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추천도서를 올려야만 하는 시간이 왔다. 한 분야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정해볼까, 아니면 예전처럼 '밀어드리기 특집'이나 해볼까, 아니면 될 가능성이 높은 책들로만 골라볼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보니 머리가 복잡해져서 다른 분들의 추천 도서만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참...다른 서평단 분들의 추천도서를 읽다보니, 다들 정성스럽게 추천의 변을 올려주셔서 이 책을 보면 이 책이 좋아보이고, 저 책을 보면 저 책이 좋아보이고, 올리신 책들 중에 어떤 책이 되어도 다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러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물론 원점이란 결국 (책이 선정될 가능성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읽고 싶은 책들을 고르는 것이다. 서평단을 하기로 한 목적이 예술 분야나 과학 분야의 책들을 읽어보자는 생각이었으므로 그 분야에서 몇 권의 책들을 골라본다.

 

 

 

빅 아카이브 / 스벤 스피커 / 홍디자인

 

'아카이브'라는 것은 결국 시간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아카이브라고 하면 통상 지루한 문서들의 저장, 단조로운 목록들, 단지 기록으로서의 가치 같은 것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 그 아카이브를 창조의 원천으로 활용한 예술가들이 있다. 그러므로 아카이브는 20세기 예술에서 시간의 집적을 넘어서, 새로운 시간의 창조에까지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록의 집적이라는 19세기의 아카이브는 이제 그것을 읽는 우리까지 기록하는 거대한 '빅 아카이브'가 되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카이브를 만들었지만, 이제 아카이브가 우리를 만든다.

 

 

위대한 수학문제들 / 이언 스튜어트 / 반니

 

페르마의 정리, 푸앵카레 추측, 리만 가설, 4색 정리...지나가다가 혹시 들어본 적이 있을 법한 수학의 대표적인 난제들이 있다. 대체로 난제들일수록 문제 자체는 명확하고 간결한 경우가 많으며, 의외로 답이 간단할 듯한 인상을 준다(물론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 이러한 문제들을 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그저 수학자들의 단순한 지적 게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여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책이 있다. 한 가지 난제의 해결은 단순히 수학자들의 만족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크게 바꿔 놓을 수도 있다.

 

 

사진 예술의 풍경들 / 진동선 / 문예중앙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사진은 회화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또는 우려를 받았고,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사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시각예술로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책은 사진이 발명된 초창기의 근대 사진부터 지금까지 현대미술로서의 사진의 역사를 주요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며 일별하는 책이다. 모든 예술에서 결국 혜안을 기르는 것은 그 분야의 좋은 작품들을 수없이 맛보는 것이다. 바르트가 말한 지각과 기호와 이미지의 혜안을 조금이라도 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현실을 상상하다 / 케빈 맥도날드, 마크 커즌스 / 커뮤니케이션북스

 

지금의 우리는 수많은 다큐멘터리에 둘러쌓여 있다. 이제 TV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다큐멘터리의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나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사건을 재연하는 시사 프로그램, 리얼리티 쇼, 생활밀착형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 중요한 스포츠 경기의 재구성 등등 이제 보도나 오락, 스포츠 프로그램에서도 다큐멘터리의 요소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카메라가 발명된 거의 초기의 다큐부터 비교적 최근의 작품들까지 중요한 작품들을 골라 평론과 인터뷰 등을 통해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를 통해서 현실을 새롭게 상상하도록 만드는 다큐멘터리의 힘과 그 위험, 그리고 앞으로서의 가능성을 동시에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 없는 우주 / 빅터 J. 스텐저 / 바다출판사

 

진화학적 관점에서 지적설계론의 허구를 살펴본 다른 책들과 다르게, 이 책은 천체물리학자가 물리학적 관점에서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책이다. 이 천체물리학자가 사용한 방법은 '우주에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상정하고, 그 가설을 입증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그 가설이 어떻게 되었는지의 여부는 책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입증의 과정에서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물론 믿음은 앎보다 늘 우선하므로, 여전히 논란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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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스토커>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몇 가지는 남겨두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박찬욱의 영화 <박쥐>와 <스토커>에 대한 리뷰는 이미 쓴 적이 있지만, 연작의 선상에서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자투리들 몇 가지를 간단하게 남겨본다.

 

 

1.

<박쥐>에서 인물들은, 그리고 사건들은 계속 반복되는 구조, 혹은 일종의 순환(악순환)의 구조에 놓여져 있다. 먼저 이 이야기들의 전제로서 혹은 하나의 비유로서 영화에 등장하는 바이러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부 상현(송강호)의 몸 속에서 바이러스들은 돌고돈다. 상현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나, 그만큼 치명적인 위험 또한 가지고 있는 이브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실험에 자원한다. 그러나 그 댓가로 죽음을 맞을 위험에 처한다. 그 순간에 그를 살려내는 것은 수혈 과정에서 그의 몸 속에 주입된 뱀파이어 바이러스다. 즉 상현의 몸 안에는 두 가지의 바이러스가 공존한다. 이브 바이러스와 뱀파이어 바이러스. 이브가 그의 몸을 더 지배한다면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가까이 갈 것이고, 뱀파이어가 그의 몸을 더 지배한다면 그는 죽지는 않겠으나 인간의 피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즉 상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져 있다. 신부로서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다다른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에서 두 가지의 극단 안에서 왔다갔다 하며 내내 괴로워한다. 그는 죽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뱀파이어라는 괴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이상한 딜레마에 처해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비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상현이 이브 바이러스를 스스로 몸 속에 주입한 것은 전적으로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가 얻은 것은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게 된다는 악이다. 즉 상현은, 아니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몸에 지니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존재이다. 악이, 즉 뱀파이어 바이러스가 그를 더 지배한다면 그는 악해질 것이며, 선이, 즉 이브 바이러스가 그를 더 지배한다면 그는 더 선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 속에서 일종의 비유로서 보여지듯이 그렇게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이 더 몸을 지배하도록 한다면, 즉 다시 말해서 이브 바이러스가 몸을 더 지배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며, 죽음에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이름이 '이브'이고 이것이 젊은 남성들에게만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정된 것은 박찬욱의 유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이브'는 남성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나, 그것이 곧 위해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영화 속 태주(김옥빈)처럼 말이다.) 즉 선해지기 위해서는 댓가가 따른다. 악의 길은 늘 더 쉬우며, 늘 더 가까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악행에 댓가가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 중에 하나는 죄책감과 같은 댓가다.

 

그래서 대체로 (상당히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들은 선행과 악행 속에서 적당히 왔다갔다 한다. 마치 '박쥐'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박쥐는 이중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솝 우화의 박쥐일 수도 있고, 뱀파이어의 비유로서의 박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완전한 선의 무리에도 그리고 동시에 완전한 악의 무리에도 낄 수가 없다. 그 중간 어디에서 끊임없이 양쪽에 왔다갔다 하여야 하는 일종의 순환 지옥에 우리는 놓여져 있다. 그것을 영화의 영어제목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thirst, 즉 목마름이라는 것은 결국 결핍의 상태이며, 그것은 뱀파이어의 혹은 인간의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뱀파이어 상현은 목이 말라서 끊임없이 피(욕망)를 갈구하지만, 그는 피라는 욕망, 혹은 태주라는 욕망을 충족하고 나면 다시 일시적으로 죄책감에 빠져 그것을 멀리한다. 그러나 그것을 멀리하는 것을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고, 그를 목마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영화 속에서 계속 반복(악순환)되며, 그것은 보통의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이는 직관적인 장면으로 보여지기도 하는데, 상현은 태주를 죽이려 하고, 죽어가는 태주에게 순간적으로 욕망을 느낀 상현은 그녀의 피를 마신다. 그러나 일시적인 목마름이 충족된 상현은 다시 죄책감이 들어 태주를 (뱀파이어를 만드는 것으로) 살리려 하고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다시 상현의 피를 마신다. 즉 상현과 태주의 피는 돌고돈다.) 그리고 이 '목마름-악행-죄책감-악행을 멀리함-고통-목마름'이라는 순환은 계속 반복된다. 마치 그의 이름 '현상현'처럼 말이다.

 

2.

이 돌고 도는 것은 박찬욱의 전작들에서 계속 이야기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복수의 등가교환이라는 환상으로서 말이다. 계속 이야기했지만,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등가교환을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박찬욱의 전작들이 보여주듯이 완전한 등가교환은 존재하지 않고 늘 추가적인 무엇인가를 남긴다. 그러므로 복수라는 것이 등가교환의 형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복수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등가교환으로서의 복수는 계속 무엇인가를 남기고, 그 남긴 무엇인가는 실물이 되어 다시 다음의 복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등가교환은 환상이나 정신병에 가깝고, 등가교환의 시도는 늘 잔여물들을 남기고, 대체로 그 잔여물들은 조금씩 조금씩 (대체로 오인과 오해를 담아) 확대되어 거대한 실물로서 박찬욱의 주인공들에게 되돌아왔다. 그 주인공들은 진짜 실물을 보기도 했고, 때로는 실물이라고 믿어지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그것은 이 영화 <박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태주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서 강우(신하균)의 살해를 감행한 상현과 태주는 이제 당연하게도 실물로서의 강우를 만난다. 기괴한 표정을 짓고 몸의 모든 구멍에서 물을 흘리는 강우를 말이다. 그렇다면 박찬욱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 잔여물들이 남긴 것, 즉 다음의 복수는 이어질까. 다시 말해서 그렇다면 이 영화를 결국 라여사(김해숙)에 의해 이루어지는 태주와 상현에 대한 복수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마지막 복수는 전작의 연작들과 상당히 양상이 다르다. 지금까지의 복수와는 달리 이 복수에서 라여사는 지켜볼 뿐, 결국 복수(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를 감행하는 것은 상현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현은 영화 속에서 두 번째 자살을 감행한다. 두 번째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그가 이브 바이러스를 이용한 실험에 참여하는 것은 순교를 가장한 자살이기 때문이다(이 연구를 담당하는 박사는 심리적으로 자살과 순교의 차이를 가려내는 것은 어려우며, 그가 자살의 방편으로 이 연구에의 참여를 자원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자살은 다르다. 처음이 순교를 가장한 자살이라면, 이 두 번째는 자살을 가장한 순교다. 그는 결국 돌고도는 복수, 혹은 고통스러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은 멈추는 것이다. 일종의 소멸이라는 형태로의 자살. 그는 자신이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될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교를 실행하기 전, 자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신도들을 일종의 거짓 퍼포먼스로 밀어낸다(선에서의 탈출). 그는 자신이 그저 선과 악에서 왔다갔다 하는 복수와 정념에 휘둘리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이것은 물론 상징으로서, 혹은 하나의 비유로서의 죽음이며,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어떻게든 애쓰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상현이 처한 딜레마라는 것은 그가 결국 애쓰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다 쉬운 길은 태주처럼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여 마음껏 욕망을 채우는 것이며, 이러한 인물들은 딜레마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애를 쓴다. 어떻게든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혹은 어떻게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그는 소멸의 길을 택한다. 즉 복수 연작의 인물들과 상현은 다르다. 복수 연작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그 결과 그들은 죽거나, 혹은 겨우 죽음을 면했지만 미치거나, 혹은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으나 영혼의 구원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아마도 상현은 그 육체를 기꺼이 소멸함으로써, 혹은 그 애씀의 댓가로서 영혼의 구원은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면 태주는 이렇게 말하는 인물이다.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나는 이렇게 말하는 영화 속 인물을 그 이후에 한 번 더 보았다. 홍상수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의 해원. 그래서 나는 해원이 조금 무서워졌다.)

 

이 마지막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들의 대단원이며, 결국 우리가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이 라여사의 강한 응시로 끝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장면은 우리가 영화라는 사각의 스크린을 보듯이, 라여사가 차창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때 박찬욱은 우리가 라여사의 위치에서 이들의 소멸을 지켜보기를 바란다.) 이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떻게든 애쓰는 그의 모습과 그들의 발에서 툭 떨어지는 두 켤레의 구두이다. (그 구두는 영화의 중반부 그들의 욕망을 매개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4.

그리고 그 다음 박찬욱은 할리우드로 건너가 구두 이후의 이야기, 구두를 신었던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가 결국 구두를 벗고 하이힐로 갈아신는 이야기인 <스토커>를 찍었다. 구두를 벗고 하이힐을 신는다는 것은 결국 이것이 성장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두에서 시작하여 결국 구두로 끝났던 <박쥐>의 루프가 아니라, 이 영화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영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형철은 <씨네21>에서 이 영화가 은유로서의 성장담임을 훌륭한 글로 잘 보여줬는데, 나도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형철이 말했듯이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은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논리가 없다. 은유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은유는 마지막에 하나의 장면으로서 보여지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인디아는 아버지의 벨트를 매고, 어머니의 블라우스를 입고, 삼촌이 준 하이힐을 신고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그녀는 영화 속에서 (하나의 은유로서) 아버지가 되어 보았다가, 삼촌이 되어 보았다가, 어머니가 되어 보았다가, 결국 그 모든 것의 혼합으로서 자신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성장하는 이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성장하는 이들은 타인이 되어 보면서 조금씩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예전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인물들은 타인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였고, 타인과의 공감에 이를 수 없었다. 그들은 성장하지 못했고, 여전히 과거의 어느 순간에 발목이 붙잡힌 올드보이들이었다. 그것은 다른 부분에서 살펴볼 수도 있는데, 인디아가 성장이 가능한 인물이라는 것은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시 반복하자면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에서 인물들은 타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신하균)는 청각장애인이었으며,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는 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말만 하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 결과 <올드보이>에서는 혀를 잘리는 징벌을 받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은 입이 꽁꽁 틀어막힌 채로, 자신에 대한 죽음을 놓고 벌이는 격정적인 토론을 들어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인디아는 다르다. 인디아는 들을 뿐더러, 심지어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까지' 듣는다(그리고 그것은 <박쥐>의 상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아주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하게 타인이 되어 볼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교차편집의 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의 교차편집이 인디아와 다른 인물을 동일하게 놓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이 때 인디아는 '영화적으로도' 그 순간 그 인물이 되어보는 중이다.)

 

지금까지 놓고 보면 박찬욱의 <스토커>는 할리우드라는 '새로움'과 동시에 이야기로도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찬욱의 길고 긴 복수의 이야기는 상현의 소멸과 함께 막을 내렸고, 이제 박찬욱은 그것을 뒤로 하고, 새롭게 성장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5.

여담으로서 하나 붙여두자면 오우삼의 비둘기와 같은 것이 박찬욱에게는 계단인 것 같다. 박찬욱의 영화들에서 이야기에 계단을 활용하는 것과 그것을 촬영하는 방식이 전체적으로 꽤 흥미롭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자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처음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만나는 공사장 건물의 비계(飛階)처럼 보이는 빈 계단과 그것을 역광으로 잡는 숏과 같은 부분, <올드보이>에서 독특하게 생긴 회상 장면에서의 학교 계단과 카메라의 움직임(동선),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가 오르는 나선형의 아파트 계단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 <박쥐>에서 상현과 태주가 하늘을 날기 위해 오르는 계단을 건물 외부에서 창을 통해 보여주는 것, 그리고 <스토커>에서 인디아의 집에 있는 나선형 계단. 특히 <스토커>는 계단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계단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그 계단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인디아와 다른 인물들의 모습이 그녀와 여러 인물들간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게 해준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계단의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덧.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뭔가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 같아서 블로그에 올 때마다 내심 찜찜했는데, 이제 왠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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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10-1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제가 궁금해했어요(진짜에요!). 맥거핀님 글은 리뷰든 페이퍼든 뭔가 명확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해요. 이게 글을 잘 쓴다는 거겠죠? (전 중언부언, 어불성설의 일인자..)

전 <박쥐>가 박찬욱 감독 영화 중 가장 기묘한 영화라는 생각을 했었고(공포나 경악이 아니라 뭔가 이상한, 기묘한) 그러나 에밀 졸라의 원안이 미친듯이 좋았기에 영화에 대해 약간의 냉소가 있었거든요. 그렇군요. 상현이 태주에게 구두를 신겨주는 장면이 이 영화 중 가장 기억나는 장면인데도 그게 인디아와 이어진다는 생각은 미처 안 해봤어요. 좋군요, 마무리 지은 글까지 보니까, 덩달아 좋네요 :)

맥거핀 2013-10-14 15:20   좋아요 0 | URL
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온다고 말할 수는 있어요. 상현이라는 캐릭터 말이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도 어떻게든 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 좋아요. 영화 중에, 내가 사람 안 죽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알아?,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 대사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왔어요. 순간순간 괴물 같은 송강호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이도 하구요.

구두가 발에서 툭 굴러떨어질 때도 말이죠. 사실 말이 안되는 장면인데(그거 하나만 불타지 않고 굴러떨어진다는 건..), 그거를 박찬욱 감독은 일부러 넣거든요. 구두로 흥한자 구두로 망한다, 뭐 그런거죠. 아니면 적어도 그 구두는 불태우지 않고 남겨둬야한다는 마음이랄까요. 박찬욱 감독은 마지막까지 우리가 무엇을 지켜보도록 만듭니다. 냉소하면서도 서늘해지게 만들지요. 박찬욱 감독한테 바라는 거는 딱 한가지 자주 좀 만드세요, 이게 제일 커요.

제가 볼 때는 Shining님은 엄살의 일인자입니다.ㅋ

네오 2013-10-2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입니다..그런데 요새 와서 생각이 든건데 박찬욱이 맥거핀님의 평론의미를 담은 그대로 영화를 만들었을까라는 의심은 드네요,,사실, 포스트 봉준호-박찬욱-홍상수가 나오지 않는 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참 궁금한데요,,분면 박찬욱이 위에 열거한 의미를 다 담은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 후학은 그것을 배우고 또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텐데 ,지금 그런말한 감독이 있나요? 굉장히 회의적입니다만,,저는 그래서 아예 해외로 눈을 돌려 영화를 찾고 있어요,,국내는 아예 포기하고요ㅠㅜ

맥거핀 2013-10-28 13:43   좋아요 0 | URL
사실 감독의 본래 의도란 이런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글들은 다 실패하는 것이기는 하죠. 그렇게 한 가지로 귀결되는 영화는 결국 좋은 영화가 아닐 것이구요. 뭐 이 글도 가능한 수많은 상상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요즘의 한국영화들이 지리멸렬한 수준이라는 것은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특히 '메이저' 영화들 말이죠. 말씀하신 그 이름들 이후에 이렇다할 만한 감독이 별로 눈에 띄지가 않아요. 인디 쪽에서 재능을 보여줬던 감독도 메이저 데뷔 이후에는 이상할 정도로 영화가 힘이 없어져 버리고 마니, 재능의 문제라기 보다는 시스템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얼마전에 <관상>을 보았는데, 영화가 아무런 특색이 없어서 이거 누구 영화야 하고 보았더니, 한재림 감독의 영화더군요. 우아한 세계,까지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는데, 왜 어쩌다가...싶기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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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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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 박사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기만(속이는 것)과 자기기만(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가정에서, 남녀관계에서, 사회적인 관계들 하에서,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서, 보다 큰 국가적인 영역에서, 종교에서, 혹은 사회과학 분야와 같은 학문 영역에서 그러하다. 특히 비행기 사고나 챌린저호 폭발과 같은 거대한 항공 우주 재난이나 전쟁과 같은 부분에서 이러한 기만과 자기기만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저자는 챌린저호 폭발에서 나타난 NASA의 경우, 미국의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과 같은 여러 예를 통해 그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자기기만은 기만에서 출발하고 있고, 기만이 하나의 개체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러한 기만은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라 인간 외의 거의 모든 종이 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낳아, 그 새가 기르도록 하는 탁란과 같은 것이나, 암컷을 흉내내 수컷 옆에 자리잡고 있다가 진짜 암컷이 오면 재빨리 그 암컷과 먼저 교미를 해버리는 의사(疑似) 암컷(그러니까 사실은 수컷), 혹은 자신의 몸짓을 더 커보이게 하거나 색깔을 바꿈으로서 위장하는 것,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 죽은 척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 등등도 모두 기만이며, 이러한 기만의 형태는 한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체 내부에서 자기기만의 형태로 나타난다. 

즉 인간은 다른 인간을 속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다른 동물들도 자기기만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저는 그것이 제 알이 아니라고 제 자신마저도 속였답니다."라고 울먹이며 고백하는 뻐꾸기가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의 양상은 예를 들어 자기(의 능력 혹은 외모 등등)를 부풀리거나 과신하는 것, 남을 폄하하는 것, 내집단 구성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내집단 사람들이 더 뛰어나다고 믿는 것(한글의 우수성!), 자신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통제할 수 있다 혹은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것(저번 주에는 로또 번호 1이 나왔으니 이번 주에는 나올/안나올 거야), 편향된 사회이론을 구축하거나 거짓된 개인 서사 혹은 집단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자신의 긍정적인 행동만을 기억하는 것) 등등의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기만은 대체로 일시적으로는 어떤 위안이나 이득을 그 자기기만을 행하는 개체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전쟁이나 국가적 자기기만 서사의 위험성을 일일이 설파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예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로또 번호를 면밀히 분석하여 이번 주에는 반드시 로또가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주 동안은 행복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다음 주에 다시 새로운 분석기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고, 다음 주에는 분노에 휩싸여 더욱 많은 로또를 구매할 것이고, 더욱 많은 소주를 소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마도 자신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더욱 높은 자기기만을 왜 행하는 것일까? 저자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진화적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고 종합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자기기만을 하는 것은 내 어떤 의식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 무의식이 혹은 내 유전자가 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의 극단적인 예가 남녀관계, 섹스에 얽힌 문제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남녀관계, 부부문제에서의 수많은 자기기만이 이것에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은 섹스를 하기 위해서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거짓 감정(자기기만)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두말할 여지도 없다. (아..얼마나 많은 수많은 여자들이 "너를 사랑해."라는 말에 속아 침대로 기꺼이 따라 들어갔던가. 물론 이것은 여자만 속이는 것은 아니며, 남성들 자신들도 실제로 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또한 여성은 배란기에 전반적으로 성적으로 활기를 띠며, 배란기에는 노출이 더 잦아진다. 또한 배란기에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유전적 자질을 지닌 남성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진화적으로' 개체에 이익을 준다.) 물론 이것은 수많은 자기기만들 중에 일부에 불과하며, 의식적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음..배란일이니까 조금 더 파진 옷을 입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즉 이것은 유전자가 시켜서(이기적 유전자) 하는 것이며, 그것의 상당 부분은 그 개체의 유지, 진화와 관련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이러한 대목들에서 스즈키 코지의 <링> 시리즈가 생각났는데, 결국 비디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자체의 번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디오는 이후 다른 형태로 진화해나갔다. <링> 시리즈는 공포물이 아니라 아마도 진화생물학적 과학 영화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즉 그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적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결국 우리는 그 자기기만들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14장의 제목은 '우리 삶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이다.) 그것의 이유를 저자가 마지막에 이야기한 간단하고 개인적인 이유, 즉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던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즉 자기기만을 줄이려 애쓰는 것이 멸종으로 내몰릴 일이 없는 전략이기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책 전체를 놓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책의 나머지 전체에서 그러한 자기기만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는 계속 되풀이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승리를 과신하고, 상대방의 전력을 한껏 폄하한 상태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나(이것은 또한 전쟁이 결국 개체수를 줄이고 강한 개체만 남김으로써 진화에 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이상한 합리화와도 연관된다. 물론 이 말들이 추운 나라의 열차를 만들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신들이 마땅히 살아야할 곳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자기기만적인 논리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 대학살, 혹은 명확한 불안신호들을 애써 무시함으로써 죄없는 7명의 우주비행사의 생명을 앗아간 챌린저호의 비극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책의 수많은 예들은 자기기만의 논리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자기기만이 빚어낸 크고 작은 댓가(비용)들을 반복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한탄, 아..얼마나 수많은 여자들이 "오빠 믿지?"라는 말에 속아 모텔에 따라 들어갔던가. 그러나 비(희)극적인 건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도 그 믿을 수 없는 '오빠'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저자가 마지막에 애써 제시하는 자기기만과 싸우기 위한 전략들 -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는 생각 중인 행동을 피하라던가, 어떤 변수를 추정할 때는 처음 추정한 값에서 30%를 줄이라던가, 불편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미리 생각해 두라던가, 기도와 명상을 활용하라던가 등등의 - 이 영 미덥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맞서서 싸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이기는 한다. 물론 그 싸움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싸움일 것이 거의 분명하지만 말이다. (당신은 당신의 무의식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덧.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다 긍정적인 반응은 이런 '이 정도 썼으면 그래도 욕은 안 먹겠지'싶은 자기기만이 가득한 리뷰보다는 보다 곰곰이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자기기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일 터이다. 물론 저자가 "기만과 자기기만 연구의 한 가지 좋은 점은 사례가 부족할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이다."(p.524)라고 말한 것처럼 내가 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기기만은 15년 동안 사설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악행을 기록했던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노트 한 두 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한정하여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서만 생각해보면 사실 글을, 특히 이런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사실 일종의 지속적인 자기기만에 가깝다. 나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 혹은 내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 혹은 내가 조금 더 잘 떠들 수 있는 것을 자유롭게 취사선택하며, 사실은 내가 좋은 리뷰를 쓰고 있다고 자기기만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물론 자기기만은 분명히 '글'을 쓰는 아주 큰 동력을 제공해주기는 한다.) 이 책의 리뷰가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영화 리뷰 같은 어떤가. 영화 리뷰란 결국 자신이 보고자 하는 대로 영화를 보는 것이고, 쓰면 쓸수록 계속 그 자기기만을 강화하여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영화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편향된 창작물이며, 어차피 자기기만을 하는 것이 자신만족 뿐인데 무엇이 상관인가,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타인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9000원을 날리게 하거나, 2시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많은 것과 연관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차가운 혹은 뜨거운 반응은 감독의 창작 욕구를 저해시키거나 증진시킬 수도 있고, 혹은 영화에 대한 논쟁은 다른 방향으로의 논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

아니면 서평단의 경우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자기기만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서평단들은 각자 나름 몇 권의 책을 추천하고, 그 추천한 책들 중에서 한두 권이 선정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체로 본인이 추천한 책에는 리뷰 시에 더 좋은 별점(점수)을 주는 경향이 있다. 시험 삼아 지난 서평단에서 선정된 책 중 6권을 뽑아 그 책을 추천한 사람과 추천하지 않은 사람의 별점을 비교해 보는 잉여짓을 해봤다(이런 잉여짓은 LG 야구를 보면서 해야한다. 요즘 LG 야구는 열심히 보면 빡치고, 대충 보면 이기는 것 같다. 오늘도 이겼다. - 그리고 물론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자기기만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한다고 믿는 것). 예상대로 6권 중에 5권의 경우에 추천한 사람들의 별점평균이 추천하지 않은 사람의 별점평균보다 최소 0.3 이상 높았다(다른 한 권은 거의 같았다). 이것을 서평단의 자기기만이라고 부른다면, 이 자기기만은 내집단/외집단 문제와 관련된 것일 터이다. 즉 내가 추천한 책이니 이 책은 '내집단'이 되는 것이고, 더 좋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악영향을 미칠까.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책을 보는 안목을 더 떨어뜨릴 수 있고(사실상 안좋은 책인데, 본인이 좋은 책이라고 믿어버림으로써) 실제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게 함으로써 별 관심없던 타인에게 그 책을 구매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타인에게 그 책을 구매하게 한다는 것은 온라인 서점이나 출판사의 이익이며, 그것은 이 서평단을 계속 유지시킬 하나의 필요성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이 자기기만은 이 서평단이라는 '종'의 유지와 진화에 기여를 하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모든 자기기만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자기기만이기 때문에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할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이 책은 내가 추천한 책이 아니니 나는 상관이 없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대로 점수를 주겠다. (그러므로 내 별점은 신뢰할 만하다고 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기)기만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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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9-30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는 맥거핀님의 '내집단'인가봐요. 나머지 한 권이 이 책인줄 몰랐어요. 저자 식으로 세상을 읽으면 세상에는 기만 혹은 자기기만이 아닌 행동이 없고, 내 안에는 날 조종하는 아이언맨이 한 명 들어와있는 것 같아요. 저는 서평단이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긍정과 구입으로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일단 관심을 가진 한정의 사람에게 책정보를 조금 더 보태주는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겠죠? 세상에는 충동구매도 있으니.. 알고보면 저야말로 책을 충동구매할 때가 많아요. 사야지 벼르던 책은 다른 책인데, 그날 신문에서 본 리뷰가 떠올라 그걸 산다던가.. 물론 매체에 실린 명사들의 리뷰는 마케팅적이지만 독자리뷰까지 그런가 싶은 거죠.

종의 유지가 목표라면 전쟁이나 테러 말고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에 적힌 미래를 향한 화학적 생식력 제거가 차라리 인간적인 것 같아요. 버튼은 여기서 누르고 누가 어떻게 되는지는 자기 손을 떠난 것. 서서히 진행되는 종의 퇴화라면 반발도 덜할 것 같고..

사실은 정치적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데 단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자식을 낳고 또 그로인해 경제력은 채워질지 모르겠으나 다른 수많은 문제를 발생시키는 아프리카 부족의 이상한 종족유지본능이 어릴 때부터 비상식적이란 생각을 했었어요. 아마 제가 일단 아직은 제가 더 중요하고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죠. 확실히 오늘날의 어떤 태세들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말이에요.

맥거핀 2013-10-01 23:19   좋아요 0 | URL
책을 읽고 돌이켜보면 정말로 많은 자기기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자기기만에 대항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거죠. 그리고 자기기만이라는 결국 내가 모르는 나, 그러니까 무의식 같은 것이 행하는 거니까요. 자신의 무의식을 무슨 수로 이겨낸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아주 소극적인 대응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뭐 그렇죠. 알라딘에서의 활동들도 일종의 자기기만에 가깝기는 하죠. 가까운 이웃들의 글은 그만큼 오랫동안 봐왔으니 이야기가 더 잘 들어오기도 하고, 또 그만큼 잘 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어느 틈에 공감을 누르고 있지요. (물론 생각해보면 '공감'이라는 것이 결코 잘 썼다는 의미는 아니고, 말 그대로 '공감'한다는 것입니다만..'공감'한다는 것이 꼭 잘 썼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구요.)

아무튼 책은 흥미로운 편이었어요. 이론 중심이라기 보다는 사례 중심이라 읽기도 조금은 편한 쪽이었구요. 아참참 댓글 늦어서 미안해요. 근데 사실 요즘 솔직히 알라딘에 잘 안들어오게 되기는 하네요. 이상하게도.

Shining 2013-09-30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음...왜 책은 별로 재미 없어 보이는데 맥거핀님 리뷰는 이렇게 흥미진진한거죠?(아부 진짜 아니고요, 정말요_-) 우디 앨런의 영화 <블루 재즈민>을 며칠 전 보고 왔는데.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재스민이 떠오르네요. 자기가 속은 줄도 몰랐던 여자였는데, 실은 자기가 자기를 속인 여자. 자기가 자기를 속였다는 것도 속이거나 숨기는 여자.

서평단과 관련된 가설(?)은 저도 서평단 할 때마다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네요. 항상, 제가 원하던 책이 채택되길 바랐는데 막상 되고나면 왠지 책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이상한 논리. 그래서 먼저 나서서 까게(!!) 되거나 은근슬쩍 옹호하게 되는 스스로의 태도. 그러다 보니 차라리 남이 추천한 책이 되길 원했던 이중성 같은거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서 좋네요, 맥거핀님의 글은 :)

맥거핀 2013-10-01 23:19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제가 추천한 책이 안되는 쪽이 약간 아쉽기는 해도, 리뷰 쓸 때는 왠지 마음이 더 편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가설을 만들어 실험(?)을 해봤던 건데, 저도 결과가 솔직히 약간은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편향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인 걸까요? (그럼에도 저는 사실 이 서평단이라는 게 유지된다는 게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이게 책의 홍보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걸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사실 영화라는 것도 얼마나 자기기만이 작용하는 것인지요. 같은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나와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야기들, 숏과 씬들은 머리 속에서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렇게 아주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끌어내는 영화들이 사실은 더 좋은 영화일 때가 많지요. 자기기만은 영화를 보는 데에도, 혹은 만들어내는 데에도 필수적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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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폭력의 자유>는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의 모습을 시기별로 나누어 추적하고 있다. 저자 김종철 씨는 그 자신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1967년도에 처음 동아일보사의 기자로 들어가서 1975년 강제해직 당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의 옥고와 더불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여 1998년까지 논설간사 및 편집부위원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즉 그의 경력 자체가 권력의 개입과 굴종, 또한 그에 맞선 언론인의 양심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파란만장한 언론 현대사의 모습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만큼 그는 때로 이 책에서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960년 4월 혁명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겪었던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1975년에 있었던 동아일보사 기자 및 직원들의 강제해직 사건,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 1988년 국민 모금에 의한 한겨레신문의 창간 등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책의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띄는데, 먼저 하나는 책의 이야기가 ('네오'님도 지적하셨듯이) 1910년도 일본의 강제 조선 병합과 제국주의 일본의 소위 '문화정책'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강제병합 후 강력한 경찰력을 바탕으로 무단통치를 자행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문화통치'로 사실상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조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한 부분이 '합법적 언론'의 허용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김성수의 '동아일보', 예종석(후일 방응모)의 '조선일보', 민원식의 '시사신문' 등이었다. 즉 근대 언론의 시작에서 흔히 언급되는 서재필, 윤치호 등의 '독립신문'을 건너뛰고, 일제의 사실상의 간섭과 통제 하에서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아마도 특히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론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저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현재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포함한 한국의 근대 언론의 시작은 자유로운 의지의 탄생이 아닌, 사실상 관과 합작하여 탄생된 반쪽짜리 언론이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민족지였음을 자랑스레 내세우지만, 그것은 '일장기 말소사건' 등 일부의 경우 뿐이고(책에 따르면 이 역시도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거사일 뿐, 사주와 고위간부들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탄생부터 일제 말기까지 친일의 모습을 보인 '反 민족지'에 가까웠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밝히듯 한국언론의 역사를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역사가 결국 어디에 더 가까웠는지를 밝히는 것은 뒤를 굳이 읽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썩은 씨앗에서 올곧은 줄기가 나오기는 힘든 법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 정권 별로 챕터가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가 다른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시기인데, 책의 성격 및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 시기가 언론이 가장 큰 통제 및 고난을 겪었던 때였으며, 또 그에 따른 언론의 투쟁 역시도 가장 격심했던 때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기관원이 신문사 편집부에 상주하여 신문의 편집과 발간에 일일이 간섭을 하고, 동아일보사 및 여러 언론사에서의 대량 해직 및 그에 맞서는 기자들의 노조 창립과 복직 투쟁이 잇따르던 때였다. 또한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전례 없었던 방송사들에 대한 낙하산 사장들의 투입 및 마음에 안드는 언론인 솎아내기,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사 총파업 및 대 정권 투쟁이 불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권 시기에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거나 언론이 정부에 맞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정권 시기에도 여전히 언론과 정부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폭압적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부의 회유 및 간섭, 그에 따른 굴종이나 투쟁의 양상으로 또한 소위 진보정권 시기에는 보수언론과 정부의 대결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사주 및 구성원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줬으며, 또한 동시에 각 시기별로도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단지 대형 보수매체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으며, 소위 진보언론도 때로는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민중의 벗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적에 가까웠으며,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도 아직은 멀다.

 

물론 그것은 언론인이나 이 책이 타겟으로 하고 있는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이 조금 더 고민해야 할 문제고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몇몇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한 가지는 책이 너무 정치와 권력과의 상호작용적인 관점에서만 언론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다루는 모든 내용이 정치에 대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현대 언론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그에 따른 투쟁, 또는 각 정치 사안에 대한 여러 언론사의 반응들로만 채워지다 보니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이다. 전체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서 여러 다양한 시각에서 각 언론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보다 더 '한국 현대언론사'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시기별 주요 사건들이 너무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현대언론사의 격랑 한 가운데에서 여러 사건을 넘나든 저자의 이력으로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너무 전체 사건을 편년체 형식으로 기술하려다 보니 특정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결여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있어서도, 당시 시작부터 깊숙이 개입했던 저자로서, 당시 내부의 이야기나 어려운 점들, 혹은 창간 과정의 문제점 같은 것을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을 텐데, 저자는 너무 알려진 사실들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각 언론의 보도 양상을 다루는 부분들 같은 데에도 마찬가지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서 어떤 언론사가 어떤 보도를 하였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보도를 하였는가의 문제일 것이고, 그것에는 언론사 내부의 경제,권력구조 및 여러 역학관계, 정부와의 관계, 사주의 성향, 기자들의 취재방식, 언론사 간의 관계 문제 등등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언론사 내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라면 이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부자의 목소리로)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각 현안들에 대한 여러 언론의 상반된 리포트는 이미 수없이 알려진 내용이다.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읽다보면 이것이 한국현대'언론사'인지, 아니면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인지 잘 모르겠다.) 즉 이 책은 사실 조금 어중간하다. 한국현대언론사라고 부르기에는 언론의 모든 내용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그리 깊숙이 추적하고 있지도 못하다. (부록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머독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같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을 다루는 부분은 본문 내용의 반복에 가깝고, 위키리크스를 다루는 부분은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좀 쌩뚱맞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왓치맨>에서 나온 것처럼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언론이 사회의 감시자라고 했을 때 그 감시자들을 감시하지 않는다면, 감시자들은 곧 또다른 권력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진보언론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에서 하나의 예처럼 제시된 위키리크스도 마찬가지이다(어쩌면 그들의 힘이 꽤나 강력하다는 점에서 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각각의 개인들이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언론들의 잘못된 보도 행태를 꾸준히 지켜보고 스스로 걸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이명박 정권이나 현 박근혜 정부 하에서 정부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켜본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벗인 언론은 없다. 그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리이다. 꾸준히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 감시자들이 우리를 억압할지 모를 일이다.

 

 

덧.

책 제목은 참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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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3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4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6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8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09-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면서 자꾸 뭔가 걸리는데? 라고 생각했던게 여기서 처음 지적한 부분인 이야기가 문화통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었군요. 깨닫고 가네요.

맥거핀 2013-09-28 01:19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확실히 의도적인 부분이 있죠. 가연님도 말씀하셨지만 저자의 관점은 명확하니까요. 저는 그런 관점하에서 조금 더 '분석'에 가까운 내용들을 보고 싶었는데, 분석이 평이한 수준이라 아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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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현실에서는 소설이나 영화였다면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비판을 받았을 법한 일들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고, 반면 허구들은 어떻게든 현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현실은 '실물보다 점점 커져서' 점점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구호들이 되어가고 있고, 반면 허구는 그 구호들에 가려진상들을 보여주려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 실상은 한편으로 다른 구호를 가진 허상으로 작동할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 있다.

 

물론 그 적당한 타협점들도 있다. 예를 들어 허구(소설)의 형식을 빌려, 현실을 보여주기, 이름하여 '논픽션'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것이다. 논픽션(non-fiction)이란 1912년 <퍼블리셔즈 위클리>가 베스트셀러를 발표할 때 '픽션과 논픽션'으로 구분한 데에서 유래한 말로, '픽션'의 반대개념으로서의 서사, 즉 소설 이외의 서사물로 르포, 역사서, 자서전, 전기 등을 포괄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국내에 꾸준히 소개하여 잘 알려진 조영일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 <미스터리의 계보>의 해설에서 논픽션은 일종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하며 그것의 본질은 형식으로는 '영상화'이고, 내용으로는 '추적 혹은 추리'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추적 혹은 추리'라는 것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그것이 알고 싶다>, <PD수첩>과 같은 시사 다큐멘터리는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의 서사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이것이 기존의 사회소설(노동문학/민중민족문학)의 상당부분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즉 이 서사구조의 유사성이 논픽션과 (TV) 다큐멘터리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 근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서사구조의 유사한 부분에 관한 것보다도, 이 (TV) 다큐멘터리가 기존의 사회소설을 대체했다는 부분인데, 한 때 대체하는 것처럼 보였던 TV의 시사 다큐멘터리들은 요즘 들어서 이상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추악한 뒷모습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보여주었던 몇몇 진지한 프로그램들은 운명을 다한지 오래고,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프로그램들도 점점 김전일 소년의 기괴한 사건기록부가 되어가거나, 소비자 고발류의 프로그램들이 되어 착한 무엇인가를 추적하거나, 휴먼 다큐라는 이름을 가진 말랑말랑한 무엇인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사회소설을 진정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독립(인디) 다큐들과 인터넷 매체들, 그리고 <현시창>,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과 같은 르포 혹은 기록 노동들 뿐이지만, 지난 공지영과 기록 노동자 이선옥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에서 볼 수 있듯, 사회(노동)를 영상으로 혹은 글로써 기록하는 일 역시 또한 그 가치를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산체스네 아이들 / 오스카 루이스 / 이매진

안나와디의 아이들 / 캐서린 부 / 반비

 

이런 때에 최근에 출간된 몇몇 책들이 조금 흥미롭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논픽션, 르포들이 연이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오스카 루이스의 <산체스네 아이들>은 1961년 처음 출간된 책으로, 멕시코의 어느 빈민가의 생애사를 세밀하게 추적하여 기록하였다. 각 가족들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서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은 35년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며, 이번에 나온 것은 50주년 기념판으로 또한 이들 가족의 후기를 새롭게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또한 조은의 한 도시빈민 가족을 추적한 훌륭한 연구이자 책, 그리고 영화인 <사당동 더하기 25>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캐서린 부의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인도 뭄바이 안나와디의 빈민가를 4년 동안 추적한 기록으로 인도라는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내버려진 도시 슬럼가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 르포르타주라는 형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작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전지적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소설처럼 이 이야기가 읽히는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노동 계급은 없다 / 레그 테리오 / 실천문학사

1942 대기근 / 멍레이 외 엮음 / 글항아리

 

레그 테리오의 <노동계급은 없다>는 미국의 어느 부두노동자의 르포르타주로 책 소개만으로는 오웰의 영국 북부의 탄광지대 노동자들을 다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나 프랑스 노동계급의 현실을 다룬 플로랑스 오브나의 <위스트르앙 부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최근 미국 노동자의 생산성은 25%가량 높아졌지만, 도리어 노동 인구 60%의 실질소득은 13년 전보다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지난 월스트리트 시위에서도 보았듯 세계의 중심지라는 그곳이나 여기나 빈부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으며, 노동 현장은 온갖 부조리와 횡포가 만연한 것 같다. <1942 대기근>은 역사서와 르포의 경계선에 위치한 책이다. 1942년 삼백만 명이 굶어 죽은 중국 허난성의 대기근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면서 또한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감춰 버린 사라진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얘기한 네 권의 책들은 빈곤 혹은 가혹한 노동이라는 거대한 것에 맞선 생존의 기록이면서, 그 생존의 메커니즘을 세밀하게 추적한 기록 논픽션들이다. 또한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가혹하게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추는 작은 등불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빈곤에 맞서는 대응방안을 생각해 보게 하는 것으로서, 또한 하나의 기록문학으로서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말하다 / 리즈 스텁스 / 커뮤니케이션북스

 

마지막 책은 조금 다른 범주의 내용으로 리즈 스텁스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말하다>라는 책이다. 다큐멘터리와 독립영화 프로듀서인 저자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감독 13인의 인터뷰를 정리해 책으로 엮은 것으로 다큐멘터리의 감상이 일천한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수많은 경험을 쌓은 저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 같다. (그래도 다이렉트 시네마의 아버지라는 앨버트 메이슬리스나 지난 EIDF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로스 맥켈위 등의 이름은 들어보신 분도 꽤 있지 않은지..?) 책 소개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한편으로 이 논픽션으로서의 다큐를 시청하게 될 대부분의 독자들 입장에서도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자신의 의자가 결국 어떻게 만들어져 그 스크린 앞에 놓여있게 되었는지, 또는 그 의자가 혹 부러진 의자가 아닌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꽤 중요한 문제일 듯 싶다.

 

아무튼 논픽션에서 결국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기록한 자의 선의 혹은 다짐을 믿는 수밖에는 없다. 위대한 르포의 하나인<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존 리드는 서문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투쟁의 과정에서 내 감정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중요한 날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꼼꼼한 취재기자의 눈으로 사건들을 보려 했고, 또한 진실만을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이 다짐과 그를 믿은 사람들의 진지한 독서는 결국 이 책을 오늘날까지 중요한 기록 문학의 하나로 남아있게 했다. 위의 책들에서도 저자들의 선의 혹은 다짐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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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9-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체스네 아이들.....음악이 꽤 유명한 안소니 퀸 주연의 영화가 생각나네요. 같은 작품일까요?

시사프로그램의 연성화는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요즘 다루는 소재가 고만고만한 도전자를 골라 방어전을 치루는 디팬딩 챔피언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아 맥거핀님...서재 이미지가 바뀌셨네요..^^ 저 이미지의 영화도 혹시 페이퍼 생각 있으신가 궁금합니다..^^)

맥거핀 2013-09-06 18:33   좋아요 0 | URL
아..그런 영화가 있었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보수 정권의 언론에 대한 공작들, 그리고 종편의 탄생들과도 연관이 있겠죠. 근데 그런 것 이외에도 TV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이나 사회전반적인 분위기 등 여러가지가 또 관련이 되는 것 같아요. 아무튼 요즘에는 그리 '각잡고' 볼만한 TV 다큐들이 없더군요. 얼마 후에는 매년 하는 EIDF가 또 시작될텐데, 그 때나 좀 챙겨서 봐야겠습니다.

저 영화는 최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인데 보기는 했습니다만, 아마도 쓰지는 않을 것 같아요. (별로 특별히 쓸 이야기도 없구요.^^) 힐링하는 기분으로 편하게 봤습니다. 사실 이야기는 좀 유치합니다만, 좋기는 하더군요.

날씨가 흐린 금요일 저녁입니다. 술을 먹으라고 권유하는 날씨군요.

아이리시스 2013-09-0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저는 며칠 전에 사서 <안나와디의 아이들>이랑 <돈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읽고 있어요. 에세이들의 표본이죠. 으하하. 이런 거 너무 좋아요. <흑단>도 좋은데요.. 내일 기차 타는데 아무래도 다 읽고오지 싶은데 냅다 잠만 잘지도 모르겠어요.. 비행기 타려다가 기차 타는 거니까 독서라도 보람이 있어야 할텐데요..

<산체스네 아이들>도 장바구니에 두고 책구입할 여유를 기다리는 중인데, <위스트르앙 부두>도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어요. 이 논픽션들 너무 제 스타일이에요. ^-^bbb


2013-09-06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09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3-09-0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이 신간평가단을 하시는 건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요, 암요. 저는 아무래도 평가단, 앞으로 안 하지 싶은데 지난 소설부문 선정책이 <파과>인걸 안 후 마음이 쓰리는 건 왜일까요_- 평가단이 됐든 아니든 책이 선정되든 아니든 저는 이 책을 샀을텐데요. 흐음, 묘한 심리에요.

저, 왔다갑니다. 음, 9월 9일 오전 11시 6분경이에요 :)

맥거핀 2013-09-09 17:12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이번에 첫 두 권만 받고도 허덕허덕 하는 중입니다. 한 권은 거의 600페이지, 다른 한 권은 거의 700페이지..물론 늘 그렇듯이 중요한 건 두께가 아니라 제 마음가짐이겠습니다만.. 아무튼 서평단 하면서 역으로 좋은 점(?)은 평소에 잘 안 읽게 되는 책들, 손이 잘 안가는 책들을 억지로라도 읽게 된다는 점입니다. 독서의 편식을 줄일 수 있다고 할까나..뭐 Shining님 같은 분이 신간평가단이 되는 건 저로서도, 그리고 출판사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ㅋ 11시 6분경이라..제가 오늘 저 시간에 뭘했지?를 생각하게 되네요.

2013-09-17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8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