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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학교 - 제10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보름달문고 35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바위에 계란
거짓말...돌이켜보니 거짓말을 해놓고 가장 크게 죄책감을 느꼈던 사람은 역시 엄마였다. 그리고 내 거짓을 밝혀낸 사람도,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가장 큰 질책을 가한 사람도 엄마였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을 통털어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한 사람도 엄마라는 결론에 이른다. 바른 말도 많이 했을 터인데 왜 그 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성장한 후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사회생활하면서는 또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다녔을까. 그런데 이상한 건 어느 시점 이후로는 내가 한 거짓말에 죄책감을 느끼기는 커녕 몇몇 상대의 배신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거짓말에도 크게 상처 받지 않아온 것 같다. 그 순간 서운한 마음 그뿐이었고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지 싶다. 아니 그래야 살아졌다. 내 쪽에서 크게 피해가 가지 않은 경우라면 내 허물도 만만치 않으니 거짓말쯤으로 상대를 비난할 자격은 서로들 없다고 생각했다. 내 거짓으로 상대의 거짓 퉁치기. 오늘, 이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내가 거짓을 용인하고 거짓말을 눈감아 주느니 당신도 그러리라 믿으며 거짓으로 인한 상처에 불감해지는 것이 정녕 나이먹는 일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지난 시절, 아직 가치관과 자의식이 완성되지 않았을 그때, 상대를 속인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그 순간 엄마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고 그 후에도 지나가는 선생님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어린 내가 그립다. 이 책은 바로 순진했던 그 가슴위에 쌓인 수많은 거짓말로 속고 속아온 내 두터운 심장앞에 거짓말처럼 도착해 그 심장의 두께를 제대로 가늠해 보고 싶도록 만드는 작품이었다. 여간해선 누구의 거짓도 뚫고 들어 올 수 없게 된 그 두께는 곧 어떤 진실도 통과하기 힘든 거대한 벽과도 같았다. 책을 덮는 것이 내 굳건한 심장을 두드리는 일이었다. 오랜 세월 바람에 풍화되고 파도에 침식된 후 켜켜이 퇴적된 바위덩어리 하나가 내 속에 버티고 있었다. 거짓말...같은 진실이다. 진실같은 거짓말이 내 거짓말 같은 진실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떤 거짓말은 세상의 모든 진실보다 위대하다, 바로 문학이라는 거짓말이 학교를 오래전 마무리한 내게 학교와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내안의 바위를 향해 문학이라는 계란을 힘껏 던져보았다. 한 두번으론 꿈쩍도 안할 것 같아 여러 번 이 책을 뒤적거렸다. "자, 이제 어떡할래?"
훌륭한 학교
사실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건 거짓말의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릴 적부터 '거짓은 잘못, 거짓말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교과서적 명제를 절대 불변의 진리처럼 누누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은 하루에 200번 거짓말을 한다고 하며 전 세계적으로 사기꾼이 가장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라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곧 하루에 200번 잘못하는 천하의 나쁜 존재이며 그러한 인간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과 다를 게 무엇인가.(틀릴 것도 없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거짓말은 제2의 천성'이라 주장하며 심리학과 교수들은 '거짓말은 사회적 재능'이라고도 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거짓말은 사회의 공동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 자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기나 음모, 위증같이 명백히 상대를 속여 피해자가 발생케 하는 거짓말도 있지만 상대를 위한 배려, 애교차원의 아부가 섞인 선의의 거짓말도 있는 것이다. 장소 및 때와 상황, 그리고 상대에 따라 '거짓말'은 역기능도 순기능도 담당하는 유기적 개념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당해온 것처럼)거짓말에 한해선 옳고 그름을 거짓말 자체의 등장여부에 두는 아주 단순한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해왔다. 일단 거짓말은 나쁜 것이니 될 수 있으면 최대한 하지 말아야 하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때 세상과 사람을 알아가듯 알게 될 것이다...이렇게 말이다. 즉, 거짓말의 의도나 목적, 거짓말의 종류, 거짓말의 단계와 단계별 진행방법, 거짓말의 수위, 거짓말의 효과등에 관해서는 살다보면 스스로 깨우쳐진다는 말과 다름 아닌 것이다. 거짓말을 배울 필요가 없으니 그 사용처를 알 필요가 없다는 논리와 같다. 이 말은 사람을 배울 필요가 없으니 세상을 알 필요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거짓말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인간을, 그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아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거짓말 학교』는 사람과 세상을 가르쳐 주는 학교였다. 내 평생 가장 훌륭한 학교였다. 문학의 역할이 이처럼 통쾌한 적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아동문학이 역설하는 이 발칙함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의 사랑스러움, 어찌할 바를 모를 환호가 미소로 번져오는 작품이었다.
내 부모님은 어떤 사연이 있으셨는지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 그것도 마흔이 다 되어 보시는 통에 나는 그만 외동이가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내 주변엔 내 또래의 아이들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고로 어렸을 적부터 내 말동무는 대부분 어르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어른들이 좋아하는 모습의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성장해야 했었다) 어른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일찍부터 간파하여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보여줌으로써 칭찬과 사랑을 잃기 싫었던 탓이다. 이 유년기의 생활태도는 학교생활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선생님들이 어떤 학생을 선호하며 호감가지는 지 한발 앞서 실천함으로써 그들로부터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재능이자 내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친구 엄마들이 나와 전화를 하며 자신의 딸이자 내 친구인 그 녀석의 미래를 같이 걱정하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가장 지독하다고 악명높은 상사밑에서 그 시절 가장 오랜 기간을 견뎌낸 직원이 되기도 했다. 물론, 내가 그 어르신과 선생님들, 조직의 윗분들을 매순간 마음으로 존경하고 진심으로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싫어도 싫지 않은 척, 혹은 좋은 척'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들을 속이고 그러한 나 자신도 속이며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이리라. 내 목적을 위해 진실이 아닌 거짓을, 거짓말을 반복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더 참혹하게 말해볼까... 거짓과 거짓말로 이룩된 내 인생, 다는 아니라 해도 전부 아니라 말 못하는 진실,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해당되는 이 진리, 오늘 나는 진심을 다해 이야기 하고 싶다. 어쩌면 단순히 리뷰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한번은 나누어야 할 담론이자 소중한 대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막 중학생이 된 십대이다. 막연하던 꿈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면서 향후 진로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포부가 가장 큰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시작되는 거짓말은 초등학교 아이들의 노란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엄마의 관심을 끌기위해 거짓으로 울고 칭얼대던 갓난아기를 지나와 친구의 물건을 빼앗고 모른 척 하는 유치원시기의 유아적 행동도 끝마쳤다. 숙제와 청소가 하기 싫어 꾀병으로 아픈 척하는 초등생의 거짓말 수준도 유치한 시기이다. 이미 많은 거짓말을 학습해 온 이 시기의 거짓말은 속이 보여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노란 거짓말보다는 더 진하고 들통날 때까지 버텨보는 새빨간 거짓말보다는 연하다. 책에서처럼 가정환경이나 성적, 교우관계에서의 열등감과 관련한 자아보호격의 거짓말이 많아질 시기이다. 아직 덜 익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톡톡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오렌지색의 거짓말인 것이다. 이것은 가치관이 완전히 성립되지 않은 이들에게 비타민C 처럼 과다섭취하면 부작용이 생기지만 어느 정도 그 나이까지 살아온 자신을 지키는 방어기제로서 작용하는 거짓말이 아닐까. 즉, (그 시기를 거쳐 온)어른 된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만한 거짓말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거짓말의 층위를 타자나 사회를 향한 종류의 것(외적인 거짓말)외에 내 자신을 향한 거짓말(내적인 거짓말)로 쪼개어 결국 사회의 거짓말로부터 시작해 개인(독자)에게 마지막 물음표를 선사하는 짜릿한 수사학을 선보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진실을 밝혀내려는 거짓된 행보의 최종 도착지, 그 지점에서의 진실은 과연 우리가 밝혀야 하는 거짓인가 묻어야 할 진실인가 하는 가치관의 아노미 상태, 이것은 결국 억류로서의 난국과 다름 아니었다. 불행히도 나는 지금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버무리며 살고 있는 어른이었고 이 책을 읽어야 할 아이의 학부모였다. 즉,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으나 내가 알고 있는 인생을 아이에게 그대로 말하고 싶지는 않은 원래 어른 된 거짓이 자꾸 나를 방해 하는 것이다. 맞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 아마도 우리의 선생님과 학교는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실인 것처럼 거짓말을 해대었을 것이다, 아니 우리가 들었던 거짓은 그들이 바래온 진실일 것이다. 그때 내가 이러한 문학을 만나지 못한 것이 다소 억울하긴 하나 어쩌겠는가.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독자인 개인의 감상을 술회하기 보다는 언제나 진실을 강요하는 어른으로서 거짓을 질책하는 학부모로서 내 자리를 인식하게 하여 비로소 기성세대의 사회적 역할을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거짓말의 경험자로서의 추억, 학부모된 시각, 사회학및 교육이론, 마지막으로 아이의 의견을 종합해 나름의 진실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야기의 결말이 꼭 '너라면 어떻게 할거니' 고집스럽게 묻는 것 같아 나는 그 고집에 제대로 맞서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시사점, 반가운 질문
21세기 연금술인 거짓말을 가르쳐 주는 학교, 세계를 뒤흔들고 새 역사를 만드는 위대한 거짓말을 배우기 위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거짓말 학교' 는 사실 거짓말을 가르쳐 주는 곳이지 거짓말을 시키거나 거짓말을 위한 학교는 아니다. 이는 마치 인류평화를 위해 무기나 전쟁, 범죄를 배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범죄심리학을 가르치는 것이 범죄자를 양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듯.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 것처럼 진실과 믿음이라는 가치가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역설하는 반어법의 수사가 학교의 존립에 숨어 있다. 그런데 이 반어법의 시스템에 작가는 결론으로서 상투적인 교훈을 제시하거나 아이들에게 그러하니 진실이 더 중요한 것이라 강요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특수목적의 엘리트 양성학교를 연상시키는 이 특성화 학교는 뛰어난 인재배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은 인간에 대한 무모한 믿음과 쓸데없는 양심 때문에 실패를 한다는 이유로 인간의 양심과 죄의식에 해당하는 뇌의 영역을 물리적인 자극을 통해 조종하자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인간의 기억이나 감정을 관장하는 뇌의 영역을 연구하여 사이버 인간으로서 최첨단무기를 계획하거나 특수한 재능을 가진 복제인간을 만드는 허리우드 영화처럼 SF적 모티브를 시도한 것이다. 거짓말 학교라는 이 비인간적인 프로젝트를 특수효과가 현란한 영화가 아닌 아이들의 진실찾기 게임으로 재구성하여 아동문학으로 귀결하였다. 한국 아동문학의 종착지에서 '거짓말'은 선과 악으로서의 진실 대 거짓을 이야기하기 위한 인류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맹목적 성공을 위해 치열한 경쟁체제에 내몰린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의 획일적 교육시스템하에서 꼭 필요한 진실이 아니냐 되묻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스스로의 거짓말을 입체적으로 보게 하여 상대와 사회를 속이는 것이 아닌 자신을 속이는 거짓도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어떠한 답을 내려주지 않고 자기주도적으로 해답을 구성해 보라는 것이다. 이는 <거짓말 학교>라는 아동문학이 사회적으로는 교육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아이들이 추구해야할 진정성을 지향케 하는 두가지 시사점을 지혜롭게 겨냥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학교존립의 목적인 것이다.
거짓말 학교에는 여느 학교처럼 교장을 비롯한 선생님과 학생인 아이들이 있다. 소설의 시점은 나영과 인애의 시점을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데 이는 후반부 친한 친구인 상대의 거짓말을 통해 자신의 거짓말을 인식하기 위한 공평하고도 지혜로운 장치로 생각되었다. 우선 학교의 운영체제및 방식을 살펴보면 소설속 거짓속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진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국가에서 기밀로 운영되며 입학조건이 까다롭다는 것은 소수의 특혜를 위한 불공정한 시스템을 상징한다 할 것 이다. 낙오자가 생기며 우리시절 국민교육 헌장처럼 거짓말 헌장을 제창하도록 하는 것은 경쟁을 조장하고 조직에 대한 경외감을 세뇌시키며 뼛속까지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어학연수, 장학금등의 과장된 특혜와 졸업 후 국가를 위한 취업을 보장한다는 것은 특수계층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게 함과 동시에 조직의 낙오나 이탈은 곧 성공을 향한 기회의 상실이라는 상대적 박탈감을 가져오는 강력한 동기유발 및 유지 장치이다. 나는 이 학교에서 교장의 세뇌교육도 우스웠지만 무엇보다 '거짓말 뉴스'가 인상깊었다. 아버지가 부동산 재벌인 어느 후보가 국회의원 출마 공약으로 부동산 투기를 위해 세금을 늘리겠다는 참신하지 않은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비난인 것이다. 거짓말의 실패사례로 오늘날 어른들의 뉴스를 시원하게 조롱하는 것 같아 내심 '이것 봐라' 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거짓말 뉴스'를 시청하던 학생들이 거짓말처럼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처음엔 순진하게도 진실에의 충격이 불러온 혼란사태일까 싶었다.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뉴스를 듣고 쓰러질 수 있다면 그 가슴은 얼마나 순정한 마음이란 말인가. 우린 이제 어지간한 대형사고나 초유의 사기꾼이 아니면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만한 뚝심의 가슴을 키워놓지 않았던가.
이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공교롭게도 거짓말을 잘 활용하며 자신의 위치에 변함없이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학교의 교장과 교사는 물론이고 뉴스에 등장하는 국회의원 후보, 수업안에 포함된 정치인은 우리사회에서 제대로 된(?) 거짓말로 성공을 이루어낸 대표적 인물들로 소개된다. 이 학교 졸업생이면서 제약산업을 이끌어 간다는 어느 선배의 특강은 너무나 솔직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교장은 아이들끼리 서로 의심을 부추기고 부모는 아이의 치료경력 같은 건 무시하며 연구원은 자신의 연구과제에만 몰두하여 정작 그 중심에 있는 아이들보다 어리숙하게 묘사된다. 이는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기업인과 정치인을 비난하며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교사와 관료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행정체계를 꼬집는 것이며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치 않는 부모를 비웃는 아주 통쾌한 거짓말인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진실같은 거짓말은 우리사회 만연된 교육현실을 정확하게 관통한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신들처럼 거짓말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짓말에 속기 보다는 차라리 이처럼 거짓말을 당당히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어 당신같은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허를 찌르는 공격인 것이다. 작가의 당돌하면서도 당연한 질문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개인적 시사점, 내 자신 바로보기
거짓말 학교의 정식명칭은 '메티스 스쿨'(METIS-Mental Energy Traning Intensive Sysrem-SCHOOL)이라 하는데 '메티스'는 제우스의 첫사랑으로 충고와 지혜의 여신이 아니었던가. 신과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아는 것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사리 분별이 분명한 존재로 회자되는 이름인 것이다. 이 역시 거짓말이야 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지혜라는 역설적 작명이다. 그러한 메티스란 직역하면 '정신력 훈련 강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그러니까 여기서 정신력 훈련은 거짓을 지혜롭게 구분하는 것이 아닌 거짓말을 지혜롭게 사용하라는 뜻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기 자신마저도 완벽히 속일 수 있는 거짓말, 세계를 이끌어 갈 창의적인 거짓말 인재'라 함은 그러한 정신력 훈련의 강화로 탄생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여기서 창의적인 거짓말은 문학에서 <마지막 잎새> 처럼 희망을 이야기 하는 하얀 거짓말이 아니다. 오로지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양심이나 믿음을 부정하는 데 쓰여지는 지혜를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보편적 가치들에 대한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고 개념의 부정은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또 다른 부정을 낳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감당하는 방법으로 쉽게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속이는 차선의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인지부조화 현상을 받아 들였을까. 바로 인애와 나영이 겪게 되는 거짓과 진실로 인한 자아찾기는 인지부조화 현상의 한가운데 있다. 아이들이 힘겨운 여행 끝에 마주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어떤 일을 대하는 태도와 실제로 그것을 행하는 행동이 균형을 이루게 하려는 심리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내적신념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일치되지 않을 때는 저도 모르게 부조화를 기피하고 조화를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 인지부조화 이론이다. 부조화(불일치)를 피해 조화(일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쉽게 나타나는 태도변화가 자기 합리화라 할 수 있다.
인애의 경우를 보자. 아버지는 사기라는 큰 거짓말을 당해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기에 거짓말이라면 누구보다 분노하고 경멸해왔다. 이러한 인애가 거짓말 학교의 교육방침에 동조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지만 자신의 현실에서는 그 학교를 선택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인애는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대로 학교를 포기하기 보다는(행동변화) 거짓말에 대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꿈으로써(태도변화) 인지의 조화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인애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어기제는 그 거짓말에 지배당하지 않겠다는 논리로 강화, 발전한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속지 않으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은 누구든 밝힐 수 있다고 주체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최초에 가졌던 거짓말에 대한 생각을 변형하게 된 것이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인지부조화 현상을 자주 겪고 있는데 그렇게 좋다는 스마트폰을 손에 넣었는데 막상 사용해 보니 별로 대단할 것도 없고 오히려 더 불편하다 느낀 사람들이 있다. 이 경우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기 보다는 스마트폰에 오히려 객관적이지 못한 더 많은 가치를 찾고 부여함으로써 스마트폰의 기능적 우월성을 그 전보다 더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편한 것은 나일 뿐이지 제품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 인지부조화가 가져온 추론의 확장인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가치를 변경시키는 경향이 있다. 원래 신념을 교정하기 위해 과다한 논리로 자신을 포장한다든지 새로운 근거나 추론을 만들어 내어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아님에도, 그렇게 믿도록 자신에게 강요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다행히 인애와 나영은 자신들이 지금 인지부조화에 빠져 있는 상황을 깨닫고, 마지막엔 자기가 자신에게 거짓말 하였음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는 어른들에게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니, 오히려 어른이기에 더 뻔뻔하고 억지스럽다. 어른들은 여지껏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명예나 자존심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신을 속인 자신을 더 믿고 의지하여 나중엔 정말로 거짓자체를 진실처럼 여기게 된다. 세간에 뻔히 드러난 거짓을 가지고도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유명인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인지부조화 현상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결국 파멸로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어른일수록 인지부조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더 다양하고 강력한 방어기제가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인애외에 다른 학생들도 거짓말은 안 좋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거짓말 학교에 적응해야 하는 각자의 현실 때문에 대부분 거짓말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원래 가치를 바꾸어 자신들의 목표에 충실하게 적응하다가 사소한 행동이 발단이 되어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의 생각에 하나둘 오점들을 발견해 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후반부 이 과정이 무엇보다 흥미진진했는데 비밀사건을 취조하듯 긴박하게 그려져 마치 추리소설에서 범인을 추적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범인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용의자로 몰고 가는 작가의 집중력이 놀라웠고 그것을 종용한 교장과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의사와 진실학 선생님의 행보가 전혀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서사의 흐름이 매끄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를 의심해 보아야 비로소 자신을 의심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여기서 교장실을 침입한 네 명의 아이들에게 밀고자를 찾으라는 교장의 비열한 지시에 아이들이 보여준 논리싸움은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숨겨온 서로의 약점을 들먹이며 바로 그 치명적 약점이 교장이라는 권력과 결탁하게 될 핵심이라고 분석하는 아이들의 시선은 흡사 어른들의 치졸한 행태를 그대로 연상케 했다. 우리사회에서 일단 사람을 의심하고 그 다음 성장환경이나 학력, 사회생활을 조사분석 한 후 마녀사냥식으로 죄인을 만들어 집단으로 비난하는 일종의 인격테러가 생각나기도 했다. 작가는 아이들의 논리 전개과정을 통해 점점 범인에 근접하기 보다는 자신에 다가가 보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을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일찍부터 부모의 경제능력이 자식의 경쟁능력이 됨을 알게 된 인애는 교장도 재수없고 친구들도 맘에 들지 않지만 학교의 운영체제를 모범적으로 따르는 학생이었기에 누구보다 이 학교가 아쉬운 사람이었다. 준우는 집안 대대로 엘리트 신분인데다가 공부하는 티를 안내고도 일등을 놓치지 않는 대표적 엄친아이므로 그 우월감과 공명심은 이 학교에서의 낙오와 연결짓기 어려웠다. 실력보다는 부모의 능력으로 입학하게 된 도윤이에게도 교장과의 결탁은 누구보다도 필요해 보였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두 사람 모두가 양육에의 부담을 안고 있는 나영으로서도 거짓말 학교는 가장 대안적인 생존방식인 것이다. 교장은 탁월한 거짓말 쟁이로서 이러한 아이들의 경쟁심리와 인지부조화를 이용해 진실한 교사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인간을 믿는 것에 대한 무모함을 역으로 강조한다. 교장은 그야말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서둘러 진실을 밝히는데 주력하지 않고 침착하게 아이들을 앞세운다. 사건의 진실도 중요하지만 더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사건을 통해 아이들이 바라보아야 할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백미는 아마도 마지막 인애와 나영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결국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뼈아픈 대화에 있을 듯 하다.
나영이와 인애는 처음 친구가 되는 과정에서도 거짓말이 직간접적으로 사용된 경우다. 나영이는 '거짓말 법칙'이라는 책을 먼저 빌린 대출자로서 같은 책을 빌리러 자신에게 온 인애에게 아직 과제를 다 못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경쟁자에게 책을 넘겨주고 싶지 않은 무의식에서 뜻하지 않게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속내를 간파한 인애는 자신의 어려운 가정환경과 면접 때 교장에게 당한 수모를 이야기하여 나영이의 경계심을 허물어 뜨림으로써 마음을 여는 방법으로 결국 같이 숙제를 하는데 성공한다. 인애는 나영이에게 호감을 느껴서 진솔한 마음을 열어 보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단점을 먼저 이야기하여 상대로 하여금 솔직하다는 평가를 유도한 후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구사한 것 뿐이었다. 이 방법...나 역시도 많이 당했고 그런만큼 나 자신에게도 결백하지 않다. 소기의 목적을 위해 약점을 파는 것. 우린 왜 고민이나 약점을 말하는 것이 곧 진실하다는 것과 같다는 착각을 하는 것일까. 고민이나 상처를 팔아 효과를 본 사람은 그 보상에의 달콤함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자신을 자학하는 방법으로 다시 더 큰 상처를 팔게 된다. 진실한 척 했기 때문에 계속 진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진실해야하는 진실이 살아가는 방식이 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특히 문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능과 재능을 추가하여 누구도 겪지 못했을 자신만의 상처를 공감의 장치로 앞세우는 습관이 있다. 인애의 방식은 지난날 내가 사람으로부터 얻은 상채기들을 떠올리게 하며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고민파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 누구보다도 진실하다 착각하는 사람들이 새삼 밉도록 만들었음이다.
그러한 인애도 결정적인 자신의 약점은 빼놓고 자신과 친한 척 한 나영에게 진정한 친구는 아니라 말하고 나영은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인애에게 사과를 하지만 인애는 처음부터 나영을 믿은 적 이 없었다고 대응한다. 인애에게 약한 모습을 들킨 나영은 일류 중학교에 합격하고 시험을 아무리 백점 맞아도 더 사랑받거나 더 행복하다는 게 아닌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버림 받는게 싫어 자신이 원한 것이라 스스로를 속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애 역시 나영을 통해 그동안 가난을 앞세워 친구의 진심을 사고 학교의 신뢰를 받아온 자신을 돌아보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속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이들이 그동안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를 방황하는 가운데 누구보다도 자신 스스로 자신을 속였음을 깨닫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동안의 모든 거짓은 이로써 정당했고 마침내 자신들을 향한 진실이 되어 준 것이다.
거짓과 학교의 병행
아이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맨 처음 알았을 때 많이도 아팠다. 눈물이 날만큼 마음의 피부가 갈갈이 찢겨져 나가는 듯 했다. 아이의 도덕과 습관, 미래가 걱정된 것이 아니라 나를, 엄마인 나를 속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인정하기 싫었다. 언젠가 방에 들어가 대성통곡을 하였더니 아이는 그 후로 무엇을 깨달았는지 지금껏 거짓말에 능숙치 못하다. 내 속으로 낳았는데 그걸 모르겠냐던 엄마가 생각나서 가슴을 부여잡은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주신 약을 먹지 않고 여러 번 몰래 장롱틈사이로 버려두었는데 그 사실을 들킨 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매를 맞았다. 엄마는 그 순간 피멍든 내 종아리처럼 가슴에 멍이 들었을 것이다. 내 아이가 앞으로 자라면서 얼마나 더 많은 거짓말을 내게 하게 될까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거린다. 차라리 그 거짓을 내가 알게 되지 말기를 바라는 이기심이 부모된 역할을 짓누른다.
아이는 이 책을 읽고 여지껏 읽은 책들 중 가장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그러니 엄마가 꼭 읽어보고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러고 꼭 반년이 지났고 이 책을 집어든 건 반이상이 의무와 책임때문 이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이는 궁금증을 풀었을까. 내가 책을 덮고 나자 왜 이제야 읽는 것이냐 묻지도 않았다. 대신 자신은 인애처럼 할 말을 자신있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대물'을 보고는 <거짓말 학교>에 정치인이 거짓말하는 단계가 나오는데 똑같다고 말했다. 진실학 선생님이 인애에게 보낸 암호편지에 등장하는 암호보다 '타이거 수사대'에 나오는 암호가 더 인기 많다고 했다. 4학년 딸아이는 어쩐 일인지 내가 기대하는 거짓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이 책을 빌려간 친구들 중에 재미있다고 말하는 친구는 반에서 1등하는 친구밖에 없었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시원한 결론이 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결말을 가진 작품들은 아이들이 선호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학습지 선생님들과 늘 하는 이야기지만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일찍부터 엄마의 지휘아래 선행학습에 길들여져 있는 터라 '생각'을 요하는 상황을 귀찮아하고 그것을 숙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의 경우에도 인애와 나영이 과연 수술을 받는 것인지 교장에게 밀고한 사람이 진실학 선생님이 맞는 것인지 사건의 결말에만 초점을 맞추고 독서를 마쳤다면 아이들 입장에선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 사실은 더더욱 <거짓말 학교>같은 구성의 작품이 아동문학에 위치해야 함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로 생각된다.
나는 문학이라는 학교의 특별활동을 믿는 학부모이다. 아이는 기특하게도 독서광에 가까워 나는 올 한 해 동안 많은 책을 사주었다. 덕분에 창작동화와 청소년 문고를 통해 아동문학의 현주소를 알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리나라 교육은 대입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어 독서도 논술을 위한 하나의 과목이 되가고 있다. 앞서 말했지만 그래서 이야기의 결말이 사고를 요하는 구성인 경우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지 모를 것에 대한 불안,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할 친구에 대한 의심, 부모나 선생님이 요구할 것 같은 답안에 대한 부담등이 섞여 숙제나 시험이라면 몰라도 스스로는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은 비호감의 장르인 것이다.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어떠할까. 이것은 물리고 물려있는 한국 교육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슬픈 일이다. 획일적,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작가된 입장에선 그들도 매번 완벽하게 창의적인 동화를 창작할 수는 없다. <거짓말 학교> 같은 작품이 문학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렇게 아이들 스스로 사고를 요하는 구성과 결말이 문학성은 물론이고 교육적으로도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은 요인이라 생각한다. 물론 교육을 목적으로 아동문학이 그 테두리에 갖혀서는 안될 것이다. 또 주입식, 교훈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스스로 삶을 운영해 나가는 주체로 인식해 그들을 독립된 독자로 대우하고 이야기를 비판하고 이야기를 더 진행 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의 자격을 좀 더 승격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교육이론에서 말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이나 구성주의 이론이 학교바깥에서도 자연스럽게 체화되려면 이론을 적용하기 이전에 그 대상인 아이들을 더욱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거짓말 학교>는 아이들의 토론학습에도 아주 유용한 교재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학교에서 필독서로 권장되고 선생님이 숙제로 내준다면 아이들에겐 정작 보기 좋게 외면받는 실상이 교육계의 목메이는 현실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독서교육의 현주소이다.
나도 그랬지만 초등학교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심리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엄마에게 '혼나고 맞을 까봐'가 일순위이다. 이 심리에는 부모님이 바라는 아이, 사회가 정해놓은 모범생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된 부모와 세상이 자신에게 실망을 할까봐 하는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그들에게 실망을 주기 싫다는 욕심, 나는 좋은 자식이고, 좋은 학생이고 싶은 욕망이 거짓말을 앞세우는 것이다. 결국 훌륭하고 싶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거짓말을 하다 보니 훌륭할 수는 없어지는 현실이 아이들, 그리고 우리네 인생인 것이다.
나는 그동안 문학작품을 대하면서 리뷰에서 어떤 분명한 결론을 내지는 않아왔다. 책을 읽고 남과 다르게 느낀 점이 중요한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이번엔 의견을 말하고 싶다. '거짓'이라는 뜨거운 화두를 깊게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됨에 있어 거짓말을 해온 아이였었고 거짓말로 속아본 엄마된 입장으로 마치 가정통신란의 학부모란을 채워야 할 것 같은 심정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거짓말을 파헤치고 진실을 밝혀내는 진실학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싶다. 바로 인애의 롤모델이기도 했던 진실학 선생님은 아버지가 밉다는 인애에게 암호쪽지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말라는 말을 전한다. 자신의 의심과 믿음도 의심해 보라는 충고를 한 것이다. 내게 생기는 의심은 거짓학을 통해 점검해 보고 내가 가져온 믿음은 진실학을 통해 되짚어 보는 일. 그럼으로써 남이 아닌 자신에게 떳떳한 자신을 만들어 가는 일. 아마도 거짓말 학교는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힘겹게 가르쳐 주려 거짓말처럼 지어진 학교가 아닐까 싶다.
거짓과 진실의 동행
할 말이 많은 독서였기에 이야기가 길어졌다. 서두에 거짓말에 그럭저럭 무감해진 세월을 넋두리했지만 실은 아직도 사소한 거짓말에 상처받고 상대의 거짓을 확인할 때 눈물짓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나이기에 마지막은 나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이제 학교를 다닐 수 없는 나에게 문학만큼 쉽고도 어려운 학교는 더 이상 없다고도 느껴진다. 오늘도 우린 크고 작은 거짓말을 인식조차 못하면서 여기까지 도착했고 같은 거짓말(문학)을 겪었다는 인연으로 거짓말처럼 마주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앞으로도 살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거짓말은 하지 못하겠다. 불행히도 이것만이 진실이다. 당신도 나도 서로서로 거짓말에 속고 속아주며 내일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이렇게 진실하게 살아있어도 거짓말처럼 죽는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진실과 거짓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불가분의 동반관계를 다행히 홀로 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이 나를 위로한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문학은 다행히 우리의 짐을 잠시 덜었다 다시 짊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진실 된 거짓이지만 우리 삶에 거짓같은 진실로 알차게 쌓여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시린 행운인가.
나는 진실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매번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항상 승리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것이 늘 옳은 쪽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세상의 모든 진실은 세상의 모든 거짓만큼이나 많지만 거짓만큼이나 밝히기 어렵고 밝혀지기 어렵다. 내가 더없이 진실했다고 상대도 그것을 같은 밀도로 받아주지 않을뿐더러 살다보면 거짓이 더 효과적이고 빠를 때가 훨씬 많다. 우리는 간혹 진실과 최선을 혼동하곤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매번 진실된 결과가 나오지 않을뿐더러 최선은 얼마든지 거짓으로 다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성실과 거짓도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살다보니 완전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페어플레이 하지 않고 약간의 거짓을 섞어가면서도 나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건 대부분 국산멸치로 국물을 내다가 어쩌다 한번 화학조미료로 찌개를 만드는 편법의 하나로 치부되는 듯했다. 나는 그들이 아닌 세상에 상처도 받아 보았다. 세상은 그런 것을 구별할 줄 모르기도 했고 또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고, 그럴만한 시간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진실과 거짓의 현상학적 현실론을 알게 된 것은 불행히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진실은 반드시 먹힐 것이라 내 진실만은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 믿어왔던 내 가치관이 제아무리 그 내구성이 탄탄해왔다손 치더라도 나는 다른 이의 도움없이도 이 사실이 마침내 알아진 것이다. 이것은 참담한 현실이자 뼈아픈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소중한 것이고 언젠가는 꼭 통하리라 믿는 이 미련함.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는 마음만이 중요한 것이라는 결론이 별다른 대안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모습일 뿐이었다.
삶과 죽음이, 이해와 오해가, 진실과 거짓이 서로 반대편이 아니라 같은 편에서 나란히 손잡고 동행하는 주자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마주하며 다시금 깨닫는다. 하지만 그것을 부러 아이에게 밥 먹여주듯 가르쳐 주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을 당해보고 거짓을 행해봐야 진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실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나 살자고 세상을 인정하기로 했다. 편하게 살고 싶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어짜피 자신이 깨달을 수 있는 것만 깨닫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거짓을 부정하고 불성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거짓이라는 걸 아는데 실은 평생이 걸린 것이다. 나는 내가 진실하고 성실하여 세상에 화난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상대를 불신 한 것 뿐이었다. 물론, 내가 나를 속이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나라고 매번, 항상, 똑같은 밀도로 진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 자체가 큰 오해였다는 말이다. 내안의 거짓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된 타자를 인정하고 그들이 꾸려나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것임을 나는 왜 몰랐을까.
나는 내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거짓을 버리기로 했다. 다만, 진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것이 그동안 내가 진실한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고집을 그나마 위로하고 존중해주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진실하지 않다. 하지만 오늘도 진실하고자 노력하며 진실은 언젠가 통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선 거짓을 이겨낼 다른 방법이 없는 듯하다. 나는 오늘부터 거짓을 옆집 친구처럼 인정해 보겠다. 나도 그와 친구일 수 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세상은 아름답지 않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결국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