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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봤다 - 개정판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떠났다가 돌아왔다. 실로 일 년 반 만이었다. 작년엔 도저히 갈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부모님 산소를 건너 뛰었더니 그 말못할 죄책감이란 거의 공포수준이 되어 있었다. 생일과 두 번의 명절, 그리고 두 분의 기일까지 일 년에 일주일이나 되는 이 중요한 기념일을 나는 한 번의 산소방문으로 깨끗이 처리(?)하고 돌아오던 꽤 바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시간으로 치자면 작년 한해가 내 평생 가장 한가로울 때였었지만 산소를 가는 것이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을 정작 못가는 심정일 때 깨닫고 말았다. 사람은 너무 못난 자신을 인정하기 싫을 땐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그리고 비로소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을 때 그제서야 백기들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찾는다. 그건 처절한 자기고문에 대한 막다른 항복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한 해 고집을 피웠던 만큼 올해는 산소를 꼭 다녀와야 모든 일이 제 자리를 잡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필 어머니의 기일은 꼭 춘삼월 꽃이 피는 시기인데 이번엔 꽃이 지기 전에 다녀오리라 마음 먹은 건 어쩌면 부모님에 대한 자식된 도리라기 보단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그늘을 돌아가신 후까지 빼먹겠다는 알찬 다짐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실 말이 좋아 꽃피는 봄이지 무덤앞에 앉아 있노라면 살을 에는 꽃샘추위에 안 그래도 울고 싶은 내 사정을 누구 하나 알아줄 이 없었던 그간의 경험을 고려한다면 부모님도 이해는 하실 것이다. 이십일만 더 늦게 돌아가셨어도 벚꽃놀이를 핑계삼아 흐드러진 꽃이라도 원망해 보았을 것인데 나는 부모님만 찾아가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삼자대면의 현장에선 차마 봄날에 가신 어머니를 두고 애꿎은 계절 탓을 하기엔 늘 면목이 없다. 이제 내겐 이 봄을 견뎌내는 것이 한 해의 통과의례처럼 커다란 일이 된 듯하다. 다행히 이번 산소행에 꽃샘추위는 없었고 날씨는 모처럼 볕좋은 봄날이었다. 덕분에 산소앞에서 청승을 떨기 보단 살랑이던 봄바람에 내 영혼을 맡기고 돌아왔달까. 고속도로는 시원했고 하늘도 깨끗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녀오길 진정 잘했다고 스스로 격려를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왔단 말인가.
이 책은 여행가방을 싸면서 같이 동행할 것인지 두고 올 것인지 몇 초간 고민하던 책이었다. 2박 3일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를 데리고 주말을 보내고 오는 데는 여러 준비가 필요하다. 이것저것 싸다보면 사실 책을 가지고 가기란 맘처럼 쉽지가 않다. 그런데 책 한권을 넣지 않으면 꼭 여행가방을 덜 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이 책은 기특하게도 이렇듯 망설이는 여행가방에 들어가도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만 두꺼운, 괘 기특한 구석이 있었다. 책을 읽겠다는 다짐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이틀째 되는 날 밤 킬킬거리며 이 책을 덮을 수 있었다. 그러곤 개운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고 담날 부모님과 쿨하게 안녕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혹시 나처럼 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아니면 떠나야 할 분들은 이 책을 가볍게 가방에 집어 넣어도 절대 후회는 없으리라 확신한다. 아니 돌아오는 여행길이 한결 가벼워 질 것이라 믿어 본다.
『호랑이를 봤다』는 출판사의 사정(?)에 의해 재출간된 보기 드문 중편소설이다. 해설을 제외하면 칠십 페이지 분량의 단편 두 개 분량이라 볼 수 있다. 칠십 페이지에 사십 여개의 짧은 이야기가 단문으로 배치되어 있으니 이야기 한 개 당 채 두 페이지가 되지 않는 꼴이다. 지난주에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고는 이건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완전 농담의 종결자, 리미티드 절정판이었다. 나름 경건해야 할 산소 귀가길 운전중에 자꾸만 웃음이 나와 혼자 빵터진 것이 두어 번 된다. 물론, 혼자 웃다가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은 웃긴 일은 아니었다. 조금 외로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슬퍼지거나 괜스레 심각해지진 않았다. 웃음 뒤 찾아오는 단단함이 어떤 힘을 부여해주는 것만 같아 나는 이 책이 실속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작품은 사십 개의 에피소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릴레이식의 이야기 보따리를 표방하고 있다. 이야기 모두 분명한 주인공이 있고 결론이 있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시시콜콜하다 못해 속된 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준하는 사설의 당사자들이다. 끝말잇기처럼 앞 이야기에서 ‘김서방’이 ‘서울’에 갔다고 하면서 뒷 이야기에 또 다른 ‘김서방’은 ‘서울’에서 ‘장사’를 했고, 그 뒷 이야기엔 ‘장사’중엔 ‘음식’장사가 제일이라는데 또 그 뒷이야기엔 그렇게 ‘장사’를 하다가 집안을 거덜 낸 ‘친구’를 알고 있다는 식이다. 물론, 모든 김서방과 모든 장사는 서사적 인과관계를 가지지 아니하고 오로지 ‘기차는 빨라 빠른 건 비행기’식의 쉬지않고 이어지는 연속성만이 이 작품의 차별성이라 주장하는 듯하다.
표면적으로는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시답잖은)소설가 강현수가 청탁을 받고선 결국 마지막 이야기인 (소설답지 않은)‘호랑이를 본 장군’으로 완성하게 되는 과정을 순서없이 나열한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야기를 다 들어놓고 보니 혹 소설가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들 중에는 지어낸 이야기 말고도 실제 기사(이것도 지어낸 것이겠지만)를 갈무리해 복사한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도 있다. 작년에 각종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모조리 창작한 내용을 서사의 중요 요소로 삽입해 놓은 <도롱뇽과의 전쟁>이라는 소설을 보고 혀를 내두른 기억이 났다.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를 만큼의 신빙성있어 보이는 지적탐구력은 분명 작가의 필력(筆力)이상의 필력(必力)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건 소설가의 작품적 모티브가 된 ‘호랑이’가 어디서 어떻게 등장했는지의 문제인데 작가는『호랑이를 봤다』라는 작품의 핵심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실제 우리가 아는 동물 ‘호랑이’와 호랑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마음에 새긴 이미지로서의 ‘호랑이’를 교란시킴으로써 독자를 기분좋은 당혹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먼저, 강현수가 알게 된 호랑이는 친구 이용원(이름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가장 유치한 놀이인데 나는 이 부분에서 배를 잡았다. 이유는 읽어보면 안다)네 가문에 관한 전설에서 포착된다. 이용원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잡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장군 집안의 후손이다. 이 친구 이용원이는 호랑이의 정기를 받지 못했는지 타고난 무감각으로 하는 사업마다 예정된 실패를 반복한다. 이용원 말고도 나머지 농담들에는 하나같이 사업실패를 약속으로 한 인물들이 줄줄이 비엔나 처럼 등장한다. 사실 이들의 인생실패는 심각한 것이지만 작가는 시종일관 능청스럽게 눙을 치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떤 면에서 작가의 입담이 의뭉스럽다고 느껴졌달까. 늘 느끼는 것이지만 농담도 이만하면 철학이다. 철학도 이런 방법이라면 득도의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배꼽잡고 웃다가도 순간 거울 속에 비친 그 웃는 이를 보고 흠칫 놀라는 것일까. 마치, 그러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는 철학자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그래서, 이 전설속의 호랑이가 드디어 소설가의 이야기속 캐릭터로 살아나는 마지막은 성석제식 득도의 현장을 목격하는 일이었다. 이용원의 조상이 잡았다는 그 호랑이가 나그네가 산속에서 조우한 그 호랑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전설속의 호랑이나 소설속의 호랑이나 모두 그들이 ‘보았다’는 것에 있었다. 심지어는 그 대상이 정말 호랑이가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호랑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에 있었다. 그들은 산속에서 용변을 보다가, 혹은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산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호랑이’와 마주친다. 호랑이가 산속에 있는 것은 새로울 일은 아니지만 그 순간 전혀 호랑이와 마주칠 줄 전혀 몰랐다는 듯 그들은 호랑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호랑이를 보고, 아니 호랑이를 보았다 믿은 후 처음으로 드는 생각이 무엇일지, 이 작품은 시답지 않게 질문한다. 그것은 어쩌면 킬킬거리고 웃다가 스며드는 서늘함의 물음표와도 같다. 호랑이를 봤다는데, 뭘. 왜. 어쩌란 말인가.
작가는 말한다. 호랑이가 그렇게 무섭더냐고. 아니 그렇게 무서울 것 같냐고. 그들은 대답한다. 호랑이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았다고. 호랑이야말로 별 볼 일 없었다고. 우리는 웃으며 끄덕인다. 거짓말. 겉으론 아닌 척 하면서 벌벌 떠는 거 다 알지롱 !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걸 다 봤지롱. 결국 ‘호랑이를 보았다’는 건 호랑이를 보았다는 ‘자신을 보았다’는 것 아닐까. 난생 처음 호랑이를 본 자신은 자신에게 조차 난생처음이었을 터. 그건 보기 드문 귀한 광경이 아니었을까. 그건 꼭 호랑이가 나타나야지만 보게 되는 자신은 아닐까. 그렇다면 호랑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호랑이와 마주하지 않았다면 나는 보게 될 수 없었다는 뜻과도 같지 않을까. 그렇다. 작가는 ‘호랑이’를 호랑이를 통해 호랑이 때문에 알게 된 우리네 인간성으로 구수하게 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잡아먹을듯 포효를 하고 있는 호랑이 앞에선 숨죽은 듯 자신의 존재를 은폐해야 하는 같은 동물된 나약함을. 그 울음소리에 기겁해 데굴데굴 굴러 내려오는 꼴좋은 볼거리를.
호랑이의 울음은 아마도 속세로 돌아가서 정신을 차리라는 우리네 인생의 경고음일지 모른다. 이 책을 덮으면서 마음 한 켠이 가벼워짐을 느꼈던 건 내게도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들렸다는 것에 있었을까. 속세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피곤치 않았던 건 다시 시작해야 할 인생살이가 여전히 버티고 있음이 슬프지 않았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산소를 간다는 건 산소를 향할 때와 발길을 돌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갈 때의 간절한 상념인 것이지 막상 산소에선 덤덤해서 의연해지는 게 사실이다. 특히나 돌아갈 때 숙제를 해 치운 듯한 가슴뿌듯함은 부모님 산소를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감할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귀가길은 거기다 즐거움을 하나 더하였다. 나는 정말 웃고 있는 내 자신을, 실로 오랜만에 보았던 것이다. 말 그대로 『호랑이를 봤다』를 보고 나서 내 자신을 확인하였으니 호랑이를 본 자신을 보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호랑이’를 보게 된 것이 아닐 수 없다. 호랑이 하나 없이 이 신기한 경험을 혼자하기 아까워 글을 남긴다.
호랑이는 어쩌면 절망과 희망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찾아오는 기특한 손님은 아닐까. 호랑이를 본 그 순간은 다시 인간으로 살아야 할 쓸쓸한 운명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은 아닐까. 그건 그 순간만은 누구보다 외롭더라도, 분명 그 후라면 씩씩해지고 심지어 가벼워질 수도 있다는 충고는 아닐까. 확인한 건 다른 누가 아닌 내 자신이고 내 모습이니 이제 정신만 차리면 되는 것이다. 아니, 정신은 이미 그때 차렸던 것일지 모른다. 호랑이를 보았던 그 순간, 나 조차도 처음이었던. 그건 살면서 꽤 운좋은 날이 틀림없다. 우린 매일 거울을 보면서도 내 자신의 인간을 자각하기 어려운 복잡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 얼마나 단순한가. 우린 이제 나 자신을 알기 위해 호랑이만 보면 된다. 그러므로 애써 산에 갈 수 없다면, 이 책을 보시라. 호랑이 한 마리 없이 어떻게 호랑이가 보이는지, 이 책에 답이 있다. 웃기지만, 웃고만 있기에 너무 큰 호랑이. 그 호랑이를 나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