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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100쇄 기념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수년간 나의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마침내 읽었다. 결국 언제고 읽을 책은 읽게 된다. 아, 그전에 이미 영화화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봤다. 확실히 영화로 담아낼 수 있는 서사의 밀도와 깊이는 원작의 아우라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우리는 눈으로 모든 정보를 뇌에 전달하고, 뇌에 내린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데 만약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백색 질병’이 퍼진 사회의 몰락을 그린다.
보통 사람들은 정상의 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상에 아무런 불편이 없이 생활한다. 하지만 당장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책을 읽다 말고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암흑이 내리고 답답해서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도시에 이런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색 질병이 속수무책으로 퍼지면서 공포가,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야말로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첫 번째 환자를 필두로 해서 정부는 초기 발병환자들을 격리 수용에 나선다. 낡은 정신병원에 그들을 가두어 버렸다. 주제 사라마구 작가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캐릭터를 하나 배치한다. 안과 의사의 아내가 요주의 인물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다. 백색 질병의 원인을 알 수가 없듯이, 유일하게 그녀가 눈이 멀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격리 수용된 병동은 조금씩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당장의 먹을 것이 없어 그들은 굶주리게 된다. 그들은 포위하고 있는 군인들은 그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지만 그들 역시 곧 눈이 머는 건 시간문제였다. 눈이 먼 사람들은 격리된 공간에서 생존하기 위해 조직과 협력이 필요하지만, 그 대신 다른 선택을 하면서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대신 짐승이 되는 길을 택한다. 소설의 엔딩을 장식하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안과 의사의 아내는 인도주의 정신으로 최대한 타자를 도우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사회적 노력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말을 주제 사라마구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도대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먹을 것에 대한 집착과 자연스러운 생리현상 때문에 발생한 악취와 비위생적 상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들이, 비상상황에서는 얼마나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게 되는지 작가는 절절하게 표현한다.
그나마 격리된 수용소에 사람들이 적었을 적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눈이 멀고 총까지 지닌 악질 깡패들이 등장하면서 수용소는 지옥으로 한걸음씩 다가선다. 자신도 눈이 멀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린 군인들은 선을 넘어서려는 재소자들에게 총격을 가한다. 자신들이 무력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빚어낸 우발적 사고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군인들이 지급하는 식량을 독점한 좌병동의 깡패들은 다른 이들에게 귀중품과 돈을 식대로 요구하고, 다음에는 더한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한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기에 대항할 수도 없었던 다른 병동의 사람들은 무력하게 좌병동 깡패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에 사람들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얼마나 인간이 바닥까지 추락할 수 있단 말인가. 더 이상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던 의사의 아내는 가위를 들고, 깡패들을 응징하러 나선다. 그리고 곧 전쟁이 벌어지고 깡패들이 바리케이드처럼 설치한 매트리스에 용감한 한 여성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서 전체 건물에 불이 붙어 버렸다.
불에 타죽지 않기 위해 군인들이 총격을 할 지도 모른 상태에서 탈출을 감행하지만, 군인들 역시 모두 눈이 멀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찾아온 실명만큼 재소자들의 자유 역시 그렇게 찾아왔다. 다음 단계는 의사의 아내를 필두로 해서 생존과 자구에 나서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 버린 도시 역시 생존에 적합하지 않았다. 도시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과 전기가 공급이 되지 않는 소비처인 도시에서 먹을 게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슈퍼마켓은 이미 약탈된 지 오래다. 거리에는 죽은 사람들이 즐비하고 야생화된 고양이와 개들이 그곳을 누비고 있다.
그리고 안과 의사의 집에 안식처를 마련한 7명의 일행들에게 결국 광명의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주제 사라마구 작가는 눈이 멀어버린 도시에서 철저한 익명성을 바탕으로 아포칼립스적인 서사를 이어간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름이라는 개인의 고유성마저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는 설정이었을까. 그런 익명성 뒤에는 위선과 허위가 비집고 들어선다. 공교롭게도 우병동 1호실에는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부터 시작해서 안과 의사와 접촉한 이들이 모이게 된다. 검은색 안경을 쓴 여자는 자신의 정체가 들어날 위기에 처하자 슬그머니 검은색 안경을 벗는다.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자신을 보호하고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행동이었을까.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타인을 위한 이타주의가 구원의 길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다가, 또 반대편에서는 약한 사람들이 죽든 말든 자기들의 욕망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극한의 이기주의가 발현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익명성은 최악의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잘 아는 이들에게 그런 악행을 저지를 수는 없었으리라. 나와 나의 동지들이 아닌 철저하게 타자화된 이들을 착취하는 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라는 변명으로 자신의 양심을 가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영화에서 아주 잘 묘사되었는데, 텅 비어 버린 도시에서 안과 의사의 아내가 먹을 것을 구하다가 잠시 안식을 위해 들른 성당에서 성상들이 모두 눈을 가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는 시퀀스는 과연 압권이었다. 신마저 보는 것을 거부했다는 표현일까. 과연 다시 볼 수 있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마저 사라졌다는 걸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장치는 아니었을까. 공존이 아닌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로 뒤뜰의 토끼와 닭을 잡아먹으며 생존하는데 성공했던 어느 노파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의사의 아내는 좌절한다.
모든 희망과 구원에 대한 기대를 접으려던 그 순간에 사람들은 시력을 되찾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이던가.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후속작으로 <눈뜬 자들의 도시>가 있는 모양이다.
가볍게 시작했으나 종말 서사가 인도하는 어둠은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금방 읽은 걸 보면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말이겠지. 역자는 주로 영문학을 번역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버전은 영어판의 번역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주제 사라마구 작가 특유의 문장 끊지 않고 쓰기와 사뭇 다르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아마 영어판 독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건조한 스타일의 번역이 아포칼립스적인 분위기가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아니 보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비판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