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2012.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타비아니 형제는 조금은 특이한 형태의 구성을 하고 있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관객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연극의 절정을 지나고 마무리 단계에 이른 장면이다. 시저를 암살한 모의에 동참한 브루투스가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장면 말이다. 그리고 결국 브루투스는 죽고 연극은 관객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끝나고 배우들은 성공에 기뻐하며, 퇴장한 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때 화면은 흑백으로 전환되고 시간은 6개월 전으로 플래시백 된다. 이 배우들이 '줄리어스 시저'를 처음 시작하던 그 때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연극의 제작발표에서부터 배우들의 오디션, 그들의 연습과정을 차례대로 짚어가기 시작한다.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것은 이 때부터다. 영화가 선택하는 것은 이들의 연습과정을 극의 순서에 맞추어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들은 이들의 연습을 보면서, 동시에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을 본다. 이들의 연습은 브루투스 일파의 시저 암살모의에서부터, 점쟁이의 시저 운명에 대한 암시, 시저의 암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과 같은 순서로 우리들에게 보여지며, 이로써 우리는 이들의 연습을 볼 뿐만이 아니라,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한편의 연극을 이 영화를 통해서 오롯하게 감상한다.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연습과정만을 보여줌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 이들이 침대에서 (자신들이 '천장관찰자'라며)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이 영화를 한편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생각해본다면 시저의 암살 장면 전에 들어가 있는 장면이다. 즉 이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실제상황(물론 이는 짜여진 '실제'이다)'을 마치 거사의 실행 직전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브루투스 일파의 모습처럼 비춰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연날 철문이 열리며 관객들이 우루루 들어오는 모습이 브루투스 세력과 안토니우스 세력의 전투 장면의 전초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나, 무대를 새로 제작하는 동시에 새로운 배우가 이 연극에 투입된다고 하면서 그가 옥타비아누스 역을 맡게 된다고 했을 때 생겨나는 효과들도 마찬가지이다(왜냐하면 '줄리어스 시저'라는 극의 내용에서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은 그 자체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면서 동시에 사태의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연극은 동시에 재소자들의 교정교화의 일환으로 상영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배우들은 모두 조직폭력, 살인, 마약밀매 등으로 최소 15년에서 40년 이상을 선고받은 중범죄자들이며, 이들이 연습을 벌이고 있는 이 공간은 교도관의 엄중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교도소이다. 그러므로 이 연습은 단지 연습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들의 어떤 개인사들과 겹쳐지는데, 예를 들어 한 재소자는 연습을 하다말고 연극의 어떤 소도구로 기억하게 된 자신의 옛일을 생각하느라 연기를 이어가지 못한다. 즉 이들에게 이 연극을 하는 실질적인 중요한 문제는 관객에게 좋은 연극을 보여준다는 것보다도 이 연극에 참여함으로써 자신 내부의 무엇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됨으로써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상연하는 연극이 바로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사실일 것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이유는 시저가 왕이 되려한다, 즉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 되리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즉 자유를 찾으려는 이들의 거사가 바로 자유가 없는 교도소 재소자들에 재연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이들이 벌이는 연극 '줄리어스 시저'는 단지 역사극이 아니라, 마치 이곳 현재의 이야기처럼 보이며, 이들은 단지 연기로서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이들 역사적인 인물이 빙의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가 죽은 시저의 시체를 광장에 데려다 놓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선택을 할 것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면, 창살에 갇힌 다른 재소자들을 마치 로마시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자유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를 묻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현재의 한 장면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이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들이 오디션을 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오디션은 오랫동안 떨어져야만 하는 가족에게 자신의 신상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과 수사기관에서 강요에 의해 자신의 신상을 말해야 하는 상황, 두 가지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즉 이들은 나름의 슬픈 사연을 가진 개별의 인간일 수 있지만, 동시에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장면은 보여준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역할을 실제의 재소자들이 맡은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픽션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고(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다큐로만 보기는 힘들다. 이들 중범죄를 저지른 재소자들이 교도소에서 연극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는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 보다 가까이 들어온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시작부에서, 연극의 마무리와 연극이 끝난 후 이들이 다시 하나하나 수감되는 장면을 보여준 후, 다시 6개월 전으로 돌아가서 이들의 6개월을 한편의 연극으로 보여지도록 한 다음에 연극이 끝나고 이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각자의 방에 수감되는 장면이 되풀이되며 끝난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서 두 번 보여지는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나고 마지막에 수감된 한 재소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하는 대사이다.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이제서야 감옥이 되었구나."

 

 

이 두 가지를 보면 타비아니 형제가 결국 우리에게 보여주려던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다. 즉 두 번이나 반복하여 보여지는 것이 이 영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저를 사랑했지만, 시저보다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브루투스의 자결, 즉 자유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난 후 각자의 방에 갇히는 이들 재소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마지막 재소자의 말로 반복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드디어 감옥으로 느껴진다는 그 말은 예술이라는 것에 담긴 자유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들은 연극이 마침내 끝났기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는 것일 뿐이지만, 연극을 통해서 브루투스가 되어 자유라는 것을 간절히 외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술 그 자체에서 자유를 맛봤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들이 이곳에 갇혀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즉 타비아니 형제는 이 교도소에서 이루어지는 연습 자체를 하나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만들어 이 교도소라는 갑갑하고 막힌 공간을 로마의 거리, 로마의 광장으로 확장했지만, 이 마지막에 이르러 연극을 종결시켰고, 로마의 거리와 광장을 다시 교도소로 되돌려 놓았다. 그것에 담긴 의미를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 브루투스의 자결과 재소자들의 수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에 들어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마지막 메시지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연극적인 효과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지만(연극은 관객을 정면으로 향하고 발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것은 꽤 특수한 경우이다), 이미 연극은 끝났고, 그들 앞에 남아있는 것은 우리 영화를 보는 관객들 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연극의 연습, 실제의 연극, 재소자들의 현실이라는 이 3중의 이야기가 우리 관객들에게 던지는 또 한겹의 메시지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이 '줄리어스 시저'의 결말 이후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죽였고, 그들은 그들의 희생으로 자유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결국 이루어진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제정이었다. 즉 '줄리어스 시저'에는 공화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선택한 것이 결국 황제의 즉위를 불러왔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며, 그것은 로마의 시민들이 결국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교도소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 관객들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기꺼이 위정자를, 아니 왕을 모시고 있으니까. 또한 우리는 여전히 예술을 모르고 그런 우리들에게도 각자의 작은 방은 각자의 감옥일 뿐이니까.

타비아니 형제의 이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77분의 미니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장치로만 이루어진 영화이다(물론 이 영화가 미니멀한 장치로만 전개되는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교도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도소라는 곳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은 필요없는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미니멀한 장치를 가진 이 곳이 거대한 로마의 거리, 광장처럼 보이는 것은 타비아니 형제의 마법이 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공간을 확장시켰던 타비아니 형제는 다시 기어이 그것을 좁은 방으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우리 관객들에게 각자의 좁은 방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다시 이 이야기를 교도소의 담장을 넘어 우리 각자의 현실로까지 재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좁은 방이 각자의 감옥임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을 알아야만 하고, 그제서야 우리는 그 제목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그 의미를 말이다. 우리의 '시저'는 누구입니까.


덧.
지난 금요일, 만료를 앞둔 롯데시네마 포인트를 사용하려했지만, 영화를 선택하기가 참 어려웠다. 예를 들어 롯데시네마 건대입구는 특별관 샤롯데와 아르떼관을 포함해 총 12개관이 있지만, 9개관에서는 <아이언맨>이 2개관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이 상영중이었고, 다른 모든 영화는 그 작은 아르떼관에 몰빵되어 있었다. 그렇게 온 국민이 그 철갑덩어리를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 무슨 흥행신기록이니 뭐니 하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참 난감하다.

나는 대신에 일산에서 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보았는데, 덕분에 좋은 영화도 보고, 일산의 밤거리도 구경하고, 갔다왔다하면서 장시간 독서도 했으니 롯데시네마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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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5-0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잡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휘리릭 읽고 지나갔는데 맥거핀님 보셨군요. 전 <장고>이후 영화관 근처에도 안 갔는데; 아무래도 다음에 볼 영화는 <위대한 개츠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이 한 군데에서라도 개봉하길 기다리는 마음_- 하아, 멀티플렉스의 물량공세는 질리고 지치군요. 아, 저 최근에 <화차>다시 읽고 영화(한국)도 봤습니다. 화차 페이퍼로 가서 댓글 달까요?(웃음)

덧) 이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읽기만 하고 다른 얘기만 하네요; 음, 배경을 바꾸셨군요! 라고 끝까지 다른 얘기......

맥거핀 2013-05-08 15:25   좋아요 0 | URL
날씨도 따스해지고 해서 산뜻하게 바꿔봤습니다. 괜찮나요?

저는 사실 바즈 루어만이 별로 취향도 아니고, 왠지 디카프리오 연기도 안봐도 알 것 같고(...), 너무 원작의 감동을 알아야, 어쩌구 하는 책 광고도 왠지 비호감(...)이어서 아마도 보러가게 될 것 같지는 않군요.^^;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요새는 멀티플렉스에 가면 아이언맨 밖에 없는 게 너무 짜증이 나서, 막상 개봉하면 바즈루어만이든 뭐든간에 볼 것 같기도 합니다만..아무튼 요즘의 멀티플렉스는 도를 넘었어요. 많이 팔리는 영화, 많이 거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그것도 정도와 상식이란 게 있죠. 최근에 멀티플렉스에서 한 영화가 일정비율을 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준비중이라 여러모로 찬반양론에 말이 많은 걸로 아는데, 법 들이대기 전에 알아서 상식을 가동해주면 참 좋을텐데 말이죠.

Shining 2013-05-10 11:35   좋아요 0 | URL
산뜻하기도 하고 왠지 좀 더 감성적인 느낌이에요. 말랑말랑?(웃음)

저도 바즈 루어만은 취향이 아니고 디카프리오 캐스팅에는 동의할 수가 없어요(...내가 뭔데 여전히ㅋ). 닉 캐러웨이 역의 토비 맥과이어와 캐리 멀리건의 데이지는 듣는 순간부터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디카프리오가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항상 예상 가능한 연기를 하는 느낌이에요. 이런 얼굴로 화를 내겠지, 이렇게 윽박지를거야, 이런 식으로 절망하겠군, 등등의 예상 가능한? (제가 언젠가도 이렇게 똑같이 말했죠?큭큭) 아내가 죽은 남자 3부작(레볼루셔너리 로드 - 셔터 아일랜드 - 인셉션) 보고 짜증이 확 나더라는_- 마찬가지로 이 얘기도 전에 했던 것 같은데 저는 개츠비 이미지를 (개인적으로는) 마이클 패스빈더나 피터 사스가드에 가장 가깝게 상상했거든요(애먼 이야긴데, 마이클 패스빈더 왜 이렇게 섹시하죠....쿡쿡).

아이언맨, 돌풍이라는데 저는 2보고 너무 실망해서_- 꿋꿋이 안 가렵니다.

상식, 상식 없는 사회로는 대한민국이 최고죠. 하아.

맥거핀 2013-05-10 22:14   좋아요 0 | URL
저도 디카프리오 연기가 어째 비스무레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캐릭터들이 비슷한 걸까 보면 그것도 딱히 아닌 것 같은데, 뭐랄까 배우가 캐릭터를 잡아먹는달까요. 디카프리오가 주연인 'J. 에드가' 같은 영화를 봐도요, 무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의 영화인데, 이스트우드의 색깔은 별로 안느껴지고, 이건 뭐 디카프리오의 영화이군 하는 생각만 들어요. 캐릭터가 인상에 많이 남긴 하는데, 남는 건 캐릭터밖에 없으니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혹은 이걸 의도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개츠비 원작을 보지 않아서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네요. 마이클 패스빈더라면 매끈하지만 뭔가 너무 매끄러워서 좀 이질적인 느낌이 있죠. 그리고 피터 사스가드는 대머리 아저씨 아닙니까?! 하긴 대머리도 섹시할 수 있다는 것은 일찌기 키퍼 서덜랜드에 느꼈습니다만...

아이언맨은 나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왠지 망했음..싶은 것이..-_- 물론 망하지 않고 잘 나가고 있습니다만...
 
복수는 나의 것 (2disc)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영화의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습니다.)



2002년 3월 개봉한 박찬욱의 네 번째 장편 <복수는 나의 것>은 이른바 '복수 연작'의 서두이며, 박찬욱 특유의 세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영화 그 자체로 보면, 이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의 중반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둘로 나뉘어지는 듯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아이러니한 사건의 중첩이다. 일은 계속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한 가지 사건은 다른 한 가지의 사건을 불러오며,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 결과 영화 중간의 한 가지 사건, 즉 아이의 죽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아이의 죽음이 불러오는 죽음의 연쇄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반부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이 <복수는 나의 것>의 플롯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먼저 전반부의 사건을 짚어보자. 사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죽음, 그러니까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어린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사건은 매우 발생할 확률이 낮았다. 아니 어떻게보면 낮다고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이의 죽음은 다음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발생했다. 1. 신장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아픈 누나를 둔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들에게 사기당해 가지고 있던 돈 전부와 자신의 신장을 털린다. 2. 그런데 그 때 누나가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증자가 나타난다. 3. 류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미(배두나)와 함께 유괴를 계획한다. 4. 원래 유괴하려던 아이는 다른 아이였지만, 자신들이 노출될까 두려웠던 류와 영미는 유괴의 대상을 그 아이의 친구, 즉 동진의 딸로 바꾼다. 5. 이때 자신 때문에 유괴를 저질렀음을 누나가 우연히 알게 된다. 6. 누나가 죄책감에 자살한다. 7. 누나를 어릴 때 같이 놀던 곳에 묻으려한다. 8. 그 누나를 묻으러가면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간다. 9. 아이는 류가 누나를 묻을 동안 차에서 자고 있었지만 목에 건 목걸이를 뺏으려던 동네 지체장애인에 의해 깨어난다. 10. 류를 찾으러 차 밖으러 나온 아이는 실수로 강물에 빠진다. 11. 구해달라고 소리치지만 류는 청각장애인이라 듣지 못한다. 12.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류는 아이를 구하려했지만, 물이 자신의 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뛰어들 엄두를 못낸다. 그러나 이는 류의 착각이었다(어릴 때 이후 그곳에 가보지 못한 류는 물의 깊이보다 훨씬 자신의 키가 자랐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1. 류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2. 기증자가 그 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3. 유괴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더라면 4. 원래의 아이가 유괴되었더라면 5. 누나가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6. 누나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7. 누나를 다른 곳에 묻으려했다면 8.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9. 아이가 차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10. 아이가 강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11. 류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12. 그리고 류가 자신의 착각을 빨리 알았차렸더라면, 적어도 동진의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즉 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건은 무려 12개의 우연이, 혹은 12개의 운명이, 아니면 12개의 오해, 오인, 혹은 잘못된 선택이 중첩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아니 박찬욱의 잔인한 장난으로 사건은 발생했고, 동진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 즉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뚝뚝 물을 흘리는 죽은 아이의 환영 혹은 실재(아이가 나타난 뒷날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환영이 실재였다는 보장은 없다)나 아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물론 그로 인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류와 영미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온 전기고문기를 손에 든 동진을 보고, 장기밀매업자는 자신을 찾아온 가위를 든 류를 보고, 다시 동진은 칼과 성명서를 손에 쥔 4명의 사내들, 즉 영미의 복수를 하러 온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본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양상, 혹은 복수의 연쇄를 본다. 동진은 류에게 복수하고, 류는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고, 영미는 다시 동진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복수는 이것이 전부인 것일까? 어쩌면 동진이 류에게가 아니라, 류가 동진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동진의 딸의 죽음을 류의 복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류가 동진의 딸을 죽게 만든 것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복수의 실행 같은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으며(이 논리는 나중에 <친절한 금자씨>에 그대로 반복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류와 영미는 돈을 받으면 아이를 얌전히 돌려줄 생각이었다(혹은 받지 못했어도 돌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 12개의 오해 또는 실수를 재론할 이유는 없으리라. 문제는 그 이후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나타났을 때이다. 이들은 스토리 상으로는 영미의 복수를 위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불현듯 나타난 시점은 참으로 수상쩍다. 이들은 동진이 류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후, 아이의 보호자임을 부인한 후에 나타난다. 여기서의 아이란 동진의 딸이 아니라, 동진이 병원에 데리고 간, 자신이 해고하여 죽은 노동자의 아이다.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내팽개친 후에야 어디에선가 유예되었던 그들이 나타난다. 즉 스토리로 보았을 때 이들이 여기에 동진을 죽이러 나타나는 것은 뜬금없지만, 플롯으로 보았을 때, 즉 아이의 보호자를 거부한 후에 나타나는 이들은 유예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동진이 노동자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어디에선가 불려나와 이 자리에 섰다. 아이의 보호자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진에게 걸려왔던 전화는 동진에게 주어진 마지막 살 수 있는 기회였고, 그가 노동자의 아이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다. 물론 그 기회는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그 전에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동진은 영화에서 3번의 배를 칼로 가르는 장면을 본다. 첫 번째에는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배를 칼로 자해하는 장면을 보고, 두 번째에는 자신의 딸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고, 세 번째에는 류 누나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에는 놀라지만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차마 쳐다보지 못했으며, 세 번째에는 마치 물건을 보듯 무심하게 보았다. 마지막 그의 배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성명서가 꽂히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그의 무심한 시선, 타인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는 이 무심한 시선, 자신의 딸의 배를 가르는 이 장면을 차마 보지 못했던 그 시선과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미가 중간에 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 머리를 두 개 가졌으니까 그만큼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하나의 머리를 잘라버렸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 중에 어느 쪽을 잘랐느냐고 물었던 류의 멍청한 질문으로 이 장면은 끝났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아마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고, 이제 그는 다시는 머리가 아플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 동진과 류를 연상시킨다. 동진과 류는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의 사회에 공존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그들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 하나를 자르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류와 동진은 처음에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방음이 되지 않아 온갖 소음이 들려오는 류의 집과 전자동으로 커튼이 쳐지는 동진의 집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류의 집에 온 아이는 묻는다. "아빠 후배(류는 자신을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왜 이렇게 못 살아요?"). 그런 그들이 어느 틈에 점점 비슷해지다가, 중후반부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추적하고, 동진이 류를 뒤쫓을 때 보면 거의 같아진다(이 때 박찬욱은 <스토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 그의 장기인 교차편집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 둘은 모두 동일하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진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묻는 형사에게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고, 류에게는 그의 목숨을 거둬가기 전에 네(류)가 착한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나름 착한 사람들이고, 착한 두 머리이다. 그러나 착한 그들은 왜 모두 죽음을 맞아야만 했을까. 착한 그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 제목은 한글제목과 조금 뉘앙스가 다른데, 'Sympathy for Mr.Vengeance'이다. 어쩌면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sympathy(동정)라는 것. sympathy의 어원은 'syn(같이 혹은 함께)+pathy(고통, 치료법)'이다. 즉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동정(同情)'이라는 한자어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마음 혹은 뜻, 생각 같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 함께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되어 본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위치에 진정으로 섰을 때만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그 타인이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님을, 혹은 한 몸뚱아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장난을 시작한 김에 조금 이어가보면)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란 어쩌면 復讐가 아니라 複首, 즉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가 하나가 아닌 두 개란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즉 '복수는 나의 것'이란 두 개의 머리가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은 腹水이거나 말이다. 타인의 배에 들어찬 물을 보는 것. 그 물을 보면서 그의 고통을 짐작하는 것, 동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단지 사물로만 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배에 꽂힌 성명서를 내려다보려고 낑낑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이 sympathy 혹은 동정은 동진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류나 영미에게도 그렇게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블루워커 류(이 영화에서의 류의 노동의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고, 전반부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 거의 지옥과 같은 소음이 울려퍼지는 공장의 풍경과 밤샘근무를 하고 녹초가 되어 공장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남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 그리고 거의 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거리를 걷는 류의 모습)와 붉은색의 전단지를 나눠주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영미(그러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이 단체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의 구호는 조금 수상쩍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영미가 주로 외치는 두 개의 구호인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는 학생운동의 두 가지 세력의 각각 가장 대표적인 구호이다. NL의 미군축출과 PD의 재벌해체)가 결국 선택한 것이 단지 유괴라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속성과 같은 것이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나쁜 유괴와 착한 유괴가 있으며, 나쁜 유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며, 좋은 유괴는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 아이와 돈은 동일하게 교환될 가치가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교환의 표면적인 원칙은 '등가'라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밤샘근무는 보수(돈)와 교환되고, 이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교환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논리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비중이 같은가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 가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즉 애초에 그것들이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일까.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겠지만, 박찬욱의 복수 연작과 후속작들은 등가교환을 매번 시도한다. <올드보이>나 <박쥐> 등에서 나오는 등가교환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만 예를 찾아보자면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려 찾아간 류는 자신의 신장을 탈취해간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똑같이 신장을 탈취하고, 자신의 딸이 익사했음을 아는 동진은 류를 동일하게 익사시키려 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세계이고(이 <복수는 나의 것>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공권력을 해체한 후에 후반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설감옥이 등장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사설재판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사건의 해결을 동진에게 맡겨버리는데, 따라서 스토리로 보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어간다. 즉 서사적으로 구멍이 생긴다), 거의 정신병적일 정도의 등가교환의 시도이다(예를 들어 일부 정신병을 가진 환자들의 경우 동일한 물건, 혹은 신체의 훼손은 반드시 동일하게 보상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우 실제 등가교환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교환되는 것의 가치가 달라서가 아니라, 교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은 동시에 잉여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 잉여들이 어떠한 것을 낳는지는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가. 동진이나 류는 복수나 유괴로 동일한 교환을 시도했지만, 복수는 잉여를 낳았고, 잉여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돌고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해했다.) 밤샘근무라는 노동과 보수는 혹 교환이 가능할 수가 있더라도(물론 이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아이의 생명, 혹은 아이의 존재와 돈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도 그게 가능하다고 금자(이영애)를 속였다. 백선생은 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요트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그것은 그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혹은 당대의 학생운동에 대한 허상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샌델의 일부 논의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점점 무엇이든 교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환,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 그 환상은 점점 커지고 거의 정신병적이 된다. 그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은 박찬욱의 다음다음다음다음 영화 <박쥐>에서 부서질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먼저 몇 개의 죽음들, 혹은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들을 만나야만 한다.



덧.
그리고 박찬욱의 계단이나, 거미와 개미 같은 것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 영화가 개봉한 10년 전 그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고, 누나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한다. 그 때 누나는 "너는 이런 영화가 좋니?"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질문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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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미 본 영화라는 이유로 다시보기가 안되고 있는 넘버원의 영화죠. 저는 데이트하면서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 영화가 그렇고, 동생이랑은 극장 안가고 국밥집이나 갈비집으로만. 누나랑 보셨다기에!

제동생은 영화를 정말 많이 보는데 그다지 계보는 없는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씩 얘기하는거보면 또 계보가 있는것 같고. 걔는 좋으면 그냥 좋은거더라고요. 많이 보면 확실히 보는 눈은 높아지는것 같아요. 저는 영화를 통으로 기억하는 편인데, 그래서 뭐가 좋았니라고 물으면 컷이나 씬을 얘기못하고, 걔는 잘하더라고요. 맥거핀님처럼.

저는 영화에서 늘 부조리를 찾아서 그걸 현실에 대비시키려는 버릇이 있고, 그 부조리를 깨부수려는 노력을 하는 직업을 갖고싶었던 것 같아요. 예를들면, 늘 말했던 형사,판사,국제공무원같은. 자유를 엄청 갈구하면서 내 자유 대신 남의 자유를 찾아주고싶은 이 부조리한 마음가짐은 또 뭐란 말입니까!

1등댓글안쓰려고 했건만 :)

맥거핀 2013-04-30 14:25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나무를 보건, 숲을 보건 좋은 법이죠. 영화라는 건 사실 대부분 영화 그 내용 자체라기보다는 그 이후에 기억남는 건 다른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날 영화를 보고난 후 주고받은 얘기라던가, 보고나와서 먹었던 음식의 맛이라던가, 짜증나게 했던 뒷자리 사람이라던가..뭐 그런거요. 그런 것과 나중에 영화의 내용과 짬뽕되어 그 총체로 기억하는 거죠. 집에서 보는 영화가 좋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무엇을 보고나면 기억에 잘 안남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최근 집에서 DVD로 다시 봤지만요.)

근데 이 영화는 데이트용 영화로는 아주 최악에 가까운데 말이죠..좀 다른 얘긴데 예전에 설날인가, 추석 때 온가족이 모여 앉아있는데 특선영화라고 <올드보이>를 하더군요. 저는 편성담당자 저 인간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싶었지만, 부모님이 유명한 영화라고 기대감을 가지고 보시기에 잠자코 있었죠. 역시나 한 중반부 넘어갈 때쯤에 어른들은 이거 뭐 이상한 영화네..그러면서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셨고, 저만 남아서 끝까지 봤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입니다.ㅋ

부조리에 부조리를 더하면 조리가 되죠. 아이리시스님 우리 1등 댓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잘 살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 멋진데요. 전혀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긁어주셨습니다.
전 그동안 맥거핀 님을 여성ㅇ라고 생각하다가 누나 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영화본지 오래도어서 가물가물하네요...ㅎㅎ. ㅎ여튼 박찬욱의 최고걸작은 늘 복수는 나의것이란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맥거핀 2013-04-30 14:31   좋아요 0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의 글들이야말로 저도 읽으면서 가끔 오호..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좋더군요.

아..근데요. 누나라고 부른다고 해서 남성이라는 법은 없지요(옛날에 여성들이 형이라고 부르던 시대도 있었잖아요. 남성들이 언니라고 부르고..). 물론 여자도 군복무를 할 수 있고요. ㅋ

Mephistopheles 2013-04-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직접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잔인한 상황을 묘사해주는 장면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송강호의 전기고문에 소변배출하는 배두나의 모습이나 마지막 송강호가 신하균을 죽인 후 강가(?)에 널브러진 신하균의 옷과 피범벅이 된 그리 크지않은 보따리 묶음(토막)등등은 뭐랄까 직접적인 고어의 느낌보다 강렬했어요.

맥거핀 2013-04-30 14:3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올드보이>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죠. 인간은 상상함으로써 비겁해진다고, 상상하지 않으면 졸라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죠. 박찬욱 감독이 뭐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꺼리는 류의 감독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들에서 상상이나 뉘앙스로 조금 더 잔인하게 느끼게 하는 면이 있죠.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아무래도 영화를 많이 본 티가 나고,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효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넙치 2013-04-3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억에 또렷이 남은 건 그 영화 개봉 당시 분위기, 그리고 영화를 봤던 때가 제 인생의 "화양연화"였다는 것 밖에 없네요.
맥거핀님 글 읽고 난 후 제가 썼던 리뷰를 봐도 생경하기만..;;;

맥거핀 2013-04-30 14:36   좋아요 0 | URL
앞으로 어떤 화양연화가 또 올지 모르죠.^^ 예전에 쓰셨다는 리뷰가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저도 예전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기억과 이번에 새로본 영화의 느낌이 상당히 달랐어요. 아무래도 영화라는 건 보는 이가 나머지 퍼즐조각을 맞추는 모양입니다.

Shining 2013-04-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읽었는데 댓글은 이제 남겨요. 저는 가끔 실은 종종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저랑 맥거핀님은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인데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사고의 회로도가 다르다는 느낌? 뭔가를 바라보는 투영도나 설계도, 농도, 질감 그런 것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이요. 그런데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맥거핀님의 글을 읽는게 즐겁다가 좌절하고 좌절하다 자극받고. 네, 그래서, 좋다구요 :)

저도 가끔 저 영화 짱이야, 라면서 혼자 TV 차지하고 같이 영화 보다가 가족들이 대개 짜증내거나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이건 슬픈 이야기).

맥거핀 2013-05-02 01:44   좋아요 0 | URL
아..그래서 말입니다. 아마 예전에도 그런 얘기한 것 같은데, 저도 Shining님의 어떤 글을 보면서 이건 못써, 이건 절대 나는 이렇게는 쓸 수 없어 하는 글들이 있어요. 그건 좋은 거겠죠. 네..아마도 좋은 걸 겁니다.

저도 가족들과는 거의 영화를 같이 안보게 되는 것 같아요. TV영화들도 거의 같이 본 적이 없는 것 같고...그리고 보다가 민망해질 것 같은 영화는 알아서 도망가구요. 뭐 특히 박찬욱 감독 영화라면 가족이나 애인과 같이 관람은 안하는 것이...

cyrus 2013-04-3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영화 장면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수월하게 잘 풀어내시는거 같아요. 저도 가끔 영화 한 편 보고나서 나름 영화에 대한 생각을 글로 끄적거리고 싶은데 책 읽고 글 쓰는 것과는 좀 느낌이 달랐어요. 책은 기억 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찾아서 볼 수 있는데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영화 서평은 영화 한 편을 한 번 봤다고해서 쓰는게 아니라 여러 편 보다가 그게 여러 가지 생각이 모아서 한 편의 글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맥거핀님은 영화 서평을 이렇게 쓰시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

맥거핀 2013-05-02 01: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른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 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든 생각을 영화글에다가 그냥 씁니다. 그러고 마치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처럼 구라를..^^

근데 DVD로 영화를 보다보니까 조금 달라지는 면이 있더군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DVD 같은 경우에는 보다가 끊고 자꾸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싶어져요. 그 충동을 참는 게 힘듭니다만, 생각해보니 왜 참아야하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우끼 2016-01-2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제 `복수는 나의 것` 영화를 보고, 이 리뷰를 보니, 정말 멋지네요.. 맥거핀님 글 잘쓰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 새삼 감탄했습니다. 이 리뷰를 쓰시는 데 쓰인 시간과 노고를 가늠해보니.. 이 글이 더 값지게 보입니다. 복수라는 단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신 부분이라든가, 두 머리에 대한 우화와 연결지은 류와 동진의 관계, 자본주의의 위선적인 등가교환 신화에 대한 지적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 속에 감독의 작위적인 메세지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군요.. 인간의 괴물을 여실하게 드러내면서도 감독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괴물을 비판하는 방법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괴물로 살고 싶지 않은데, 겨우 허덕이며 위선을 베푸는 게 전부인 요즘, 어떤 삶을 살아야 괴물을 마주하면서도, 괴물로 남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하던 지점에서, 이 글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1-25 16: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우끼님. 댓글로 얘기나누는 건 처음이죠? 제 글 읽어주시는 거 알고 있었는데, 제가 먼저 인사드려야하는데 늦었습니다. 일단 칭찬 먼저 감사드리구요.

박찬욱 감독은 제가 참 좋아하는 감독이라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다층적으로 풍부하게 담아내기도 하고, 영화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죠. 아무래도 영화가 좋아야(물론 책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만큼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할 말이 더 많아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제 글은 물론 그 중에 일부만 다룬 것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분명히 다층적으로 볼만한 내용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저도 마찬가지,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 느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부조리와 폭력이 만연하는 이 사회에서 아마도 대부분 자신들만의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한 작은 투쟁을 해나가고 있지 않을까요. 매일 또 지면서 말이죠. 예전에 누군가 한 말대로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는 법이니...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오멸, 2012

 

 

 

최근 어떤 글에서 허문영은 세르쥬 다네의 말을 빌려 세상의 영화를 역사적 영화와 지리적 영화로 구분지었다. 허문영의 설명에 따르면 역사적 영화는 사건의 영화이고, 지리적 영화는 장소의 영화이며, 예를 들어 서부극이 미국의 건국신화라는 설명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서부극이 역사적 영화라기보다 지리적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비슷한 구분법을 영화 <지슬>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지슬>은 역사적 영화인가, 지리적 영화인가.

일단 영화 <지슬>은 역사적인 요소와 지리적인 요소를 둘다 가지고 있다. <지슬>은 흔히 4.3사건이라 불리는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정과 우리군에 의해 저질러진 제주도민 학살사건, 혹은 그에 맞선 민중들의 항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동시에 이는 제주도라는 좁고 한정된 고유의 지역성을 크게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지슬>이 역사적 영화이자 지리적 영화라고 답한다면 굳이 이 구분법을 끌고 들어온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슬>은 지리적 영화다. 이는 역사적인 이 사건이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동시에 이 영화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감독 이하 제주도 사람들이 만든 제주도 말로 진행되는 영화라고 하는 말도 아니다. 그저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역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있지만, 그래서 4.3사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고도 이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이 영화에서 지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제주도 방언으로 진행되고, 표준어 자막이 계속 밑에 따라붙는 특이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제주도를 지운다면, 즉 예를 들어 이 배우들에게 표준어로 연기하도록 했다면, 이 영화는 어떤 형태를 띄었을까, 아니 이 영화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거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N사이트 같은데서의 20자 평에는 지리는 없고 역사만 있다. 아니 역사는 없고, 이념만 있다. 그것도 이상한 이념만 있다. 지독한 인간들.)

앞에서 허문영의 구분을 따르자면, 그러므로 이는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장소의 영화이고, 그러므로 보아야 할 것은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이어지는 일련의 장소들이고, 장소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있는 집과 이들이 있는 동굴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 바닥에 나뒹구는 제기(祭器)들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 보여주듯이 군인들이 머물고 있는 이 집은 제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집이다. 그리고 군인들은 태연하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시체 혹은 원혼의 옆에서 태연하게 과일을(아마도 제사상에 올라가 있었을 과일을) 깎아서 먹는다. 시체와 원혼과 군인들이 함께 머무는 집. 그래서 이 집은 한없이 으스스하고, 그들이 설혹 귀신들린 행동을 해도(예를 들어 이 부대의 지휘관인 김상사는 마약에 취해 흙바닥에서 헤엄를 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때로 의도적으로 인물의 포커스를 지워버리고, 그들을 종종 흐릿하게 보이도록 한다. 즉 이들을 일종의 영화적인 유령으로 만든다.

반면 이들이 숨어 있는 동굴은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영화는 형식적으로 신위-신묘-음복-소지라는 전통 제사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음복을 하고(무동 할머니가 죽으면서 남긴 감자를 나누어 먹고), 소지를 한다(군인들이 동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날려보내는 매운 연기는 소지의 연기이고, 동시에 울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실제의 제사에서 소지를 하는 것, 그러니까 죽은 이를 적은 신위를 불사르는 것은 동시에 울기 위함이 아닐까). 물론 이는 앞서의 으스스한 집과 다르게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곳에서 감자를 나누어 먹고, 서로를 걱정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을 북돋운다. 그것은 감독이 이 좁은 동굴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이 동굴에서 인물들은 길게 늘어 앉아있고, 카메라는 그들을 각각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모두 꽉 들어차도록 잡으며, 그들 모두에게 포커스를 배분한다(딥포커스). 그것을 그들이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대화하는 씬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때는 대화를 이루어내는 몇 개의 무리를 잡되, 그 대화의 상대자가 매번 바뀌며, 앉는 위치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고, 카메라는 마치 끝없이 계속 패닝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 때의 카메라는 이 좁은 동굴을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마법을 부리고 있으며, 그것은 이 좁은 공간에 가득 담겨진 그들의 공동체성, 그 무한의 힘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의 비교를 변성찬은 영화와 연극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것 역시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변성찬의 구분에 따르면 군인들의 장면은 영화적인 장면들이고, 주민들의 동굴에서의 장면은 연극적인 장면들이다. 기법상으로 보면 이는 영화적인 기법을 주로 활용한 군인들의 장면과 연극적인 기법을 많이 활용한 주민들의 장면이라는 대비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어떤 죽음과 관련한 은유들(유령들이 뛰노는 스크린과 죽어 있는 관객들)과 연극이라는 매체의 어떤 살아있음의 대비로 볼 수도 있다. 즉 <지슬>은 하나의 제의이자 연극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 제의이자 연극은 죽은 영화 속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우리 관객들)이 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의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제의는 온전히 죽은 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살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죽은 혼령을 달램으로써 살아 있는 후손에게 나쁜 기운이 아니라 좋은 기운을 보낸다는 관점에서도 그렇고, 동시에 제의는 죽은 이들이 우리와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점을 일깨우고(죽은 이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남은 하루하루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제의는 죽은 이와 우리를 연결지으면서도 동시에 선을 그음으로써,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케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로 이루어지는 제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고, 동시에 그것은 지슬(감자의 제주도 방언)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제목이 '지슬'인 이유일 것이다. 지슬은 누구에게나, 즉 주민에게나 군인에게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지슬>이 역사적인 영화가 아니라 제주도라는 땅에서 나는 지리적 영화, 아니 감자적 영화이고, 동시에 역사로서의 과거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현재를 다루는 영화이기도 한 이유다. 삶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으니까. 그러므로 제의(祭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덧.
이 말은 덧붙이고 싶다. 이 영화의 이미지는 때로 아름답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살인, 학살의 장면 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 자연의 모습을 마치 한편의 수묵화처럼 비춘다(물론 살인 장면도 그다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 혹은 오멸 감독의 '어떤 태도'라는 것일 터이다.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 아무도 이 죽음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이 자연, 자연의 정령만큼은 이것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처참함 이후에 이런 아름다움을 보아도 좋은 것일까. 아니 처참한 것을 아름답게 찍어도 되는 것일까. 처참한 것은 처참하게 보이도록 찍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남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 영화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사실 우리는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처음에 보인 거의 모든 주민이 죽을 것을 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4.3 사건이라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대로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제의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이 영화가 이들에게 바치는 제의가 되려면 그전에 이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어떤 우스꽝스럽고 순박한 모습을 보면서도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마치 이들이 진짜 죽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제의 제주도 사투리를 쓰고, 자막을 넣는 것이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배우를 쓰는 것은 이 영화를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이게 했으며, 더욱 웃음을 짓지 못하게 했다. 곧 죽을 사람들을 보는 것, 혹은 그들의 죽음을 실제처럼 받아들이는 어떤 불편함이 나를 지배했으며, 그것은 어떤 실제의 죽음 혹은 학살을 보는 것, 혹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쇼아)를 다룬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에서 실제의 자료화면(죽음의 장면)을 쓰는 것을 '외설스런 짓'이라며 피하고, 오로지 인터뷰만으로만 영화를 구성하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전쟁 다큐 <아르마딜로>에서처럼 의도적으로 실제의 죽은 시체, 혹은 죽어가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 - 등에 담겨진 질문들과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게 했다.

앞에서는 제의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이라 말하고, 그것을 보라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거기에서 죽음이 먼저 보이나 보다. 이렇게 이성과 감정의 거리가 머니 제대로 영화보기는 아직도 멀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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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4-1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논란의 대상에 올라설 수밖에 없는 영화의 한 자리에 위치해버렸네요.

영화를 영화로만 이해하고 그 후 해석을 해도 늦지 않을텐데 지나치게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제법 많더군요. 여전히..(과연 네오나치와 일본 극우세력들과 이땅의 속칭 "일베"들과의 차이점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맥거핀 2013-04-18 23:18   좋아요 0 | URL
논란의 대상이 되도 본 사람들끼리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좋을텐데요. 뭐 하긴 늘 말이 많은 사람들은 안 본 사람들이긴 했습니다만...

그들의 전략이 꽤 나름 성과를 거두는 것 같아요. 그런 세력들이 주류언론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교과서를 고치고, 국사를 축소시키고, 아무튼 노무현 정권 말기부터 MB정부 때까지 꾸준히 노력을 해왔고, 그의 일종의 성과가 예를 들어 '일베'같은 것이겠죠. ('일베'를 일종의 돌연변이나 같은 세력으로 보는 것은 좀 아니라고 봅니다. 꾸준하고 나름 세밀한 전략의 결과죠.) 아무튼 이제 그런 세력이 정치판에도 점점 발을 들이고 있구요. 분명 이번 정권 하에서 안좋은 방향으로 세력을 넓힐 거라고 봅니다. 앞으로 이런 논란은 꾸준히 그리고 더 큰 폭으로 이어질 것 같아요.

Shining 2013-04-1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말이 마지막 상영이었는데 결국 시간을 못 내서 못봤어요ㅠㅠ
여태껏 그랬듯(아직까진 저 약속 어긴 적 없죠?ㅎㅎ) 영화 보고 난 후 이 글과 씨네21(영화 보고 읽으려고 잡지 사두고 접어놨거든요;) 둘 다 읽고 댓글 달게요 :-]

맥거핀 2013-04-18 23:20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지슬>이 더 상영관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어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가능하면 오멸 감독의 전작들도 좀 찾아서 보려구요. 전작들을 보고 보는 것이 또 많이 느낌이 다르다고 하더라구요. 나중에 영화보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구요.^^

아이리시스 2013-04-2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영화보러 가고시퍼요.오오오오.
맥거핀님, Shining님 저 놔두고 무려, 2박3일이나, 여행갔어요! 이거 혹시 저만 아는 거였어요? 다 소문낼거예요, 혼자갔다고. 화내겠죠? 어쩔 수 없죠.힝힝.

경주(경주 맞나? 전에 자랑(!)했잖아요)갔던 얘기 해주세요. 저는 봄여행 못가요ㅠ.ㅠ

아이리시스 2013-04-23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맥거핀님 아직까지 안왔어요?(안왔군, 흠, 쳐들어가볼까;)(아니야;)(좀 더 기다려)(곧 올거야)(그래?;)(그래--;)

비와요, 비 맞지 말고 살아요, 맥거핀님.

맥거핀 2013-04-25 00:54   좋아요 0 | URL
요 며칠간은 좀 정신이 없네요. 지금도 뭐하다가 잠깐 들어와서 댓글 달고 있음.^^; 어차피 서울에 벚꽃이 펴도 볼 수가 없어서 얼마 전에 경주에서 벚꽃보고 와서 다행이예요. 아이리시스님은 봄여행을 못 갔으면 여름여행을 가면 되죠. 그래도 요새는 밖에 나가면 공기가 따스한 걸 느껴요. 곧 여름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나중에 아이리시스님 글도 읽으러 갈께요. 잘 안들리는 아이리시스님이 저보다 글은 더 쓰는 듯.^^

아이리시스 2013-04-26 14:57   좋아요 0 | URL
오, 여름여행!
사람없는 곳으로 한적하게,
따스한 공기속으로.

그런데 여전히 침대위에 전기매트를 켜고 잔다는 게,
아직 여름도 봄도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어요.

아..일어나보면 막 등에 땀이나..있는데도 끄고 잘 수가 없어요, 어쩐지..

글 더 쓸 거예요, 4월이 가기 전에 리뷰 세 편쯤?ㅎㅎㅎ

2013-04-27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3-06-12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봤고,
(지슬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봤습니다.)
심지어 공동체 상영시간을 맞추지 못해
시작부분을 못봤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좀 답답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어느정도 감독의 의도가 읽히고,
영화와 이 글에 대해 공감이 갑니다.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3-06-15 15:08   좋아요 0 | URL
아..보셨군요. 제의라는 형식을 영화에 도입함으로써, 단순히 이야기가 아닌, 영화 이상의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저도 듭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오멸 감독의 영화들을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의 감상에 이 리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즐겁습니다. 저도 감은빛 님의 글들을 보며 늘 배우고 있어요.^^
 

 

 

(<안나 카레니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스포가 들어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조 라이트, 2012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랭 레네, 2011  

 

  

 

 

 

  

 

 

 

 

        

 

1.

아마도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번역에 따라서 약간 뉘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버전) 그리고 이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이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레빈의 고뇌에 찬 질문에 대한 일꾼의 뭐 그런 것을 묻느냐는 식의 간단한 답과 함께 끝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지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조금 바꿔서 이야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실은 불행한 가정에 나름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행복한 가정에도 나름나름의 이유가 있다(혹은 사실은 둘다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나름나름이 아니라, 고만고만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행복에는 아무도 그 이유를 캐묻지 않기 때문이다. 즉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어떤 자세가 그 행복을 행복한 것으로 만들거나, 그 불행을 불행한 것으로 만든다. 불행한 사람이 더욱 불행해지는 것은 그 불행에 무엇인가 이유를 계속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불행한 자는 그 불행의 근원을 찾아, 어떻게든 그것을 해결하려 하고, 대부분의 불행은 사실 해결할 수 없거나, 사실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즉 본인이 이유라 생각한 것은 대부분 이유가 아니므로) 그런 생각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악순환에서 겨우 벗어나게 된 실마리를 찾게 된 레빈과 달리 안나 카레니나(키이라 나이틀리)는 그 불행의 이유를 찾는 것이 더욱 불행이 되는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을 끝끝내 찾지 못했고, 결국 뱅글뱅글 도는 기차바퀴에 몸을 던졌다. 그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에서 계속 ''에 방점을 찍고, ''가 또다른 ''를 낳는 순환지옥, 끊임없이 뱅글뱅글 도는 악순환의 기차바퀴. (이 영화에서 계속 이 돌고도는 이미지가 반복됨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것이 내가 이해한 이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이다.

 

 

2.

물론 이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는 이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들도 들어있으며, 그 이야기 자체 외에도 주목할 만한 형식적인 부분이 있다. 많이 이야기되었듯이 이 영화는 연극 기법의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의 어떤 것을 생각해 보게 하며, 따라서 이 영화를 도리어 일종의 영화적인 텍스트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즉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부재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우리가 영화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야기가 전환될 때 카메라와 배우는 그대로 둔채 무대 배경을 바꾸거나, 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배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씀으로써, 영화에서의 씬의 전환, 즉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씬과 씬의 연결의 기이함(즉 예를 들어 우리는 영화에서 누군가 집 안에서 잠자리에 들고, 바로 다음 장면에 그가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장면을 보더라도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즉 그가 잠자리에 든 다음에 일어나는 장면이 없더라도, 그가 당연히 일어나서 집밖으로 나왔겠거니 하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혹은 충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씬과 씬의 연극적인 연결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도 펼쳐지는데, 예를 들어 무도회 장면에서 안나와 브론스키(애런 존슨) 커플을 부각시키거나, 극장에서 안나가 여러 사람들의 경멸어린 눈초리를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영화에서라면 한 커플을 부각시키는 방법은 카메라를 활용한다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다. 원경에서 줌으로 잡거나, 혹은 클로즈업을 활용하면 된다. 그러나 연극을 보는 관객의 눈에는 줌 기능이란 없고, 그러므로 연극에서라면 다른 방식을 써야할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그 커플에만 조명을 주거나, 이 영화에서처럼 다른 커플을 정지시키고 안나 커플만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나가 극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경멸어린 주목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의 경멸적인 수군거림과 안나의 미세한 떨림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 것이 일반적인 영화의 방법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대신 다른 사람을 정지시키고, 안나의 히스테리컬한 반응만이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을 쓴다. 이는 물론 '실제'가 아니지만, 훨씬 더 극적이고, 적어도 보는 이를 자극시킨다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다.

 

 

3.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종종 바깥으로 멀찍이 물러나 이 영화가 연극 무대라는 하나의 공간 위에서, 계속 사실은 하나의 연극으로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명이 둘러져 있는 단 위의 무대, 그 안에서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주드 로)은 위태로운 치정극을 펼친다. 그리고 카메라는 종종 뒤로 물러나 그것이 하나의 무대임을 다시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치정극 속의 주인공들만은 아니다. 그 무대 바깥에 위치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나는 기차 객실 안이라는 무대 안의 공간과 그 바깥에서 안나가 마주치게 되는 검댕을 잔뜩 뒤집어쓴 기차 화부의 대비. 즉 그 무대 안에 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이 있다면, 그 무대 밖에는 그 치정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가 흥미로운 것은 무대 안의 이들을 보여주면서도 그 무대 밖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레빈과 같이 일하는 레빈 집의 일꾼들이나 레빈에게 낮은 신분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충고하는 아마도 사회주의자이거나 혹은 공산주의자일 듯한 레빈의 형과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올림으로써 그 무대 밖에서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상기시킨다. (<씨네21>에서 보니 제작비 및 기타 문제로 러시아 현지 로케이션이 무산되자 감독 조 라이트가 주요 배경을 (스튜디오에서 찍을 수 있는) 극장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이는 도리어 영화에 상당한 플러스로 작용하고 있다.) 즉 무대 위에 이들 구체제의 귀족들이 있다면, 그 무대 바깥에는 그 무대에 오르지 못한 러시아 하층민이 있다. 즉 이들 러시아 하층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처절한 치정극은 있는 자들의 한판 연극이며, 환한 불이 켜진 무대 위에서 펼치는 한편의 꼭두각시놀음이다. 영화에서도 잠깐 스치듯 지나갔지만, 낭만적 사랑, 혹은 한껏 격식을 갖춘 사랑놀음은 구체제의 유물이다. 사교계의 어지러운 밀당은 하층민의 입장에서 보면 있는 자들의 감정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브론스키가 죽은 화부에게 건넨 한움큼의 돈은 한순간의 시혜이고 가난한 자들이 아주 잠깐 보는 화려한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연극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고, 언젠간 끝난다. (안나의 오빠는 카레닌에게 이혼은 하더라도 식사는 하고 가라고 한다. 그렇다. 이혼은 해도 식사는 해야한다, 누구나.) 영화를 보다보니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치정극이자, 혁명극이기도 하다.

 

 

 

 

4.

물론 그 무대의 바깥에는 러시아 하층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연극을 혹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이 있다. 무대 위에 귀족들의 사랑싸움이 있고, 무대 밖에 그것과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하층민들이 있다면, 그 더 바깥에는 스크린 밖의 우리들이 있다. 즉 우리는 사실 무대와 혹은 영화와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아까 씬과 씬의 연결, 혹은 숏과 숏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므로 숏과 숏의 연결은 한편으로 무대 밖의 우리를 어떻게든 참여시키려고 하는 영화의 전략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의 대화를 본다고 했을 때 우리가 아주 최선을 다해 좋은 위치를 잡아도 두 사람의 옆모습을 볼 수 밖에 없고, 우리는 그 대화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화는 대신 당신에게 숏과 반응숏(리버스 숏)을 제공한다. 어떤 반응숏을 보여준다는 것은 여러가지 효과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것을 보고 있는 당신이 그 반응에 반응하라는 것이다. 이런 노골적인 반응숏 외에도 아까의 예를 다시 가져와본다면 누군가가 잠을 자고, 그 다음에 그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씬을 붙인다면 영화는 이 때 당신에게 그 중간에 당신이 참여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즉 그가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집밖으로 나가는 장면에 대한 당신의 상상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눈속임이고 미봉책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그 영화에서 분리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당신이 개입하지 않아도 영화는 계속 씬을 이어나갈 것이고,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영화관은 당신에게 나갈 것을 요청할 것이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5.

그것의 하나의 대답은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와 같은 것이 아닐까. 저명한 극작가 앙트완이 죽고 생전에 그의 연극 '에우리디스'에 참여했던 여러 배우들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들을 모아놓고 대형화면에 등장한 앙트완은 그들을 이자리에 모이게 한 이유가 있다며, 그들이 그의 유작인 젋은 배우들로 새롭게 구성된 연극 '에우리디스'의 리허설을 보고 이것을 무대에 올려도 괜찮을지 판단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 촬영된 연극 '에우리디스'가 스크린에 상영을 시작하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이 참석한 배우들이 상영하는 화면에 맞춰 연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이 화면과 참석한 배우들의 연기가 혼합되고, 배우들이 앉아있던 장례식장은 연극 '에우리디스'의 무대로 확장되고, 없던 공간들이 생겨난다. (이와 비슷한 것을 <안나 카레니나>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이 열리고, 없던 눈밭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것은 이와 거의 유사하다.) 즉 이 앙트완의 장례식장에서 상영되는 연극의 관객이 될 것을 이 배우들은 요청받았지만, 이들은 단지 관객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이 연극의 배우가 됨으로서 관객의 지위를 벗어난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영화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모순된 지위를 부여한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영화는 관객이 영화의 무엇인가에 개입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 개입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즉 그 개입은 영화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일반적으로 어떠한 영화감독도(동시에 어떠한 옆자리 관객도) 주인공의 대사에 맞춰서 당신이 연기를 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영화에 들어올 것을 끊임없이 유혹받지만 동시에 그 영화에서 물러날 것을 끊임없이 요청받는다. 그러므로 스크린 위에서 존재하는 것은 유령들이다. 우리는 환영들, 유령들을 보며, 두 시간 동안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빠져있고, 사실은 그 두 시간 동안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홀려 거의 죽어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일종의 임사체험이다. 영화가 끝난 후 밖으로 나왔을 때 뭔가 세상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당신이 그 사이에 잠깐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당신이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홀려 있던 사이에 스멀스멀 기어나왔다가 겨우 다시 기어들어갔기 때문이다.

 

 

6.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시작은 거의 임사체험의 시작이다. 알 수 없는 상대방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이 반복의 시작은 임사체험을 알리는 포고다. (그 화면은 참으로 으스스하다.) 그리고 그들은 앙트완의 장례식, 현계와 선계의 사이에 있는 듯한 오묘한 공간에 들어와 죽은 자의 환영을 받는다. 자 나는 유령일세, 자네들도 나처럼 유령이 되어보지 않겠는가. 유령이 되어보라는 것은 이 영화의 관객이 되라는 말이다. 관객이 되어 이 유령들이 펼치는 향연을 맛보는 유령이 되어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참석한 배우들은 앙트완의 청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연기를 하기 시작하고, 곧 그들은 이 영화의 관객이 아니라, 이 영화의 배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지금 죽음에 대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 번 죽어보라는 요청에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다. 필사적으로 연기를 함으로써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붙이면 더 재미있다. 바로 이들이 벌이는 연극이 '에우리디스'라는 것. 흔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로 알려져 있는 그 이야기. 저승의 신 하데스가 데려간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으로 내려간 오르페우스가 하데스를 감복시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오는데 성공하지만, 거의 지상에 다다랐을 무렵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약속을 어겨 다시 저승으로 에우리디케가 영영 사라져버린다는 슬픈 이야기. 어쩌면 우리가 여기에서 방점을 찍어야 되는 것은 그들의 슬픈 사랑이나 그 얼마를 참지 못한 오르페우스의 인내심 부족이 아니라 혹시 '돌아본다'는 사실은 아닐까. 그 본다는 것. 우리가 돌아보았을 때 다시 환영이 되고 마는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튼 그랬다. 오르페우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발놀림이었지, 결코 보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면 조금 이상한 질문. 혹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갑자기 무서워진 것은 아닐까. 자기 손을 잡고 따라오고 있는 이것이 혹시 괴물은 아닐까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에우리디케인지 뭔지 모를 그것을 저승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뒤를 돌아본 것은 아닐까. 아무튼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서 앙트완은 저승에서 귀환했지만, 그는 결국 다시 저승으로 끌려들어갔고, 어쩌면 앙트완이 주최한 임사체험에서 달콤한 죽음의 유혹에 맞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친 이들은 앙트완의 장례식장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저렇게 가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러나 안심은 이르다. 스크린 속의 유령은 그들의 옆에서 몰래 몸을 숨기고 있으니까.)

 

 

7.

알랭 레네는 말한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이것은 아마도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곧 놀라운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 하나, 아니면 영화를 다 본 당신에게 건네는 조소. 당신은 무엇인가를 보기는 했으나, 사실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당신이 바보처럼 그 곳에서 넋놓고 앉아있는 동안 사실은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당신은 그저 잠깐 죽어있던 것 뿐인걸.

 

영화는 2-3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깜깜한 극장에서 좁은 의자에 앉아서 봐야한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진다. 그러므로 영화는 보는 이에게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의 마법을 쓴다. 예를 들어 플래쉬백을 사용하는 것은 시간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이고, 분할화면으로 여러 공간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은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종의 마술, 눈속임일 뿐,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공간은 극복되지 않는다. 알랭 레네는 시간과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것은 기억과 상상이다. 기억은 과거의 시간을 당신에게 돌려놓으며, 상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공간을 당신에게 제공해준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이 기억과 상상을 당신에게 요청하는 영화, 죽음으로 유혹하지만, 그 죽음에 발버둥치라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아직도 기억하고, 상상할 것은 많으니까. 우리는 그럼으로써 무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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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4-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편집기가 바뀌었구나..근데 줄간격 먹이는게 제멋대로인듯?

프레이야 2013-04-0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저도 이번 안나카레니나를 특별한 감흥을 가지고 봤어요.
기대 이상인 점도 있고 기대보다 못한 점도 있고,
아무튼 기대는 저의 주관적인 것이었으니 차치하고요.
꽤 감각적이었어요. 레빈과 키티, 안나와 브론스키를 내용상 두 축으로 두자면
'이유'를 찾는그들의 모습을 돌아보아 맥거핀님의 글이 와닿습니다.
사랑엔 이유가 없다고 대답한 브론스키,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 레빈에게 반박하는 농노의 말 등이요.
무엇이 선일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마무리한 점은 원작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한 것 같아요.
키이라는 정말 새로운 안나였어요.
카레닌의 마지막 모습도 여운이 있더군요.

맥거핀 2013-04-04 13:36   좋아요 0 | URL
<안나 카레니나>가 등장인물만 해도 150명이 넘는 소설이라고 하니까요. 단순히 연애, 치정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보기 보다는 당대의 풍속을 세밀히 묘사한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듯 싶습니다. 안나나 카레닌, 브론스키도 인상적이었지만, 저는 그래서 영화의 다른 인물들이 더 흥미로웠고, 눈여겨 보게 되었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역사서 같은 느낌으로 보았다고 할까요. 영화의 어떤 감각적인 부분이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은데, 저는 그것이 영화의 어떤 주제의식과도 연관이 되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었고, 괜찮게 보앗습니다.^^

저는 예전 버전의 안나 카레니나를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이번 영화의 카레닌은 예전 영화의 카레닌들과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처음에 주드로를 못 알아보고 주드로 나온다던데, 왜 안나오삼, 이러고 있었어요.


2013-04-12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뭔가를 쓰고 싶은데, 쓸만한 건덕지가 없다. 이럴 때는 아무 것도 쓰지 않은채, 쓰고 싶은데 바빠서 못 쓰는 것처럼 기믹을 하는 것이 상책이겠으나, 그래도 명색이 일주일에 뭐라도 하나 쓰자는 것이 목표였는데, 왠지 이렇게 여유있을 때 뭐라도 안 하면 기믹이 현실이 곧 될 듯하다.

 

그래서 써보는 '즐겨찾기를 털어봐요' 1탄. 내 파폭 브라우저 즐겨찾기에 있는 몇 사이트를 정보 소개 차원에서 그냥 끄적거려본다. 서재 컨셉을 보면 아시겠지만, 다 영화에 관련한 사이트이니 영화 쪽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들은 패스. 물론 이미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만한 내용이나, 그래도 또 몰랐던 누군가에게는 아주 조금이라도 미미한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1. 인디플러그 (http://www.indieplug.net/)

 

먼저 예전에 얘기했던 것부터. 독립영화 다운로드 사이트인 '인디플러그'다. 이 사이트의 장점은 말 그대로 극장에서 잘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 일반 다운로드, 웹하드 사이트 등에서 잘 찾을 수 없는 독립영화, 예술영화들을 다운로드하여 감상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많이 알려진 독립영화부터 거의 관객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사라진 영화, 혹은 극장에 개봉을 하지 못했던 독립영화들도 서비스하고 있는데, 이 참에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맛보시는 것은 어떨는지. 가격은 편당 500원에서 3000원 정도(현재 개봉하는 영화 - 예를 들어 <가족의 나라> 같은 경우 - 를 동시 다운로드 서비스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이례적으로 10,000원 정도 하는 경우도 있다). 수익금 중의 일부는 민간독립영화전용관 건립 기금으로 적립된다고 한다.

 

 

 

 

2. 유에포 (http://www.youefo.com/)

 

여러 단편영화들을 바로 감상할 수 있는 사이트인 '유에포'다. 최근에 만들어지는 일종의 습작 형식의 단편부터 현재 충무로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감독의 오래전 단편(예를 들어 나홍진 감독의 <완벽한 도미요리> 같은 것)까지 상당히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자랑하는데, 이 모든 작품을 로그인만 하면 바로 전편을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일종의 감독과의 대화인 '숏컷'이라는 단편영화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5018)를 최근 시작하고 있는데 감독의 창작론이라든가, 촬영상의 여러 에피소드를 들을 수도 있어서 재미있다. 어느 단편 영화의 첫 팬이 되어보시는 건 어떨지. 혹시 아는가, 그 감독이 미래의 대가가 될지도.

 

 

 

 

3. 아트플러스 시네마 네트워크 (http://www.artpluscn.or.kr/jsp/main/index.jsp)

 

전국의 예술영화관 네트워크인 '아트플러스 시네마 네트워크'다. 2013년 현재 전국의 21개 극장, 25개의 상영관이 참여하고 있는 '아트플러스 시네마 네트워크'는 주로 예술영화관 등에서 개봉하는 독립영화, 예술영화, 작은 영화들의 개봉관을 살펴볼 수 있고, 바로 예매할 수도 있으며, 또 그런 작은 영화관들에서 자주 펼쳐지는 작은 영화제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도 있다. 영화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대부분이 거대배급사에 의해 와이드릴리즈 개봉하는 영화들에 대한 소식인 경우가 많은데, 이 사이트를 통해 소외된 영화들이 어떤 영화들인지 확인할 수 있다.

 

 

 

 

4. Top Documentary Films (http://topdocumentaryfilms.com/)

 

조금 색다른 사이트를 하나 소개해보면, 주로 미국의 다큐멘터리들을 볼 수 있는 'Top Documentary Films'라는 사이트가 있다. 건강, 미디어, 범죄, 철학, 예술, 과학, 성, 스포츠, 기술 등 여러 카테고리의 다큐멘터리 필름들을 볼 수 있는데, 장점은 부분이 아닌 전체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자막이 없으며(뭐 미국 사이트니까 당연하다), 꽤 짤린 영상이 많다는 점(그럼에도 아직 상당수의 다큐는 볼 수 있다). 뭐 자막이 없는거야 음성 대신 화면에 집중하는 것으로 카바(...)할 수 있는데, 짤린 영상들은 어서 복구해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5. 한국영상자료원 (http://www.koreafilm.or.kr/index.asp)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보물섬과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는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다. 이 곳의 장점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각종 영화 회고전, 특별전이 상시 열리며, 이 곳의 티켓 가격은 무료다. (티켓은 현장에서만 발권가능하며, 상영 이틀 전부터는 현장예매도 가능.) 참고로 현재는 故 박철수 감독의 추모특별전이 열리고 있으며, 4월 6일(토)에는 장국영 10주기 추모 특별전이 계획되어 있다. 둘째, (이거뭐 서울 사람들만 좋겠구먼, 하는 분들을 위해) 유투브에 '한국고전영화극장 채널'(http://www.youtube.com/user/KoreanFilm)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지나간 한국영화의 명작, 예를 들어 <오발탄>, <바람 불어 좋은 날> 등의 전편을 감상할 수 있다. (현재 약 70여 편이 서비스 중이며, http://www.kmdb.or.kr/vod/에서 더 많은 자료를 감상할 수 있으나, 여기는 유료다.) 셋째, 이곳에서 격월간으로 발간되는 웹진 '영화천국'은 웹진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실제 책으로 받아볼 수 있는데, 사이트의 '구독신청' 버튼만 눌러 주소를 입력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내준다. 단순히 홍보지가 아니라, 여러 평론가들, 기자들의 좋은 글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지난 30호의 특집 주제는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를 말하다'로 여러 영화평론가들이 자신이 발견한 시네아스트들 - 벤 휘틀리, 크리스티 푸이유, 정재훈 등등 - 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꾸며졌다. 지나간 호들의 내용 및 구독신청은 여기 http://www.koreafilm.or.kr/webzine/webzine_list.asp. 넷째, 이곳에서 자매품으로 운영하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kmdb.or.kr/' 사이트에서는 한국영화들에 대한 정보 외에도 여러 좋은 영화에 대한 글들을 읽을 수 있는데, 최근 정성일 평론가가 올해 연말까지 임권택 감독의 영화 101편에 대해 각각의 글로 정밀분석하는 '임권택x101'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이다. (헉헉 힘들다. 근데 avast는 여기 영상자료원 사이트에만 들어가면 위험이 발견되었다고 삑삑거리고 난리람. 예끼, 니가 더 위험하다, 애 떨어질 뻔 했네.)

 

...............................

 

 

저도 여기 알라딘에서 여러 고마운 분들에게 늘 좋은 책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기에 이 또한 누군가에게 혹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적어봤습니다. 좋은 영화들 많이 관람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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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3-25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최근 정보성 블로그로 탈바꿈.

2013-03-25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3-03-25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좋은 정보네요^^

맥거핀 2013-03-26 17:52   좋아요 0 | URL
도움이 조금 되셨나요?^^

Arch 2013-03-25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멸 감독님 인터뷰 읽다가 artpluscn 알려주려고 다시 로그인 했는데, 와, 저 첫화면이 왜 낯익나 했네.

2013-03-26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6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6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3-03-26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국영상자료원과 인디플러그, 만 즐찾 되어있는데. 이런 보물을 공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의 관심과 애정은 있어야는데. 헐랭하게 살아온 지난 날(?)을 반성...

맥거핀 2013-03-26 18:04   좋아요 0 | URL
네 오백원만 내세요.^^ 근데 예전에 보니 Shining님도 뭔가 비밀스런 정보를 잔뜩 알고 계시던데, 원래 진짜 고수보다는 조금 아는 사람들이 입이 가벼운 법이죠.

넙치 2013-03-26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꼼꼼하게 영화 관련 정보들을 살펴보시네요. 더불어 맥거핀님이 지닌 영화에 대한 열정에 감탄을.^^

저는 <씨네21>도 거의 안 읽는데..ㅜㅜ 저는 여러 영화 잡지 폐간에 일조한 관객이에요. 예전 알라딘 영화 상영정보 블로그가 제게는 딱. 이리저리 서핑하는 거 완전 귀찮아해서 영사자료원과 아트시네마 정도만 주기적으로 들락거려요. 것도 상영정보를 얻기 위해서만;;;


맥거핀 2013-03-26 18:09   좋아요 0 | URL
근데 위에 번지르르하게 썼지만, 저도 막 정보를 찾아보고 본다기 보다는 충동구매, 아니 충동관람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찜해논 영화 보러갔다가 다른 영화보는 경우도 허다하구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충동적으로 보게 된 영화가 더 좋은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본 영화들은 막 시간 맞추고 기대하고 본 영화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이 훨씬 좋았어요.

씨네21은 정기구독 중인데, 쌓여가는 잡지를 보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좀 읽어야 하는데...잡지를 늘 표지만 감상해요.;;

꽃도둑 2013-04-02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하고 있는데 영화에 대해 잘 몰라요,,
이해되세요?,,,으흐흐 그래도 합니다 무대포 정신으로다!!!
영화도 책 읽듯 하는거죠...ㅋ
두 군데 자료 찾으러 들락거리긴 했는데.. 나머진 죄다 낯선 동네에요,
사이트 정보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어요.,,^^

맥거핀 2013-04-02 18:32   좋아요 0 | URL
오..그런 시민평론단 같은 거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시험 보고 막 그러나요?) 뭐 원래 다 잘 모르는데 그러는거죠. 언제는 리뷰 같은 것도 잘 알아서 쓰나요. 그냥 막 쓰면서 자기 글에 도취되고 그러는거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기쁘군요.(뻔한 말.) 좋은 정보 있으시면 저도 나중에 좀 알려주세요. 상부상조합시다. (이건 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