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 여행자 - 신경과 의사, 예술의 도시에서 뇌를 보다
김종성 지음, 경연미 그림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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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여행자'라는 제목과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표지가 눈길을 확 잡아 끈다. 저자는 국내 유수의 신경과 전문의. 그에 걸맞게 저자의 기행은 여행이나 휴가가 아닌, 학회참석의 이유다.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책처럼) 나와 같은 일반인 눈에 신기해 보이는 신경과 질환의 증상이나 사례를 따라가는 내용이나, 혹은 흥미진진한 의학의 뒷골목을 탐험하는 내용이 아니다. '뇌과학' 만큼이나 이 책을 단단하게 받히고 있는 것은, 예술과 문학에 대한 저자의 소양이다. 그리고 그 위에 신경과 질환에 관한 이야기들을 살짝 끼얹는다.

 

저자는 미라보 다리를 거닐며 아폴리네르의 시와 인생 그리고 그의 뇌손상을 생각한다. 루브르에서는 퐁파르드 부인의 편두통 이야기를 꺼내고, 위그모어 홀에서 다발성 경화증으로 저주받은 천재의 대열에 오르게 된 재클린 뒤프레의 비극을 떠올린다. 아프르카에서는 블릭센의 척수매독을, 천안문에서는 중국현대사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인물인 마오쩌둥의 치매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 외에도 그의 여행길을 따라 베토벤, 슈만, 플로베르, 모파상, 엘가, 고흐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는 외래 진료를 하는 선생님처럼 알아듣기 쉬운 말로 그들의 증세를 분석, 설명하고 진단을 내린다. 그리고 한숨을 돌리며 기행문 특유의 여유로운 시선으로 꽃밭과 연못, 오래된 극장건물, 사람들에 대해 아주 상투적인 투로 이야기한다.

 

이처럼 신경과 질환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으면서도, 기행문의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책은 상당히 말랑말랑하다. 비슷하게 역사적 인물들의 병증에 대한 책인 '매독'에도 '뇌과학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베토벤, 플로베르, 모파상, 블릭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뇌매독과 척수매독이 과거 흔한 질병이었기에 그런 듯 싶다) 두 책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 '매독'의 내용이나 분위기는 매우 논쟁적이고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들의 삶은 상당히 무시무시한 병증으로 얼룩져 있다. 반면 '뇌과학 여행자'의 분위기는 관조적이랄까, 심지어는 뇌매독 증상으로 정신병원에서 말년을 보낸 모파상 같은 경우도 저주받은 천재의 이야기처럼 쓸쓸하고 극적이다. (물론 증상 자체는 좀 무시무시하다...)

 

한 마디로, 조금 독특한 기행문을 읽고 싶은 이들에겐 상당히 재미있는 독서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뇌과학이나 신경과 질환에 관심있는 이들에겐 쉬어가는 의미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반면 기행문 치고는 조금 전문적인 내용이 많은 편이고, 뇌과학이나 신경과 질환 관련 저서로 보기엔 너무 가벼울 수도 있다. 독특함은 언제나 이렇게 장점과 단점을 마치 동면의 양면처럼 함께 가지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의 뛰어난 문화적 소양을 감탄하며 보았다. 신경과 전문의라는 직업에서 얼핏 떠오르는 냉철한 이미지와 달리, 저자는 (다른 책에서 본) 외모 만큼이나 부드럽고 사려가 깊다. 글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엄청난 독서량과 미술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까지, 한 분야의 대표적인 전문가면서도 사적인 생활까지도 풍요로운 그의 삶이 부럽기까지 하다. '춤추는 뇌'에서도 엿볼 수 있는 저자의 다방면에 걸쳐 풍부한 소양은 책을 읽는 동안, 내게는 가장 강렬한 페로몬으로 작용했다.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는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제가 되어줄 한적한 프랑스의 시골 풍경이나 나 역시 아주 좋아하는 뒤프레의 드라마틱한 비극보다도 더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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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앤 아버스 -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
퍼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김현경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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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앤 아버스(디앤 아버스-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디앤'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수전 손택의 책에서였다. 칼을 먹는 묘기를 보이는 알비노 여인을 찍은 사진과 장난감 슈류탄을 들고 있는 소년의 사진이었는데 아버스에 대한 손택의 설명과 사진에서 풍기는 묘한 불균형과 낯설음 그리고 그 둘에서 기인하는 끌림에 아버스의 사진을 여럿 찾아보았다.

 

 

아버스는 당시 소외되었던 계층이나 금기시되었던 것들에 사진기를 들이댔다. 누드촌, 동성애자, 남장여자, 10대연인, 기형인, 불구. 아버스 말고도 비일상적인 상황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상,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 너머를 포착한 사진작가는 많다. 비록 아버스가 선구자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세월이 흐르고 비슷한 대상을 탐구한 사진작가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만약 그녀가 단순히 '특이한 대상'을 포착했다는 이유로 유명해졌다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그녀 작품의 힘은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아마 대상에 대한 아버스의 생각과 태도가 그 사진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단순히 미화나 동정, 공감, 혹은 혐오나 구경이 아니다. 그녀의 사진들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밀어내며, 불편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불편함이 대상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관람객 자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버스 사진들 속 대상들은 그들의 영혼의 일부를 사람들앞에 놀랄만큼 무방비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무방비함에 충격을 받고 매혹당하지만 그 비어있는 부분에 머물러 길을 잃고 만다. 그녀의 사진에서는 어떤 스토리도 찾을 수 없지만 대신 찰나의 이미지가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깊이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세상의 가치나 기준으로부터 자유롭다. 어쩌면 아버스의 사진이 담고 있는 수 많은 느낌들은 사람이 타인을 대할 때 느끼는 온갖 감정들을 풀어헤쳐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의 관습이나, '이래야 된다'는 이성적인 태도나 내 자신이 지닌 내 역사가 배제된 정말 '날 것'의 느낌 말이다. 그리고 그 감정에서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관찰자, 나, 자신이다.

 

 

아버스는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전기를 잘 읽지 않는 내가, 아버스의 전기를 찾게 된 것은 그런 이유가 제일 컸다. 나는 고흐를 이해하기 위해 고흐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치 않으며, 모차르트나 바흐의 예에서처럼 어떤 전기나 뒷이야기가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왜곡하거나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기란, 책 뒤의 저자의 말이나 추천서처럼 읽는 나의 느낌이나 감상을 왜곡시키거나 오염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몇 줄 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생이라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들이나 행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데, 그럴 땐 전기를 찾아서 그 사람의 객관적인 역사-작가에 의해 취사선택된 것이겠지만을 쫓아가보는 것이 좋은 방법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솔직히, 아버스의 경우는 그녀가 가정주부였다가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점에 우선 흥미가 간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은, 아버스는 처음부터 사진작가였다. 그녀가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스 부인이 아닌 디앤 아버스가 되었지만 말이다. 부유한 어린시절, 유대계라는 것과 엄격하면서 다소 폐쇄적인 (중상류층의 교육들이 그렇듯이) 가정교육, 패션사진작가로서의 경력은 그녀가 디앤 아버스로서 거리에 나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후의 결과물과 다 맞물려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사진의 힘은 그녀 내면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그런 내면의 힘을 지닌 이들이 그러했듯이, 그녀 역시 어두운 부분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결국 그것에 먹혀들였다. 전반은 유복한 소녀의 삶, 중반은 화려함, 그리고 말년에 있어서는 서서히 침몰해가는 배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세상을 창조적으로 보았거나 그에 기여한 사람들은 그런 결말을 맞곤 하는 것 같다. 매우 아쉽게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쓰여진 어떤 스캔들이나 비극적인 결말이 그녀의 사진의 힘을 퇴색하거나 더 신비롭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아버스의 사진은 비린내가 난다. 그녀 마음속에 있던 어떠한 놀람과 떨림, 흔들림, 확신 그리고 재능이 그 순간에 담겨져 있다. 아버스의 사진 속 인물들은 당당하지만 보통의 소외계층을 찍은 사진과는 달리 친근감은 보여주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 그녀 마음속의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들을 신화적인 존재로 생각했다. 이미 태어날때부터 시련을 겪어 완성된 인간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옳은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그녀 사진에 어떤 힘을, 분위기를, 깊이를 부여해주고는 있다. 그 결과가 꼭-쌍둥이 사진의 부친이 보였던 태도처럼-마음좋은 것만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유족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아서 책에서는 아버스의 작품 사진은 한 장도 볼 수 가 없다. 그게 가장 아쉬운 점이다. 아마 이 에피소드는 그녀의 사진속에 담긴 밀림과 끌림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책 속의 내용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식구들과 함께 크고 자랐다. 그 점에 어떤 비난이나 납득이 없이, 사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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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사 Dr. 스쿠르 애장판 전12권 세트
사사키 노리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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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뽑은 만화 50선"이라는 목록을 본 적이 있다. <내일의 조/허리케인 조>라든지 <도라에몽> <유리가면>같은 익숙한 작품들이 상위에 링크되어 있고, 이름을 모르겠는 만화가 한 반쯤 되는 목록이었다. 그런데 그 목록 13위에 정말 생각치도 않았던 만화가 한 권 올라 있었다. 노리코 사사키의 <닥터 스쿠르>였다.

노리코 사사키의 <닥터 스쿠르> 이야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노리코 사사키라는 만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녀만큼 일관성있는 스타일을 가진 만화가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작품마다 그녀가 변화를 주는 것은 배경 뿐 인 것 같다. <닥터 스쿠르>는 수의대와 동물병원, <못말리는 간호사>는 병원, 그리고 최근작 <헤븐>은 레스토랑, 이런 식으로. 배경설명이 끝나면 이렇게 간단하게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 십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성격의 캐릭터들은 자질구레한 소동들을 벌이면서 평범하지만은 않은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그래서 그녀의 만화들의 첫인상은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큰 줄거리도 없고, 사건도 없고,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과연 있을까. 그림체도 상당히 평범하고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편이다. 슬랩스틱개그풍도 적다. 그러나 그녀 만화가 매력이 없다는 이야기는 절대 할 수 없다. 그녀의 작품은 정말로 정말로 매력적이니까. 그것도 두세번, 네번, 그 이상을 반복해서 읽어야만 직성이 풀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과연 어디에 그런 매력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노리코 사사키 만화만의 특징을 찾아야 한다. 그녀의 만화만의 무엇을 찾는 일은 쉬워 보인다. 그녀 스스로는 일관성있는 스타일의 소유이지만 만화계 전체로 보면 그녀의 스타일은 오직 그녀만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하면 지나친 평가일까?) 수의대, 병원, 레스토랑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평범한 사건들과 조금은 벗어난 평범한 일상의 비범한 사건들. 아까도 말했듯이 개성 강하고 나름대로 다들 성격파(?)인 등장인물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녀가 이야기를 펼쳐놓는 무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 세밀한 묘사들.

그 중 그녀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세번째 요소이다.  <닥터 스쿠르>를 보고나면 왠지 수의대를 반쯤은 다닌 기분이 되고 (그래서 쥐에게 주사를 맞출 수도 있을 것 같고 개에게 약을 먹일 수도 있을 것 같으며, 소의 아이를 받는 일이나 동료의 꼬리를 물어뜯는 범인 돼지를 잡는 일도 가능할 것만 같다) <못말리는 간호사>를 보면 종합병원 간호사들의 행동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게다가 각종 병의 신기한 특징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까지) <헤븐>을 보고나면 이런 저런 일들을 해 주지 않는 레스토랑이 삼류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만화의 "로인 디시 loin d'ici"라는 레스토랑이 과연 일류인지는 다른 문제지만. 상당히 격식은 갖추었지만...품위가... --;;;) 흥미롭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같은 해박한 묘사, 그것이 상당히 재미있으며 매혹적이다. 그래서 결코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점점 만화에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캐릭터들이다. 한 번 보면 잊혀질 수 없는 상당한 성격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닥터스쿠르>의 주인공 찬우나 <헤븐>의 주인공 이가 칸은 주인공치고는 상당히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지만 주인공이 평범한 대신 정말 빛나는 조역들이 많이 등장한다. <닥터 스쿠르>에서는 (만화를 보신 분이라면 아하!하고 가장 먼저 생각해내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유교수가 있고, 만화 여주요조역 치고는 상당히 과격한 특징과 괴상한 체질을 소유자인 이태영양, 쥐를 무서워해서 교재의 쥐 그림에 "나는 다람쥐"라 써놓야만하는 강민군, 엄격하면서도 엄격하지 않은 할머니, 무신경한 놈인 것 같은 태수, 등이 이 만화의 빛나는 인간 조역들이다. 사실 이 만화에서는 동물 조역들이 진짜이다. 동네의 여대장 나비, 무섭게 생겼으나 담담하고 얌전한 시베리안 허스키 꼬마, 아무생각 없는 모래쥐들, 그리고 닭에 대한 인식을 상당히 바꾸어놓는 마당의 무법자 병순이. 생각해보면 주인공들이 얌전한 사사키의 만화에는 그 빈자리(?) 메꾸고도 몇번은 넘칠 조역들이 그득그득 하다. (<못말리는 간호사>에서는 주인공부터 상당했는데 그 대신 조역들이 상당히 정상적인 인물었다는 재미있는 점이 생각난다.)

그리고 마지막, 배경에 대한 상당한 묘사를 바탕으로 독특한 성격의 인물들이 평범하지는 않지만 일어날법한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이 이 만화에 묘하게 매력적인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친근하면서도 신기한 느낌을 전해 주는 것이다. <닥터 스쿠르>를 보면 "이 정도 일은 일어날 것 같아"하면서도 수의대라는 곳이 상당히 신기한 곳이 된다. 실제 수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기도 하지만 만화만큼 재미있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 역시도 신기하다.

바로 노리코 사사키의 만화는 이렇게 일상과 비일상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우리가 쳇바퀴돌듯한 일상에서 한 번 꿈꾸는 소심한 탈출감이랄까. 나와 내 주위 사람들과 나의 일은 여기 그대로 존재하면서도 한바탕 웃을 수 있고 잠깐 휴식이 될 수 있는 해프닝들을 구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사사키의 만화는 그렇게 일상적인 해프닝들의 연속이다.

상당히 쉬워 보이면서도 꽤 어려운 일이다.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일상에서 특징적인 해프닝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사실 <닥터 스쿠르>말고도 그런 해프닝적 일상들을 다룬 만화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사사키만큼 "평범해보이는" 작가는 만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것 저런 것 잊고 아직 <닥터 스쿠르>를 읽지 않으신 분은 한 번 쯤은 읽어둘만은 하다.  모두의 마음에 들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꼬마같은 시베리안 허스키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들테니.

ps ; 새로 나온 판형과 종이, 마음에 든다. 근데 제본이 약간 약한 듯... (내것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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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관의 살인 -하 - 완결
사사키 노리코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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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월관의 살인>의 띠지에 붙어있는 문구는 과대광고의 혐의가 짙다. 아야츠지 유키토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적인 작가이고, 사사키 노리코 역시 일본 역대 코믹스 순위 10위권내에 진입한 <닥터 스쿠르>의 작가이긴 하지만 어쨌든 천재 운운은 조금 성급하다. 개인적으로 아야츠지 유키토의 소설을 크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처음 이 책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무릎을 탁 쳤다. 사실 아야츠지 유키토는 한계가 뚜렷한 작가라 생각되지만, 그것은 주로 문장이나 묘사가 단조롭다는 문학적 측면에서의 이야기이고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기발한 트릭을 펼쳐놓는 재주는 신본격의 대표주자로 꼽힐 자격이 충분이 있으니까. 그래서 늘, 영상화가 되면 더 볼만한 작품이겠군 이란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문장을 쓰는 대신 만화 스토리를 써서 그것도 굴지의 만화가와 함께 책을 낸단다. 이것이야 말로... 아야츠지 유키토에게 적합한 일처럼 보였다.

특히나 함께 하게 된 사사키 노리코는 진작에 전문분야의 세세한 에피소드를 담백한 유머에 녹여내는 작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선택한 '철광'이라는 소재 역시 왕년의 솜씨대로 능숙히 그려낼 것이다. 그림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물의 표정 묘사라던가 행동 묘사가 어색하다는 평도 있지만 도리어 그 담담함이 추리만화에 잘 어울릴 것도 같았다.

그리하여 나온 결과물은, 어딘지 모르게 '응?'하게 되는 것이었다. 추리과정은 어딘지 모르게 고리 하나가 생략된 듯하고 크게 놀랍거나 대단한 트릭도 없었다. 재독 했다. 이번엔 사사키 노리코에 맞춰서. 아, 역시 그녀의 스타일이다. 철광에 관한 잡다산만한 에피소드들을 잡다산만하게 풀어놓는 재주는, 이미 <닥터 스쿠르>에서 빛을 발했던 그대로였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케 하는 유머들 또한 내가 좋아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고. 그런데 뭔가 찝찝하다. 추리는?

월관의 살인은 전체적으로 보면 볼만한 만화이다. 그러나 추리만화, 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산만하고 무게 중심이 잘못 잡힌 듯 하다. 머릿속에 남는 건 트릭에 대한 찬탄이나 아야츠지 유키토의 장점인 '특이한 배경 만들어내기'에 대한 재확인이 아니라 철광제군들의 기막힌 '철광증명담'뿐이었다. 무엇보다 소녀탐정 소라미는 사사키 노리코 스타일의 '무덤덤한 주인공' 그대로이지만 탐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추리가 뜬금없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사키 노리코의 팬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와 추리의 팬에게는 부족한 작품인 것 같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아야츠지 유키토의 개성이 사사키월드 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사사키 월드에도 충격이 있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해서는 그저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것, 그것만을 추억해야 할 듯 싶다.

그래도 책의 사양이나 빠른 출판들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검은 종이에 인쇄된 작가의 말은 눈이 나쁜 나로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철광제군들, 영원하길 빈다.

별은 두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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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등 - 잉마르 베리만 자서전, 예술가의 초상 03
잉마르 베리만 지음, 민승남 옮김 / 이론과실천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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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좋아하는 영화감독을 물으면 '잉마르 베리만'을 꼽긴 하지만, 늘 함께 꼽곤 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만큼 자신있는 대답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크로넨버그 추종자라는 이미지가 가진 변태성;; 을 잉마르 베리만의 이름으로 중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조금은 숨어 있달까.

이 민망한 고백을 해 놓고 보니,  변명 또한 늘어놓고 싶어진다. 다른 '소위 명감독'들도 많은데, 굳이 베르만을 꼽는 게 오직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을 세트를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크로넨버그처럼 확고부동한 지지를 보내는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리만의 영화를 크로넨버그의 영화 만큼이나 즐기면서 보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앙겔로풀로스와 타르코프스키는 수면제이고, 키에슬롭스키 앞에서는 공부하는 기분이 되는 내가, 이상하게도 베리만은 꽤 즐겁게-시간이 가는 걸 가끔씩은 깜빡할 정도로-볼 수 있으니. (좀 자의적인 묶음이긴 하군...) 과격한 표현을 써 보자면, 베리만은 내게 안토니오니보다 많은 걸 느끼게 해 주며, 드뤼포 보다 즐겁고, 고다르 보다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그런 걸 보고, '상성이 맞는다'고들 한다던가.

그래서, 잉마르 베리만의 자서전을 읽는 건 다른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어서라던가, 그의 영화를 더 잘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왜 이 지리한 영감과 상성이 맞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이었달까. 나 역시도 '크로넨버그'와 '베리만'이라는 이상한 조합이 가능한 이유가 궁금하였던 것이다. 마침 자리끼로 두고 볼 책이 없기도 했지만.

하지만 '괴조합에 대한 의문점 풀이'라던가 '베리만의 영화 세계 탐구'라는, 이렇게 써 놓고 보니 거창하지만 기실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목표들은, 이 책을 반도 보기 전에 날아가 버렸다.
그 사람이 영화 감독이든, 미술가든, 작가이든 간에, 한 예술가의 자서전에서 그의 작품세계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런데 베리만의 자서전의 첫 인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겐 호수처럼 깊고 정적이고 경건하다는 표현을 쓸 만큼 고요한 이미지였던 그의 영화들과 달리, 그의 인생은 굉장히 동적이었다. 특히 스캔들을 쫓는 스스로의 저열한 관심사를 저주하면서도 열심히 읽었던 그의 여자들과 아이들, 연애사에 대한 부분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알고보니 꽤 바람둥이였더군, 영감쟁이)

그의 자서전은 그야말로 한 고집불통 인간이자 괴짜 예술가의 투쟁록이었던 것이다. 경직된 사회와, 내면의 열정과,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끝없는 투쟁.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투쟁. 한 마디로 그의 영화의 느낌과 그가 쓴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이 책을 읽은 다른 친구와도 오직 "쇼킹하지 않냐?"라는 말 밖에 못 나누었을 만큼.

하지만,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생각을 정리해보니 꼭 '다르다'라고는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영화는 얼핏 정적이고 고요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뤄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끌어안을 수 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저열한 욕망의 움직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그런 욕망을 하찮다며 비웃거나 신처럼 고고히 내려보는 대신, 함께 투쟁하고 고민하고 회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들에 스민 종교적 색채도 사실은 인간의 욕망-신을 바라는-의 한 측면을 그린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하지만 동시에 그 본질과는 달리,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그것을 저열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포장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 본연의 하찮은 욕망-그리고 그 욕망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다-과 투쟁하는 고집불통 괴짜들의 영화들이라는 점에서 베리만과 크로넨버그는 닮은 듯 하다. 물론, 베리만의 다른 영화들을 더 보고, 크로넨버그의 자서전이라도 읽게 되면 또 다른 결론, 어쩌면 전혀 다른 결론을 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결론이랍시고 내 놓은 이것도 사실은 리뷰를 벌려놓고 수습을 하지 못하는 한 멍청한 인간의 고군분투의 결과물-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일지도...) 그러나 지금 내가 내린 결론이 조금이나마 중심에 가까워졌든 아님 남의 다리 긁는 수준이든 간에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베리만'이라는 감독의 정체가 이 책으로 인해 백만분의 일정도 또렷해진건 사실이다.

어쨌든, 무엇보다도 또렷해진 건 바로 이거다 ; 이래서 자서전이라는 걸 읽을 가치가 있는 거였다. (사실 이 독서와 엉망진창 리뷰를 쓰면서 얻은 건 오직 이 것 뿐만이 아닐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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