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화면 전체로 분사되는 피를 계속 접하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박 감독의 피가 잔혹함을 느끼게 한다면 김 감독의 피는 강렬하고 화려하다.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색감이다. ‘달콤한 인생’을 보면서도 머리통이 총탄에 바스러지고, 회 뜨듯 칼로 배를 휘젓는 잔인한 영상에 내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새삼 ‘피의 미학(美學)’을 떠올렸다.
김지운 감독과의 인터뷰는 ‘달콤한 인생’ 개봉 시기에 맞춰 ‘신동아’ 5월호용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 일본 프로모션 일정과 겹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 영화가 칸 영화제 공식 섹션 중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만 해도 유일하게 공식 섹션에 진출한 한국 영화였다(이후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이 공식 섹션 중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그래서 “칸에도 갔으니 인터뷰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로는 ‘피맛’을 아는 이 감독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였다.
4월25일 오후 4시, 서울 압구정동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날씨가 꽤 더웠지만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털모자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났다.
-실내에서도 모자와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야 이유가 있었죠. 낯가림이 심한 편이거든요.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고, 굳이 말을 안 해도 되며, 인사하기 싫은 사람한테 인사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하지만 이젠 습관이 됐어요. 제가 모자와 선글라스를 안 쓰면 주변 사람들이 더 불편해하고 심지어 못 알아보기도 하죠.”
영화주간지 ‘씨네 21’의 편집장을 지낸 조선희씨는 저서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에서 “그는 늘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뭔가 우수에 찬 듯, 또는 심각한 듯 다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코미디 반죽’인 자신을 은폐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하면서도 어느 순간 선글라스를 벗었고,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게 하는 특유의 ‘김지운식’ 유머를 자주 선보였다.
지독한 자기애가 부른 파멸
-칸에 처음으로 초청받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영화제 가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니까 그저 보너스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 국제적으로도 좋은 영화로 인정을 받았다는 정도의 충족감이랄까. 사실 가면 귀찮은 일이 너무 많아요. 턱시도도 입어야죠, 한국에서도 제작 발표회 같은 부대행사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런 데 참가해야죠. 칸에 간다니까 지인들이 ‘네가 턱시도를 입어?’라고 했을 정도예요.”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이 아쉽진 않나요.
“경쟁 부문에 초청돼야만 세계 영화사 조류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건 한국뿐인 것 같아요. 공식 섹션이든 부대행사든 우리 영화가 많이 초청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합니다. 순위나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또 심사위원장의 성향에 따라 섹션별 출품작이 많이 달라져요.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처음에는 비경쟁으로 갔다가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에 의해서 경쟁으로 옮겨진 거고요. 경쟁에 갔고 또 수상했다고 해서 경사인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아쉬워하거나 위축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그것보다 ‘달콤한 인생’에 생각보다 많은 관객이 들지 않은 게 아쉽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