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거창하게 뽑았으나 사실 내용은 역시나 책읽기에 대한 것이다.

 

4일전에 중고서점에서 냉큼 줍줍한 오르한 파묵의 <페스트의 밤>에 빠져 버렸다. 원래 이번 명절에는 보뱅의 책을 읽으려고 했으나... 아직 명절이 끝나지 않았으니 보뱅의 책도 최소한 한 권은 읽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두툼한 책의 포스에 눌린 나머지, 사두기만 하고 아예 펴볼 생각조차 안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침대 머리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뒷장에 실린 창궐하는 페스트(질병)의 존재를 부인하는 장면에서 코로나 대유행 시절이 생각났다.

 

이거 또 참을 수가 없네 그래.

 

사실 그동안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오르한 파묵의 책들을 만나 보겠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했으나 한 번도 완독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내 이름은 빨강>을 필두로 해서 그 뒤에도 몇 권이 더 있다. , 이 참에 읽다만 책들을 다시 끝내야 하나 어쩌나.

 

사실 독서는 시의성,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이밍 정도가 되겠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작가들도 코로나 시대에 전염병을 다룬 책들을 펴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 들어올 적에 노를 저어야 한다는 걸까. 너무 시니컬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쨌든 파묵의 <페스트의 밤>1901년 민게르섬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중국에서 도래한 신종 페스트가 퍼지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제 막 결혼한 누리 파샤와 파키제 술탄 부부는 중국 무슬림에게 전할 술탄의 메시지를 들고 중국행에 오른다. 한편, 술탄은 오스만 제국 동지중해 최대 항구인 이즈미르에 퍼진 페스트를 신속하게 진압하는데 성공한 제국의 보건위생의이자 방역전문가 수석 검사관 스타니슬라프 본코프스키 파샤를 페스트 전염이 심각한 양상을 띤 민게르섬에 파견한다.

 

<페스트의 밤>은 역사소설인 동시에 추리소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한다. 외부로부터 고립된 민게르섬은 소설적 재미를 위한 충분조건을 갖춘 상태다. 참고로 진짜 민게르섬이 존재하는지 지도로 찾아보는 우는 범하지 않도록. 가상의 섬이라고 한다. 우선 민게르섬에는 그리스에게 빼앗긴 지중해 동부의 터키 영역에 가까운 섬에서 피난온 혹은 강제추방된 무슬림들과 그전부터 살아온 기독교도인들의 비율이 거의 50:50이었다.

 

그리고 보니 방역은 처음부터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개화된 룸 사람(기독교도)들은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 방역과 격리를 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즈미르에서의 방역 성공도 이들의 협력이 절대적 공헌을 했다고 본코프스키 파샤는 증언한다. 반대로 무슬림들은 이웃 크레타섬의 경우처럼 페스트를 이용해서 서방세계와 그리스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섬을 빼앗으려는 고도의 정치적 음모라는 점을 이유를 들어 방역에 반대한다. 아니 총독인 사미 파샤는 처음부터 자신이 통치하는 섬에 페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그 존재를 부정한다. 이미 이즈미르를 능가하는 페스트의 명백한 징후를 보이는 사망자가 능가했음에도 말이다.

 

이런 와중에 적극적으로 페스트 발병 사실을 선포하고, 방역에 나서려던 본코프스키 파샤가 암살당하면서 <페스트의 밤>은 그 피치를 올리기 시작한다. 아주 적절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중국으로 향하던 젊은 전문의 누리 파샤 부부에게 술탄의 비밀 명령이 떨어지고 누리 파샤와 파키제 술탄 부부는 다시 민게르섬으로 향한다.

 

파묵 선생은 20세기 초반, 유럽의 환자라는 별명으로 수백년 동안 지배해온 북아프리카와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급속도로 상실하고 있던 조국 터키(이제는 튀르기예라고 불러야 하나, 난 계속해서 터키로 부를란다)의 운명은 그야말로 등전등화 같은 상황이었다. 그리스를 필두로 해서 유럽의 모든 영토를 잃었으며 이집트와 튀니지 마저 각각 영국과 프랑스에게 빼앗겼다.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하하던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여 역시 흑해 연안의 영토들도 상실했다. 과연 이게 수세기 전 빈을 포위하면서 전유럽을 공포에 몰아 넣었던 오스만 제국이란 말인가.

 

산업혁명을 계기로 눈부신 경제 및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가던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는 달리 여전히 중세 무슬림 율법에 안주해 있던 터키는 그야말로 열강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버렸다. 동방에서 도래한 페스트가 창궐해도, 터키는 제대로 된 방역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물론 술탄은 그전부터 이런 사태를 대비했지만 페스트에 대한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 제한적인 방역과 격리 말고는 다른 대처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코로나라는 이전에 보지 못한 가공할 위력을 지닌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2년 전의 기억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소환되었다. 그나마 페스트는 공기 중의 오염으로 전파되지 않지만, 마스크를 써도 막을 수 없었던 코로나의 확산은 우리의 삶을 B.C.(Before Corona)와 그이후로 100% 바꾸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여전히 코로나는 우리 주변을 떠돌면서 위협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전염병이다.

 

, 지금 다시 책을 살펴 보다가 파묵 선생이 정한 민게르섬의 위치를 책에 실린 지도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놀랍게도 크레타섬과 로도스섬 사이 가상의 공간에 민게르섬을 배치했다. 개인적으로 더 아래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터키 위정자들이 우려한 대로 섬이 페스트 사태를 통해 그리스의 지배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게 됐다.

 

짧게 탁탁 치고 넘어가는 <페스트의 밤>이 지닌 구성 때문인지 두께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소화 중이다.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술탄이 파견한 수석 검사관이 피살되면서 발생한 미스터리까지 해결해야 하는 해결사로 등장한 누리 파샤와 그의 아내로 이 모든 걸 기록한 파키제 술탄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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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9-10 12: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780쪽의 두꺼운 책이네요! 오르한 파묵이 집필을 마칠 무렵
코로나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본인도 많이 놀랐을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2-09-11 23:41   좋아요 1 | URL
역시 책은 타이밍이지 싶습니다.

파묵 샘들의 책이 예전만 인기가
없지 싶네요. 노벨상 특수를 가장
많이 탄 작가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데 말이죠.

새파랑 2022-09-10 19: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파묵 항상 읽어보고 싶지만 손이 잘안가는 작가 입니다 ㅋ <하얀성> 한편만 읽었는데 좀 어려웠습니다 ㅎㅎ 왠지 좀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레삭매냐 2022-09-11 23:42   좋아요 1 | URL
앗~! 저도 <하얀성> 도서관
에서 빌려다 읽다 말고 반납
했는데 -

<페스트의 밤>이 좀 더 완성
도가 높지 않나 싶네요.

coolcat329 2022-09-10 2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실물보고 두께에 놀랐습니다. 오르한 파묵 이젠 <내 이름은 빨강>읽어보고 싶은데, 손이 안 가는 작가입니다.

레삭매냐 2022-09-11 23:48   좋아요 2 | URL
저도 그러하답니다 -

그래도 무려 노벨문학상 작가
라고 하니, 한두권씩 쟁이다
보니 ㅋㅋ

얄라알라 2022-09-11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다가 종종 단어에서 막히면, 네이버 검색하고 다시 돌아와 읽는 저같은 독자에게 하시는 말슴 같아서 뜨끔.

‘민게르섬‘ 검색해볼 뻔 ㅋㅋ
가상의 섬이어도, 나름 위치성이 분명하게 있네요
근데 크레타섬과 로도스섬, 이 섬들의 위치도 다시 검색하러 가봐야겠어요 ㅎㅎ 레삭매냐님 페이퍼를 읽다보면 왜 이리 검색할 일이 생기는지 . 배움 주시는 레삭매냐님.

레삭매냐 2022-09-11 23:49   좋아요 2 | URL
부족한 닝겡이의 허접한 글을
좋게 봐주시니 고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야말로 아예 네이버와 위키
피디아 그리고 구글맵을 달고
산답니다 ^^

서니데이 2022-09-11 18: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 보면 잘 모르겠는데, 페이지가 두꺼운 책인 모양이네요.
레삭매냐님, 추석 잘 보내셨나요.
즐거운 연휴 보내시고, 좋은 주말 되세요.^^

레삭매냐 2022-09-11 23:4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명절이 그렇게 설렁설렁
지나가고 있네요.

얄라알라 2022-09-11 2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레삭매냐님 저 방금 ˝닝겡˝ 검색하고 다시 왔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2-09-13 13:34   좋아요 0 | URL
저도 일본어 하는 동료에게
배운 말인데, 나름 갠춘한 것
같아서 종종 쓴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