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죽음의 나쁜 예 - 법의학이 밝혀낸 엉뚱하고 기막힌 살인과 자살
에두아르 로네 지음, 권지현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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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한 사고사가 화제가 되었다. 정말 확률적으로 말도 안 되는, csi류의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일이 일어났다. 다만 그것이 현실로 일어난 일이기에 고인을 전혀 모르는 나에게도 남은 감정은 소소한 화젯거리가 아닌 안타까움이었다. 죽은 이에겐 그가 살아나갔어야 하는 남은 시간들이 있을 것이고, 그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에게 소중했던 남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놀랍고 이해할 수 없고 황당한 죽음이라고 해도 죽음은 죽음이다. 나 역시 잡담거리로 타인의 죽음을 듣거나 말한 적이 있지만, 그 뒷맛은 언제나 조금 쓰다. 아무래도 고인에 대한 예의문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황당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생각이 그런 이야기들에는 꼬리표처럼 달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남의 죽음의 이야기는 그것이 우리 죽음의 이야기도 될 수 있기 때문에, 늘 흥미롭긴 하나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을 읽었고, 역시 뒷맛이 좀 쓰다.

 

미안하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여기 서재에도 법과학 카테고리를 따로 두었고, 법과학과 관련된 신간들은 되도록 다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충격적인 묘사가 많은 책 보다는, 전문적으로 분석하되 어느것도 쉽게 단정짓지 않는, 균형을 지키려 애쓰는 책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특히 정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사실을 서술하고 묘사하는 책을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편이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그것이 누구의 삶이든 간에 몇 장의 글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법과학 교양서 내에 등장하는 일개 사건일지라도, 그 죽음은 누군가의 역사가 거기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책은 때로는 그런 죽음을 농담거리 삼으며 심지어 때로는 빈정대기까지 한다. 참 고약한 유머감각이구나 라고, 느끼는 내가 너무 보수적인 사람인가? 하지만 나는 항문에 뭘 집어넣었든 간에 그로 인한 죽음이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건 괴짜의 희안한 종말이 아니다. 평생을 자신의 비밀스런 욕구와 싸워야 했던 누군가가 정말 맞고 싶지 않았던 공포스런 종말에 더 가깝다. (자기성애에 심취한 사람들이 사고로 죽지 않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들과 그에 대한 개인적인 고심들에 대해 알게 되면, 그 사람들의 공포를 비웃을 수 없게 된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의 욕망이 우스꽝스럽지는 않다)

 

이 책이 애초에 칼럼을 모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책의 농담을 버무린 서술이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신문에서 한 주에 한 두번 한 꼭지씩 만나기엔 그리 부담스러운 가벼움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게 한 권의 책이라는 게 문제고,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왜 이책이 쓰였을까 하는 의문이 어쩔 수 없이 남는다. 저자는 가볍게 서술함으로서 충격적인 내용을 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걸까? 하지만 내게 남는 의문은 이것이다-자기 몸에 수십개의 못을 박으며 자살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렇게 희안하고 웃긴가? 분명 중증 정신질환이 있을 그 사람의 이야기나 나는 그저 안타깝고 슬프며, 그것을 읽고 있는 내 자신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물론 죽음이나 사고사에 대해 우리가 매번 심각해 질 필요는 없다. 농담을 조금 섞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죽음을 대화 주제로 삼는 것에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다. 나는 메리 로취가 시체에 대해 쓴 '스티프'도 매우 좋아해서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내내 가볍기만 한 흥밋거리인가 아니면 저자가 그래도 희안한 사실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를 남기려고 했는가 하는 차이일 것이다. 아니, 저자가 자기를 놀리고 있는지(로취는 모든 저서에서 스스로를 농담거리로 자주 삼는다) 아니면 망자를 놀리고 있는지에 대한 차이일 것이다. (물론 로취의 책은 죽음이 아니고 시체에 대해 다루고 있긴 하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무미건조하고 중립적인 학술논문이라고 해서 소위 흥미가 덜해지는 건 아니다. 굳이 설탕에 굴리고 식용색소를 잔뜩 첨가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첫머리에 언급했던 사건을 들으며. 이 책을 떠올렸다. 어쩌면 고인의 비극적인 종말은 이런 책들에서 심심풀이로 쓰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다. 매우 황당하고 흥미로운 사고이긴 하니까. 다만 고인에게는 어린 자녀가 있다고 한다. 아이가 있어 그런가 나는 낯모르는 고인의 삶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정도는 다르지만 자기 자신을 '나쁘도록' 우습게 학대함으로서 죽음을 맞은 이들에 대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런 책들을 찾아 읽는 내 자신이 과연 어떤 인간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여기에 언급한 것이 그 분께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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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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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이 책을 읽었을까요?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는 한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쇄살인범 시점에서 쓰여진 1인칭 소설입니다. 건조하고 혼란스러우며 담담해서 공포스럽습니다. 후기를 읽으니 조이스 캐럴 오츠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미국의 여류 작가라고 합니다. 책을 검색해봤더니 읽기 힘든, 깔깔한 소설을 주로 쓰시는 일흔의 노작가로군요.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이 소설 주인공의 모델이 되는 어떤 실존 인물 때문입니다. 그 실존 인물의 범죄사실에 드러난 몇몇 가지 점이 좀 특이하다 생각하던 차에 이 책이 서평에 추천된 것을 보게 되었죠. 뭐 그런데 관심을 가지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누군가는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저 같은 경우를 설명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값싼 호기심이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하기도 하더군요. 전 그저 인간이 참 궁금할 때가 있는데 그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이 책을 읽기 위해선 강한 심장과, 이런 내용에 대한 맷집이 필요합니다. 음, 요즈음 분위기에선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자극적인 묘사로 말초를 자극하는 그런 책은 아닙니다. 쉽게 읽히고 잘 따라가게 되면서도 정말 많은 생각을 나게 하는 그런 책입니다. 좋은 소설은 그렇더군요. 그리고 좋은 소설은 사람을 불편하게도 만듭니다. 그래도 이 소설은 주인공에 공감사키는 그런 종류는 아닙니다. 아니... 누가 주인공에 공감을 할 수 있을까요. 철저한 관찰자, 어떤 병소를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들에서는 오츠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주인공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소위 병소가 좀 더 보편적인 상황에도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가령 이런 부분들이요.

 

 

195-196p

 

 

"6번 채널에서는 아프리카의 어딘가에서 알몸의 흑인 시체들이 쓰레기장에 널브러진 장면이 나온다. 9번 채널에서는 보스니아라는 곳에 있는 폭격 받은 병원에서 아이들이 울부짖다가 "여러분의 주지사가 말씀드립니다"라는 광고로 넘어간다. 11번 채널에서는 승합차가 바위가 많은 사막에서 덜커덩덜커덩 달리는 광고가 나온다. 12번 채널에서는 미시건과 오대호 주변의 기온이 계속 높겠다는 일기예보가 나온다. 엠티비에서는 섹시한 라틴계 여자가 약에 취한 백인 자식의 젖꼭지를 빨고 있다. 다시 11번 채널로 돌아간다."

 

 

247p

 

 

"M_K_ 박사는 원자력 위원회의 비밀 실험에 참가한 과학자 팀을 이끌었다. 어떤 실험에서는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에 있는 학교에서 지적장애아 서른 여섯 명에게 방사능에 오염된 우유를 먹였다. 다른 실험에서는 버지니아 주의 몇몇 대학에서 죄수의 고환을 전리방사선에 노출시켰다. 왜 이 옛날 뉴스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나왔는지, 왜 사람들이 신경 쓰는 척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그저 스쳐지가나는 에피소드고 전체 내용의 흐름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간절한 마음으로 뭔가 완충지대를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한 구절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힘이 있고, 그 힘조차 내용처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 스믈스믈 몸 아래에서 뱀처럼 기어오르는 듯 느껴지기 때문에 읽은 후가 참 어려운 소설입니다. 우리는 간혹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들여다볼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은 바로 그 입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엔 뭐가 있을까요? 이 소설을 단순히 어떤 연쇄살인범을 떠오르게 하는 공포소설로 받아들일 건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지평을 발견하게 될지는 독자의 몫이겠지요. 이 소설은 주인공 쿠엔틴이 그저 풍경에 녹아들기를 원하는 것 처럼 독자와 단 한번도 눈을 맞추지 않으려 하니까요. 아, 그러니 정말 잘 쓰인 소설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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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펭귄클래식 59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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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쓰인 소설이라면, 게다가 그게 연애소설이라면 더더욱. 하나 더 얹자면, 해피 엔딩이 아니고 더우기 밑도 끝도 없다면, 그래서 아주 건조하면서도 로맨틱하다면, 절대 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운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 생활은 내가 여운에 젖어 하루나 이틀 혹은 그 이상을 보낼 수 있도록 나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 권의 잘 쓴 문학작품이 주는 충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이 결국에는 삶을 살찌운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마치 교통사고를 당하듯 가끔 아무런 생각없이 그런 소설을 집어 들 때가 있다. 도대체 무슨 미친 마음이 들어서 문학전집을 읽자고 생각했고, 그 첫권으로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를 선택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를 읽었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를 인상깊게 보아서 읽게 되었던 '네이키드 런치'는 한 마디로 매우 난해했고 혼란스러웠으며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 감정말고는 내게 남긴 것이 없다. 나는 이렇게 휩쓸리지 않고, 아주 먼 거리에서 무언가를 봤다고 이야기 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퀴어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아, 그런데 이건! 밑도 끝도 아닌 결론을 지닌 잘 쓰인 연애소설이 아닌가. 게다가 아주 로맨틱하고, 섬세하고 부드럽고 약하다. 거미줄이나 갓 태어난 아기의 볼에 돋은 솜털이나 새벽 공기를 읽고 있는 듯 하다. 아주 보편적이기 까지 하다. 닳고 닳은 표현을 여럿 동원해서 어쩐지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한 마디로 내가 너무 좋아하는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들의 총합이었다. 나는 책을 한 장 한 장 집어삼키듯 읽어나가면서 마약중독자 백인 게이에게 공명하는 스스로가 두려워졌다. 특히 앨러턴에게 끈질기게 거부당하면서 갈가리 찢기는 리의 내면이,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떤 역사로 작용할 지언정 결과적으로는 마음 한 구석의 빈 공간 말고는 리의 삶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지독한 허무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가끔씩 너무나 보편적이지 않은 것들에서 강한 인간 마음의 보편성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이 그러했다. 주인공 리는 마약중독자이고, 한량이고, 게이이지만 그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은 그런 '퀴어'적인 측면을 넘어서는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퀴어를 받아들이고 말고는 이 소설의 핵심과는 별 상관이 없다. 다만 퀴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혹은 퀴어만을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표면적인 것들에서 부유하며 충돌만을 반복한다면, 더 없이 멋진 경험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마약중독자인 리가 쏟아내는 의미없고 알맹이 없는 수 많은 말들 사이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버로스의 섬세한 감수성-대표적으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그러하다. 이 문장은 매우 고전적이면서 아름답다-과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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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1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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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처럼 비웃는 것' 의 작가 미쓰다 신조의 호러 소설이다.

 

 

원래 호러는 잘 안 읽는데 추리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엔 미쓰다 신조의 스타일대로 추리+호러이구나! 좋구나! 하고 읽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 수록... 호러가 맞다.

 

 

잘 안 읽는 분야라 해서 책을 읽는 내내 별로였다는 아니고 사실 마쯔다 신조의 두 추리소설보다 나았다. 호러는 분위기와 스토리지 미스테리 처럼 풀어야 할 문제가 없고 독자도 따지고 들 여지가 적으니까. 마쯔다 신조는 추리보다는 이 편이 더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본편의 뒤쪽은 얼버무린듯한 티가 나긴 하는 듯 하다. 그 기관의 미스테리어스한 역사가 다 밝혀지지 않은 채로 끝이 나는 건 불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 뒤에 붙여진 외전격의 편들-가짜 후기-의 분위기는 제법이라 꽤 좋게 읽었다,로 결론내리고 싶다.

 

 

그런데 도착 시리즈도 그렇고 이렇게 소설의 밖과 안이 겹쳐지는 소설을 연달아 읽으니 속이 좀 안 좋다. 글만으로도 멀미를 나게 할 수 있구나. 사실 나는 바닷배를 타고 멀미는 거의 안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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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앤 아버스 -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
퍼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김현경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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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앤 아버스(디앤 아버스-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디앤'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수전 손택의 책에서였다. 칼을 먹는 묘기를 보이는 알비노 여인을 찍은 사진과 장난감 슈류탄을 들고 있는 소년의 사진이었는데 아버스에 대한 손택의 설명과 사진에서 풍기는 묘한 불균형과 낯설음 그리고 그 둘에서 기인하는 끌림에 아버스의 사진을 여럿 찾아보았다.

 

 

아버스는 당시 소외되었던 계층이나 금기시되었던 것들에 사진기를 들이댔다. 누드촌, 동성애자, 남장여자, 10대연인, 기형인, 불구. 아버스 말고도 비일상적인 상황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상,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 너머를 포착한 사진작가는 많다. 비록 아버스가 선구자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세월이 흐르고 비슷한 대상을 탐구한 사진작가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만약 그녀가 단순히 '특이한 대상'을 포착했다는 이유로 유명해졌다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그녀 작품의 힘은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아마 대상에 대한 아버스의 생각과 태도가 그 사진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단순히 미화나 동정, 공감, 혹은 혐오나 구경이 아니다. 그녀의 사진들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밀어내며, 불편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불편함이 대상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관람객 자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버스 사진들 속 대상들은 그들의 영혼의 일부를 사람들앞에 놀랄만큼 무방비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무방비함에 충격을 받고 매혹당하지만 그 비어있는 부분에 머물러 길을 잃고 만다. 그녀의 사진에서는 어떤 스토리도 찾을 수 없지만 대신 찰나의 이미지가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깊이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세상의 가치나 기준으로부터 자유롭다. 어쩌면 아버스의 사진이 담고 있는 수 많은 느낌들은 사람이 타인을 대할 때 느끼는 온갖 감정들을 풀어헤쳐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의 관습이나, '이래야 된다'는 이성적인 태도나 내 자신이 지닌 내 역사가 배제된 정말 '날 것'의 느낌 말이다. 그리고 그 감정에서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관찰자, 나, 자신이다.

 

 

아버스는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전기를 잘 읽지 않는 내가, 아버스의 전기를 찾게 된 것은 그런 이유가 제일 컸다. 나는 고흐를 이해하기 위해 고흐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치 않으며, 모차르트나 바흐의 예에서처럼 어떤 전기나 뒷이야기가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왜곡하거나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기란, 책 뒤의 저자의 말이나 추천서처럼 읽는 나의 느낌이나 감상을 왜곡시키거나 오염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몇 줄 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생이라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들이나 행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데, 그럴 땐 전기를 찾아서 그 사람의 객관적인 역사-작가에 의해 취사선택된 것이겠지만을 쫓아가보는 것이 좋은 방법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솔직히, 아버스의 경우는 그녀가 가정주부였다가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점에 우선 흥미가 간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은, 아버스는 처음부터 사진작가였다. 그녀가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스 부인이 아닌 디앤 아버스가 되었지만 말이다. 부유한 어린시절, 유대계라는 것과 엄격하면서 다소 폐쇄적인 (중상류층의 교육들이 그렇듯이) 가정교육, 패션사진작가로서의 경력은 그녀가 디앤 아버스로서 거리에 나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후의 결과물과 다 맞물려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사진의 힘은 그녀 내면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그런 내면의 힘을 지닌 이들이 그러했듯이, 그녀 역시 어두운 부분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결국 그것에 먹혀들였다. 전반은 유복한 소녀의 삶, 중반은 화려함, 그리고 말년에 있어서는 서서히 침몰해가는 배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세상을 창조적으로 보았거나 그에 기여한 사람들은 그런 결말을 맞곤 하는 것 같다. 매우 아쉽게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쓰여진 어떤 스캔들이나 비극적인 결말이 그녀의 사진의 힘을 퇴색하거나 더 신비롭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아버스의 사진은 비린내가 난다. 그녀 마음속에 있던 어떠한 놀람과 떨림, 흔들림, 확신 그리고 재능이 그 순간에 담겨져 있다. 아버스의 사진 속 인물들은 당당하지만 보통의 소외계층을 찍은 사진과는 달리 친근감은 보여주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 그녀 마음속의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들을 신화적인 존재로 생각했다. 이미 태어날때부터 시련을 겪어 완성된 인간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옳은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그녀 사진에 어떤 힘을, 분위기를, 깊이를 부여해주고는 있다. 그 결과가 꼭-쌍둥이 사진의 부친이 보였던 태도처럼-마음좋은 것만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유족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아서 책에서는 아버스의 작품 사진은 한 장도 볼 수 가 없다. 그게 가장 아쉬운 점이다. 아마 이 에피소드는 그녀의 사진속에 담긴 밀림과 끌림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책 속의 내용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식구들과 함께 크고 자랐다. 그 점에 어떤 비난이나 납득이 없이, 사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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