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의 한양진경 - 북악에 올라 청계천 오간수문 바라보다, 보급판
최완수 지음 / 동아일보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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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서양을 통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술가는 겸재 정선이다. 리움에서 인왕재색도를 봤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유연하면서 박력이 넘치고, 깊고 그윽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풍경화에도 산수에도 별 취미가 없는 나이지만, 유독 겸재의 그림 앞에서는 넋을 잃게 된다. 공부를 하지 않아 한국화나 산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 더 근사한 설은 풀지 못하지만, 빨려들 것 같은 그 느낌만은 어느 그림에서도, 심지어 그림의 기로 치면 둘째가면 서러울 반 고흐나 고야의 그림에서도 느껴보질 못했다. 윗새오름에 올라갔을 때 늪지를 지나 펼쳐진 고원평원을 마주했던 그 느낌, 그 느낌이 겸재의 그림엔 있다.

 

이 책은 겸재가 그린 한양진경을 설명한 그림이다. 요즈음의 지명과 위치가 지도에 나와 있으니 서울을 잘 아는 사람이면 그편으로도 상당히 재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동소문 즈음, 보문동과 창신동에서 자랐다. 물론 겸재의 그림으로는 내가 자랐던 그 곳을 추억하기 어렵다. 너무나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몇백년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수도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 역사 만큼이나 많은 부침을 겪은 지금 서울의 모습과 겸재의 그림 속 서울은 길잡이가 있다해도 같은 곳이라고 보기 힘들다. 세월은 무참할 정도로 무심하다는 것을 마치 꿈속의 지명과 같은 서울의 그림들 속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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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비밀 - 호크니가 파헤친 거장들의 비법
데이비드 호크니 지음, 남경태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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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데이비드 호크니는 특히 사진을 이용한 꼴라주 작업과 인위적으로 화면에서 깊이와 시선을 배제한 회화작품등으로 유명한 우리시대의 화가이다. 그는 1960년대 영국 팝아트계열에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특히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탐구하며 나아가 '그리는 행위'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David Hockney, Merced River, Yosemite Valley, 1982. (1992)


예술가의 초상 (1971)

그런 데이비드 호크니가 쓴 책 '명화의 비밀'은 우연찮게도, 아니 역시나, 회화의 역사중에 베르메르 같은 화가들이 보조적으로 채택하였다고 알려진 광학적 기구들의 도움이 좀 더 폭넓게 있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특히 현대인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정밀한 묘사들에 있어서 말이다. 호크니가 주장하듯이 실제로 어느 순간에 있어 그림 그리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이나 시대의 차이라 믿어졌지만, 호크니는 그것은 기술의 차이였다고 말한다.그리고 사진이 등장하면서, 정밀묘사의 가치는 떨어지고 인상파 야수파등 현실을 화가의 눈으로 해석한 그림들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의 그림들은 기구를 이용한 모사이다-이것은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이 주장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비평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 생각난다.

호크니는 그것을 문헌적 증거보다는 특히 명화의 분석 그리고 자신이 화가라는 방법을 십분 이용한 재현으로 증명해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백마디 말보다 한 번 맛보기가 더 낫겠으나, 기술문제로(;;;) 해당 부분을 첨부하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몇몇 분이 이미 그 부분을 알라딘에나 블로그에 올려놓으신 것 같으니, 찾아보면 될 것 같다. 어쨌든 책에 나온 앵그르의 드로잉, 비율이 이상한 그림들, 왼손잡이 모델,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한 실제 드로잉 장면들은 무척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호크니는 이것을 '단순한 모사'라던가 '사기'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호크니는 그들이 광학적 도구의 도움을 받았을지라도 색상을 쓰는 방법이라던가 그림에 스민 대상에 대한 이해와 깊이, 개성은 화가들 고유의 것이라 말한다. 나는 그것에 크게 수긍한다. 호크니에게 처음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앵그르와 실제로 도구를 이용한 증거가 남아있는 베르메르의 그림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니까. 그리고 어떠한 잘못된 신비나 미신보다는 정확한 이해와 분석이 결국은 그 가치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감상의 깊이 그리고 작품을 대할 때의 감동을 더 해 준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옳은 소리가 아닌가. 

그러므로 이 책이 주장하는 바가 분명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것을 너무 충격으로 받아들여 낙담할 필요는 없다. 가설 자체에만 집중해본다면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우며 어느정도 타당하다 생각하지만, 나는 전문가나 전공자도 아니고 사실은 그림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이에 가까우므로 단순히 혹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전문가들도 새로운, 흥미로운 가설과 그림을 읽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받는다는 점에서는 한 번 읽어볼만한 그리고 생각해 볼 만한 책과 주장이라 생각한다. 그림도 많으니 재미도 있다.

다만, 문제는 한 번 읽어보기엔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 책의 크기나 두께도 무기용으로 써도 손색이 없다. 그림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하여 증거를 제시하는 책이니 책이 이렇게 비싼 것도 이해는 간다. ...곤란한 점이 아닐 수 없다.

덧 ; 표지에 나온 그림은 데이비드 호크니가 실제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 스케치를 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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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 / 학고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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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 그림 '읽어주는' 손가락이 아니다. '보여주는'이라는 단어의 선택에 저자가 얼마만큼의 의도와 생각을 가졌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보여준다'라는 제목이야 말로 이 책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읽어주는'이 아니라.

 

'본다'는 '읽는다'라는 행위에 비해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느낌을 준다. 후자가 '해석'의 의미라면 전자는 '감상'에 가깝다. '본다-감상'과 '읽는다-해석'에 대한 나의 생각은 편견일 수도 있고 어쨌든 간에 거칠고 지나치게 단순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 있어서만큼은 '본다'라는 단어에 대한 스스로의 덜 된 생각에 촛점을 맞추고 싶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책은 미술에 관한 교양 서적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에 가깝고, 따라서 일반인에게 (대체로 서양)미술의 도상학적 의미를 쉽게 풀어 설명한다는 목적보다는 그림을 발판으로 삼아 좀 더 감성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려고 하고 있다. 물론 블로그에서 책으로 옮겨지면서 뒷부분에 새로 덧붙여진 듯한 한 페이지 정도의 텍스트는 기존의 미술 교양서적의 그것과 비스무레한 효과를 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본편에 넘실거리는 혹은 격렬하게 파도쳐 오는 듯한 감성적인 내용들에 뭍혀 보이지 않는다. 그 점이 이 책을 '미술 교양서'로 생각하고 접한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감성적인 내용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독자 개인적으로 강하게 공감하여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하다. 그러니 코드가 맞지 않는 분께는 실망스러운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도는 훌륭하다. 도상학은 사실 암호해독과 같이 흥미진진하지만 무척 이성적인 두뇌와 믾은 주변지식들을 요하는 것으로 때문에 접하기 쉽지 않고 자칫 잘못하면 그림 보는 재미를 앗아갈 수도 있다. 그것을 보충하는 것은 미술이 주는 감성적인 부분들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색채나 형태의 아름다움, 혹은 때때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너무 어렵기만 한 '미적인 가치'에 관한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의 일상에 파고드는, 그리고 마음을 직접 두드리는 부분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문자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열린 해석이 가능하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대표적 작품인 뭉크의 절규를 보면서 우리는 작가 뭉크의 정신병력과 굴곡 많았던 삶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 자신의 갑갑하고 답답한 그래서 절규하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후자는 결코 전자에 비해 가치 없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구했던 감상자와의 소통은 자신의 사적인 생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부분에 대한 공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림 감상의 그와 같은 면에 중심을 두고 있다.

 

물론, 그림을 소개하는 방식이라든가 풀어낸 이야기들이 다소 거칠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사적이어서, 이 책 뒷부분에 가서는 저자의 삶이라던가 감정 상태가 여과없이 다가오는 바람에 혼란스럽다. 사실, 저자가 좀 걱정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굳이 카테고리를 나눈다면, '예술'이 아니라 '에세이'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내가 조금은 저자가 그림을 풀어놓으면서 쏟아낸 말들에 (특히 후반부의 '우울함'에 대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그림책이 아니라 그림이 있는 에세이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십대 중-후반의 우울함이라는 것은 출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터널 속을 달려갈 때의 막막함과 닮아 있다. 철이 들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반대로 자신이 꿈꿔왔던 것을 하나씩 현실에 빼앗긴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어느날 돌아본 나 자신은 내가 생각했던 내 자신과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어, 낯설고 두렵기만 하다. 영원히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타인보다 더 낯설고 두려운 자신을 만난다는 경험. 그런 우울함이 이 책의 후반부엔 가득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후반부가 좀 더 자제되었다면 하는 생각을 숨길 수가 없다. 아무리 이 책을 에세이로 생각하며 본다 한들, 소개된 그림의 이미지 대신 저자 마음속의 어두운 그림들만이 뇌리에 남는다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을 들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모태가 된 김치샐러드님의 블로그를 접함이 없이 이 책을 집어들었을 사람들 중의 많은 부류가 원하는 일도 아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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