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봤다 - 개정판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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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났다가 돌아왔다. 실로 일 년 반 만이었다. 작년엔 도저히 갈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부모님 산소를 건너 뛰었더니 그 말못할 죄책감이란 거의 공포수준이 되어 있었다. 생일과 두 번의 명절, 그리고 두 분의 기일까지 일 년에 일주일이나 되는 이 중요한 기념일을 나는 한 번의 산소방문으로 깨끗이 처리(?)하고 돌아오던 꽤 바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시간으로 치자면 작년 한해가 내 평생 가장 한가로울 때였었지만 산소를 가는 것이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을 정작 못가는 심정일 때 깨닫고 말았다. 사람은 너무 못난 자신을 인정하기 싫을 땐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그리고 비로소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을 때 그제서야 백기들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찾는다. 그건 처절한 자기고문에 대한 막다른 항복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한 해 고집을 피웠던 만큼 올해는 산소를 꼭 다녀와야 모든 일이 제 자리를 잡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필 어머니의 기일은 꼭 춘삼월 꽃이 피는 시기인데 이번엔 꽃이 지기 전에 다녀오리라 마음 먹은 건 어쩌면 부모님에 대한 자식된 도리라기 보단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그늘을 돌아가신 후까지 빼먹겠다는 알찬 다짐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실 말이 좋아 꽃피는 봄이지 무덤앞에 앉아 있노라면 살을 에는 꽃샘추위에 안 그래도 울고 싶은 내 사정을 누구 하나 알아줄 이 없었던 그간의 경험을 고려한다면 부모님도 이해는 하실 것이다. 이십일만 더 늦게 돌아가셨어도 벚꽃놀이를 핑계삼아 흐드러진 꽃이라도 원망해 보았을 것인데 나는 부모님만 찾아가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삼자대면의 현장에선 차마 봄날에 가신 어머니를 두고 애꿎은 계절 탓을 하기엔 늘 면목이 없다. 이제 내겐 이 봄을 견뎌내는 것이 한 해의 통과의례처럼 커다란 일이 된 듯하다. 다행히 이번 산소행에 꽃샘추위는 없었고 날씨는 모처럼 볕좋은 봄날이었다. 덕분에 산소앞에서 청승을 떨기 보단 살랑이던 봄바람에 내 영혼을 맡기고 돌아왔달까. 고속도로는 시원했고 하늘도 깨끗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녀오길 진정 잘했다고 스스로 격려를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왔단 말인가.

이 책은 여행가방을 싸면서 같이 동행할 것인지 두고 올 것인지 몇 초간 고민하던 책이었다. 2박 3일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를 데리고 주말을 보내고 오는 데는 여러 준비가 필요하다. 이것저것 싸다보면 사실 책을 가지고 가기란 맘처럼 쉽지가 않다. 그런데 책 한권을 넣지 않으면 꼭 여행가방을 덜 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이 책은 기특하게도 이렇듯 망설이는 여행가방에 들어가도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만 두꺼운, 괘 기특한 구석이 있었다. 책을 읽겠다는 다짐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이틀째 되는 날 밤 킬킬거리며 이 책을 덮을 수 있었다. 그러곤 개운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고 담날 부모님과 쿨하게 안녕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혹시 나처럼 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아니면 떠나야 할 분들은 이 책을 가볍게 가방에 집어 넣어도 절대 후회는 없으리라 확신한다. 아니 돌아오는 여행길이 한결 가벼워 질 것이라 믿어 본다.

『호랑이를 봤다』는 출판사의 사정(?)에 의해 재출간된 보기 드문 중편소설이다. 해설을 제외하면 칠십 페이지 분량의 단편 두 개 분량이라 볼 수 있다. 칠십 페이지에 사십 여개의 짧은 이야기가 단문으로 배치되어 있으니 이야기 한 개 당 채 두 페이지가 되지 않는 꼴이다. 지난주에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고는 이건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완전 농담의 종결자, 리미티드 절정판이었다. 나름 경건해야 할 산소 귀가길 운전중에 자꾸만 웃음이 나와 혼자 빵터진 것이 두어 번 된다. 물론, 혼자 웃다가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은 웃긴 일은 아니었다. 조금 외로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슬퍼지거나 괜스레 심각해지진 않았다. 웃음 뒤 찾아오는 단단함이 어떤 힘을 부여해주는 것만 같아 나는 이 책이 실속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작품은 사십 개의 에피소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릴레이식의 이야기 보따리를 표방하고 있다. 이야기 모두 분명한 주인공이 있고 결론이 있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시시콜콜하다 못해 속된 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준하는 사설의 당사자들이다. 끝말잇기처럼 앞 이야기에서 ‘김서방’이 ‘서울’에 갔다고 하면서 뒷 이야기에 또 다른 ‘김서방’은 ‘서울’에서 ‘장사’를 했고, 그 뒷 이야기엔 ‘장사’중엔 ‘음식’장사가 제일이라는데 또 그 뒷이야기엔 그렇게 ‘장사’를 하다가 집안을 거덜 낸 ‘친구’를 알고 있다는 식이다. 물론, 모든 김서방과 모든 장사는 서사적 인과관계를 가지지 아니하고 오로지 ‘기차는 빨라 빠른 건 비행기’식의 쉬지않고 이어지는 연속성만이 이 작품의 차별성이라 주장하는 듯하다.

표면적으로는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시답잖은)소설가 강현수가 청탁을 받고선 결국 마지막 이야기인 (소설답지 않은)‘호랑이를 본 장군’으로 완성하게 되는 과정을 순서없이 나열한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야기를 다 들어놓고 보니 혹 소설가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들 중에는 지어낸 이야기 말고도 실제 기사(이것도 지어낸 것이겠지만)를 갈무리해 복사한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도 있다. 작년에 각종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모조리 창작한 내용을 서사의 중요 요소로 삽입해 놓은 <도롱뇽과의 전쟁>이라는 소설을 보고 혀를 내두른 기억이 났다.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를 만큼의 신빙성있어 보이는 지적탐구력은 분명 작가의 필력(筆力)이상의 필력(必力)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건 소설가의 작품적 모티브가 된 ‘호랑이’가 어디서 어떻게 등장했는지의 문제인데 작가는『호랑이를 봤다』라는 작품의 핵심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실제 우리가 아는 동물 ‘호랑이’와 호랑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마음에 새긴 이미지로서의 ‘호랑이’를 교란시킴으로써 독자를 기분좋은 당혹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먼저, 강현수가 알게 된 호랑이는 친구 이용원(이름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가장 유치한 놀이인데 나는 이 부분에서 배를 잡았다. 이유는 읽어보면 안다)네 가문에 관한 전설에서 포착된다. 이용원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잡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장군 집안의 후손이다. 이 친구 이용원이는 호랑이의 정기를 받지 못했는지 타고난 무감각으로 하는 사업마다 예정된 실패를 반복한다. 이용원 말고도 나머지 농담들에는 하나같이 사업실패를 약속으로 한 인물들이 줄줄이 비엔나 처럼 등장한다. 사실 이들의 인생실패는 심각한 것이지만 작가는 시종일관 능청스럽게 눙을 치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떤 면에서 작가의 입담이 의뭉스럽다고 느껴졌달까. 늘 느끼는 것이지만 농담도 이만하면 철학이다. 철학도 이런 방법이라면 득도의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배꼽잡고 웃다가도 순간 거울 속에 비친 그 웃는 이를 보고 흠칫 놀라는 것일까. 마치, 그러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는 철학자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그래서, 이 전설속의 호랑이가 드디어 소설가의 이야기속 캐릭터로 살아나는 마지막은 성석제식 득도의 현장을 목격하는 일이었다. 이용원의 조상이 잡았다는 그 호랑이가 나그네가 산속에서 조우한 그 호랑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전설속의 호랑이나 소설속의 호랑이나 모두 그들이 ‘보았다’는 것에 있었다. 심지어는 그 대상이 정말 호랑이가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호랑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에 있었다. 그들은 산속에서 용변을 보다가, 혹은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산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호랑이’와 마주친다. 호랑이가 산속에 있는 것은 새로울 일은 아니지만 그 순간 전혀 호랑이와 마주칠 줄 전혀 몰랐다는 듯 그들은 호랑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호랑이를 보고, 아니 호랑이를 보았다 믿은 후 처음으로 드는 생각이 무엇일지, 이 작품은 시답지 않게 질문한다. 그것은 어쩌면 킬킬거리고 웃다가 스며드는 서늘함의 물음표와도 같다. 호랑이를 봤다는데, 뭘. 왜. 어쩌란 말인가.

작가는 말한다. 호랑이가 그렇게 무섭더냐고. 아니 그렇게 무서울 것 같냐고. 그들은 대답한다. 호랑이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았다고. 호랑이야말로 별 볼 일 없었다고. 우리는 웃으며 끄덕인다. 거짓말. 겉으론 아닌 척 하면서 벌벌 떠는 거 다 알지롱 !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걸 다 봤지롱. 결국 ‘호랑이를 보았다’는 건 호랑이를 보았다는 ‘자신을 보았다’는 것 아닐까. 난생 처음 호랑이를 본 자신은 자신에게 조차 난생처음이었을 터. 그건 보기 드문 귀한 광경이 아니었을까. 그건 꼭 호랑이가 나타나야지만 보게 되는 자신은 아닐까. 그렇다면 호랑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호랑이와 마주하지 않았다면 나는 보게 될 수 없었다는 뜻과도 같지 않을까. 그렇다. 작가는 ‘호랑이’를 호랑이를 통해 호랑이 때문에 알게 된 우리네 인간성으로 구수하게 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잡아먹을듯 포효를 하고 있는 호랑이 앞에선 숨죽은 듯 자신의 존재를 은폐해야 하는 같은 동물된 나약함을. 그 울음소리에 기겁해 데굴데굴 굴러 내려오는 꼴좋은 볼거리를.

호랑이의 울음은 아마도 속세로 돌아가서 정신을 차리라는 우리네 인생의 경고음일지 모른다. 이 책을 덮으면서 마음 한 켠이 가벼워짐을 느꼈던 건 내게도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들렸다는 것에 있었을까. 속세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피곤치 않았던 건 다시 시작해야 할 인생살이가 여전히 버티고 있음이 슬프지 않았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산소를 간다는 건 산소를 향할 때와 발길을 돌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갈 때의 간절한 상념인 것이지 막상 산소에선 덤덤해서 의연해지는 게 사실이다. 특히나 돌아갈 때 숙제를 해 치운 듯한 가슴뿌듯함은 부모님 산소를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감할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귀가길은 거기다 즐거움을 하나 더하였다. 나는 정말 웃고 있는 내 자신을, 실로 오랜만에 보았던 것이다. 말 그대로 『호랑이를 봤다』를 보고 나서 내 자신을 확인하였으니 호랑이를 본 자신을 보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호랑이’를 보게 된 것이 아닐 수 없다. 호랑이 하나 없이 이 신기한 경험을 혼자하기 아까워 글을 남긴다.

호랑이는 어쩌면 절망과 희망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찾아오는 기특한 손님은 아닐까. 호랑이를 본 그 순간은 다시 인간으로 살아야 할 쓸쓸한 운명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은 아닐까. 그건 그 순간만은 누구보다 외롭더라도, 분명 그 후라면 씩씩해지고 심지어 가벼워질 수도 있다는 충고는 아닐까. 확인한 건 다른 누가 아닌 내 자신이고 내 모습이니 이제 정신만 차리면 되는 것이다. 아니, 정신은 이미 그때 차렸던 것일지 모른다. 호랑이를 보았던 그 순간, 나 조차도 처음이었던. 그건 살면서 꽤 운좋은 날이 틀림없다. 우린 매일 거울을 보면서도 내 자신의 인간을 자각하기 어려운 복잡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 얼마나 단순한가. 우린 이제 나 자신을 알기 위해 호랑이만 보면 된다. 그러므로 애써 산에 갈 수 없다면, 이 책을 보시라. 호랑이 한 마리 없이 어떻게 호랑이가 보이는지, 이 책에 답이 있다. 웃기지만, 웃고만 있기에 너무 큰 호랑이. 그 호랑이를 나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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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 The Fight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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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무엇일까. 형제란 어떤 관계일까. 챔피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가족의 힘과 형제간 믿음, 그리고 챔피언의 의미에 대해 이 영화는 말한다. 챔피언도 형제와 함께라면 가족모두 행복한 것이라고... 끝내, 행복해지는 영화였다. 드라마틱한 연출이나 강요된 감동없이 드라마는 투박하고도 수줍게 감동을 이끌었다. 막이 내리고 나는 썩 감동받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어쩌면 늘상 마주하는 가족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는지 모른다. 어제 본 가족이, 내일 다르지 않을 그들이 오늘이라고 유난히 반갑지 않은 일상의 마음가짐이었다. 어쩌면 남들 앞에서 그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거나 감동을 드러내는 것이 겸연쩍어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혼자 돌아와 그들 몰래 아주 어릴 적 촌스럽게 찍었던 몇 장 안되는 흑백 가족사진을 들쳐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런 마음이었달까. 지긋지긋해도 내 살처럼 편하고 티격태격해도 내 체온처럼 미더운. 어쩌면 아주 익숙해 잠시 눈물을 미루어 두었을지도. 형제...사실 난 형제가 없다. 무엇을 놓고 경쟁해 본 적도 협동해 본 적도 양보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일까. 내게 이 영화는 못해 본 정겨움이자 못다 핀 그리움이었다.

알려졌듯이 이 영화는 쌍둥이 복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며, 이번 아카데미 남녀 조연상을 석권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사실이 영화선택을 이끌었던 건 아니다. 실화가 아니고 상을 받지 못했어도 나는 이 영화에 자석처럼 끌렸다. 뭐랄까 대단하진 않지만 든든한 밥심같은, 조금은 거칠고 퉁명하게 새삼스러워도 속마음은 뜨거워 질 것 같은. 크레딧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형 디키역의 크리스찬 베일은 (너무 살이 빠져)알아보지 못했을 뻔 했고 동생으로 분한 마크 윌버그와 엄마역의 멜리사 레오의 이름도 쉽게 기억하지는 못했다.(물론 그들의 대표작조차도) 꼭 얼굴은 익숙한데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한국 드라마의 연기파 단골 조연배우들 같았달까. 하지만 그동안의 우리사이 세월이야말로 작품의 흥행과 관계없이 무언의 신뢰를 제공하는 밑거름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의 배우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몸에 힘을 빼고 로웰마을의 실제 주민들처럼 울고 웃었다. 표면상 주인공이었던 동생 미키도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특이하게도 스포츠 소재의 영화에서 승리의 주인공이 빛나는 순간 더 눈부신 형과 엄마가 밟히던 것은 아마도 이들의 오래된 익숙함이자 신비한 연기력이었나보다. 모두들 얼마나 실제 인물을 연구했을지 그들의 제 몸같은 연기가 가끔 인간극장류의 휴먼 다큐멘타리로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워 그 애틋함이 스크린을 보면서도 꽤 오래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영화로서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장면만 없었다면 나는 이 영화가 거의 한국의 미니시리즈식 드라마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특이했던 건 바로 시작과 끝이 동생과 함께인 형의 감정상태였다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감독의 확실한 연출의도가 구성상 ‘to be continue’의 드라마가 아닌 ‘the end’ 의 영화로 보이게 했다. 이 수미쌍관식의 인터뷰 촬영장면은 이 영화를 더욱 리얼하게 전달하는 일등공신이기도 했는데 내겐 마치 어떤 근사한 그림의 액자이자 개성있는 선물의 케이스와 같이 느껴졌다. 유명 스포츠 채널인 HBO에서 왕년의 복서 형의 영화를 촬영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 형의 인터뷰가 마지막에는 이 영화는 ‘내 영화가 아닌 동생의 영화’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엔 껄렁껄렁하게 잡담하듯 대답을 내뱉다가 마지막에 목이 메어 눈물을 글썽이던 형의 목소리는 이 영화에서 동생의 승리만큼이나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옛날엔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동생이라고, 동생이 로웰의 자랑이며 인생은 그런 거라고 하지만 나처럼 되고 싶어 했던 동생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아느냐고. (물론, 그런 형의 눈물에 굳이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한 일이라는 동생의 첨언도 기억한다)



              "동생에겐 제 전부를 가르쳐줬죠"             "예전엔 저였지만 이젠 동생이죠"


형은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울음으로 영화를 마친 것이다. 하지만 처음 웃음은 자만이었고 마지막 울음은 겸손이었기에 우린 형이 울어도 행복했다. 형은 자신의 영화를 찍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동생의 영화로 끝이 난 것에 슬픔이 아닌 감격의 눈물을 흘림으로써 결국 자신의 영화를 더 드라마틱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승리는 동생의 것만이 아닌 망가져가던 형의 승리였고, 형에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가족 모두의 것이기도 했다. 혹시 동생이 실패하고 형 역시 폐인이 되고 그로 인해 가족이 절망한다고 했어도 나는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가족인 것, 서로 미워하고 부담주고 상처를 주었다 해도 그들이 가족이라는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마지막에 위로가 될 것은 가족밖에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영화라는 현실은, 아니 영화같은 현실은 우리를 울리지 않았다. 대신 웃고 있어도 가슴에 눈물이 고이게 만들었다. 형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동생의 이야기이며 알고 보니 엄마의 이야기도 누나들의 이야기도 어쩌면 아빠와 여자친구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가난하고 할 줄 아는 게 한가지 밖에 없는, 어쩌면 특별히 아무 재능도 없고 그렇다고 유달리 부지런하지도 않은 우리들 이야기일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욕심은 왜 이리 눈물이 나는 걸까.
 
그랬다. 그들은 변두리 마을에서 소시민의 욕심을 가졌기로 남들에게 절대 부끄러울 이유가 없었다. 남들만큼 실패했고 나이만큼 실수했다. 적당히 위법하고 요령껏 반칙한다. 한번 영웅이면 영원한 영웅이듯 그때를 회상하며 오늘을 소모한다. 상금이 될수록 많으면 좋겠고 내 아이한테 존경받고 싶다. 그리곤 내 방식대로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려든다. 가족이 잘못되면 남의 탓을 하고 어떨 땐 구성원의 희생에 침묵한다. 이들은 너무 영화적이어서 완벽하거나 절대적인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족은 하나같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또 기특하게도 귀여운 장점들이 있었다. 내 어머니처럼 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고 내 아버지처럼 능력이 없었고 내 형처럼 허풍이 많았고 내 동생처럼 가족을 지겨워했고 내 누나처럼 여자친구 탓을 했다. 하나같이 거짓말처럼 영화속에 등장할만한 인물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를 실제보다 더 리얼하게 감동을 선사한 요인이 되었다.

형제들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아홉 남매의 어머니, 육십대에도 미니스커트와 화이트 스키니진이 어색하지 않은 글래머 몸매에 화려한 옷차림, 외향적으로는 가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서 두 형제가 어렸을 적 부터 권투경기의 매니저 역할을 해온, 아버지와 싸울 땐 후라이팬을 집어 던지고 누나들과 협심해 아들의 여자친구를 찾아가기도 하는, 그녀야말로 이 영화의 파이터가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말한다. 우린 가족이라고. 형도 네가 잘되길 원한다고. 당신보단 내가 더 아들을 잘 안다고. 장남에게 많은 기득권이 주어지는 대신 막중한 역할이 기다리는 우리네 가족관계의 그것처럼 형의 성공은 곧 우리 가문의 자랑이고 마을의 영광이니 가족모두는 대 가정의 행복이라는 대의에 따라야 하느니. 고시 공부를 하는 우리네 큰 형들을 위해 동생들이 무언가 해야 한다면 그건 우상같은 형과 기둥이 될 오빠를 위해 부모님의 욕망을 기꺼이 수용하는 일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서 그건 차별이 아니라 차별화 전략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같이 복서를 했지만 설사 동생이 형의 연습상대로만 존재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져주는 경기를 해야 할 지라도 가족 모두가 행복해진다면. 형이 주로 좌충우돌 사고를 유발하는 '트러블 메이커'였다면 어머닌 작품내에서 그들의 가정내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로 긴장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메이커'였달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언제나 구경꾼처럼 소파에 모여앉아 사태를 관망하던 일곱명의 누나들, 무능력해 보이던 딸기코 아버지와는 달리 그들 가운데 유일한 아들은 열 두살때부터 열 여덟살이라 속이며 경기를 해온 권투유망주, 속칭 인생 역전, 한방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주먹 하나로 세계를 제패할 수도 있는 기특한 마법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자자손손 마을의 영광이 될 수 있는 자랑스런 아들을 낳은 당사자였던 것이다. 그녀가 시원하게 날리고 싶었던 건 혹시 다른 건 별볼일 없었던(?) 자신의 인생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다른 가족들도 저마다 세상을 향해 무언가 날리고 싶었던 무엇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인생은 한 방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조롱하고 무시해온 그들을 보기 좋게 한방 먹인 결말이었다는 것이 참 반가운 영화였다.

가만 보면 이 작품은 형을 통해 동생을 말하는 영화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형은 처음부터 인터뷰할 때 자신의 이야길 바로하기 보다 동생과 함께인 자신을 설명하려 했다. 동생은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다 맞아 준다고, 자신은 바깥쪽을 선호하는데 동생은 안쪽을 선호한다고. 은연중에 내비친 자신과 동생이 많이 다르다는 형의 진술(?)은 의미심장한 예언이기도 했다. 형의 소개처럼 영화내내 안쪽에서 한방을 준비하던 동생은 시종일관 과묵했고 바깥쪽에서 치명타를 날리는 형은 수다스러웠다. 둘 다 돌주먹이었지만 이들의 권투성향은 서로 반대이기에 조화로울 수밖에 없는 필연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 챔피언 도전에 나선 동생에게 형은 말한다. 이건 네 무대이고 온전한 네 시간이니 당하고만 있지 말라고. 혹시 형의 주문은 네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너는 해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주먹은 있고 힘도 세지만 자신있게 상대를 제압하지 못했던 동생은 늘 최선의 방어를 공격으로 삼지 않고 최선의 공격을 방어로 삼은 선수였다. 동생에겐 늘 그래왔듯이 형의 전술대로 형이 파악한 상대만큼 형이 지켜볼 때 경기를 하는 것이 가장 쉬웠고 형없이 경기를 하고 형없이 이긴다는 건 상상할수 조차 없었다. 제발 형없이 자신만으로도 이겨보고 싶었지만 그는 감옥에 있는 형을 찾아가 형이 알려준 조언대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어쩔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마치 형이라는 자기 내부의 우상을 극복하고 자신을 찾는 것이 이 영화의 궁극적 가치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보편적인 예상을 깬 실제 형은 영화속 동생보다 나았다. 형은 동생에게 반드시 필요했고 형에게도 동생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 그래서인지 동생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형이 동생 자신을 이기도록 독려하는 마지막 영혼의 주문은 많은 위로가 되었다. 아무리 옆에서 훈수를 두어도 결국 사각의 링안에서는 자신만이 상대의 주먹을 막아내야 하는 잔인하고도 고독한 시간들을 동생은 알고 있었다. 다만 형은 잠시 그 사실을 잊은 동생의 자존감을 가장 뜨거운 강도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자극할 수 있었던 존재였다. 결국 가장 공격적이라는 건 그러한 고독한 시간을 깨달으며 누구의 도움없이도 자신의 두려움을 깨부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 그것은 형과 동생이 내게 함께 알려준 교훈의 한방이었다.

그렇다면 못다한 형의 꿈을 이루면서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은 동생은 세계챔피언이 아닌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은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서 스포츠에서의 최대 적은 결국은 나와 경기를 하는 상대선수가 아닌 상대가 마주하는 내 자신이었을을 다시금 깨우쳤다. 아무리 막강한 선수와 맞붙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연습한대로 자기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어떠한 전략보다 더 공격적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건 우리가 인생이라는 스포츠를 행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챔피언이 되고 마는 동생을 보고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링위에 서있던 형의 얼굴을 기억한다.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 영웅심리와 마약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형, 교도소에서 까지 전화로 동생의 경기 중계를 듣고는 환호성을 울리던 형. 그의 표정은 흡사 자신은 금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제자가 당당하게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버린 광경을 보고 잠시 만감이 교차되던 오서코치의 눈물을 생각나게 했다. 그 눈물은 동생과 제자의 승리가 누구보다 기뻐서 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이기도 했을 터이다. 그래, 어느 개그맨이 그랬다. 스타와 슈퍼스타의 차이는 바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자신감에 있다고.

90년대 초라고는 하지만 8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 한편으로 봄날의 우울을 이겨보고 싶었다. 사는 건 왜이리 극복해야 할 일이 많은지 나이들면서 점점 이제는 날씨마저도 이겨야 할 상대가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오늘 모처럼 예년 기온을 웃돌며 햇살좋은 봄날씨에 마음이 바빠진 하루였다. 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이미 깨달은 나는 서둘러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다. 나 역시 이 봄이 다가기 전에 이 두려움에 지기 싫어 가족의 힘을 빌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굳이 가족영화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분명 가족이 등장하는 영화였다. 그건 내가 꼭 지난시절 가족 때문에 힘을 얻었다고 말하기엔 뭐하지만 그래도 가족이 없었다하면 가장 먼저 힘이 빠지는 이유와 같지 않을까. 형을 확인하고 동생을 확인하고 부모님과 기타 가족을 확인하러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가족은 굳이 확인하며 신분과 역할을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형의 이름과 어머니의 고집과 누나의 응원과 동생의 상처를 가슴으로 확인하였을 때 세상엔 내 가족도 있었음이 거짓말처럼 벅차게 고마울 날도 있다는 것. 가끔은 그렇게 고마운 눈물 한 방울로 다시 다가오는 계절도 반가울 수 있다는 걸. 화창한 봄날, 속으론 울었지만 태연한 척 찡긋하며 삐죽거릴 수 있는 오늘, 당신도 공평하게 자기 인생의 파이터로 살아감이 짠해지는 오늘, 불어오는 봄바람을 핑계로 얄미운 사람의 어깨를 툭 쳐봐도 좋을 오늘, 우리 다시 파이팅하자.  삶이 두려운 건 당신과 내가 마찬가지인 오늘, 서로의 한방을 응원하는 우리 목소리가 기분좋은 오늘,  똑같이 내일을 기다리는 도전자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준비하며 기다렸기에 언젠가 터지고 말 그 한방의 파이팅으로. 



                                            이봐요, 앞 일은 누구도 모르는거죠?
                                                  포기하면 안되죠, 절대
                                   
                       - HBO 캐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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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본전을 뽑다

어린 시절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코미디 프로가 우리들 사이 가장 유명한 예능이던 때가 있었다. 비록 흑백화면이었지만 비실이 배삼룡과 땅딸이 이기동은 지금의 유재석, 강호동의 인기를 능가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기 절정의 코미디언이었다. 이들 두 분의 고인이 주로 슬랩스틱 코미디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면, 바로 직전 라디오 시대에 ‘몸’이 아닌 ‘말’로 재주를 펼치신 만담가 장소팔, 고춘자 콤비가 있었다. 이들은 아쉽게도 ‘웃으면 복이 와요’식의 콩트 코미디가 인기를 얻으면서 점점 TV 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팔도를 유람하며 세상을 숨가쁘게 풍자하던 국민 만담콤비 ‘장소팔, 고춘자’의 이름 여섯 자 만큼은 꾸준한 조기시청(?)의 효과덕분인지 내겐 그 어떤 개그맨의 이름보다 강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내가 책을 덮고 제일 먼저 생각나던 이름은 바로 이들 추억의 만담가 두 분이었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연출된 리드미컬 텍스트 코미디, 이 책은 꽤 유익한 소설가의 일인 만담이었다. 농담도 그냥 우스갯 소리로 지나칠 수 없는 뼈있는 농담이라면 웃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때론 자기 자신과 나누는 밀談으로, 때론 지인들과 나누는 잡談으로, 때론 독자에게 건네는 덕談으로 촘촘히 구성된 그의 농담은 분명 그저 웃고 말 담론은 아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한담(閑談)이거나 본 서사와 관계없는 여담(餘談)인 것 같아도 그의 농담은 말 그대로 입심좋은 재담꾼의 능숙한 만담(滿談), 꽉 찬 이야기로 충분했다. 그의 만담(漫談)은 결국 만 가지의 농담(萬談)이 선사하는 만족할만한 이야기(滿談)였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자는 감히 없지 않을까.

책을 통해 무언가 본전을 제대로 뽑았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래서일까. 솔직히 이 책을 그의 소설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고 ‘농담 따먹기’ 까지는 아니더라도 ‘농담주고 받기’정도 쯤으로 기대를 한 터였다. 그런데 일찌감치 그것은 제목마저 농담이었다. 소설 밖에서의 이 ‘진담’을 알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상쇄시키는, 작가가 세상을 성찰하는 지적인 ‘관점’을 희석시키려는 치밀한 의도에 불과했다. 실은 ‘진담하는 마이크’의 영리한 반어법, ‘진실담은 타자기’의 성석제식 은유였던 것이다. “농담이라니, 이게 무슨 농담?, 그렇게 정의내려진 제목이야 말로 농담!”, 나는 다른 독자들과 이렇게 면談하고 싶었다. 그리곤 마음이 통한 그네들과 곧 “농담도 이정도면 학문” 이라며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후 최고의 문학적 사건이라며 화談을 나누고 싶었다. 이 책의 농담이 이끄는 사유와 카메라가 향한 세상은 그래서 튼실한 ‘뼈’가 되고 뜨거운 ‘피’와 단단한 ‘살’이 도는 어쩌면 세월의 질긴 ‘근육’마저 어우러진 성석제라는 ‘인간’된 작가의 총체였다. 인간과 세상을 말하는 방식이 결국 자신을 말하는 매력이 된 소설가가 참 멋스럽고 근사하다는 생각, 이런 작가라면 흠모해도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다.(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이런 그의 ‘입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혹시 책에 자주 등장하는 음식을 통한 ‘밥심’이거나 그가 겪어온 세상 속 끈끈한 ‘인심’이 그를 말 잘하고 글 잘하는 만담가로 키운 것인지. 연배로 보면 딱 내 여고시절 갓 부임한 국어선생님이거나 직장시절 만년 부장님이시거나 아주 오래전 짝사랑하던 거래처 유부남(?) 정도의 그다지 거리감 느껴지는 인연은 아니지만 글로써는 아주 오래된 고향 스승의 느낌을 받았다. 세대차에서 오는 연륜,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경험들 때문이 아니라 너무 아는 것이 많다고 느껴지는 일상 속 ‘비범’, 속세를 살아가는 ‘비법’, 자신만이 간직한 ‘비경’까지 그는 어지간히 박학다식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꼭 대학생 때 어느 동아리나 한명씩 존재하는 전설의 인물-당구나 바둑, 운동과 근육, 음주와 가무, 전국의 맛집 및 숙박정보, 민원 및 법률지식, 하드와 소프트웨어, 자동차와 컴퓨터, 음악 및 악기연주까지 척척 해내던-모든 잡기에 능한 인기많던 선배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가정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끌어 모으는 친화력이 남달랐고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이 뛰어났으며 기본적으로 매사에 성실하고 누구에게나 열정적이었다. 자신도 어려우면서 곤란에 처한 친구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언제 책을 그리 읽었는지 아는 철학자와 사상가는 얼마나 많았던가. 돌이켜보면 그런 영화적 캐릭터의 선배들은 꼭 인생이 순탄치가 않아 결국 소설적 사연을 자기 生의 이력서로 작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성석제라는 작가는 그 아까운 사연들을 이력서가 아닌 직접 소설로 쓰게 된 인물은 아니었을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인생의 ‘사연’은 곧 ‘실패’나 ‘좌절’과 동의어라 믿어왔다. 그런데 이번 산문집에선 ‘사연’도 농담으로 건네면 ‘희망’이나 ‘활력’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대체로 사연이 많다는 걸 슬픔이나 한이 많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같은 사연이라도 전달하는 사람과 방식에 따라 반전이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는 세상과 인간이라는 피사체를 담아내는 자신을 ‘카메라’로 인식하고 ‘농담’이라는 셔터로 조작하는 직업을 가졌다며 그것은 ‘농담’을 좋아하는 자신의 인생관이라 주장한다. 그의 카메라는, 아니 카메라인 그는 정지한 정물은 물론이고 사계절의 풍경,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포착하는 여느 사진사와 다르진 않았다. 사용하는 렌즈도 광각에서 망원까지 때에 따라 적절한 필터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능숙했다. 구도는 안정적이었으며 초점은 정확했고 빛의 활용도 일정했다. 대체로 과장이나 무리수를 두지 않는 물 흐르듯 편안한 촬영기법은 고성능 카메라 자체의 품질(?)인 덕도 있었겠지만 결과물이 즉석사진이든 스냅이든 작품사진이든 변하지 않는 동일한 작동기법은 작가만이 개발한 어떤 조작의 비법으로 느껴졌다. 카메라인 그를 통해 인화된 텍스트라는 사진들은 분명 조작방법에 있어 하나의 패턴이 존재했으며 잔상을 기억하고 저장하는 그만의 법칙이 있었다. 그건 세상의 오류나 사람의 실수, 의심없이 이어져 온 관행을 관통하여 받아들이는 깊고도 넓은 ‘지혜’, 즉 자신이 고안한 유일무이한 독창적 ‘필터’에 있었다. 도저히 웃기지도 않은 세상을 그래, 참 웃기는 세상이니 다시 웃어야 할 색감으로 그래서 다 같이 웃고 싶은 인생으로 연출하는 카메라 구동의 차별화된 기능이었다.

과학자와 예술가처럼

총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카메라가 향하는 피사체에 따라 구분된 듯 했다. 1부(나는 카메라다)는 주로 자신의 손을 탄 물건이나 어느 한 시기 눈과 귀를 스쳐간 사건과 인연을 줌인, 클로즈업으로 포착해 낸 정적인 사진들이었다. 2부(길 위의 문장)는 말 그대로 여행중에 길거리에서 발견한 활자에 대한 애증(?)과 애환을 담은 것이었다. 마지막 3부(마음의 비경)는 살아있음으로 모두 제각기 다른 모습을 취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투시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눈에 포착된 세상의 모든 상(像)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각(想)하는 사람이었다.

시계와 막국수, 과일과 생맥주, 바둑과 자전거에 대한 단상들은 하나의 물체를 통해 그 관찰에서 자신의 인생관을 찾아가는 끈질긴 논리의 주인공, 진리에의 발견의 기쁨과 탐구의 재미를 터득한 과학자를 연상시켰다. 특히 그의 관찰이 시계로부터 시작된 것은 자신을 카메라라는 도구로 동일시한 후 시도된 가장 잘 어울리는 피사체였다. 여자들이야 그날의 기분과 날씨, 유행에 따라 여러 가지의 악세사리를 다양한 스타일로 연출해도 별스럽지 않다지만 남자들은 몇 개의 허락된 악세사리들로만 자신을 연출할 수 있다. 그중 시계는 얼굴과 가장 가까우면서 자동차나 기타 디지털제품, 각종 AV 기기와는 달리 장소와 상황에 제약없이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일심동체의 물건이다. 즉, 말하지 않고 아무행동을 하지 않고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가장 잘 표출할 수 있는 효자상품이라 할 수 있다. 여성처럼 모델을 자주 바꾸거나 특별히 시계를 가리는 패션을 즐겨하지 않는 남성의 경우, 시계는 곧 지금까지 구축해온 거의 모든 자기 生의 압축적 장치와 동일시된다. 이러한 시계에(그것도 명품에) 집착했다는 작가의 고백은 어떤 면에서 속세의 물욕을 외면해왔을 것 같은 작가로서는 다소 의외로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학창시절 어느 교수가 과시용으로 자랑했다는 그래서 그를 존경하지 않았다는 하지만 그 진가를 알고 나니 지금은 부럽다는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은 벤츠와 같은 가격대라 주워들었다. 비록 자신의 짝퉁모델 ‘파텍 필립’은 고장이나 멈추었지만 시계 속 욕망의 초침만은 멈추지 않은 자신을 속물적으로 비하하기 보다는 원래 ‘초침이 없었다’며 시계 탓을 하는 그의 첫 농담은 퍽이나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의 시계(時計)를 통해 세상의 시계(視界)를 바라볼 줄 알았던 작가는 그만한 시계를 소유할 자격이 되는 것으로 판단되었고 이후의 에피소드에서 자주 감지되던 매니아적 기질을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그는 각종 지방의 천차만별 막국수와 비빔밥, 자장면, 막걸리를 먹으면서도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의 삶을 음미하고 느끼는 사람이었고 음식의 맛에서 고유의 미감, 원칙, 냄새를 발견하는 미식가였다.(잡학과 미식은 서로 통한다고 들었다) 그건 과학자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예술가의 능력이었다. 메뚜기날개와 함께 푸드덕 거리던 고향 생맥주의 추억은 지난 시절 거하게 ‘토(로)하고 싶었던 밤’도 오늘날 유창하게 ‘토(론)하고 싶은 밤’으로 회상하게 하였다. 학생기록부 취미란에 적기 시작한 특기 바둑을 향한 ‘관전문학’은 흡사 작고한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의 <이규태 코너>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풍부한 지식과 다양한 경험, 촌철살인 식의 문체가 지혜로 똘똘 뭉쳐져 대중에게 짧은 혜안을 선사하는 일일칼럼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장가들어 첫 사위인증의 기념으로 불렀다는 <봄의 교향악>을 어머니 칠순잔치에 가족의 축가로 부르면서 떠올린 아버지의 얼굴은 그토록 목메이던 내 아버지의 얼굴과도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갓 서울로 전학 와 아버지 손을 잡고 어린이 대공원을 갔다가 인파에 치여 온종일 고생한 내 어린이날은 그래도 입장도 못해본 작가의 그날 보다는 나았다. 공원 안은 ‘천국’, 버스 안은 ‘지옥’으로 각인된 그 시절 어린이날, 얼추 셈을 해보니 작가가 중학생때 나는 코흘리개 유치원생이었을까. 그 몇 년 후 나 역시 꼭 같은 곳에서 엄마, 아빠 손을 잡고 풍선을 손에 쥔 채 사람구경만 실컷 하다 돌아갔다고 생각하니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까. 그 먹먹함은 작가가 사십년 전 어머니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들어간 시골 학교에 대한 그리움과도 같았을까. ‘합창단 노래에 이유를 알 길 없이 목이 메었’다는 그였지만 학교가 가르쳐준 그 은혜로 한번이라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음에 먹먹해지는 가슴과 비슷했을까. 어쩌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자신을 태우고 돌아다닌 ‘불개’와의 이별을 회상하는 마음과도 같았을까. 안방 두레상에 열 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가 둘러앉아 모두 뜨거운 김을 호호 불며 숟가락을 들었다는, 기름이 잘잘 흐르는 햅쌀밥은 자꾸만 많지도 않은 세 식구가 밥상을 앞에 두고 식사를 하던 내 어린 시절과 겹쳐지며 새삼 부모님을 그리도록 만들었다.

그랬다. 그는 이렇듯 농촌이었던 시골 밥상에서의 뜨거운 입김과 기름진 밥심, 학교라는 유년기를 그리워하는 애심(哀心)으로 능청스런 입심을 키워온 듯 했다. 아버지가 선물한 강아지가 자꾸만 울고 있자 자신은 백설기를 선물했지만 정작 울음을 그친 것은 그저 쓰다듬어 주었을 때였다며 ‘숨 쉬고 생명있는’ 것들은 관심과 연민이 선물이었음을 깨닫기도 했다. 두렵기만 하던 자전거와 처음 한 몸이 된 날 비로소 세상을 내달리며 알게 된 비밀, ‘안장위에 올라선 이상 계속 나아가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이치는 시와 춤, 노래와 암벽타기, 사랑에서도 같은 원리였음을 알아간다. 그는 관심을 얻어 보려 책을 훔치기도 했으며 그 시절 책도둑이 공유한 지식을 향한 시대정신만은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로맨티스트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작가의 낭만적인 감수성을 가장 체감한 장면은 모차르트의 협주곡과 자신의 애상을 연결짓는 대목이었다. 그는 알파벳송의 모티브가 된 원곡이 모차르트의 음악이고 그 음악적 근원에 작곡가의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슬픔이 베어있다고 언급하며 자연스레 자신이 꿈속에서 시몽처럼 조우한 꿈같은 멜로디도 바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유사했다고 증언했다. 그 음악을 듣고 끝내 흘려버린 몇 방울의 눈물이야말로 인간을 향한 연민과 예술을 향한 열정이 응축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작가하는 성석제의 보석같은 ‘진액’은 아니었을까. 그의 눈물 때문에 나는 천재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이 연주했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 2악장(로망스)을 다시 듣게 되었고 그 음악은 중학생시절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그리고 여타 많은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들어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막다른 아름다움이 왜 슬픔으로 느껴지는 지를 설명하는 말이 필요없는 훌륭한 사례였고 농담도 간절하다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진실이 된다는 걸 깨닫게 해준 작가만의 텍스트, 그 텍스트로 밀착된 한 장의 ‘진짜’ 사진이었다.

추적하고 기록하며

그에게선 길을 가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간판과 표지판, 안내문에서도 오랜 세월 활자중독자로서 연마한 예리한 분석과 기지넘치는 해석을 엿볼 수 있었는데 만성병에 가까운 이 직업병도 실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화된 삶의 방식에서 기인한 듯하다. 그는 이미 중학생이 되어서 ‘원주율 파이는 왜 끝이 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인지’ 너무나 당연해 질문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수학의 공식을 만나는 선생님마다 질문하였다. 만약 자신의 질문이 질문으로서 타당성을 가지지 못하다면 그 이유라도 알고 나서야 질문을 멈추는 꽤 집요한 학생이었던 것. 고교시절 고문시간에 배운 작자미상의 사설시조를 해석하며 단순히 외우고 이해하는데서 발전해 시작(詩作)을 한 시인의 천의무봉한 입심을 찬양하고 현실의 고통을 특유의 유희성으로 극복하며 삶의 재미를 찾아 나누던 선조의 지혜를 발견해내던 학생이었다. 그 작자미상의 시인은 후세에 이 작가에게 빙의된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호기심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속에서 자신만의 답안을 창조해낸 삶의 패턴은 오늘날 작가로서의 독창적인 경쟁력을 길러낸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총각이 운영하는 과일가게의 이름표에 붙여진 황제 '앨버트' 복숭아가  '장호원' 복숭아로 표기되기까지의 사연을 들려주며 이른바 명색이 '황제'라 불리는 최고 품질과 '장호원'이라는 지명이 적절하게 어울리는 것인지의 여부를 넌지시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는 대부분 문자의 오표기에 대한 정정의지를 피력하는데 그가 갈고 닦은 인문탐구 정신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기업하다'란 말은  '사랑하다(사랑을 하다)'는 말이나 '개-하다(개를 먹다)'는 말처럼 관용되어서는 안되며 '기업을 하다'나  '기업을 잡아먹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 맞지 않으므로 '기업을 창업하고 경영하다'라는 말로 굳이 부연하는 것이 낫겠다는 작가의 일침은 단순한 국어사용의 정석을 제시하고자 지적한 말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속에 관용된  '기업하기 좋다'는 의미-정치적 의도(유권자 의식)와 가시적 상징(통계치, 순위등) 혹은 구체적 조건(환경, 자원, 인력등)-를 제시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불명확성이 언어로 먹고 사는 전문가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종의 불량제품이라는 자격지심을 갖게 한 것은 아닐까. 버스 안에서도 문자로 제시되는 각종 안내문구(다리를 꼬는 건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등)들은 이상한 유권해석을 유도한다며(법학 전공자답게) 정작 안전을 위해 안전벨트 착용을 권유하는 본질적 내용과 연결되지 않는 오류를 지적한다. 문자로 가장 기발했던 해석은 컵라면에 표시된 ‘희망소매가격’을 희망을 소매한다는 의미의 ‘희망+소매+가격’으로 분석하여 사소한 일상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도출해 내는 그의 재치에 있었다. 희망을 먹는다는 뜻으로 ‘타오르는 꿈을 안고 사는 젊은이’를 ‘꿈을 먹는 젊은이’로 노래한 가사는 내 학창시절 인기가수의 그것이기도 했다. 노랫말에서 사유의 시원을 찾는 그의 통찰은 우리의 동요 ‘비행기’와 ‘반달’로도 이어졌다. ‘비행기’와 미국민요, ‘반달’과 중국동요의 짝짓기는 노래를 들으면서도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주인공을 자신이 구성한 또 다른 이야기로 직조하는 성석제식의 ‘만담歌’에 다름 아니었다.

문자에 예민하고 문장에 정직했던 그가 2005년 북한에서 개최된 남북작가대회에 다녀온 후 한 일은 먹어본 것과 먹어보지 못한 메뉴, 가본 곳과 가보지 못한 곳의 지명을 열거하며 기록하는 일이었다. 북한 작가들과 겉도는 대화를 하고 돌아온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외우던 북한의 지명, 현장에서 그 지명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목이 메이던 그는 북한에서 보았던 활자를 애써 기록하며 그쪽 세상에서 느낀 낯설음과 거리감을 메워보려 했던 건 아닐까. 어느 연구에 의하면 활자중독증은 거의 불치에 가까운 병이며 시간이 갈수록 증세는 심해진다고 한다. 작가는 이번 책에서 스스로 기록하는 저장매체로서 세상과 사람을 담았다 하였으므로 그는 늘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기록할 거리를 찾았다는 말과도 같다. 사건이나 현상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구체적 행위로서 ‘사고’를 추적하고 ‘사유’를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는 어린 시절 배달된 신문에 새겨진 대통령의 이름을 오랜 세월 추상적인 한자이미지로만 인식하다가 어느날 마을에 헬리콥터를 타고 온갖 뿌연 먼지 및 소음과 함께 등장한 대통령의 실체를 구체적 이미지로 대체하게 된다. 선생님의 지시로 유신헌법 찬반 투표 홍보용 포스터를 골목마다 붙이고 다녔다는 그에게 있어 대통령은 젖을 떼기 전에 등장해 대학에 입학하던 해까지 18년간 존재하던 유일한 거인(giant)이었다. 이처럼 실체적이지 않고 안개처럼 모호한 그림자, 그러나 그 영향력만은 막강했던 유소년기의 기억은 같은 시절 고향과 가족, 친구에 대한 향수와 겹쳐지면서 심리적 갈등의 접점지대를 형성하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질문이건 답이건 대부분 명확하고도 자유로운 결론이 동반되던 에피소드들에 반해 유독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기억만은 흐릿하고 두려운 그래서 불쾌하기 까지한 그의 심리를 엿보면서 어쩐지 활자와 기록에 강한 집착을 보이던 작가를 더 애틋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할까. 그는 혹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지배하던 안 보이던 마음속 거인을 극복하고 이기기 위해 보이는 활자라는 소인을 거인이 될 때까지 일일이 기록해 왔던 것은 아닐까.

다시 설레이다

활자를 거인삼은 작가의 시선은 그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구분짓는 기준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였다. 창작은 컴퓨터를 이용해 원고를 작성하지만 교정은 종이형태로 주고받으며 이루어지는 자신의 작업을 예로 들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이같이 인간적인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주장한다. 바로 자신은 세상의 모든 ‘비인간적인 것’들을 펜으로 교정하는 사람이며 그렇게 수정된 따스한 종이로 이루어진 자신의 문학은 누구보다 ‘인간적인’ 작품이길 원한다는 뜻으로 읽혀졌다. 그렇기에 그는 남들보다 특출난 능력(?)을 타고난 다양한 군상의 인간들을 끌어안는 비법으로 인간적인 ‘농담’을 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야산에서 나무를 헬스기구 삼아 운동을 일삼고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고 아예 라디오 볼륨을 크게 한 채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외롭고 나약한 사람으로 여기며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대도시에 울려대는 경적소리와 위압적인 간판, 교통법규를 무시하는 얌체운전자, 사람을 대하는 업무보다 인터넷으로 해결하는 업무가 더 중요해진 세상에서 마음의 비경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비법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사람에 대한 애정임을 평범하게 말한다. 카메라된 입장으로 연신 셔터를 조작하고 있었던 그가 보기엔 세상도 사람도 인간된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가장 최고 화질의 삶을 인화할 수 있다고. 그것은 카메라도 셔터도 대상물의 책임도 아닌 인간된 마음 그 뿐이라고.

‘인간적이다’란 말은 무슨 뜻일까. 이 책을 읽고 오래된 관용어, ‘인간적인 사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새삼 사람은 원래 인간인데 인간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것은 내가 성석제식으로 질문하게 된 이 책의 가장 큰 질문이자 교훈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것은 있는 그대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상징하는 걸까. 때론 실수하고 때론 화내지만 그래도 울고 웃는 솔직함을 가리키는 걸까. 사람살이의 참맛을 알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서로 인간됨을 의미하는 걸까. 사소한 일상에서도 소중한 행복을 느끼는 보통사람의 심성을 말하는 걸까. 그는 주로 소설에서 해학과 풍자를 통해 세상을 말하고 과장과 익살로 인간을 그려내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해서 나는 그동안 그의 소설을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가벼운 거짓말쯤으로 여겨왔다. 물론 의미심장한 소설의 주제는 기본이었지만 시종일관 가볍게 농담을 섞어 어깨를 툭치듯 말하였으므로 가볍다고 느낀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산문집은 정반대의 묵직한 이야기 보따리로 인식된다. 그가 건네준 농담으로 포장된 진담의 알맹이는 무거울 만큼 가득했다. 마치 그러한 가벼운 소설을 쓰기위한 지독히도 무거운 배경이라도 깊숙이 파헤친 것처럼 나는 어깨가 무거웠다. 그가 말하는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혹시 이 산문집의 문법대로라면 웃음으로 포장된 슬픔, 기쁨으로 표현된 울음, 농담으로 뱉어낸 상처는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문학하는 방식은 이러한 인간적인 방식에 근거해 뚜렷하게 차별화된 그만의 양식은 아니었을까. 맛깔나게 입담좋은 한 소설가의 사유의 체계와 그로 엮어낸 빛깔좋은 결과물을 양껏 섭취한 심정으로 책을 덮는다. 나 그가 문학하는 방식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농담과 진담사이에서 능청을 떨며 진실게임을 유도하는 이 방식을 내 삶의 방식으로 슬쩍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웃으며 세상을 비판하고 더 크게 웃으며 사람을 울리는 건 농담이 가진 최고의 미덕이자 미학일 것이다. 그건 무릇 무림고수의 오래된 내공이렸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농담’하는 존재이고 우리 삶은 ‘소풍’과 같은 것이며 사람사는 이야기는 다 ‘소설’이라고 한다면 사뭇 우리네 ‘인간적인 삶’이라 함은 성석제를 통해 조금은 더 설레어도 괜찮을 듯하다. 아홉 번 울고 단 한번 웃더라도 인생은 그 한 번의 농담으로 나머지 진담을 견딜 수 있는 것이기에. 비록 그 한 번의 웃음이 아홉 번의 눈물을 더 빛나게 하는 비극의 조건일지라도. 인간은 희극적이고 인생은 비극적일지라도.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사람들. 그것은 봄처럼 설레이는 ‘농담.  농담’은 설레이는 ‘진담의 다른 말.  물론,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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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3-0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네요.
저는 이제 겨우 배송됐는데...
전 사실 아직 성석제에 재미를 못 붙였습니다.
오래 전 두 권쯤 읽었는데, 참말로 좋은 날도 사인본으로 모셔두기만하고
아직도 못 읽고 있습니다.
입담도 코드가 맞아야하는 건 아닌가? 그때부터 의심하고 있는데,
이책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재밌게 잘 읽혀야할텐데...
남들 재밌다고 할 때 혼자만 시니컬해져 있으면 그것도 이상한데.ㅠ

한사람 2011-03-09 21:33   좋아요 0 | URL

지난주 도서관에 갔다가 이책이 있길래 들쳐봤죠^^
전 재미나게 읽었어요 ㅋ
생각보다 진지하고 사실, 남성분들이 좋아할 글투를 가지신분^^
소설은 두어편 읽어보았는데 산문집은 처음이라
새로운 맛이었구요

리뷰는 나중에 쓰게 되기 싫을책(?)일듯 해서
후다닥 쓰고 올려버렸어요~
기대안하고 들추면 오호? 할 책이죠^^
글구 입담은 소설적 서사에 해당되는 말 같고
산문에서는 완전 학구파 냄새 물씬이던걸요?
 
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몇번의 문학상 수상작에서 그녀의 단편을 접했다. 꼭 가을지나고 겨울 다가오는 어느 늦은 오후, 문득 두려워지는 준비안된 내 인생같았다고 할까. 막히면 막히었지 이름처럼 숨이 트이는 소설은 아니었다. 흡사 '하성란'이 더 수직적으로 파고든 것으로 보이는 그것의 실체, 이번 소설집에서 확인할수 있을지. 창자를 투시하는 그녀의 레이다가 어디를 향했는지 그곳엔 어떤 물질이 있었는지 렌즈를 들이대고 확인해보고 싶어진다.

  

 

 

  

『아Q정전』이 루쉰의 대표작이라 들었다. 슬쩍 소개를 보니 사실주의 판화가 어우러져 루쉰의 작품이 새롭게 해석되었다고 한다. 청조말기의 주인공 아Q라는 인물의 허무한 인생이 주된 이야기. 그런데 한참 멀어도 너무 먼 1Q84를 떠올린 나는 얼마나 무심한 독자인지. 이 사람으로 한참 망해가던 그 시절의 중국과 중국사람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만나면 밉고 싫어도(?) 소설속에서는 어쩐지 짠하게 생각되는 중국사람들. 흑백의 판화때문이라도 더더욱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3월이 오면 시름시름 앓는다.  
나는 3월에 태어났고, 어머니도 3월에 태어났지만
나를 낳아준 그녀는 내 생일상을 차려준 다음날 죽었다.  
그날 이후 나는 3월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해왔다.
생일상과 제사상을 같이 차리고 싶지 않아 

그저, 3월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꽃이여,
어떤 님이든 피기만 하여라, 그대 진다고 서러워 할 이 걱정말아라
그건 봄을 만든 그대의 일이 아닌, 만들지도 않고 빠져드는 우리네 일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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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책이야! - 2024 개정 초등 1-2 국어 국정교과서 수록 도서
레인 스미스 글.그림, 김경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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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도에 나는 우리 집 재산 목록 1호인 니콘 카메라로 사진학 수업을 들었다. 91년도엔 슬라이드 교재로 발표를 했고 92년도에 8m 비디오 카메라로 교육영상물을 제작했다. 93년도에 하이퍼텍스트 기반의 CD-ROM 교재를 만들었다. 95년도에 회사에서 인터넷교육을 받았다. 97년도 포털 싸이트에 처음 홈페이지라는 것을 개설했다. 같은 해 휴대폰을 개통했다. 98년도에 생애 최초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했다. 2002년도에 사람찾기 사이트에서 동창생을 만났다. 2004년도에 개인 블로그라는 걸 시작했다. 2006년도 자동차에 네비게이션을 장착했다. 2008년도에 아이팟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다. 2009년도에 태블릿 PC를 구경했다. 2010년 전자책 단말기를 경품으로 받을 뻔 했지만 거절했다. 2011년, 나는 아직 트위터에 계정이 없다. 이것이 '스티븐 잡스' 식으로 대충 기억해본 스무 살 이후 내 인생의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이다.

적어놓고 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했고 그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도 달라졌다는 걸 실감한다. 누가 얼마나 먼저 시작했고 얼마나 더 오래 지속했느냐의 차이일 뿐 우리는 결국 모두가 휴대폰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 그걸 가지고 얼마나 더 스마트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가 어느덧 소셜 네트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경쟁력이 되고 말았다. 아마도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당신도 나와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사는게 거기서 거기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지난 이십년 동안 변하지 않은 내 일상이 있다면 아직 매일 아침 미련하게 종이신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책을 손때 묻혀가며 때론 접어가며 넘기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특히, 활자는 종이라는 매개체에 디스플레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쪽에 가깝다. 어찌보면 아날로그 세대의 전형적인 편견이랄 수 있겠다. 엊그제 전자책 시대를 맞이해 작년 한 해 오히려 도서 컨텐츠의 구매가 증가했다는 통계를 보았다. 어찌되었건 전체 독서인구가 늘어났으니 매체의 발달이 절대 컨텐츠의 질적 양적 저하를 가져온다고는 볼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문지의 질감과 종이책의 두께감을 여전히 사랑한다. 클릭하는 터치감보다 넘겨보는 손동작이 더 그립다. 그리고 그것이 창피하다거나 고집스럽다고 생각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당당하게 느껴야 한다고 스스로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반갑게도 이런 내 (어른된)고집을 (아이처럼)귀엽게도 찬성하는 책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이 책은 그림책이었다. 내가 아직 그림책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한 책이었다. 그래, (다른 게 아닌)책이었다. 열네 번 페이지를 넘겨가며 한 자 한 자 글자와 그림을 눈으로 만져보는 책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아이는 자기가 마음에 드는 책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읽어 달라 고집을 부렸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잠들기 전에도 그 책만 껴안고 닳고 닳아 책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한권의 책만 보았다. 아이는 그렇게 특별히 애정을 쏟은 그림책이 약 열권이 있는데(한권의 수명이 약 일년?) 올해 오학년이 된 아이는 아직도 그 열 권의 그림책을 따로 책꽂이 한 칸에 고이고이 모셔두고 있다. 이 책은 아마 십년 전 쯤이라면 그렇게 넘기고 넘기고 또 넘겼을 그 한권의 책이었달까. 아이의 어린시절이, 더불어 혹시 내가 그림책을 보았을지 모를 까마득한 아기눈의 세월이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 노트북의 동키, 그냥북의 몽키, 그리고 마우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마우스와 동키, 그리고 몽키이다. 동키는 노트북을 몽키는 그냥북을 가지고 마주앉아 대화를 하는 것이 이 책의 전부이다. 노트북의 동키는 자그맣고 세련되 보이고 그냥북의 몽키는 덩치가 동키의 세 네 배이다.(잡스식으로 보자면 이들의 덩치는 정보용량의 차이랄까?) 동키는 묻는다. 그건 뭐냐고. 몽키는 대답한다. 이건 책이라고. 많은 질문 중 '그걸로 무얼 할 수 있느냐'는 동키의 질문에 '이건 그냥 책'이라고 답하는 몽키가 가장 신나도록 고마웠다. 스크롤도 안되고 메일도 보내지 못하고 트위터, 와이파이, 배경음도 안 나오지만 비밀번호나 별명이 필요없고 결정적으로 충전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책. 책은 그냥 손가락과 눈만 있으면 되는 별스럽지 않은 매체였다. 심지어는 책을 펼쳐놓고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은 무용지물이 아닌 꽤 기특한 친구였다. 하지만 몽키의 대답은 동키의 직접적인 질문에 어떤 변명이나 해명이 필요없는 완전한 답이었기로 덮고나니 그만 영혼을 울리는 종소리가 된다. 흠칫하는 마음이 곧 훗하는 미소로 바뀌게 된다. 책을 가지고 뭘 하겠다는 것이 책으로 꼭 뭘 얻겠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디 웃긴 다짐이었을까 싶은 요봐라 하는, 귀여운 한방. 그것은 이 그림책이 선사하는 예쁘고도 소중한 반전이었다.

이 따스한 그림책을 덮고 나니 나는 책을 읽는 다는 것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짐을, 책을 대하는데 조금은 부담이 덜해지는 신기한 변화를 다 느낀다. 혹시 우리 아이들도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 것 같은 이런 기분 때문에 그 한 가지 책을 보고 또 보는 것일까. 혹시 나도 옛날 옛적에 지금처럼 넘겨본 그림책이 있을까. 책이라고 맨 처음 마주한 내 어린이를 기억하자니 그만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건 왜 일까.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은 마음인 것일까. 그림책은 어린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구나 싶어 당황이라도 한 것일까.

언제부턴가 우린 전원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이곳 온라인 세상에 도착할 수 조차 없다. 언젠가 회사에 정전이 되어 하루 종일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자 모두다 일을 접고 조퇴를 한 그날의 어이없고도 막막함이 떠오른다. 전기가 통하지 않으면 우린 이 세상에 접속할 수도 없고 만나서 이야길 나눌 수도 없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도 은행결제도 쇼핑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이제 우린 만들어진 ‘전기’가 통해야만 우리 마음의 ‘전기’도 통하는 정말로 미디어의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다. 이런 세상에 유일하게 파워를 올리지 않아도 그냥 책인 채로 내 마음의 '전기'를 발전시키는 아날로그 매체가 책이라는 사실, 이 책을 덮으며 조용히 깨닫게 된다. 책은 스위치가 필요없는 '전기'에너지 였음을.

어떤 젊은 엄마 한 명과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아기 한 명이 이 책을 도란도란 넘기고 있을 장면이 자꾸만 그려진다. 등장하는 캐릭터도 표현하는 방식도 그때와 같은 그림책이지만 그 내용은 딱 지금의 내용인 것이 새삼 신기하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이 책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라는 평을 덧붙여 주었다. 무엇보다 그래, 이건 책이니까.(아이는 책을 좋아한다) 우린 가끔 새롭게 등장한 매체는 바로 그 전에 사용되던 매체보다 효과나 필요성이 덜 할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예를 들어 슬라이드 이후 비디오가 등장하였다고 슬라이드의 교육용 효과가 비디오보다 못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오늘 뉴스에도 '아이패드 2'를 공개한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는 정치소식 다음으로 메인 뉴스거리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첨단 후속모델이 정보처리의 속도와 대용량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90년대에 과제로 작성하던 가상교육의 시나리오는 사실상 거진 실현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이런 정보와 매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면서 점점 더 나만의 정보, 내 것의 매체는 상실되어 간다고 느낀다. 접속하여 연결하고 공유하고 전송하는 것이 정보생활의 주를 차지하다 보니 내 머릿속에 든 지식, 내 손 안에 든 자료, 나아가 내 가슴에 남겨진 메시지들 마저 여기 일상이 아닌 저기 매체와 온라인 세상에 남겨두고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전기는 흐르지 않는 것이기에 에너지는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전기'가 흐르지 않으면 정말 '전기'는 통하지 않는 것일까.

책은, 다행히도 '전기'없이 '전기'를 통하게 할 줄 알았다. 책은 완전한 내 것이고 내가 가진 확실한 매체라는 생각. 그런 고마운 생각을 오늘 처음 해본다. 책이 제공하는 소유의 매스감과 그것이 꽂혀지는 지적 만족감, 그리고 책을 읽어냈다는 쾌감의 자신감, 이런 무형의 것들은 분명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책이어야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그림책은 이러한 책의 본질과 전통적인 기능및 의미, 역할들을 무엇보다 어려운 논리와 설득을 통해서가 아닌 너무나 쉽고도 정겨운 어린이 그림책으로 표현해 내었다는 것이 가장 큰 미덕으로 여겨질 듯하다. 그림책을 다시보았다. 거의 사십년 만일 수도 있는 내 인생의 역사적 순간이다. 다시 전 생애를 되돌아가 내 가슴에 흘렀을지 모를 '전기'를 느껴본 추억의 책장. 그곳에도 분명, 책이 있었고 그림이 있었을 것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는 동안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그리움, 책이라는 '전기'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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