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밀한 역사
테오도르 젤딘 지음, 김태우 옮김 / 강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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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앞부분을 좀 읽다가, 급히 저자 정보를 찾았다. 나는 원래 책을 읽을 때엔 저자정보를 가장 나중에 보는 편인데(저자의 약력이나 전력을 아는 데 따른 오독이나 과독의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이다) 이 책의 경우엔 서술스타일이나 내용이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책을 잘못 선택했나,라는 느낌이 4할 정도였다. 저자 정보를 읽어보니, 전통적인 사학자는 아니고 그 스타일이 장점이나 특이점이라고 한다. 아하. 저자 정보를 읽고 나는 이 책을 과감하게 역사 쪽으로 밀어놓았다.

 

이건 보통의 역사서와는 많이 다르다. 역사서는 연대기나 열전 스타일이 대부분이다. 아니면 한 가지 현상이나 주제를 분석하는 경우에도 사실의 서술과 그에 대한 분석을 주로로 하며 교양에 대한 속물적인 추구를 만족시켜줄만한 스타일들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다르다. 이 책을 펼칠때 처음 접하는 것은 에피소드이다. 평생을 식모로 일해온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여성의 삶을 분석이나 소개, 관조하는 대신 출발점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 시켜 나간다. 전개된 이야기는 딱히 소개된 여성의 삶과는 큰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자꾸 떠올리게끔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장을 다 읽고 나면, 그게 '서문'의 기능을 대신하는 장이었음을 알게 된다!

 

각 장에는 멋진, 그리고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이끌어주는 등대불 같은 제목이 붙어 있다. '남성과 여성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게 된 경위' 뭐 이런 분위기다. 처음에는 에피소드가 나오고, 그를 출발점 삼아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들과 분석들이 제시되지만 숨가쁜 나열 대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서술과 은유가 나오고 어떠한 방향이 제시된다. 낙관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하고, 허무맹랑하기도 하고....

 

전통적인 역사서와는 많이 다르다. 그것만으로도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에피소드의 힘이랄까, 한 번에 잘 읽힐 듯 하다. 그리고 어쩐지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 본듯한 기분이다. 근데 실상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역사의 흐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시점은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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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한양진경 - 북악에 올라 청계천 오간수문 바라보다, 보급판
최완수 지음 / 동아일보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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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통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술가는 겸재 정선이다. 리움에서 인왕재색도를 봤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유연하면서 박력이 넘치고, 깊고 그윽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풍경화에도 산수에도 별 취미가 없는 나이지만, 유독 겸재의 그림 앞에서는 넋을 잃게 된다. 공부를 하지 않아 한국화나 산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 더 근사한 설은 풀지 못하지만, 빨려들 것 같은 그 느낌만은 어느 그림에서도, 심지어 그림의 기로 치면 둘째가면 서러울 반 고흐나 고야의 그림에서도 느껴보질 못했다. 윗새오름에 올라갔을 때 늪지를 지나 펼쳐진 고원평원을 마주했던 그 느낌, 그 느낌이 겸재의 그림엔 있다.

 

이 책은 겸재가 그린 한양진경을 설명한 그림이다. 요즈음의 지명과 위치가 지도에 나와 있으니 서울을 잘 아는 사람이면 그편으로도 상당히 재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동소문 즈음, 보문동과 창신동에서 자랐다. 물론 겸재의 그림으로는 내가 자랐던 그 곳을 추억하기 어렵다. 너무나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몇백년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수도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 역사 만큼이나 많은 부침을 겪은 지금 서울의 모습과 겸재의 그림 속 서울은 길잡이가 있다해도 같은 곳이라고 보기 힘들다. 세월은 무참할 정도로 무심하다는 것을 마치 꿈속의 지명과 같은 서울의 그림들 속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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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귀결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3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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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론도, 도착의 사각에 이은 도착 시리즈 제 3편.

 

...인데, 도착의 사각은 아직 읽지 못했다. 도착의 론도는 읽은 적이 있다. 그 때가 [사놓고 못읽은 책 모두 해치우기 기간] 중이었는데 이런 기간엔 보통 그렇듯이(?) 설렁설렁 읽어 넘기다가 후반부에서 으익? 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일본풍 세공같은 서술 장난질인가(딱히 부정적인 의미도 아니지만 굳이 긍정적인 투도 아니다), 것도 조금 떨어지는 수준의, 라고 생각했다가 살짝 놀랐고 제목의 의미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뒤죽박죽이랄까, 그런 면도 있는데 도착의 론도와 도착의 귀결만 놓고 본다면 그 뒤죽박죽의 특유의 매력으로 화한 느낌이다.

 

특히 개인적으론 도착의 귀결을 더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건 아마 '목매다는 섬' 파트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요코미조 세이시 스타일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럴 필요 없는데 굳이 그렇게 되어야만 분위기가 사는 약간 병적인 미녀 군단이라던가, 이상한 전래동요라던가(그런 동요 실제론 없을 거 같다) 인물들의 살짝 비정상적인 태도라던가 따지고 들자면 구멍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살짝 얄팍하기까지 한데 그래도 그 분위기로 다 용서가 된다. 감금자는 읽으면서 에헤, 그렇겠군 싶었는데 정말 그랬다.(??)

 

하지만 평가로는 론도를 더 쳐 주고 싶다. 아무래도 소설의 두 부분과 소설 밖과 소설 안, 그러니까 현실과 픽션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하는 재주는 론도가 더 윗줄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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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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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도 트렌드가 있다면 진화 심리학과 뇌과학, 그리고 유전학을 요즈음의 유행 학문들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세 학문 모두 기술의 발전에 기인하고 있고 기존 학문들의 거의 가치화된 가설들 여럿을 깨부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특히 인간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이성의 존재이다.' 특히 서양에 있어서, 이 전제는 거의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기초이다. 태초에 창조주가 다른 것들과 달리 하루를 따로 들여 창조한, '창조주를 닮은' 특별한 존재, 그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은 21세기에 이른 지금도 유효하며 사실상 우리 문명의 기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래 기술과 연구방법의 발달은 그런 인간의 특별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다. 물론 인간이 동물의 한 종이며 인간의 특별함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19세기 다윈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지만 요즈음의 연구는 다윈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을 넘어 인간이라는 종을 바라보는 인간 자신의 시선들을 재편하는 듯 싶다.

 

특히 인간의 특별함의 이유라 할 수 있는 '이성의 존재'는  여전히 그 위치가 굳건해 보이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 중이다. 내 전공인 법학은 특히 완전무결한 인간 이성의 존재를 가정해 놓고 시작하는 '이성 중심주의의 끝'을 보여주는 학문인데 요즘 이러한 법학과 그와 관련된 분야들에서도 변화를 타진하는 글들이 간혹 보이곤 하니(법학이란 학문의 특성상, 경향이라고 보기에도 아직 부족한 변화이지만 충분히 주목할 만한 작은 움직임들이다), 사실상 인문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도전이 일어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도전 중 가장 특기할만한 바탕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진화심리학이다.

 

뇌과학이나 유전학이 이러한 변화의 시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실들을 밝혀준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의 유전적 뿌리를 탐구하고 MRI나 CT촬영을 통해 자신의 뇌를 들여다봄으로서 우리는 인간이 백지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닌 그의 출생과 죽음까지의 일생에 대한 단서들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알았고, 영혼이나 마음 같이 인간의 정수를 이루고 있으나 몸과 유리된 어떤 '존재'들은 인간 신체의 활동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분야는 '자연과학'으로서 존재하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기계(말하자면 컴퓨터)로치면 이때까지 보기 어려웠던 핵심 부분들을 펼쳐놓고 분석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심리학은 그로부터 더 나아간다. 진화심리학은 인간 행동의 상당수가 완전무결한 이성을 지닌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가 오랜 진화의 과정중에 획득하여 지니게 된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OS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웃는가, 우리는 왜 근친상간을 보편적으로 혐오하는가, 우리는 왜 윗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고 배우는가. 진화심리학은 그에 대한 답을 내어놓고자 한다.

 

때문에 진화심리학은 그간 많은 비판과 오해에 시달려왔고 그 시달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계산법이 쓰여있는 공식책이 아니라 무언가 많은 것이 꽉꽉 들어찬 사전이라는 사실은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류가 어떠한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꽤 위험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보편적인 가치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어떤 기준을 의미하기 마련이고 이는 구별과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진화심리학 서적들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우려는 오해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되지만 사실 서구사회의 경우 부당한 차별과 맞서는 것이 역사 그 자체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또 특히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이해가 가는 오해이다. 사실 사람들은 인류의 보편성을 인정하기가 쉽지 나와 타인이 다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는가. 하지만  진화심리학은 이러한 차이도 어떤 보편성에 기인하고 있음을 밝히고 그로인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들을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 그 바탕을 제시, 증명하는 진화심리학의 인기는 사실 거창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사소한 행동의 바탕을 제시, 증명하는 진화심리학은 그 때문에 빠르게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매력적인 배우자를 만나는 법, 성공하는 법, 타인에게 호감을 얻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법등을 설파하는 자기계발서들만 봐도 진화심리학에서 연구한 결과물들을 인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인용말고 직접 진화심리학 책을 읽어보아도 꽤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왜 타인을 살해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저 사람과 성관계를 맺자고 결정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우리는 왜 커피숍에서 밖이 내다보이는 구석진 자리를 좋아하는가, 우리는 왜 자연의 풍경에 끌리는가 하는 문제까지  다루는 진화심리학 서적들은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쉽게 접할 수 있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사실 나 역시도 그런 독자였다. '빈 서판'이나 '언어본능' '이웃집 살인마' 같은 책들을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존재를 모른채 접했던 것이다. 물론 빈 서판 같은 경우는 진화심리학의 고전과도 같은 책이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도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을 모를 수 있다는게 나조차도 신기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 '양육과 본성'의 문제 때문에 이 책을 읽었다.) 어쨌든 그렇게 빈 독서를 한 결과로 많은 오해과 몰이해가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계획적인 독서는 중요하다. 서가를 쭉 살펴보다 제목을 보고 한 권 뽑아드는 것의 가치를 폄하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 상태에서 전중환 교수님의 '오래된 연장통'의 첫장을 읽는 순간, '아하' 하는 생각(깨달음이라고 해도 좋을까)이 들었다. 내가 채 읽지 못하거나 읽고도 단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그 책들이, 심지어 기억속에서 따로따로 편재되어 있던 그 책들이 한 줄로 늘어서는 순간이었다. 사실 나는 입문서 스타일의 가벼운 교양 서적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근 몇년간 그러한 선호가 일종의 오만이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오래된 연장통' 역시 내 자기반성을 깊게 해 준 책이었고.

 

책은 얇고, 가볍고, 에피소드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볍게 읽기 좋다. 커피숍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나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릴때나,  아니면  대중교통 수단에서도 시간 때우기 위해 읽기 제격이다. 칼럼을 모았다고 하던데 그래서인가 다루는 소재도 다양하고 여러모로 구미가 당기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는 것은 (나도 그러한 '강력추천'을 받아 읽었다) 가볍게 읽을만하면서도 진화심리학에 입문하기엔 손색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진화심리학 전공자도 아니고 심리학에 대해서도 거의 무지하기 때문에 평가할 주제는 되지 않으나, 감히 나와 같이 심리학을 교양이나 흥미 차원에서 접근하는 독자들에게는 진화심리학으로 이르는 매우 적절한 입구와 같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교수님의 썰렁한 유머는 차치하고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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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네가 술래야 - 경계성 성격장애로부터 내 삶 지키기
폴 T. 메이슨 외 지음, 김명권.정유리 옮김 / 모멘토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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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어든 것은 오로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근래 경계성 인격장애 의증 진단을 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사적으로 나눈 적이 있다. 내가 처음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병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나쁜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 전에도 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었고 경계성 인격장애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몇 만난적도 있지만, 사실 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한 내 지식의 거의 대부분은 <나쁜 유전자>에서 읽은 것이 전부였다. 제목으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사람을 나쁘게 혹은 트러블메이커로 만드는 요인들, 특히 선천적인 요인들에 대한 책이다. <나쁜 유전자>에서 책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사례자로서의 저자의 언니가 경계성 인격장애이며, 저자는 밀로셰비치나 마우쩌뚱 같은 독재자나 몇몇 범죄자들이 경계성 인격장애로 의심된다고도 서술해 놓았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우울증이나 조현증 같은 정신 질환이라기 보다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 유형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마침 대화의 빌미를 제공한 그 사람도 질환이 원인중의 하나가 되어 별로 좋지 않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잡았다, 네가 술래야> 를 읽고 난 후, 내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이 것은 '병'이며,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책에서는 '경계인'이라 한다)과 그 주변인(이 책에서는 '비경계인'이라고 한다)모두 '도움과 이해가 필요하다' 점 그리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주변의 우울증이나 양극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병에 따른 증상으로서 이해해주려 하고 나름대로 도와주려 애쓰는 것처럼, 경계인 또한 그런 이해와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경계성 인격장애가 병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이해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게 질환이라는 걸 아는 이들에게는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타인에 대한 평가가 양극단을 오가며 타인에게 부담스러운 찬사와 격렬한 비난을 쏟아붓고 자해나 자살위협까지 이르는 그들의 행동을 직접 대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우울증이나 조현증 환자를 대할때와는 많이 다르다. 나는 실제로 우울증 환자와, 양극성 장애(조울증)환자, 조현증(정신분열증) 환자를 주위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때마다 그들의 행동에 위협을 느낄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병 때문임이 확실했고 또한 그들의 행동이 일반의 편견과는 달리 보통은 환자들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옆에서 환자들을 보면 안스러운 마음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던 기억이다. '누구누구가 안 좋은 거 같은데 부모님께 연락을 해봐야 하지 않겠냐' 우울증으로 약을 먹고 있다는데 약을 먹으니 곧 좋아지겠지만 당분간 좀 당황스러수도 있을 거야. 이해해주자' 같은 말을 친구들과 나누기도 했었고. 특히 내가 이해심이 깊은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보게 되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는 좀 다르다. 그들의 행동 중 가장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것은 (경험상) 사소한 일,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도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고 타인을 몰아세우듯 비난한다는 점이다. 책에서 나오듯이 그들은 전화를 하면 자신을 간섭하고 잔소리를 퍼붓는다고 생각하며 비난하고 전화를 걸지 않으면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졌다고 비난을 퍼 붓는다. 심지어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나를 비난하기도 한다.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그들의 행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면 지나친 반응이라 생각하지만, 나름 논리에 맞고 꼬투리일지라도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들에게 비난을 받는 비경계인이 제3자로부터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혹은 이 책에서 '투사'라고 부르는 경우, 즉 비경계인이 경계인의 문제를 마치 비경계인 자신의 문제인것처럼 생각하여 경계인에게 끌려가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경계인 부모를 둔 아이들이 그렇다) 경계성 성격장애의 부산물은 타인에 대한 직관적이고 날카로운 이해와 교묘한 정신조종 인데, 비경계인은 이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경계성 인격장애인과 가까운 비경계인은 다른 정신질환자의 가족이나 친구 이상의 '전략'이 필요하다. 그들이 정신질환을 겪고 있음을 알고, 그들의 행동을 질환에 따른 증세로 이해하며, 그들이 나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과 언사들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를 해야 한다. 그 대처는 우선은 비경계인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며 그럼으로서 나아가 경계인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쓰여진 책이고, 상당부분을 어떻게 나를 지키고 경계인을 도울 것인가에 대한 '전략'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전략' 중 하나는 '경계를 세우는 것' 이다. 앞서 이해와 도움이 필요하다 했지만, 정도가 지나친 경우, 즉 무조건적으로 경계인에게 공감해주고 맞춰주는 것은 경계인과 비경계인의 상태 모두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무조건적인 공감과 이해 그리고 비경계인의 끝없는 희생은 경계인이 바라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는 불안한 자아상 때문에 고통받으며 그에 따른 공허감 때문에 타인을 비난하거나 우상화한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너 자신'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한데 경계의 존재는 그에 핵심적이라 한다. 비경계인 자신을 위해서도 경계인의 행동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럼으로서 나아가 그들을 도울 수 있기 위해 경계는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아마 사회를 살아가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우리 모두에게도 유용한 태도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외의 여러 전략을 친절한 설명으로, 때로는 나열된 항목으로, 경계인과 비경계인의 모임에서 발췌한 그들 자신의 글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 전략은 원칙적인 것부터 구체적인 것까지, 심지어는 경계인이 자신을 부당히 모함하거나 상황을 조종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학대를 당하거나 돌이키기 어려운 피해를 받은 경우까지 포함한다. 예를 들어 이혼소송 중인 남편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부당히 고발하는 경계인 아내나, 부모가 자신을 학대한다고 신고를 하는 경계인 자녀, 그리고 아이를 학대하는 경계인 부모/배우자에 대한 것까지 말이다. 사람들이 경계성 인격장애인들에 대해 두려움이나 비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종종 일으킴으로서 가까운 사람들이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인데, 이 책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비경계인들에 대해서도 좋은 조언을 많이 해 주고 있다. 관계를 끊어야 되겠다는 결단까지 포함해서.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책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간혹 경계성 인격장애 말고도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까운 이들에 대해 사람들은 비교적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감이나 심지어 (가족같이 아주 가까운 사이일수록) 죄책감을 가질 수 있다.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애정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들을 진정을 돕기 위해서는 어떤 단호함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들을 돌보느라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이 책은 그 부분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비경계인에게 그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나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한다. 변화는 오로지 경계인들 자신만이 스스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며, 사실 모든 문제가 그러하다. 그래서 이 책을 특히 경계성 인격장애인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고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인용된 햄릿의 대사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무엇보다도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

그러면 밤이 낮을 자연스럽게 따르듯

다른 사람에게도 충실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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