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양장) - 제왕학의 영원한 성전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2
한비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속이 시원하다. 머리가 개운하다. 내가 원했던 건 아마도 '원칙'이었던 것 같다. 나는 최근에 개인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 지인들은 하나같이 내가 혐의를 의심하는 자에게 어떤 조취를 취하라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지목한 사람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은 또 있었다. 사람을 믿었던 건 내 실수였지만 살면서 믿음이 잘못이 될 때 나는 며칠 끙끙 앓아 버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다. 나에게 친분을 전했던 사람이라 더욱 믿기도 어려웠고 애꿎게도 막 당도한 계절이나 괜한 나이 탓을 해대곤 했다. 그러나 그 일은 밝히기 보단 묻어야 할 일에 가까웠고 증거또한 희박해 결과적으로 상대가 아닌 나 자신만 점점 피폐한 영혼이 되가는 꼴이었다. 소설도 좋고 에세이도 시도 좋았지만 나는 좀 더 강력한 처방이 필요했다. 어떤 본능은 평소의 취향을 잊어버리게도 만드는 것. 이 책은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정의'나 '도덕'에 관한 인문서적을 택하는 대신 우연찮게 집어든 제왕학의 고전이다. 그런데 제대로 정의로왔다. 울분에 찬 어느 비주류 학자의 집요한 외침이 군주도 법조인도 정치인도 아닌 내 울분을 차근차근 위로해 주었다. 나는 마치 내가 군주가 되거나 억울한 신하, 아니면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된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감동은 없었지만 감분(感奮)만큼은 충분한 독서였다.


의심스런 이야기

요즘 TV에선 '대물'이라는 드라마가 인기이다. 서점가에선 지난 여름 '정의'가 화두가 되기도 했다. 얼마 전 케이블방송의 슈퍼스타 K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한 친구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정사회의 모델'로 언급되기도 했다. 일련의 흐름으로 볼 때 우리사회가 경제발전이나 민주화를 외치던 시기를 지나 인간다운 삶, 국가다운 국가의 역할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시사하는 사회현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정작 정치인의 자질이나 정의의 실현, 공정한 검찰을 요구하는 우리 대중의 심리이면에는 어떤 기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시기는 우연히도 지난 G20 정상회의 개최기간이었다. 방송에선 연일 G20 정상회의 의장국가로서 우리가 세계 주요국가의 반열에 올랐음을 시사했고 무사히 치러낸 지금 새로운 한국, 새로운 미래에 들어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한층 높아진 국력과 세련되어진 국격으로 포장되어 연말을 향하고 있었다. 의장국이라는 프리미엄 덕분인지 언론에서의 홍보때문인지 이명박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의 정상외교도 예전 국가원수들에게서 느껴지던 겸손함보다는 당당하고 자신감넘치는 이미지로 부각되는 듯 했다. 올해는 동계올림픽과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의 굵직한 스포츠 행사도 있었고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서민경제가 붕괴되고 열심히 일하고 번대로 저축하면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초적인 희망은 사라진 한해였다. 적어도 서민임을 자처하는 내 입장에서는 국가와 개인이 따로 논다는 생각이 드는 2010년이었다.

거기다가 나는 올해 애석하게도 사십대를 시작하게 되었다. 많이 흔들렸다. 어찌보면 우리 세대들은 성장환경에서 국가적 패배감을 잘 모아둔 종잣돈처럼 지니고 자라났다. 그래서인지 딴에는 애국심도 남다르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 사회정의에 대한 기대 또한 살아온 이력만큼이나 열정적이지 않을까 싶다. 어떤 분야든 우리세대가 움직이면 그 기운엔 변화가 감지되곤 했다. 서점에서 책 한권을 사더라도, 음반이나 영화, 공연을 선택할 때에도 우리의 획일적인 관심은 금새 사회현상에 반영되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늘 평균적이던 일상에 변화를 추가해 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일례로 올해 이상현상의 하나로 치부된 하버드대 마이클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가장 많이 구매한 독자층은 사십대 남성이었다. 그들이 책을 집어 들거나 TV앞에 앉으면 적어도 수치상의 변화를 유발한다. 하지만 그 열정만큼이나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높지는 않아서 이들은 마케팅에선 잠재고객이거나 끝까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주도면밀한 부동층으로 분류된다. 속된말로 좀 음흉한 세대들이라 할 것이다. 나 역시 그 세대에 진입을 하게 되어 올 한해 내 개인은 물론이고 한국이라는 내가 살고 있는 국가에 대해 누구보다도 음흉한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9시 뉴스를 보게 되고 나라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를 연결짓게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우리사회에 여진히 후진국형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는 분야가 다름아닌 '사법'분야라고 생각한다. 그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법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형이 행사되는 과정에서 보통의 시민이 보기에는 그다지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바이다. 그 객관적 기준을 자세히 모르지만 애초에 그러한 기준이 있었는지 조차도 의심스럽다. 이것은 수사와 재판이 정의롭게 시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속시원히 답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혹시 나처럼 누구에게 묻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답답하기엔 속터지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 책은 정말 개운한 선물이 되줄 것 같다. 이 책은 동양의 군주들이 늘 베게머리에 두고 새겼다는 한비자의 법치이론에 관한 고전이지만 고리타분한 법적인 이론들이 주는 아니다. 쉬운 말로 풀이된 중국의 인물과 설화, 문학과 철학, 그리고 한비자의 주장이 강물흐르듯 유유자적 흘러간다.

사연을 살펴보니 한비는 살아생전에 그토록 주창한 자신의 법치사상이 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가장 친한 동창의 계략에 의해 살해당한 억울한 운명의 소유자였다. 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던 일화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 세세히 나열되어 있다. 군주는 음모를 오해하여 신하를 죽이고, 신하는 권세를 이용해 군주를 죽이고, 아내는 남편을, 아버지는 아들을, 친구는 친구를 죽이는 사례와 그 연유를 자신이 펼쳐는 논리의 근거이자 그 시대의 교훈처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어찌보면 한비는 한비자를 엮으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이러한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 언젠가 한번은 꼭 망하리라하는 그 목소리가 사뭇 비장하게 들려왔음이다. 책을 덮고 난 지금 가장 가슴에 와닿는 건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고집이다. 비록 변역체이긴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세상을 향해 나는 이만큼이나 고민했고 그런 만큼 누구보다 애절했다는 집착같은 것이 느껴졌다. 더 많이 고민한 사람의 목소리는 언제나 더 의심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 아닌가.

냉정어린 이야기

책은 ‘말하는 것을 어려워 하라’는 <난언難言>을 시작으로 총 32편의 글이 600페이지를 육박하는 분량에 담겨져 있다. 처음에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첫 장만 읽어보면 재미난 옛날이야기처럼 술술 넘어가는 '넘기는 재미'도 이 책의 매력이라 알려드리고 싶다. 그 매력의 근원에 바로 '입은 삐뚤어져도 바른말을 하겠다'는 부조리와 정치술수에 관한 직언이 끄덕없이 버티고 있다. 실제로 한비는 심한 말더듬이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유창한 논리를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 내는 것을 보니 삶의 모순과 그의 회한이 겹쳐져 숙연해 지기도 했다. 충신으로서 학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싶었을 한비의 이 열등감은 더욱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게 하는 최고치의 자극으로 작용한 듯 하다. 풀어가는 논리에 한치의 빈틈이 없으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반론의 여지를 허락치 않기 때문이다. 각 편마다 주로 앞부분에 자신의 견해를 요약하고 의심의 여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다양한 사례(역사적 사건및 인물인용, 속담, 설화나 우화 비유등)를 부연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다시 한번 결론을 강화하며 자신의 논리를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지금으로 본다면 거의 서른 편이 넘는 논문이나 사설을 연구해 낸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통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겉으로 보기엔 긴가민가해도 하나같이 사회모순과 인간의 추악한 이기심들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때문이었지 싶다. 특히 앞부분에 주로 소개되는 군주의 역할로서의 원칙이나 도리, 신하의 유형들은 한비가 말하는 오늘날이 과연 춘추전국시대의 오늘인지 2010년을 살고 있는 우리의 오늘인지 세월의 차를 오로지 문체로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한비 사상의 큰 틀은 나라의 흥망성쇠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군주의 통치술이 위치한다. 우리는 여기서 서술하는 일관된 시선이 군주인 위로부터의 관리자 마인드인 것을 다소 불쾌하게 생각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당시 약소국이었던 나라에 속한 한비로선 절대군주의 역할과 도리가 곧 한나라의 성공도 멸망도 가져온다고 보았기에 어떤 과정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 지를 밝히고 알리는 것이 곧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는 일이라 여긴듯하다. 가장 많은 분량으로 반복되는 부분은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인데 신하를 총애하다 보면 반드시 그 군주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며 끝내 군주의 자리는 바뀔 것이라는 논리를 무섭도록 반복, 서술한다. 군주는 신하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 없도록 허정虛靜과 무위無爲를 뿌리로 두어야 하며 절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면 안된다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는 대통령은 물론이고 기업총수의 취향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실정으로서 나도 모르게 허를 찔리는 심정이었다. 알게 하면 반드시 알게 된다는 것이 한비의 주장이며 새를 잡으려면 몸을 숨기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신하를 평판이나 추천에 의해 등용하지 않고 반드시 법률에 근거할 것이며 등용된 신하역시 직분에 넘치지 않는 업무수행으로 군주의 권세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비는 외교술이 너무 뛰어나거나 학문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아 지혜로운 신하들이 자신의 지위를 믿고 판단하는 국정의 모든 것을 경계하였다. 준엄한 법과 엄격한 형벌로 오로지 절대권력을 행사할 사람은 군주가 유일함을 천명한 것이다.

그동안 중국의 유가와 도가사상을 중심으로 仁이나 德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연의 자세임을 학습해온 우리로서는 신선하고도 놀라운 이론이었다. 인간본성의 어둡고 이기적인 면을 집요하게 밝혀내며 권력의 본질을 냉혹하게 꿰뚫어 본 한비의 통찰력은 어찌 보면 비인간적, 비윤리적인 면모를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비가 주장하는 사악한 신하에는 직분을 넘어서 백성에 仁을 베푸는 재상이나 눈물에 이끌려 제대로 형벌을 행사하지 않은 관리도 포함된다. 말이 많은 신하만큼이나 할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의 신하도 예외가 없다. 법으로 정한 분량만큼만 일하고 처음 언급한 대로만 일하라는 것이다. 융통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참으로 냉철한 ‘공정성’ 이었다. 그런 만큼 군주가 빠지기 쉬운 잘못에도 한비가 제시하는 기준은 살벌하다. 작은 충성에 반응하거나 눈앞의 이익에 손을 들어 주거나 충언과 모략을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심지어 음악이나 무희에 빠지는 것 조차 나라를 망치는 태도라 비판한다. 나라만 망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은 더 강해진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예언을 빼놓지 않는다.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으려면 그만큼 철저하게 자신에게 엄격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죽도록인(必死) 이야기

그런 가운데 한비 자신의 생각이 솔직하게 담겨있으며 훗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고분孤憤 : 홀로 분격하다>편은 언제든지 생명이 위협할 수밖에 없는 충신의 비애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통치술에 정통하고 법도를 잘 준수하는 인재는 정론을 내세워 군주의 편협한 시각을 바로잡으려 하기 때문에 군주의 총애를 받기도 힘들고 다른 신하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거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늘 울분에 차 있다는 심정적 토로였다. 즉, 모함으로 죽거나 덮어 씌울 죄가 없을 경우에는 자객의 칼에 죽는다는 의미심장한 결론은 바로 동창의 모함으로 사약을 받은 그 자신과도 정확하게 중첩되는 구절이었다. 한비는 자신을 총애하는 진시황의 신하인 동창의 모략으로 자살아닌 자살로 최후를 맞았다. 그렇다면 한비의 친구는 비열한 신하였고 진시황은 공정하지 않은 군주였을까. 한비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비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타국의 충신으로서 자국에 들어와 정세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주장하는 한비의 친구 역시 한비못지 않은 논리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타국에서까지 탐낼 정도의 지식과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한비의 총명함과 재능이 화를 부른 것이 아닐까. 진시황은 그가 죽어서 남긴 한비자를 보고 통치를 하는 것이 살아서 자신보다 더 큰 시야를 가지고 자신을 보필하는 한비보다 더 이롭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한비의 이론에 의하면 군주나 신하 누가 되었건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 상대를 죽인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한비에게 한 수 배운 나의 소견이다. 역사는 재능이 있는 사람을 억울한 죽음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성격상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해온 나는 그의 억울함이 남일같지 않았음에도 진시황과 그의 신하가 한비를 죽게 한 심리가 한편 이해되기도 했다.

우리 사회 어느 조직이건 실세라는 보이지 않는 세력자들이 있다. 이들은 조직의 총수가 누가 되었건 세력을 유지하며 실질적인 이득을 챙기는 부류로서 정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몰아낼 수 있는 자신들만의 패밀리를 형성하고 있다. 보통의 서민이 보기에 그들은 거대한 벽과도 같아 아니라고 틀렸다고 말하기엔 너무 멀고 높기만 한 것이 사실인 것이다. 한비는 이 실세들의 패밀리를 군주를 위협하는 신하군으로 보고 이들에겐 군주가 없어지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군주를 해치는 것이라 설명한다.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생기는 이익을 위해 군주가 아니라 자식이나 부모, 배우자까지도 죽이는 이치는 아직도 유효하지 않은가. 한비도 언급했지만 이들은 상대가 더 밉고 그들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신하들이 더 잔인하고 더 포악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이 죽음으로써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라 강조한다. 한비는 시종일관 군주도 신하에게도 그 어떤 인간적인 기대는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인과 의와 예와 정을 앞세운 자들의 학문을 명분으로서 이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는 한비의 충언은 많은 군주들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증언하는 것으로 동의를 구하고 있다. 한비가 생존했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자고나면 왕이 바뀌고 나라가 빼앗기는 혼란의 시대였다. 철저히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들을 다스리기 위해 한비는 군주가 이용해야 할 법을 거울이나 저울, 자와 컴퍼스, 쇠망치등의 도구와 같다 말한다. 그가 제시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법치, 공사의 구분은 우리사회 공정성의 기준과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가 벌받을 사람에게 정확히 벌을 주고 상받을 사람에겐 정당히 상을 주는 것만 제대로 시행하여도 어쩌면 공정을 화두로 내세운 책자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전혀 이득이 없을 것 같은 ‘바른 말하기’가 시간낭비이거나 체력소모인 일거리로 치부되진 않을 것이다. 상벌이 적절치 못해 생기는 결과는 법치국가에서 바로 법치를 불신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누군가는 부당한 이익을 얻고 누군가는 정당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비는 법치의 권위자로서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군주의 자세를 까다롭게 지적했다. 아무리 이치상 완전하다고 생각되는 의견도 반드시 채택되지 않는 것은 군주의 어리석음때문이라 꼬집는다. 결국 설득하는 신하(자신)의 어려움을 언급하면서 현명하고 어진 신하가 죽임을 당하고 굴욕을 피할 수 없음을 군주의 우매함으로 귀결시킨 것이다. 이는 한비가 돌리고 에두르고 다른 비유를 몇 차례 들어 가면서도 결국 그 시대의 군주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을 더듬어 자신을 무시하는 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하는 방법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글로써 기록하고 남기겠다는 의지로 해석되었다. 새삼 오늘, 그의 일침이 무엇보다 통쾌한 까닭은 무엇때문일까. 벼슬아치는 법을 공평하게 하는 자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공평함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목소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공부하는 이야기

한비자에는 인문학적 논점들을 사설조로 전개하는 부분외에 이야기로서 주장을 역설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노자의 도덕경을 풀이한 <해노解老>와 노자의 사상과 비교한 <유노兪老>, 민간전설과 우화를 한비식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의 숲, 설림說林>, 설화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내저설>과 <외저설>에 이르는 옛날이야기들이다. 전체 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야기 퍼레이드는 어렵고 지루할 수 있는 고전읽기의 부담을 완화시키면서 이야기꾼으로서의 한비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다. 한비는 유가와 묵가의 사상은 반대하였으나 도가사상에는 우호적이어서 무위나 관조의 지혜를 군주의 도리로 해석하기도 했다. 욕심이 없고 마음이 고요한 상태는 결국 자신을 위한 법치라 할 수 있다. 법과 군주를 떠나서도 마음이 현명해지는 대목이었다.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근심, 만족할 모르는 데서 시작되는 재앙, 자신을 수양함으로써 얻어지는 덕성이야 말로 진실이라는 가르침은 내 자신을 보지 않고 자꾸 먼저 달리고 있는 경쟁자,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마음을 잡지 못하는 현재의 내 모습을 보기좋게 꾸짖는 듯 겸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을 보는 것이 밝은(明) 것이며 스스로를 이기는 것을 강하다(强) 말하는 건 군주에게만 해당되는 진리는 아닌 까닭이었다.

이야기의 숲, 설림說林에서는 주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궤변과도 같은 지혜를 속담풀이 하듯 소개한다. 누가 되었건 사람을 보기 좋게 속이는 방법을 제시하며 역으로 속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는 것 역시 군주의 지혜를 강조하는 방법의 하나로 활용한 것은 아닐까. 군주의 위기대처 능력을 설파하려 많은 이야기들을 예로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웃고 나서 거울을 보니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전략은 간접화법이면서 결국 직언에 동조하게끔 하는 정성스런 필력으로 느껴졌다. 설림을 좀 더 층위를 나누어 체계화 한 것이 내저설과 외저설인데 후반부에 전개되는 이 형식은 모두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따라서 미래를 예언하는 공통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내저설에는 군주가 신하를 다스림에 있어 구체적인 술책과 조심해야 할 사항을 먼저 요약한 후 하나하나 설화를 들어 증명한다. 이 부분은 한비의 철학과 사상이 이론과 방법으로 정리된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내가 조직의 우두머리라면 이 부분은 두고두고 외우다 시피 할 정도로 그 논조가 날카롭고 예리하다. 외저설에서는 주로 언행의 효용성을 이야기 하였는데 묵자같은 중국의 유명한 이론가들의 인물을 예로 들면서 화려한 변론과 다스리는 것과의 괴리를 주장한다. 사실 유익하긴 해도 전체 분량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기도 해 학술가로서 연구적 성과라고도 할 수 있는 한비의 총체적 결과물로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부분에 비해 시원한 결론을 내지 않고 질문 그 자체로 끝나는 이야기가 많았던 것은 다른 사상가들을 언급함에 있어 신중함과 예를 갖춘 것이라 생각되었고 한비 스스로도 다른 사상의 실용성과 공리성을 계속하여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문헌이었다.

한비자의 마지막 문헌인 다섯가지 좀벌레, <오두>는 표면적으로는 나라를 갉아먹는 좀벌레와도 같은 다섯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면 다스리는 방법도 달라져야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한비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를 최종적으로 가이드해주는 지침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고사성어가 등장한다. 이 말은 원래 그루터기에 목이 부러져 죽은 토끼를 보고 농부가 쟁기를 버리면서 그루터기를 지키며 다시 토끼가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당시 그 시대에서도 낡은 관습, 영원불변한 규범을 지키고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사람을 비유하는 한비의 혜안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세상은 진화하는 것이니 시대가 변하면 방책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마무리 하면서 자신이 내세운 법치사상도 절대불멸의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시사하는 겸손함과 예를 선보였다. 한비는 대단한 예지력과 통찰력으로 미래를 내다본 애국자였으며 그가 주창한 통치술은 현실정치에 기초가 되는 지속가능한 발전모델이었다.

마음잡는 이야기

대통령중심제의 나라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나는 그동안 사회정의를 떠올릴 때 반사적으로 그 나라의 리더가 겹쳐지고는 했다. 그런데 내 서운함을 어디서부터 무엇을 기준으로 원망을 가져야 하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제왕학의 기본이라는 <한비자>를 만난 것을 필연의 행운이라 생각한다. 나는 정치인도 법조인도 아니지만, 내가 처한 우리 나라의 현실 속에서 남이 아닌 내 목소리로 사회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잣대를 빌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비의 통찰은 결코 너무 멀거나 높지 않았다. 다분히 현실적이고 냉철해 융통성이 없다고 느껴지기 까지 했다. 하지만 대부분 공감할 만한 원칙이었고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많은 울분을 위로할만한 지침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시대의 상황과 배경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해는 다시 '대물'도 '정의'도 '공정수사'도 '대통령'도 '국격'도 각자 마땅해 보이는 제자리를 찾아 그들의 위치에 긍정하며 돌려 놓는 너그러움을 선사했다. 서두에 언급한 내가 당했다는 억울한 일도 세상의 이치로 잘 배치할 수 있었다.

안팎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독서였다. 고전은 그렇게 내 흔들림의 기둥이 되어 현실의 풍화를 막아주는 힘이 있다. 선인들의 고민과 해결과정을 엿봄으로써 비로소 내 고민이 별다르지 않았음을 깨우치는 범상함이 있다. 당장 내 고민이 해결되고 눈앞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내 근심의 출처를 바로보고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자세를 다지게 하는 오래된 반가움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고전 독서의 원리와 효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집어든 상황이 벌써 나의 심리를 방증하는 것이겠지만 10대나 20대 때 한비를 만났더라면 과연 그의 주장에 공감하며 감흥 받을 수 있었을까.

새삼 세상에는 유익한 책도 많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책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불혹(不惑)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외부로부터의 잡다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생각이 주였지만 막상 마흔을 넘기고 보니 그 흔들림의 중심에는 바로 내가 가장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내 흔들림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유혹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역할도 달라지다 보니 독서의 끝에 도착하는 세상도 그 의미가 조금은 달라진다. 만약 내가 평범한 가정주부가 아닌 조직의 대표나 그룹의 리더로서 이 책을 읽었다면 부하나 조직원과의 관계를 기점으로 열심히 리더쉽을 연구하는 태도를 유지했을 것 아닌가. 책을 대하는 목표는 달랐지만 나에겐 막연한 기대가 구체적인 교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스스로 대견한 시간이었다.

이제 겨울이다. 이제야 지난 가을과의 이별에 정신을 차리고 자꾸 달력을 들여다 보는 내가 실감이 된다. 나는 올 한해 얼마나 성숙한 것일까. 나도 모르게 지난 시간을 들추게 된다. 산다는 건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돌려보고 오늘을 확인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아마도 어제의 꺼진 불을 기억하며 내일의 등불을 다시 밝히는 일인가 보다. 하지만 먼저 내 마음의 등불이 켜지지 않고서는 절대 내일이라는 미래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것도 우리네 인생일 것이다. 세간의 바람으로 번뇌의 균열로 마음의 등불이 꺼져갈 때 지금처럼 말더듬이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싶다. 미처 다하지 못한 애닮픔과 오래된 간절함을 그리워하고 싶다. 심산한 마음이 켜지도록 비로소 등불이 밝아오면 그땐 아마 마음이라는 세상도 한껏 커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이 커지면 내가 사는 지금 이 세상도 조금은 넓어 보이지 않겠는가.

 
 

 


성인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는 것에 의지 하지 않고서
나에 의지해 스스로를 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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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3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비자>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보다 내용면이 더 좋고 읽을만하다던데,,
가격이,,^^;; 이런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기에는 그렇고 구입해서
틈틈히 읽어보면 좋을텐데 말이죠^^

한사람 2010-12-03 22:24   좋아요 0 | URL

아...전 군주론은 못읽어 보았지만..
한비자는 생각보다 친근했습니다^^
정말 그 두꺼운 분량이 술술 넘어가는 것이 신기하더군요 ㅋㅋ

어떻게 중국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을까 싶기도...했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