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학문에도 트렌드가 있다면 진화 심리학과 뇌과학, 그리고 유전학을 요즈음의 유행 학문들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세 학문 모두 기술의 발전에 기인하고 있고 기존 학문들의 거의 가치화된 가설들 여럿을 깨부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특히 인간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이성의 존재이다.' 특히 서양에 있어서, 이 전제는 거의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기초이다. 태초에 창조주가 다른 것들과 달리 하루를 따로 들여 창조한, '창조주를 닮은' 특별한 존재, 그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은 21세기에 이른 지금도 유효하며 사실상 우리 문명의 기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래 기술과 연구방법의 발달은 그런 인간의 특별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다. 물론 인간이 동물의 한 종이며 인간의 특별함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19세기 다윈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지만 요즈음의 연구는 다윈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을 넘어 인간이라는 종을 바라보는 인간 자신의 시선들을 재편하는 듯 싶다.

 

특히 인간의 특별함의 이유라 할 수 있는 '이성의 존재'는  여전히 그 위치가 굳건해 보이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 중이다. 내 전공인 법학은 특히 완전무결한 인간 이성의 존재를 가정해 놓고 시작하는 '이성 중심주의의 끝'을 보여주는 학문인데 요즘 이러한 법학과 그와 관련된 분야들에서도 변화를 타진하는 글들이 간혹 보이곤 하니(법학이란 학문의 특성상, 경향이라고 보기에도 아직 부족한 변화이지만 충분히 주목할 만한 작은 움직임들이다), 사실상 인문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도전이 일어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도전 중 가장 특기할만한 바탕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진화심리학이다.

 

뇌과학이나 유전학이 이러한 변화의 시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실들을 밝혀준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의 유전적 뿌리를 탐구하고 MRI나 CT촬영을 통해 자신의 뇌를 들여다봄으로서 우리는 인간이 백지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닌 그의 출생과 죽음까지의 일생에 대한 단서들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알았고, 영혼이나 마음 같이 인간의 정수를 이루고 있으나 몸과 유리된 어떤 '존재'들은 인간 신체의 활동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분야는 '자연과학'으로서 존재하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기계(말하자면 컴퓨터)로치면 이때까지 보기 어려웠던 핵심 부분들을 펼쳐놓고 분석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심리학은 그로부터 더 나아간다. 진화심리학은 인간 행동의 상당수가 완전무결한 이성을 지닌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가 오랜 진화의 과정중에 획득하여 지니게 된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OS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웃는가, 우리는 왜 근친상간을 보편적으로 혐오하는가, 우리는 왜 윗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고 배우는가. 진화심리학은 그에 대한 답을 내어놓고자 한다.

 

때문에 진화심리학은 그간 많은 비판과 오해에 시달려왔고 그 시달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계산법이 쓰여있는 공식책이 아니라 무언가 많은 것이 꽉꽉 들어찬 사전이라는 사실은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류가 어떠한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꽤 위험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보편적인 가치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어떤 기준을 의미하기 마련이고 이는 구별과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진화심리학 서적들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우려는 오해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되지만 사실 서구사회의 경우 부당한 차별과 맞서는 것이 역사 그 자체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또 특히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이해가 가는 오해이다. 사실 사람들은 인류의 보편성을 인정하기가 쉽지 나와 타인이 다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는가. 하지만  진화심리학은 이러한 차이도 어떤 보편성에 기인하고 있음을 밝히고 그로인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들을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 그 바탕을 제시, 증명하는 진화심리학의 인기는 사실 거창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사소한 행동의 바탕을 제시, 증명하는 진화심리학은 그 때문에 빠르게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매력적인 배우자를 만나는 법, 성공하는 법, 타인에게 호감을 얻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법등을 설파하는 자기계발서들만 봐도 진화심리학에서 연구한 결과물들을 인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인용말고 직접 진화심리학 책을 읽어보아도 꽤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왜 타인을 살해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저 사람과 성관계를 맺자고 결정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우리는 왜 커피숍에서 밖이 내다보이는 구석진 자리를 좋아하는가, 우리는 왜 자연의 풍경에 끌리는가 하는 문제까지  다루는 진화심리학 서적들은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쉽게 접할 수 있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사실 나 역시도 그런 독자였다. '빈 서판'이나 '언어본능' '이웃집 살인마' 같은 책들을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존재를 모른채 접했던 것이다. 물론 빈 서판 같은 경우는 진화심리학의 고전과도 같은 책이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도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을 모를 수 있다는게 나조차도 신기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 '양육과 본성'의 문제 때문에 이 책을 읽었다.) 어쨌든 그렇게 빈 독서를 한 결과로 많은 오해과 몰이해가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계획적인 독서는 중요하다. 서가를 쭉 살펴보다 제목을 보고 한 권 뽑아드는 것의 가치를 폄하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 상태에서 전중환 교수님의 '오래된 연장통'의 첫장을 읽는 순간, '아하' 하는 생각(깨달음이라고 해도 좋을까)이 들었다. 내가 채 읽지 못하거나 읽고도 단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그 책들이, 심지어 기억속에서 따로따로 편재되어 있던 그 책들이 한 줄로 늘어서는 순간이었다. 사실 나는 입문서 스타일의 가벼운 교양 서적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근 몇년간 그러한 선호가 일종의 오만이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오래된 연장통' 역시 내 자기반성을 깊게 해 준 책이었고.

 

책은 얇고, 가볍고, 에피소드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볍게 읽기 좋다. 커피숍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나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릴때나,  아니면  대중교통 수단에서도 시간 때우기 위해 읽기 제격이다. 칼럼을 모았다고 하던데 그래서인가 다루는 소재도 다양하고 여러모로 구미가 당기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는 것은 (나도 그러한 '강력추천'을 받아 읽었다) 가볍게 읽을만하면서도 진화심리학에 입문하기엔 손색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진화심리학 전공자도 아니고 심리학에 대해서도 거의 무지하기 때문에 평가할 주제는 되지 않으나, 감히 나와 같이 심리학을 교양이나 흥미 차원에서 접근하는 독자들에게는 진화심리학으로 이르는 매우 적절한 입구와 같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교수님의 썰렁한 유머는 차치하고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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