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 연출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멋지게’ 살아보고 싶었다. 다음 학기부터 그는 연극 연출로 전공을 바꿨다. 하지만 곧바로 입대했고 온갖 문제를 일으키다가 제대하고 보니 대학에서는 이미 제적돼 있었다. 학교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그때부터 10년 가까이 백수였어요. 정말 아무 일도 안했어요. 하루 종일 책이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었어요. ‘교보문고에서 몇 시까지 책을 본다’는 식의 1일 계획표를 짜서 하루하루 보냈죠. 아마 제 인생에 가장 ‘달콤한 시절’이라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싶어요. 친구를 만나 커피 한 잔 마실 때의 행복도, 책 한 권, 노래 한 곡 접할 때의 희열도 너무 컸고요. 지금은 글쎄요. 그때만큼 재미가 없으니까 계속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본인은 편했다지만 가족의 불안과 걱정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직장생활을 하던 어머니는 그에게 9급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독촉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반 폐인 상태로 문을 열어주는 서른 살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암담했기 때문. 그 역시 ‘백수 7년차’쯤 이르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어렴풋이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모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프랑스 영화를 실컷 보고 오면 무언가 길이 보일 것 같았거든요. 당시 파리에 두 달간 머물며 100여 편의 영화를 봤어요. 운 좋게도 그때 파리에서 세계 영화사의 걸작을 정리해 틀어주는 행사를 했거든요. 저도 영화 좀 봤다면 본 사람인데,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어요. 세상에 훌륭한 영화와 감독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죠. 유럽에서 보낸 5개월이 제게 영화감독의 꿈을 다시 심어줬지만, 귀국 후 3년간 백수 생활을 더 해야 했죠.”
‘10년차 백수’의 저력
1996년, 2년간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거의 동시에 가만히 서 있는 차를 박았다. 수리비가 400만원이나 나왔지만 ‘10년차 백수’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 쓴 시나리오가 영화지 ‘프리미어’ 공모에 당선됐다. ‘그래도 10년간 헛 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분식집에 라면을 먹으러 갔어요. 그런데 주인 아줌마가 잡지로 그릇을 받치고 오더라고요. ‘씨네 21’이었어요. 라면을 먹으면서 잡지를 봤는데, 시나리오 공모 공지가 있었어요. 마감이 일주일 남았더군요. 그대로 집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썼죠. 5일 만에 완성한 이 시나리오도 다행히 당선됐어요. 그 작품이 바로 제 데뷔작 ‘조용한 가족’입니다. 1년여 준비한 끝에 1998년 개봉했고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았죠.”
김지운 감독은 ‘로젤’ ‘버자이너 모놀로그’ 등으로 유명한 연극배우 김지숙의 동생이다. 한때 ‘김지숙과 그의 동생’으로 부르던 관계는 김 감독의 연이은 흥행 성공으로 이젠 ‘김지운과 그의 누나’로 역전됐다.
-누나인 김지숙씨와 참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누나가 ‘업계’ 선배로서 많은 도움을 줬을 것 같은데요.
“한번은 누나가 작업하는 걸 도와준 적이 있어요. 그런데 누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거든요. 연기는 목숨 걸고 하고, 조명이나 무대장치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기죠. 그 모습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또 영화나 연극, 연기에 대한 ‘잡념’이 생길 때 꼭 누나와 이야기를 나눴고요. 쓰가 호에이의 ‘뜨거운 바다’로 연극무대에 연출가로 데뷔할 때도 누나의 도움을 받았죠. 하지만 현실적인 도움보다 정신적인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혹자는 누나를 제 작품에 출연시키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물론 제 영화에 필요한 캐릭터가 누나와 꼭 맞는다면 같이 해야죠. 누구보다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훌륭한 배우니까.”
어느덧 약속한 두 시간이 지나갔다. 그래서 한 번 더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더니 흔쾌히 좋다고 했다. 약속시간을 정하면서 김 감독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이랬다.
“시간을 쪼개 보면 오늘 4시 한남동 쪽 괜찮고, 내일 6시 종로 쪽 괜찮아요.”
그래서 4월30일 오후 6시 종로에서 다시 만났다.
-문자 메시지가 재미있더군요. 백수 시절 1일 시간표를 짜서 생활했다는 얘기가 생각났어요.
“게으른 편이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오늘도 나오면서 시간표를 짰어요. 오후 3시부터 6시 영화 관람, 6시부터 7시 인터뷰, 7시 이후 영화 관람(웃음). 방금 전에는 예술영화 전용극장으로 바뀐 허리우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왔어요.”
-쉴 때는 주로 영화를 보나요?
“극장에 가기도 하고 DVD를 보기도 해요. DVD를 대략 500편 모았어요. 며칠 전에도 10편을 새로 신청했고요. 영화 보는 것 외에는 별다르게 하는 일이 없어요. 만나는 사람들도 다 영화인이다 보니 영화 이야기만 하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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