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밤 꿈에 사부님을 뵈었습니다.

 꿈에서라도 뵐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전기일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집들을 많이 다니시면서 저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고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사부님게서는 부동산일과 그 일만을 하신다고 말씀 하셨지요. 여기저기를 많이 다니며 배우는 꿈이었는데 깨어보니 아쉬운점도 있었지만 기분만큼은 좋았습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이즘에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가족 분들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수확의 달이고 얼마남지않은 한해인데 잘 한게 무엇이고 못 한게 무엇인데 나는 무엇을 해야하고 또 할 수 있는 지를 제 자신에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눈 부신 하루처럼 최선의 삶을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한 저의 멘토이시고 삶의 모델이신 사부님을 감사하면서

 

안양에서 그랜드슬램을 꿈꾸는 이경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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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구절양장, 무수한 덤불과 가시밭길, 세찬 파도와 폭풍의 언덕을 넘어간 세월이었다. ‘토지’ 1부를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에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암과 피나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3시간의 수술 끝에 보름 만에 퇴원한 바로 그날부터 작가는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를 썼다. 악착스러운 자신에 무서움을 느낄 정도였다 한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작가는 전신에 엄습해오는 통증과 시력의 감퇴 등 붕괴되어가는 체력과 맹렬하게 싸웠다. 오죽하면 ‘구약’의 ‘욥기’를 떠올리며 위안을 받았을까. 전쟁 중에 남편을 잃어 일찍 청상이 되었고, 그런 몸으로 기른 딸의 지아비로 맞아들인 사위 김지하는 1974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확신범이었다. 1974년부터 신문기자로 밥벌이를 한 소설가 김훈은 1975년 2월15일 김지하가 형집행정지로 영등포교도소에서 출감하던 어둑한 시간, 교도소 광장 건너 언덕에서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바로 손자를 업은 박경리였다. 그날 밤 김훈은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으나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한다. 어쩐지 그 모습은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 같았다(솔 출판사, ‘수정의 메아리’, 1994)고 한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었다.
상황은 어려웠고 쌓이는 한의 뭉치는 더 커져만 갔다. 그 와중에도 박경리는 거실에서 포대기에 손자를 업은 채 원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원한이 오기가 되어 그를 자존의 삶으로 끌어올렸다. “글 기둥 하나 잡고 눈먼 말처럼 연자매 돌리며” 운명처럼 작가는 ‘토지’를 썼다.
영험한 산자락이 지란을 숨기듯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그 남편 김지하.

작가는 원주집 텃밭에서 한 세대에 가까운 세월 절대고독을 천명으로 견디며, ‘생명주의’의 삶과 사상을 일구어냈다. 그는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고 했다. “뿌린 것에다 백배 천배의 이자를 붙여서 갚아주는 게 땅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본전 까먹지 말고 이자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박경리가 아침 일찍 텃밭을 기다시피 엎드려 김을 매는 모습은 땅에 대한 경배와 같았다고 그를 만난 이들은 회고했다.
원주의 단구동 집에는 황토 빛이 밴 수많은 면장갑이 베란다 난간에 널려 있었다. 그곳을 찾아오는 문단의 후배나 지인들은 누구나 작가가 텃밭에서 손수 가꾼 채소나 대추·오가피·두릅·취나물·고들빼기 등을 구메구메 싸주던 작가의 모습에서 언제 꺼내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그리운 고향집의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설이란 박경리에게 삶과 생명의 문제였다. 그러나 소설이 인생보다 크고 소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도 그 터전으로서의 삶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했다. 삶 속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 그것이 삶에의 연민이며, 그것이 다시 한의 언어로 승화되어 ‘토지’가 탄생했다. 작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던 자의식의 언어가 타(他)자아의 언어로 발전한 것이다.
당초 ‘토지’ 1부를 구상할 때 작가는 ‘타(他)자아’와 ‘객관적 거리’로 삶과 죽음을 포옹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등짐장수로부터 몰락하는 귀족에 이르는 인생을 두루 섭렵하면서 초기의 꿈은 우주관으로 발전한다. 마침내는 한반도의 문화역량이 러시아대륙과 중국대륙에 버금갈 수 있음을 깨달아갔다. 일상적 삽화를 통해 전개되는 작품이 한민족의 서사시처럼 다가오는 것은 작가의 원숙해진 ‘모신(母神)의 시선’에 있다.
다른 대하소설에는 계급과 이데올로기 등의 어떤 중추계통이 있다. 그런데 ‘토지’는 600~700명에 달하는 수다한 계급과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봇짐장수와 시장거리의 할머니도 나온다. 그들 모두는 총체적 존재로서 등장한다. 생명이 그 핵심이고, 탄생과 죽음, 긍정과 부정이 부딪치는 모순, 그 한을 덩어리째 받아들인다. 작가는 ‘토지’에서 영험한 산이 지란(芝蘭)을 자락에 숨기듯 수많은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게 했다.
한과 민족과 생명을 주제로
‘토지’라는 제목과 관련, 작가는 소유의 출발로 문서를 생각했고, 문서화된 토지로부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꿰뚫어보게 되었다. 소유개념은 인간의 비극뿐만 아니라 개인의 비극, 국가와 민족 간의 비극을 불러일으켰고, 오늘날 자본주의로써 지구를 파괴하는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까지 그 영향을 확장시켜 나간 것으로 작가는 사유를 확대, 심화시켰다.
‘토지’에는 또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비극이 담겨 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개인이거나 영웅이거나, 혁명가이거나 등짐장수, 심지어는 작부에 이르기까지 토지는 생명을 담아내는 거대한 호수와 같다. 어느 시대 어떤 장소에서 생명들이 무수하게 흘러가고, 그러면서 만약 죽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유한성을 안은 채, 토지는 비극이면서 축복이고, 운명이면서 사랑이고, 삶에 대한 연민이면서 다른 세계와 교신하려는 간절함이 담긴 삶의 젖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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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토지’를 한과 민족과 생명사상이라는 주제를 식민지 자본주의의 전개과정 속에서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해하는 비평가도 있다. ‘토지’의 주제와 사상 및 작품의 형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된 바 있지만, 김성수(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일제의 식민지 자본주의에 대한 총괄적 대항 서사로 읽는다. ‘토지’의 서사적 깊이와 공간적 범위가 보여주듯, 우리 근대사가 포착할 수 있는 한민족 삶의 소망스러운 형태에 관한 염원을 가장 포괄적인 서사를 통해 복원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김성수는 작품의 서장으로부터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토지는 땅·농토·소작료·지주(제) 등 농민들의 생존문제를 포함해 식민지 자본주의의 유입과 그에 따른 근대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작품 전체의 기조로 삼고 있다고 보았다. ‘토지’는 단지 자연 상태의 대지나 소유개념이 불분명한 땅에 얽힌 생존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소유개념이 당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과 의식과 제도를 어떻게 변화시켜갔는지에 대한 작가의 정치경제적 상상력을 총괄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토지’는 자본의 자기확장이라는 목적이 가장 폭력적으로 구현되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역사적 장을 서사 구성과 전개의 주요 모티프로 삼아 ‘한과 민족주의와 생명사상의 고양’이라는 주제를 생성한 작품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지’는 작품에 내장된 일제 강점기의 여러 현상, 즉 지식인과 일본문화·한국문화의 변별성 문제, 일제 강점기의 도시화 과정과 풍속 등에 관한 미시적인 분석과 해석을 세밀하게 탐구할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토지’를 통해 전개된 작가의 생명사상은 그의 문학적 본질이면서 문학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잉태됐다. 작가가 ‘토지’를 쓰던 한 세대 전만 해도 공해나 생태문제는 사회문제의 관심권 밖이었다. 작가는 청계천 복원을 촉구한 선구적 제창자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환경론 수준을 넘어 자연의 위대함, 그것의 가치와 삶의 조화를 고양하는 생명론자로서의 우주적 사유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토지문화관.

박경리란 작가에 대해서 어느 평자는 그 정신의 도저함에서 비롯되는 감동을 말한다. 그는 현실과 권력으로부터 수많은 억압과 피해를 당했지만, 전혀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고 버텼다. 그는 인기를 혐오했고 명예를 사절했다. 그는 사람들이 비굴하고 천박한 것을 단연 싫어했다. 예술원 회원 되기를 끝내 거부한 것도, 언론을 한사코 기피한 것도 그런 생래의 체질이었다.
그러나 1999년 토지문화관을 만들고 재단을 구성한 것은 젊은 작가들에게 창작의 산실을 마련해주려는 배려에서였다. 그는 역사를 따뜻하게 관찰했고,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했으며, 자연과 공감하며 소통했으며, 생명을 보듬어 안았다. 무엇보다 인간적 품위를 우선적 가치로 삼았다.
일대 장엄한 서사 ‘토지’는 그래서 가능했고, 독자는 작품을 존중했으며, 작가는 정상의 평가를 받았다. 이 같은 사실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각종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토지’는 1980년대의 한 조사에서 한국문학 30년의 최대 문제작 3편 중 하나로 꼽혔고,
5월8일 열린 박경리의 노제.

1990년대의 한 조사에서는 광복 이후 한국의 대표소설 또는 건국 이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혔다. 또 2000년대 들어 작가 박경리는 세계에 알리고 싶은 문인 1위, 노벨문학상 가능성 후보 1위로 꼽히는 등 박경리와 그의 ‘토지’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1989년 9월의 한 신문은 ‘토지’가 20년 통산 판매 1위의 작품으로 당시까지 120여만부가 판매되었다는 종로서적의 집계결과를 발표했다. ‘토지’ 5부작 16권은 2002년 나남출판사에서 전21권으로 재출간되자마자 1주일간 4000질(8만4000부) 가량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출판계에서는 ‘토지’에 대해 “한국의 현대문학은 박경리의 ‘토지’로 인해 풍요로울 수 있었다”며 찬사와 존경을 표했다.
지난 5월5일 “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현대문학’ 4월호 발표, ‘옛날의 그 집’)는 시 한 편을 남긴 채 박경리는 홀연 이 세상을 떠났다.


尹武漢
● 1943년 대구 출생
●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경향신문 정경문화부장·부국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 1993~98년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강원대 사학과 초빙교수
● 저서 및 논문 : ‘인물대한민국사’ ‘한국사 정립을 위한 새로운 시론’
5월9일에는 한산도가 내려다보이는 미륵산 기슭 별이 가득한 하늘의 대지에 몸을 뉘었다.
1971년 가슴의 암 수술을 받기 바로 전날 동대문쪽으로부터 남산까지 길게 걸린 무지개를 보면서 죽음이 자기를 데려가려나 보다고 여겼던 박경리,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뒤 박경리는 수만리 장천을 날갯죽지 하나로 날아갔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에 자신을 지탱해가면서 진실만을 기록했던 사마천(司馬遷)의 그 ‘멀미 같은 시간’을 앓은 뒤, 작가는 마침내 영혼을 육신에서 빼내 나비처럼 전혀 다른 세상으로 훨훨 날아오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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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구절양장, 무수한 덤불과 가시밭길, 세찬 파도와 폭풍의 언덕을 넘어간 세월이었다. ‘토지’ 1부를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에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암과 피나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3시간의 수술 끝에 보름 만에 퇴원한 바로 그날부터 작가는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를 썼다. 악착스러운 자신에 무서움을 느낄 정도였다 한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작가는 전신에 엄습해오는 통증과 시력의 감퇴 등 붕괴되어가는 체력과 맹렬하게 싸웠다. 오죽하면 ‘구약’의 ‘욥기’를 떠올리며 위안을 받았을까. 전쟁 중에 남편을 잃어 일찍 청상이 되었고, 그런 몸으로 기른 딸의 지아비로 맞아들인 사위 김지하는 1974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확신범이었다. 1974년부터 신문기자로 밥벌이를 한 소설가 김훈은 1975년 2월15일 김지하가 형집행정지로 영등포교도소에서 출감하던 어둑한 시간, 교도소 광장 건너 언덕에서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바로 손자를 업은 박경리였다. 그날 밤 김훈은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으나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한다. 어쩐지 그 모습은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 같았다(솔 출판사, ‘수정의 메아리’, 1994)고 한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었다.
상황은 어려웠고 쌓이는 한의 뭉치는 더 커져만 갔다. 그 와중에도 박경리는 거실에서 포대기에 손자를 업은 채 원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원한이 오기가 되어 그를 자존의 삶으로 끌어올렸다. “글 기둥 하나 잡고 눈먼 말처럼 연자매 돌리며” 운명처럼 작가는 ‘토지’를 썼다.
영험한 산자락이 지란을 숨기듯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그 남편 김지하.

작가는 원주집 텃밭에서 한 세대에 가까운 세월 절대고독을 천명으로 견디며, ‘생명주의’의 삶과 사상을 일구어냈다. 그는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고 했다. “뿌린 것에다 백배 천배의 이자를 붙여서 갚아주는 게 땅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본전 까먹지 말고 이자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박경리가 아침 일찍 텃밭을 기다시피 엎드려 김을 매는 모습은 땅에 대한 경배와 같았다고 그를 만난 이들은 회고했다.
원주의 단구동 집에는 황토 빛이 밴 수많은 면장갑이 베란다 난간에 널려 있었다. 그곳을 찾아오는 문단의 후배나 지인들은 누구나 작가가 텃밭에서 손수 가꾼 채소나 대추·오가피·두릅·취나물·고들빼기 등을 구메구메 싸주던 작가의 모습에서 언제 꺼내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그리운 고향집의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설이란 박경리에게 삶과 생명의 문제였다. 그러나 소설이 인생보다 크고 소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도 그 터전으로서의 삶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했다. 삶 속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 그것이 삶에의 연민이며, 그것이 다시 한의 언어로 승화되어 ‘토지’가 탄생했다. 작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던 자의식의 언어가 타(他)자아의 언어로 발전한 것이다.
당초 ‘토지’ 1부를 구상할 때 작가는 ‘타(他)자아’와 ‘객관적 거리’로 삶과 죽음을 포옹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등짐장수로부터 몰락하는 귀족에 이르는 인생을 두루 섭렵하면서 초기의 꿈은 우주관으로 발전한다. 마침내는 한반도의 문화역량이 러시아대륙과 중국대륙에 버금갈 수 있음을 깨달아갔다. 일상적 삽화를 통해 전개되는 작품이 한민족의 서사시처럼 다가오는 것은 작가의 원숙해진 ‘모신(母神)의 시선’에 있다.
다른 대하소설에는 계급과 이데올로기 등의 어떤 중추계통이 있다. 그런데 ‘토지’는 600~700명에 달하는 수다한 계급과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봇짐장수와 시장거리의 할머니도 나온다. 그들 모두는 총체적 존재로서 등장한다. 생명이 그 핵심이고, 탄생과 죽음, 긍정과 부정이 부딪치는 모순, 그 한을 덩어리째 받아들인다. 작가는 ‘토지’에서 영험한 산이 지란(芝蘭)을 자락에 숨기듯 수많은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게 했다.
한과 민족과 생명을 주제로
‘토지’라는 제목과 관련, 작가는 소유의 출발로 문서를 생각했고, 문서화된 토지로부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꿰뚫어보게 되었다. 소유개념은 인간의 비극뿐만 아니라 개인의 비극, 국가와 민족 간의 비극을 불러일으켰고, 오늘날 자본주의로써 지구를 파괴하는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까지 그 영향을 확장시켜 나간 것으로 작가는 사유를 확대, 심화시켰다.
‘토지’에는 또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비극이 담겨 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개인이거나 영웅이거나, 혁명가이거나 등짐장수, 심지어는 작부에 이르기까지 토지는 생명을 담아내는 거대한 호수와 같다. 어느 시대 어떤 장소에서 생명들이 무수하게 흘러가고, 그러면서 만약 죽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유한성을 안은 채, 토지는 비극이면서 축복이고, 운명이면서 사랑이고, 삶에 대한 연민이면서 다른 세계와 교신하려는 간절함이 담긴 삶의 젖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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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파란의 근대사, 생생한 인간 벽화, 총체소설의 장관

 
 




1979년 ‘토지’ 3부를 끝마치고.

“선생님이 평생의 업적으로 남기신 ‘토지’에는 우리의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모든 국면과 모든 직업, 고귀한 인간성으로부터 바닥 상것의 비천함까지 천태만상의 인간군상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박제를 만들어 모자이크한 게 아니라,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비천한 것들이 존엄해지기도 하고 잘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비천해지고 하는 게, 마치 지류(支流)가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생육하는 것과 같은 장관입니다.”
1973년 봄 ‘토지’ 1부를 읽고 김병익은 “아마도 춘원의 ‘무정’ 이후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이며 “박경리의 ‘토지’는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라고 평가했거니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8년에도 ‘토지’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토지’는 일제 강점기에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이후 맥이 끊어진 대하소설의 맥을 되살려 이후 김주영의 ‘객주’,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뛰어난 성과를 거둔 작품들이 잇달아 나왔다.
그러나 김병익이 ‘토지’에 대해 ‘가장’이란 최상급의 수식을 고집한 것은 이 작품이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이 3만1200장의 방대한 양적 규모를 자랑한다거나 50년에 달하는 가장 긴 역사를 소설공간으로 재현하고 있다거나 우리 민족사를 재구성하고 대작 붐을 선도해서 획기적이었다거나 한 것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정신의 GNP”
‘토지’야말로 우리 문학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총체소설이라고 그는 평가했다. ‘토지’는 개인사·가족사·생활사·풍속사·역사·사회사 등을 포괄하고 있다. 여기에는 농민과 중인을 중심으로 양반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사회 모든 계급을 망라한 우리 민족 전체의 삶의 모습이 재구성되어 있으며, 별의별 인물과 성격들을 재현하고 창조함으로써 인간사의 모든 것을 모아들여 거대한 실존적 벽화를 그리고 있다.

‘토지’의 주무대를 관광지화한 경남 하동 최참판댁.

소설의 시대적 배경도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에 이르는 가장 험난한 역사적 흐름을 폭넓게 조망하고 있으며, 그 서사적 공간도 한반도 남단의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진주·통영·경성과 만주의 용정·신경·하얼빈 및 일본의 동경 등으로 확대되며, 언어가 창조할 수 있는 삶의 실제 세계를 파노라마처럼 전시함으로써 소설의 거대성을 담보해내고 있다.
따라서 ‘토지’는 마땅히 최상급으로 존중받아야 할 우리 소설문학 최대의 자산이라는 것이 김병익의 주장이다. 사실 많은 대하소설이 규모가 크고 내용이 풍부하며 이야기가 박진하다 하더라도, 그 전체는 부분사적 로망으로 그치고 세계는 한 측면으로 서술되는 데 반해, ‘토지’는 수백 가지의 이야기 마디를 총체성으로 엮어 우리 문학사의 어떤 작품도 이르지 못한 경지에 도달했다.
1970년대에 근대성에 대한 치열한 비판을 작품 속에 녹여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는 ‘토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가 이 모순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우리 영혼의 슬픈 밑뿌리를 보호해 이 땅에 묻는 작업을 한 선배가 박경리다. 나는 거대한 중화학공장 몇 백 개보다 ‘토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세금으로도 생산해낼 수 없는 것이 예술작품이다. ‘토지’가 올려준 것은 우리 정신의 GNP다.”
‘토지’는 6·25전쟁 이전부터 박경리의 기억 한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다. 거제도 외가 할머니가 어린 시절 들려주었던 얘기가 작가의 뇌리에 선명하게 빛깔로 남아 있었다. 거제도 어느 곳, 끝도 없이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떨어져 내릴 때였는데,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해 수확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외가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는데, 나중에 웬 사내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어느 객주 집에서 설거지하는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마을사람들이 있었다 한다.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황금빛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작가의 머리에 짙은 잔영을 드리웠다.
“글 기둥 잡고 눈먼 말처럼”
‘토지’는 매우 조용히 시작됐다. 1부가 연재되기 시작한 ‘현대문학’ 1969년 9월호에는 “오랫동안 외부와 접촉을 끊으며 오직 이 작품에만 심혈을 기울였다”는 작가의 말과 함께 작가의 사진이 실렸을 뿐이다. 이 침묵을 깬 것은 1부 단행본의 발간이었다. 2부를 연재하던 ‘문학사상’에서 1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자 “문단의 괄목할 만한 수확”(김동리), “문학사 희유(稀有)의 대작”(백철), “뼛속에 스미는 아픔”(황순원),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대하소설”(이어령) 같은 평가가 나왔다.
제3부는 ‘독서생활’ ‘한국문학’ ‘주부생활’을 거쳤으며, 1980년에 작가는 아예 원주시 단구동으로 거처를 옮겨 자신을 외부와 격리한 채 제4부를 ‘정경문화’ ‘월간경향’에 발표했다. 제5부는 그 후 4년여의 공백 끝에 1994년 8월까지 문화일보에 연재됨으로써 길고 긴 장정을 마감했다. 작가의 나이 43세에서 68세까지 25년간이었다. 작가는 “내가 ‘토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토지’가 나를 몰고 갔다”고 회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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