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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바이 - 다자이 오사무 단편선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박연정 외 옮김 / 예문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어짜피 저 세상 사람들이지만 돌아가는 방법이 자살이었던 작가의 글은 마침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읽을 경우엔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자살한 작가들은 거의 유서 쓰듯 작품을 집필한다고 생각하기에 실은 유서를 읽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문학이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문학이 죽음으로 이끄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평범한 독자인 내가 이해하기엔 여전히 힘겨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궁금했다. 혹시나 마지막 작품을 읽으면 혼자만 안고 갔을지 모를 연유에 가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한가닥 실마리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전혜린의 글을 읽고 이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었겠구나...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다자이 오사무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굿바이』를 덮고 난 지금 이 사람은 죽는 것이 더 나을 수 도 있었겠다는 공감과 연민으로 가득하다. 이번 소설집은 그가 작품을 발표한 시간 순에 따라 총 여섯 편을 모아 구성한 것이었는데 여섯 편이 모두 집필 당시마다 죽음을 늘 예견하고 있던 사람이 마치 죽음의 이유를 찾고 정당화하는 작업의 결과물로 느껴졌다. 각 편 마다의 무게감이 막중하여 십대의 유서, 이십대, 삼십대의 유서를 차례로 확인한 것 같은 서글픔은 이 작품집의 집요한 의도인 것일까. 무르익어 가는 가을과 함께 가슴깊이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살을 정당화했고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권장했으며 카프카는 자살로 해방을 얻을 수 있다했으며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자살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그러했으니까.
...자의식의 역행
- 비교적 젊은 시절의 고흐 자화상-
다자이 오사무는 그야말로 시골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나 식사를 할 때 하녀가 옆에서 부채로 더위를 식혀주는 귀족생활을 해온 왕자님이었다. 7남 4녀 중 10번째이면서 아들로는 여섯 번째 였으니 30명이 넘었던 대가족 집안에서는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남동생과 함께 가장 막내격 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14살에 작고하고 유모의 젖이나 숙모의 가슴을 만지며 자란 것으로 보아 부모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잘난 형과 누나가 많았던 덕에 그들로부터 극심한 열등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얼굴이나 신체등 외모컴플렉스도 심했다고 한다. 자살한 일본 작가들이 어린 시절 모성이나 부성이 부재한 경험과 성장하면서 병약한 신체를 지니게 된 점은 이제 하나의 공식과도 같아 보인다. 정서적 불안감은 곧 신체적 나약함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다시 정신적 문제로 확산되는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문학은 구원이 아닌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거나 결국 유혹이나 협력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이들의 순로였다는 것을 그를 보며 다시 한번 인정해야 했었다.
청소년 시절까지의 가족관계와 고향에서의 추억을 서술해낸 <추억>은 오사무가 자의식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유년시절부터 바깥의 세상과 대립하며 자신이 느끼는 자아에 대해 그 나이답지 않게(필요이상으로) 생각이 많았던 것으로 보였다. 부모와의 거리는 소원했다 해도 당시 집안환경이나 교육조건, 주변 인물들로 보아 얼마든지 활달하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적어도 청년기까지는) 스스로에 대한 요구치가 지나치게 높아 자신을 반성하거나 다그치는 시간들이 혼자 있는 시간의 주를 이룬 것은 다분히 타고난 기질적 요인에 있었다고 느껴진다. 오사무는 자신의 천성적인 나약함과 평생을 투쟁해 왔다고 생각되며 어쩌면 그 나약함을 이기려고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사무는 부모님과의 기억은 없었지만 막내 동생, 숙모, 하녀들과는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며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낡은 앨범속의 빛바랜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예닐곱 살에는 책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던 하녀로부터 방화범, 거짓말, 지옥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대해 편향적인 이야기를 듣고 미신적인 공포를 체험한다. 소학교에서 글짓기에 진실을 담아 쓰면 결과가 좋지 않고 거짓을 쓰거나 표절을 하면 항상 칭찬을 받았던 경험은 많은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실제 일상에서도 솔직하게 진실을 전해야 하는 것과 남들이 좋아할 거짓을 선택하는 것 사이에서 혼란스런 학창시절을 보낸다. 형제들 중에서도 잘생긴 형이나 동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처럼 못생긴 누나와는 애틋했으며 어릴 때부터 병약했기에 옷차림과 자세, 이마와 머리모양, 건강과 피부색깔에 관한 남들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열등감과 자존심 때문에 공부했으며 관심있는 여자에게는 절대로 먼저 접근하지 않는 소극성을 우월감으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굳어지며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없었던 공허한 몸부림은 창작이라는 도피로 이어지며 사실상 그때부터 작가라는 외로운 길을 걸었다고 보여진다. <추억>의 마지막은 자신이 짝사랑하던 고향집의 하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자 그녀와 어머니, 숙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숙모와 닮은 하녀를 발견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수록작인 <추억>을 읽으면서 하찮은 멸시를 받으면 죽어버리려 결심했다고 하는 그의 극단을 꽤 어린 시절부터 접하고는 결국 자살은 인간관계에서 혼자 연민하고 혼자 판단하며 혼자 결론짓는 삶의 습관을 형성해온 자의식의 과잉때문 이었다는 것을 일찌감치 감지 할 수 있었다.
제 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 될 뻔 하였던 <역행>이라는 작품 역시 젊은 시절의 팽창된 자의식의 흐름을 시간의 역순을 따라 보여주며 독특한 서사를 선보였다. 만약 이 작품이 차석이 아닌 1등의 수상을 했다면 어떠하였을까. <추억>과 <역행>은 이미 두 번의 자살을 기도하고 반제국주의 학생운동을 하다 자수와 함께 완전히 발을 뺀 직후에 쓰여진 작품들이었다. 특히나 동반자살에서 카페 호스티스는 죽었고 자수역시 그의 죄책감을 극대화하는 상처였을 것인데 그 시기에 자신이 우상으로 여기던 작가의 이름으로 제정된 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면 얼마간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마땅한 전환점을 찾지 못한 오사무는 그 이후에도 같은 상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며 자신의 문학적 행로에 있어 아쿠타가와상에 대한 의미를 세상과의 화해로 생각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은 있어 보이나 사생활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심사평은 그를 더욱 세상과 단절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끝내 상을 수상하지 못한 오사무에게 자살에 대한 정당성을 굳히는 문학적 테러였다고 생각된다.
<역행>은 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물다섯을 넘긴 노인의 임종을 묘사한 '나비'를 시작으로 도쿄대 학생으로서 시험을 치는 날의 풍경과 식당에서의 에피소드를 그린 '도적', 술집에서 농사꾼 남자를 무시하다 결투까지 하게 된 '결투', 마을을 방문한 곡마단에서 재주를 부리던 검둥이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동일시 해보던 소년의 추억을 그린 '검둥이'의 짧은 이야기가 단편속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야기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역행>이라는 묶음만 없었다면 연결고리가 없는 개별적인 작품으로도 인식될 수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동인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음이다. 네 가지 이야기를 공통으로 관통하던 감정은 자신을 향하던 지독한 냉소였다. 그다지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소한 생각과 행동들에 쉽게 상처 받고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 결국 화살을 자신에게 쏘고 마는 결말은 청춘이 가지는 자기파괴의 특권이라 생각하기엔 그 골이 너무 깊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긴 생애에서 거짓이 아닌 것은 태어남과 죽음, 단 두가지 뿐이라는 그의 결론은 너무 완벽해 보여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음이다.
자의식은 내면을 향한 냉철한 의식이지만 자의식에만 빠질 경우 외부와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과 그로인한 병적인 망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오사무는 그토록 과잉된 자의식 속에서도 자신을 가치있는 인간으로 인식하는 자각은 평생 해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인 오사무는 절망으로 막을 내렸지만 문인 오사무는 바로 청춘의 '분열과 팽창'을 상징하는 문학의 희망으로 남았다. 오사무가 일본문단에서 작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했을 젊은 시기의 글들을 보면서 아마도 다음 세대의 일본 작가들은 오사무의 청춘의 분열과 팽창을 자신의 질료로 삼아 작가적 소양을 갖추어 나간 문인들이 많았을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폐허의 기억
-공허한 심연이 표현된 고흐의 자화상-
오사무의 작품 이력에서 커다란 계기가 되는 역사적 사건은 태평양전쟁과 그 패배였다. 이 작품에 실린 <망치소리>와 <아침>은 전쟁 패배 직후(1947)에 집필, 발표된 작품들이었다. 문단 초창기 이후 또 한번의 동반자살기도도 있었지만 모친은 별세하고 자신은 오랜 병마와 싸우면서 청춘의 열정을 거의 소진한 상태라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앞선 <추억>과 <역행>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날카롭고 예민한 감정상태보다는 슬프고 무의미한 자신의 감각을 나지막히 읊조리는 듯한 분위기는 전후에 폭격으로 소실된 자신의 고향집을 연상케 하며 점차 죽음의 그림자가 더 크고 더 깊게 드리워져 가고 있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망치소리>는 스물 여섯 살의 청년이 어느 소설가에게 자신의 고민을 고백하는 내용의 편지글이다. 화자는 태평양 전쟁에 참여해 일본이 항복한 후 고향에 돌아와 우체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평범한 젊은이였지만 군대에 있을 당시 전쟁의 패전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과 해산을 명하는 상사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시점에 쇠망치 소리를 동시에 들었던 기억을 무의식에 저장해둔 '상처 입은 청춘'이었다. 비장하거나 엄숙하지 않고 차분해지던 그때의 충격은 그 이후로 화자가 생의 열정을 감지 할 순간마다 여지없이 의식을 두드리며 찬물을 끼얹는 '탕탕탕'의 불청객이 되고 만다. 화자는 이 환청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자신의 고민거리를 소설가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망치 소리는 일, 사랑, 인간관계 모두를 잠식하며 결국엔 '허무의 열정'마저 무너뜨려 자신마저도 지각할 수 없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외상증후군이었다. 작품자체는 소개된 어느 작품보다도 매끄럽고 감상적이었지만 만약 현실에서도 비슷한 환청에 시달린다면 더 이상 삶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으로 무의미한 현실을 견뎌내는 반복된 습관으로도 인식되었다.
<아침>은 수록된 작품 중에서 가장 짧은 분량의 소설로 작가로 보이는 화자가 집중을 위해 마련한 비밀사무실에서의 일상을 촛불과 교차시키며 자신의 심리를 전달한다. 비밀사무실에는 애인도 연인도 아닌 친분이 있는 여성이 살고 있고 나는 만취한 상태에서 그녀와 같은 하룻밤을 지내게 되지만 촛불을 밝히고 그 촛불이 꺼질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시각각 촛불이라는 소품에 자신의 시선과 심리를 투영시키며 불꽃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대화의 기운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촛불이 꺼지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각오를 다져보지만 다짐과 동시에 그만 아침이 되어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촛불이 켜져 있을 동안만 열정이 불살랐으며 그 열정을 실천하려 함과 동시에 촛불이 사라지고 어둠이 사라지는 것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결론일 것이다. 촛불이 꺼진 것은 아쉽지만 더 이상 번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볼 수 있고 죽음이 아침인 것은 곧 절망만이 희망인 것을 의미하기에 이 역시 반복되어온 오사무의 일상적 고뇌를 일상의 편린으로 표현하였다는 생각이다. <망치소리>와 <아침> 두 작품은 전후 폐허가 된 일본사회에서 심리적으로 그 어떠한 열정도 다시 불태우기 쉽지 않았던 오사무의 절망을 직접, 간접적으로 드러내었기에 그 안타까움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고백과 농담
- 자학과 조롱으로 연민에 호소하는 자화상-
이번 소설집에서 (모두 솔직하지만)특히 오사무의 가공없는 솔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작품은 <내 반생을 말하다>였다. 그런 면에서 <굿바이>는 평소에 자신이 잘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아마도 죽기 전에 한번 세상을 향해 웃기는 소리를 내뱉고 가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작품은 모두 오사무가 다섯 번째 자살시도에서 드디어 성공하기 바로 직전에 쓰여졌고 <내 반생을 말하다>는 거의 직접적인 유서로 보아도 무방해 보였음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그동안 자신이 세상에 적응 할 수 없었던 이유들을 고이 정리하여 '나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세상과 이별하고 싶었고 나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사람들로부터 잘난 체 한다는 비난으로 돌아왔고 문학에 입문하게 된 것은 어떤 큰 뜻을 품고 이룬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들판 한가운데 서게 되었고 안톤 체홉, 푸시킨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좋아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괴짜로 부르기에 도덕적이지 않다고 오해를 하지만 실은 기독교적인 삶의 태도, 프롤레타리아 적인 의식으로 무장된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싫어하면서 학대하는 것은 곧 상대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살할 수밖에 없는 태도임을 깨달았다...그래서 술을 마셨고 가정은 파탄이나 빈곤함을 면치 못하고 결국 처자식을 부양하기엔 너무나 형편없어 죽어야만 할 것 같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 그의 반생...에 대한 고백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많은 이유를 열거하는 반성문과도 같았음이다. 그런데 아직 나의 전생이 아닌 반생인 것을 보면 죽음을 결심하지는 않은 단계로도 보였다. 실은 그것조차 남은 반생에 살짝 유보한 상태였겠지만 이야기적으로 죽어야 할 이유는 참으로 마땅해 보였기에 그 역시 아무런 토를 달수 없는 글이었다. 그는 왜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고민하며 글을 남기지 않았던가.
완성을 다 하지 못한 <굿바이>라는 유작은 완성을 하지 않은 사실 자체가 그 작품의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이 작품을 집어들 때 신문에 연재분을 넘겨놓고 자살 무대로 달려가는 그의 심리가 퍽이나 궁금했다. 몇 회만 더 작성하면 마무리를 볼 수 있었는데 완벽주의자였던 오사무가 자살하는 마음 한 켠에 미완의 원고를 남겨두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보였기 때문이다. 그 많던 정부들과 소설속이긴 하지만 헤어지기 미안했던 것일까. 주인공은 그동안 큰 의미없이 만남을 지속해오던 정부들과 어느날 갑자기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이별통보를 위해 '까마귀소리'라는 비현실적 캐릭터를 앞세운다. '까마귀소리'라는 여성과 정부를 한명 한명 찾아가기까지의 농담 따먹기와 찾아간 순간의 웃긴 상황, 어설픈 이별을 하고 난 뒤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또 다음 정부를 찾아가는 서사가 핵심인 이 작품은 사실은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과의 불공평한 인연을 정리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마음약한 자신에 대한 대단히 웃긴 조롱으로 느껴졌다. 그 작품을 마무리 한다는 것은 아마도 작가로서 상당한 만족감을 주었을텐데, 작가는 그러한 상황을 예견했는지 행운이나 열정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던 것으로 해석된다. 어짜피 다시 열정을 느껴보아야 그것을 채 느껴버리기도 전에 다시 사그라들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아예 모든 희망과 절망조차 미리 차단해버리는 심리는 우울증의 핵심이다.
결국 자신이 답습해온 삶의 패턴대로 여인과 투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에 대한 벌이었을까. 더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동반자살의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나머지 여성들이었다. 실제로 오사무의 자살기도로 세명 중 두명의 여성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수면제로 혼자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투신할 땐 여성과 함께였고 그들은 모두 화류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이었다. 즉, 그들 역시 앞날이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았을 것이고 오사무의 심리적 상태를 인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라면서 모성부재와 부성공포로 상처입은 오사무의 저 심연 밑바닥엔 여성과 살아서 이루지 못할 사랑을 죽어서 이루자는 취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남과 같은 모성의 품안에서 자유롭게 바다로 뛰어 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다시 탄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가장 대표작인 <인간실격>을 아직 접해보지 못했기에 욕심이 생긴다. 여섯 개의 단편이었지만 솔직하고 섬세한 문체와 함께 끊임없는 자의식에 대한 질책이 의도적인 은유로 반복되는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적 독창성은 은근한 중독성을 가공한다는 결론이다. 많이 울어야 할 것 같지만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 낸 다음 글로 담아낸 물기 없는 눈물의 미학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그가 자살한 덕에 누리는 행운일 수도 있겠다. 문학은 공급자의 처절한 입장과는 별도로 그것을 취하는 대상에게는 턱없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준 작품이었다. 그가 몸을 던진 바다가 문학의 바다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굿바이...지금, 여기 보단 조금은 더 좋은 곳이길 바래 본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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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무의 자화상을 보면서
자화상을 그린 고흐가 계속해서 중첩되었다.
시대와 분야는 달랐지만 자살로 이른 두 예술가를 향한 서글픈 공감만은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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