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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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미조 세이시의 또 하나의 걸작 <악마의 공놀이 노래>가 번역되어 나왔다. 근년에 발간된 책으로는 <혼징살인사건>(나비부인 살인사건이 합본되어 있다) <옥문도> <팔묘촌>에 이어 네번째. 아마 요코미조 세이시나 긴다이치 코우스케 시리즈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몇번이나 일본에서 영화화,드라마화 되었던 그의 다른 작품들도 접해 보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본 것은 근래 SMAP의 맴버인 이나가키 고로가 킨다이치 탐정으로 분한 <팔묘촌> <여왕벌>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그리고 곧 출간될 예정이라 하여 기다라고 있는 <이누가미의 일족> 등이었다. 

비록 책으로 접한 것은 세 편이요(나비부인 살인사건은 긴다이치 탐정 시리즈가 아니다) 드라마로 본 것까지 하면 일곱편 정도를 접했을 뿐이이지만, 각각의 편들은 어쩐지 저마다 조금씩 닮은 부분이 있다. 접한 작품이 적고 읽은 것은 더 적으니 감히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월드'라고 말할 주제는 되지 않지만, 그래도 긴다이치 시리즈하면 어떤 이미지 하나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비가 내리기 직전의 하늘처럼, 무겁고 가라앉아 있으며 어두침침한 무엇이다. 마치 지금쯤의 날씨와 같다.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하며, 상쾌하지 못하다. 어서 비가 내리든지 날이 개든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될 때처럼 어쩐지 막막한 불쾌감이 스며있는 듯하다. ‘음습함’ - 딱 그런 단어가 어울리는 분위기이다.

시리즈 내내 느껴지는 이러한 음습한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또 한편의 긴다이치 코우스케 시리즈를 읽자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사실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책 속에서도 '옥문도 사건이 생각난다'고 몇 번이나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세이시의 다른 작품들과 닮았다. 사실상 폐쇄되다시피 한 배경,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들을 공유하고 있는 내부자들, 그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 외부자인 긴다이치는 옥문도에서처럼 갇히든 <악마의 공놀이 노래>의 배경인 귀수촌에서처럼 은근히 기대를 모으든 간에 사건 당사자들과의 사이에 맹장지 문을 하나 둔 것 같이 어딘지 모르게 나뉜 느낌이다. <옥문도>의 하이쿠, <팔묘촌>의 마을전설에서처럼 <악마의 공놀이 노래>에서는 공놀이 노래라는 일본풍 소재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 역시 비슷한 점이다. 그러나 배경, 인물, 소재가 닮았다는 것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하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장면 하나를 부득이하게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것은 여든 살 노파 이오코가 긴다이치들에게 공놀이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이었는데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라던가 그 때 노파의 태도 같은 것, 그리고 그일에 대해 긴다이치가 나중에 설명한 내용이야말로 이러한 음습한 분위기의 원인을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악’ 이다. 적극적이거나 공격적이거나 무시무시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 숨겨져 있고 감춰져 있고 소극적인 태도를 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 바닥에 머물고 있다가 그 썩은 내를 피워 올리는 종류의 그런 악 말이다. 악의 근원은 아주 오래전에 어떠한 불행한 사건, 무도한 인물이 저지른 일들로부터 시작된다. 옥문도, 팔묘촌,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인 귀수촌 까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 폐쇄되어 있고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권세라던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여전히 남아있는 신분의 차이 같은 봉건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 마을에서 과거의 사건이 불러온 악이 흩어지지도 흐릿해지지도 잊혀지지도 않고 살아남아 연쇄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예전에 옥문도를 읽고 ‘마음의 감옥’이라는 표현을 써서 감상을 남겼었는데 그것은 이 작품에서 역시 유효하다. 감옥 같은 그 곳에서 직접적인 범인은 한 사람일 지도 모르겠으나, 누가 살인자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마다 인물들은 언뜻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비수를 드러냄으로서 독자들에게 서늘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소설들은 꽉 조여진 트릭과 논리로 중무장한 탐정의 해결, 혹은 재빠른 탐정이 선사하는 서스펜스로 독자들을 경악케 하는 편은 아니다. 도리어 흐느적흐느적 나타나 ‘범인을 알고 있었다’와 ‘이렇게 될 줄은…’이라 중얼거리는 ‘사람 죽이는 탐정’ 긴다이치의 태도나 중요한 사실들이 마지막 순간에 ‘뿅’하고 제시된다던가 하는 방식이 어딘지 모르게 공정치 못하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런 면에서 긴다이치 코우스케 시리즈는 탐정 활극으로도, 한 편의 흥미진진한 게임으로도 어쩌면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기계적인 트릭이나 범인의 심리에 관한 탐정의 섣부른 연설보다도 더 흥미진진한 것이 이 시리즈에는 있다. 왜, 어떻게, 누가 살인을 했는가? 요코미조 세이시는 답한다. 살인은 인간과 환경이 만들어낸 불협화음 같은 것이라고. 범인을 무조건 비난 할 수도 없지만, 무조건 동정할 수도 없고, 범인과 대비되는 눈처럼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들도 없다. 이 소설에서 변을 당하는 사람들은 안타까운 희생양들이고, 그것이 특히 마음 아프지만 말이다. 이처럼 긴다이치 시리즈는 작가와 독자간의 게임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만들고 독자가 공감하는 거대한 비극이다. 그리고 눈처럼 흰 비듬과 순결한 마음을 가진 긴다이치 코우스케가 사람을 그렇제 죽여대면서도 매력적인 것은 비극을 바라보는 그, 나아가 요코미조 세이시의 측은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시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요코미조 세이시라는 한 거장의 깊이이며, 이야기를 단순한 신파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힘이 아닐까 한다.

아니 이런저런 설명들은 다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독자를 끊임없이 자극시키고 따라갈 수 밖에 없이 만드는 소설 자체의 재미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임을 읽는 이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개인적으로 과연 이름난 작품은 무언가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탐정 긴다이치 코우스케의 손자를 뛰어넘는 ‘위험함’과 나사 풀린 듯한 매력 역시 잘 드러나 있다. 어쨌든 백 가지 리뷰가 소설 한 권보다 못한 건 만고불변의 진리 아닌가. ‘웰컴 투 요코미조 월드!’ 좋은 독서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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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ca 2007-07-2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눈처럼 흰 비듬과 순결한 마음. 리뷰 정말 잘 읽었습니다.

투명고냥이 2007-07-24 19: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좋은 책 계속 부탁드립니다. 이누가미의 일족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