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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평점 :
어느 시골마을에 아담하고 오래된 간이역이 있었다. 하지만 더 새롭고 더 빠르게 변한 세상은 열차의 크기를 줄이고 말았다. 조금 더 있다가는 노선이 사라지고 할 수 없이 역무원도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역사 驛舍도 사라졌다. 이제 驛舍를 지나온 이별의 歷史마저 사라지는 것일까. 이별했다고 만났던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듯, 驛舍가 사라졌다고 기차가 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기, 이별하러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차를 타고 왔다가 기차를 타고 떠났을 것이다.
나는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영화나 미술보다 훨씬 소심하다. 덜커덕 선입견으로 작품을 집어 든다든지 서점에서 몇 장 넘겨보고 그 첫인상만으로 계산대로 달려가진 않는 편이다. 적어도 내 의지로 선택할 땐 어쩐지 늘 책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자신이 없다. 지인들이 추천하거나 나와 성향이 비슷한(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내 주관을 의지하고 싶은 것이다.(그러니 편향적일 수 밖에) 그런데 가끔가다 소설의 제목이 시집같다거나 시집의 제목이 소설같으면 본능적으로 끌린다. 혹시 낚일지 몰라도 본능을 따르고 만다. 『이별하는 골짜기』는 바로 그 우물쭈물하는 내 본능에 강력하게 호소했다. 문지 홈피에서 제목만 언뜻 보고 시집인 줄 알고 있다가 몇 개의 홍보기사에 "간이역처럼 스러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는 물론이고 김승옥, 이청준의 단아함과 절제를 계승했다고 하는 평가나 한마디로 "애잔함"...(애잔이라 했다)을 주장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애잔하고 싶었다. 애처롭고 애틋한 애잔이었겠지만 나는 애잔(사랑하는 나머지, 愛殘)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할 수 없이 愛殘에 만취했다. 이 소설은 사계절을 테마로 사람들의 사연을 한데 모았지만 나에게는 온 계절이 꼭 시월의 단풍, 낙엽의 거리로 느껴져 가을의 소설로 다가왔다. 내 본능은 가을이 필요했고, 가을은 문학을 손짓했던 것이다.
이별이다. 그들은 모두 이별했다. 아니 이별해야 했기에 실은 만난 것이다. 아니 이별할 줄 모르고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날 줄도 몰랐었던 것이다. 작가는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를 이별하는 골짜기(別於曲)로 불러 들여 한명마다 계절의 이름을 부여하고 이별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명의 남자는 간이역의 역무원으로, 두 명의 여자는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외지인으로 교차시켜 이들이 별어곡에 모이게 된 세월과 연유를 차근차근 꼽아 본다. 기차가 다가오면 마음이 달뜨고 기차가 멀어지면 마음이 허전하듯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을 시적 원근감으로 조율하는 작가의 운전이 어찌나 세심하고 서정적이던지 책을 덮을 때 마저 조심스레 마음을 내려놓았다. 간이역이라는 곳이 언제든 기차가 들어오고 떠날 것을 알기에 실은 만남이든 이별이든 기다림이 반 이상이고 기다림은 누구에게든 잠시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간이역에 잠시 쉬지 않고 이별하는 골짜기에 머무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혹 저마다 간절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결국, 이 작품을 '만남'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 들이고 싶었다. 어쩌면 가을에 누군가를 떠나 보내기 힘들었던 세상 모든 이의 추억이라 해도 좋다. 아직은 가을의 추억이 겨울의 기다림보다 애잔하니까...하지만 나는 애잔(사랑하는 나머지, 愛殘)하고 싶었으니까.
애틋한 이야기 - 시인, 언젠가는
시작은 '별어곡의 시인'이라 불리는 역무원 정동수라는 젊은이였다. 오래전에 울면서 본 일본영화 <철도원>을 떠올리며 하얀 눈으로 뒤덮인 시골 마을에서 역무원으로 평생 살아가는 남자의 사연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데...간이역과 시인이라...그는 생명의 축복과 계절의 환희를 느낄 줄 아는 청년이었다. 그는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노시인의 충고대로 노트에 아름다움을 적으며 상상력을 훈련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날마다 뭐든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을 천 가지만 찾아내봐."
그런데 여자라곤 어머니와 외할머니 밖에 모르던 자신을 의지하던 다방 여종업원, 빨강머리 소녀가 뜻밖에 자살을 하고 길가에 버려진 병든 개는 주인을 찾아 헤메다가 결국 아스팔트에서 검붉게 발견된다. 여지껏 평범하게 자라왔다고 믿던 그는 책장에서 탄광촌의 어두운 역사와 마주하고 비로소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막연한 어두움은 눈앞의 두려움과 조우한 것이다. 그는 기차가 끊긴 시간에 제초제를 마셨다는 아들을 만나러 가기위해 눈물콧물로 유리창을 두드리던 노파를 보며 '시'는 '아름다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곧 우리네 삶이었고 곧 그의 삶일 것이었다. 도망치거나 외면해선 안 될 그 무엇이라는 청년의 눈물앞에 하얀 나비가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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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나비의 날개 짓이 슬픈 건 아름답기 때문일까. 하지만 청년은 슬퍼하지 않았다. 순진한 시골청년, 막내 역무원의 가슴에 날아 든 것은 그래도 품어야 할, 자신의 꿈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수십 마리의 흰나비는 날갯짓으로 힘차게 그를 응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는 슬프기도 아름답기도 한것-
애절한 이야기 - 기차여, 용서해요
"저 아저씨도 참 박복하시네요."
철도 공무원 생활 35년의 백전 노장 신태묵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가장 내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한 가지 일을 오래한 남자들을 보면,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것이 그다지 세상에서 알아주는 일이 아닌 경우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중첩되며 부질없는 그리움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하곤 한다. 신태묵은 피난길에서 혈육을 읽어버린 후 오랜 불면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환각과 고통의 날들을 매일 들이고 내보내는 기차로부터 위안을 받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업무중 실수로 한집안의 가장이자 대학진학의 꿈을 갖고 있던 수려한 용모의 젊은이를 치어 죽이게 되고 운명의 장난으로 그의 아내와 딸과는 역사에서 재회한다. 신태묵의 실수를 전혀 모르던 남자의 아내는 신태묵의 구애를 받아 들이고 행복을 약속한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비밀에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던 신태묵은 더욱 더 아내를 향한 집착과 소유욕으로 자신과 상대 모두를 파괴시키고 우연히 신태묵의 비밀을 알게 된 아내는 그만 자살을 하고 만다. 내 손으로 당신을 죽여 버릴 거라던 의붓딸의 절규와 반 실성한 듯 나비처럼 날아갈 거라는 딸의 노래가 한동안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 한 번도 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신태묵은 사위로부터 딸이 여섯 번째 유산 끝에 일곱 번째 드디어 아들을 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년기 이후 터지지 않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고 만다.
그는 역사 주변에 매년 꽃씨를 심던 따스한 사람이었고 술이 들어가면 정선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부르던 사람이었다. 일생동안 소중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잃는 것만이 익숙했던 그가 아는 단 한 가지 사랑법은 상대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일방적 '동화同化'였다. 눈앞이 캄캄해 질정도로 아득한 그의 눈물앞에 팔랑팔랑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 들었다. 평생 쇳물 같은 덩어리로 펄펄 끓기만 하던 그의 가슴이 봇물처럼 터져버리던 그날 그가 곱게 심은 꽃씨는 기쁨과 행복의 나비로 피어 난 것이리라. 그는 사람이 아닌 세상에 '동화同化'됨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물은 슬프기도 기쁘기도 한 것-
애통스런 이야기 - 할머니, 잘가요
작가가 가장 공을 들였다고 생각되는 '겨울이야기-귀로'는 전라도 구례가 고향인 전순례라는 70대 할머니의 차마 눈뜨고 보고 들을 수 없는 우리시대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작가는 어쩐 일인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장 길고도 가장 자세하게, 그리하여 더 이상 슬픔과 한탄과 분노에서 한 치도 도망칠 수 없을 때까지 우리를 쉬지 않고 몰아 붙였다. 50대의 조카와 우연히 마을에 흘러온 할머니는 늘 바퀴가 달린 가방을 질질 끌고 역사로 들어와 차표만 사고는 멍하니 기차를 바라만 보는 별어곡의 '가방할멈'이시었다. 꽃다운 열여섯의 나이에 만주 방직공장에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동네이장의 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청춘을 짓밟힌 그녀의 '위안부 체험기'는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다. 나치 수용소에서 처형된 유태인이거나 중국인 마루타의 이야기처럼 남의 나라 남의 불행이 아닌 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운 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어서 끝이 나주기를 기다리며 벌렁거리던 가슴을 꾹꾹 누르고 있어야 했으며 사실, 다른 이야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분량으로 정밀묘사 했어야 했는지 되묻고도 싶었다.
조금 더 짧았어도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작가는 적당한 지점에서 비극의 서사를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일까. 가방 할머니의 과거 스쳐온 이야기로 적당히 언급하기고 말기엔 스스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동안 분단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천착해온 작가이니 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모자르고 턱없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방할머니와 함께 위안부 생활을 했던 언니들과 동생의 죽음이 더 할 수 없이 애통하다. 일본군에게 영혼과 육체를 짓밟혀 가면서도 사랑하던 남자의 아이를 끝까지 지키려했던 마유미의 죽음은 거룩했다. 한명 한명 동료들이 가진 천조각을 모아 화장실 천정에 목 매달아 죽은 다케코의 죽음은 처연했다. 도피하지 못할 처지만큼 병세가 악화된 환자 유리코의 거품물린 죽음엔 피가 끓었다. 절벽 꼭대기에서 몸을 던진 사다코의 죽음은 차라리 탈출과도 같았다. 가난한 농사꾼의 장녀로 태어나 별명은 걸귀가 씐 '허천뱅이'였던 만큼 굶주린 식구들을 위해 입하나 덜어준, 가족과 시대의 희생자 전순례 할머니의 기구한 삶을 오래도록 잊지 말라는 통곡의 외침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을 듯 죽을 듯 기어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이유도 불행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저주받은 현실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만주벌판에서 구사일생으로 자신을 구해준 남자와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지만 연이어 터지는 한국전쟁은 그녀에게서 남편과 아이를 빼앗았고 십 수년 만에 밟은 고향땅에선 빨치산 동생 때문에 온가족이 비참하게 몰살당하고난 흉가만이 그녀를 반겨줄 뿐이었다. 아...순례할머니는 살아 남은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그녀에겐 자신만이 아는 목적지가 있을 터이다. 기어코 찾아야 할 어떤 것, 가 닿아야 하는 목적지.
그것이 아직 존재하는 한 그녀의 외출은 죽는 날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225p
그녀는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노란나비의 꿈을 꾸었다. 자살을 결심하고 강가로 들어갔을 때 마저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수천마리의 황금나비 아니었나. 그녀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은 지천으로 피던 산수유 꽃과 눈부시게 아름답던 노랑나비가 날아다니던 고향마을 그 언덕에 검정치마와 노랑저고리를 입고 있던 소녀,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할 그 소녀에게로 ...가 아니었을까.
- 피지 못한 꽃, 날아가지 못한 꿈 -
애처로운 이야기 - 손가락, 울지마요
마지막 이야기는 별어곡 맞은편에 어울리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한 빵집주인 '안경 쓴 말라깽이' 여자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무녀이었던 빵집 여주인은 늘 불행에 대한 자신의 육감을 절대적으로 믿어왔기에 이곳 역무원 정동수와의 만남이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음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산속에서 탈영병을 만나 그로부터 아내에게 편지를 부쳐줄 것, 자신을 보았다고 절대 말하지 말 것을 부탁받는다. 하지만 장교아버지를 둔 그녀는 탈영병과의 약속을 지키기에 너무 어렸고 그녀로부터 위치를 알게 된 군인들에게 포위된 탈영병은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의문을 늘 품고 있던 정동수의 진짜 아버지가 탈영병이라고 확신한 그녀는 어머니를 묻고 온 그에게 평생 숙원이던 속죄의 시간을 부여받고 드디어 자신을 옭아맨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탈영병을 가리키던 그녀의 손가락은 결국 사는 동안 자기 자신을 카리키며 지독히도 상처를 찔러대었던 것이다. 이제 그 손으로 탈영병이 쓴 편지를 불러내어 정동수에게 읽어주던 그녀의 굵은 눈물은 만남이 곧 이별이었던 간이역의 가장 아름다운 역사로 남게 되었다.
그녀에겐 생의 특별한 고비 마다 커다란 부채꼴 날개를 단 주홍색의 나비가 찾아든다. 그녀는 늘 그것이 불운과 위험의 징조라 생각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의 손을 내보일 수 있게 될까. 주홍색 불행이 아닌 주홍색 열정이었다면 틀림없이 손을 가리지 않으리라.
- 다시, 생의 열정으로 -
별어곡이 1인 배치 간이역에서 무인역으로 격하된다는 소식은 마을 사람들을 역사라는 추억의 공간으로 모두 불러 모으게 되고 신태묵과 정동수를 비롯한 역무원들은 저마다 별어곡과의 만남과 이별을 가슴에 새겨 넣는 자리를 마련한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던 날 이들은 종무식과 송별회를 한 것이다. 비록 같은 날 이 땅의 수많은 역들이 무인 간이역으로 일제히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곳 간이역에서 얼마나 많은 이별과 만남을 치루어 내었는지, 그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났지만 그 곳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우리들은 그 만큼의 만남과 이별을 기억할 것이다. 마지막 근무자 동수가 별어곡을 떠날 때 떠오른 수천수만 마리의 나비들이 무수한 만남과 이별의 기억들인 것이다. 3월의 눈꽃처럼 하얗게 가슴에 내려앉은 이별하는 골짜기에서 였을 것이다.
오늘, 기차타고서
네 사람은 모두 별어곡에서 헤어졌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똑같이 누군가 꼭 만나야할 사람이 있었고, 꼭 만나야 할 그 무엇도 있었다. 별어곡 시인 정동수에겐 살아생전 비밀로 관철된 아버지에 대한 진실여부를 꼭 만나야만 했었다. 35년 철도역무원 신태묵씨는 죽은 아내에게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딸을 꼭 만나야 했었다. 위안부 전순례 할머니에게는 북으로 끌려간 남편 소달섭의 생사와 꼭 만나야 했었고 빵집주인 아주머니는 탈영병의 가족을 만나서 그의 마지막을 알려야 했었다.
이들 네 사람의 인연을 이끌고 운명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한 사건은 다름 아닌 한국 전쟁이었다. 이들은 모두 분단과 전쟁에 관한 직접, 간접의 상처를 품고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전쟁세대와 전후세대를 지나 전쟁과 무관하듯 살아가는 세대가 되고 있는 우리들은 결국 상처의 인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후세대 인 것이다. 사라져 가는 역사驛舍와 사라질 뻔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정적인 표현으로 애잔함을 선사한 작가의 '순수'를 향한 고집을 엿보았다.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올 것이다. 올 것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쓸쓸함을 알고 있는 행운이 반복의 상처를 뛰어 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겨울보다 봄보다 가을이 더 헤어지기 힘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언제나 헤어짐은 그 계절의 지금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가을이니 당연히 가을의 이별이 더 애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음 겨울에 느끼는 겨울이별은 가을보다 더 아플 것이리라.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사는 오늘은 언제나 내일보다 더 아프고 더 슬픈 것이다. 간이역은 어제와 내일을 이어주는 우리 슬픔과 실연을 잠시 놓아두는 곳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골짜기는 될 수 없었음이다. 우리 모두는 그 모두를 다시 짊어 들고 기차를 탄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가을을 떠나고픈 작품이었다. 단풍이라면 더 벅차지 않을까 싶다.
겨울을 앞둔 나무들은 제 스스로 가지의 잎을 모조리 지워낸다. 잎과 가지에 물기를 남기면 추위에 금방 얼어붙고 말 터이기 때문이다. 한 올 집착도 미련도 남기지 말아야 함을, 어짜피 떠나보낼 것은 보내야 함을 나무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86p
- 인생, 다시 짊어 지고 오르는 오늘의 여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