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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김태환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이란 조금 기막힌 제목을 달고 있는 재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Wittgenstein's Poker'이다. Poker는 포퍼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포커가 '놀이'의 일종임을 생각해볼때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게도 한다. 또한 포커라는 게임을 떠올려보자. 상대에게 보여준 패, 내 손 안에 감춘 패, 그리고 내게 보여진 상대의 패, 상대의 손 안에 감춘 패, 그리고 중도에 카드를 던지지 않는다면 주어질 마지막 '숨겨진' 패. 이 책의 두 저자는, 1946년 10월 25일 저녁 8시 30분 케임브릿지 킹스칼리지 깁스 빌딩 회의실 H3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를 포커패를 분석하듯 독자에게 풀어놓는다.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몰이해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 우리가 알고 있는 포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포퍼, 그리고 논리실증주의를 위시하여 당시 2차 대전후의 유럽에 떠돌고 있던 거대한 생각의 흐름들. 그리고 히든 카드는 바로 그 모든 생각의 흐름들이 허깨비처럼 흩어져버리고 있는 현대에 있어 두 위대한 철학자의 의미이다.

 

사실 원제나 우리나라에서 첫출간 되었을 때의 제목인 '비트겐슈타인은 왜?'를 생각해보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촛점이 맞춰진 느낌이고, 책 역시도 분량이나 밀도를 공평하게 맞추려고 노력한 점은 엿보이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살짝 기울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에 나온 성격대로의 포퍼라면, 노발대발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비트겐슈타인의 이란 인물의 인상이 강력해서일 것이다. 생전에 낸 책 한권 사후에 출간된 책 한 권 이렇게 겨우 두 권의 책으로 이후 철학의 방향을 바꾸어 버렸으며, 심지어 두번째 책이 첫번째 책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두 책 모두 아직까지도 연구의 대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된 해석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만 봐도 비트겐슈타인이란 인물은 뭐지, 이사람? 싶다. 거기에 세기말의 빈에서 태어나 2차 대전을 겪은 유대인 지식인이라는 점과 동성애적 성향까지 하면 가쉽거리로 삼기에도 딱 좋다. 그에 반해 포퍼는 그 역시 오늘날까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 유명하나, 살짝 밀리는 듯한 느낌이다. 사실 포퍼가 논리실증주의의 난점을 극복하고자 했던 논리학자였다는 점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이 두 학자는 사실 당대를 풍미했던 모두 논리실증주의와 나름의 교집합을 이루는 학자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부지깽이 스캔들' 역시 일단은 논리실증주의와 궤를 같이 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1946년 당시 논리실증주의의 난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명감 같은 건 없었고 포퍼가 공격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이론 역시 당시 포퍼의 이해하고는 다른 것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내심이야 어떻든 (그의 내심의 철학을 그 누가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포퍼가 비트겐슈타인에게 들이댄 공격은, 논리실증주의를 넘어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의도와 얼마나 일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몰고올 철학의 '전회'와 그 흐름이 도착하기 직전의 철학의 전통 사이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당시 인간 비트겐슈타인의 상태나 생각과는 상관없이)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리고 놀랍게도 비트겐슈타인이 폭발시킨 철학의 새로운 흐름과 그의 철학으로 인해서 부정당할 위기에 처했던 (과연 이 해석이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통적인 흐름 모두 살아남아 현대의 사상사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여전히 분석과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어, 이 날의 스캔들은 여전히 진화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논리실증주의 자체가 이해하기 쉽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말할 것도 없기 때문에 살짝 정신을 놓으면 그 시사점이나 의미보다는 오해나 스캔들에 퐁당 빠져버리기 십상인 것 같다.

 

역시 이 책에서 또한 가장 재미있고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가는 부분은 '사상'보다는 '사건'들을 나열한 부분들이다. 심지어 그 부분이 상당히 잘 쓰여졌기 때문에 퐁당 빠져버릴 위험이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건 이 책이 택한 형식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 두 거장의 사상과 당시 사상의 흐름을 재구성하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는데, 그런 꿈을 실현시기키에 사건은 너무 재미있고, 두 철학자의 개성은 너무 뚜렷한 반면, 두 사람의 사상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너무 난해하고 그들이 두고 싸웠던 문제 역시 근원적인 문제가 그렇듯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자칫하면 '괴상한 천재 비트겐슈타인과 성질 더러운 수재 포퍼' 그리고 '능구렁이 같은 러셀'만 남을 수도 있다.

 

그런 난점을 이 책의 두 저자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논리실증주의와 두 철학자의 사상에 대해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해석을 충실히 요약 설명함으로서 그런 위험을 최대한 피하고자 한다. 사실 이 책의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설명은 구경꾼인 내가 읽기엔 상당히 적당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해서도 그 해석의 난장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일치되고 있는 해석을 충실히 적어 놓았다. 입문이라면 입문일테지만, 그냥 두 철학자의 싸움이 어디서 연원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밑밥이라고 해 두자. 감히 말하자면, 밑밥은 상당히 적절하게 잘 깔린 거 같다. 그러나 그 10분이 너무 기가 막히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파트 '최후의 승자'는 꽤 중요하다. 이 파트는 이 책이 단순 스캔들을 복기하는 것이나 스캔들에 철학 입문의 양념을 얹는 것이 아니라면, 왜 그 당시의 일을 꺼내와서 책을 쓰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들의 답과 같다. 사실 우리는 가장 최근의 천재로서 비트겐슈타인을 꼽기에 주저하지 않고,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드러난 포퍼의 혜안에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그들이 진정 닿고자 했던 그 무엇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철학의 문제는 무엇인가, 진리를 무엇인가를 두고 벌였던 두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겐 가쉽거리로만 남을 위기에 처해 있다. 역자서문에서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파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두 사람의 사상은 살아남아 여전히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 반짝이는 빛은 바래져가고 있고 그건 역자가 이야기하듯 아마 우리 누구도 더 이상 진리를 중요하다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한숨을 쉬고 싶지는 않다. 저자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주의자, 포퍼주의자 같은 말을 여전히 사용하며 그들의 빛나는 개성과 뛰어난 논리는 여전히 많은 이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더 이상 치열한 논쟁을 기대하기 어렵다 해도 말이다. 이는 한편으론, 마치 진리는 말해질 수 없고 보여져야만 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그렇기에 누군가에 의해서든 계속 말해져야 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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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개념어 시리즈 (문학동네) 1
서영채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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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장점은 전문적인 입장에서 쓴 개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대학강의 교재같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분야의 이론을 접하기에 대학강의 교재만한 것이 없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학강의 교재는 계속 그 분야의 이론을 접할 사람들, 그 분야이론을 업으로 공부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에 종종 다음 코스를 더 배워야 함을 전제로 해서 쓰인 단락들과 강사나 교수의 설명으로 해설이 반드시 되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대학교재에서 개론이란 기초를 쌓는닫는 의미라, 입문이나 교양으로 이론을 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대학교재는 상당히 난도가있는 입문서인 셈이다. 물론 입문이나 교양이라 할지라도 '인문학 개념강의' 정도에서 다뤄지는 개념을 더 심도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독서가 필요하겠지만, 필요에 의해 대학학부전공과는 다른 이론을 독학으로 접해야 되는 입장이 되니 대학교재의 높은 벽이 느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다루는 개념들이 얄팍하지는 않다. 사실 이 책 정도는 가볍게 읽어 대충 느낌만 잡고, 원전이나 독학이든 강의를 듣던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개념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저자의 개념해석이 얼마나 옳은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쟁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굳이 이 책의 성격을 말하자면 교양과 기초쌓기의 중간에 위치해 있지만 '교양'쪽이 조금 치우쳐 있다는 느낌? 교양인문학으로 추천되는 책들과는 그런 점에서 조금 궤를 달리 한다.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은 그런 면에서 동전의 양면 같다. 이해가기 용이하고, 폭넓은 개념을 접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이지만 이 책에 담긴 개념의 깊이가 만만치 않는 고로 논쟁이나 수정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높다는 게 단점. '개념정원'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 정원이란 집에 속한 부분이되, 집 안에 존재하진 않는다. 대문을 통과해야 하지만, 현관문을 들어설 필요는 없다. 딱 그 정도의 책이다. 아주 사려깊고, 저자의 신중함이 엿보이는 제목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아쉬움이라면, 이 책이 특히 뒷부분에서 각 소제목간의 연결이 부실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앞부분이 개념정원다운, 인문학 개념들을 소개 정리하는 일종의 교양 입문서 같은 느낌이라면 뒷부분은 저자의 진짜 흥미가 드러나는 충실한 그러나 사적인 내용이다. 뒷부분은 자유로운 추론과 저자의 깊은 이해가 흥미롭게 날아다니고, 전자는 역시 접하는 입장의 저자가 꼼꼼히 정리한 필기 노트 같다. 그래서 앞부분에 대해서는 보충을, 뒷부분에 대해서는 논쟁을 하고 싶은 기분이다. 물론 내가 필요했던 부분은 앞부분이라 그리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글솜씨는 아주 좋다. 역시 올해 읽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와 비교한다면 물흐르듯 읽히는 것은 '푸코...'지만 정리가 잘 되는 것은 '인문학 개념정원'이다. (강의록을 정리해놓은 책과 처음부터 읽히기 위해 쓰인 책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두 책 모두 매우 추천할 만하며 - 물론 전공자나 전문가 입장에서는 충분히 반론이 있을 만하다 - 전문가나 전공자가 아닌데 해당 분야를 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고 이해하기에는 아주 편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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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위험하다 - 왜 하버드는 디지털 세대를 걱정하는가?
존 팰프리.우르스 가서 지음, 송연석.최완규 옮김 / 갤리온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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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제목에 속지 말자. 원제는 제목대로 "디지털 세대로 태어나다 - 첫번째 디지털 원주민들에 대한 이해"이다. 마케팅이나 기타 이유를 위해서 번역시 제목을 바꾸는 일이 흔하고 그에 일반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책의 주제를 호도할 수 있는 얄팍하고 값싼 번역 제목에는 언제나 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위헙하다 - 왜 하버드는 디지털 세대를 걱정하는가?'라니! 심지어 띠지에는 '디지털 키즈는 역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가 될 수 있다' 라고 되어 있다. 물론 책 중에 등장하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저자들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려가 아니다. 저 띠지의 섬뜩한 문구에는 정말 중요한 문장들이 생략되어 있다. '반대로 가장 축복받은 세대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물론 정확히 책에 나오는 문장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제는 바로 내가 말한 뒷부분이다. 게다가 하버드 타령은 또 뭔가. 이 책의 두 사람의 저자 중 한 사람이 하버드 로스쿨 교수기는 하지만, 공동저자가 몸을 담고 있는 스위스 세인트 갤런 법대 무시하나요?  차라리 '디지털 세대의 이해'라는 부제를 달았으면 훨씬 정직하고 훨씬 나았을 것이다. 굳이 마이리뷰 제목을 영어로 단 것은, 이 책의 원제를 꼭 소개하고 싶어서이다. 뭐 제목에 대한 불평을 너무 길게 했나 싶긴 하지만.

 

이 책은 두 명의 공동저자가 있다. 두 저자의 공통점 중 눈에 띄이는 점은 그들이 72년생이라는 사실과 법대 교수라는 사실이다. 나는 79년생인데, 디지털 원주민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세대 보다는 디지털 환경에 훨씬 능숙하다. 아마 저자들도 나와 비슷할 것이다. 디지털 환경에 적응되어 있고 디지털 환경에서 살며, 생활하고, 돈을 벌어야 하지만 한편 디지털 환경에서 키워지지는 않은. 그리고 역시 나처럼, 디지털 환경에서 키워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디지털 환경이란 마냥 경이만은 아니다. 때로는 위협이고, 어느 부분은 기회이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선 도대체 믿을 수 없다. 특히 아이에 대해선 말이다. 그리고, 아이가 나보다 이른 나이에 디지털 환경에 노출되고 이용하게 되는 것을 무력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저자의 시각도 비슷하다. 그래서 아이가 디지털 환경에서 입을 수 있는 예상되는 침해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아이가 디지털 환경의 승리자가 되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또 하나는 더 두 공동저자는 법대교수이다. 때문에 이 책에는 디지털 환경이 자라나는 아동의 정서적, 신체적 발달에 미치는 영향이나 연구 같은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어떤 캠페인적 의도가 두드러지는 부분도 없다. (물론, 어떤 논지는 있지만) 이 책의 주요 부분은 디지털 환경에서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입을 수 있는 침해, 게중에서도 법적으로 문제될만한 종류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그런 문제들을 논의하는 태도가, 무척 신중하고 중립적이다. 저자들은 대놓고 겁을 주거나 나쁜 사례를 나열하며 디지털 환경을 헐뜯는데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단지 예상되는 침해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침해를 설명하며 예방책과 구제책을 논한다. 물론 그 전에 디지털 세대에 대한 정의나 예시도 들어놓았고 분석도 해 놓았다. 그런 저자들의  태도는,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학문의 성격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환경은 이미 아이들을 기르거나 아이들이 자라는 데 있어 절대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현실인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만 디지털 환경이 너무 급변하고 있으므로 아이가 너무 어린 분들은 이 책에 나온 것과는 전혀 다른 디지털 환경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모두가 지난 겨우 15년 정도 겪은 인터넷 환경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예상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 과대망상은 아닐 것이다. 또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피씨등의 보급등으로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 환경을 처음 겪는 연령이 자꾸 내려가는 중이니 아이가 어리다고 해도 아주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닐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컴퓨터 안 돼, 인터넷 위험해, 스마트폰은 나빠, 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 양육자들이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를 어느정도 포기해버리는 게 양육자들이기 때문에 (마치 tv문제에서 그러하듯) 한 번쯤은 객관적인 책들을 한 번 읽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지나치게 허용적이지 않도록, 무엇보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살아갈 디지털 세상을 조금 뒤에서라도 따라갈 수 있도록 말이다. 혹은 아이가 없어도 디지털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개인적으로는 육아에 도움받을 목적으로 책을 접했지만, 결론적으로는 후자의 목적을 달성했다. 즉 좀 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감상과 이해를 얻었으며, 나 자신의 디지털 세상에서의 행동 수칙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 부디, 한글 번역 제목만큼은 잊어도 좋다고 다시 (집착적으로)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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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추억 - 노먼 맬컴 <회상록> 개정판
노먼 맬컴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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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이자 코넬대 철학교수였던 노먼 맬컴의 회상록이 번역되어 나왔다. 재번역 출간이라고 하던데, 2001년 경에 먼저 출간되었다던 책을 접해보진 못하였다.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평전 : 천재의 의무>를 번역 재출간한 필로소픽에서 나왔다. 특별히 몽크의 평전을 언급하는 것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몽크의 평전을 먼저 읽거나 몽크의 평전을 함께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회상록'이라는 제목으로도 알 수 있지만, 이 책은 제자이자 친구인 맬컴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회상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분량도 적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논평이나 해석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을 최대한 자제한 티가 난다. 실제로 이 책의 시점은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릿지에서 교수로 강의를 한 이후부터기도 하다. 압도적인 두께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개론으로도 볼 수 있는 몽크의 책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몽크의 책을 읽거나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을때 보조적으로 독서를 돕는 수준으로 접하면 어떨까 한다. 물론 인간 비트겐슈타인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괜찮은 책일수도 있겠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그의 철학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을 생각할 때 이 책 만을 읽는 게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테니 이 말은 사족이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철학자나 예술가 기타 등등의 사람들의 전기를 읽는 것을 썩 즐기진 않는다. 누군가의 사상이나 작품을 파악할 때는 우선 그 자체로 파악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해설서를 먼저 읽지 않는 마음하고 비슷한 것이다. 특히 창작자의 사생활이나 생애는 선입견을 더욱 강하게 심어주곤 한다. 비트겐슈타인처럼 유별난데다 강한 인상을 주는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은둔, 괴팍함, 강박, 무례함, 날카로움 같은  비트겐슈타인 개인에 대한 이미지는, 그의 때론 병적으로 치밀하지만 동시에 매우 불친절하고 난해한 그의 저서에 덧씌워져 그의 철학을 더욱 더 난해하게 심지어는 (비트겐슈타인이 결코 읽혀지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이) 신비롭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불안을 안고, 또한 비트겐슈타인 개인에 먹혀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비트겐슈타인의 개인적 기록이나 전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저작이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데다, 해설서를 읽어도 학자들 마다 각기 다른 이야기를 뇌까리고 있는 듯한 혼란 속에서,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허나 결론적으로는, 도리어 그렇게 유별나기에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전기는 그의 사상을 접하는 중이라면 한 번 쯤 꼭 읽어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을 자신의 삶과 일치시키려 했으며 철학하는 것에 대한 염증, 아울러 실천하는 삶에 대한 중요성을 항상 설파했던 비트겐슈타인의 개인적 삶이야 말로 그의 사상을 관통하는 키가 될 지도 모른다는 짐작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특히 후기 저작을 읽으면 비트겐슈타인이 일상 언어에 대해 상당히 집착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전개야말로 내가 비트겐슈타인을 읽어야 하는 이유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삶과 철학에 대한 태도 역시 그런 논리 전개를 그대로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겨우 비트겐슈타인을 읽어가는 중이라 자신있게 말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이 책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한짓을 한다는 생각이 아주아주 많이 든다....), 분명한 것은 소위 '철학의 언어적 전회'라고 일컫어지는 일대 사건의 대표자로서-그 자신이 거기 포함되는 걸 원했는가와는 상관없이-비트겐슈타인이 보여준 논리전개 방식, 철학하는 방식, 그리고 철학에 대한 태도에서 보여지는 엄격함은, 그런 방식을 통해 나온 결론만큼이나, 철학을 넘어 여러 분야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으며, 실제로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 역시 철학전공자는 아니지만, 그런 영향을 조금 얻어갔으면 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고.

 

그런 엄격함과 치밀함 및 세기를 넘어 그의 책을 읽는 이들 까지도 고통스럽게 만드는 자신과 주위의 온갖 것에 대한 병적인 회의와 자기 검열을 간접 체험하며, 그의 철학 나아가 그의 철학에 어느정도 빚을 지고 있는 많은 현대 철학 및 기타 사상들에 대한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면, 노먼 맬컴의 페이지마다 애정과 존경과 경이가 뚝뚝 떨어지는 이 회상록 역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장점 한 가지 더(또한 내가 이 책을 읽고 확실하게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감상은),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을 다룬 책들 중에서는 가장가장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편에 속한다. 그리고 이 책속의, 맬컴의 눈에 비친 철학자이자 개인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사소한 버릇 하나까지도 따라하고 싶어하는 추종자들을 몰고 다녔다는 에피소드처럼, 매우 강하게 독자를 끌어당긴다. 그의 철학이 그러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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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밀한 역사
테오도르 젤딘 지음, 김태우 옮김 / 강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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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앞부분을 좀 읽다가, 급히 저자 정보를 찾았다. 나는 원래 책을 읽을 때엔 저자정보를 가장 나중에 보는 편인데(저자의 약력이나 전력을 아는 데 따른 오독이나 과독의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이다) 이 책의 경우엔 서술스타일이나 내용이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책을 잘못 선택했나,라는 느낌이 4할 정도였다. 저자 정보를 읽어보니, 전통적인 사학자는 아니고 그 스타일이 장점이나 특이점이라고 한다. 아하. 저자 정보를 읽고 나는 이 책을 과감하게 역사 쪽으로 밀어놓았다.

 

이건 보통의 역사서와는 많이 다르다. 역사서는 연대기나 열전 스타일이 대부분이다. 아니면 한 가지 현상이나 주제를 분석하는 경우에도 사실의 서술과 그에 대한 분석을 주로로 하며 교양에 대한 속물적인 추구를 만족시켜줄만한 스타일들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다르다. 이 책을 펼칠때 처음 접하는 것은 에피소드이다. 평생을 식모로 일해온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여성의 삶을 분석이나 소개, 관조하는 대신 출발점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 시켜 나간다. 전개된 이야기는 딱히 소개된 여성의 삶과는 큰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자꾸 떠올리게끔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장을 다 읽고 나면, 그게 '서문'의 기능을 대신하는 장이었음을 알게 된다!

 

각 장에는 멋진, 그리고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이끌어주는 등대불 같은 제목이 붙어 있다. '남성과 여성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게 된 경위' 뭐 이런 분위기다. 처음에는 에피소드가 나오고, 그를 출발점 삼아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들과 분석들이 제시되지만 숨가쁜 나열 대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서술과 은유가 나오고 어떠한 방향이 제시된다. 낙관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하고, 허무맹랑하기도 하고....

 

전통적인 역사서와는 많이 다르다. 그것만으로도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에피소드의 힘이랄까, 한 번에 잘 읽힐 듯 하다. 그리고 어쩐지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 본듯한 기분이다. 근데 실상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역사의 흐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시점은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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