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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ㅣ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학교 다닐 때 억지로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우리 학교는 교양필수과목으로 누구나 수영을 이수해야만 다시는 수영을 안 할 수 있었다. 유난히도 물을 무서워했던 내가 별 수 없이 학점 때문에 혼자 수영장을 몰래 다닐 정도였다. 1.9m 풀에 다이빙으로 뛰어 들어 25m는 자유형으로, 다시 턴한 다음 25m는 배영으로 돌아오는 그 코스를 중간에 멈추지 않고 헤엄쳐 나온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요일마다 아무도 없는 동네수영장에 들러 나머지 연습을 했던 나...그런데 어느날 자유형도 겨우 10m를 이어갈까 말까하던 내가 우연히 둥둥 뜬 몸으로 나도 모르게 뒤로 물살을 가르게 된 그날, 나는 내 위에 펼쳐진 뜻밖의 세상을 보고 말았다. 물속에선 물안경을 끼고도 눈도 뜨지 못하던 내가 거짓말처럼 물위에 누워서 바라본 하늘은 내가 만나본 세상 중에 가장 넓고도 아름다웠다. 거기다가 내의지로 내 몸을 움직여 하늘을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은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세계를 잠시 넘어와 있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완벽하게 다른 세상이 온전한 지금의 세상이 되는 경험...나는 그때 교양과목을 가까스로 통과하면서 수영을 배운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통과하고 왔다는 안도감에 앞으로 또 다른 어떤 세상이 닥쳐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그때의 물, 아니 그때의 하늘 위를 떠다니듯 작품 속에서 다른 세상을 헤엄쳐 나오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홀린 듯 빠져 나와 버린 지금 나는 그 어떤 문학도 다른 세상을 만남에 있어 지금처럼 새롭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작품 속에 완전히 몰입해 있던 시간들이 물살을 가르고 하늘을 떠다닌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매순간 가득한 해방감을 느끼며 온정신과 육체가 다른 세상에 의지했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했다.
이야기를 믿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집요하게 내 의식을 좇아다니던 단어는 '세계'라는 두 음절의 세계였다. 내 의식속의 '세계'란 '세계화' 캠페인 이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고착된 死語에 가까웠기에 점점 '세상'이라는 보다 현실적이고 자조적인 의미의 단어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 세계가 어디인지'를 집요하게 되묻고 있었다. 즉, 자신이 지금 바라보고 지각하는 세계가 진짜 현실세계 인지 혹시 잠시 다른 세계를 비집고 들어 온 것이라면 자신은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하는 궁극의 위치인식에 대한 질문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소설가가 차지하는 위치인식은 곧 작품 속 주인공들이 찾아가는 인물의 위치를 이끌 것이고 그것은 여지없이 독자의 인식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 물 흐르듯 당연해 보이는 문학의 이치가 그것이 깨달아지는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 본다면 과연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작품을 지나오면서 한 작가의 소중한 깨달음을 일종의 무위로 얻어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통렬한 자각과 고통 없이 단지 1Q84라는 열차에 무임승차 한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세상에 대한 이치를 짜릿하게 알아 채버린듯 한 승리감은 독자로서는 커다란 행운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가지는 문학적 성취나 작품성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내 몫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했기에 한마디 감사는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가 그 깨달음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비극인지 희극인지와는 상관없이)아름답지 못할 수도 있었던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마치 고통이 없는 안락사나 무통치료와 같은 처방전을 받아들고 그전에 느껴보지 못한 치료과정을 경험했다면 투병환자로선 천금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지 않겠는가. 깨우침에 대한 수월한 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문학적 성찰의 진수를 보여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커다란 깨달음을 관통하던 아주 견고한 그리고 촘촘한 하나의 응고된 덩어리로서 그 내재된 힘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에 대한 신뢰, 그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어도 온전히 동화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었다. 이 신뢰감은 하루키 작품에 대한 일종의 기시감이나 1,2권에 의한 선험적 학습효과일 수도 있고 이미 세계적 반열에 올라선 작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일 수도 있지만 1권 이후 거의 이야기에 내맡겨진 듯한 진지한 착각의 힘은 마치 마술사의 매직박스에 들어가 어떠한 칼이 들어와도 안전할 것을 믿는 여주인공이거나 머리위에 사과를 올려놓아도 정확하게 목표물을 명중시키고 말 아버지를 믿는 아들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 느낌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기에 그저 읽어보라고 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다는 것, 비슷한 다른 것을 설명하거나 비유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기에 아마도 설명한다고 해서 알아질 문제는 아니라는 것, 나는 이야기의 힘(magic)에 휘둘려진 독자로서 그 이야기가 이끄는 힘의 진원지를 찾고자 했다.
진원지에서 발견한 진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보편적인 깨달음이었다. 일본작가의 지극히 일본적인 그렇기에 극적이고 세계적인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작품이라는 결론을 얻고 말았다. (시기적으로 한참 후에 작품을 집어든)내게 이 작품을 강력히 권해준 지인은 평소 책을 속독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는 분량에 비해 의외로 빨리 넘어가던 페이지의 마술과 그 가속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어떠한 비논리도 논리성을 가지게 하는 의식의 흐름을 지배하는 문장구사력 덕분에 물 흐르듯 서사를 좇아가다 보면 이 소설이 지극히도 일본적인 당면문제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개인의 성찰을 방대하게 풀어 놓았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지 모른다. 물론, 독서의 즐거움이 우선시 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일본적 코드와 기호를 분석해가며 일일이 의미를 재해석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물 흐르듯 지나쳐 온 그 두껍던 책들을 세 권이나 덮고 난 지금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홀렸으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쯤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고 독자로서의 감회는 서술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가장 일본적이라는 특수성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보편성과 결합하며 나타나는 현상적 결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그 결과에 협조한 한국의 독자로서 이러한 기회를 지나쳐 보내는 것은 책임회피이자 직무태만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두가 길었지만 나는 이야기의 힘, 즉 소설적 서사의 구성적 파워를 1Q84의 뼈대가 된 네가지 이야기로부터 시작할 수 있었고, 가장 일본적이어서 가장 세계적인 대중에 호소한 주제는 세계무대에 위치한 일본인의 위치발견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 두 가지를 작품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인식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따로 또 같이
먼저 1Q84에서는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서사출산의 구조가 천연덕스럽게 이어지는데 나는 이 구조를 1+Q+84=1Q84 라는 공식으로 만들어 보았다. 즉, 1과 Q와 84는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모두 합해져서 1Q84를 복합적으로 구성해내는 수사학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1과 Q와 84는 각기 일본의 현실과 일본의 스타일들을 명징하게 암시하는 작품속의 개별적인 스토리라인이자 1Q84의 서사적 모태를 상징한다.
1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유일한 믿음' 그 하나였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소재들은 일본 내 종교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 문제가 심각하던 90년대 일본의 옴 진리교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전 세계에 자신들의 '이단성'을 손쉽게 홍보할 수 있었다. 바로 아오마메의 부모가 자식을 버리면서 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증인회'는 아마도 옴 진리교(와 같은 사이비교)를 상징한다 할 것이다. 사회주의 공동체 '선구' 역시 농업을 기반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일본의 '야마기사회'가 그 모델로 알려졌다. 하지만 평화롭게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던 단순한 농업 코민에서 사이비 광신단체로 변모하면서 그 역시 옴 진리교와 다를 바 없는 '신흥종교'로서 죽음으로서만 재생되는 극단적인 믿음을 과시하였다. 아오마메의 부모가 믿었던 것, 후까에리의 아버지 즉 선구의 리더가 믿었던 것들은 고도의 물질문명을 비판하며 나름의 절대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유일한 믿음'이었다. 하루끼는 옴 진리교 사건 사형수들을 만나 그들을 인터뷰 한 후 마치 달의 뒤편에 한명 더 남아 있던 것 같은 공포를 느꼈기에 그 상상력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1995년 고베 지진과 옴진리교 지하철 가스사건을 겪은 뒤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현실과의 괴리감을 통렬하게 자각했다고 한다. 비록 시발은 자국 내에서 자국에 관한 문제였지만 그 질문만은 (어쩌면) 세계보다 빠른 세계적인 인식의 전환점이었음에 틀림없었고 그것은 1Q84라는 문학적 메아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1Q84에서 1이 일인칭인 I(나)가 아닌 절대치의 1(하나이자 처음)인 것은 이러한 일본의 세계를 향한 자신감 혹은 우월감을 반영한 코드라 느껴졌기에 그들의 질문과 대답이 세계적인 공감에 접수한 사실이 새삼 부럽고 대단해 보였음이다.
Q 두 번째 이야기는 '의문(Question)을 안고 있는 것'으로서 후까에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초안을 쓰고 덴고가 다듬어 완성한 <공기번데기>의 이야기였다. <공기번데기>라는 작품속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열 살의 소녀로서 고립된 커뮤니티에 살고 있었던 후까에리 자신(원작자)을 암시한다. 소녀는 밤중에 은밀히 찾아와 공기번데기를 만드는 리틀 피플을 목격한다. 공기 번데기 속에는 소녀의 분신이 들어있고 그곳에서 마더와 도터의 관계가 발생했음을 인지한다. 그 세계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리틀 피플처럼 통로를 만들어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소녀가 통로의 문을 열려고 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그러므로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나는 공기번데기의 동화적 환타지를 만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식의 일본 특유의 서정적 애니메이션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소녀가 어두운 밤에 공기 속에서 실을 뽑아 번데기를 만드는 모습은 <반딧불의 묘, 2006,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한 장면인 반딧불로 어둠을 밝히려는 남매의 모습과 중첩되면서 묘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여타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누에고치의 외피 속에 만화캐릭터를 등장시켜 신비롭게 인물을 묘사하던 방식을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반딧불의 묘, 2006 / 다카하타 이사오> <2005 일본 아이치 엑스포 나카구테 일본관 건축 이미지>
공기번데기 개념은 2005년 일본 아이치 세계박람회의 일본주제관(나가쿠테 일본관)에서도 파사드(건축물 외관) 이미지 컨셉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다. 당시 나는 건축관련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나무 구조의 바구니를 연상시키는 이 건축물은 '부화해서 성장하는 생명을 지키는 누에고치'를 상징하며 당시 많은 화제를 낳았었다. 엑스포의 테마였던 "순환형 사회"를 표현하기 위해 친환경적인 대나무를 이용하여 생명의 영원성을 품는 인공적인 프레임을 누에고치의 외피로 형상화 한 것은 지극히 일본다운 발상이었고 신비감과 조형미를 동시에 만족시킨 건축물이었다. 공기번데기가 암시하는 생명에의 영원성과 시각적인 청결, 자연미 그것에 대한 의문은 순수에 대한 서정적 신비감에 귀착된다 할 것이다. 아오마메가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통과하며 1Q84년의 세계로 물리적인 진입이 이루어 졌다고 본다면 공기번데기는 '의문을 안고 있는' 정서적 진입에의 유도체로서 아오마메와 덴고 모두에게 내면의 통로(bridge)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공기번데기의 외적 이미지는 누에고치를 의미하는 코쿤(cocoon)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최근 도쿄 신주쿠에 건립된 코쿤 타워(2008) 역시 나방이 되기 전에 마음껏 꿈을 만들고 미래를 준비하라는 의미의 염원이 담겨있는 건축물로 도쿄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코쿤에 담긴 심리적 기호를 살펴보면 복잡하고 물질적인 현대사회에서 급작스런 위험이나 예측할 수 없는 현상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하나의 보호막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주인공인 덴고와 아오마메는 물론이고 주조연격인 후까에리, 고마쓰, 우시카와, 노부인, 다마루 이들 모두는 외부세상에서 도피하여 타자의 간섭없이 자신만의 공간 안에 머무는 성향이 있으며 혼자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기에 타자와 어울리기 보다는 자신만의 일과 취미를 즐기며 칩거를 일상화하는 '코쿤족'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코쿤의 시각적 이미지를 유기체적인 인테리어나 디자인 상품에 많이 접목하여 젊은이들에 소구하는 대표적인 디자인 강국이다. <공기번데기>는 언뜻 보기에 뜬금없이 보이는 '의문을 안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실은 건축, 영상, 디자인 전반에 익숙하게 소비되던 일본의 문화적(상품적) 소재였던 것이다.
<도쿄 신주쿠 코쿤 타워 / 2008>
84 세 번째 이야기는 아오마메와 덴고가 각각 스포츠 클럽의 인스트럭터와 수학 학원강사로서 변함없는 일상을 아무런 의심없이 살고 있었던 '(문제는 있었지만)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현실 세계의 이야기이다. 표면적으로는 1984년을 의미하며 소설 속에서의 실존적 현실을 상징한다. 이들에게 있어 1984년은 그해 일 년의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들이 초등학교 때 헤어진 이후 서로 각자 지나온 이십년의 세월만큼의 누적된 시간과 이동하여 왔던 공간을 모두 의미한다고 느껴졌다. 즉, 그해 1984년은 1984년이 되기까지의 아오마메와 덴고의 현실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1,2권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조지오웰의 <1984>와 빅브라더로서의 리틀 피플을 하나의 전제된 공식처럼 연결지었었고 1984년의 일본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사회분위기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3권을 덮고 난 지금 1984년은 달이 두 개가 아닌, 현실을 인식하고 그 현실 속에서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우리 세계라는 생각이 더 많아졌음이다. 즉 조지오웰의 1984년을 문학적으로 계승한다는 의미나 일본의 역사적 전환점의 시기로서의 1984년이라는 전제적 당위성은 작품을 덮고 난 지금 큰 의미는 없어졌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단순하게 일반인들에게 널리 공유된 시각적 기호로서의 상징성과 익숙함을 <1984>라는 작품에서 차용해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984년이 되었건, 1985년이 되었건 어짜피 1Q84 혹은 1Q85는 존재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단, 1Q84년이 없었다면 1984년은 1985년이나 1994년과 다를 바가 없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세계일 뿐 이었을 것이고, 궤도상에서 이탈하지 않은 이유로 다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었을 종속적 개연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그것을 주목해야 했다. 이것은 1984년 때문에 1Q84년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1Q84년(비현실)을 통해 비로소 1984년(현실)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떠났기 때문에 돌아와야 했고 돌아 올 곳이 있었던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는 현실을 인식하고 제 것으로 받아 들이는 일은 결과적으로 현실을 이탈했기에 가능했다는 소설적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1Q84라는 작품에서 가장 작위적인 이야기는 실은 1과 Q, 그리고 1Q84가 아닌 '84'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은 두 개의 달이 떠오르는 세계보다 더 비현실적인 세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세계, 1984년의 현실이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애초부터 소설적 낭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1Q84년이 소설 바깥이 아니라 1984년이 소설 바깥으로 느껴지는 시점의 착란 현상은 작품속에서도 원래 처해야 하는 현실(1984)이 지금 처한 현실(1Q84) 보다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인식되도록 함으로써 어디까지가 가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시간과 공간에 있어 전혀 원근감과 이동성을 느낄 수 없도록 의도한 작가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이는 어느 이야기건 이야기의 힘을 같은 밀도로 전달하는 하루키에 대한 신뢰도가 빚어낸 어쩔 수 없는 역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게 있어 1984년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에 온갖 비현실이 난무하는 현실이야 말로 진짜 현 세계일지 모른다는 깨우침을 얻게 한 '84' 스토리였다.
1Q84 비로소 마지막을 이룬 이야기는 1과 Q, 84의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잘 구성된 이 작품의 실체이자 소설의 현실세계 1Q84의 이야기였다. 아오마메가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타고 아래의 246번 도로에 내려갔을 때부터 바뀌어 버린 세계이기도 하고, 세계의 보편적인 룰이 느슨해져 많은 부분의 이성이 상실되어 가는 세계이면서 무언가 기존과는 다른 원리위에 성립되어 다른 룰로 운영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의문을 안고 있는 소설 <공기번데기>에서처럼 크고 작은 두 개의 달이 하늘에 떠오르고 리틀 피플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외톨이로 살아간다. 하지만 아오마메와 덴고는 다른 현실세계로 진입했음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생명에의 위협을 느끼기 전까지는 여간해서 돌아갈 방도를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행보를 보여 주었다. 다만 몇 가지 희망적인 사실은 같은 세계에서 같은 것을 본다는 것, 보이지 않아도 늘 서로를 생각해 왔다는 것, 각자의 인생에 서로가 운명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정도였다. 만약 1Q84를 서로의 운명적인 첫사랑을 찾아가는 러브 스토리라 말한다면 1Q84는 이들의 만남을 기어이 유도하는 공시적, 통시적 배경으로서 소설적 당위성을 필연적으로 확보하는 치밀한 계획으로 준비된 세계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 안에 가설이 있고 가설 안에 현실이 있는 진짜 세계를 향한 좌표와 자아의 위치찾기라 말한다면 진짜와 가짜가 공존하면서 공생하던 1Q84의 세계는 죽음이 아닌 삶의 구원을 받기위한 통과의례적 경계지대로서 엄청난 설득력을 확보한다 할 수 있겠다.
...통과하는 사람들
1Q84에서 두 주인공이 만난 주요 인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채널러(통과하는 사람: channeler)의 역할을 지니고 등장했다고 보여진다. 1,2권에서 후까에리가 충실한 역할을 수행했다면 3권에서는 단연 우시카와일 것이다. 후까에리가 긍정이라면 우시카와는 부정적 채널러였지만 두 사람은 1984년에는 존재하지 않을 사람들로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비현실적인 현실세계에서 이들의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소중한 인물이었다.
후까에리는 가장 숭고한 행위를 담당하는 매개체로서 덴고의 정자와 희망을 채집, 수렴하는 종교적(이단적)인물이었다. 후까에리로 전달된 덴고의 정자는 후까에리 아버지 선구의 리더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자신을 죽인 아오마메에게 남겨진다. 그녀가 창안한 <공기 번데기> 역시 현실과 비현실을 이어주는 '통과하는 이야기' 로서 1Q84의 세계에서 공유되도록 하였다.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어보이던 두 사람이 2권의 마지막에서 한사람은 자살에 실패하고 한사람은 삶의 의지를 깨우쳤지만 감동적인 해후는 다음으로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아오마메가 다시 찾아간 1Q84년의 출발점, 비상계단에선 출구가 막혀있었다. 죽음이 삶의 출구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덴고는 쓰러진 아버지 병실에서 열 살의 아오마메가 빛나던 공기번데기를 선사받고 비로소 아오마메를 찾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서로 자력과 의지, 주어진 상황만으로 해후를 하기에는 서사의 흥미나 논리성이 부족해 보였던 것일까. 3권에서 등장하는 우시카와는 1984년과 1Q84년 사이에 존재하던 비상계단과도 같았다. 계단은 출발하는 상황에 따라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있는 전이공간이다. 바로 우시카와는 스토리 적으로는 두 사람의 만남을 훼방 놓는 역할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안내자로서 이야기의 구심점이 되었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초등학교에서 운명의 조우를 이룬 후 1Q84년에서는 어린이 공원이라는 접점지대에서 운명의 기운으로만 다시 재회한다. 그런데 주목할 사건은 같은 곳에 우시카와라는 제 3의 인물도 합세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시카와는 3권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동안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특별한 사람으로 1Q84년이 아닌 2Q84나 1Q85년에서 시공을 초월해 나타난 메신져처럼 느껴졌다. 3권의 존립당위성은 우선 우시카와라는 인물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이루어 질 수 있었기에 나는 우시카와라는 인물을 처음부터 인정하기로 했다. 우시카와는 진전이 없어 보이던 이야기의 평행선을 허물어 뜨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조성하며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우시카와가 펼치는 심리 변화와 논리 조합의 묘사는 그 디테일과 몰입도에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그것을 능가했다. 안타깝게도 소설 속에서 수행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는 독자를 위한 확실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우시카와는 3권의 분량을 증가시킨 일등공신이자 아오마메와 덴고 두사람의 환타지를 현실화 논리화하는 조율자였다. 나는 우시카와가 죽음을 맞이할 때 두 사람의 만남을 기대하면서도 한편 그의 냉철하고도 집요한 분석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몹시 아쉽고도 허탈했다. 현실에선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한 경계인으로서 삶을 마감한 우시카와가 뜻밖의 공기번데기를 재생해내는 이변(?)을 연출해 냄으로서 진한 연민을 대신해주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소설적으로 가장 근사한 캐릭터였다.
그를 통해 현실을 평생 비현실적으로 산다는 것 역시 죽음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일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시카와는 아오마메, 덴고와 함께 1Q84의 세계에서 두 개의 달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었다.(후까에리처럼 공기번데기와 일차적 인연이 없는) 하지만 그는 그 세계에게 자신만을 향한 진지한 성찰이 없었고 성찰이 없었다는 것은 자신이 넘어와 버린 세계에서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한 (도덕적)인식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똑같이 두 개의 달을 목격했지만 자신이 처한 비현실적인 현실을 집요하게 고뇌함으로써 타의가 아닌 자의로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지 못한 우시카와만이 죽음으로 재생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레 주체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행동으로 비현실의 현실을 헤쳐나간 두 사람의 행보와 비교되는 상징적 결말이었다. 비록 타의에 의해, 혹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상황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현실세계에 내던져 졌을지라도 계속하여 타의적인 삶에 모든 것을 걸었던 우시카와와 비현실적 현실을 선택한 것도 자신이요 그것을 극복해갈 것도 자신이라 생각한 두 사람과의 차이점은 비현실적인 오늘을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현대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타자를 탓하지 않고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 들이고 그 속에서 현실을 이겨내기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외롭고 힘겨운 것인가. 현실을 현실에서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에 남을 수 없다는 명징한 진리가 이토록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에 무의식처럼 녹아 있었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순간이었다. 세 사람의 결말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새삼 내가 처한 현실을 내 스스로 받아 들이고 있는지 이 세계가 내가 살고 있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처음으로 자문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상실된 사람들
우시카와는 통과하는 사람이었지만 가장 처참하게 사라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후까에리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스스로 종적을 감추면서 상실되었다면 우시카와는 타자에 의해 생을 마감하면서 소실되었다고 본다. 우시카와는 전지적 작가시점으로서의 작가의 분신이면서 사건과 사건의 논리를 가장 잘 끼어 맞춘 결과로 결국 두 사람의 로맨스를 가장 잘 이해한 단 한명의 사람이었다. 나는 우시카와가 사라지고 난후 직감적으로 작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체감했다.
두 사람이 초등학교에서의 만남 이후 각자 의지한 사랑 역시 주체적이지 못했기에 지속되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아오마메는 학창시절 다마끼라는 친구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고 사회로 나와서는 아유미라는 여성과 동성애적 사랑에 매달리며 몸과 마음을 소비해왔다. 덴고 역시 연상의 유부녀와 반복된 패턴에 의한 성행위를 유지하며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진 않아왔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스쳐온 사랑은 모두 정상적이지 않았고 상대의 실체가 아닌 그들이 생성하는 그림자 아래에서 자신을 숨겨 온 것이었다. 이렇듯 다마끼, 아유미, 연상 유부녀 모두는 자살, 살해, 실종이라는 공통의 운명으로 그들에게서 상실된다. 두 사람과 관계했던 여성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라질 때 나는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놀라곤 했었다. 그들의 상실은 아마 애초부터 예정된 작가와의 약속이었겠지만 특히, 아유미와 연상녀가 사라진 후 두 사람이 보여준 일상들은 '진실한 단 하나의 사랑'을 찾고 있던 두 사람을 정당화하기 보다는 '진실하지 않은 나머지 사랑'에 대한 댓가로 느껴져 많이도 씁쓸했음이다. 하루끼는 적어도 '상실'에 관해서라면 소설적으로 인정머리가 없는 편이었다. 그 외 후까에리의 아버지 선구의 리더가 아오마메에게 살해 당한 것은 작품에서도 의미했듯이 자신 스스로 죽음을 갈구했기 때문에 '자연사'에 가깝다 할 수 있으며 상실이라기 보다는 구원을 향한 실천으로 느껴졌다. 그는 죽기직전 아오마메에게 "자네는 무거운 시련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돼. 그것을 뚫고 나갔을 때,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들을 목격할게야" 라는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다. 그의 유언은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결코 상실되지 말아야 할 소설적 진실이 아니었을까.
...감각의 사람들
이 소설이 특히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주인공들이 인간의 감각에 의존하며 특정한 자신만의 감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오마메는 초등학교에서 덴고의 손을 잡은 이후 촉각에서 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된다. 그녀가 노부인을 마사지 할 때나 선구의 리더를 살해할 때, 아유미와 유희를 즐길 때 촉각은 신체뿐 아니라 그녀의 의식, 무의식을 지배하는 독창적인 감각이었다. 덴고는 후까에리의 독특한 억양에서도 감정과 논리를 읽어내는 따스한 청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요양소에서 의식을 잃은 아버지에게도 소설을 읽어주며 무언 아닌 무언의 대화를 나누려 했고, 고양이, 올빼미, 기차등 환청과 유사한 소리에 자신의 의식을 정립하며 청각이상의 초감각을 발휘하기도 했다. 만져보지 않은 악기를 연주할 줄 알던 절대음감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우시카와에게는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적인 후각이 있어 사건을 추적하고 단서를 연결짓는데 누구보다 뛰어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세계로 이동하면서 그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 맞서기 위해 감각이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인간의 오감에 속하는 감각외에도 초인지적인 감각으로 해석되는 직감이나 위기 대응능력은 시련을 헤쳐 나가기 위해 주인공에게 작가가 부여한 일종의 무기로도 느껴졌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비록 어렸지만 자기발로 억압된 상황을 탈출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 앞에 놓여진 비현실적인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이탈'을 향한 환상감을 방어기제로 사용했다. 아오마메는 자살 단념 후 은신의 시간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이야기로, 덴고는 아버지의 병실이라는 공간을 '고양이 마을'이라는 문학적 공간으로 관념적인 치환을 하며 자신의 온감각을 의지했다. 이는 현실을 도피 했다기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출구를 찾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현실을 어짜피 같은 비현실인 문학으로 이겨내게 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가 흡사 그동안 자신이 시행해온 발걸음과도 같이 느껴졌던 부분이었다.
초능력적 감각의 절정은 아오마메의 임신이었다. 하지만 아오마메가 선구의 리더를 살해한 순간 수태된 무엇은 생물학적인 생명체를 잉태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케 한 의미로서 생명성을 가진 개념체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덴고가 아버지의 병실에서 본 공기번데기와 소녀의 분신은 아오마메의 임신을 상징하는 태몽으로 볼 수 있다. 개념체가 생물체가 되기 위해서 두 사람은 1Q84년에서 1984년으로 돌아가야 했었고 그곳에서 실제 성관계라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생명체에 인간성을 부여 하게 된 것이다. 즉 1Q84의 세계에서는 단지 가능성에 불과했지만 1984의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현실성을 획득한 것이었다. 가능성은 곧 아오마메에게 있어 산다는 것(생존)이었고 그것은 곧 덴고와의 만남에 대한 실현 가능성(재회)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희망'이 '리얼'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표현은 초감각적이었지만 장중한 여행의 값진 결론만큼은 문학적 고전성을 추구한 것으로 느껴졌다.
...머무는 사람들
그런데 누구나 다 달라진 세계를 인식하고 이전의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 했을까? 혹은 돌아갈 필요가 있었을까? 어쩌면 변화된 세계에서도 변화자체를 감지하지 못했거나 감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즉, 1Q84년이 끝나기 전에 돌아오지 못하고(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그 세계에 머무는 인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의 현실로 돌아가야 할 절실한 이유가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세계의 룰이 느슨한 그 곳에서 그런대로 그 생활을 반복하며 살아도 상관없었을지 모르겠다. 버드나무 저택의 노부인이나 그녀의 충신이자 아오마메의 수호천사였던 다마루, 덴고의 상사 고마쓰,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돈해주던 간호사들은 어쩐지 1Q84의 세계에 머무르려는 사람들로 보였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그 사람들은 어쩌면 아오마메와 덴고 같은 사람들을 위해 그 세계에 꼭 필요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모두 비현실이 현실보다 나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가끔 현실에서도 어느 세계에 살았어도 무방할 사람들을 목격할 때가 있는데 그들은 세상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 나다기 보다는 세상 저편, 시간 너머 그 어디에서도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으며(혹은 피해 준 것을 크게 생각지 않으며) 조용히 살아갈 사람으로 보였다.
3권에서 우시카와와 함께 인상깊었던 인물 중 NHK 수금원 역시 그곳에 머무르려는 사람으로 생각된다. 실제 수금원으로서 평생 사역당해 온 덴고의 아버지가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죽기 전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던 그는 후까에리, 아오마메, 덴고, 우시카와의 집앞에서 연신 노크를 해대던 공포스런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로 비밀이 있었던 주인공들에게 자신은 그 비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당신들이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그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그 비밀은 영원하지 않을뿐더러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계속해서 자신의 노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NHK수금원은 시청료를 지불하지 않은 비양심적인 사람들만을 향해 노크를 하는 사람이었고 덴고의 아버지는 그 일을 가장 잘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수금원의 섬칫한 목소리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면 그 댓가를 지불하라는 자본주의 논리를 전달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저곳 현실세계로 돌아가려면 이곳 비현실 세계에 진입하여 여기서 누린 것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가라는 수차례 경고로 느껴져 지극히 비현실적인 존재로서 가장 극명하게 현실을 깨우쳐 주는 멋진 존재였다.
달보고 오늘보다
이제, 간절한 바램이 현실로 이루어지던 소설의 결말을 떠올려 본다. 두 사람이 다시 찾은 수도고속도로에 비상계단은 막혀있지 않았고 그 출구를 통해 1Q84를 빠져나온 그들은 달이 하나인 1984년의 세계로 돌아온다. 아오마메는 드디어 덴고의 품안에서 콩깍지 안에 든 콩처럼 자신의 몸을 맡기며 덴고의 아오마메(靑豆, 푸른 콩)가 된다. 결국 덴고가 1Q84에서 보았던 열 살소녀의 공기번데기는 1984년의 아오마메(푸른 콩)로 현실화 된 것이었고 두사람의 결실은 아오마메의 푸른콩(태아)이 될 것이었다. 1Q84의 하늘에는 노란색 커다란 달과 초록색 이끼긴 작은 달이 나란했었지만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듯 달은 하나로 빛나고 그 달빛아래에서 자신들의 소중한 생명에 미래를 약속하였다. 초록색 이끼긴 작은 달은 자신들의 과거 어두운 그림자 이면서 그들의 인생에 드리우는 미래 죽음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나는 두 개의 달 중 한 개의 달이 사라졌다기 보다 두 개의 달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졌다고 느껴졌기에 그 하나 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주면서 사라지고 남게 된 인물들을 점점 드러나는 달빛 속에 비춰볼 수 있었다. 1,2권에 주로 두 사람의 인생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던 인물들이 등장했었다면 3권에선 그 그림자가 서서히 걷혀가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오마메의 위험을 감지하고 결정적인 도움을 준 다마루와 의미심장한 충고를 마다않은 고마쓰와 도쿄로 돌아가라고 했던 간호사들...비밀을 가진 모든 사람의 무의식을 흔들어 대던 영원한 노크맨 NHK수금원까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며 나 역시도 소설바깥, 지금의 내 현실로 힘겹게...돌아왔음이다.
소설 속에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만약, 덴고가 아오마메를 만난 후에도 소설을 계속 쓸 것이라면 과연 <공기번데기>에 그려진 세계를 그대로 계승하여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에서 리틀피플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그려 낼 것인가. 그때도 세계가 소멸한 뒤에는 어떤 왕국이 도래 할 것이며 내가 소멸한 뒤에는 무엇이 찾아 오는지,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나의 본모습과 세계의 본 모습에 천착할 것인가... 나는 소설 속에서 덴고가 그려낼 공기번데기의 후속작품이 바로 '바늘로 찌르면 붉은 피가 나는 현실세계'에서 하루끼가 창조해 낸 1Q84라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덴고의 질문을 답으로 작성한 1Q84는 그래서 품에 안을 수 밖에 없으며 그 깜찍한 영민함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음이다. 아오마메가 1Q84의 세계에서 잉태하고 1984의 세계에 등장게 될 그들의 소중한 새 생명은 분명 보다 완벽한 인간일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가드너의 다중이론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덴고는 논리 및 수리지능, 음악 및 언어지능이 아오마메는 신체 운동지능, 자연탐구지능이 특히 발달된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좌뇌와 우뇌가 골고루 발달된 창의적인 2세를 기대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모든 일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고 하루끼가 직조해낸 이야기의 힘은 새로운 공기, 새로운 인간, 새로운 생명을 창출해 내었다. 자신의 목표를 당당히 성취하고만 작가정신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그는 일본인이었으며 가장 일본적인 고뇌를 세계적 공감대로 끌어 올려 놓은 그의 능력이 한가위 보름달만큼 빛나게 느껴진다.
1Q84를 읽은 독자들이었다면 이번 추석에 떠오른 달을 보며 소원을 빌기 전에 확인한 사실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번 보름달은 더 깊고도 아릿해 그 달무리가 서정적으로 느껴졌다면 나만 그런 것일까. 우리는 대부분 과거나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움으로 달을 바라보지만 일 년에 단 한번 한가위 때 만큼은 자신의 앞날과 소원을 희망하며 달을 우러러 본다. 이 세계는 달이 하나이듯 우리의 삶도 한번, 그럼으로 죽음도 한번인 인생을 딱 한번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하나뿐인 달은 다행히 한번만 뜨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고자 할 때마다 늘 거기 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달빛은 고맙게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주고 기다리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아왔다. 이제는 추억 때문에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떠올리며 달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자리 잡은 초록색 이끼낀 달그림자를 잘 어루만져 보고 커다랗고 밝은 달을 보며 지금 이 세계에 속한 나의 모습을 계속 투영한다면 결국 달빛만큼 근사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달이 뜨는 횟수만큼이 결국 내 인생의 시간들임을 알겠다. 달빛 아래 누군가와 손을 잡고 싶은 밤이다.
혹시, 에소 주유소 광고판에 그려진 목격자 호랑이는 두 사람의 극적인 귀환을 축하하며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이 한마디를 얻으려 이토록 긴 이야기를 돌아왔던 것은 아닐까.
" 인간은 희망을 부여받고, 그것을 연료로 목적으로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
-1Q84/3, 11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