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김대중과 배우 최민수, 두 남자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상징적 인물이란 공통점이 있지만 전혀 다른 패턴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신분석의학자의 흥미를 끈다. 》



한국의 영화배우 중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인물로 평가받는 최민수. 그러나 그런 카리스마보다 더 큰 공허함을 느끼게 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의 ‘터프함’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터프함이 지나쳐 유치하고 단순하며 느끼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의 터프함에는 남성다운 매력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최민수 닭’이 있었다. 주인이 일반 닭과 최민수 닭을 잡았다. 털을 뽑으려고 하자 최민수 닭이 말했다.

“내 털은 내가 뽑는다.”

결국 스스로 털을 다 뽑은 최민수 닭은 끓는 물에 넣어졌다. 최민수 닭이 물 속에 들어가며 말한다.

“춥다, 뚜껑 닫아라.”

얼마 전 그가 출연한 토크쇼에서 MC가 ‘최민수 시리즈’ 중의 하나라며 들려준 말이다. 관객들이 박장대소하는데, 최민수가 진지한 얼굴로 관객을 나무란다.

“왜 웃으세요. 우리 눈높이 좀 높이자구요. 진짜로 멋있지 않아요?”

바로 그렇게 말하는 최민수의 부적절한 진지함이 참으로 눈길을 끈다.

대한민국 정치인 중 최고의 카리스마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김대중 대통령. 그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실 예닐곱 번씩이나 감옥에 드나들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나에게 무척 용감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퍽 겁이 많습니다. 그만하면 이력이 날 만 하건만, 감옥에 들어가야 할 때마다 두렵고 마음이 죄입니다. 속으론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섰던 겁니다.”

그는 자신을 겁쟁이라고 한다. 자신은 두려움이 많고 소심하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개가 무서워 개 키우는 집에는 심부름도 못 갔노라고 소년시절을 회고하기도 한다. 4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번의 감옥생활과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엔 대한민국 대통령에 오른 인물의 고백 치곤 너무 의외다.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어린 시절의 빈궁을 당당하게 밝히는 심리와 같은 것일까. 그러나 DJ의 경우엔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카리스마의 정치인 DJ, 겁쟁이 DJ. 이런 부적절한 조화가 적절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 바로 김대중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독자 여러분께 개인적인 정치적 취향은 잠시 뒤로 하고 김대중이라는 한 남자를 바라보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느낌에만 주목해주길 부탁드린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보여준 대중적 흡인력의 심리적 배경에 대해, 흔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논리적 화술이나 지적인 태도를 꼽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의 카리스마는 그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논리적 태도에다 감성이 동반된 형태의 균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파괴력이 극대화한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논리와 감성의 균형적 카리스마’라고나 할까.

김대중과 최민수. 두 남자는 각기 다른 이유로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들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카리스마의 내용은 전혀 다른 패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의 카리스마는 우등하고, 배우가 연기하면서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열등하다는 식의 단세포적인 논의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명백히 차원(Dimension)의 문제가 아니라 질(Quality)의 문제인 것이다.



질이 다른 카리스마의 소유자들


필자의 직업은 정신과 의사다. 굳이 직업을 밝히는 이유는 정치평론가나 영화평론가가 느끼고 판단하는 김대중, 최민수와는 전혀 시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한다. 먼저 최민수를 살펴보자.

“그는 이 드라마(‘사랑의 전설’)에서 자신이 좋은 남자로 보였으면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이 대목에서 ‘자전거 페달의 목가적 의미’ ‘내 공간의 페이지’ 등 잘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사용했다. 이는 전형적인 최민수식 어법이다.”

‘사랑의 전설’이라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그와 인터뷰를 한 한 기자의 말이다. 그는 기자들이 인터뷰하기 힘들어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한다. 그의 말은 현학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언뜻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아들을 키우는 일조차 애국애족의 측면에서 심각하게 설명하는 사람이다.

얼마 전 가족과 피자를 먹으러 갔다. 갑자기 옆 테이블이 술렁거려 돌아보니 고등학교 남학생 네댓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손한 태도로 인사하고 있었다. 선생님이라도 나타난 것일까. 그러나 그들이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한 대상은 문 쪽에 나타난 두 명의 선배였다. 선배 둘은 당당하고 거만한 자세로 후배들에게 말하고 있었고 후배들은 다소곳한 자세로 선배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선생님이나 부모의 말을 들을 때도 그렇게 진지하고 겸손하지 않을 것이다.

고교 시절 남자들에게 선배란 거의 신과 동격쯤 되는 존재가 아닐까. 특히 더 이상 상급 학년이 존재하지 않는 고3의 권위란 가위 절대적이라 할 만하다. 그들의 어깨에는 늘 힘이 들어가 있고, 후배를 대할 때의 목소리는 낮고도 음산하다.

컴컴한 극장에서 ‘대부’의 말론 브랜도나 ‘보스’의 조양은이 보여주는 절제되고 권위 있는 행동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는 세대다. 어쩌면 이 시기는 남자들에게 최초의 카리스마가 존재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삼류 코미디 같은 유치함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남자다움의 원형, 수컷의 체취나 권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른바 ‘고3의 카리스마’인 것이다.

최민수에게는 늘 ‘무한의 카리스마’ ‘고독한 카리스마’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필자는 최민수를 보면 ‘고3의 카리스마’가 연상된다. 양귀자 소설 ‘모순’에는 고3의 카리스마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진모(주인공의 남동생)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애당초 주먹질하곤 거리가 먼 허약 체질의 심약한 졸개 몇 명을 놓고 조직, 조직 해대는 엉성한 보스다. ‘모래시계’에 나오는 최민수를 교과서 삼아 혼자 거울을 들여다보며, 좌악 깔리는 말투를 맹렬히 연습한다. 대화 도중에도 불현듯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면서 상대방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런 다음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날리는 연습도 한다. 정확하게 최민수를 표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최민수의 카리스마가 또 다른 어떤 것을 표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최민수의 ‘as if 성격’


정신분석 용어 중에 ‘as if 성격’이라는 것이 있다. As if란 ‘마치 ∼인 것처럼’이란 뜻의 접두사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는 자기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대상을 흉내내는 데 익숙하다. 행동이나 생활, 가치관도 동일시하는 대상의 것을 모방한다.

그런데 그들이 흉내를 잘 내는 것은 자신이 텅 비어 있다는 느낌, 바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둡고 냉소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 성격이 영판 달랐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며 불쑥불쑥 던지는 농담이 TV의 대발이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사진촬영 중에도 ‘이렇게 찍으면 이쁘겠다. 나 어때요?’라며 익살을 부리며 벤치를 번쩍번쩍 들어 옮겨놓던 최민수를 보고 있던 기자가 오히려 의아해했다. 그런 그를 보고 친구들이 여자 같다고 놀린다고 한다.”

최민수가 92년 대단한 인기를 끈 ‘사랑이 뭐길래’란 드라마에 ‘대발이’로 나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절의 인터뷰 기사다. 신기하기까지 하다. 지금은 많은 사람에게 강한 남자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는 최민수의 8년 전 모습이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대발이 역을 맡으며 실제 모습까지도 대발이화(化)되었던 것이다.

그의 성격은 전형적인 ‘as if 성격’ 유형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모래시계’ 이후 2년 간 박태수로 살았다”라고 한 그의 말은 바로 as if식 삶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배우로서 새로운 인물에 몰입하고 그 인물의 성격으로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호들갑을 떨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배우에겐 천혜의 자원일 것이다. 문제는 ‘배우 최민수’가 정체성이 취약한 ‘인간 최민수’의 내면을 필요 이상으로 지배하는 불안정한 심리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잠깐 어느 기자가 취재 후기에서 밝힌 최민수에 대한 느낌을 들어보자.

“고독하다는 이야기를 자꾸 하기에 단도직입적으로 ‘왜 고독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한참을 생각한 뒤 특유의 제스처로 마치 대사를 외우듯 ‘떨어지는 물방울을 비가 아니라 보석으로 보기 때문에 고독하다’고 유장한 어투로 말하더군요. 감상적인 편지에서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는 제가 만나본 어떤 사람보다 ‘배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평상시에도 영화 속에서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사실 최민수씨를 다양한 이유로 폄하하는 사람이 있지만, 적어도 그의 배우성 혹은 스타성은 본능적인 재능에 더 가깝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필자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진단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자는 직업 특성상 ‘배우 최민수’를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의학적 견지에서 ‘배우 최민수’가 아닌 ‘인간 최민수’의 내면을 관찰하다 보면 필자는 마치 그가 속이 비어 있는 중국빵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인간은 생후 2∼3세에, 엄마로부터 최초의 심리적인 분리-독립(separation-individuation)을 하면서 자기정체성이 확립된다. 이 시기에 적절한 심리적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나 지나치게 강한 처벌을 경험한 아이들은 정체성 확립에 문제가 생긴다. 그 대신 극도의 공포감과 불안,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이로 인한 공허감, 억압된 분노들을 가슴속에 담게 된다.

최민수는 두 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떨어져 아버지와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얼굴은 거의 보지도 못한 채 할머니와 고모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최초의 분리-독립 과정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긴 것이다. 당연히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도 정상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수염 한번 만져본 적이 없었고 아버지에게 용돈 한번 받지 못했다고 했다. 청소년기에 그는 전국을 돈 없이 떠돌면서 극심한 외로움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종일 샌드백을 두드리기도 했고 밑바닥 주먹세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고아인 친구와 자취를 하며 굶기를 밥먹듯이 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육성(肉聲)이 아닌 가성(假聲)으로, 어떤 대상을 흉내내는 방식을 통해서라도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청소년기를 넘기면 스스로 부끄러워서라도 용도 폐기하는 ‘고3의 카리스마’를 지금도 움켜잡고 있는 것이다.

아마 87년의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서울시청 앞에서 최민수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가 권투영화 ‘신의 아들’로 데뷔한 다음해였다.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했는데, 그는 카키색 군복의 깃을 세우고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더블백을 메고 사람들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그의 들개 같은 눈빛과 절제된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수컷의 강렬한 느낌, ‘고3의 카리스마’가 아직 유효하던 시절이었다. 그와 비슷한 연배인 필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오랫동안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을 설레었는지 모른다.

‘최민수 시리즈’용이 아니고 보는 사람의 가슴을 진짜로 설레게 할 속이 꽉 찬 ‘배우 최민수’의 카리스마를 우리는 언제쯤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건 온전히 ‘인간 최민수’의 몫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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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정광사 수행음악회. 자정 무렵 졸던 불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피아노를 두드리며 “비나리는 호남선~” 하고 불러대니 법당 안이 난리가 났다. 신이 난 불자들이 손뼉을 치고 조명을 껐다 켰다…



“뭐 하는 사람이야?”
무료하게 TV채널을 돌리던 남편이 시선을 고정하고 묻는다. 고개를 돌리니 임동창(44)이다. 방송을 의식해서인지 원단 전라도 말투에 평소보다 약간 순화된 욕을 섞어가며 피아노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섰다 앉았다 열강을 펼친다. 교육방송 시청률 올리는 데 한몫 했다는 소문의 ‘임동창이 말하는 우리 음악-흐드러지게 한판 놀아보세’였다.

“그냥 음악하는 사람.”

대답해 놓고 보니 멋쩍다. 그를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 마디로 설명하려니 대답이 마땅치 않다. “원래 피아노를 쳤는데 국악도 하고, 작곡도 하거든.” 아는 대로 나열해봐도 영 아니다. 남들처럼 그냥 ‘유명한 피아니스트’ ‘국악인’ ‘작곡가’ 혹은 ‘어느 학교 출신’이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임동창은 세상 사람이 정한 틀이 도무지 맞지 않는 사람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뭐 좀 간단하게 부를 거 없어요?”라고 물었더니 실쭉 웃으며 “그냥 현대에 사는 음악가라고 혀. 그것도 길면 소리쟁이라고 혀”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그의 호가 또 ‘그냥’ 아니던가.

그래서 종잡을 수 없는 임동창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단어를 동원한다. 괴짜 피아니스트는 한물간 표현이고, 컬트 피아니스트는 2년 전 유행어다. 요즘은 퓨전 음악가란 말이 간간이 쓰이지만 그가 원치 않는 버터냄새를 너무 풍긴다. 차라리 빡빡머리 혹은 대머리 피아니스트라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음악계의 이단아라 하면 좀 심각해지고, 그가 조직한 젊은 음악인 모임 ‘쟁이골‘ 촌장이란 말이 제일 친근하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가리켜 ‘기인(奇人)‘이라 하고 그는 ‘그냥 임동창‘으로 불러달란다.


드뷔시고 나발이고 때려치우시오

임동창 음악을 가리켜 국악이냐 양악이냐, 저 사람이 피아니스트냐 아니냐 헷갈려 하는 것은 그의 음악을 이루는 성분이 남달리 복잡하기 때문이다. 속세에서 사람 가리는 데 가장 중요한 ‘대학교 졸업장‘이나 받았는지 의문스럽고, 또 음악계에 끼는 데 필수적인 ‘누구누구 제자‘ ‘무슨 콩쿠르 출신‘이라 내세울 것도 없다. 그런데 누구도 딴죽 걸기 어려운 달변이고, 아는 건 또 왜 그리 많은가. 도대체 어디서 굴러나온 사람인가.

1956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워낙 노래를 잘해 별명이 ‘팔도강산’이었단다. 그의 음악회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연주 중간중간 불러제치는 유행가 솜씨가 심상치 않다. 그의 말대로라면 노래솜씨는 “뽕짝을 뒤집어지게 잘 불렀던 부모님 덕”이다.

그래도 그의 직업 중 제일 앞에 소개되는 것이 피아니스트다. 사실 그는 피아노를 군산남중 2학년 때 처음 봤다. 처음 듣는 순간 투명한 피아노 소리에 미쳐버려 그날로 헌책방에서 피아노 교본을 구해다 교회 피아노를 가지고 연습했다. “한번 제대로 배워봐야 쓰겠구먼” 하고 찾아간 것이 당시 군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이길환 선생 음악학원. 동창의 재능을 아껴서 먹이고 재워가며 피아노를 가르쳐준 선생님 밑에서 5년. 그 사이 피아노 실력은 독주회를 열 정도로 일취월장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작곡에도 손을 댔다. 물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미친 듯 베토벤이니 모차르트니 대가들의 음악을 들으며 작곡이란 걸 배웠다. 여기까지는 어린 동창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한 스승의 안목에 그의 천재성이 발현되면서 왕성하게 서양음악을 탐식하던 시기다.

그리고 고교 졸업 후 돌연한 입산. 그의 음악과 입산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밤중에 작곡한다고 오선지 앞에서 끙끙대는데 선생님 주무시는 방에서 괘종시계가 땡땡땡 하고 세 번 치데요. 그런데 내 방 시계를 보니 자정이더란 말입니다. 참 이상하다 해서 선생님께 ‘지금 몇 시예요?’ 했더니 ‘3시다’ 하시는 거예요.”

남들 같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일이라고 곧 잊어버렸겠지만 임동창은 마치 괘종시계가 자신의 머리를 울리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용화사에 들어가 보림이라는 법명으로 1년 넘게 수도생활을 했다. 군 입대 문제로 하산하기까지 그는 피아노나 음악 따위는 딱 끊고 복식호흡과 수식관을 배웠다. 당시 큰스님으로부터 받은 ‘이 뭐꼬’라는 화두는 나중에 그의 음악(수행음악 ‘이 뭐꼬 1, 2’ 작곡)으로 되살아난다. 이 시기, 그는 아예 음악을 딱 끊고 마음공부에 열중하면서 남의 것(서양음악) 열심히 외워 연주해봤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군 제대 후 그는 절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에 자신의 재주가 통하는지 시험해 보기로 한다. 군악대 선배들이 신중현 밴드에 들어오라고 권했지만 음악학원 선생 쪽을 택했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그의 제자들은 다양했다. 4개월쯤 지나니까 음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소문 듣고 찾아오더니 나중에는 곡 해석을 놓고 의논할 게 있다며 전문 피아니스트가 찾아오기도 했다.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그에게 전문연주가가 음악을 한 수 가르쳐달라고 찾아오니 별꼴은 별꼴이었다.

“악보만 딥다 판다고 음악이 되나. 몸과 마음이 하나 돼야 예술이 나오지. 피아노는 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피아노가 돼야 한당께.”

그 피아니스트는 드뷔시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인벤션부터 다시 배우라는 그의 호통에 자존심이 상해 돌아갔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연주자들이 차이코프스키가 어쩌고 베토벤이 어쩌고 하며 현지 여행하고 전기 읽어가며 공부한다고 하면 ‘다 사기’라고 손사래를 친다. 독산동 음악학원 선생. 그의 말대로 알량한 재주를 마음껏 부려보던 시기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공부를 하나?’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겨 최동선 교수를 찾아간 것이 84년, 스물여덟 살이었다. 최교수의 권유로 다시 학력고사를 공부해 85년 서울시립대 작곡과 수석입학. 천재라고 하기에는 너무 쑥스러운 스물아홉이었다. 대신 조교급 1학년생으로 최교수의 작곡발표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는 등 맹활약을 했다. 하지만 화려한 학창생활과 달리 졸업과 함께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 다시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임동창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어울려 공연을 하면서부터다. 사물놀이에 조금만 관심이 있고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시 김덕수패 전용무대였던 신촌 난장에서 민둥머리 피아니스트가 사물놀이에 맞춰 신나게 놀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이미 서른 중반. 힘과 기가 넘쳐흐르는 임동창의 연주와 몸짓에 “도대체 저자가 누구여”라는 소리가 여기저기 튀어나왔다.

그와 사물놀이의 인연은 89년 2월 낙원동 어느 찻집인지 술집인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술 한잔 걸치고 장구를 마구잡이로 두드리고 있는데 그 자리에 있던 김덕수패 사물놀이 단원인 이광수씨가 다가와 장구는 그렇게 치는 게 아니라며 채를 빼앗았다. 장구 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동창은 아예 거처를 사물놀이패가 있는 곳으로 옮기고 김덕수씨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기억으로만 전해지던 사물놀이에 처음 채보란 걸 시작했소. 내가 그래도 서양음악이란 걸 좀 아니까 해보자 했지. 그런데 덕수형이랑 맘이 안 맞는 거야. ‘이건 해봐야 아는 거여’라고 큰소리만 치는데 그런 식으로는 일반인에게 전수가 안 되잖아요. 덕수형이 ‘이것은 큰 호흡이여’라고 하면 내가 얼른 악보로 적었죠. 사실 만날 쌈만 했어요.”

그 와중에 ‘정간보’ 1, 2집이 완성됐고 임동창은 국악의 깊은 맛에 푹 빠진다.




동창아, 동창아 뭐 하니



95년 8월29일 연강홀에서 가진 첫 독주회를 전후로 그의 무대인생이 만개한다. 그 사이 연극음악도 하고 무용음악도 하고 93년에는 첫 창작음반 ‘신아위’와 95년 74분짜리 즉흥연주음반 ‘천국인간’(영국 재즈뮤지션 토니 부르크와 협연, 덴마크 레이블로 출시)을 내기도 했지만, 임동창 음악의 진수가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역시 연주회였다.

‘이 뭐꼬’(피아노 산조), ‘달아 달아’ ‘가을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전래동요 편곡) 등 자작곡도 이 무렵 선보였다. 연주하다 말고 “동창아!” 하고 객석을 향해 소리지르지를 않나, 프로그램에도 없는 즉흥연주가 그의 전공, 아무 때고 기분에 따라 등장하는 ‘칠갑산’ ‘소양강 처녀’ ‘남행열차’ ‘목포의 눈물’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그처럼 무대 위에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연주자도 없었다. 피아노 치고 장구도 치고 노래 부르고 무대를 휘젓는 그에게 관객들은 넋이 나갔다.

압권은 96년 정광사 수행음악회. 자정 무렵 졸던 불자들을 모두 일으켜 세우고 피아노를 두드리며 “비내리는 호남선~”하고 불러대니 법당 안이 난리가 났다. 어색한 시간도 잠시, 신이 난 불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손뼉을 치며 조명을 껐다 켰다 하며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자 그는 모두 편안히 눕게 하고 명상음악을 들려주었다. 그 상태에서는 어떤 음악이라도 온몸으로 듣게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96년 연강홀 연주회, 97년 장사익·이생강과 한 무대에 선 ‘공감’ 공연, 예술의 전당 독주회, 국악에서부터 행위예술가까지 국내 재주꾼들을 몽땅 모아 펼친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 공연, 98년 불가식 메뉴의 호텔 디너쇼, 99년 4월 안동 수몰지구 폐가 연주 등 그는 숱한 화제를 뿌렸다. 그 사이 불가 수행법 ‘수식관’을 토대로 한 일곱 번째 음반 ‘명상’(2장, 악 레이블)을 발표하며 오랜 실험과 방황 끝에 거듭 태어나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지난 10월, 16일간의 TV출연을 통해 그는 일반인에게 ‘임동창 음악’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가지고 국악이니 양악이니 기존 틀거리에 맞추려 하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닌 크로스오버라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냥 임동창 음악’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할 때 그는 사라졌다. 지금은 어딘가에 틀어박혀 정악 ‘수제천’을 토대로 한 새 음반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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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것은 메이저 우승



-나이키가 우즈 효과를 보듯, 한국에서는 ‘최경주 마케팅’이 붐을 이룰 것 같은데요. 실제로 업체에서 우승세일을 하는 등 여러가지 행사를 열고 있는 걸 아는지요.

“집사람이 인터넷에서 뽑아준 한국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미국 언론에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인터뷰 기사를 써주는 등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문이나 방송은 한수 위던데요. 우승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 줄 언론을 보고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으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습니까.

“없다고 말하면 안되겠죠. 투어에서 우승을 했으니 이제 목표는 반드시 메이저대회 우승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메이저대회는 그야말로 전 세계 별들이 모여 벌이는 잔치판이니까요. 어쨌든 우리 국민이 성원해주고 아끼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프로가 되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싶습니다.”

-끝으로 후학들에게 미국진출에 대한 조언을 해주시겠습니까.

“미국투어에서 버텨내려면 체력과 기량이 우선입니다. 가능한 한 영어를 공부하고 오는 것도 중요하고요. 국내에서 충분히 경험을 쌓고 과감하게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최경주는 이번 인터뷰를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아직 경기중이어서 다른 데 신경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터뷰에 임한 최경주는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었다. 그리고 신동아 독자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기도하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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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치부심의 기술샷 다듬기



최경주가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두둑한 배짱과 자존심, 정신력, 그리고 누구 못지 않은 연습량이다. 언제나 연습장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던 그는 미국투어에서 연습벌레로 통한다. 최경주는 이전에 누구에게서 특별레슨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독학파’다. 타이거 우즈가 잭 니클로스나 톰 왓슨, 아널드 파머 등 유명 프로들의 장점만을 골라내 그대로 흉내내보고 연습한 것처럼, 최경주는 자신과 체형이 많이 닮은 웨일즈의 스타 이안 우스넘을 모델로 스윙연구를 했다. 우스넘이 샷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반복해서 보면서 훈련했던 것.

-비거리 때문에 기량에서 밀린다는 생각, 애초에 싸움이 안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데뷔 첫해에는 연습장에서 드라이버를 때릴 때 창피해서 얼굴을 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타이거 우즈나 필 미켈슨 등이 옆에서 치는 것을 보면 마치 대포알이 날아가는 것 같았으니까요. 이제는 드라이버 거리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습니다. 저도 제법 나가거든요. 많이 나가면 300야드 이상 날아가고, 아무리 못 나가도 275야드 이상은 되니까요.”

에피소드 한 가지. 필자와 그는 남서울CC에서 골프를 함께한 적이 있다. 12번 홀(파4). 레귤러에서 치면 조금 가까운 거리다. 그린까지 평탄하고 31cm가 조금 넘으니까. 앞 팀은 퍼팅을 하고 있었다. 최경주의 티샷. 그린 앞쪽에 떨어진 볼은 굴러서 퍼팅중인 사람들 쪽으로 갔다. 놀란 사람들이 뒤를 돌아봤지만 모두 티잉 그라운드에 있지 않은가. 퍼팅을 끝낸 사람들은 가지 않고 기다렸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글을 보기 위해서. 그러나 최경주는 홀에 붙여 버디로 끝내면서 앞 팀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본인이 느끼기에 가장 나아진 점은 무엇인가요.

“전체적으로 샷에 안정감이 붙었습니다. 2000년에 비해 지난해에는 드라이버 평균거리가 274.9야드에서 283.70야드로 늘었고, 올 시즌도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363야드를 날린 것이 최고의 장타였습니다. 성적에 큰 영향을 미치는 퍼팅수도 2000년 29.29타에서 지난해는 28.85타, 올해는 27.88타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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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절 아내를 만나다



그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한 후 세미프로 생활을 하며 최경주는 친구집에 얹혀사는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언제 정식프로가 될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시절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아내가 된 김현정씨를 만나는 일이었다.

-아내를 처음 보고 ‘이 사람이 평생 반려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가요.

“솔직히 말해 과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둘째 문제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이나 서로 생각하는 것에 공통분모가 얼마나 있을까가 가장 큰 문제였죠. 그런데 만날수록 정이 가고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어찌 보면 김현정씨와 최경주 커플은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최경주는 섬에서 태어나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운동선수. 하지만 아내는 단국대 법대를 졸업한 재원이다.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처음에는 어색했다고 한다. 최경주가 독실한 신자도 아닌데다 오로지 운동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명시절이었으니 오죽했으랴.

결혼 후에도 김현정씨는 계속 직장에 다니며 최선수의 뒷바라지를 했다. 아내가 월급을 타면 회식을 했다. 그러나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당시 골프를 직업으로 삼을 생각이었나요? 프로선수의 미래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텐데….

“프로가 되면 파라다이스가 열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었죠. 프로가 된 후에도 ‘모셔가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정식 프로자격을 받은 것이 짐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습니다. 세미프로처럼 아무 연습장이나 가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이 무렵 그는 잠시 딴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털어놓는다. 프로를 포기하고 취직을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인천의 한 연습장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자신 때문에 다른 한 선배 프로가 그곳 연습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최경주는 필자에게 ‘지금까지도 그 선배가 마음에 걸린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미국PGA투어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뛰어난 기량과 정신력입니다. 여기에 샷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제가 처음에 고생을 하고 성적을 내지 못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 그린은 딱딱하고 빠릅니다. 따라서 어프로치나 짧은 아이언이 들어오면 그린에 세울 수 있는 기술 샷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스핀이 걸리지 않으면 그린에 맞아도 튀어나가기 쉽기 때문이죠. 미국 진출 후 2년 동안 이것을 터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최경주가 필자에게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미국 그린에 적응하기 어렵다.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역마다 잔디종류가 다른데다가 그린 빠르기도 차이가 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기술 샷을 구사하지 못하면 미국투어에서 살아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 편지는 ‘이제야 5번 아이언 정도까지 스핀을 걸 수 있게 됐다. 욕심을 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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