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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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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애써왔다. 언어학, 문학, 역사학, 법학, 철학, 비교종교학, 윤리학 등등의 소위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학문 분야는 물론이고, 사회학, 과학, 예술, 종교 등 여타의 다른 부분에서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특질과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그것은 인간을 수식하는 수많은 용어들의 범람에서 그 결과물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하는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예술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 등등의 넘쳐나는 수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넘쳐나는 설명들에도 인간이라는 이 특수한 종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여전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원과 특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거의 영원한 난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이 책 <지구의 정복자>는 이 영원한 난제에 도전한 또 하나의 시지푸스적 시도이자 사회생물학자가 내놓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원과 특질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윌슨의 화두는 한편의 그림이다.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거의 모든 것을 뭉뚱그린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보통 사람이라면 움츠러들고 말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오랫동안 사회생물학에 천착해 온 노학자는 조심스럽고도 거침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시작은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 인간이라는 종을 이렇게 특수하게 만들었는가?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여타의 종들과 다르다. 각종 기술과 도구를 사용하며, 서로 언어로서 소통하고, 상당한 지능을 소유하였으며, 사회를 이루고, 때로는 협력하고 경쟁한다. 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학자들이 진사회성 동물(eusociality animal)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p. 27). 집단의 구성원들이 여러 세대로 이루어져 있고 분업의 일부로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가진 동물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이런 존재로 만들었을까.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면 되겠지만, 사회생물학자인 윌슨이 내놓은 답은 다르다.

그의 답은 인간이 몇 가지의 선적응(preadaptation)을 거쳐 이러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선적응은 육지에 살았다는 것이었고, 두번째 선적응은 지구 역사상 육상 동물 중 소수만이 갖춘 수준의 큰 몸집이었다. 이 두 가지 선적응은 불을 사용할 수 있다는 큰 이점을 가져다 주었는데, 기술의 발전에는 불의 사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선적응만으로는 부족했는데, 그 다음의 선적응은 사물을 쥐고 조작할 수 있도록 진화한 부드럽고 납작한 손가락이 달린 움켜쥐는 손의 출현이었다. 이는 기술의 발달을 촉진할 뿐더러, 지능의 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다음의 선적응은 혹은 그로써 일어난 결과는 상당한 양의 고기가 포함되는 쪽으로 식단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편으로 다른 여러가지 것과 연관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뇌를 발달시킬 정도의 충분한 에너지를 고기에서 얻을 수 있었다는 일차적인 사실 외에도 다른 중요한 변화를 불러왔다. 그것은 '무엇을' 사냥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냥하는가의 문제였는데, 고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보금자리와 사냥하는 동안 그 보금자리를 지켜줄 협력이 필요했고, 이는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은 다른 말로 '진사회성 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진사회성 진화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단계들을 포함한다. 윌슨 박사는 개미, 흰개미 등 진사회성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는 다른 여러 (무척추) 동물들을 살펴봄으로서 이 조건들을 밝혀내고 있는데, 이는 집단의 형성, 집단을 치밀하게 만드는 선적응 형질 조합의 출현, 특히 그 중에서도 가치 있고 방어 가능한 보금자리(그리고 그에 대한 의존), 집단의 지속성을 빚어내는 돌연변이의 출현 등을 포함한다. 곤충들의 경우에는 로봇같은 일꾼과 같은 창발적 형질들이 '집단 수준의 선택'을 통해 군체의 생활사와 사회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며, 때로는 기이한 초유기체까지 발전하기도 한다(즉 집단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어 개미 집단의 경우 어떤 개미는 계속 번식기능만 담당하고, 어떤 개미는 계속 먹이를 구해오는 데에만 집중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이와는 상당히 다른데,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집단 수준에서의 선택은 유전적 과정과 문화적 과정의 결합이다. 

이는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의 전환이기도 하다. 즉 같은 진사회성을 갖추었으면서도 우리 인간과 곤충을 갈라놓는 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윌슨이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는 아주 조악하고 간단하게 말해서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별개의 과정으로 이루어지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제하거나 뒤집는 것이 아니라, 그 두가지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서로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의미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성인의 젖당 내성 발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전의 모든 인류에게서는 우유를 소화할 수 있는 효소인 락타아제는 유아에게서만 생산되었다. 그러다가 9천에서 3천년 전에 북유럽과 동아프리카의 다양한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목축이 발달했을 때, 성인이 되어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락타아제를 계속 생산하는 돌연변이가 문화적으로 퍼졌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주요 식량 원천으로서 소의 가축화를 가능케했다. 즉 이 돌연변이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조직의 유지와 발전에 이로웠기 때문이다(다른 집단보다 성인이 우유를 마시는 집단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전자-문화 공진화는 근친상간의 금지, 색깔의 인식, 언어의 발달 등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가 언어를 더 잘 배우고, 특정의 색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유전자가 문화적 발달에 따라 진화했기 때문에, 혹은 문화가 어떤 유전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유전자-문화 공진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것의 전제이자, 이 책의 일종의 분기점, 혹은 논란지점이다. 즉 유전자-문화 공진화에는 그것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유전자의 변이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전제로 깔려있다. 즉 이것에는 집단 수준의 이타주의적 본능이 조금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윌슨이 다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는 개별 구성원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선택압과 집단 전체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다른 선택압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다(p. 72). 다시 말해서 인간은 각각의 개체 수준에서는 이기적인 방식으로 유전자를 진화시킬지 몰라도 전체 집단 수준에서는 이타적인 방식으로 유전자를 진화시킨다고 윌슨은 말한다. 바로 그것이 한편으로는 인간이 개미나 흰개미 등의 다른 진사회성 곤충과 다른 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미나 흰개미의 경우에는 집단이 거의 하나의 초유기체로 보일 정도의 극단의 이타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개체 수준과 집단 수준의 선택압이 다르며, 그것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거나 혹은 충돌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준 선택에서의 상호작용과 충돌이 도덕, 종교, 창작예술 등등의 기원과 발전에 크게 연관되어 있다고 윌슨은 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혹은 인간의 유전자는 개체 수준에서는 약간은 이기적일 수 있으나 집단 수준에서는 결국 이타적이라고 윌슨 박사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집단 선택'이 결국 이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를 지배한 원동력이라고 그는 본다. 이는 인간의 진화가 '혈연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능의 결과'라는 그간 학계를 지배했던, 그리고 그 자신이 그동안 주장했던 혈연선택의 관점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이 포괄 적합도 및 근친도 개념에 기반한 혈연선택에 대해서는 솔직히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있었는데, 해설을 한 최재천 교수가 "논쟁의 핵심을 이루는 적합도와 근친도 개념은 수많은 학자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의조차 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남아 있"다고 하셔서 힘을 얻기로 했다. 이 분야의 권위자인 최교수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하겠는가. 다만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윌슨의 이 다수준선택에 기반한 자연선택으로의 회귀는 급작스러운 반동이라기 보다는 예정된 회귀이며, 그것들이 그렇게 완전히 대립되는 것만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가 보는 우리의 미래, 즉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긍정적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지닌 맹목적인 믿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몹시 원한다면, 22세기쯤이면 지구는 인류의 영원한 낙원이 되거나 적어도 그 초입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p. 363)." 그는 우리를 이렇게 만든 원동력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선택이며, 그 이타성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혹 인간은 개미의 군체와 비슷하게 될까). 그러나 윌슨의 이 주장에 그대로 올라타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책을 통해 제기된 물음들이 계속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으며, 명확한 결론은 아직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질문과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것일 것이다. 이 노학자의 통섭의 결과물들도 결국 가능성 있는 하나의 추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노학자가 우리에게 가지기를 권하는, 과학에 기반한 태도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 역시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태도와 열린 마음이다. 나는 다만 이 노학자의 긍정성에 나의 소박한 긍정을 더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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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07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도 사람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있어서 아직도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는군요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이것은 진화하고는 조금 다른 것이기도 하군요 어쩌면 저는 지금까지 사람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사람이 어떻게 바뀌어왔다고 배웠다 해도... 진화는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 자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군요^^

그런데 22세기라니, 그때 저는 이 세상에 없겠군요 이 글을 쓴 분도... 그래도 누군가 이어서 이 문제를 알아가고 있겠죠


희선

맥거핀 2014-02-08 00:00   좋아요 0 | URL
아마도 지금의 인간들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로 진화하고 있을 겁니다. 이 책을 쓰신 윌슨 박사는 상당히 긍정적이신 입장이지만, 저는 부정적인 인간이라, 그렇게 좋은 쪽으로 진화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는 솔직히 그렇게 크게 되지가 않네요. (예를 들어 저도 이 인터넷 상당히 좋아합니다만, 이것이 인간을 긍정적으로 진화시키고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뇌를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요..)

아무튼 윌슨 박사는 인간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이타적으로 진화해 갈 것으로 보고 있고, 인간이라는 군체도 일종의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그게 혹시 인간종에게는 좋을지라도 지구 수준에서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만..
 

 

 

 

 

 

 

 

 

 

 

풍경, 장률, 2013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2013

 

 

(위 두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것들이 이어지는 영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의 꿈에 대한 인터뷰가 이어지는 장률의 <풍경>과 같은 영화. 꿈이라...꿈. 사실 생각해보면 '꿈'만큼 조금 이상한 단어도 없다. 꿈은 실현될 수 없는 것, 가상의 것, 허구의 것 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젠가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 가능성 있는 무엇인가, 희망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꿈'이라는 이 말은 그 자체만 놓여져 있을 때는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가진 양쪽의 어느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장률이 말하는 꿈은 그 중 어느 쪽인가. 일차적인 의미는 전자에 가깝다. 이주노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잠을 자면서 꾸었던 꿈 중에 기억에 남는 꿈이다. 질문이 영화 속에 제시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질문도 그런 것이었을 것 같다. 그들은 한국에 온 첫날밤에 꾸었던 꿈이라든가, 혹은 며칠 전에 꾸었던 꿈이라던가, 혹은 며칠을 반복해서 꾸었던 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꿈들은 조심스럽게 이차의 의미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꾸었던 상당수의 꿈에서 그들은 고향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혹은 그리워하던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그것은 동시에 그들이 가진 희망, 혹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꿈'이라는 말이 가진 양쪽의 의미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섞여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꿈'이라는 말이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떤 거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그들의 꿈과 그들이 현재 서 있는 곳의 차이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거리. 그들이 꿈을 말하는 이 공간들의 배경은 그들의 꿈과 거리가 멀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일하는 공간에서 이 인터뷰를 한다. 목공소, 공장, 도축장, 좁은 작업공간, 혹은 작은 자취방이나 아니면 병원. 그들은 단순하고 힘든 노동이 계속 반복되는 공간에서, 고향집에서 가족들과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제주도에서 가족과 휴양을 보내고 있는 풍경을 그린다. (이런 면에서 영화의 가장 처음에 나온 노동자의 인터뷰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공간은 출국을 위해 있는 인천공항이니까. - 조금 이상하게도 이 인터뷰는 "여기는 한국의 인천공항입니다."라는 마치 기자의 리포트처럼 끝난다. 그리고 이후의 인터뷰에서 특별히 지명이 언급되는 경우는 없다. - 이 인터뷰는 이 영화의 일종의 프롤로그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인터뷰 후에 이어지는 것은 먼지가 자욱한 혹은 매우 뿌연 도로의 풍경이다. 그리고 다른 꿈과 괴리된 공간에서의 인터뷰들이 이어진다. 즉 우리는 이 뿌연 공간을 거쳐 이 '거리' 혹은 '괴리'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에필로그가 붙기전에 이 먼지가 자욱한 도로의 풍경은 반복된다.)

 

즉 장률이 원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도) 이 괴리를 계속 반복하여 지켜보는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말하는 꿈을 담은 이 음성정보와 주물이나 핏물이 쏟아지는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거운 공간에서, 약간은 생기를 잃어보이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담은 이 시각정보의 괴리. 장률은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우리가 지켜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하나의 장치를 건다. 그것은 이 괴리를 붙이려는 시도의 어떤 으스스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를 들어 한 노동자가 말하는 꿈의 경우가 있다. 이 노동자는 꿈에서 귀신을 만나 도망다니고 불에 뛰어든 꿈을 말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고 있는 이 공간은 병원이다. 그리고 그는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큰 화상을 입은 상태이다. 이 꿈과 현실의 무서운 도킹. 혹은 무엇인가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꿈을 이야기하는 이주노동자의 인터뷰 후에 저절로 마당에서 움직이는 자전거의 불가사의한 숏을 붙이는 것, 아니면 제주도에 가는 꿈을 꾸었다는 노동자의 인터뷰 후에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있다가 지하철이 지나간 후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이주노동자의 숏을 붙이는 것은 꿈의 실현이나 어떤 판타지라기보다는 으스스한 느낌에 가깝다. 즉 화상을 입은 이주노동자가 꿈에서 얘기한 것이 그의 예지가 만들어낸 귀신이라면, 이는 카메라가 만들어낸 귀신이다.

 

   

그러니까 장률은 여기에서 이 괴리를, 혹은 이 거리를 붙이지말고 이것을 어쨌든 계속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에는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에 <풍경>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일텐데, 왜냐하면 이 모든 꿈들이 실현되는 것을 억지로 보여준다고 해도, 극장의 객석에 앉아서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는, 혹은 현실에서 그들을 보게 되는 우리는 결국 객석과 스크린만큼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영원히 그것을 계속 풍경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리나 혹은 괴리는 다른 방식으로 건드릴 수밖에 없다고 장률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다른 방식'이란 어떠한 것이 있을까. 가능한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 하나는 반복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 괴리를 다시 처음부터 반복하여 보여주는 것.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 반복을 아주 조금이라도 견뎌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견뎌냄이 다른 것을 불러오기를 기대하는 것. (물론 이 반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뒤에 말하겠지만 에필로그의 색다른 시도도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식의 반복도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자본주의 포르노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나는 단지 그 반복되는 적나라한 노출 장면들 때문에 포르노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아니다. 방점은 도리어 '적나라한 노출' 보다는 '반복되는' 쪽에 있다고 해야할 것인데, 포르노야말로 일단 그 반복이 생명이다. 포르노도 기꺼이 영화의 하나라고 부른다면, 포르노만큼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 같은 것을 반복하는 영화도 없다. 매번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단지 배우만 바꿔서, 포르노는 계속 찍고 또 찍어낸다. 그리고 이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동안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한다.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 친구들은 계속 멍청한 대화를 반복하고, 코로 흰가루를 흡입한 다음 이상한 짓거리를 벌이고, 여자와 그짓을 한다. 그리고 이 시퀀스는 계속 무한히 반복된다. 다만 그 규모나 상대가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물론 나는 단지 반복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본주의 포르노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물론 여기에는 비난의 의도도 없다. 나는 포르노를 옹호했으면 했지, 욕하고 싶은 입장은 아니다). (많이 이야기된 부분이기도 하지만) 포르노와 다른 야한 이야기의 차이라면 과연 무엇을 잘라내고 있는가의 차이이다. 포르노에서 그들이 어떻게 하여 한 침대에 들어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길게 보여줄 이유도 없거니와 설혹 어떤 판타지의 충족을 위해 길게 보였주었다고 해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건너뛰어 버릴 것이다. 반면 보통의 야한 이야기들은 침대도 중요하지만, 그 침대 이전도 나름 중요하다(물론 침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게 포르노보다 화끈하지 않기 때문에도 그렇다). 즉 포르노가 침대 이전을 자른다면, 다른 야한 이야기는 침대의 어떤 부분을 자른다. 그런데 이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그런 측면에서 조금 재미있는데, 이 영화에서 이미 잘라내 보여지지 않는 것은 침대 이전, 아니 소비 이전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의 어떤 메커니즘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라면 그 영화는 소비도 보여줄 수 있겠지만, 그 소비를 가능케 해준 축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나에 비슷한 중점을 둔다. 그런데 이 영화는 벨포트 패거리가 돈을 벌게 되는 과정은 상당히 축약되어 있거나, 거의 희화화하여 오그라뜨린다. 이 영화에서 계속 반복하여 보여주는 것은 그들의 소비, 소비, 소비이다. (포르노가 섹스, 섹스, 섹스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갈라지는 지점이다. 이 소비, 소비, 소비의 강조가 어떤 영화적인 왜곡인가, 아니면 그것이 이 포르노적인 자본주의의 속성인가. 마틴 스콜세지의 강조는 아무래도 후자쪽인 것 같다. 즉 현재의 이 자본주의에서 축적은 그저 우스꽝스럽게 이루어진다. 거의 완벽한 사기로 자본의 축적은 가속화되고(그들이 컨테이너 공장에서 거의 사기에 가까운 전화로 처음 계약을 성사시키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일단 한번 축적된 자본은 알아서 몸집을 불려가며, 무절제한 소비만을 반복한다고 마틴 스콜세지는 보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마틴 스콜세지가 우스꽝스러운 화면 앵글과 시각적인 화려함과 정신없는 음악으로 수를 더 놓기는 했지만, 이 구조 자체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 조던 벨포트가 실존 인물이며,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마틴 스콜세지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자본주의의 포르노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 스스로가 거의 포르노로 변신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 극대화된 시각적 자극을 거리낌없이 3시간 동안 반복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반복이 다른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3시간 동안 꼬박 앉아서 포르노를 - 그것도 기계적인 섹스와 사정만 반복하는 - 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라도 그런 적이 있었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물론 이는 위험한 선택이다. 그것은 영화의 결말에 제시된 대로 보는 이의 욕망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포르노의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우리가(미안하다. 내가) 포르노를 보는 것은 우리의 욕망과 판타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포르노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 거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환상을 이용하여 우리의 일차적인 욕구를 어느정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이 반복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해도 이 반복은, 동시에 그러면서도 우리의 욕구와 환상을 충족시키며, 일시적이나마 우리를 그 환상에 젖어들게 만든다. 그리고 그 환상은 때로 거대해져 실제로 그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 영화가 혹은 이 영화에 제시된 포르노적인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조던 벨포트가 월스트리트에 출근한 첫날 선배 브로커가 그에게 알려준 월스트리트의 첫번째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월스트리트에서 돈을 버는 법은, 큰돈을 벌고 싶은 고객의 욕망을 더 크게 부풀리는 것이라는 그 얘기(그것은 물론 포르노가 돈을 버는 방식과 동일하다. 고객의 욕망을 이용하여 그것을 더 크게 부풀릴수록 그들은 돈을 번다. 실물을 쥐고 있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내내 이어지며, 결국 영화의 마지막까지 연결된다. 조던 벨포트의 강연을 들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사람들로 끝내는 이 마지막은 이 우려를 조금은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본 당신도 혹시 잠깐이나마 눈을 반짝이지 않으셨어요,라는 질문이다. 혹은 당신도 포르노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요,라는 질문이다.

 

아니면 장률의 <풍경>의 에필로그에서의 카메라의 질주라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반복을 견디다못해 질주하고는 결국 쓰러져버리는 이 카메라. 그 카메라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장률은,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는 질문을 제시해줄 뿐 답을 주지는 않는다. 반복을 무엇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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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23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인가를 되풀이해서 보게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참아내게 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세뇌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중독... <풍경>이라는 영화에서는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풍경에서 빠져나와 달리는군요 그거 좋은데요 달리다보면 어딘가 다른 곳에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두번째는... 그런 것도 자꾸 보다보면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지기도 하는군요 그것도 결국에는 돈을 쓰게 하는 것과 같겠습니다 광고처럼...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네요 바로 무슨 말을 하기 어려워서 좀 생각해봤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4-01-24 02:59   좋아요 0 | URL
저도 별 생각없이 좀 늘어놓자면,

여러가지의 갈림길이 있겠죠. 반복은 때로는 인내를, 혹은 혐오를, 혹은 탐닉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겁니다. 뭐 그 중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겠습니다만, <풍경>은 반복하면서도 그 반복에 빨려 들어가려는 관객을 꾸준히 거리를 두며 제어하고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반면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혐오를 의도적으로 노렸지만, 저는 그것에 상당히 실패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조금 더 과잉을 보여줬어야 합니다. 조금 더 역겹게 만들어야 했습니다만, 관객에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여지를 너무 많이 남겨놓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상업영화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요.

아이리시스 2014-01-28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카프리오 저번 작품 좋았잖아요. 장고. 개츠비는 제가 안봐서. 책읽고 보자 했는데 그 책이 지금 어디.. 옛날에 친구 빌려줬더니 유명해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안읽혀서 화장실에 갔다놨다길래 똥냄새 배인 책은 안갖겠다, 너가져라 한 기억이 있는데 그후로 안샀나봐요(또 딴소리). 장고 이미지 좋았는데 그래서 월가의 늑대 먼저 읽자 이러고 생각만..하는데.. 저는 딴소리 제조기인가 봅니다.

장률 감독의 <풍경> 저 풍경.. 작품들이 항상 마음을 끌어당기는 포스터를 가졌다고 매번 생각해요. 뭔가 있을것 같고 그리울것 같고 애틋할 것 같고. 우리나라 감독 중에서는 전수일 감독.. 근데 마음과 달리 보면 졸려고 하고!

문득 <마이 라띠마>랑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보고 싶어요. 하지만 현실은 <겨울왕국>에 빠져서 예전에 좋아한 애니 <눈의 여왕>이랑 현빈.. 현빈 내레이션이 기가 막힌 드라마 생각하고 있어요(흠).

이 영화들은 어려워서 안보고 글로 뭐라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쓸데없는 말만 쓰고 말았어요.


맥거핀 2014-01-29 00:10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댓글에서 냄새나요. ㅋㅋㅋ 아무튼 주인장이 요새 나름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자주 못 들르는데, 이렇게 잊지말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디카프리오는 더 할 수 없는 적역을 만난 것 같구요. 너무 적역이라 도리어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왜 그렇잖아요. 보기도 전에 왠지 어떤 캐릭터로 나올지 미리 예상이 된달까..예를 들어서 이번에 <남자가 사랑할 때> 같은 영화에 나오는 황정민도 사진만 봐도 대강 어떤 역이고,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느낌이 와요. 물론 예상한 것과 조금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장률 감독 영화는 뭐 그 말이 맞죠. 저도 글은 이렇게 하지만 보다보면은 졸립다기 보다는 멍해지는 때가 있어요. 더구나 이 영화는 계속 인터뷰가 반복되는 구조이고, 더구나 그 얘기도 자신이 꾸었던 꿈에 대한 얘기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멍하게 만들다가도 가끔 번뜩이는 순간이 있어요. 어쩌면 영화라는 게 그렇게 버텨내다가 가끔 번뜩이는 순간을 보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사는 것도 그런 거겠죠. 대부분 지루하고 미칠 것 같지만, 가끔 반짝거리는 순간이 있잖아요.

<겨울 왕국>이 매우 좋다고 그래서 보러가고 싶은데, 몸도 마음도 잘 시간이 안나네요. 그래도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은 한 번 보러가야할 것 같습니다. 시네마테크와 친구들 영화제도 한 번은 들러줘야 하는데 못 그러고 있어요.

그래도 제 서재는 자주 안와도 아이리시스님 새글은 보러가야죠. 글보러 갈께요. 후훗.

희선 2014-01-3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는 인사 못했으니, 지금 해도 괜찮을 듯하네요 새해 첫달이 거의 가고 있지만, 그래도 설날이 있어서 기분이 조금 낫기도 합니다 늘 이러지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즐겁게 보내세요(영화를 보며 보내실지도 모르겠군요) 첫달이 가고 있지만, 남은 달 동안 맥거핀 님이 하고 싶은 거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희선

맥거핀 2014-02-03 23:23   좋아요 0 | URL
설날은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간만에 영화 한편 제대로 못본 팍팍한 설날이라 조금 아쉽긴 합니다. 그래도 이제 시작이니 힘차게 시작해야겠지요. 희선 님도 2014년 한 해는 하시고자 하는 일들 즐겁게 하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나면 서재도 종종 들르시구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2013

 

 

(영화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쉬가르 파라디의 오프닝은 이 영화를 읽는 하나의 방향지시등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는 관객을 다짜고짜 시민과 나데르의 이혼법정의 심사관으로 앉혔다. 관객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불충분한 정보들을 놓고, 미심쩍은 판단을 해야만 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공항에서 나오는 한 남자를 마중나온 여자. 이들은 분명히 서로 잘 아는 사이인듯 하나, 그 관계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감돌고, 그들은 무엇인가 대화하려고 애쓰지만 유리창에 막혀 대화가 전달되지 않거나, 대화하지만 그 대화는 빗소리에 가려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조금 이상한 말이겠으나,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다. 그들은 대화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화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전작에서 우리가 내내 불충분한 정보들에 둘러싸여 불충분한 판단밖에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우리는 대화하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들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무엇인가를 판단해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이 아쉬가르 파라디가 파놓은 덫이다.

 

즉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에서 말들은 계속 쌓인다. 우리가 처음 알 수 있는 것은 이야기의 극히 일부분이다. 그리고 계속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거나,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어떤 일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다면, 통상 조금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조금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태는 전혀 다르게 보이며, 판단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영화가 영화적 속임수를 써서 무엇인가를 속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거의 모두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아는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에 따른 최선의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내가 등장인물이라도 비슷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사실 이 사건의 핵심은 당사자들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에 있다. 즉 이는 어떤 진실이 있지만, 작가나 감독의 속임수에 의해 그 핵심의 진실이 감춰진 (보통의) 추리극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사건의 핵심인 라지에의 유산이 무엇으로 인해 벌어진 것인지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감독이 그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당사자들도 그 사건에 대해 반신반의하기 때문이다. 라지에를 밀친 나데르는 자신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라지에 역시 유산의 원인이 전적으로 나데르 때문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사건의 진실, 즉 사미르(타하 라힘) 부인의 자살 이유도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녀의 자살 시도의 장면이 공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설혹 그녀가 죽으려고 한 날 그녀의 행적을 모두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몇몇 부분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야기는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즉 문제는 무엇이 답이고, 진실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무엇을 믿을 것이며, 그 믿음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가 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는 그 어떤 답도 확실한 근거를 가진 확실한 답이 아니며, 어떤 선택이든 불확실한 무엇인가가, 즉 그 불확실함이 가져다주는 미심쩍음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무엇인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파라디의 영화는 전작과 조금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전작에서 한 걸음 나아간 선택을 한다. 전작에서는 마지막에 우리는 다시 어떤 판단을 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져 있다. 그리고 파라디는 그 선택의 한가운데에서 어떠한 조망이나 믿음도 주지 않고 영화를 끝냈다. 그런데 이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의 마지막은 조금 흥미로운데, 아내의 병원에 간 사미르는 여전히 혼수상태에서 깨어날지 모르는 아내를 놔둔채 병원을 돌아나오려고 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영화를 끝낸다면 이는 전작과 동일한 끝맺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사미르는 별안간 다시 뒤돌아 병실로 돌아가 아내의 손을 잡으며 향수냄새에 그녀의 손이 반응하는지를 살핀다. 이 끝맺음, 그러니까 아내의 손과 맞잡은 사미르의 손을 오랫동안 비추며(방금 말한 이 일련의 장면들은 롱테이크로 찍혔다)  끝내는 이 마지막은 우리에게 다시 믿음의 문제를 상기하게 만든다. 이것은 사미르의 믿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독이 제안하는 우리의 믿음 작동 요구이기도 하다. 그녀의 손이 사미르의 손을 잡은 것일까, 아니면 그 손은 역시 아무 반응이 없는 손일까(내가 여기에서 떠올린 것은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이다. 마지막 녹색광선을 보았나, 혹은 보지 못했나). 양쪽의 두 가지의 믿음. 그러나 어떻게 믿든 간에 사미르의 그 꼭 쥔 손은 단순한 진실게임이 아닌 그가 이제 감내해야하는 나머지 것들을 말해준다(딸 루시가 말한 진실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 마리(베레니스 베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굳이 다시 나가서 딸을 데려오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파라디의 이 새로운 유형의 믿음의 게임, 혹은 도덕극은 지금의 세계에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정보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알면 알수록 어려워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는 오늘의 세계. 이와 달리 예를 들어 중세의 도덕극(morality play)에서는 거대하고 확실한 저편의 세계가 있고, 등장인물들은 매우 성스럽거나, 매우 어리석거나, 혹은 매우 악하다. 인물들은 극도로 유형화되고, 유형화된 인물들은 결국 어리석은 주인공, 그러니까 우리 인간을 선의 길로 이끈다. 그러나 아쉬가르 파라디의 세계에서는 모든 인물들은 비도덕적인 면이 있으나 대체로 도덕적이다. 똑똑하고 도덕적인 그들은 최선을 다해 올바른 판단을 하려고 애쓰지만, 그들이 보게 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괄호 안에 놓여진 공백이다. 그 괄호로 이루어진 공백들, 바로 이러한 오늘의 세계에 당신을 어떤 믿음을 가지고 답을 적어낼 것인가. 혹은 그 공백을 비워둔채, 고통을 감내할 각오를 가지고 '답없음' 혹은 '모두정답'을 기꺼이 선택할 것인가. 나는 지난번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리뷰에서 이 감독의 영화를 '영화로 치르는 윤리학 시험'이라고 썼었는데, 이 시험은 어쩌면 모든 답이 정답이거나, 모든 답이 오답인 것 같다.

 


덧.
이 수입사의 번역제목이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적극적인 제목을 굳이 달았는지 모르겠다. 이 제목이 아쉬운 것은 앞서 말한 오프닝 때문이기도 한데, 차에 탄 그들이 뒤에서 부딪힌 'Le Passe(과거)'라는 이 영화의 원제를 와이퍼가 지워버리는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가 감독이라면 상당히 짜증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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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1-0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제가 많이많이 보낼게요 :)

맥거핀 2014-01-10 00:14   좋아요 0 | URL
응..고마워요. 아이리시스님. 새해 복많이 받아요. 제가 요즘 알라딘에 자주 못와서 늦었어요. 흑흑.

희선 2014-01-23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가 많다면 그 안에서 무엇이 진짜인지 알아내기 어렵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읽지 않았지만 온다 리쿠 소설 에는 어떤 사건에 대해 여러 사람이 말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조금씩 다르답니다 이런 일은 흔히 있기도 합니다

어려운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1-24 02:49   좋아요 0 | URL
네..그런데 아무리 정보를 그러모아도 결국 알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런 문제를 놓고 싸우지만요. 그리고 쉽게 단지 그건 우리가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라고 다시 정보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때가 있는데, 그 때야말로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정말 '그 때'인가, 즉 이것이 믿음을 작동시켜야 할 때인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먼저 답해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은 (리뷰를 쓰는 것보다도) 수많은 책 중에서 몇 권의 책을 골라내는 일이다. 한참 동안이나 이 책이 좋을까, 저 책이 좋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사실 모든 책이 좋아보이거나, 아니면 모든 책이 다 문제가 많은 책처럼 보이는데,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읽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단지 좋아보인다는 이유로 골라낸다는 것의 민망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리뷰를 쓸 때보다도 이 추천도서 목록을 작성할 때가 늘 시간이 더 걸리곤 해서 아유, 이런 추천리스트 같은 것은 이제 더 안했으면 싶었는데, 막상 마지막 추천도서를 쓸 때가 되고보니 시원함보다는 여전히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자면 또 저번 서평단 마지막 추천글의 ctrl+V가 될 것 같고, 어서 몇 권의 책을 내밀며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일 듯 싶다.

 

이대로 책만 읽고 있어도 좋은걸까, 하는 시간들 속에서 골라낸 몇 권의 책들.

 

 

 

사물 판독기 / 반이정 / 세미콜론

 

<씨네21>에 실렸던 반이정의 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커다란 사진과 같이 실린 그의 (대체로) 짤막한 글들은 때로 사진 에세이 같기도 하고, 혹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이나 단지 농담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 종잡을 수 없는 웅얼거림들을 듣다보면 어느 순간 도리어 문득 세상을 보는 (나의) 무감한 시선들이 느껴지곤 했다. 그가 내미는 하얀 토끼를 따라 이상한 사물들의 나라로 들어가 보자.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류신 / 민음사

 

이상한 사물을 보았으니 이제 이상한 공간을 읽을 차례이다. 문학비평가인 류신의 이 책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모티프를 얻어 이 복잡한 도시 서울을 벤야민 식으로 읽어낸다고 하는데, 뭐 사실 누구 식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보다 중요한 것은 거의 대부분 무감하게 지나치는 이 공간들을 기어코 다시 '돌아본다'는 것에 있을 것인데, 새로운 필터를 거친 이 공간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하얀 토끼를 따라 들어간 앨리스는 이제 여왕이 지배하는 기이한 공간들을 보게 된다.

 

 

시인을 체포하라 / 로버트 단턴 / 문학과지성사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 / 전경목 / 휴머니스트

 

기이한 공간들을 보는 것은 현재의 공간들을 뒤집어보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 당시의 공간들이 어땠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역사책에 실린 거대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무대로서만의 공간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살아 숨쉬던 일상적인 공간 그 자체를 보려는 미시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고양이 대학살>로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을 이름인 로버트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세기 중엽의 파리와 당시의 구어적 의사소통망을 특유의 흥미로운 서술 방식을 통해서 재구성해낸다. 전경목의 책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는 낡고 빛바랜 종이일 뿐이었던 고문서를 입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당대의 생활상을 복원해내고, 우리에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면의 일상사를 엿보게 해준다. 고문서 연구에 오랫동안 천착해 온 저자의 이력을 한번 믿어보자. 

 

 

세상물정의 사회학 / 노명우 / 사계절출판사

 

이상한 사물들과 이상한 나라를 본 앨리스는 이제 과거의 앨리스가 아니다. 이야기 속의 앨리스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났지만, 현실의 앨리스들에는 꿈에서 깬 이후의 삶이 남아있다.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에 감춰져있던 리얼리티를 보는 것일텐데, 사회학자 노명우는 이 책에서 우리 세속의 풍경들에 감춰져 있던 의미를 끄집어내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누구나 당연하게 여겼던 취미, 섹스, 개인, 가족, 노동, 기억, 상식과 같은 풍경들에 담긴 것들인데, 우리는 이 당연한 키워드들 속에서 어떤 냉혹한 현실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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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1-03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맥거핀 2014-01-05 14:42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도 추천도서 쓰시면서 많이 고민하셨던 모양이네요. 파트장님 추천목록도 늘 잘 보고 있습니다.

가연 2014-01-0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ㅎㅎㅎ 너무 늦게 이렇게 서재를 돌아다니면서... 저도 빨리 추천목록을 만들어야하는데...

맥거핀 2014-01-05 14:43   좋아요 0 | URL
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연님 추천목록도 보러 가겠습니다. 이번달에도 과학책이 한 권은 들어있겠죠?

비의딸 2014-01-1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물정의 사회학..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맥거핀 2014-01-15 19:43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이 책이 되었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이번 서평단도 별로 안남았네요. (댓글이 조금 늦었네요. 제가 요새 잘 못 들어와서..;)
 

 

2013년 좋았던 영화 10편 (무순)

 

 
설국열차, 봉준호

후쿠시마의 잔해 제거를 위해 노숙인들이 헐값에 투입되었다는 세밑의 기사를 보고 내가 떠올린 것은 설국열차에서 그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 바닥에 들어가 있던 어린아이였다.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윌포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셈이다. 봉준호가 직관적으로 보여준 이 세계는 이미 실현되었고, 이때 봉준호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도대체 어느칸에 들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폴 토마스 앤더슨은 집단의 서사를 개인의 서사로 능숙하게 압축시킨 다음,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보는 것을 통해 결국 우리 각자의 비어있는 과거와 마주하게 만든다.

 

 
카운슬러,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과 코맥 맥카시는 관객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놓고 극단으로 몰아붙인 다음,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차가운 성찰을 요구한다. 올해 최고의 공포물. 리들리 스콧의 의외의 간결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가 늘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한편으로 리듬의 조절에 매우 능숙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적절한 포인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종종 멈춰서서 관객을 차분히 성찰하도록 내버려둔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그는 알고 있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타비아니 형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세 가지 층위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한다. 고대 로마와 그것을 연기하는 재소자들의 과거와 그들이 보여주는 현재의 무대. 그리고 그 세 가지의 이야기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지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죽어야 하는 우리의 '시저'는 누구인가.

 


스토커, 박찬욱

단 한 숏도 의미없이 지나치지 않는다. 박찬욱은 늘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번에도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한 세계를 마감하고, 기꺼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홍상수의 명계(冥界)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 홍상수의 줌은 누군가를 가까이 당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지워버리기 위해 사용되는 것 같다. 그 명계에서 해원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에 서 있을까.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집요한 도덕극이자 말(言)이 만들어내는 환영들의 향연. 전작의 장점들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새롭게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이 영화를 지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말의 스릴러'라는 거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것 같다.

 


블러드 브라더, 스티브 후버

진짜 기적이 있는지 늘 의심하는 나와 같은 자들은, 진짜 기적을 만났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EIDF에서 만난 단연 올해의 다큐.

 


일대종사, 왕가위

모든 것이 쇠락해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을 잃지 않으며, 한껏 자신만만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최소한도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에게 왕가위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경의를 보낸다.
 



2013년 보았어야 할 영화 10편 (무순)
(언젠가 보기 위해 기록해둔다.)

 

 

테이크 쉘터, 제프 니콜스

잠 못 드는 밤, 장건재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풍경, 장률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제로 다크 서티, 캐서린 비글로우

가족의 나라, 양영희

필름 소셜리즘, 장 뤽 고다르

비념, 임흥순

코스모폴리스, 데이빗 크로넨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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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일대종사, 풍경,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언급된 것 중 보았어야 한다고 (특히) 생각하는 영화 3편이에요. 아 아쉽다!
2. 영화에 대한 짧은 설명들이 모두 고개 끄덕이게 하는...
맥거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맥거핀 2014-01-03 20:35   좋아요 0 | URL
아..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을 봤네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들러서 인사해주시고..섬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풍경은 저도 아직 못봤지만(사람이 너무 없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일대종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강추할 수 있습니다.^^ 아..아직 개봉하고 있는 영화중에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이 영화도 참 좋아요.

2014-01-0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시간이 너무 없어서 알면서도 그 영화 못 보고 있어요.ㅠㅜ 심지어 동네 극장에서 하는 월터..도 못 보고 있는!! 이대로 출국 2월초 귀국하면 봤어야 할 영화에 월터와 아델이 떠억하니 오르겠죠. 넘흐 보고 싶었던 이무지치의 사계마저도 1월에 내한 공연!!!!!!!! 뭡니까.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왜!!!!! 난 너희 나라에 지금 갈 건데! 진짜 저주받은 타이밍요...ㅠㅜㅜㅜ /아 풍경....ㅠㅠ 장률 감독 GV도 기회 있었는데 못 가보고...

맥거핀 2014-01-03 21:07   좋아요 0 | URL
아..저 사실은 월터..도 봤어요,라고 염장을 지르려고 했는데, 이건 뭐 염장을 지르는 것은 아무래도 섬님인듯..이태리요? 저는 이 팍팍한 서울에 갇혀서 TV속에서 그네 언니 얼굴이나 보고 있는데..

저는 영화 같은 건 안봐도 좋으니..(;;) 어디나 좀 갔으면 싶은데,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어디 갈 일이 없어요. 매일매일 술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마음 속의 공허함을 여행으로 채우고 싶어요(라고 하지만, 사실 술도 좋..).

2014-01-0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댓글 안 달려고 했는데 우껴서.. 그네 언니야 트윗 탐라 조정하듯이 인생에서 편집해 주시고, 사실 술이 좋다고 괄호 속에다 부끄럽게 고백하셨으니 행복 인증이네요. 알콜은 어디서나 손닿는 곳에 있어주시니.. 일상 속 찰랑이는 행복...후후후 근데 이건 어떻슴까? 전 이딸리아에서 싸고 맛있는 와인, 좋은 친구로 날밤을 보낼 거라는... (월터, 그래도 제게 염장입니다.ㅋ 휴~)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어제 저도 조촐한 신년회가 있어서 와인 마셨어요. 이탈리아에서 마시는 와인 정도는 안되겠지만, 뭐 그래도 많이 먹었으니..질보다 양으로다가..(정신승리중. ㅋ)

근데 월터씨는 좀 별로였어요. 그거 아시죠? 남들 다 웃을 때, 하나도 안 웃겨서 소외되는 기분..개인적으로는 왜 우리나라에서 평들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외국에서는 평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하던데.

아무튼 이탈리아 잘 다녀오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가연 2014-01-03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본 영화가 하나도 없... ㅋㅋㅋ 정말 삭막한 작년을 보낸 것 같네요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제가 다 안타깝네요. 뭐 그런데 가연님은 그 이상으로 좋은 책 많이 보시니까.^^

Shining 2014-01-05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를 뒤늦게 봤어요. 덕분에 제 페이퍼에선 언급도 안 된;; 개인적으로는 (물론 전작을 다 본 건 아니지만) <걸어도 걸어도>가 최고작일줄 알았는데. 영화 정말 좋았어요. 한 컷도 낭비하지 않은 철저함과(편집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이라죠) 그러나 넘치는 서정과 설정숏도.

새해 잘 보내셨나요? 저는 구정을 찾을 거에요, 그래서 아직 나이를 먹지 않은 거라 믿고 그래서 인사도 안 하는 겁니다.....라고 하고 싶은데; 실은 연말연시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이제야 들어오네요. 인사가 늦었어요. 건강하고 건강한 한 해 보내세요^^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웃음).

맥거핀 2014-01-06 18:43   좋아요 0 | URL
영화에서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 참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인데,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그 시간이라는 것의 무게를 관객에게 인식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역시 믿고 보는 고레에다 감독 영화입니다.

사실 위의 BEST10은 마지막에 두 개의 좋은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았기 때문에 나온 글입니다. 그 두 개의 영화를 연말에 못 만났으면 리스트 같은 것은 안 썼을 거예요.ㅋ

저도 연말에 이웃분들에게 다 인사를 쓸까, 아니면 다 하지 말까 하다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죠. 뭐. 그래서 이렇게 인사를 받으니 참 민망하네요. 저야말로 Shining님의 좋은 글을 잘 읽고 있으니,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해야겠군요. 어디 도망가지 마세요.하하.

아..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구요!!!

희선 2014-01-23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반갑습니다 처음으로 말(글말)을 하는군요 지난 한해 동안도 여전히 영화가 만들어졌군요 저는 영화는 한편도 못 봤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극장이 있는데 한번도 안 가봤습니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학교와 집이 가까운 사람이 학교에 더 자주 늦기도 하잖아요 꿈 이야기가 나오는 책에 영화는 낮에 꾸는 꿈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더군요(저는 깨어있을 때 꾸는 꿈이라고 썼는데) 이것은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영화는 보는 것(듣기)이니까 더 생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맥거핀 2014-01-24 02: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희선님. 그렇군요. 영화를 안 보셨군요. 사실 제 서재의 상당수의 글들이 영화에 대한 글들이라서 별로 재미가 없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뭐 그래서 한편으로 여러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 서재에서 영화란 맥거핀입니다(그러기를 바랍니다). 영화를 놓고 늘 그것과 어쩌면 관계가 없을지 모를 다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제 희망입니다만, 솔직히 아직 그럴 깜냥이 안됩니다. 그거야말로 어쩌면 대가들의 말하기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뭐 아무튼 저는 그럴 능력이 턱없이 안됩니다.^^

영화관에 있다가 나오면 한바탕 꿈을 꾸고 나온 것 같은 영화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영화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운이 나쁘면 가끔 진짜 꿈을 꾸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