이었다. 실제로 오사무의 자살기도로 세명 중 두명의 여성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수면제로 혼자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투신할 땐 여성과 함께였고 그들은 모두 화류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이었다. 즉, 그들 역시 앞날이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았을 것이고 오사무의 심리적 상태를 인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라면서 모성부재와 부성공포로 상처입은 오사무의 저 심연 밑바닥엔 여성과 살아서 이루지 못할 사랑을 죽어서 이루자는 취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남과 같은 모성의 품안에서 자유롭게 바다로 뛰어 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다시 탄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가장 대표작인 <인간실격>을 아직 접해보지 못했기에 욕심이 생긴다. 여섯 개의 단편이었지만 솔직하고 섬세한 문체와 함께 끊임없는 자의식에 대한 질책이 의도적인 은유로 반복되는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적 독창성은 은근한 중독성을 가공한다는 결론이다. 많이 울어야 할 것 같지만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 낸 다음 글로 담아낸 물기 없는 눈물의 미학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그가 자살한 덕에 누리는 행운일 수도 있겠다. 문학은 공급자의 처절한 입장과는 별도로 그것을 취하는 대상에게는 턱없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준 작품이었다. 그가 몸을 던진 바다가 문학의 바다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굿바이...지금, 여기 보단 조금은 더 좋은 곳이길 바래 본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화상-
.
. 

 오사무의 자화상을 보면서
자화상을 그린 고흐가 계속해서 중첩되었다. 
시대와 분야는 달랐지만 자살로 이른 두 예술가를 향한 서글픈 공감만은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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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5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과 고흐의 그림의 만남이라,,,
시대는 다르더라도 그들이 겪었던(아니면 견뎌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 묘하게 어울리네요. 사실 저도 오사무의 독특한 생애만 알고 있을 뿐이지
아직은 그의 작품은 접하지 못했답니다. 저도 <인간 실격> 읽어봐야겠군요^^
오늘 하루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

한사람 2010-10-05 22:12   좋아요 0 | URL

cyrus님은 <인간실격>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한데요?
다자이 오사무는 독자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지는 않는 작가인듯 합니다^^


2010-10-06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6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동 종료] 7기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1.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2. 이슬람 정육점
3. 쓰리
4. 죽음 이외에는
5. 가미가제 독고다이
6. 바이퍼케이션
7. 카르마
8.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
9. 독고준
10.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
11.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 막는가
12. 불안의 황홀
13. 사랑, 마음을 내려놓다  

문학 B조인 제가 평가를 담당했던 작품은 모두 13작품 이었습니다. 제일먼저 도착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상당했던 책 두께가 기억나는군요^^ <이슬람 정육점>,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 <가미가제 독고다이>는 나름대로 완성도가 높았다고 생각됩니다. 여름엔 추리장르로 색다른 독서를 할 수 있었구요. 후반기에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 막는가>와 <불안의 황홀> 역시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서 색다른 주제와 형식에 독서의 만족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1. 신간평가단 활동 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그런데, 제 경운...그 중에서 불시에 선착순으로 모집하신 <바이퍼케이션>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덕분에 이우혁이라는 작가도 알게 되었고 책자체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고, 또 서평도 한여름의 열대야를 이겨가면서 끙끙 대었기에 많이 기억에 남네요...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한 제 서평중에서도 제일 공들여 썼던 것 같습니다. 그 세권을 독파하고 서평을 쓰고나니 여름이 물러 가 있었죠...
<바이퍼케이션>은 이번 여름을 견디게 해준 일등공신입니다. 우연이 필연을 능가하는 행운이 된 셈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 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1.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

표절에 관한 추억이 많아서 그랬는지 저는 이 책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김도언 작가의 서정적 문체도 인상적이었구요.
어린시절 원고지와 손에 쥔 연필이 한참 동안 떠오르더군요
더불어 강원도 평창의 아름다운 겨울풍경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2. 이슬람 정육점 

장르는 청소년 문학에 가까운데 시종일관 진중한 주제를 배치시키는
작가의 능숙하면서 도 고집스런 문학적 성향을 엿보았습니다.
마지막 결말부의 감동까지 대단한 클라이막스가 없다는 것이
옥의 티만큼만 아쉬웠습니다.


 
3. 불안의 황홀
 
뜻밖의 수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기문학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었고
솔직하고 유려한 문장에 많은 매력을 느꼈습니다.
커피이든, 술이든 무엇이든 한잔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4. 바이퍼케이션
 
독서의 쾌감면에서는 최고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많은 부분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제 자신에게도
얼마간은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반입니다.
(평가단이 아니었다면 스스로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책입니다^^*)

 


5. 가미가제 독고다이

작가의 천연덕스러운 문체와 걸쭉한 구절에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무거운 주제였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웅숭깊은 감동을 전해주었기에
오래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전작이 너무 관심을 받은 탓인지 평가는 야속하게 받은 것  
같더군요...전작을 읽어보지 않은 저로서는 문학사적인 의미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좋은책이라 하셨기에...제 주관이긴 하지만 문학적인 작품성과 문단 및 독자들의 평가를 완전히 배제하기 힘드네요^^
그러고 보니 모두 한국작가들의 작품이구요. 그래도 제 맘대로 베스트를 뽑으라는 운좋은 기회를 부여받았으니 저렇게 정리하겠습니다.


3. 신간평가단 도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소설가는 삶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게 아니고, 삶에 대한 자신의 오해를 정당화하려고 소설을 쓴다."

 

 

<불안의 황홀, 김도언> 에 나오는 한 구절 입니다. 김도언 작가는 일기에 시인과 소설가등 문학인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돌아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소설가의 한계와 자격에 대해 솔직한 시선을 남겨 두었습니다. 흔히들 작가가 세상의 이치와 도리를 훤히 꿰고 있어 그토록 격조높은 작품을 창작해 냈다고 생각하지만 통찰의 깊이는 작가의 자각의 결과가 아닌 작품의 자각의 결과 이며 그래서 대부분 작가는 훌륭한 작품보다 훌륭하지 않다는 것이라는 그의 글이 너무나 뇌리에 남았습니다. 실제로 서평을 쓰면서도 실은 작품을 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쓰면서 이해하게 되는 제 자신을 발견한 적이 많았기에 저는 저 구절을 노트 한 귀퉁이에 적어 두었습니다. 작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오해를 정당화 하기 위해 무엇이든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서평단 역시 작품에 대한 다양한 오해를 이해하기 위해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평단을 하면서 평소 제 취향과는 전혀 다른 책들을 접해볼 수 있었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많은 성취감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좋은 책으로 다양한 기회를 골고루 나누어 주려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8기에선 더욱 발전 된 모습으로 활동하길 바랍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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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5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5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6 0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6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0-05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7기 신간도서 평가단 활동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마음님이 속한 B조의 도서들을 보니 정말 읽어볼 만한 책들이 많았네요ㅎㅎ
(한사람님은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활동도 7기 버금가는 독서와 멋진 글을 쓰실거라고 믿습니다^^ㅋ

한사람 2010-10-05 22:14   좋아요 0 | URL

수고는요~ 행운이었죠 뭐
도서는 다 좋았던거 같습니다..
다만..수급시기가 너무 들쑥 날쑥 해서..
이번엔 좀 체계적이었음 좋겠어요~
저도 cyrus님의 인문분야 활동을 기대합니다
 
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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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마을에 아담하고 오래된 간이역이 있었다. 하지만 더 새롭고 더 빠르게 변한 세상은 열차의 크기를 줄이고 말았다. 조금 더 있다가는 노선이 사라지고 할 수 없이 역무원도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역사 驛舍도 사라졌다. 이제 驛舍를 지나온 이별의 歷史마저 사라지는 것일까. 이별했다고 만났던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듯, 驛舍가 사라졌다고 기차가 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기, 이별하러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차를 타고 왔다가 기차를 타고 떠났을 것이다.

나는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영화나 미술보다 훨씬 소심하다. 덜커덕 선입견으로 작품을 집어 든다든지 서점에서 몇 장 넘겨보고 그 첫인상만으로 계산대로 달려가진 않는 편이다. 적어도 내 의지로 선택할 땐 어쩐지 늘 책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자신이 없다. 지인들이 추천하거나 나와 성향이 비슷한(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내 주관을 의지하고 싶은 것이다.(그러니 편향적일 수 밖에) 그런데 가끔가다 소설의 제목이 시집같다거나 시집의 제목이 소설같으면 본능적으로 끌린다. 혹시 낚일지 몰라도 본능을 따르고 만다. 『이별하는 골짜기』는 바로 그 우물쭈물하는 내 본능에 강력하게 호소했다. 문지 홈피에서 제목만 언뜻 보고 시집인 줄 알고 있다가 몇 개의 홍보기사에 "간이역처럼 스러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는 물론이고 김승옥, 이청준의 단아함과 절제를 계승했다고 하는 평가나 한마디로 "애잔함"...(애잔이라 했다)을 주장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애잔하고 싶었다. 애처롭고 애틋한 애잔이었겠지만 나는 애잔(사랑하는 나머지, 愛殘)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할 수 없이 愛殘에 만취했다. 이 소설은 사계절을 테마로 사람들의 사연을 한데 모았지만 나에게는 온 계절이 꼭 시월의 단풍, 낙엽의 거리로 느껴져 가을의 소설로 다가왔다. 내 본능은 가을이 필요했고, 가을은 문학을 손짓했던 것이다.

이별이다. 그들은 모두 이별했다. 아니 이별해야 했기에 실은 만난 것이다. 아니 이별할 줄 모르고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날 줄도 몰랐었던 것이다. 작가는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를 이별하는 골짜기(別於曲)로 불러 들여 한명마다 계절의 이름을 부여하고 이별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명의 남자는 간이역의 역무원으로, 두 명의 여자는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외지인으로 교차시켜 이들이 별어곡에 모이게 된 세월과 연유를 차근차근 꼽아 본다. 기차가 다가오면 마음이 달뜨고 기차가 멀어지면 마음이 허전하듯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을 시적 원근감으로 조율하는 작가의 운전이 어찌나 세심하고 서정적이던지 책을 덮을 때 마저 조심스레 마음을 내려놓았다. 간이역이라는 곳이 언제든 기차가 들어오고 떠날 것을 알기에 실은 만남이든 이별이든 기다림이 반 이상이고 기다림은 누구에게든 잠시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간이역에 잠시 쉬지 않고 이별하는 골짜기에 머무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혹 저마다 간절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결국, 이 작품을 '만남'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 들이고 싶었다. 어쩌면 가을에 누군가를 떠나 보내기 힘들었던 세상 모든 이의 추억이라 해도 좋다. 아직은 가을의 추억이 겨울의 기다림보다 애잔하니까...하지만 나는 애잔(사랑하는 나머지, 愛殘)하고 싶었으니까.


애틋한 이야기 - 시인, 언젠가는

시작은 '별어곡의 시인'이라 불리는 역무원 정동수라는 젊은이였다. 오래전에 울면서 본 일본영화 <철도원>을 떠올리며 하얀 눈으로 뒤덮인 시골 마을에서 역무원으로 평생 살아가는 남자의 사연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데...간이역과 시인이라...그는 생명의 축복과 계절의 환희를 느낄 줄 아는 청년이었다. 그는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노시인의 충고대로 노트에 아름다움을 적으며 상상력을 훈련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날마다 뭐든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을 천 가지만 찾아내봐." 

그런데 여자라곤 어머니와 외할머니 밖에 모르던 자신을 의지하던 다방 여종업원, 빨강머리 소녀가 뜻밖에 자살을 하고 길가에 버려진 병든 개는 주인을 찾아 헤메다가 결국 아스팔트에서 검붉게 발견된다. 여지껏 평범하게 자라왔다고 믿던 그는 책장에서 탄광촌의 어두운 역사와 마주하고 비로소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막연한 어두움은 눈앞의 두려움과 조우한 것이다. 그는 기차가 끊긴 시간에 제초제를 마셨다는 아들을 만나러 가기위해 눈물콧물로 유리창을 두드리던 노파를 보며 '시'는 '아름다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곧 우리네 삶이었고 곧 그의 삶일 것이었다. 도망치거나 외면해선 안 될 그 무엇이라는 청년의 눈물앞에 하얀 나비가 날아든다.
.
고요한 나비의 날개 짓이 슬픈 건 아름답기 때문일까. 하지만 청년은 슬퍼하지 않았다. 순진한 시골청년, 막내 역무원의 가슴에 날아 든 것은 그래도 품어야 할, 자신의 꿈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수십 마리의 흰나비는 날갯짓으로 힘차게 그를 응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는 슬프기도 아름답기도 한것-



애절한 이야기 - 기차여, 용서해요

"저 아저씨도 참 박복하시네요."

철도 공무원 생활 35년의 백전 노장 신태묵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가장 내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한 가지 일을 오래한 남자들을 보면,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것이 그다지 세상에서 알아주는 일이 아닌 경우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중첩되며 부질없는 그리움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하곤 한다. 신태묵은 피난길에서 혈육을 읽어버린 후 오랜 불면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환각과 고통의 날들을 매일 들이고 내보내는 기차로부터 위안을 받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업무중 실수로 한집안의 가장이자 대학진학의 꿈을 갖고 있던 수려한 용모의 젊은이를 치어 죽이게 되고 운명의 장난으로 그의 아내와 딸과는 역사에서 재회한다. 신태묵의 실수를 전혀 모르던 남자의 아내는 신태묵의 구애를 받아 들이고 행복을 약속한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비밀에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던 신태묵은 더욱 더 아내를 향한 집착과 소유욕으로 자신과 상대 모두를 파괴시키고 우연히 신태묵의 비밀을 알게 된 아내는 그만 자살을 하고 만다. 내 손으로 당신을 죽여 버릴 거라던 의붓딸의 절규와 반 실성한 듯 나비처럼 날아갈 거라는 딸의 노래가 한동안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 한 번도 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신태묵은 사위로부터 딸이 여섯 번째 유산 끝에 일곱 번째 드디어 아들을 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년기 이후 터지지 않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고 만다.
그는 역사 주변에 매년 꽃씨를 심던 따스한 사람이었고 술이 들어가면 정선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부르던 사람이었다. 일생동안 소중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잃는 것만이 익숙했던 그가 아는 단 한 가지 사랑법은 상대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일방적 '동화同化'였다. 눈앞이 캄캄해 질정도로 아득한 그의 눈물앞에 팔랑팔랑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 들었다. 평생 쇳물 같은 덩어리로 펄펄 끓기만 하던 그의 가슴이 봇물처럼 터져버리던 그날 그가 곱게 심은 꽃씨는 기쁨과 행복의 나비로 피어 난 것이리라. 그는 사람이 아닌 세상에 '동화同化'됨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물은 슬프기도 기쁘기도 한 것-



애통스런 이야기 - 할머니, 잘가요

작가가 가장 공을 들였다고 생각되는 '겨울이야기-귀로'는 전라도 구례가 고향인 전순례라는 70대 할머니의 차마 눈뜨고 보고 들을 수 없는 우리시대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작가는 어쩐 일인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장 길고도 가장 자세하게, 그리하여 더 이상 슬픔과 한탄과 분노에서 한 치도 도망칠 수 없을 때까지 우리를 쉬지 않고 몰아 붙였다. 50대의 조카와 우연히 마을에 흘러온 할머니는 늘 바퀴가 달린 가방을 질질 끌고 역사로 들어와 차표만 사고는 멍하니 기차를 바라만 보는 별어곡의 '가방할멈'이시었다. 꽃다운 열여섯의 나이에 만주 방직공장에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동네이장의 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청춘을 짓밟힌 그녀의 '위안부 체험기'는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다. 나치 수용소에서 처형된 유태인이거나 중국인 마루타의 이야기처럼 남의 나라 남의 불행이 아닌 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운 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어서 끝이 나주기를 기다리며 벌렁거리던 가슴을 꾹꾹 누르고 있어야 했으며 사실, 다른 이야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분량으로 정밀묘사 했어야 했는지 되묻고도 싶었다.

조금 더 짧았어도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작가는 적당한 지점에서 비극의 서사를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일까. 가방 할머니의 과거 스쳐온 이야기로 적당히 언급하기고 말기엔 스스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동안 분단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천착해온 작가이니 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모자르고 턱없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방할머니와 함께 위안부 생활을 했던 언니들과 동생의 죽음이 더 할 수 없이 애통하다. 일본군에게 영혼과 육체를 짓밟혀 가면서도 사랑하던 남자의 아이를 끝까지 지키려했던 마유미의 죽음은 거룩했다. 한명 한명 동료들이 가진 천조각을 모아 화장실 천정에 목 매달아 죽은 다케코의 죽음은 처연했다. 도피하지 못할 처지만큼 병세가 악화된 환자 유리코의 거품물린 죽음엔 피가 끓었다. 절벽 꼭대기에서 몸을 던진 사다코의 죽음은 차라리 탈출과도 같았다. 가난한 농사꾼의 장녀로 태어나 별명은 걸귀가 씐 '허천뱅이'였던 만큼 굶주린 식구들을 위해 입하나 덜어준, 가족과 시대의 희생자 전순례 할머니의 기구한 삶을 오래도록 잊지 말라는 통곡의 외침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을 듯 죽을 듯 기어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이유도 불행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저주받은 현실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만주벌판에서 구사일생으로 자신을 구해준 남자와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지만 연이어 터지는 한국전쟁은 그녀에게서 남편과 아이를 빼앗았고 십 수년 만에 밟은 고향땅에선 빨치산 동생 때문에 온가족이 비참하게 몰살당하고난 흉가만이 그녀를 반겨줄 뿐이었다. 아...순례할머니는 살아 남은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그녀에겐 자신만이 아는 목적지가 있을 터이다. 기어코 찾아야 할 어떤 것, 가 닿아야 하는 목적지.
그것이 아직 존재하는 한 그녀의 외출은 죽는 날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225p


그녀는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노란나비의 꿈을 꾸었다. 자살을 결심하고 강가로 들어갔을 때 마저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수천마리의 황금나비 아니었나. 그녀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은 지천으로 피던 산수유 꽃과 눈부시게 아름답던 노랑나비가 날아다니던 고향마을 그 언덕에 검정치마와 노랑저고리를 입고 있던 소녀,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할 그 소녀에게로 ...가 아니었을까.
 


- 피지 못한 꽃, 날아가지 못한 꿈 -



애처로운 이야기 - 손가락, 울지마요


마지막 이야기는 별어곡 맞은편에 어울리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한 빵집주인 '안경 쓴 말라깽이' 여자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무녀이었던 빵집 여주인은 늘 불행에 대한 자신의 육감을 절대적으로 믿어왔기에 이곳 역무원 정동수와의 만남이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음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산속에서 탈영병을 만나 그로부터 아내에게 편지를 부쳐줄 것, 자신을 보았다고 절대 말하지 말 것을 부탁받는다. 하지만 장교아버지를 둔 그녀는 탈영병과의 약속을 지키기에 너무 어렸고 그녀로부터 위치를 알게 된 군인들에게 포위된 탈영병은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의문을 늘 품고 있던 정동수의 진짜 아버지가 탈영병이라고 확신한 그녀는 어머니를 묻고 온 그에게 평생 숙원이던 속죄의 시간을 부여받고 드디어 자신을 옭아맨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탈영병을 가리키던 그녀의 손가락은 결국 사는 동안 자기 자신을 카리키며 지독히도 상처를 찔러대었던 것이다. 이제 그 손으로 탈영병이 쓴 편지를 불러내어 정동수에게 읽어주던 그녀의 굵은 눈물은 만남이 곧 이별이었던 간이역의 가장 아름다운 역사로 남게 되었다.

그녀에겐 생의 특별한 고비 마다 커다란 부채꼴 날개를 단 주홍색의 나비가 찾아든다. 그녀는 늘 그것이 불운과 위험의 징조라 생각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의 손을 내보일 수 있게 될까. 주홍색 불행이 아닌 주홍색 열정이었다면 틀림없이 손을 가리지 않으리라.  


-  다시, 생의 열정으로 -

별어곡이 1인 배치 간이역에서 무인역으로 격하된다는 소식은 마을 사람들을 역사라는 추억의 공간으로 모두 불러 모으게 되고 신태묵과 정동수를 비롯한 역무원들은 저마다 별어곡과의 만남과 이별을 가슴에 새겨 넣는 자리를 마련한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던 날 이들은 종무식과 송별회를 한 것이다. 비록 같은 날 이 땅의 수많은 역들이 무인 간이역으로 일제히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곳 간이역에서 얼마나 많은 이별과 만남을 치루어 내었는지, 그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났지만 그 곳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우리들은 그 만큼의 만남과 이별을 기억할 것이다. 마지막 근무자 동수가 별어곡을 떠날 때 떠오른 수천수만 마리의 나비들이 무수한 만남과 이별의 기억들인 것이다. 3월의 눈꽃처럼 하얗게 가슴에 내려앉은 이별하는 골짜기에서 였을 것이다.


오늘, 기차타고서


네 사람은 모두 별어곡에서 헤어졌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똑같이 누군가 꼭 만나야할 사람이 있었고, 꼭 만나야 할 그 무엇도 있었다. 별어곡 시인 정동수에겐 살아생전 비밀로 관철된 아버지에 대한 진실여부를 꼭 만나야만 했었다. 35년 철도역무원 신태묵씨는 죽은 아내에게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딸을 꼭 만나야 했었다. 위안부 전순례 할머니에게는 북으로 끌려간 남편 소달섭의 생사와 꼭 만나야 했었고 빵집주인 아주머니는 탈영병의 가족을 만나서 그의 마지막을 알려야 했었다.

이들 네 사람의 인연을 이끌고 운명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한 사건은 다름 아닌 한국 전쟁이었다. 이들은 모두 분단과 전쟁에 관한 직접, 간접의 상처를 품고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전쟁세대와 전후세대를 지나 전쟁과 무관하듯 살아가는 세대가 되고 있는 우리들은 결국 상처의 인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후세대 인 것이다. 사라져 가는 역사驛舍와 사라질 뻔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정적인 표현으로 애잔함을 선사한 작가의 '순수'를 향한 고집을 엿보았다.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올 것이다. 올 것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쓸쓸함을 알고 있는 행운이 반복의 상처를 뛰어 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겨울보다 봄보다 가을이 더 헤어지기 힘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언제나 헤어짐은 그 계절의 지금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가을이니 당연히 가을의 이별이 더 애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음 겨울에 느끼는 겨울이별은 가을보다 더 아플 것이리라.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사는 오늘은 언제나 내일보다 더 아프고 더 슬픈 것이다. 간이역은 어제와 내일을 이어주는 우리 슬픔과 실연을 잠시 놓아두는 곳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골짜기는 될 수 없었음이다. 우리 모두는 그 모두를 다시 짊어 들고 기차를 탄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가을을 떠나고픈 작품이었다. 단풍이라면 더 벅차지 않을까 싶다. 


겨울을 앞둔 나무들은 제 스스로 가지의 잎을 모조리 지워낸다. 잎과 가지에 물기를 남기면 추위에 금방 얼어붙고 말 터이기 때문이다. 한 올 집착도 미련도 남기지 말아야 함을, 어짜피 떠나보낼 것은 보내야 함을 나무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86p 


 
- 인생, 다시 짊어 지고 오르는 오늘의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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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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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억지로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우리 학교는 교양필수과목으로 누구나 수영을 이수해야만 다시는 수영을 안 할 수 있었다. 유난히도 물을 무서워했던 내가 별 수 없이 학점 때문에 혼자 수영장을 몰래 다닐 정도였다. 1.9m 풀에 다이빙으로 뛰어 들어 25m는 자유형으로, 다시 턴한 다음 25m는 배영으로 돌아오는 그 코스를 중간에 멈추지 않고 헤엄쳐 나온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요일마다 아무도 없는 동네수영장에 들러 나머지 연습을 했던 나...그런데 어느날 자유형도 겨우 10m를 이어갈까 말까하던 내가 우연히 둥둥 뜬 몸으로 나도 모르게 뒤로 물살을 가르게 된 그날, 나는 내 위에 펼쳐진 뜻밖의 세상을 보고 말았다. 물속에선 물안경을 끼고도 눈도 뜨지 못하던 내가 거짓말처럼 물위에 누워서 바라본 하늘은 내가 만나본 세상 중에 가장 넓고도 아름다웠다. 거기다가 내의지로 내 몸을 움직여 하늘을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은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세계를 잠시 넘어와 있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완벽하게 다른 세상이 온전한 지금의 세상이 되는 경험...나는 그때 교양과목을 가까스로 통과하면서 수영을 배운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통과하고 왔다는 안도감에 앞으로 또 다른 어떤 세상이 닥쳐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그때의 물, 아니 그때의 하늘 위를 떠다니듯 작품 속에서 다른 세상을 헤엄쳐 나오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홀린 듯 빠져 나와 버린 지금 나는 그 어떤 문학도 다른 세상을 만남에 있어 지금처럼 새롭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작품 속에 완전히 몰입해 있던 시간들이 물살을 가르고 하늘을 떠다닌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매순간 가득한 해방감을 느끼며 온정신과 육체가 다른 세상에 의지했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했다.  
     

이야기를 믿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집요하게 내 의식을 좇아다니던 단어는 '세계'라는 두 음절의 세계였다. 내 의식속의 '세계'란 '세계화' 캠페인 이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고착된 死語에 가까웠기에 점점 '세상'이라는 보다 현실적이고 자조적인 의미의 단어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 세계가 어디인지'를 집요하게 되묻고 있었다. 즉, 자신이 지금 바라보고 지각하는 세계가 진짜 현실세계 인지 혹시 잠시 다른 세계를 비집고 들어 온 것이라면 자신은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하는 궁극의 위치인식에 대한 질문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소설가가 차지하는 위치인식은 곧 작품 속 주인공들이 찾아가는 인물의 위치를 이끌 것이고 그것은 여지없이 독자의 인식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 물 흐르듯 당연해 보이는 문학의 이치가 그것이 깨달아지는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 본다면 과연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작품을 지나오면서 한 작가의 소중한 깨달음을 일종의 무위로 얻어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통렬한 자각과 고통 없이 단지 1Q84라는 열차에 무임승차 한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세상에 대한 이치를 짜릿하게 알아 채버린듯 한 승리감은 독자로서는 커다란 행운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가지는 문학적 성취나 작품성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내 몫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했기에 한마디 감사는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가 그 깨달음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비극인지 희극인지와는 상관없이)아름답지 못할 수도 있었던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마치 고통이 없는 안락사나 무통치료와 같은 처방전을 받아들고 그전에 느껴보지 못한 치료과정을 경험했다면 투병환자로선 천금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지 않겠는가. 깨우침에 대한 수월한 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문학적 성찰의 진수를 보여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커다란 깨달음을 관통하던 아주 견고한 그리고 촘촘한 하나의 응고된 덩어리로서 그 내재된 힘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에 대한 신뢰, 그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어도 온전히 동화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었다. 이 신뢰감은 하루키 작품에 대한 일종의 기시감이나 1,2권에 의한 선험적 학습효과일 수도 있고 이미 세계적 반열에 올라선 작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일 수도 있지만 1권 이후 거의 이야기에 내맡겨진 듯한 진지한 착각의 힘은 마치 마술사의 매직박스에 들어가 어떠한 칼이 들어와도 안전할 것을 믿는 여주인공이거나 머리위에 사과를 올려놓아도 정확하게 목표물을 명중시키고 말 아버지를 믿는 아들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 느낌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기에 그저 읽어보라고 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다는 것, 비슷한 다른 것을 설명하거나 비유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기에 아마도 설명한다고 해서 알아질 문제는 아니라는 것, 나는 이야기의 힘(magic)에 휘둘려진 독자로서 그 이야기가 이끄는 힘의 진원지를 찾고자 했다.

진원지에서 발견한 진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보편적인 깨달음이었다. 일본작가의 지극히 일본적인 그렇기에 극적이고 세계적인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작품이라는 결론을 얻고 말았다. (시기적으로 한참 후에 작품을 집어든)내게 이 작품을 강력히 권해준 지인은 평소 책을 속독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는 분량에 비해 의외로 빨리 넘어가던 페이지의 마술과 그 가속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어떠한 비논리도 논리성을 가지게 하는 의식의 흐름을 지배하는 문장구사력 덕분에 물 흐르듯 서사를 좇아가다 보면 이 소설이 지극히도 일본적인 당면문제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개인의 성찰을 방대하게 풀어 놓았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지 모른다. 물론, 독서의 즐거움이 우선시 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일본적 코드와 기호를 분석해가며 일일이 의미를 재해석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물 흐르듯 지나쳐 온 그 두껍던 책들을 세 권이나 덮고 난 지금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홀렸으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쯤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고 독자로서의 감회는 서술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가장 일본적이라는 특수성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보편성과 결합하며 나타나는 현상적 결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그 결과에 협조한 한국의 독자로서 이러한 기회를 지나쳐 보내는 것은 책임회피이자 직무태만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두가 길었지만 나는 이야기의 힘, 즉 소설적 서사의 구성적 파워를 1Q84의 뼈대가 된 네가지 이야기로부터 시작할 수 있었고, 가장 일본적이어서 가장 세계적인 대중에 호소한 주제는 세계무대에 위치한 일본인의 위치발견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 두 가지를 작품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인식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따로 또 같이


먼저 1Q84에서는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서사출산의 구조가 천연덕스럽게 이어지는데 나는 이 구조를 1+Q+84=1Q84 라는 공식으로 만들어 보았다. 즉, 1과 Q와 84는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모두 합해져서 1Q84를 복합적으로 구성해내는 수사학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1과 Q와 84는 각기 일본의 현실과 일본의 스타일들을 명징하게 암시하는 작품속의 개별적인 스토리라인이자 1Q84의 서사적 모태를 상징한다.

1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유일한 믿음' 그 하나였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소재들은 일본 내 종교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 문제가 심각하던 90년대 일본의 옴 진리교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전 세계에 자신들의 '이단성'을 손쉽게 홍보할 수 있었다. 바로 아오마메의 부모가 자식을 버리면서 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증인회'는 아마도 옴 진리교(와 같은 사이비교)를 상징한다 할 것이다. 사회주의 공동체 '선구' 역시 농업을 기반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일본의 '야마기사회'가 그 모델로 알려졌다. 하지만 평화롭게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던 단순한 농업 코민에서 사이비 광신단체로 변모하면서 그 역시 옴 진리교와 다를 바 없는 '신흥종교'로서 죽음으로서만 재생되는 극단적인 믿음을 과시하였다. 아오마메의 부모가 믿었던 것, 후까에리의 아버지 즉 선구의 리더가 믿었던 것들은 고도의 물질문명을 비판하며 나름의 절대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유일한 믿음'이었다. 하루끼는 옴 진리교 사건 사형수들을 만나 그들을 인터뷰 한 후 마치 달의 뒤편에 한명 더 남아 있던 것 같은 공포를 느꼈기에 그 상상력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1995년 고베 지진과 옴진리교 지하철 가스사건을 겪은 뒤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현실과의 괴리감을 통렬하게 자각했다고 한다. 비록 시발은 자국 내에서 자국에 관한 문제였지만 그 질문만은 (어쩌면) 세계보다 빠른 세계적인 인식의 전환점이었음에 틀림없었고 그것은 1Q84라는 문학적 메아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1Q84에서 1이 일인칭인 I(나)가 아닌 절대치의 1(하나이자 처음)인 것은 이러한 일본의 세계를 향한 자신감 혹은 우월감을 반영한 코드라 느껴졌기에 그들의 질문과 대답이 세계적인 공감에 접수한 사실이 새삼 부럽고 대단해 보였음이다.

Q   두 번째 이야기는 '의문(Question)을 안고 있는 것'으로서 후까에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초안을 쓰고 덴고가 다듬어 완성한 <공기번데기>의 이야기였다. <공기번데기>라는 작품속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열 살의 소녀로서 고립된 커뮤니티에 살고 있었던 후까에리 자신(원작자)을 암시한다. 소녀는 밤중에 은밀히 찾아와 공기번데기를 만드는 리틀 피플을 목격한다. 공기 번데기 속에는 소녀의 분신이 들어있고 그곳에서 마더와 도터의 관계가 발생했음을 인지한다. 그 세계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리틀 피플처럼 통로를 만들어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소녀가 통로의 문을 열려고 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그러므로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나는 공기번데기의 동화적 환타지를 만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식의 일본 특유의 서정적 애니메이션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소녀가 어두운 밤에 공기 속에서 실을 뽑아 번데기를 만드는 모습은 <반딧불의 묘, 2006,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한 장면인 반딧불로 어둠을 밝히려는 남매의 모습과 중첩되면서 묘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여타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누에고치의 외피 속에 만화캐릭터를 등장시켜 신비롭게 인물을 묘사하던 방식을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반딧불의 묘, 2006 / 다카하타 이사오>    <2005 일본 아이치 엑스포 나카구테 일본관 건축 이미지>

공기번데기 개념은 2005년 일본 아이치 세계박람회의 일본주제관(나가쿠테 일본관)에서도 파사드(건축물 외관) 이미지 컨셉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다. 당시 나는 건축관련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나무 구조의 바구니를 연상시키는 이 건축물은 '부화해서 성장하는 생명을 지키는 누에고치'를 상징하며 당시 많은 화제를 낳았었다. 엑스포의 테마였던 "순환형 사회"를 표현하기 위해 친환경적인 대나무를 이용하여 생명의 영원성을 품는 인공적인 프레임을 누에고치의 외피로 형상화 한 것은 지극히 일본다운 발상이었고 신비감과 조형미를 동시에 만족시킨 건축물이었다. 공기번데기가 암시하는 생명에의 영원성과 시각적인 청결, 자연미 그것에 대한 의문은 순수에 대한 서정적 신비감에 귀착된다 할 것이다. 아오마메가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통과하며 1Q84년의 세계로 물리적인 진입이 이루어 졌다고 본다면 공기번데기는 '의문을 안고 있는' 정서적 진입에의 유도체로서 아오마메와 덴고 모두에게 내면의 통로(bridge)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공기번데기의 외적 이미지는 누에고치를 의미하는 코쿤(cocoon)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최근 도쿄 신주쿠에 건립된 코쿤 타워(2008) 역시 나방이 되기 전에 마음껏 꿈을 만들고 미래를 준비하라는 의미의 염원이 담겨있는 건축물로 도쿄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코쿤에 담긴 심리적 기호를 살펴보면 복잡하고 물질적인 현대사회에서 급작스런 위험이나 예측할 수 없는 현상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하나의 보호막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주인공인 덴고와 아오마메는 물론이고 주조연격인 후까에리, 고마쓰, 우시카와, 노부인, 다마루 이들 모두는 외부세상에서 도피하여 타자의 간섭없이 자신만의 공간 안에 머무는 성향이 있으며 혼자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기에 타자와 어울리기 보다는 자신만의 일과 취미를 즐기며 칩거를 일상화하는 '코쿤족'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코쿤의 시각적 이미지를 유기체적인 인테리어나 디자인 상품에 많이 접목하여 젊은이들에 소구하는 대표적인 디자인 강국이다. <공기번데기>는 언뜻 보기에 뜬금없이 보이는 '의문을 안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실은 건축, 영상, 디자인 전반에 익숙하게 소비되던 일본의 문화적(상품적) 소재였던 것이다.   
<도쿄 신주쿠 코쿤 타워 / 2008> 


84      세 번째 이야기는 아오마메와 덴고가 각각 스포츠 클럽의 인스트럭터와 수학 학원강사로서 변함없는 일상을 아무런 의심없이 살고 있었던 '(문제는 있었지만)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현실 세계의 이야기이다. 표면적으로는 1984년을 의미하며 소설 속에서의 실존적 현실을 상징한다. 이들에게 있어 1984년은 그해 일 년의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들이 초등학교 때 헤어진 이후 서로 각자 지나온 이십년의 세월만큼의 누적된 시간과 이동하여 왔던 공간을 모두 의미한다고 느껴졌다. 즉, 그해 1984년은 1984년이 되기까지의 아오마메와 덴고의 현실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1,2권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조지오웰의 <1984>와 빅브라더로서의 리틀 피플을 하나의 전제된 공식처럼 연결지었었고 1984년의 일본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사회분위기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3권을 덮고 난 지금 1984년은 달이 두 개가 아닌, 현실을 인식하고 그 현실 속에서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우리 세계라는 생각이 더 많아졌음이다. 즉 조지오웰의 1984년을 문학적으로 계승한다는 의미나 일본의 역사적 전환점의 시기로서의 1984년이라는 전제적 당위성은 작품을 덮고 난 지금 큰 의미는 없어졌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단순하게 일반인들에게 널리 공유된 시각적 기호로서의 상징성과 익숙함을 <1984>라는 작품에서 차용해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984년이 되었건, 1985년이 되었건 어짜피 1Q84 혹은 1Q85는 존재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단, 1Q84년이 없었다면 1984년은 1985년이나 1994년과 다를 바가 없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세계일 뿐 이었을 것이고, 궤도상에서 이탈하지 않은 이유로 다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었을 종속적 개연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그것을 주목해야 했다. 이것은 1984년 때문에 1Q84년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1Q84년(비현실)을 통해 비로소 1984년(현실)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떠났기 때문에 돌아와야 했고 돌아 올 곳이 있었던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는 현실을 인식하고 제 것으로 받아 들이는 일은 결과적으로 현실을 이탈했기에 가능했다는 소설적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1Q84라는 작품에서 가장 작위적인 이야기는 실은 1과 Q, 그리고 1Q84가 아닌 '84'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은 두 개의 달이 떠오르는 세계보다 더 비현실적인 세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세계, 1984년의 현실이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애초부터 소설적 낭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1Q84년이 소설 바깥이 아니라 1984년이 소설 바깥으로 느껴지는 시점의 착란 현상은 작품속에서도 원래 처해야 하는 현실(1984)이 지금 처한 현실(1Q84) 보다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인식되도록 함으로써 어디까지가 가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시간과 공간에 있어 전혀 원근감과 이동성을 느낄 수 없도록 의도한 작가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이는 어느 이야기건 이야기의 힘을 같은 밀도로 전달하는 하루키에 대한 신뢰도가 빚어낸 어쩔 수 없는 역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게 있어 1984년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에 온갖 비현실이 난무하는 현실이야 말로 진짜 현 세계일지 모른다는 깨우침을 얻게 한 '84' 스토리였다.

1Q84   비로소 마지막을 이룬 이야기는 1과 Q, 84의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잘 구성된 이 작품의 실체이자 소설의 현실세계 1Q84의 이야기였다. 아오마메가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타고 아래의 246번 도로에 내려갔을 때부터 바뀌어 버린 세계이기도 하고, 세계의 보편적인 룰이 느슨해져 많은 부분의 이성이 상실되어 가는 세계이면서 무언가 기존과는 다른 원리위에 성립되어 다른 룰로 운영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의문을 안고 있는 소설 <공기번데기>에서처럼 크고 작은 두 개의 달이 하늘에 떠오르고 리틀 피플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외톨이로 살아간다. 하지만 아오마메와 덴고는 다른 현실세계로 진입했음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생명에의 위협을 느끼기 전까지는 여간해서 돌아갈 방도를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행보를 보여 주었다. 다만 몇 가지 희망적인 사실은 같은 세계에서 같은 것을 본다는 것, 보이지 않아도 늘 서로를 생각해 왔다는 것, 각자의 인생에 서로가 운명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정도였다. 만약 1Q84를 서로의 운명적인 첫사랑을 찾아가는 러브 스토리라 말한다면 1Q84는 이들의 만남을 기어이 유도하는 공시적, 통시적 배경으로서 소설적 당위성을 필연적으로 확보하는 치밀한 계획으로 준비된 세계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 안에 가설이 있고 가설 안에 현실이 있는 진짜 세계를 향한 좌표와 자아의 위치찾기라 말한다면 진짜와 가짜가 공존하면서 공생하던 1Q84의 세계는 죽음이 아닌 삶의 구원을 받기위한 통과의례적 경계지대로서 엄청난 설득력을 확보한다 할 수 있겠다.

...통과하는 사람들

1Q84에서 두 주인공이 만난 주요 인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채널러(통과하는 사람: channeler)의 역할을 지니고 등장했다고 보여진다. 1,2권에서 후까에리가 충실한 역할을 수행했다면 3권에서는 단연 우시카와일 것이다. 후까에리가 긍정이라면 우시카와는 부정적 채널러였지만 두 사람은 1984년에는 존재하지 않을 사람들로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비현실적인 현실세계에서 이들의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소중한 인물이었다.

후까에리는 가장 숭고한 행위를 담당하는 매개체로서 덴고의 정자와 희망을 채집, 수렴하는 종교적(이단적)인물이었다. 후까에리로 전달된 덴고의 정자는 후까에리 아버지 선구의 리더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자신을 죽인 아오마메에게 남겨진다. 그녀가 창안한 <공기 번데기> 역시 현실과 비현실을 이어주는 '통과하는 이야기' 로서 1Q84의 세계에서 공유되도록 하였다.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어보이던 두 사람이 2권의 마지막에서 한사람은 자살에 실패하고 한사람은 삶의 의지를 깨우쳤지만 감동적인 해후는 다음으로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아오마메가 다시 찾아간 1Q84년의 출발점, 비상계단에선 출구가 막혀있었다. 죽음이 삶의 출구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덴고는 쓰러진 아버지 병실에서 열 살의 아오마메가 빛나던 공기번데기를 선사받고 비로소 아오마메를 찾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서로 자력과 의지, 주어진 상황만으로 해후를 하기에는 서사의 흥미나 논리성이 부족해 보였던 것일까. 3권에서 등장하는 우시카와는 1984년과 1Q84년 사이에 존재하던 비상계단과도 같았다. 계단은 출발하는 상황에 따라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있는 전이공간이다. 바로 우시카와는 스토리 적으로는 두 사람의 만남을 훼방 놓는 역할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안내자로서 이야기의 구심점이 되었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초등학교에서 운명의 조우를 이룬 후 1Q84년에서는 어린이 공원이라는 접점지대에서 운명의 기운으로만 다시 재회한다. 그런데 주목할 사건은 같은 곳에 우시카와라는 제 3의 인물도 합세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시카와는 3권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동안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특별한 사람으로 1Q84년이 아닌 2Q84나 1Q85년에서 시공을 초월해 나타난 메신져처럼 느껴졌다. 3권의 존립당위성은 우선 우시카와라는 인물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이루어 질 수 있었기에 나는 우시카와라는 인물을 처음부터 인정하기로 했다. 우시카와는 진전이 없어 보이던 이야기의 평행선을 허물어 뜨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조성하며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우시카와가 펼치는 심리 변화와 논리 조합의 묘사는 그 디테일과 몰입도에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그것을 능가했다. 안타깝게도 소설 속에서 수행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는 독자를 위한 확실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우시카와는 3권의 분량을 증가시킨 일등공신이자 아오마메와 덴고 두사람의 환타지를 현실화 논리화하는 조율자였다. 나는 우시카와가 죽음을 맞이할 때 두 사람의 만남을 기대하면서도 한편 그의 냉철하고도 집요한 분석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몹시 아쉽고도 허탈했다. 현실에선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한 경계인으로서 삶을 마감한 우시카와가 뜻밖의 공기번데기를 재생해내는 이변(?)을 연출해 냄으로서 진한 연민을 대신해주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소설적으로 가장 근사한 캐릭터였다.

그를 통해 현실을 평생 비현실적으로 산다는 것 역시 죽음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일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시카와는 아오마메, 덴고와 함께 1Q84의 세계에서 두 개의 달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었다.(후까에리처럼 공기번데기와 일차적 인연이 없는) 하지만 그는 그 세계에게 자신만을 향한 진지한 성찰이 없었고 성찰이 없었다는 것은 자신이 넘어와 버린 세계에서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한 (도덕적)인식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똑같이 두 개의 달을 목격했지만 자신이 처한 비현실적인 현실을 집요하게 고뇌함으로써 타의가 아닌 자의로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지 못한 우시카와만이 죽음으로 재생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레 주체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행동으로 비현실의 현실을 헤쳐나간 두 사람의 행보와 비교되는 상징적 결말이었다. 비록 타의에 의해, 혹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상황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현실세계에 내던져 졌을지라도 계속하여 타의적인 삶에 모든 것을 걸었던 우시카와와 비현실적 현실을 선택한 것도 자신이요 그것을 극복해갈 것도 자신이라 생각한 두 사람과의 차이점은 비현실적인 오늘을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현대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타자를 탓하지 않고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 들이고 그 속에서 현실을 이겨내기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외롭고 힘겨운 것인가. 현실을 현실에서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에 남을 수 없다는 명징한 진리가 이토록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에 무의식처럼 녹아 있었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순간이었다. 세 사람의 결말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새삼 내가 처한 현실을 내 스스로 받아 들이고 있는지 이 세계가 내가 살고 있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처음으로 자문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상실된 사람들

우시카와는 통과하는 사람이었지만 가장 처참하게 사라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후까에리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스스로 종적을 감추면서 상실되었다면 우시카와는 타자에 의해 생을 마감하면서 소실되었다고 본다. 우시카와는 전지적 작가시점으로서의 작가의 분신이면서 사건과 사건의 논리를 가장 잘 끼어 맞춘 결과로 결국 두 사람의 로맨스를 가장 잘 이해한 단 한명의 사람이었다. 나는 우시카와가 사라지고 난후 직감적으로 작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체감했다.

두 사람이 초등학교에서의 만남 이후 각자 의지한 사랑 역시 주체적이지 못했기에 지속되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아오마메는 학창시절 다마끼라는 친구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고 사회로 나와서는 아유미라는 여성과 동성애적 사랑에 매달리며 몸과 마음을 소비해왔다. 덴고 역시 연상의 유부녀와 반복된 패턴에 의한 성행위를 유지하며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진 않아왔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스쳐온 사랑은 모두 정상적이지 않았고 상대의 실체가 아닌 그들이 생성하는 그림자 아래에서 자신을 숨겨 온 것이었다. 이렇듯 다마끼, 아유미, 연상 유부녀 모두는 자살, 살해, 실종이라는 공통의 운명으로 그들에게서 상실된다. 두 사람과 관계했던 여성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라질 때 나는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놀라곤 했었다. 그들의 상실은 아마 애초부터 예정된 작가와의 약속이었겠지만 특히, 아유미와 연상녀가 사라진 후 두 사람이 보여준 일상들은 '진실한 단 하나의 사랑'을 찾고 있던 두 사람을 정당화하기 보다는 '진실하지 않은 나머지 사랑'에 대한 댓가로 느껴져 많이도 씁쓸했음이다. 하루끼는 적어도 '상실'에 관해서라면 소설적으로 인정머리가 없는 편이었다. 그 외 후까에리의 아버지 선구의 리더가 아오마메에게 살해 당한 것은 작품에서도 의미했듯이 자신 스스로 죽음을 갈구했기 때문에 '자연사'에 가깝다 할 수 있으며 상실이라기 보다는 구원을 향한 실천으로 느껴졌다. 그는 죽기직전 아오마메에게 "자네는 무거운 시련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돼. 그것을 뚫고 나갔을 때,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들을 목격할게야" 라는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다. 그의 유언은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결코 상실되지 말아야 할 소설적 진실이 아니었을까.

...감각의 사람들

이 소설이 특히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주인공들이 인간의 감각에 의존하며 특정한 자신만의 감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오마메는 초등학교에서 덴고의 손을 잡은 이후 촉각에서 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된다. 그녀가 노부인을 마사지 할 때나 선구의 리더를 살해할 때, 아유미와 유희를 즐길 때 촉각은 신체뿐 아니라 그녀의 의식, 무의식을 지배하는 독창적인 감각이었다. 덴고는 후까에리의 독특한 억양에서도 감정과 논리를 읽어내는 따스한 청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요양소에서 의식을 잃은 아버지에게도 소설을 읽어주며 무언 아닌 무언의 대화를 나누려 했고, 고양이, 올빼미, 기차등 환청과 유사한 소리에 자신의 의식을 정립하며 청각이상의 초감각을 발휘하기도 했다. 만져보지 않은 악기를 연주할 줄 알던 절대음감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우시카와에게는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적인 후각이 있어 사건을 추적하고 단서를 연결짓는데 누구보다 뛰어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세계로 이동하면서 그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 맞서기 위해 감각이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인간의 오감에 속하는 감각외에도 초인지적인 감각으로 해석되는 직감이나 위기 대응능력은 시련을 헤쳐 나가기 위해 주인공에게 작가가 부여한 일종의 무기로도 느껴졌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비록 어렸지만 자기발로 억압된 상황을 탈출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 앞에 놓여진 비현실적인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이탈'을 향한 환상감을 방어기제로 사용했다. 아오마메는 자살 단념 후 은신의 시간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이야기로, 덴고는 아버지의 병실이라는 공간을 '고양이 마을'이라는 문학적 공간으로 관념적인 치환을 하며 자신의 온감각을 의지했다. 이는 현실을 도피 했다기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출구를 찾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현실을 어짜피 같은 비현실인 문학으로 이겨내게 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가 흡사 그동안 자신이 시행해온 발걸음과도 같이 느껴졌던 부분이었다.

초능력적 감각의 절정은 아오마메의 임신이었다. 하지만 아오마메가 선구의 리더를 살해한 순간 수태된 무엇은 생물학적인 생명체를 잉태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케 한 의미로서 생명성을 가진 개념체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덴고가 아버지의 병실에서 본 공기번데기와 소녀의 분신은 아오마메의 임신을 상징하는 태몽으로 볼 수 있다. 개념체가 생물체가 되기 위해서 두 사람은 1Q84년에서 1984년으로 돌아가야 했었고 그곳에서 실제 성관계라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생명체에 인간성을 부여 하게 된 것이다. 즉 1Q84의 세계에서는 단지 가능성에 불과했지만 1984의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현실성을 획득한 것이었다. 가능성은 곧 아오마메에게 있어 산다는 것(생존)이었고 그것은 곧 덴고와의 만남에 대한 실현 가능성(재회)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희망'이 '리얼'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표현은 초감각적이었지만 장중한 여행의 값진 결론만큼은 문학적 고전성을 추구한 것으로 느껴졌다.

...머무는 사람들

그런데 누구나 다 달라진 세계를 인식하고 이전의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 했을까? 혹은 돌아갈 필요가 있었을까? 어쩌면 변화된 세계에서도 변화자체를 감지하지 못했거나 감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즉, 1Q84년이 끝나기 전에 돌아오지 못하고(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그 세계에 머무는 인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의 현실로 돌아가야 할 절실한 이유가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세계의 룰이 느슨한 그 곳에서 그런대로 그 생활을 반복하며 살아도 상관없었을지 모르겠다. 버드나무 저택의 노부인이나 그녀의 충신이자 아오마메의 수호천사였던 다마루, 덴고의 상사 고마쓰,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돈해주던 간호사들은 어쩐지 1Q84의 세계에 머무르려는 사람들로 보였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그 사람들은 어쩌면 아오마메와 덴고 같은 사람들을 위해 그 세계에 꼭 필요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모두 비현실이 현실보다 나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가끔 현실에서도 어느 세계에 살았어도 무방할 사람들을 목격할 때가 있는데 그들은 세상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 나다기 보다는 세상 저편, 시간 너머 그 어디에서도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으며(혹은 피해 준 것을 크게 생각지 않으며) 조용히 살아갈 사람으로 보였다.

3권에서 우시카와와 함께 인상깊었던 인물 중 NHK 수금원 역시 그곳에 머무르려는 사람으로 생각된다. 실제 수금원으로서 평생 사역당해 온 덴고의 아버지가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죽기 전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던 그는 후까에리, 아오마메, 덴고, 우시카와의 집앞에서 연신 노크를 해대던 공포스런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로 비밀이 있었던 주인공들에게 자신은 그 비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당신들이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그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그 비밀은 영원하지 않을뿐더러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계속해서 자신의 노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NHK수금원은 시청료를 지불하지 않은 비양심적인 사람들만을 향해 노크를 하는 사람이었고 덴고의 아버지는 그 일을 가장 잘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수금원의 섬칫한 목소리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면 그 댓가를 지불하라는 자본주의 논리를 전달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저곳 현실세계로 돌아가려면 이곳 비현실 세계에 진입하여 여기서 누린 것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가라는 수차례 경고로 느껴져 지극히 비현실적인 존재로서 가장 극명하게 현실을 깨우쳐 주는 멋진 존재였다.


달보고 오늘보다

이제, 간절한 바램이 현실로 이루어지던 소설의 결말을 떠올려 본다. 두 사람이 다시 찾은 수도고속도로에 비상계단은 막혀있지 않았고 그 출구를 통해 1Q84를 빠져나온 그들은 달이 하나인 1984년의 세계로 돌아온다. 아오마메는 드디어 덴고의 품안에서 콩깍지 안에 든 콩처럼 자신의 몸을 맡기며 덴고의 아오마메(靑豆, 푸른 콩)가 된다. 결국 덴고가 1Q84에서 보았던 열 살소녀의 공기번데기는 1984년의 아오마메(푸른 콩)로 현실화 된 것이었고 두사람의 결실은 아오마메의 푸른콩(태아)이 될 것이었다. 1Q84의 하늘에는 노란색 커다란 달과 초록색 이끼긴 작은 달이 나란했었지만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듯 달은 하나로 빛나고 그 달빛아래에서 자신들의 소중한 생명에 미래를 약속하였다. 초록색 이끼긴 작은 달은 자신들의 과거 어두운 그림자 이면서 그들의 인생에 드리우는 미래 죽음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나는 두 개의 달 중 한 개의 달이 사라졌다기 보다 두 개의 달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졌다고 느껴졌기에 그 하나 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주면서 사라지고 남게 된 인물들을 점점 드러나는 달빛 속에 비춰볼 수 있었다. 1,2권에 주로 두 사람의 인생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던 인물들이 등장했었다면 3권에선 그 그림자가 서서히 걷혀가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오마메의 위험을 감지하고 결정적인 도움을 준 다마루와 의미심장한 충고를 마다않은 고마쓰와 도쿄로 돌아가라고 했던 간호사들...비밀을 가진 모든 사람의 무의식을 흔들어 대던 영원한 노크맨 NHK수금원까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며 나 역시도 소설바깥, 지금의 내 현실로 힘겹게...돌아왔음이다.

소설 속에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만약, 덴고가 아오마메를 만난 후에도 소설을 계속 쓸 것이라면 과연 <공기번데기>에 그려진 세계를 그대로 계승하여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에서 리틀피플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그려 낼 것인가. 그때도 세계가 소멸한 뒤에는 어떤 왕국이 도래 할 것이며 내가 소멸한 뒤에는 무엇이 찾아 오는지,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나의 본모습과 세계의 본 모습에 천착할 것인가... 나는 소설 속에서 덴고가 그려낼 공기번데기의 후속작품이 바로 '바늘로 찌르면 붉은 피가 나는 현실세계'에서 하루끼가 창조해 낸 1Q84라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덴고의 질문을 답으로 작성한 1Q84는 그래서 품에 안을 수 밖에 없으며 그 깜찍한 영민함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음이다. 아오마메가 1Q84의 세계에서 잉태하고 1984의 세계에 등장게 될 그들의 소중한 새 생명은 분명 보다 완벽한 인간일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가드너의 다중이론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덴고는 논리 및 수리지능, 음악 및 언어지능이 아오마메는 신체 운동지능, 자연탐구지능이 특히 발달된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좌뇌와 우뇌가 골고루 발달된 창의적인 2세를 기대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모든 일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고 하루끼가 직조해낸 이야기의 힘은 새로운 공기, 새로운 인간, 새로운 생명을 창출해 내었다. 자신의 목표를 당당히 성취하고만 작가정신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그는 일본인이었으며 가장 일본적인 고뇌를 세계적 공감대로 끌어 올려 놓은 그의 능력이 한가위 보름달만큼 빛나게 느껴진다.

1Q84를 읽은 독자들이었다면 이번 추석에 떠오른 달을 보며 소원을 빌기 전에 확인한 사실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번 보름달은 더 깊고도 아릿해 그 달무리가 서정적으로 느껴졌다면 나만 그런 것일까. 우리는 대부분 과거나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움으로 달을 바라보지만 일 년에 단 한번 한가위 때 만큼은 자신의 앞날과 소원을 희망하며 달을 우러러 본다. 이 세계는 달이 하나이듯 우리의 삶도 한번, 그럼으로 죽음도 한번인 인생을 딱 한번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하나뿐인 달은 다행히 한번만 뜨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고자 할 때마다 늘 거기 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달빛은 고맙게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주고 기다리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아왔다. 이제는 추억 때문에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떠올리며 달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자리 잡은 초록색 이끼낀 달그림자를 잘 어루만져 보고 커다랗고 밝은 달을 보며 지금 이 세계에 속한 나의 모습을 계속 투영한다면 결국 달빛만큼 근사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달이 뜨는 횟수만큼이 결국 내 인생의 시간들임을 알겠다. 달빛 아래 누군가와 손을 잡고 싶은 밤이다.

혹시, 에소 주유소 광고판에 그려진 목격자 호랑이는 두 사람의 극적인 귀환을 축하하며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이 한마디를 얻으려 이토록 긴 이야기를 돌아왔던 것은 아닐까.


                                   " 인간은 희망을 부여받고, 그것을 연료로 목적으로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
                                                        
  -1Q84/3, 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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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30 15: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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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30 16: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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