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파야 기쁜 우리관계

컨셉트 플래너. 젊은 날 내 명함엔 이렇게 쓰여 있었던 적이 있었다. 십오년 쯤 되었으려나. 당시 우리 회산 일본의 유명한 설계회사의 安을 받아서 이른바 그들로부터 한수를 배우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본팀의 수장 명함엔 컨셉트 플래너(Concept Planner)라는 아리송한 직함이 써 있었던 것이다. 일본어를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한눈에 보아도 자신감 넘치는 설명과 지적으로 보이는 그의 언변에 우리쪽 사람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가 컨셉을 도출해내면 일본에선 당선 백프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安(그의 컨셉)으로 프로젝트가 당선되는 기쁨아닌 기쁨을 맛보았고 그가 떠난 후로 우리 부서의 기획자들은 **팀 컨셉트 플래너라는 직함이 명함에 표기되기(이는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시작했다. 그날 이후 우린 새로운 컨셉을 생각해내기 위해 한국의 컨셉도출의 1인자 이어령 前장관(우리시절엔 장관이라 불렀다)의 서적을 옆에 쌓아 놓고 살았다. 'A는 B다' 식의 고난이도 은유의 달인. 한국말로 가장 한국과 한국인을 창의적으로 멋지게 말하는 사람. 문화, 예술계에서 이어령은 문학계에서의 이어령보다 한층 높은 위치에 지존처럼 우뚝 서 계신다. 우리나라의 굵직한 국가 행사는 대부분 이어령의 자문을 거친다고 보면 되는데 이는 곧 그만큼 한국을 독창적인 컨셉으로 연출할 사람이 없다는 뜻과도 같다. 그래서 나는 이어령을 문학으로 읽어 온 것이 아니고 컨셉으로 느껴왔다. 이것은 그의 문학성과 작품 내용과는 무관한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리고 항상 얄밉게도 책을 덮으면 건질 것은 건져내고 필요없는 것은 버려왔다. 어찌보면 내 업무를 위해 방법론으로서 이어령을 철저하게 이용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최근의 그의 문학적 행보에서 느껴지는 말년의 감성적 변화를 드디어 접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좀 마음이 급했다. 왜 그런지... 머리가 아닌 가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숨막히는 단어...때문이었을까. 어머니를 컨셉으로 읽어내기엔 내가 너무 작았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어머니에 대한 글을 시작으로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기억, 문학의 길을 택하게 된 배경등 사적인 체험을 주로 술회하고 있다. 지난 봄에 출간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의 '메멘토 모리'를 기억한다면 이번엔 언제나 '어머니를 기억하고 살아라'라는 뜻으로 후속 연재해 주신 듯하다. 그리고 유난히도 이번 에세이는 이어령 은유의 정수精髓를 느낄 수 있는 은유의 교과서라 해도 좋을 듯하다. 그의 은유엔 언제나 한국이라는 자부심과 지식인의 혜안과 문학인의 감성이 논리적으로 탁월하게 믹스되어 있지 않았던가. 이번엔 어머니라는 모성, 탄생의 시작, 인연의 바다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어머니로 시작된 글이어서 그런지 시종일관 문체는 숙연하고 그리웁다. 왜 아니겠는가. 그의 나이는 꼭 내 아버지와 같은데 나는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에게는 우리 할머니로 여겨지는 그 세대분들의 등에 업혀 자라난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그는 열한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어머니를 기억하는 그 짧은 기간의 추억은 그의 문학의 모든 것이라 해도 좋았다. 어떻게 저렇게 박식하고 언변이 유창할까 싶었던 그 신기함의 모태는 바로 어머니라는 비밀아닌 비밀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나는 아직 내 어머니를 또 다른 말로 은유할 수 없다. 내가 이어령의 나이가 되면, 그와 비슷하기라도 한 경지에 만에 하나 근접하기라도 한다면 혹시 두어 개, 아니 하나라도 은유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이 없다. 어머니를 여섯 가지로 은유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자신의 생애를 여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일 터이다. 어머니를 은유한다는 것은 자신이 해온 모든 문학적 작업을 집적하는 일일 것이다. 반사적으로 '왜'가 아닌 '이제'라는 시점으로 들려오는 이 은유는 작가로서 많은 의미를 상징한다고 느껴진다. 어머니가 있다고 해서 모두 문학을 한다고 해서 이렇게 여섯 가지로 은유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설령 은유한다고 해도 그건 굉장히 사적인 영역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이어령은 인간으로서 가장 사적인 인간관계인 어머니를 은유하는 것이 그와 세상사이의 어떤 예정된 약속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는 약속을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늘 그를 깊숙이 관통하고 세상에 등장하는 세상 유일한 창조작업으로서 가장 고통스런 언어였을테니 말이다. 우리는 작가가 되도록 많이 아파야 최대한 기쁠 수 있는 존재일테니 말이다.

모순의 법칙, 역설의 진리

그에게 어머니는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이다. 집을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가르쳐준 나들이다. 어머니를 대신해 대청마루에 앉아있는 뒤주다. 세상의 쓴 맛을 가르쳐 준 금계랍이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겨주신 귤이다. 현존하는 거대한 부재로서 바다이다. 책은 유전으로 전수된 어머니의 문학적 기질을 상징한다. 어머니는 수많은 소설책을 읽어주셨기 때문이다. 나들이는 어린 시절 고향의 정취를 대신한다. 어머니 손을 잡고 외갓집을 오가던 그 길이 아름다운 여행길이었기 때문이다. 뒤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암시한다.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시고 베풀어 주시던 어머니의 지혜창고였기 때문이다. 금계랍은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젖줄을 떼어내고 혼자 일어설 용기를 길러주신 약이기 때문이다. 귤은 어머니의 유품을 의미한다. 그 시절 귀한 것이라 먹지 않고 보내 오셨지만 유골과 함께여서 먹을 수 없었던 애통의 과일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돌아가셨지만 늘 눈앞에서 생생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살아있는 것 같으면서도 죽어 있는 것, 꽉 차있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것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는 사실 어머니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그럼으로써 자신을 대변하는 이어령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머니와 11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아온 이어령의 체험은 책이라는 구체적 사물에서부터 나들이라는 한국적 행동개념, 뒤주와 같은 시대를 대변하는 물건, 금계랍이나 귤같은 음식, 동서양을 아우르는 보편적 대상인 바다까지 선뜻 연관성을 짓기 참 난해한 여섯 가지로 정리되었다. 이들을 연계시킬 대 주제는 오로지 이어령의 어머니 하나로 인식되는 지극히 개인적 작업의 결과물이지만 그의 언어는 이 여섯 가지를 우주적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다. 우주적 승화에는 그 만의 창조원칙과 방식이 있었다.

그에게 고향은 고집스런 기억의 공간일 뿐 누구라도 이미 고향이라 말하며 그 시절을 그리워 할 시점엔 고향은 없어진 것이라 말한다. 기억속에 늘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부재한 고향의 역설을 시작으로 그는 고향을 지키고 있던 우물의 모순도 발견해 낸다. 우물이 좀 더 깊어져 생성된 자신의 고향 온양온천은 지하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불꽃과 어두운 심연을 향해 하강하는 모순속에서 피어나는 고향의 진원지라 설명한다. 이 대비되는 관념은 온천 주변에 병원이 있어 늘 신혼부부들과 부상자를 동시에 볼 수 있었던 이유로 육체의 쾌락과 아픔이 공존하는 삶의 모순을 실체로도 일찍이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따뜻한 햇볕이라는 뜻의 온양의 태양아래 자라난 수박은 깨보기 전엔 절대 알 수 없는 내면을 가진 과일이므로 여름의 태양을 닮은 속살을 간직한 고향사람들을 비유하기도 한다. 결국 고향은 자신이 그랬듯이 떠날 때면 할머니가 멀어질 때까지 손짓을 하는 이별의 방식을 그 원풍경으로 하는 것이므로 고향은 어디에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내리고 있다. 자신이 살아온 고향을 통해 고향을 정의하는 이 방식은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어머니를 은유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개인의 경험에서 탄생된 언어의 우주화, 이것은 이어령 은유의 기본원칙과도 같지 않을까.

언제나 자연과 인간의 모순속에서 진리를 발견해 내는 그의 혜안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는 바이지만 이제 그는 신화속에서 발견한 세 가지 언어를 통해 자신이 앞으로 택해야 할 언어를 소망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반항과 저항, 투쟁과 불의 언어로서 프로메테우스의 언어를 지나 모순의 강을 뛰어넘는 다리로서 헤르메스의 언어도 지나 마지막으로 대립에서 교통으로 교통에서 화합에 이르는 오르페우스의 언어를 원하고 있다. 그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혹과 선인장의 샘이 되어 문학을 더 성장시키고자 한다. 더 이상 발전의 경지가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도 지속적인 성장의 언어로 화합을 택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는 강연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서재로 가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지 생각하는 것이 아침의 시작이요, 하루의 기쁨이라 말한 적이 있다. 창조에 대한 열정만큼은 어느 젊은이들 부럽지 않은 자신이라 말했다. 어머니와 문학 사이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는 제 2장 '이마를 짚는 손'에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오르페우스의 언어에 대한 의지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명징하게 나타나 있어 우린 주옥같은 그의 창조작업으로서의 화합의 언어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키워온 혹을 하늘삼아 꿈을 꾸는 낙타처럼 자신의 몸속에 저장한 수분을 영양삼아 갈증을 해소하는 선인장처럼 그는 진리탐구에도 존재함으로써 발생하는 모순의 법칙을 재료삼아 역설의 진리를 밝혀내고 인간과 세상을 연결지으려 한다. 이 모순하는 반대어를 하나되는 동의어로 끌어안는 그의 안간힘은 얼마나 고독하였을 것인가. 이십대에 이미 일간지의 논설을 쓰셨고 문학평론가로서 위세를 떨치셨고 교수로서 베스트셀러의 저자로서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서 국내의 국제행사의 기획연출자로서 그는 부와 명예 혹은 권세까지 누릴만큼 누린 자타공인 유명인사였다. 이 책의 후반부에 어느 방송사와 인터뷰한 내용에도 언급이 되지만 그는 더는 올라갈 수 없는 극치의 정상에서 아마도 텅 비어있는 '존재의 빈터'를 이미 체감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간혹 문학의 천재들이 이 실존의 극한을 체험하고 자살에 이르는 작가들도 있어 왔지만 그는 다행히 속세의 문명과 영혼의 자아를 아주 훌륭히 조율하여 스스로의 번뇌의 결과에 의해 자신의 문학적 자아를 완성시키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어령은 바로 이 빛과 그림자의 동반관계 자체를 자신의 시대적 숙명이라 인식하고 그 정체성으로 문학이라는 꽃을 피운 것이다. 이 너무 일찍 알아버린 절대고독의 길에서 그는 얼마나 외로왔을까. 외로움마저도 낙타의 혹처럼 키워낸 그의 고독이 언어로 잉태되는 이번 에세이는 그래서 유난히 결연하고 영롱한지 모르겠다. '감기바이러스'에서 시작해 '우수의 이력서'로 회오리처럼 이어지는 언어의 이끌림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가속력이 추가되어 어떤 최면에 걸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감기가 걸린 나는 내 이마를 짚는 손에 의해서만 내 신열을 확인하므로 상대 손의 차가움이 내 이마의 뜨거움과 하나되는 그 순간의 언어를 기적으로 은유하는 그만의 목소리를 조용히 들어보시라. 어느덧 세상에 들끓는 분노와 알 수 없는 시기에 스스로 상처받은 우리들 이마에 그의 손이 넌지시 내려앉는 기분이 들고 말 것이다. 심장이 두근대며 얼굴이 붉어지는 그 마음은 분명 감사의 증표이리라.

실존으로 공명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스스로 진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이끄는 그의 언어창조작업은 한 겨울 소년이 잃어버린 '연'이나 값비싼 털모자와 '팽이'를 바꾸어 버린 사내의 비극이 가지는 生의 의미를 정의하는 지점에 이르면 그가 얼마나 감성을 이성으로 논리화하는 독창적 창조자인지 알 수 있다. 연(鳶)을 좇다가 최초로 잃어버린 연줄이 우리 전 생애에 어떤 연(緣)이 끊어진 것인지 반대로 연을 띄우는 것은 유년의 生에서 무엇을 희망한 것인지 우리는 소년의 얼굴을 통해 이어령의 혹은 우리 자신의 미소와 눈물을 발견한다. 털모자를 쓴 지주의 아들이 동네꼬마들이 요술같이 돌려대는 팽이가 부러워 자랑스럽게 바꾸고 돌아온 날 소년은 어떠한 生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그토록 시린 겨울에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그가 풀어내는 상실에 대한 조사弔辭는 이미 지나가 버린 동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병든 굴과 조개에서만 생겨나는 진주의 생명이 왜 불행하면서도 광채를 가질 수 있는지 마치 生의 비밀을 알아가듯 나지막히 짚어주신다. 그렇게 하나씩 둘씩 깨달은 우수憂愁의 이력이 자신이 창조해 낸 작품만큼 같은 높이로 쌓여 그는 그 끝에서 극적으로 크리스천이 되고만 것은 아닐까.

배꼽의 질문, 영성의 대답

그가 문학을 하게 된 배경을 술회하는 '나의 문학적 자서전'의 부분에는 실제 나이와 호적상의 나이가 달라 호적의 언어로 자신이 호명된 학교생활이 지울 수 없는 크나큰 상처로 남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이 호적의 언어란 단순히 생년월일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 창씨개명을 통해 학적부에 등록된 이름과 낯선 이름이 호명되면서 시작되는 일본땅에 대한 경배,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타국의 영웅들을 자신도 호명해야 하는 수치심, 같은 언어로 평가받아야 하는 자존심등이 복합적으로 더해진 언어였다. 그는 이러한 호적의 언어와 본능적으로 대적하였던 자신의 모태, 배꼽의 언어로서 어머니, 그리고 친구들의 진정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고향의 언어로서 범법행위가 문학을 태동시키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자신과 나라에 대한 실존적 욕구는 하나의 정당방위로서 호적의 언어로 불리어지기 이전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한국의 정서, 한국의 문화, 한국어의 창의성과 연결되며 그의 문학적 정체성이 되었던 것이다. 유년시절 고향땅을 장난삼아 호기심에 파보던 행위는 바로 땅을 파서 그 밑을 보고 진실을 캐내는 그만의 창작형식이 된 것이다. 표층에서 심층까지 켜켜이 쌓여진 다양한 층위를 밝혀내고 비밀을 캐내는 것이 이어령 문학의 수사학이었던 것이다. 그는 언어의 말살이라는 극명한 억압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탄생한 언어의 자유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 자기문학의 업적을 달성하는 일이라 여겨왔던 것은 아닐까. 이 태어남의 아픔을 상징하는 진주의 눈물은 혹시 자신이 흘린 눈물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를 드러내놓지 않고 내면으로만 끝없이 스며드는 진주의 빛이란 역설과 모순이 빚어낸 자신의 운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 지.

이 책의 마지막 장, '나는 피조물이었다' 는 라디오 프로그램 ‘장승철의 CBS 초대석’(2008. 1.6)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를 그대로 실은 내용이다. 대담의 목적은 그가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 지의 계기와 과정들을 들어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신년대담의 성격이다 보니 이어령 특유의 희망적인 메시지가 다분하다. 우리나라에서 전 일간지를 통털어 아마도 신년메시지를 가장 많이 작성해 온 사람이 그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곧 새로운 해를 맞아 새로운 희망을 품고 싶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에 섬광과도 같은 영혼의 기운을 가장 논리적이면서 또 가장 감성적으로 전해주는 적임자로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는 뜻과도 같다.

이 인터뷰는 형식으로는 구술체가 문어체와 동일시되는 그의 유려한 언변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글이며 내용상으로는 향후 작가로서의 그의 행보를 암시한다 할 수 있다. 그는 그동안 무신론자로 살아왔던 그 핵심에 자신의 지적오만을 겸손하게 이야기 하는데 이는 역으로 자신도 피조물이면서 시 쓰고 소설 쓰고 보니 무엇을 창작해 낸다는 오만이 결국 절대고독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었다는 소리로도 들렸다. 그러나 나이 들어 지난 날의 업적들을 돌이켜 볼 때 이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서 총체적인 결산의 시점에 이르자 결국 영원성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으로도 들리었다. 그는 이 영원성에 대한 일종의 운명적 계시를 여섯 살 때에 아무도 없는 대낮 길 한복판에서 영문도 모른 채 눈물을 흘렸던 기억에서 찾고 있었다. 그때 무방비 상태에서 벼락과도 같이 체험한 유년의 충격은 이미 1차적 세례였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가져온 듯하다. 모든 것을 다 두루 체험했기에 이제 세속을 졸업한 심정으로 지식으로는 다 할 수 없는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한 그의 진솔한 이야기는 하루하루 다시 태어나고 하루하루를 창조하라는 조언으로 마무리된다. 영혼을 울리는 사색의 종소리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영성의 대답으로 돌아온 글이었다.

내가 참 작아 보이는 글이기도 했다. 언젠가 아주 젊은 후배에게 이어령을 물었더니 그를 모른다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었다. 비로소 내가 나이 들었고 내가 선배가 되었음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공부나 여성을 먼저 살아온 선배로서 이어령의 책을 권하는 것의 의미도 새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이제, 이어령을 권하는 것은 인생선배로서 겸손한 충고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어머니를 말하는 것이 문학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한국을 말하는 것이고 그럼으로 자신을 말하는 일이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립고 사무친다고 적지 않은 세월 울기만 한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가엾어 보이는 이 문학의 정신앞에 나는 무신론자로서 기도를 드리고 싶다. 아직은 어머니를 입에 올릴 자격조차 되지 않는 나를 위해 매일이 다시 태어나는 내 인생이 되기 위해 이 지독한 생의 감기 바이러스를 감사히 여겨 볼 터이다. 감기의 신열이 부르는 생의 유혹을 못 본 척 뿌리치지 않아 볼 테다. 폐부를 울리는 기침소리에 꿋꿋이 내 심장의 의지를 확인할 테다. 사라져 버린 시간들, 헤어져버린 이웃들, 반목해버린 친구들, 모두 내 열기를 확인하러 뻗어오던 그 손길을 외면하지 않을 테다. 당신의 냉기로만 비로소 확인되는 나의 열기를 더 소중히 여겨 볼 테다. 감기의 함정에 빠져 온갖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내 못난 침잠을 경계할 테다.

아...이 겨울이 가도 나는 내 어머니를 볼 수 없다. 나만을 바라보고 나 하나를 위해 생을 다하신 어머니 그를 결코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으니 글로도 무지하다. 나는 침묵의 언어로 눈물을 변주하겠다. 언젠가 내 썩은 조개의 분비물로도 진주가 오롯되는 그 순간이 온다면 그 불행의 광채가 행복이 되는 바로 그날, 내 눈물은 당신의 모든 것이었다 다만 촉촉이 떠들어 보리라. 내 어머닌 차마 대신할 수 없어 그 어떤 것으로도 은유할 수 없었다고. 당신을 말하는 것은 내 못남을 말하는 것과 같아 그땐 벙어리가슴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나는 그 한마디 변명을 위해 오늘을 걷는다. 이 그리움의 산책의 길에서 이어령을 걷고 은유를 줍고 어머니를 담는다. 어둠으로 빛이되는 그때 그날을 위해 천천히, 그리고 뜨겁게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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