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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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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마치 장마철의 하루 같다. 하루 종일 안개비가 내리고,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뒤덮여 있으며,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공기는 텁텁하고, 손에 닿는 것이 죄다 눅눅하며, 발바닥에 장판이 쩌억 달라붙는 그런 날 말이다. 땀이 온 몸을 한 바퀴 휘어감고 있는 기분에 새로 갈아입은 옷도 곧 소용이 없고 세수를 해도 무언가가 자꾸 얼굴에서 흐르는 것 같다. 외출하기엔 소리없이 옷을 적시는 안개비가 부담스럽고, 집에 있자니 눅눅한 물건들이 나를 죄어오는 느낌이 든다. 그런 기분으로 읽기엔 참으로 부담스런 소설이다. 소설 앞부분에 묘사된 하나와 준고의 집, 특히 벽장의 모습이 이 책을 읽는 나의 상황과 기분이라면 제대로 된 설명이 될까? 어쨌든 그렇게 끈끈하고, 눅눅하며, 어둡고, 습한 소설이다.

 

사실, 소설의 문체나 인물들이나 스토리에서 배어나오는 그런 후텁지근한 느낌은, 소설이 다루고 있는 소재와 무척 잘 어울린다. 양아버지 준고와 그에게 11살때 입양된 고아 하나. 그들의 묘한 관계는 마치 누런 장판 구석에 엷게 핀 곰팡이를 바라보는 듯 하다. 가족이며서 가족이 아니고, 연인이면서 연인이 아니고, 하나면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지워버릴 수 있다면 더할나위없이 산뜻해 질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약혼자가 상징하는 일상의 평온에 덮힌 그 불쾌한 푸른 자국에 자꾸 눈이 가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그 자국을 용인하지 않더라도, 외면하기 어려운 것 만은 사실이니까.

 

소설은 약간 미스테리 형식으로 되어 있고(그러나 결코 흥미를 돋구지는 않는다), 시간이 역순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가지 특성이, 소재가 스캔들로 범람되는 것을 막아준다. 하지만 담담하고도 무심한 전개와 문체가 자못 병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타인의 사랑이나 예술을 상식이나 윤리로 재단할 수 있는가, 라는 거창한 질문하고는 상관없이 작가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병적으로 끈끈한 느낌이 아닌가 싶다. 사랑인지 존재인지 모를 관계의 묘함에 방점을 찍는 듯한 제목 까지도.

 

다만 두 번 읽지는 못하겠다. 나는 하루종일 줄창 내리는 안개비를 즐기거나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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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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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이 책을 읽었을까요?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는 한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쇄살인범 시점에서 쓰여진 1인칭 소설입니다. 건조하고 혼란스러우며 담담해서 공포스럽습니다. 후기를 읽으니 조이스 캐럴 오츠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미국의 여류 작가라고 합니다. 책을 검색해봤더니 읽기 힘든, 깔깔한 소설을 주로 쓰시는 일흔의 노작가로군요.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이 소설 주인공의 모델이 되는 어떤 실존 인물 때문입니다. 그 실존 인물의 범죄사실에 드러난 몇몇 가지 점이 좀 특이하다 생각하던 차에 이 책이 서평에 추천된 것을 보게 되었죠. 뭐 그런데 관심을 가지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누군가는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저 같은 경우를 설명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값싼 호기심이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하기도 하더군요. 전 그저 인간이 참 궁금할 때가 있는데 그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이 책을 읽기 위해선 강한 심장과, 이런 내용에 대한 맷집이 필요합니다. 음, 요즈음 분위기에선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자극적인 묘사로 말초를 자극하는 그런 책은 아닙니다. 쉽게 읽히고 잘 따라가게 되면서도 정말 많은 생각을 나게 하는 그런 책입니다. 좋은 소설은 그렇더군요. 그리고 좋은 소설은 사람을 불편하게도 만듭니다. 그래도 이 소설은 주인공에 공감사키는 그런 종류는 아닙니다. 아니... 누가 주인공에 공감을 할 수 있을까요. 철저한 관찰자, 어떤 병소를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들에서는 오츠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주인공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소위 병소가 좀 더 보편적인 상황에도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가령 이런 부분들이요.

 

 

195-196p

 

 

"6번 채널에서는 아프리카의 어딘가에서 알몸의 흑인 시체들이 쓰레기장에 널브러진 장면이 나온다. 9번 채널에서는 보스니아라는 곳에 있는 폭격 받은 병원에서 아이들이 울부짖다가 "여러분의 주지사가 말씀드립니다"라는 광고로 넘어간다. 11번 채널에서는 승합차가 바위가 많은 사막에서 덜커덩덜커덩 달리는 광고가 나온다. 12번 채널에서는 미시건과 오대호 주변의 기온이 계속 높겠다는 일기예보가 나온다. 엠티비에서는 섹시한 라틴계 여자가 약에 취한 백인 자식의 젖꼭지를 빨고 있다. 다시 11번 채널로 돌아간다."

 

 

247p

 

 

"M_K_ 박사는 원자력 위원회의 비밀 실험에 참가한 과학자 팀을 이끌었다. 어떤 실험에서는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에 있는 학교에서 지적장애아 서른 여섯 명에게 방사능에 오염된 우유를 먹였다. 다른 실험에서는 버지니아 주의 몇몇 대학에서 죄수의 고환을 전리방사선에 노출시켰다. 왜 이 옛날 뉴스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나왔는지, 왜 사람들이 신경 쓰는 척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그저 스쳐지가나는 에피소드고 전체 내용의 흐름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간절한 마음으로 뭔가 완충지대를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한 구절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힘이 있고, 그 힘조차 내용처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 스믈스믈 몸 아래에서 뱀처럼 기어오르는 듯 느껴지기 때문에 읽은 후가 참 어려운 소설입니다. 우리는 간혹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들여다볼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은 바로 그 입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엔 뭐가 있을까요? 이 소설을 단순히 어떤 연쇄살인범을 떠오르게 하는 공포소설로 받아들일 건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지평을 발견하게 될지는 독자의 몫이겠지요. 이 소설은 주인공 쿠엔틴이 그저 풍경에 녹아들기를 원하는 것 처럼 독자와 단 한번도 눈을 맞추지 않으려 하니까요. 아, 그러니 정말 잘 쓰인 소설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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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펭귄클래식 59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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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쓰인 소설이라면, 게다가 그게 연애소설이라면 더더욱. 하나 더 얹자면, 해피 엔딩이 아니고 더우기 밑도 끝도 없다면, 그래서 아주 건조하면서도 로맨틱하다면, 절대 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운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 생활은 내가 여운에 젖어 하루나 이틀 혹은 그 이상을 보낼 수 있도록 나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 권의 잘 쓴 문학작품이 주는 충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이 결국에는 삶을 살찌운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마치 교통사고를 당하듯 가끔 아무런 생각없이 그런 소설을 집어 들 때가 있다. 도대체 무슨 미친 마음이 들어서 문학전집을 읽자고 생각했고, 그 첫권으로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를 선택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를 읽었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를 인상깊게 보아서 읽게 되었던 '네이키드 런치'는 한 마디로 매우 난해했고 혼란스러웠으며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 감정말고는 내게 남긴 것이 없다. 나는 이렇게 휩쓸리지 않고, 아주 먼 거리에서 무언가를 봤다고 이야기 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퀴어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아, 그런데 이건! 밑도 끝도 아닌 결론을 지닌 잘 쓰인 연애소설이 아닌가. 게다가 아주 로맨틱하고, 섬세하고 부드럽고 약하다. 거미줄이나 갓 태어난 아기의 볼에 돋은 솜털이나 새벽 공기를 읽고 있는 듯 하다. 아주 보편적이기 까지 하다. 닳고 닳은 표현을 여럿 동원해서 어쩐지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한 마디로 내가 너무 좋아하는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들의 총합이었다. 나는 책을 한 장 한 장 집어삼키듯 읽어나가면서 마약중독자 백인 게이에게 공명하는 스스로가 두려워졌다. 특히 앨러턴에게 끈질기게 거부당하면서 갈가리 찢기는 리의 내면이,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떤 역사로 작용할 지언정 결과적으로는 마음 한 구석의 빈 공간 말고는 리의 삶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지독한 허무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가끔씩 너무나 보편적이지 않은 것들에서 강한 인간 마음의 보편성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이 그러했다. 주인공 리는 마약중독자이고, 한량이고, 게이이지만 그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은 그런 '퀴어'적인 측면을 넘어서는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퀴어를 받아들이고 말고는 이 소설의 핵심과는 별 상관이 없다. 다만 퀴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혹은 퀴어만을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표면적인 것들에서 부유하며 충돌만을 반복한다면, 더 없이 멋진 경험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마약중독자인 리가 쏟아내는 의미없고 알맹이 없는 수 많은 말들 사이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버로스의 섬세한 감수성-대표적으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그러하다. 이 문장은 매우 고전적이면서 아름답다-과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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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아틀라스와 헤라클레스 세계신화총서 3
재닛 윈터슨 지음, 송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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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 신화를 재해석한 재닛 윈터슨의 <무게>는 영웅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영웅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스 로마 신화 최고의 강한 남자이자 가장 드라마틱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 헤라클레스는 이 신화를 재해석한 어떤 버전의 창작물들보다도 여기에서 가장 가차없이 다뤄진다. 헤라클레스는 마초적이고, 제 멋대로이고, 영악하고, 폭력적이며 불경하며 뒤틀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내이다. 헤라클레스 뿐만이 아니다. 그의 적도, 그의 경쟁자도, 그리고 그를 눈엣가시처럼 미워했던 헤라여신도 마찬가지로 제 욕망을 위해 달려가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마치 이탈을 막기 위해 눈가리개를 씌워놓은 말들과 같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인류의 역사와도 닮았다.

윈터슨은 그의 굴곡많은 인생과 종말을 비극적 영웅서사시가 아니라 일종의 아이러니한 인생 이야기 쯤으로 위치시킨다. 우리의 역사가 영웅의 역사가 아니라 사실은 끝없는 아이러니로 된 긴 이야기듯이. 그리고 그것은 지구 전체의 역사에 비하면 참 사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 중에, 한 '거인'이 위치해있다. 아틀라스. 신화에서는 단지 헤라클레스에게 이용당한 어리석은 거인일 뿐이지만, 여기에서 그는 고뇌하며 사유하는 인물이다. '무게'에 대하여. 그가 벌로서 지고 있는 지구의 무게는 너무나 오랜시간 견뎌왔던 것이라 마치 그 자신이다 다름 없을 것이다. 무게가 존재가 되고, 존재가 무게가 되는 삶.

이 소설이 정말로 시작되는 부분은 그 뒤에 위치한다. 헤라클레스도, 신도 죽고, 그들이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서. 현대 문명이 시작되고 우주선에 실려온 작은 개 한마리가 그의 친구가 되어주어도 아틀라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지구의 무게를 버티고 있다. 그 순간 어떠한 영감같은 질문이 그에게 떠오른다. 이것을 내려놓으면 안 될까, 하는.

그 옛날, 헤라클레스가 그 앞에 도착해 그의 무게를 대신 져 준다 했을 때 그 잠깐 동안 거인이 느꼈던 것은 자유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무게였고, 그는 돌려받아야 했고, 남에게 떠넘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절망하고 분노한다. 잠시 벗어났던 그 때의 기억은 거인에게는 더 골 깊은 절망으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삶의 무게를 직감하는 순간 그러하듯이.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그 무게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불안해하고 분노하고 답답해한다. 우리 어깨 위에 놓인 그 무게는 아틀라스가 진 지구처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어떠한 숙명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내려놓는 순간 모든 것이, 내 존재까지도 끝날 것이다. 아틀라스에게도 우리에게도 무게는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할까. 과연 무게가 곧 존재이고, 존재가 곧 무게인 것일까. 이 책을 읽고 저자가 나름대로 내린 답에, 독자 모두가 공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달콤한 위안정도는 누구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속도, 깊이, 진정성, 유머 어느 것도 놓치지 않는 작가의 글솜씨와 좋은 번역을 따라가는 순간만큼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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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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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화가 세계를 짓누르기 시작하면서, 이슬람 문명이 무시되거나 오해받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슬람 세계는 여성이나 소수자를 억압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등 전근대적 가치에 매달리는 듯이 보여지거나, 오일머니로 번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 졸부들의 이미지거나, 끊임없이 전쟁과 테러를 일으키고 고집을 부리는 문제적 존재들로 여겨진다. 이슬람 세계와 계속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서 보수주의자들이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내 놓은 책들을 보면 그들은 사탄이며, 잠재적 테러리스트들이며, 무식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기독교문명으로 대표되는 유럽계 백인들과는 전혀 다른 인종들이며 아무리해도 유럽은 이들을 이해할 수 없고, 이들은 유럽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결국 남는 건 전쟁과 정복 그리고 말살이다. 서구 기독교인들의 이런 시각은 십자군 전쟁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바탕을 지니고 있는 저 머~~언 세계인 동북아시아에서 살아가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는 극과 극이며 서로 배척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럽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경계에 선 터키의 작가로서, 파묵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인 베네치아 출신으로 오스만 투르크에 노예로 끌려온 '나'와 그의 주인인 터키인 호자, 마차 쌍둥이처럼 닮은 이 두 주인공을 통해 질문하고 있다. '우리와 당신은 얼마나 다르며, 또 얼마나 닮았는가.' 이 책은 물론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동시에 다루고 있디고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충돌의 여파 중에 가려져 있던 두 문화의 융합과 상호이해의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간 접할 수 있었던 시도들이 대부분 유럽계 백인의 시각에서 쓰여진 것에 반해, 터키인인 파묵은 자신이 발딛고 있는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는 점이 무척 신선하다. 유럽인 노예가 화자가 되어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이야기구조는 그 반증이다. 그러나 만약 단순히 노예가 야만인의 문명의 발전된 모습에 교화되었다는 스토리였다면 이 소설 역시 편협함과 자문화 중심주의의 혐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조금 특이한 시각에서 바라본 두 문명의 충돌에 관한 이야기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여기서 파묵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자문화 예찬의 함정에 빠지는 대신, 유럽인 노예의 맞은편에 서구를 동경하며 이슬람문화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호자를 배치함으로서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서로가 느끼는 타문화에 대한 동경과 이해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면서 두 문화의 닮은 점만큼이나 다른 점도, 그리고 닮은 것은 닮은 것대로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놓아두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마치 '나'와 호자가 닮았으되 서로 다르듯이 말이다. 

<하얀 성>은 매우 복잡하지만, 매우 잘 쓰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읽히든, 아니면 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의 관계에 촛점이 맞추어지든 간에, 독자를 깨우고 독자가 깨어있어야만 하는 요소들이 그득하다. 몇 번을 읽어도 새로운 이야기가 보일 것 같고 전혀 다른 지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감성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림으로서 그것이 마치 머리에서 일어나는 일인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동시에 읽으면서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은 참 오랫만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번역자이신 이난아 선생님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앞으로도 더 좋은 소설, 그리고 소설을 통한 더 넓은 세상을 많이 소개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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