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신발 좀 바꾸세요라고 말씀드리곤 하죠. 10년 정도 된 듯한 선생의 등산화는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남루해 보였거든요. 그럼 ‘나도 바꿀 생각이 있는데…’ 하시면서 말꼬리를 흐리고 맙니다. 산을 내려와서 등산화 가게에 여러 번 모시고 가도, 한번 둘러보고는 마음에 드시는 것이 없는지, 늘 다음에 사지 뭐…, 하시지요. 아마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아요. 아직도. 그런 면이…, 존경스럽습니다.”
그분과는 이런 인연으로 맺어져 지금까지 지극하게 모시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에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다. 시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만 해도 장광설이다. 그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 이야기들이 성석제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질문할 수 없었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도 벅찼다.
1979년에 입학해서 86년에 졸업한 대학시절. 그는 이 시절 집에서 잔 것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절반은 친구들과 함께 잤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첫 시집을 낸다. 그의 책 표지에 실린 이력을 보면 시인으로서의 경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그는 두 권의 개성 있는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다. 시를 굳이 문학의 모성으로 비유하지 않더라도 우리 문단에는 시인으로 출발한 소설가가 적지 않다. 친구인 원재길을 비롯해 윤후명, 이제하, 마광수 등 알게 모르게 많은 이가 시인으로 출발한 소설가들이다.
탁월한 이야기꾼
그들의 이력이 소설가로 굳어지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시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석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소설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큰 배가 침몰하면 소용돌이치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는 단순히 잡학에 흥미가 많은 정도가 아니다.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녹이고, 다지고, 결국 한 편의 빛나는 황금빛 잔을 만들어내는 장인과 같은 모습이다.
1992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루 사이로 세상을 뜨신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호적상 가장이 되어버렸다. 묶이기 싫어하는 그의 성품에 짐이 많아진 것이다. 서유기에 저팔계가 남긴 ‘먼 길에 가벼운 짐 없다’는 명언이 있다. 그도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이다.
가족과 일, 그리고 재미나는 직장. 졸업하고 이어진 회사생활도 재미있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재미있게 했을 것이다.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예술가 기질로 그는 일상적인 업무에서도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평사원이면서도 갖은 이유로 ‘이사급 출장’을 많이 다닌 시절이었다. 그러다 1993년에 사표를 낸다. 1994년 중반엔 신림동 하숙촌에서 한여름을 보낸다. 무척 더운 해였다.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불어 이불을 덮고 자야 된다는 소문을 듣고 찾은 곳이었지만, 웬걸 그해의 무더위는 그곳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두 번째 시집 원고를 정리했다. 시집 정리가 의외로 일찍 끝나는 바람에, 나머지 시간에 그동안 쓴 짧은 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를 쓰면서 자신을 잡아당겼던 것들, 이렇게저렇게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를 메모해놓았던 것들, 즉 시인으로 쓴 글이 아닌 비시적(非詩的)인 원고를 나름의 스타일로 정리한 것이다. 아침에 샤워 한 번 하고 한 편 쓰고, 동네 어귀 슈퍼마켓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 다시 샤워하고 또 한 편 쓰고 하는 식으로 정리한 원고들, 그야말로 스스로도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원고들은 어처구니없이 태어난다.
그 원고를 당시 민음사 주간이던 이영준 씨에게 넘긴다. 이영준씨는 출판해달라는 의도로 보내온 원고인 줄 알고(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다른 편집위원에게 검토를 부탁했고, 원고를 본 편집위원이 책으로 출판하자고 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이 책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가 그에게는 소설가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 책이 출판되자 독자와 문단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의 이야기 실력을 믿고 발 빠르게 계간지 ‘문학동네’에서 첫 소설 청탁이 들어왔다. 첫 단편은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이 소설로 그는 탄탄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다. 이상문학상 후보에 선정돼 문단의 인정을 받았고, 영화사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끌려 판권 계약을 한다. 그 뒤로 계속 청탁이 들어온다.
그의 탁월한 이야기 실력의 근원은 사람들이다. 그의 주위에는 그보다 더 재미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필자 역시 10여 년 전에 성석제의 책을 만든 경험이 있는데, 그때 성석제에게서 정말 재미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한다.
“그것이 저에게는 행운인 것 같은데, 내 주위에 재미있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서 이야기가 떠오르고, 그 이야기가 활자화되고 나면 의외로 그 오리지널 이야기들은 내 마음에서 힘을 잃어요.”
성석제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참 많은 나라를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러 어처구니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어처구니는 상상 밖으로 큰 물건이나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경쾌하다. 그 경쾌함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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