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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커크비의 청아한 음성
Decca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엠마 커크비의 청아한 음성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앨범의 영어 제목은 the pure voice of Emma Kirkby 이다. 한국어 제목보다는 영어 제목이 좀 더 핵심을 찌르는 것 같다. 'pure' 맑다, 청아하다를 넘어서 우리가 보통 소프라노의 목소리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 커크비는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성인 여성 소프라노라기 보다는 차라리 소년합창단의 보이소프라노처럼 들릴 때가 더 많다. 그렇기에 엠마 커크비의 음성을 처음 들었을 때, 누군가는 '깨끗하고 맑다'고 하고 누군가는 '빈약하다' 때론 '뱀 나온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음성을 가진 그녀가 고음악 운동에서 가장 뛰어난, 아니 그것을 넘어 상징적인 소프라노가 된 것도 역시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엠마 커크비의 청아한 음성'은 메이저 레이블 데카가 고음악 전문 레이블 르와조리르를 합병한 후, 그 레이블에서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함께 냈던 엠마 커크비의 음반들을 가지고 만든 베스트 앨범이다. 데카가 르와조리르 인수 후에 그 레이블과 함께 했던 시대연주가들에게 보인 태도는 그다지 훌륭한 것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런 앨범이 라이센스로까지 나오게 된 건 데카 레이블의 힘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데카에서 나왔기 때문에 수록된 레퍼토리 면에서 분명 아쉬운 점도 많다.
이 앨범에는 저녁기도, 엑슐라테 유빌라테같은 모차르트의 종교곡, 모차르트, 헨델등의 오페라, 르네상스 가곡이나 세속가요 등이 실려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 오페라는 커크비의 주종목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녀의 음색이나 섬세한 표현력등은 성당이나 교회에서 연주되는 종교곡들에 정말 제격이다. 물론 오페라에서도 그녀만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표현을 즐길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모차르트의 자이데나 헨델의 알치나 보다는 퍼셀의 디도나 에네아스 에서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베스트 앨범으로도 커크비를 소개하는 음반으로도 고음악이 아닌 오페라를 비롯한 대규모의 곡들이 많이 실린 건 유감이다. 특히 모차르트 곡이 네 곡이나 되는데, 이것이 단순히 모차르트가 잘 알려진 작곡가라서 선택된 것이 아니길 빌자.
대신 커크비의 매력은 다울랜드의 세속가요에서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페르골레지의 '살베 레지나'는 북독일 칸타타가 한 곡도 실리지 않은 아쉬움을 그나마 보상해 준다. 그녀가 제임스 보우만과 함께 녹음한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 역시 데카에서 다시 발매 되었는데, 두 위대한 성악가의 조화가 참 멋지다. 듀엣이라 그런가, 이 앨범에 소개되지 않은 것이 좀 아쉽다. (하지만 같은 데카 레이블의 바바라 보니의 베스트 음반에서는 숄과 듀엣으로 한 '스타바트 마테르'의 첫 곡이 실렸다!) 커크비의 아름답고 '순결한' 음색과 꾸밈없는 창법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신의 숨결위의 깃털'은 하이페리온 레이블이라 실리지 않았을 테지만, 웬지 언급하고 싶다. 그 앨범에서 느꼈던 커크비의 매력을 이 앨범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트랙인 모차르트의 '라우다테 도미눔'이나 영화 '샤인'에서 삽입되어 유명해진 (그건 커크비의 노래는 아니었다;)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같은 노래들은 너무나 아름답다. 특히 비발디는! 또한 영국인 커크비야말로 퍼셀의 노래를 부르기에 적절한 예술가일 것이다. 많은 성악가들이 모국어로 노래부를 때 보통 훌륭한 결과를 냈던 것은 사실이므로. (물론 모국어가 아니더라도 훌륭한 연주는 할 수 있다. 저 명제의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 커크비가 모차르트가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한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엑슐라테 유빌라테'를 부르기에 적당한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꾸밈음이나 잇단음 처리는 훌륭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언뜻 연약해 보여도 전혀 그렇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음반에도 맥락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연주자들의 맥락을 우선 무시하고 편집된 성악가들의 컴필레이션 음반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근데 꽤 가지고 있잖아 -_-;;) 그래도 그 성악가의 장기를 잘 살려 편집된 컴필레이션 음반이라면 괜찮다고 본다. 그건 편집자의 능력, 아니 그 보다는 세심함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엠마 커크비의 이 음반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녀가 르와조리르와 함께 어떤 레퍼토리들을 주로 녹음했는지는 잘 모른다. (생각해보니 주로 인상적으로 생각되었던 레퍼토리는 하이페리온과 함께 한 것이었고, 내가 음악을 듣기 시작하기 전에 르와조리르는 망했다) 하지만 이 레퍼토리로는 커크비의 고음악 운동의 여왕으로서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 아래 쌓인 연주가이자 연구자로서의 정신, 그리고 그녀와 함께 고음악 운동을 함께 이끌었던 수 많은 연주자들의 역사를 맛보기엔 다소 부족한 점들이 있다. 그녀는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를 자랑하는 부지런한 음악가이기도 하므로, 한 장의 음반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레이블과 함께한 그녀의 역사라는 점을 생각해 봐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