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첸중가에서의 ‘비박’
엄홍길 산악인

 
 




등산을 하다 보면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밤을 맞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바위 밑이나 눈두덩 같은 곳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잠깐 눈을 붙이는 노숙을 한다. 텐트 없이 산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을 ‘비박’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어 ‘bivouac’과 독일어 ‘Biwak’에서 따온 것이다. 산을 다니면서 수없이 비박을 했지만 나에겐 잊지 못할 비박이 있다. 2000년 칸첸중가(8586m) 등반 때의 일이다.
마지막 캠프인 7800m까지를 구축하고, 나와 박무택 대원이 정상 공격에 나섰다. 박무택은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산악인이자 8000m급 이상 네 개 봉을 함께한 혈연 이상의 사이였다. 둘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눈길을 헤치며 정상을 향했다. 꽤 많이 오른 것 같은데 아무리 가도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히 정상이 머리 위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는데…. 탈진 상태에서 어느새 산소도 떨어져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밤이 오고 만 것이다.
우리는 로프에 의지한 채 빙벽의 중간에 매달려 있었다. 설벽의 튀어나온 바위 턱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동이 틀 때까지 비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잠 못 이루는 자의 밤은 길다지만, 밤이 그렇게 길고 긴 것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절벽 로프에 매달려 엉덩이를 걸친 채 우리는 칸첸중가 8000m 어디쯤에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무택아, 자면 안 된다.”
그곳에 매달려 혹여 잠이 들면 얼어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째서 산을 오르는가
추위는 둘째치고, 온몸이 탈진 상태여서 눈만 살짝 감아도 그대로 잠이 들 것만 같았다.
“홍길이 형, 자요?”
5초쯤? 아니 7초쯤? 잠들었을까. 박무택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바위 턱에 간신히 올려놓았던 엉덩이가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네를 타듯 몸이 빙벽 밖으로 휘청 나갔다가 돌아올 무렵 다시 바위 턱을 찾아 엉덩이를 걸쳤다.
“무택아, 너도 자면 안 돼! 잠들면 죽는다.”
그렇게 빙벽에 매달려 깜빡깜빡 졸 때면 우리는 허공에서 그네를 타고 다시 제자리 찾기를 반복했다. 밤새 얼마나 많이 서로의 이름을 불렀던가.
다행히 칸첸중가의 신은 우리가 그곳에서 하룻밤 비박을 할 수 있게끔 허락해주었다. 로프를 붙잡고 10여 시간 쪼그려 앉아 사투를 벌이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 어느새 멀리 동이 터왔다. 그때 본 그 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둠이 물러나며 붉은빛이 산악으로 올라오는데, 탈진해 있던 몸에 갑자기 기운이 돌았다.
지금 생각하면 삶의 기쁨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고 밝은 빛이 비추어 우리가 살아 있고, 깨어나 일어설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이란 기쁨인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많은 것을 묻곤 한다. 어째서 산에 오르는지,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지,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는지, 또 그 모든 것을 이뤄낸 후에는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아마도 생이 다하는 날까지 나는 결코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이다. 끝없는 도전이야말로 진정한 내 삶의 모습이며,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은 나태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코 그 이상의 삶을 살 수 없다. 나 역시 히말라야 16좌 등반을 하는 동안 무수한 고비를 넘겼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적도 여러 번 있었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슬픔도 겪어야만 했다. 등정에 성공했을 때보다 중도에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서 다음을 기약해야 했던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좌절하고 주저앉았다면, 만약 내가 히말라야를 등지고 남들처럼 도심에서 샐러리맨과 같은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나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겠지만, 그건 분명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도전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역사는 바로 도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씌어졌다. 현재의 세상을 이룬 이들은 바로 불굴의 도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도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변화되며 재창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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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청(殺靑)’의 작가 성석제
“시 쓰던 시절 행복했죠, 소설 쓰는 지금? 재미있죠”


 



똥장군의 테두리
“단편이나 장편이나 소설은 장르에 관계없이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내부에서 웅성거리는 에너지가 느껴져야 된다고 믿습니다. 에너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글을 읽다 보면 억지스럽게 썼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아마 에너지가 부족해서, 힘이 달려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맥주 같은 음료가 에너지가 웅성거리는 술이 아닐까? 성석제는 맥주를 좋아하는데, 땅콩은 먹지 않는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서다. 차를 마시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술 이야기로 넘어간다. 맥주를 마시면서 요즘에는 맥주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맥주에 대한 짧은 글을 준비한다고 했다. 발효시킨 보리음료인 맥주의 역사가 술 중에서는 아마도 제일 오래됐을 것이라고 한다. 기원전 6000년경부터 있었는데, 그때는 맥주를 액체 빵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많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음식에 관한 글을 많이 쓰는 편이다. ‘소풍’은 음식에 관한 에세이다. 필자 또한 과거 음식에 관한 산문 연재를 그에게 제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일로 바빠, 필자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한 권 먼저 써버린 적이 있다. 나중에 성석제의 책을 읽고 그 책 괜히 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성석제는 작가와 소설의 관계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이렇게 했다.
“작가는 자신이 읽고 좋아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런 식으로 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잘 읽은 소설가의 스타일을 닮을 수밖에 없다.”
성석제는 자신이 읽고 좋았던 소설로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브레히트와 베케트, 프랑스의 이오네스코와 사르트르와 같은 작가들의 단편을 들었다. 이 작가들은 짧고 간결하지만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충혈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 역시 그러하다.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했다. 처음에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소설이란 표현의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과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죠. 즉 소설은 공감의 매체입니다. 글의 그릇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좀더 재미있는 말로 소설을 이야기해줄 것을 권했다. 아마 우리 둘 다 술이 취했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기 위해 쓰는 물건 중에 똥장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농사지을 때 전통적으로 쓰던 거름을 지고 나르는 물건인데, 인분을 져 나르기 때문에 이 통이 새면 낭패지요. 냄새가 얼마나 나겠어요. 그래서 나무통으로 만든 똥장군의 테두리는 잘 마른 대나무로 친친 감아놓습니다. 단단하게 밀착시키기 위해서지요. 내 어린 시절 활놀이할 때 쓰기에는 똥장군의 대나무 줄기만한 게 없었어요. 그래서 그 테두리 잘 마른 대나무를 골라서 벗겨내어 활을 만들어 한겨울 잘 놀았지요. 이듬해 집에서 머슴이 내가 테두리를 몰래 빼낸 것을 모르고 그 똥장군에 거름을 담아 나르려고 들어 올리다가 그만 와르르 거름을 쏟아버리고 맙니다. 그때 머슴이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석제야 하고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 머슴이 왜 내 이름을 불렀을까? 소설이 뭐냐고요? 소설은 똥장군이고, 억울한 머슴이고, 똥장군 안에 담긴 똥오줌일 수도 있지요.”

‘바람의 전설’ 주인공이 바로 나
한바탕 웃고 났지만, 뭔가 가슴에 남는 게 있는 이야기다. 점점 더 취기는 오르고, 성석제는 시인으로서의 생활도 이야기했다. 시인으로서 살 때는 세상 물정을 몰랐지만, 시를 쓰던 시절에는 행복했다고 한다. 그 행복이 무엇일까? 소설을 쓰는 지금은 재미있다고 한다. 그 차이를 성석제는 이렇게 설명한다.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죠. 남이 알아주든 말든 자신만의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다는 것은 서로 이야기를 나눠야 하기 때문에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증폭되는 힘이 있어요. 그것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예술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는 예술이겠지만, 물론 언어미학이 뛰어난 소설도 있기는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소설이란 대화의 한 방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 언어를 가지고 예술을 하고 싶었다면 아마도 나는 시를 썼을 겁니다.”
그의 경쾌함은 이런 면에서 빛을 발한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선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신의 힘을 다한 작품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성석제의 소설을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소설이 예술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작품이 의외로 그 함량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성석제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서의 소설, 그것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하다. 그의 소설 ‘소설 쓰는 남자’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바람의 전설’에는 한 예술가가 나온다. 무도 예술가다. 그는 그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원재훈
● 1961년 서울 출생
●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등

무슨 말인가? 성석제가 무도 예술인이란 말인가? 아니, 그 반대의 경우였다. 그는 그 주인공들과 정반대의 경우로서 예술가라고 표현했다. 춤을 전혀 출 줄 모르는 예술가와 춤을 잘 추는 무도 예술가는 다르면서도 같다는 것이다. 그 소설의 모티브는 어느 날, 캬바레에 다녀온 후배가 막연히 퇴폐적으로만 보이던 그곳의 놀라운 세계를 전해주면서부터였다. 그곳은 정말 예술가들의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즉 학력, 외모, 재산으로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춤 하나로만 결정하는 진짜 선수들의 세계를 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당신 제비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을 향해 극중 주인공인 영화배우 이성재는 또박또박 말한다.
“나, 제비 아닙니다. 예술갑니다. 무도 예술가.”
그런 식으로 성석제도 예술가다. 세상을 무대로 비유한다면 그는 연극배우이고 춤꾼이면서, 자연으로 비유하면 그는 지루한 겨울을 깨우기 위해 남쪽에서 날아온 제비이고, 눈앞에 확 나타나는 어처구니이면서, 결국은 예술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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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 시인의 작가 열전]

‘살청(殺靑)’의 작가 성석제
“시 쓰던 시절 행복했죠, 소설 쓰는 지금? 재미있죠”


 





“선생님 신발 좀 바꾸세요라고 말씀드리곤 하죠. 10년 정도 된 듯한 선생의 등산화는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남루해 보였거든요. 그럼 ‘나도 바꿀 생각이 있는데…’ 하시면서 말꼬리를 흐리고 맙니다. 산을 내려와서 등산화 가게에 여러 번 모시고 가도, 한번 둘러보고는 마음에 드시는 것이 없는지, 늘 다음에 사지 뭐…, 하시지요. 아마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아요. 아직도. 그런 면이…, 존경스럽습니다.”
그분과는 이런 인연으로 맺어져 지금까지 지극하게 모시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에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다. 시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만 해도 장광설이다. 그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 이야기들이 성석제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질문할 수 없었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도 벅찼다.
1979년에 입학해서 86년에 졸업한 대학시절. 그는 이 시절 집에서 잔 것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절반은 친구들과 함께 잤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첫 시집을 낸다. 그의 책 표지에 실린 이력을 보면 시인으로서의 경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그는 두 권의 개성 있는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다. 시를 굳이 문학의 모성으로 비유하지 않더라도 우리 문단에는 시인으로 출발한 소설가가 적지 않다. 친구인 원재길을 비롯해 윤후명, 이제하, 마광수 등 알게 모르게 많은 이가 시인으로 출발한 소설가들이다.

탁월한 이야기꾼
그들의 이력이 소설가로 굳어지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시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석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소설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큰 배가 침몰하면 소용돌이치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는 단순히 잡학에 흥미가 많은 정도가 아니다.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녹이고, 다지고, 결국 한 편의 빛나는 황금빛 잔을 만들어내는 장인과 같은 모습이다.
1992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루 사이로 세상을 뜨신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호적상 가장이 되어버렸다. 묶이기 싫어하는 그의 성품에 짐이 많아진 것이다. 서유기에 저팔계가 남긴 ‘먼 길에 가벼운 짐 없다’는 명언이 있다. 그도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이다.
가족과 일, 그리고 재미나는 직장. 졸업하고 이어진 회사생활도 재미있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재미있게 했을 것이다.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예술가 기질로 그는 일상적인 업무에서도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평사원이면서도 갖은 이유로 ‘이사급 출장’을 많이 다닌 시절이었다. 그러다 1993년에 사표를 낸다. 1994년 중반엔 신림동 하숙촌에서 한여름을 보낸다. 무척 더운 해였다.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불어 이불을 덮고 자야 된다는 소문을 듣고 찾은 곳이었지만, 웬걸 그해의 무더위는 그곳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두 번째 시집 원고를 정리했다. 시집 정리가 의외로 일찍 끝나는 바람에, 나머지 시간에 그동안 쓴 짧은 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를 쓰면서 자신을 잡아당겼던 것들, 이렇게저렇게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를 메모해놓았던 것들, 즉 시인으로 쓴 글이 아닌 비시적(非詩的)인 원고를 나름의 스타일로 정리한 것이다. 아침에 샤워 한 번 하고 한 편 쓰고, 동네 어귀 슈퍼마켓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 다시 샤워하고 또 한 편 쓰고 하는 식으로 정리한 원고들, 그야말로 스스로도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원고들은 어처구니없이 태어난다.
그 원고를 당시 민음사 주간이던 이영준 씨에게 넘긴다. 이영준씨는 출판해달라는 의도로 보내온 원고인 줄 알고(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다른 편집위원에게 검토를 부탁했고, 원고를 본 편집위원이 책으로 출판하자고 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이 책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가 그에게는 소설가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 책이 출판되자 독자와 문단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의 이야기 실력을 믿고 발 빠르게 계간지 ‘문학동네’에서 첫 소설 청탁이 들어왔다. 첫 단편은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이 소설로 그는 탄탄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다. 이상문학상 후보에 선정돼 문단의 인정을 받았고, 영화사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끌려 판권 계약을 한다. 그 뒤로 계속 청탁이 들어온다.
그의 탁월한 이야기 실력의 근원은 사람들이다. 그의 주위에는 그보다 더 재미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필자 역시 10여 년 전에 성석제의 책을 만든 경험이 있는데, 그때 성석제에게서 정말 재미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한다.
“그것이 저에게는 행운인 것 같은데, 내 주위에 재미있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서 이야기가 떠오르고, 그 이야기가 활자화되고 나면 의외로 그 오리지널 이야기들은 내 마음에서 힘을 잃어요.”
성석제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참 많은 나라를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러 어처구니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어처구니는 상상 밖으로 큰 물건이나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경쾌하다. 그 경쾌함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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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청(殺靑)’의 작가 성석제
“시 쓰던 시절 행복했죠, 소설 쓰는 지금? 재미있죠”


 





대학에 들어가서 1학년 1학기 동안 미팅을 평균 일주일에 3번 정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55회의 미팅을 하고 나서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연세대 법학과 출신이다. 당시 정외과에 다니던 친구들도 거기에서 만난다. 그중에 고(故) 기형도 시인이 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당시 대학생들이 의무적으로 학점을 따기 위해 군에 일정기간 입소했던 문무대에서였다. 기형도는 노래를 잘했다. 훈련을 마치고 휴식시간에 노래를 하면 노래하는 동안 휴식시간을 연장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기형도가 나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기형도는 노래를 4절까지 불러서 훈련받던 학우들을 푹 쉬게 했다. 필자도 시운동 동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던 시절에 기형도의 노래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노래는 성악 창법으로 유장하게 좌중을 압도한다. 성석제는 2학기 때 복도에서 기형도와 마주쳐 이야기를 나눴다.
기형도는 그에게 연세대 문학동아리 가입을 권했다. 마침 1학기 때 미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그 통과의례를 마치고, 뭐 좀 재미있는 것 없나 하던 참이라 친구를 따라 문과대 수위실 맞은편에 있는 문학동아리를 찾았다.
동아리 방은 6·25전쟁 때 감옥으로 쓴 적이 있는 컴컴한 공간이었는데, 가운데 긴 탁자가 있었다. 마침 그 탁자에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성석제는 그래, 이제부터 여기에서 내기바둑을 둬서 점심을 해결하자는 생각에 가입했다고 한다. 문학동아리는 그에게 낙원과 같은 곳이었다. 서로 쓴 시를 발표하고, 깨부수고, 끝나면 저녁 때 선배들이 술 사주고, 여기에서 그는 기형도, 권진희 등과 어울리면서 잘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앞에 한 시인이 찬란하게 나타난다. 무인도에 있다가 사람을 만난 격이었다. 교양국어 시간에 만난 신대철 선생이다. 신대철 선생은 강의를 무척 재미있게 했다고 한다. 재미난 이야기 덕분에 그가 좋아졌고, 선생의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를 읽고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릴케, 하이네의 시에서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신대철 선생의 시에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눈이 확 뜨인 것이다. ‘그래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한번’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가 돈을 주고 산 첫 번째 시집이 바로 신대철 선생의 시집이라고 했다. 그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달라고 하니 “대단히 치열하고 힘들게 사신 분”이라고 간단하게 말하고 만다. 필자 역시 그 시대의 시집 두 권을 꼽으라면 신대철의 ‘무인도를 위하여’와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을 깨는가?’를 들겠다.

스승이자 인생 친구인 정현종
1979년에 대학에 입학했으니 이듬해가 바로 1980년이다. 3월에 학교는 휴교를 한다. 시위와 전두환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우울한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도 역시 치열하게 놀았다. 시골에 내려가 모내기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하지만 가까이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함구무언이다.
그는 판·검사가 되기 위해 법학과에 간 것이 아니었다. 법학과에 가면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는 매력적인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 같이 신문방송학과에 가자고 한 약속을 어기고 법학과에 입학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재미가 없어 3학년 초에 군에 입대한다.
군대에 다녀오니 기형도가 교내 문학계를 평정하고 졸업을 한다. 이에 자극을 받아 쓴 시로 교내문학상에서 가작상을 받았다. 당시 당선작은 심종철의 작품. 이때 심사위원이 정현종 시인이다.
성석제는 스승 정현종 시인을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분을 이야기하자면 우선은 술을 많이 사주시는 어른이었다고 한다. 스승은 만나면 만날수록 ‘바닥이 없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바닥이 없어, 솟아나는 샘처럼 항상 새로운 분이라는 것이다. 즉 반복이 없어 지겹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던진다.
“선생은 애인으로는 최상급일 겁니다.”
그리고 토를 단다.
“그런데 연세가 많으셔서 문제지요, 히히.”
제자는 지금도 스승을 한 달에 한두 번 찾아뵙는다. 20년 이상을 만났는데도 여전하시다. 그런 모습에 놀란다고 한다. 선생은 “총명하다”라는 표현을 잘 쓰는데, 정작 선생이 총명한 분 같다고도 했다.
성석제에게 정현종 시인은 대학 스승이면서 인생의 친구 같은 분이다.
“그동안 제가 쓴 시나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누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일상적인 이야기 몇 마디 하고, 주로 산에 많이 가는데 여름날이면 ‘산도 덥구나’라든지, 같은 장소에 여러 번 찾아가서는,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다르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두 마디 나누는 겁니다. 그리고 산속의 나무를 지나치면서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상수리나무, 동백나무, 피나무, 소나무 등을 가리키면서 이 나무는 이러이러한 나무라는 식이지요.”
성석제는 스승의 인품을 선생이 오랫동안 신고 있는 등산화에 비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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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청(殺靑)’의 작가 성석제
“시 쓰던 시절 행복했죠, 소설 쓰는 지금? 재미있죠”


 





그리고 형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운다. 그가 동네에서 아이들과 장기 두는 모습을 보던 형이 “유치하게 무슨 장기냐”면서 바둑판을 펼친다. 처음에 25점을 깔고 두었다. 처음 두니 자기 집에 자기 돌을 두어 잡아먹히는 수준이다. 형은 그런 동생의 바둑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이 묵묵히 완전박살을 내버린다.
어린아이는 눈물이 날 정도로 억울해서 다음 방학 때 형이 내려오면 박살을 낼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결국 형과는 단 한 판만을 두게 된다. 당시 형의 실력은 9급 정도였는데, 다음 방학 때 동생이 두는 것을 보더니 13급 정도라는 판정을 내려준다. 그래서 자신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9급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둑에서 5급 이하는 별 의미 없다는 부연설명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성석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인 1973년에 형이 병으로 요절한 것이다. 형은 보통 아들이 아니었다. 그 슬픔을 겪은 부모의 심경을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도 노모에게 형에 대한 아픔을 되살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바둑 맞수 담임선생님
그 일을 겪은 후 가족은 자식들의 공부를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한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이 먼저 가고 성석제는 1년을 그 큰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낸다. 처음에는 서러웠는데, 살아보니 몹시 좋았다고 한다. 집이 넓어서 집안에 들어온 고등학교 자취생과 어울려 놀면서 잘 보낸다. 읍내 만화가게의 모든 만화를 독파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서울로 전학을 온다.
서울에 와서 기원을 찾는다. 거기에서 또래가 7급 정도 둔다고 해 돌을 잡았는데 무참히 깨졌고, 그 아이를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자신이 성장한 만큼 그 아이도 성장해서 결국 한 번도 못 이겼다고 고백한다. 성석제는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바둑 50%, 만화 25%의 생’이었다고 한다. 약은 약사에게 주문하듯이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신고등학교에서 바둑을 좋아하는 국어선생을 담임으로 만난다. 그가 문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교시절 때부터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신입생들의 학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보는 시험에서 국어를 75점 받아 반에서 1등을 했다. 평균이 15점 정도였으니 담임선생의 눈에는 그가 보석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전까지 객관식 문제에 익숙했다. 처음으로 모든 문제가 주관식으로 나와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무협지와 만화로 단련된 성석제의 ‘논술’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담임선생은 그를 곧바로 문예반에 넣어서 창립 90주년 교지를 만드는 일을 시킨다. 편집 일은 그가 특별히 좋아했다기보다 구속받기 싫어하는 그의 성품에 어울리는 일이었다. 교지 편집을 핑계로 수업도 빼먹고, 교지를 만들면서 편집일도 배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자신이 문예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교지 일이 끝나자 문예반을 나오고 싶었지만, 깡패 기질이 있는 선배들이 문예반을 나가려거든 ‘빠따’를 맞아야 한다며 몽둥이를 드는 바람에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국어선생님은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수업시간에 종이에 연필로 바둑판을 그려 몰래 바둑을 두는데, 선생에게 걸렸다. 선생이 너 몇 급이냐고 물었고, 1급이라고 대답한다. 선생은 아마도 ‘요 녀석 봐라’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선생과 제자는 숙직실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선생과 성석제는 실력이 비슷했다.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은 금방 친해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스승의 눈에 바둑 잘 두고 국어 잘하는 성석제가 얼마나 귀여웠을 것인가. 여기서 그의 바둑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 한다. 그는 현재 아마 5단으로 문단 고수 중 하나다. 김성동, 송영 같은 고수들이 있지만, 아마도 그를 가볍게 여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집으로 제자를 데려가곤 했다. 사모님이 선생님과 한참 나이차가 나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분의 말씀이 몇 년에 한 번씩 제자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는 것이다. 선생의 집에서는 주로 바둑을 뒀는데, 그 사실을 간파한 친구들이 성석제에게 자신들이 빼앗긴 ‘보물’들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선생 집에는 아이들이 보다가 빼앗긴 무협지와 ‘빨간책(포르노 잡지)’들이 쌓여 있었다. 바둑을 두고 나서 그 압수품들을 좀 가져가도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물건을 돌려주고 빵 얻어먹으며 재미나게 살았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석제의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세상을 재미나게 ‘보는’ 사람이다.

기형도와 신대철
최근에 낸 그의 산문집을 보면 그러한 면이 잘 드러난다.
“나는 잘 웃는다. 대학 시절 어떤 자리에서 크게 소리 내어 웃다가 스승으로부터 ‘별일 아닌 것 가지고 뭐가 좋다고 그렇게 혼자 웃느냐’고 지엄한 질타를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울상을 지으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서는 실컷 웃고 다시 들어갔다. 그러고도 웃을 일이 자꾸 생겨서 귓구멍이 아프도록 후비며 웃음을 참으려고 했던 기억도 있다. 자주 웃고, 웃을 만한 기미에 민감해지다 보니 흥미로운 것, 재미있는 것에는 쉽게 빠진다.”
그래서인지 그는 소설가이면서 짧고 재미난 산문을 맛깔스럽게 써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경신고는 미션 스쿨이어서 수시로 보는 예배 때문에 상당한 속박을 느낀 것 같다. 그리고 교복의 속박감에서 벗어나 대학에 들어간 성석제는 드디어 자유를 만끽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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