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 3주간 주말에는 산문과 에세이를 읽었다. 그런데 그건 비단 지난 몇 주 만의 패턴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계기다) 아무래도 가족들과 함께 있는 주부로선 주말에 지긋이 앉아 나만의 독서 시간을 이어가기가 힘든 형편이다. 그렇다고 책을 멀리하기엔 서운하다보니 툭툭 이야기가 끊어져도 상관없는 에세이류를 집어 들게 된다. 리뷰에 부담이 없는 책을 찾게 된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에세이는 어떨 땐 다 읽는데 한 달이 걸리기도 한다. 어제 신달자 에세이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과 은희경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들>을 같이 덮었는데 리뷰를 따로 남기자니 작위적인 글이 될 듯하고 그냥 넘어가자니 허전하여 내 나름대로 비교형식의 페이퍼를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일었다.
한 여름을 앞두고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비소설류이고 방식은 다르지만 내게 많은 위로가 되었던 글들이라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다. 내겐 글을 정리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습관이 어느덧 지금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 된 듯하다.
편의상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은 ‘여자’, <생각의 일요일들>을 ‘생각’으로 불러야겠다. ‘여자’와 ‘생각’을 동시에 덮은 한 ‘여자의 생각’ 인 것이다. ‘여자’가 마흔 이상의 여성을 집중적으로 위로한다면 ‘생각’은 글 좀 쓴다는 어리지 않은 여성을 위로한다는 느낌이다. 순전 내 느낌이니 아니다, 이 책들은 나이, 성별과 상관이 없다는 분들은 아마 나보다 사고가 유연한 분들일 것이다. 경험상 마흔 이상의 글 좀 쓴다는, 글을 쓰고 싶은 여성이라면 이 두 권과 함께한 올 여름이 결코 아깝지는 않을 터이다.
1. 고궁 VS 레스토랑
우선,
‘여자’를 덮고는 제일 먼저 고즈넉한 고궁에 가고 싶었다.
‘생각’을 덮고는 파스타와 와인이 멋스런 작은 레스토랑을 가고 싶었다.
고궁에선 봄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나리나 벚꽃이 피어난 상투적 장면 같은 분위기속에서 아무런 걱정없이 한나절 멍하니 벤치에 앉아만 있다가 오고 싶었다. 벤치에 앉아서 나는 어떠한 생각에 잠기고 싶을 터였다. 예를 들면 내가 어릴 때부터 집주소를 기억하던 그 모든 집, 나를 길러오고 내가 살아왔던 그 집들을 다시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부모님과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 생각나 잠시 사진첩을 뒤적거리기도 했는데 신기한건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그 집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집의 구조가 훤한데, 그 집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퍼지는 거였다.
와인과 스파게티를 하다가 말아먹은 뼈아픈 기억이 있어 사실 언젠가부터 와인 하는 집은 가지 않아왔다. 원가를 알면 술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읽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페퍼잭 치즈와 진한 카베르네 쇼비뇽 한잔을 마시고 싶었다. 은희경 작가는 피노 누와를 좋아하시는 듯 한데 피노 누와는 여간해서 맛있는 브랜드가 드물다. 오랜만에 1865 까르미네르가 생각나는 거였다.
2. 합창 VS 가요
‘여자’를 넘길 때 남자의 자격 청춘의 합창단을 보며 뭉클했고
‘생각’을 넘길 때 불후의 명곡 재방송을 보았다.
어르신들이 입을 벌려 노래를 하시는 모습은 왜 이리 찡하고 감동적인 것일까. 그들의 눈빛과 입모양에서 미처 못다 이룬 꿈의 계절을 엿본다. 그리곤 다시 꿈이 있었던 그 시절의 간절함을 느낀다. ‘여자’는 여자들의 못다 이룬 꿈을 들추어 낸다. 신달자님이 여성으로서 모진 풍파를 겪고 여기까지 오신 분이기에 목소리는 늘 큰 언니같고, 이모같고, 선생님 같고, 엄마같다. 그런 당신의 마음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시큰하다. 왜 참고 있다가 눈물이 한방울 나올 때 누군가가 울지 말라고 안아주면 더 크게 울음이 터져버리는 것 같은.
<소년을 위로해줘>가 힙합 소년의 이야기인데 나는 책에서 아무리 힙합론을 주장해도 그냥 내가 그 시절 좋아했던 가요만이 생각난다. 이를 테면, ‘너를 처음 만난 날 소리 없이 밤새 눈은 내리고~’ 혹은 ‘혼자만의 사랑은 슬퍼지는 거라 말하지 말아요~’같은 가사가 입을 맴돈다. ‘생각’이 아무래도 <소년을 위로해줘>를 만나고 그에 빠졌을때를 떠올리게 하는 거였다.
3. 삼겹살 VS 아이스크림
‘여자’의 몇몇 중간에 삼겹살과 소주가 생각났고 잘 차려진 한정식의 밥상이 생각났다.
‘생각’의 몇몇 중간에 핑크빛 샴페인, 잭 다니엘(콜라탄)이 그리웠다.
달달한 아이스크림, 진한 초코렛도 먹고 싶어졌었다. 필라델피아 치즈케잌도.
여름이라 반찬하는 것이 아주 고역이다. 불 앞에서 불쾌감은 물론이고 요리하면서 이미 식욕이 떨어지기 일쑤다. 복숭아, 포도, 수박같은 여름과일과 미숫가루, 토마토 주스로 식사를 때울 때도 있고 비빔면 같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요리시간 자체를 줄이기도 한다. 그러다 갑자기 잡채, 굴비, 불고기 같은 밥반찬이 그리워 실제로 어느 비 억수로 쏟아지는 날 나는 잘 아는 한정식 집을 부러 찾아간 적도 있다. 밥먹고 나올 때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나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운전을 했다. 빗속, 밤속을 뚫으며 내 입에서 나지막히,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한마디. 엄마... 내가 엄마를 불러본지도 어언 삼년이 지나 4년이 되가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외제 식품 사이트에서 구입한 초코렛류의 과자, 쿠키, 음료수를 풀어놓고 우리끼리 초코렛 파티를 했다. 먹다가 너무 달아서 콜라를 마셨고 갑자기 매운 맛이 당겨 떡볶이를 급하게 사다 먹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들의 에세이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이 나로 하여금 패배감을 안겨준 건 처절한 다이어트, 체중조절의 불가능이었다. 많은 먹을 것들이 생각나 그걸 먹고 싶게 하는 책. 그러므로 책들은 본능을 자극하는 욕망의 메시지가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밖에,
‘여자’가 강연의 형식을 빌린 면담이라면
‘생각’은 독백을 가장한 편지.
‘여자’는 어머니라는 여성이
‘생각’은 여자로서 친구가 떠올랐다
‘여자’는 재래시장에 가고 싶었고
‘생각’은 대형 쇼핑몰에 가고 싶었다
‘여자’는 여성이기에 외로움을
‘생각’은 글을 쓰기에 고독함을 달래주었다.
‘여자’는 다시 일어나라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생각’은 잠시 누워라 발목을 잡았다.
‘여자’는 지혜가 삶의 지구력이라 말씀하셨고
‘생각’은 지성이 개인의 우주력이 될 수 있다 말해주었다.
‘여자’는 트로트가 바뀌어진 발라드 노래, 예를 들면 백지영이 부르는 ‘무시로’를 다시 듣고 싶었고
‘생각’은 록의 재즈버전, 그러니까 박정현이 부르는 ‘그것만이 내 세상’을 자꾸 듣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여자’는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고민을
‘생각’은 소설가로 산다는 것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었다.
‘여자’는 안성기
‘생각’은 박해일
둘 다 장동건, 이병헌은 생각나지 않았다.
다음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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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익혀야 할 최고의 기술은 자기를 있는 힘을 다해 살게 하는 기술일 것이다.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
- 자기 자신의 문제를 소설 속에다 적나라하게 고발해놓고 현실에서는 결코 고치지 않는 사람들이 소설가가
아닐까. -<생각의 일요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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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는 힘을 다해 살게 하는 기술이란 무엇일까. 그게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에 고개를 숙인다.
혹시 리뷰쓰는 자는 그 책의 장단점을 리뷰에 적나라하게 고발해놓고 현실로 돌아오면 바로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연휴가 끝나고 있다. 예전에 소원했던 사람과 좀 오래 대화를 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웃기게도 이 나라, 우리 사회, 정치인, 스티브 잡스, 우리 교육, 김연아, 이외수, 베스트셀러, 워터파크, 기후, 과일 물가, 추석, 가을까지... 그냥 대충 머리에 떠도는 잡담을 오래 나누었더니 꽤 진지한 성찬이 된 느낌이다.
결론은 사는게 억울하다고 징징대지 말자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가 억울하니 그걸 내세우지 말자는 누군가 내 억울함을 특별히 달래주길 바라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실은 서로의 억울함을 달래주었던 건 아닐까..싶다만.
하루종일 매미가 울었다. 그런 소리 딱 일년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