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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활동이 슬슬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처음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슬슬 나태와 관성이 고개를 드는 때이기도 하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늘 핑계에 불과하다. 조금 더 절실한 마음으로 책들을 보아야만 한다.

 

 

 

광신 / 알베르토 토스카노 / 후마니타스

 

'설국열차'의 머리칸 부근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광신을 가진 자들의 대결을 본다. 환각물질인 크로놀에 취해 정신을 못차리는 남궁민수와 역시 환락과 크로놀에 취해있는 일군의 무리들의 대결. 아마도 우리의 시대는 지금 그 순간에 거의 다다랐거나, 아니면 그 순간을 넘어서 머리칸의 문을 열어제치기 직전일 것이다. 물론 머리칸을 연다고 해도 그렇게 나아지는 것은 없다. 거기에는 더한 광신자이자 열차성애자 윌포드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남궁민수처럼 어떻게든 문을 여는 것이 해결책일까. 모든 광신들의 근원인 크로놀을 합쳐서? 그가 창 밖에서 보았다는 무엇인가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의 환상에 불과했을까. 우리는 답이 없는 채 도박을 해야하는 위험한 상황에 점점 내몰리고 있다.

 

광신 없는 세계는 이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광신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광신은 남궁민수의 그것처럼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무엇인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좋을지 나쁠지는 광신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달려있다. 

 

 

일베의 사상 / 박가분 / 오월의봄

 

아마도 그런 광신의 한 단면이 '일베'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베에는 온갖 것들이 흘러들어왔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다시 흘러나간다. 그곳은 사회의 온갖 재료들이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오염되어 흘러나가는 거대한 역정화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마치 카오스처럼 보이는 그곳은 나름의 규칙과 나름의 패턴과 나름의 팩트로 중무장한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을 쓴 청년 논객 박가분의 말이다(사실 그 '일베(일간베스트)'라는 이름에서도 우리는 어떤 패턴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청년의 시각으로 '일베'라는 '청년들의 공간'을 보는 것은 노땅들의 분석과는 또다른 지점을 던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 박가분의 글들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파멸의 시대 저항의 시대 / 크리스 헤지스, 조 사코 / 씨앗을뿌리는사람

 

물론 그러한 광신의 이면에는 망가져가는 절대다수의 삶이 있다. 무엇인가에 취해 있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려운 현실의 그늘이 짙게 우리들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 책은 미국의 자본가와 자본주의가 인디언, 흑인, 유색인종의 희생을 먹고 자라났다고 말하는 책이다. 물론 절대다수의 삶을 망가뜨리는 미국 기업 자본주의의 실상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코믹 저널리즘으로 잘 알려진 조 사코의 그림이 가미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이미 팔레스타인이나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 등을 코믹(comic)이라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다루며, 이야기를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아마도 이번에도 조금은 다를 것 같다.

 

 

리딩 / 크리스토퍼 히친스 / 알마

 

그러한 광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고 논쟁적인 태도를 취했던 이들 중에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같은 이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유작 <리딩>은 전에 출간된 <논쟁>과 본래 한묶음이었던 글들로 <논쟁>이 주로 칼럼에 가까운 글들을 담고 있다면, 이 책은 주로 서평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글의 성격은 조금 다를지라도 그가 치를 떠는 것들은 여전하다. 그것은 전체주의, 종교적인 독단, 테러리즘, 국가폭력 등등의 소위 '광신'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끄집어내기 위해 책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폭압적인 현실에 맞서는 우리 시대의 책읽기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영화 같이 볼래요? / 김영진 외 / 씨네21북스

 

조금 쌩뚱맞지만 솔직히 말해서 서평단이 끝나기 전에 영화에 관련된 책을 한 권 쯤 읽고 싶었다. '카쿠군'님이 추천하셨길래 이때다 싶어서 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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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04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베'가 하나의 단어가 되어버렸네요... ㅠ
저런 신조어가 생겨나는 사회가 조금 서글프네요.

맥거핀님, 잘 지내시나요?
이런 활동은 정말 부지런해야 가능한거 같아요, 홧팅~ 좋은 책들 골라내셨네요.

맥거핀 2013-11-04 21:52   좋아요 0 | URL
썩 유쾌하지는 않은 말이죠. '일베'를 막는다거나, 그들을 일종의 범법자 취급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닌듯합니다. 지금 서평단 때문에 표창원씨의 <공범들의 도시>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표창원씨가 강조하는 것이 처벌보다는 예방의 문제라고 하는데, 그에 공감합니다. 먼저 그러자면 그 메커니즘을 알 필요가 있겠죠.

부지런하지 않고 허덕허덕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번달 책도 지금 겨우 읽기 시작했군요. 마녀고양이님도 잘 지내시죠? 가끔 서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참 부지런하십니다.^^

가연 2013-11-0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신을 주제로 책들을 고르셨네요. 리딩이 겹치는데요ㅎ 광신, 은 저도 추천할까 고민했었기는 하지만.. 짐멜의 돈의 철학, 이 너무 눈에 띄어서 결국 놓아두었네요.

맥거핀 2013-11-06 18:25   좋아요 0 | URL
저도 돈의 철학,을 추천할까 하다가 결국 안되지 않나 싶어서..가라타니 고진의 책도 역시 그간으로 볼 때 안된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구요. (사실은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서평을 쓸 자신이 없어서... ) 크리스토퍼 히친스 책은 일단 재미있으니까요. 즐거운(사실 그렇게 즐거운 내용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13-11-0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단 활동이 그렇긴 하더라구요. ^^ 그렇게라도 읽으니 읽게되는 측면도 있고 좋은 책 소개도 이렇게 하게되구요. 마음에 들어오는 책 몇 권 담아갑니다. 좋은하루 보내세요.^^

맥거핀 2013-11-06 18:27   좋아요 0 | URL
네..이번에는 현재 추천도서 0권 선정의 위업을 달성중입니다만, 뭐 이 참에 안 땡기는 책도 보고 그러는거죠(분위기를 보니 잘하면 이번에 1권 될지도..). 그리고 영화도 그렇듯이 사실 기대하고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EIDF(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본 영화 단상들 첫번째.

 

 

 

부즈카시(Buzkashi!), 나지브 미르자, 2012

낯선 땅에서 벌어지는 낯선 스포츠에 대한 그러나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 '부즈카시'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벌이던 놀이에서 유래한 전통 스포츠로 타지키스탄에 널리 퍼져있다. 이는 죽은 염소를 땅에 놓고, 달리는 말을 타고 재빨리 그것을 '잡아채서' 정해진 곳까지 이동시키면 득점을 획득하는 게임으로, 많게는 백명이 넘는 인원(과 말)이 동시에 참여하기 때문에 매우 격렬할뿐더러, 늘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도 또 그렇다고 해서 또 그렇게 무모한 위험만이 있는 것만은 아니며, 박진감과 스릴이 넘치는 게임이기도 하다. 영화 <부즈카시>는 이 '부즈카시'에 선수로 참여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축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개인 대 개인으로서 게임에 참가하는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베테랑 챔피언 아잠과 현대식 훈련으로 팀을 짜서 게임에 참가하는 크루세드, 그리고 새롭게 게임에 참여하는 젊은 유망주 아스카가 그들이다.

여기에는 익히 보아왔던 충돌 지점이 있다. 전통적인 훈련 방식과 전통적인 게임 방식을 존중하고 그에 최선을 다하는 아잠과 현대적인 훈련 방식으로 새로운 전환을 꾀하는 크루세드의 충돌이 그것이다. 아잠은 팀을 짜서 훈련하고, 팀을 짜서 게임에 참여하는 크루세드 측을 '마피아'라고 부르면서 비난하고(일종의 팀으로서 게임을 하게 되면,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다. 화투판에 팀을 짜서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 크루세드는 한꺼번에 백명이 넘는 인원이 뛰어드는 현재와 같은 방식은 스포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꿈은 이 '부즈카시'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유망주로서 그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아스카가 있다. 그는 아잠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크루세드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 그러니까 이 <부즈카시>라는 영화의 미덕은 일종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것에 있다. 특색을 가진 인물들과 그들의 충돌과 그 사이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 많은 영화들이 꿈꾸지만 사실 잘 만들어내고 있지 못한 것을 이 영화는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 상에서의 충돌 외에도 다른 충돌들도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유목의 공간과 빠르고 격렬한 부즈카시가 보이는 충돌 같은 것이 있다. 격렬한 부즈카시를 보여주는 사이사이에 느린 호흡의 장면들 - 예를 들어 아잠이 산등성이를 뛰면서 훈련하는 장면을 먼 전경에서 정지된 카메라로 잡아낸다거나 하는 장면들 - 을 삽입하고, 아주 가까이에 붙어서 말과 사람들의 충돌을 보여주다가도 카메라는 언뜻언뜻 아주 뒤로 물러나 먼 발치에서 그 스포츠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표정을 느리게 살핀다. 이러한 정과 동의 충돌은 어쩌면 이곳 타지키스탄의 현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산과 양과 염소와 유목민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곳에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고, 느린 이곳에도 빠른 다른 것들이 점점 들어오고 있다. 크루세드의 훈련장에 울려퍼지던 빠른 비트의 음악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무엇인가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빠른 변화 속에 이들이 언젠가 사라질 운명의 것임을 우리가 예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슬퍼할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또 마지막에 새로운 탄생을 보여주기도 하니까. 아잠의 아들은 언젠가 의사가 될 것이고, 새로 태어나는 새끼 염소도 있으니까. 사라짐과 탄생이 교차하며 삶은 이어진다.

 

 

 

100m 위의 고독(The Solitary Life of Crane), 에바 웨버, 2008

에바 웨버의 이 27분짜리 짧은 다큐는 고공의 크레인에서 외롭게 일하는 기사의 하루를 다룬다. 영화가 취한 방법은 조금 색다른데,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크레인 위에서의 그들이 아니다. 사람 한 명 앉으면 꽉 들어차는 그 공간의 답답함이나 폐쇄성이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보는 세계이다. 100m 위의 좁은 공간에서 그들은 세상을 관찰한다. 지상에서는 누군가가 집을 나서고, 집안을 청소하고, 옥상 위에서 파티를 즐기고, 혼자 앉아서 식사하고,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비오는 퇴근길에 우산을 쓰고 귀가를 재촉하고, 전화로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방에서 옷을 갈아 입는다. 영화는 우리가 크레인 기사의 입장에서 그 세계를 같이 보기를 바란다. 혼자 들어가서 24시간이 넘게 앉아있어야 하는 좁은 크레인 위에서, 사람들을 100m 위의 고공에서 멀리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좁은 크레인 위에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고독하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일 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도리어 가깝게 느낀다는 점이다.

때로는 100m 위의 고독한 크레인 기사들은 어떤 이의 생활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알게 된다. 그들이 매일 집안을 언제 청소하는지 알고, 그들이 밥을 주로 누구와 먹는지 알고, 누가 누구와 친한지 알고,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잠자리에 드는지 안다. 그리고 그들이 때로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게 된다. 즉 역설적인 것은 그들은 고독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타인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됨으로서 고독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반면 대부분의 우리는 시끌복잡한 지상의 세계에서 고독하지 않지만, 나 이외의 타인의 삶을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고독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으로 고독했던 것은 다른 많은 삶을 바꾸기 위해 그런 곳에 올라갔던 김진숙 위원과 같은 이들보다 한번도 그런 고공의 크레인을, 그리고 크레인 위의 사람을 생각해보지 않은 우리들일 것이다.) 마지막, 영화는 런던 시내에 올라가 있는 수많은 크레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춘다. 지상의 삶을 관찰하는 수많은 관찰자들이 그곳에 있다.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것을 쌓아올릴까 고민하는 이곳 서울에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많은 크레인이 있을 것이다. 고공의 관찰자들이 거기에 있다. 그들은 우리를 보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 

 

 

블랙 아웃(Black Out), 에바 웨버, 2012

늦은 밤, 불이 켜진 공터에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뭐 그다지 놀랄 건 없다. 어느 곳에서나 어두워질수록 나이든 사람들은 어떻게든 집으로 가고, 반면 청소년들은 집을 나와 집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은 조금 색다르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일탈 행위들이 아니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이니까. 이곳은 서아프리카의 기니. 인구의 80%는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가동되는 전기도 발전소 시설의 낙후로 번번이 끊기기 일쑤이며, 아이들은 '전기를 지원해주는 집'이 부럽다고 말하는 곳이다. 시험 기간이 되면 아이들은 공항 근처로 모여든다. 시험 기간이 되면 우리네 도서관이 붐비듯이 그곳에는 공항의 공터가 붐빈다. 늦은 밤까지 불빛이 공급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행기 소음과 날벌레들 옆에서 그들은 수학 공식을 외우고, 인체의 기관을 살피고, 주요한 세계사의 사건들이 일어난 년도를 외운다. 그러므로 제기되는 것은 왜 이렇게 환경이 열악한가라는 물음보다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들이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 두 가지의 물음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영화는 두 가지의 교차하는 축을 이용해서 보여준다. 하나는 기니의 열악한 현실이다. 정치는 군부 쿠데타 등으로 불안정하고, 발전소를 비롯한 제반 시설들은 낙후되어 있으며, 풍부한 자원들은 거의 모두 외국으로 반출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그러한 현실을 보고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들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꿈은 대부분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라며 그런 세상이 오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공항의 불빛 속에서 공부를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영화의 마지막은 보여주는데, 학교의 최종 시험일에 아이들은 시험을 치르고 성적은 학교의 벽에 나붙는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라디오에서는 대통령궁이 괴한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대통령은 피신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불안정한 정치에 조그마한 희망을 가져오리라 여겨졌던 대통령이 말이다. 그렇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희망은 늘 무엇인가에 공격을 받는다. 아이들의 공부를 하겠다는 희망은 때로는 블랙 아웃(정전)에, 그리고 때로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부모들의 뜻이나 가족을 돌보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경제적인 부분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늙은 선생님은 힘주어 말한다. 삶의 본질은 희망이며, 희망 없는 삶은 죽음이라고 말이다. 희망의 친구는 늘 신념이다. 그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신념에 희망은 살아남고 삶은 이어진다. 

.................

무엇인가가 교차한다. 느림과 빠름, 정과 동, 전통과 현대, 이전 세대와 미래의 세대. 혹은 고독하지만 타인을 보는 사람들과 고독하지 않지만 타인을 보지 않는 사람들. 혹은 희망 없는 현실과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노력. 좋은 다큐멘터리는 그렇게 교차하는 것들을 잡아내 그 교차점들과 가까워지는 것 혹은 멀어지는 것을 지그시 살펴보도록 함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숙고하게 한다. 물론 그 무엇인가 중의 하나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교차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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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3-10-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 격하게 공감해요. 영화를 보는 이유기도 하고.

맥거핀 2013-10-30 21:24   좋아요 0 | URL
다큐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아요. 생각을 하게 해주는 다큐들이라 좋았습니다.

아이리시스 2013-11-0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블랙아웃]은 제가 맥거핀님이 말씀해주셨을 때 보려고 기억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첫째날에 편성되어 있어서.. 이후에 또 재방이라든지 해서 다시보기가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 여튼 제가 정신을 차린 게 둘째날이라 못..( '') 뭐 이게 자랑은 아니고 하고싶은 말도 아니고.. 제가 하고싶은 말은요, 첫번째 사진 엄청 좋아요. 말이 사람 밟고(자세히보니까 말도 밟힌 ㅠㅠ) 그래서 좋은 거 아닙니다..활력이 느껴지고 뿌연 게 뭔가 역동성이 느껴져서요. 하지만 역시 저는 저 작품을 못볼 거예요, 아마도. 저는 경기시키고 경주하고 돈걸고 스포츠하고 그런 걸 못보겠어요. 오랜만에 읽어도(요즘 좀 뜸해서) 맥거핀님 글은 글자체까지 좋네요(뭔 상관?). 뭔가 맘을 꽉꽉 채워서 가는 것처럼요.

1분만 더있음 내일입니다!

맥거핀 2013-11-04 21:56   좋아요 0 | URL
오..그래도 볼려고 했다는 얘기죠..? 좋아요, 좋아요. 위에 올린 것 말고도 몇 편 더 본 게 있어서 리뷰를 남기려고 하는데, 계속 미뤄지네요. 조금 미리미리써야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도 있고 좋을텐데...이렇게 뒤늦게 올리는 게 자기만족 외에는 무슨 효과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 '부즈카시'란 작품 참 좋았어요. 사진만 보면 엄청 격렬하게만 보이는데, 이 다큐멘터리에는 또 무척 정적인 장면들이 있거든요. 그게 멋있기도 하고, 일종의 리듬도 만들어내고 해서 꽤 좋았습니다. 사람 사는 게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저들의 삶을 보면서 뭔가 이질감을 느끼지만, 저들은 또 우리의 삶을 보면서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살까 하겠죠..

오랜만에 아이리시스님 댓글을 보니 좋아요, 좋아.

아이리시스 2013-11-05 12:44   좋아요 0 | URL
자기만족..그게 좋은 거죠.. 좋은 거예요.. 사실, 리뷰를 보고 나도 봐야지 한 적 거의 없었어요, 저는. 어차피 볼지 말지는 맘속에서 다 결정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알리는 효과, 미리 쓸 필요 없어요. 맥거핀님 리뷰는 그냥 그 자체로 좋아서 읽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다음사람1)
아..그러니까 빨리빨리 쓰란 말입니다..네? 왜 늦어요, 방송정보를 알려주고 올렸어야죠, 이렇게 뒤늦게 올리시면 자기만족 외에 우리는 얻는 효과가 뭐가 있어요. 봤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지마요, 우리집에도 TV 있어요.

(다음사람2)
써준 것도 감사하지 무슨 자기 못봤다고 빨리 올리라느니 효과가 없다느니 차라리 읽지 마세요. 님 같은 사람들은 봐도좋을 작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사람3)
힘들어서 기권



(돌아온 아이리시스) 맛난 점심 드세요!

맥거핀 2013-11-06 18:32   좋아요 0 | URL
어..(다음 사람1)이 제일 좋은데요. 저는 변태인가 봐요. 갈구는 게 좋아요. 하긴 이런 다큐는 사실 때 지나면 못보는 경우가 많아서 보고 다음날 바로 올린다해도 별 의미가 없겠죠. 그저 자기만족만 해도 다행이죠. 요즘에는 자기만족도 안되는 글들도 많아서..

아이리시스님 저녁 잘 챙겨드세요!! (비오는 날에는 늘 술이 땡기는데 그래도 밥을 먹어야겠죠.)

2013-11-09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0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기없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 <인기 없는 에세이>는 그의 후기에 쓰여진 여러 편의 비교적 대중적인 에세이들을 묶은 책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철학이었지만, 단지 그것에만 머물지 않았는데, 그는 철학, 수학, 과학, 교육, 정치, 예술, 종교 등 인간의 거의 모든 부문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부분에 걸쳐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피력하였다. 그것은 이 한 권의 책에도 잘 드러나있는데, 이 책에 실린 12편의 에세이들은 철학의 효용, 인류의 정신사, 인류가 가진 관념들, 인류의 미래상 등등의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여러 부문에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현실과 유리된 철학적인 논의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대의 현실을 깊숙이 반영하여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이야기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에세이들이 쓰인 현실, 그러니까 그 시기인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의 에세이들을 제외하고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은 1946년에서 1950년 사이, 즉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하고, 세계가 급속히 두 개의 커다란 세력으로 분화하던 시기, 냉전이 서서히 그 고개를 쳐들고 있던 시기에 쓰여졌다.

버트런드 러셀이 이 때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반전과 반핵, 평화운동이었다. 물론 당시 대다수의 지성인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서구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결국 이긴 쪽에나 패배한 쪽에나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이대로 더이상 큰 전쟁이 지속되면 인류 전체가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등장한 핵무기와 그것의 증가는 만약 다음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것은 인류의 완전한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조금 더 특별했는데, 그는 이러한 전쟁이 인류의 어리석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러한 전쟁이라는 솥을 부글부글 끓게 한 재료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현대의 전쟁은 거슬러 올라가면 마녀를 처형하던 중세의 재판에서 단지 그것의 목적이 군중들의 분노를 마녀와 마술이라는 허상에 돌리고, 군중을 즐겁게 함으로서 그들의 악한 열정을 만족시켰던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다. (즉 여기에서 도리어 가장 위험하게 여겨졌던 것은 '마술을 부리는 마녀'가 아니라, '마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중세에서 마술을 부린다고 여겨졌던 상당수의 것들은 마술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과학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을 다시 전쟁에 적용한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공격받는 주장은 '우리가 적에게 질 것이다'가 아니라, '전쟁이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니)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질투, 국가적 자만심, 자신의 집단이 우월하다는(특별하다는) 믿음 등등의 여러 '인류에 해를 끼치는 관념들'이 결합되어 전쟁이 수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러셀의 입장으로 보면,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물질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정신세계 자체를 파괴하는 것, 인류의 정신 자체를 복구할 수 없는 파멸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수행되던 영국에서 반전운동을 주장하였고, 그로 인해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1918년에는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렇게 확고하게 전쟁을 반대하고, 혹시 발발할지도 모르는 나중의 전쟁을 우려하는 시각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주된 에세이들의 쓰여진 때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셀은 이 책에서 지금으로보면 조금 의아하다고 느껴질만한 주장, 혹은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무엇인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법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탄생이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느니 미국이든 소련이든 어느 한 쪽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승리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길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중략) 내가 미국을 편드는 이유는, 문명적인 생활 방식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소련보다 미국이 더 존중하기 때문이다. (p.97)" 이것이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정적인 완전성'에 따른 철인이 지배하는 그의 이상국가론이 허구이고, 기만술이라고 맹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이 전체에 위치한다는 관념에 기반한 플라톤의 <국가론>은 비판하면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제국의 건설을 꿈꾼다는 이 껄쩍지근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그러나 당시의 러셀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아니 몇 가지의 가능한 정치적인 대안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의 한 형태를 히틀러식의 국가사회주의(나치), 혹은 스탈린과 레닌의 소비에트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셀이 보기에는 그 두 가지는 전쟁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었고, 또한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 것이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교조주의인데, 그 두 가지의 사회 모두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교조주의가 만연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교조주의의 총체라고 볼 수도 있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또다른 교조주의로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가 발견한 대안은 경험주의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라고 여겨지는 미국 혹은 영국과 같은 사회였다. 즉 그가 책에서 내내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가하는 것은 스콜라주의,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등의 교조주의, 혹은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불분명하고 두루뭉술한 것들이고, 그가 옹호하는 것은 경험론과 합리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 그리고 수학과 과학의 명징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는 그 교조주의의 근원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거슬러 올라가 멀게는 플라톤에서 가깝게는 헤겔까지 도마에 올려놓고 비판하고 있으며, 넓게는 형이상학 전체에 교조주의의 혐의를 덧씌우고 있다.

즉 러셀은 묻는다. 이 모든 게, 즉 철학이니, 인류의 관념들이니, 과학이니, 수학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이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이다(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에세이의 제목은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이다).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정치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며,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을 보존하고,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을 뿌리뽑는 것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쟁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 자문에 대한 자답은 이 정치의 기본바탕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철학은 이론적 목표와 실천적 목표를 같이 지닌다고 말이다. 즉 철학은 이론의 측면에서 과학이 아직 실험할 준비가 안된 방대한 범위의 가설을 세우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특정의 삶의 방식을 부단히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정의 삶의 방식이란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엄밀하고 사려 깊게 사고하는 습관,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바라보는 것, 사고의 대상을 보다 폭넓은 관계 속으로 넓히는 것, 그럼으로서 현재의 불안과 고뇌에 평정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러셀이 강조하는 절대 빼놓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관용과 자비와 박애이다. 러셀이 보기에 당시의 세계는 하나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러셀은 말한다. "지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인류가 유례없는 재앙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인지가 향후 20년 사이에 우리의 총체적 지혜에 따라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p.293)"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 혹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서로 공격하지 않고, 관용과 자비를 갖추고 서로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손을 맞잡는가에 달려 있다. 글쎄. 러셀이 그렇게 말한 시기로부터 6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놓여 있을까. 유례없는 재앙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인류가 이런 위치에 놓인 것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철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즉 우리가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만을 더욱 더 널리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러셀이 현상 파악에 실패하였기 때문이거나, 그가 헛된 것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일까(하기는 러셀이 현재의 미국이 벌이는 패악들을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현상파악이 틀렸고, 경험론과 민주주의에 근거하는 그의 관념이 낡아빠진 것이라고 해도, 그가 말하는 가치들, 특히 그 중에서도 관용과 자비와 박애가 중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도리어 인류가 재앙으로 가까이 갈수록 서로를 관용하는 것, 그리고 서로를 긍휼하게 여기는 것은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60여년 전의 러셀의 이야기가 지금으로서는 고루해보이지만, 지금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닳디닳은, 낡아보이는 가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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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11-0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에게 세상을 묻다]가 생각보다 아주 좋아서 빌릴 리스트에 넣어서 도서관에 갔어요. 그전에 [비트겐슈타인 평전]을 읽고 있었는데 저였으면 당돌하게 도전해오는 비트겐슈타인을 러셀처럼 대하지 못했을 듯해서, 러셀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거든요. 반세기도 훨씬 전에 쓰여진 에세이에서 요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가치와 논점을 본다는 건 중요하고 그래서 가치가 있는 거겠죠. 저는 플라톤의 [국가론]이 완전한 텍스트라고 생각했는데(어떤 이론적인 관점에서는 아니고) 러셀이 그렇게 생각했구나..(끄덕끄덕) 뭐 그런 건가요, 남이 하면 이론이고 자기가 하면 이론+실천인. 아, 저 이 책 아직 안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3-11-04 22:01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태블릿을 하나 샀는데, 전자도서관에서 이북 대여해서 보는 데에 맛들려서 신나게 보고 있습니다. 집 소파에 누워서 클릭 한 번으로 책을 대여해서 바로 읽을 수 있다니 이거 참 신세경이로구나 하면서 말이죠. 조금 아쉬운 건 책이 조금 다양했으면 좋을텐데, 소설 쪽은 그래도 괜찮은 작품들이 있는데, 인문학 쪽은 거의 읽을 만한게 없어서 아쉽습니다. (도서관 얘기 하셨길래 그냥 저의 도서관 근황을 말씀드렸어요.)

으하..사실은 비밀을 말씀드리면, (뭐 별 건 아니지만) 저는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 본 적이 없어서...최근에 천병희 선생의 번역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그거는 전자도서관에 안 나오려나..

아이리시스 2013-11-05 12:59   좋아요 0 | URL
그런데 책을 안 읽긴 안 읽나봐요. 평소에는 거의 인지할 일도 없고 그러려니 하다가 도서관에서 책을 검색해보면 완소신간인데, 게다가 대부분 한 권밖에 안 들여온 책인데도 '거의 다' 대출가능목록에 있어요. (이런 신세경@.@)

태블릿(#.#) 좋겠다..(@.@) 웬만한 인문서가 전자도서관에 등장하는 날 우리나라도 독서국가로 발돋움하겠죠. 아니, 제가 <국가론>을 읽었다고 생각하시는 거 오해입니다..-.-;;;;;

맥거핀 2013-11-06 18:36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에 도서관에 가본지가 100만년전이라 잘 모르겠는데 요즘에 반질반질한 새 책이 도서관에 많나보죠? 저는 사실 내용보다도 '새 거 같은 책' 이런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막 헌 책 같고 그러면 도서관 책이라도 너무 읽기가 싫어지더라구요. 아이리시스님이 남들 잘 안 읽는 보물들을 잘 골라내는 걸지도 모르죠.

근데 요즘에 알라딘 중고도서점 가보면 저도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아니 이런 신간이 여기에 있네 싶은 책들이 많아요. 아니 한 일주일 전에 출간된 책인데, 중고서점에 막 돌아다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저건 좀 그렇지...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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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로 잘 알려진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123페이지라는 짧은 쪽수와 사륙판이라는 작은 사이즈, 그리고 비교적 작지 않은 폰트를 가진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팜플렛이나 선언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질문은 명확하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왜 우리는 가지고 있는 작은 것마저 빼앗기면서 가만히 있는가(혹은 그 '빼앗김'을 도리어 옹호하고 있는가)? 그러나 원래 질문이 간단하고 명확할수록 대답은 조금 더 긴 사색을 요하는 법이다. 바우만의 방법은 이렇다. 먼저 우리가 얼마나 경제적 불평등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사실적인 판단력이 작동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불평등의 옹호에 내재한 4가지의 '부정의의 교의'를 살펴보고, 그 '부정의의 교의'를 깨부숨으로써 우리가 논리적 정당성을 갖추고, 이것이 행동의 의지를 일으키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실에 의거한 판단과 논리가 결합된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바우만이 먼저 제시하는 것은 여러 자료들에서 찾아낸 불평등의 양상들이다. 경제적으로 '20대80의 사회'라는 이야기는 이제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자료들이 보여주는 것은 현재는 거의 1대99의 사회이거나 0.1대99.9의 사회, 혹은 그 이상의 사회라는 사실이다. 대략적으로 '전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 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 배가 된다.'(p.18) 혹은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퍼센트가 생산된 재화의 9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퍼센트는 불과 1퍼센트만을 소비하고 있다(p. 19). 문제는 이것이 계속 악화되고 있으며, 급격하게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에 미국 최고 대기업들 최고경영자의 세후 평균 보수는 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의 12배였다. 1974년에는 이것이 35배가 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는 135배, 1999년에는 400배, 2000년에는 531배가 되었다(이와 비슷한 수치들은 다른 부분에서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세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만이 아니고, 전세계에서 중산 계급들은 점점 '프리카리아트(불안정한 고용이나 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파견직, 실업자, 노숙자들을 총칭하는 말)'로 전락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런 경제적 불평등은 비단 경제 부분만이 아니고, 사회의 전부분에 걸쳐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점증하는 사회병리와 큰 상관관계가 있음을 관련한 연구들은 보여준다. 마지막 하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일텐데, 그것은 이 마지막에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 파국은 매우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평등은 왜 감소하지 않는가? 아니 감소하기는 커녕 왜 도리어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소수의 부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기이한 믿음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용어로는 '낙수효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비슷한 다른 표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다. 부자들의 감세가 경제를 발전시킨다. 삼성이 잘 되어야, 우리나라가 잘 된다.) 바우만이 이러한 기이한 믿음을 부수기 위해 채택한 전략은 이 표면에 자리잡은 '교의'를 직접 공략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교의'에 내재한 '부정의의 교의'의 기만들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부정의의 교의'는 큰 소리로 선언되는 확신들을 뒷받침하고 '타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암묵적인 전제들로서, 지금까지 숙고되거나 검토된 적이 거의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암시만 될 뿐 분명하게 표현되는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믿음들을 가지고 생각한다(p. 35~36).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이한 믿음'에는 몇 가지의 암묵적인 믿음들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 믿음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바우만의 말이다.

바우만이 보여주는 네 가지의 내재된 믿음, 즉 부정의의 교의는 다음과 같다(p.49).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만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4. 경쟁(가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정리하자면 불평등과 경쟁은 사회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거나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을 감수하고라도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소비가 필요하다는 교의, 혹은 믿음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 교의들이 거짓말이거나, 혹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올 수 있는 믿음임을 다음의 이야기로서 보여준다.

1. 경제성장은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낙수 효과는 없고, 경제성장은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의 부만 더 늘려주고 있음을 수치들은 보여준다. (예를 들어 2007년의 신용 붕괴 이후 미국의 GNP 증가분의 90퍼센트 이상이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미국인들에게 돌아갔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p.59).
2. 행복에 이르는 것이 소비라는 말은 현재의 부정의를 잊게 하는 당의정에 불과하다. (9.11 다음날 당시 대통령 부시가 제시한 최선의 행동 수칙은 '쇼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현재 공공연하게 제시되는 소비 권장 메시지는 소비를 놓고 대중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듦으로써 대중들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소비사회에서 (슬로푸드 운동과 같은) 공공의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3. 불평등이 당연한 것이라는 오랜 믿음은 사회적 불평등을 무리없이 수용하게 하면서, 오히려 그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불평등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회의 질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옆에 사람이 조금 더 가지거나, 자신의 생활수준이 조금 더 나빠지는 것을 부정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우리는 작은 불평등에 분노하지만, 커다란 불평등은 정상적인 것, 혹은 자연의 섭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오랜 교육과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4. 소비사회에서 소비자와 물건이라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우리는 인간사회에마저 적용하고 있다. 상대방을 주체로 대하는 정당한 인간관계는 상대방을 객체로 대하면 되는 경쟁관계보다 더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협력과 공생보다는 경쟁이 우선 순위가 된다. 이는 소비사회의 특징이며, 그것을 쇼핑몰들은 보여준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인간의 선의와 친절보다는 입구에 있는 CCTV나 무장경호원에 더 의존한다.

...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맥이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이렇게 얘기하고 싶을지 모른다. 아니 겨우 그런 얘기하려고...그거 별로 안 좋은 거는 우리 모두 잘 알잖아요. (혹은)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그거 어쩔 수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 말 많이 해왔지만, 여전히 사회는 이 모냥, 이 꼴이잖아요. 모두들 다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경쟁하고 소비하면서 사는데, 나 혼자 협력하고 선의와 친절을 보여주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후....맞는 말이다. 그것은 바우만도 인정한다. "우리가 소망하거나 없애버리기에는 너무 강력하고 벅찬 것들을 지칭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p.111) 그러나 여전히 포기해서는 안되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이유라기보다는 하나의 모순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이제는 끝났다. 이제는 다가오는 파국을 멈출 기회도 희망도 없다. 둘째,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말하고 생활방식을 바꿈으로써 말과 행위의 간극을 줄이려, 파국을 막으려 노력해야 한다.

바우만은 말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p.114) 어느 작가는 1939년 8월 23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끝났다'는 진술이 아니라, 그가 이 진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진술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가를 '진짜'작가로 만드는 것은 현실에 대한 말의 영향력이고, (진술을 한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말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후...당신이 이것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동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혹은 차라리 파국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1925년생으로 나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겪은 노학자는 파국을 막기 위해 글을 쓰면서 애쓰고 있다. 나도 파국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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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6 1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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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7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11-04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지나긴했는데 일본 사법고시에서 교포가 아닌 한국 일반여성이 처음으로 합격했는데 부산여자인 거예요. 정확하진 않지만 아시아최초, 외국인최초 뭐 그렇게 났던 것 같아요. 지역신문에서 봤고요. 국제변호사가 되겠다고 중퇴한 학교는 제가 사는 구에서 갈 수 있는 다섯 개 여고중 하나였고, 교포가 아니니까 언어가 안돼서 서너시간만 자고 공부했대요. 나이도 20대라 관심있게 읽었는데, '처음으로'가 맘에 걸려서 제가 나름 분석끝에 한 소리가, 누가 일본에서 변호사를 하겠다고 하겠어, 하겠다고 시험 볼 확률이 적으니 당연히 합격률도 낮겠지 생각했었는데 이 리뷰 보면서 그때 생각났어요.

20%:80% 이런거,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이나 불평등 이런 게 저는 특히 심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늘 생각했거든요. 우리나라가 이상한거지, 나는 괜찮아.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잖아요. 다른 사람이 가난하다고 내가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겪지않은 걸 두려워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우린 공산주의도, 전쟁도 모르니까 그것들이 만들어놓은 불합리도 이해할 수도 없고 어떻게 우리 잘못이 아닌지도 잘 모르고요. 이런 와중에 TV 틀면 상속자들이 드글거리는 [상속자들] 같은 거나 하고.. 맨날 재벌2세는 가난한 여자를 사랑해요. 으흐흐흐.

강남에 있는 (장사하는)건물들 90%는 우리나라 자본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건물이 아니라 업체가 우리나라껀 아닌 거겠죠. 그게뭐든. 요즘은 제주도도 그렇대요. 중국이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다고. 우리나라도 우리 게 아닌데, 이 나라에 내껀 없어요. 갑자기 슬퍼요 ㅠㅠ (저 지금 뭐하는 거임?-_-;;)

맥거핀 2013-11-04 22:19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뭔가 진지한 댓글인 척 하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슬퍼지는 이 댓글은 앞뒤가 안맞습니다. 다음 번에 조금 더 진지한 자세로 응모하시기 바랍니다.ㅋ

..는 뻘소리구요. 읽다보니까 과연 불평등이 어디까지인지,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여러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 기회를 평등하게 해주면 평등한 것인가...국제중 입학 전형에서 같은 시험기회를 주면 공평한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꼭 그런 건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사 붙고, 엄청난 과외받고 한 아이들이 더 유리할 것은 당연한 이치고, 그렇다고 어느 정도까지 평등하게 만들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원시공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는 문제죠.

그리고 (책에 집중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이지만) 경제적 불평등만 있는것도 아니고, 심리적인 부분이나, 사회적인 부분은 더 크고,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죠. 차라리 파국이 나을까요? 알라딘 서재의 배너에도 '자본주의의 파국'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던데, 파국이 무엇이 될 것인가, 즉 그 '파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가 될 것인가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자본주의의 비행은 이미 글렀고, 그럼 이제 연착륙 시켜야 하는데, 그 연착륙마저 어렵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동체착륙이라든가, 수상착륙이라든가)을 시도해봐야겠지요. 물론 여기서 지금이 연착륙을 포기할 시점인가?,의 문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구요.

아이참..나도 <비밀> 끊어야하는데...그러니까 재벌 2세를 만나려면 먼저 가난해져야만 하는 거군요..응?

아이리시스 2013-11-05 13:04   좋아요 0 | URL
..가난한데 미국에 가서 언니한테 버림받고 잘 곳이 없어지거나, 가난한데 재벌2세가 사랑하는 가난한 여자를 실수로 죽여야죠..

1시다, 대낮에 알라딘하니까 좋다, 맨날 밤이나 새벽에만 하다가.. 이제 맛난 거 먹으러 갑니다..안녕..

맥거핀 2013-11-06 18:38   좋아요 0 | URL
근데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2세들은 왜 다 이렇게 잘생긴거임? 돈이 있어서 성형한건가..돈이 많으면 못생기기라도..아님 돈이 많고 잘 생겼으면 성질이 엄청 더럽기라도 해야지..돈이 많고 잘 생겼는데, 성질 더러운 것 같았지만 알고 봤더니 착해!, 왜 다 이런 애들 뿐인가요.
 

  

 

 

 

 

 

 

 

 

 

 

 

어떤 여인의 고백, 아틱 라히미, 2012.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지속된 전쟁으로 페허가 된 아프가니스탄. 그곳에서 한 때 전쟁영웅이라고 불렸던, 이제는 총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돌보는 한 여인의 삶. 포성은 계속 울려퍼지고, 먹을 것을 달라고 딸들은 보채고, 끊임없는 기도에도 남편은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는 왠지 익숙하다는 선입견을 준다. 이 여인은 끊임없는 내부와 외부의 압박에 시달릴 것이고, 그것을 보는 우리들 역시 고통스럽지만, 스크린 밖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과 또한 우리는 그런 것에 멀어져 있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줄 것이라는 선입견 말이다. 그런데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영화는 슬슬 이상한 방향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고통 속에서 기도와 인내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보였던 여자는 빨간 옷을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남편 옆에 요염하게 앉아 있다. 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영화 <어떤 여인의 고백>에서 영화가 달라지는 것은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녀가 고백을 하는 시점부터다. 무엇이 그녀를 달라지게 만드는가. 중요한 것은 고백의 내용이 가지는 어떤 파괴력이 아니라, 단지 그녀가 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즉 그녀가 발화자가 된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화자가 된 적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듣는 쪽이었고,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메추라기들을 싸움 붙이는 도박에 미쳐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언니를 도박빚 대신 나이든 남자에게 넘겼고, 그녀 역시 단지 전쟁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인내하는 삶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남편은 밖에서는 전쟁영웅일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가부장적인 남편이었고, (영화에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말을 하는 쪽은 그녀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물론 그녀의 남편이 이제 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니 말을 넘어서 이제 둘 사이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은 아내이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은 그녀의 보호 없이는 죽고 말 것이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 부부의 관계, 즉 역전되어 버린 말을 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를 이 인습과 굴레의 총체라고 부르는 것조차 표현하기에 부족해보이는 이 이슬람 사회 전체에 확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시작은 그녀를 몸을 파는 여자라고 오인한 한 젋은 군인과 그녀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이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어린 그녀가 남자와의 성관계를 처음 배운 것은 거칠고 나이든 그녀의 남편으로부터였고, 그 관계에서 그녀는 단지 남편이 이끄는 대로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다르다. 이 젊은 군인은 여자와의 관계가 처음이고, (처음의 시작은 남자의 오인과 일방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 관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그녀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성적인 관계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물론 가장 큰 메타포는 그 남자가 극도로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대화를 이끄는 것은 그녀고, 이 남자에게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군대에 끌려간 소년병 출신이라는 고백을 끌어내는 것도 그녀다. 즉 이 관계에서 다시 우위를 점하는 것은 그녀이고, 그 남자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것도 그녀이다.

 

즉 이 영화에서 조금씩 희망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남자들이 입을 닥치고 난 이후이다.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것은 이어지는 폭력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포격과 총소리, 종교지도자들의 지나친 간섭, 식물인간으로 큰 짐덩어리처럼 보이는 남편, 총을 들고 위협하는 군인들과 잔혹한 살해, (그녀의 고백으로 알게 되는) 어린 시절에 그녀를 지배했던 아버지의 폭력. 이것은 남자들의 세계이고, 남자들의 폭력이다. 그런데 그녀의 고백과 맞물려 이야기의 중심이 조금씩 여성들에게로 옮겨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나아져 간다. 짐덩어리에서 이제 그녀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 남편, 그녀가 피신하는 그녀 이모집의 기이해 보이는 여성공동체(물론 이것이 기이해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또 한편으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사람이 '고모'가 아니고 '이모'임을 주목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아들이 아니라 두 명의 딸이 있다는 사실과도 연관될 것이다), 그녀와 젊은 군인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점하는 우위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것을 그녀의 이모는 약간의 유머 섞인 말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사랑을 잘 하는 남자가, 전쟁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국가적인 폭력, 외부의 만연한 폭력은 사회 내부의 폭력, 작게는 한 집안 내부의 폭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남자들이 집 안에서 벌이는 메추라기들을 데리고 하는 투기(鬪技)는 외부의 지독한 전쟁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여성이 지배하는 작은 사회에서는 폭력은 없다. 여인은 식물인간인 남편에게 고백을 하며 돌보고, 이모는 비참한 상황에 놓인 여인을 감싸 안으며, 또 여인은 소년병으로 학대받아야 했던 젊은 남자를 품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결국 폭력과 전쟁이 지배하는 부계사회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이 지배하는 모계사회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결정적인 고백과 그녀가 보여준 행위로 연결되는데, 이는 이 영화를 뻔하지 않게 만들면서, 동시에 이러한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자, 새로운 시각으로서의 진전이기도 하다. 그것의 시작은 단지 몇 마디의 말, 고백이었다.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것의 힘, 그것이 가지는 작은 파괴력이 어쩌면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동력으로도 변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덧.

이 영화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좁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데, 빛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여 답답함을 많이 벗어나고 있다. 또한 클로즈업, 때로는 익스트림한 클로즈업까지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는 인물의 감정을 잘 잡아낸다는 주된 효과 외에도 좁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잘 어울려 영화 전체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여주인공을 맡은 골쉬프테 파라하니의 연기도 인상적인데, 영화 초반부와 영화 마지막에 이른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아..그리고 이 영화는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스스로 영화로 만든 경우다('제2의 이창동'이라는 카피가 있어서 조금 웃겼다). 공쿠르상을 받은 소설이라고 하는데, <인내의 돌>이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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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0-1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찜해두고 있는데 요새 비프 영화들 골라 보고있느라ᆞᆢ다음주나 이번 일욜까지 걸려있을 지 모르겠네요. ^^ 오랜만에 맥거핀님 영화이야기 반가워요. 저도 뜸하다 못해 아주 밀려있지만요.

맥거핀 2013-10-11 14:44   좋아요 0 | URL
아..비프. 가고 싶었는데, 주말에 간다해도 제대로 영화를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올해에는 몇몇 정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매년 이맘때 쯤이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분들이 늘 부럽습니다. 다음주에 EIDF가 있는데, 그곳에서 아쉬움을 달래야겠습니다(몇몇 영화를 예매해두었어요). 볼 수 있을 때 보세요. 영화는 볼 수 있을 때 봐야합니다.^^

암튼 프레이야님 오랜만에 반가워요. 건강히 잘 지내세요.^^

아이리시스 2013-10-1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어째서 원제가 아니라 [어떤 여인의 고백]인가 했더니 그래서 그랬군요. 리뷰가 쏙쏙 들어와서 좋아요. 영화제는 진짜 활짝 핀 꽃같아요. 정말 재밌어보이는 영화들이 많은데 티켓 경쟁에서도 밀리고 시간도 겹치고 아무리 많이 봐도 결국 놓치는 게 있고 그래서 아쉬워요. 올해는 특히 관심영화가 엄청 많은데..

EIDF도 재밌을 것 같아요. 부럽.. 영화제도 신나게 개막식 한번쯤 가보고 싶은데 올해는 정각에서 3초만에 티켓경쟁에서 실패... 아, 저희집 근처에도 예술관 있어서 이 영화 하네요. 가봐야겠어요.^^

맥거핀 2013-10-14 14:58   좋아요 0 | URL
근데 대체로 영화제를 가면 말이죠, 여러 편 많이 보기는 하는데, 정작 좋은 건 1-2편 밖에 안되요. 여러 편 봐도 다 잘 들어오지도 않구요. 처음에는 막 의욕적으로 하루에 3편 이렇게 보다가, 술에 쩔고, 피곤에 쩔면 나중에는 하루에 1편, 그것도 영화관가서 막 졸고 있어요. (아마도 다들 그러지 않나요?)

EIDF는요, 거기에서 상영하는 상당수의 작품들이 동시에 EBS에서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시간만 잘 알아두면 좋은 작품들을 집에서도 볼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블랙 아웃>이라는 작품 좋을 것 같아요.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빛을 찾아서 공부를 하는 얘기예요. 그 동네에는 밤에 불이 있는데가 잘 없으니까.

으흐흐..3초만에 티켓경쟁에서 실패요? 저 이번에 야구 플레이오프 게임보려고 예매해볼까 생각중인데, 저도 비슷한 처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LG야구는 올해 가을야구 못보면 또 언제볼지 모르는데..이번에도 11년만에 진출한거라..

넙치 2013-10-1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볼까말까 망설이는 중인데 맥거핀님 리뷰 읽으니 봐야겠어요. 불끈!ㅋ eidf 올해는 제가 놓쳤나보다 했는데 다음 주란 정보도 얻고 가네요.^^

맥거핀 2013-10-14 15:01   좋아요 0 | URL
정확히는 18일 개막입니다. 저도 이번에는 가능한한 많이 보려고 생각중입니다. 이번에 흥미로워보이는 작품들이 많더군요. 제가 위에 리뷰 쓴 작품도 좋아요. 예상했던 패턴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라 좋았습니다.

2013-10-1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후반부군요. 달라지는 삶, 처음과 너무 다른 여주인공. 갑자기 <바그다드 카페> 생각이.. 이 영화랑 전혀 다르지만.ㅎ / 블랙아웃, 저도 관심.. 비프에서 페루음악에 관한 다큐 봤는데 좋았어요. 그리고 태국영화 하나 봤는데, 이건 보고 나서 친구들하고 씹는 재미가 있었다는..ㅋ

맥거핀 2013-10-16 17:10   좋아요 0 | URL
아..비프 가셨었군요. 영화제의 참맛은 영화보고 나와서, 돼지국합 한그릇, 혹은 회라도 한접시, 돈이 안되면 오징어 한마리라도 먹으면서 잘근잘근 씹는 맛이죠 (아..오징어 말한 겁니다.ㅋ).

아..그리고 밑에는 도움이 될까 싶어서 EIDF 영화들 EBS 시간표예요. 시간만 잘 맞추면 양질의 다큐들을 집에서 볼 수 있어요. (뭐 이러니까 홍보하는 것 같군요.;;)

http://www.eidf.org/kr/movie/tvSchedu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