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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몇 개의 키워드가 맴돌고 있는 책이다. 시, 시인, 시대(정신), 인문(정신), 자유,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 단독성, 행동, 불온함, 그리고 김수영. 처음 나열한 키워드들과 마지막 '김수영'이라는 키워드는 이 책에서 무게가 같지 않다. 아니 무게가 같지 않다기 보다는 모든 키워드는 결국 '김수영'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김수영은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이며, 그래서 시인이고, 엄혹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고자 했으며, 일반성/특수성의 공식에 매몰되지 않고 단독성을 지키려고 했으며(그럼으로서 보편성이 되었고),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려 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불온했으며, 그래서 자유와 불온함으로 표상되는 인문정신의 구현자가 되었다. 즉 강신주의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 따르면, 이 모든 키워드들은 김수영이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치들이자, 김수영의 다른 이름들이며, 인문정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처음에 이 책을 보고서는 뭔가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표지의 바탕과 글씨, 그리고 내부의 속지, 그리고 책날개에 실려 있는 '김일성만세'라는 시가 모두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굳이 붉은색일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책을 보니 그럴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가독성'이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모든 글씨를 붉은색으로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의 제목이 '불온함은 긍지다'로 귀결되는 것처럼,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김수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 그것은 '불온함'이기 때문이다. 불온함은 자유와 행동으로 완성된다. 자유 하나만 놓고서는 결국 불온함에 이르지못한다. 머리 속으로만 행하는 자유, 생각에 그치는 자유는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 자유로움은 권력과 우상에 반하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누군가가 줄로 감아서, 혹은 채찍질로 도는 팽이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리며 도는 팽이. 그것이 불온함이며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인문정신이다. 김수영의 경우에는 그것이 시를 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만세'와 같은 시를 쓰는 것. '김일성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중략)/나는 잠이 깰 수 밖에.

 

물론 불온함이 꼭 붉은색일 이유는 없다. 불온함과 붉은색. 발음이 언뜻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것에는 어떤 태생적인 연관성은 물론 없다. 우리가 불온함에 언뜻 붉은색을 연상하는 것(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의 표지가 붉은색이 된 것)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며, 같은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역사와 관련된 김수영의 두 번의 전환점이 나온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과 그에 이어진 거제포로수용소의 경험이다. 김수영은 북한 의용군에 징집되어 끌려갔으나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잡혔고, 묻어두었던 인민복과 총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다시 남한 경찰에 체포되어 인민군 첩자로 낙인찍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포로수용소에서 친공포로임도 반공포로임도 내세우지 않는, 회색인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두 번째는 1960년 4월 학생혁명이다. 그는 초기에 학생혁명을 지지하며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고 여러 시들을 발표하였으나 곧 그 혁명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 되는지를 목도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위에 이야기한 '김일성만세'라는 시에 여실히 나와있는데, 4월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 역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이승만 정부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는 점. 즉 방을 없애자고 혁명을 하였지만, 그저 단순히 방이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점, 자신(과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은 친공이냐, 반공이냐의 이분법적 도식만이 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불온함을 붉은색으로만 내세우는 이 책의 표지가 사실은 도리어 어떤 씁쓸함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불온함에 붉은색을 연상하여야만 하나.)

 

김수영이라는 인간에게 있었던 이 두 번의 전환점은 물론 그의 시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의 시에도 두 번의 전환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첫 번째 전환은 그가 휴전협정이 되던 1953년에 발표한,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했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팽이가 돈다/팽이가 돈다. 너도 나도, 그러니까 각자 스스로 도는 팽이, 공통된 무엇을 위하여가 아니라 스스로 도는 팽이. 북한이니 남한이니, 친공이니 반공이니, 정치나 이념이니 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 각자 스스로가 혼자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는 그래서 4월혁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알게 된다. 시 '육법전서와 혁명'. 혁명을-/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그대들인데/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를 통해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는 비탄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힘, 그러니까 불온한 자유의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불온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외부의 정치적 억압과 내부의 노예적 습성에 대해서 말하며 행동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전환이다. 시 '푸른 하늘을'.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시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보이지는 않는다/(중략)/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하......그림자가 없다.

 

..................

 

뭔가 좀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라 생각했다. 일단 이 책은 정확한 형체를 알 수가 없다. 김수영의 전기나 평전도 아니고, 시작(詩作)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철학에 대해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책도 아니다. 김수영의 시를 읽은 개인적인 느낌에 대한 글이라고 보기에도 약간은 이상한 점이 있고, 그렇다고 김수영 시에 대한 비평문도 아니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글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다. 책의 앞과 뒤에 붉게 열을 가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김수영에 대한 사랑 혹은 찬양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아 종종 딴죽을 걸고도 싶어진다. (특히 가장 압권은 에필로그로 실은 저자 자신과 김수영에 대해 이야기할때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많은 분들도 약간은 느꼈겠지만, 그렇다면 김수영만이 시인인가, 다른 시인들은 모두 가짜시만 써낸 허위의 시인들에 불과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 따르면 순수시도 참여시도 아닌 김수영의 정신을 가지고 써낸 시, 즉 자신의 시마저도 끊임없이 새롭게 넘어서려는 시(그것도 단지 형태만이 새로운 시여서는 안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제스처로 써낸 시만이 올바른 시니까. 순수시도 아닌, 참여시도 아닌 각자 자신만의 제스처로 각자 도는 각각의 시.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묘한 불편함의 원인이 아닐까. 즉 이 책에서 결국 원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가득한 사회다. 즉 각자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각각 토해낸 시가 자유롭게 어우러져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시인이라는 특이한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니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시인이므로. 모두가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를 써내는 사회이므로. 그러므로 이 책은 김수영에 대해서만, 혹은 그의 시에 대해서만, 혹은 시쓰기나 철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김수영에 대해서 자세히 알거나, 그의 시쓰기를 모방하게 되거나, 특정의 철학사조를 전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신만의 제스처, 자유와 행동이 결합된 불온을 우리 각자 스스로가 얻는 것이므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불편할 때만이 우리는 움직이므로. 편할 때의 우리는 결코 불온해질 수 없으므로.

 

시끄러운 여름밤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김수영의 기일이다. 불온한 그대여. 시를 써라.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도록.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 시 '여름 밤'(1967.7.27)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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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6-1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느라 유로 게임 날리나 싶었는데, 이게 웬일. 아직도 전반. 쉐바 한 골 넣어줘요~.

맥거핀 2012-06-17 16:32   좋아요 0 | URL
네..결국 억지로 쓰게 되는군요. 자발적으로 좀 쓰고 그래야하는데..^^ 한사람님이 읽으시면 긴장해야겠군요.

조금 기획적으로 만들어진 느낌이 없잖아있죠. 사실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는 경향도 짙고...강의를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굳이 10개의 챕터로 나눌 이유도 없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아무튼 강신주의 김수영에 대한 애정만큼은 생생히 알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알아듣기 쉽게 차분히 이야기하는 능력도 돋보였구요. 저 같은 경우는 김수영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김수영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딧불이 2012-06-16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의 정신에 감염되고 싶습니다. 김수영에 대한 글은 하도 많아서 무얼 또 보태려하나 싶어 뜨악해하고 있었는데 저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글을 써주셨네요. 맥거핀님 덕분에 또 공부했습니다.

맥거핀 2012-06-17 16:36   좋아요 0 | URL
강신주의 논의대로라면 김수영처럼 사는 것은 계속된 자기반성과 자기를 초월하려는 움직임이 뒤따라야하므로 매우 고난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고난한 일인만큼 기쁨도 맛볼 수 있겠지만요. 저도 김수영의 정신에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2012-06-2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좀 불쾌했어요. 너무 김수영을 자기 식으로 끌어다 해설해 버리니까.. (그래서 김수영의 연애 이야기까지 읽고 책갈피 꽂아 책장에 넣고 여태 묵혀두었지요. 어쨌든 마저 읽어야겠지요..)
예전에 김수영과 자유를 주제로 '불온함=자유=시정신' 뭐 이런 도식의 강의를 할 때는 재밌고 좋았는데, 그걸 책 한 권으로 써 놓으니(온통 그렇게 자기 논리로 김수영의 삶을 재단해 놓으니) '하나의 해석'이란 걸 넘어서서 '진짜 김수영이 이럴까' 싶은 것이, 불쾌해졌어요. 그래서 맥거핀 님도 '종종 딴죽을 걸고 싶어지'신 게 아닐까 싶네요.

어쨌거나 이 글의 마지막 문단과 인용, 맘에 듭니다.

맥거핀 2012-06-21 02:51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강신주 씨의 강의도 들으셨나요? 하긴 좀 보면 너무 한가지 주제로 밀고나가며 모든 것을 다 그 틀에 맞춰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요. 아마도 김수영 시인이 아직 살아계셨으면 불벼락을 내리셨을듯도 싶은데..

그래도 저는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어요. 확실히 글을 쉽게 쓰는 능력이 있고, 조금 어렵다 싶은 이야기도 쉽게 푸는 능력이 있더라구요. 그의 해석에 100%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해석능력에는 어느 정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홍상수, 2012

 

 

(영화의 전체 줄거리가 들어있음)

 

 

 

홍상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특히 최근작에 들어서 그런 경향이 좀 짙어지는데, 과거로 돌아가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나가는 시간(지난 여름에 좋았던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의 <하하하>와 '일기'의 형식으로 되어있는 <밤과 낮>)과 증폭되거나 급속하게 축소되어 있는 시간(영화의 어떤 부분들이 영화 속 인물인 옥희가 찍은 영화임을 암시하는 <옥희의 영화>와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게 해놓았던 <극장전>. 결국 영화란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는 것이다)을 보여주다가 <북촌방향>에 이르러서는 이 시간의 흐름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이 영화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표면상으로 이 이야기는 원주(정유미)가 쓰는 세 개의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이 시나리오는 각각 완전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 개의 시나리오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비교적 비슷한 흐름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즉 이 세 개의 시나리오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모항이라는 곳에 온 안느(이자벨 위페르)라는 외국여자가 여러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모든 이야기는 이 모항의 펜션과 그 주변에서만 이루어지며, 이 안느는 안전요원(유준상)이라는 공통의 인물을 만나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영화감독 종수(권해효)와 그의 부인(문소리)를 만나고 이들과 어떤 관계가 이루어진다(이 부부는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뒷모습이 살짝 비치며, 대신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는 영화감독 종수 대신에 이름도 비슷한 다른 영화감독 문수(문성근)가 등장한다). 그리고 안느는 이 각각의 시나리오에서 '등대'를 찾는다.

 

즉 어떻게보면 이것은 세 개의 평행한 시나리오이며, 세 개의 비슷한 세계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몇 가지 것들을 미세하게 바꾸면 아마 두 번째 시나리오가 될 것이고, 그것에서 또 몇 가지를 미세하게 바꾸면 아마 세 번째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 개의 평행우주이다. 같은 인물, 같은 공간, 같은 상황들. 그것의 하나의 힌트는 이 세 개의 시나리오에서 이 각각의 인물들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세 편의 시나리오에서 공통적으로 안느는 호기심이 많고, 어느정도 포용력이 있고, 타인과 대화를 하고자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다른 인물들도 어느정도의 공통성이 보이는데, 안전요원은 때로는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순진하고, 조금은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붕 뜬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며, 펜션의 여주인(정유미)는 친절하고, 영화감독 종수의 부인은 술마시고, 여자를 밝히는 종수를 못마땅해한다. 그러므로 이 전체 이야기를 세 개의 평행우주, 세 개의 다른 나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내가 살고 있는 이 세 개의 다른 나라들. 이 각각의 다른 나라에서 미세한 몇 가지가 어그러졌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것인가.

 

 

전체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어떤 느낌들을 읽어보니 대체로 유쾌하고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로 생각하는 의견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왠지 쓸쓸했고, 서늘한 감정이 남았다. 물론 홍상수의 이야기에서 이것은 그리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홍상수의 이야기는 상당수 찌질한 남자들이 찌질한 짓거리를 벌이는 코믹스러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지만, 한편으로는 그 가운데에서 늘 불안한 기운들이 맴돌고 있었고, 전면적인 죽음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홍상수 영화들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영화를 본 어떤 이는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불안하고 불길한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는 이 사실. 이 넓은 스펙트럼이 가능한 영화는 많지않다.) 그것은 이 <다른 나라에서>의 이야기의 흐름도 어느정도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아마도 홍상수의 영화들 중 영화내내 가장 미소를 짓게하는 장면이 많은 영화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흐름은 동시에 왠지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같은 인물, 같은 공간, 같은 상황들. 그러나 세 개의 시나리오에서 인물은 점점 나쁜 위치에 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안느의 변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안느는 잘나가는 영화감독이지만, 두 번째에서는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불륜행각을 벌이는 여자이고, 세 번째에서는 한국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프랑스여자가 된다. 다른 인물들은 어떨까. 먼저 세 편 모두에 등장하는 안전요원의 경우를 보면, 첫 번째 편에서는 안느를 위해 사랑스런 노래도 불러주고, 약간 무모해보이기는 하지만, 안느에게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세 번째 시나리오에 이르러서는 아무 생각없는 무뇌의 캐릭터, 상당히 수동적인 인물이 되어버린다. (단적으로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안전요원이 고기를 구워주는 장면과 세 번째 시나리오에서 고기를 구워주는 장면을 보자. 첫 번째는 조금은 막무가내지만, 자신의 뜻대로 밀어붙이는 성향이 강한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수동적인 리액션에 머물고 만다.) 그리고 영화감독 종수와 그의 부인의 경우, 첫 시나리오에서 이들은 술자리에서 티격태격하지만, 결정적인 파국에 이를 가능성은 그다지 없어보인다. 그러나 세 번째 시나리오에 이르러서는 그 파국은 상당히 현실에 가까워진다.

 

이것을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 이야기는 원주가 모항의 펜션에서 쓰고 있는 세 개의 시나리오이다. 왜 원주는 여기에서 이 이야기들을 쓰고 있는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원주와 그녀의 어머니(윤여정)의 대화를 본다. 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사업실패, 혹은 보증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이 펜션에 갇혀있어야만 하는 신세이다. 즉 원주가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함이기도 하며, 한편으로 현실을 잊고자함이기도 하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쓰는 첫번째 시나리오에서 그녀는 최대한도의 꿈을 담는다. 여주인공은 잘나가는 영화감독이며, 어느 낯선 곳에서 로맨틱한 남자를 만난다. 이것은 첫 번째 이야기. 그러나 이후 우리는 두 편의 이야기를 더 본다. 한가지 질문. 왜 첫번째 시나리오 이후에 비슷한 두 개의 이야기가 계속 쓰여졌는가. 원주는 왜 두 가지의 이야기를 더 쓰는가. 그것은 첫번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이제와서 새로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완전히 다르게 쓸 요량은 없다. 그러니 그녀는 몇 가지의 설정을 바꾸기로 한다. 여주인공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여자가 되고, 이야기는 꿈과 현실이 어지럽게 뒤섞인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두 번째 이야기. 그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은 원주는 세 번째 이야기를 쓴다. 여주인공은 다시 이혼당한 여자가 되고, 할 수 있는 일은 술을 마시고, 누군가와 잠깐의 섹스를 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세 번째 이야기.

 

즉 처음에는 꿈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두 번째에는 꿈과 현실의 중간에 있는 이야기가 되고, 마지막에는 이야기는 급기야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된다. 꿈에서 현실로의 추락. 첫 번째 시나리오를 결국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에는 안느는 물에서 수영을 하고 막나온 안전요원에게 물이 차갑지 않느냐고 물었고, 안전요원은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지으며 전혀 춥지 않다고, 따듯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 번째 이야기에 안전요원은 춥지 않느냐는 안느의 말에 대답한다. 춥다고, 물이 차갑다고. 그 차가워진 현실의 온도, 꿈이 깨어져버린 차가움. 등대는 어떨까. 이곳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등대. 안전요원에게 안느는 그것에 대해 묻지만, 안전요원은 모른다(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기는 한다. 안느의 꿈 속에서). 어딘가에 있을 그 꿈의 등대는 그러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자그맣게 축소되어 안전요원의 손에 들려있다. 이거 등대잖아요, 작은 등대. 그 작게 축소된 현실에서의 꿈의 존재. 이 쓸쓸한 모항에서 이루어지는 쓸쓸한 이야기들. (그래서 영화 속에서는 안느와 다른 인물들에 의해 '아름답다'고 이야기되는 모항이지만, 나는 그 모항의 쓸쓸한 이미지들만 보였다. 항구 옆에 덩그러니 서있는 펜션, 포구에 매어있는 빈 배들, 잿빛의 바다, 홀로 수영하는 안전요원, 화장실 옆의 단 하나의 텐트.)

 

물론 이것은 그저 내가 만들어낸 어지러운 도식이다. 그 도식을 보는 홍상수는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영화 속 안느와 스님의 대화. 왜 이렇게 슬픈가요. 당신이 슬퍼하기 때문이지요. 왜 무서운가요. 당신이 무서워하기 때문이지요. 말장난하시는 건가요. 아니, 모든 것이 그래요.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 뿐이지요. 결국 도식이란, 그렇게 보고자하니 그렇게 보이는 것, 그렇게 느끼고자 하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쓸쓸함이란 내가 만들어낸 쓸쓸함일 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세 개의 시나리오, 세 개의 평행우주. 이것은 정말 '다른 나라'인가. 꿈과 현실은 그토록 다른 것인가. 홍상수는 몇 개의 힌트를 던진다. 세 번째 시나리오에서 안느가 해변에 던진 깨진 소주병은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돌아오고, 처음 안느가 길가에 꽂아두었던 우산은 중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안느에 의해 되돌아온다. 꿈 속의 현실, 현실 속의 꿈. 이 세 개의 평행우주는 결국 다른 것일까, 같은 것일까.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 이것은 가능한 다른 나라의 하나일뿐.

 

당신의 '다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덧.

영화가 끝난 후 이어졌던 홍상수 감독과의 대화에서 홍상수의 태도는 그 자신의 영화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였다. 답은 없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마 답일 거에요, 허허허. 아마도 홍상수의(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영화들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정답을 상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답이 있는데, 그 정답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 그러나 무엇이 정답인가. 감독의 애초 의도에 가까운 해석이 정답인가. 감독의 의도에 최대한 맞춘 답, 그 답은 아마 나의 답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홍상수의(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답일뿐. 그러므로 가장 웃기는 것 중의 하나는 영화의 완전해석판이니, 이것이 답이니, 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는 '영화'에 국한된 태도만은 아니다.

 

덧2.

이 영화에 대한 (그간 다른 홍상수의 영화들과 비추어볼 때) 외국에서의 더한 호평은 언어적인 뉘앙스와도 많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언어적인 뉘앙스는 매우 중요한 문제니까. 외국의 관객들에게는 그 언어적 뉘앙스를 바로 포착할 수 있는 첫번째 영화다. 반면 도리어 우리 관객들에게는 이는 약간은 역으로 작용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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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6-1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오래간만에(제가 오래간만^^) 영화글 반갑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보셨다는 글귀, 와닿네요.
안느가 또다른 길을 가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사라지자, 스님과 여교수가 허둥지둥
안느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전 몹시 우스꽝스러웠어요. 다른 장면들에서 웃음이 많이
나왔지만요. 어쩌면 우리는 각자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말'을 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니 서로 말장난이나 하는 것으로 들리고요.
종우가 안느를 굳이 뻘로 데리고 들어가 둘이서 그러다 들키는 장면에서도 웃다가
문득 좋은 데 데려간다더니 뻘로?? ㅋㅋ 이런 생각 들었어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생각할 게 많이 드는, 웃지만은 못할 홍감독 영화^^

맥거핀 2012-06-14 00:49   좋아요 0 | URL
네..최근에 영화를 별로 보지 못해서, 글도 좀 뜸했네요.^^ 그래도 홍상수의 신작이 나왔으니 봐줘야죠. 하..그 장면 좀 많이 웃기긴 했죠. 하필 그 타이밍에서 걸려서, 뭐 사실 그다지 별다른 걸 할려는 건 아니었던듯도 싶었는데..

홍상수의 영화는 늘 흥미로워요. 여전히 또 모호한 지점들을 안고 있구요. 그래서 또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만, 약간은 비슷한 것이 반복되다보니 조금은 저로서도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싶다는 느낌은 좀 있었어요. 즉석에서 쓰는 시나리오, 예기하지 않고 만드는 촬영방식이 홍상수의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지만, 트레이드 마크라는 것은 또 한편으로 정체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GV에서도 그와 관련된 질문들이 조금 나왔던 것 같고..) 물론 저는 홍상수 감독이 보여줄 것이 여전히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6-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맥거핀님이 주말에 보신 영화! (저는 주말에 영화 안봤답니다, 그냥 뭐 뒹굴놀이~)
리뷰 못보고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아마 극장전, 밤과낮? 이후로 홍상수 영화를 볼 생각도 없어져버렸지만 이자벨 위페르라니, 오오, 담번엔 인도에 가셔서 영화 찍으실 것 같아요.

지금 제 다른 나라는 '요리'입니다ㅋㅋㅋ 김치김밥 말았는데 김을 펼치니까 밥을 어디까지 깔아야 할지 모르는 그런 초보자의 무한요리세상ㅋㅋㅋ

맥거핀 2012-06-14 00:55   좋아요 0 | URL
근데 홍상수+이자벨 위페르..우와 하고 가졌던 기대감만큼은 조금은 덜한 것 같아요. 물론 홍상수 감독이 배우빨(?)로 영화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다지 새로운 느낌은 주지 못했다고 할까요..말씀하신 것도 재밌어보이기는 하네요. 홍상수가 만드는 발리우드? 하..근데 이 영화에도 귀여운 노래가 나오기는 합니다.

저도 요즘에 어찌어찌하다보니 혼자 밥을 해먹는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근데,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은 늘 살짝 걱정되기는 해요. 김치김밥 같은 건 시도도 못하구요. 아직은 그냥 간단한 찌개끓이는 정도. 요즘의 고민은 찌개를 끓일 때 야채를 일차로 살짝 볶는게 좋은가, 아닌가,입니다. 블로그들에 가득한 레시피들은 대체로 볶으라고 하는데.. 귀찮아요.ㅋ

아이리시스 2012-06-14 13:49   좋아요 0 | URL
음..맥거핀님은..애긴데?! 계란말이랑 고기볶음으로 해결!
아..찌개 끓일 때 야채를 볶아야 한다면 차라리 볶음밥을 먹고 말겠어요. 무진장 귀찮은 거 아니예요?ㅜㅜ(운다) 생각만으로도 귀찮아ㅜㅜ

김치찌개할 때 고추기름 낸다고 볶다가 태워먹은 적 여러 번 있어요. 그나저나 저는 남자가 요리하는 거 아직도 너무 신기한 여자ㅎㅎ 마인드가 이래요. 내가 해야한다 뭐 이런 건 아니고 남자가 밥도 하는구나..뭐 이런 신기함.

맥거핀 2012-06-16 02:57   좋아요 0 | URL
응? 허허..아이리시스님 의외로 보수주의ㅋㅋ 요새 밥 정도는 해야 집에서 안 쫓겨나요.-_- 당연히 계란말이가 더 좋은데요, 그넘의 귀차니즘 때문에..찌개는 한 번 끓이면 그냥 3일 정도는 그것만 먹어요. 그니까 맛보다는 귀찮음에 굴복한 셈.

Shining 2012-06-1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내일 보러 가요, 리뷰는 다녀와서 읽을게요 :-) 그러니 저는 딴 얘기만 할게요
ㅎㅎ 올해 칸에 간 영화들 중 개인적으로는 하네케와 크로넨버그의 것이 제일 궁금합니다.

아, 저는 어떤 영화가 개봉했을 때 맥거핀님은 이 영화 보셨을까? 혹은 보실 예정일까? 무심코 생각하게 될 때. 스스로 신기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꼭 영화 페이퍼 써주셔야 해요(결론ㅋㅋ)_-*

맥거핀 2012-06-16 03:07   좋아요 0 | URL
네..신의를 지키시는 Shining님이시기 때문에 저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허허..하루에 시를 두 개 베껴 쓰는 날도 있네..)

아무튼 이 밤에 하네케의 영화와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찾아봤음. 으..예상대로 두 영화 모두 쉽게 볼 영화가 아니군요. 특히 크로넨버그 씨 '젊은 자산관리사가 강박증에 빠져 보내는 24시간'이라니..또 보는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할려고 그러시나..그러나저러나 덕분에 크로넨버그 씨의 또다른 새로운 영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네요! 무려 비고 모르텐슨 나오는 '이스턴프라미스'의 속편이라니....@.@

마지막 말씀은 저로서는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고마운 말씀이네요.^^ (저 사실 Shining님이 (장르)소설에 대해 글 쓰실 때 '과감히 패스'하는 경우도 있는데 죄송하네요.;;)

Shining 2012-06-19 12:12   좋아요 0 | URL
네, 전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므로ㅋㅋㅋ 토요일에 보고 왔습니다, 하지만 여지껏 그의 영화에 제가 늘 그랬듯 첨언을 하지는 않겠어요^^;

크로넨버그 영화 주인공이 로버트 패틴슨이라는 것도 좀 놀랐어요(전 아마 이 배우에게 깊은 편견이 있나봐요, 매번 놀라는 걸 보니;;). 저도 속편, 그 영화 기다립니다. 사실 <코스모폴리스>보다 더 궁금하기도 해요ㅎㅎ

죄송하긴요~ 맥거핀님이 고른 영화에 관심이 있는거지, 맥거핀님 글이라서 일부러 읽는 건 아닌걸요^^ 각자 읽고 싶은 글을 읽고 싶을 때에 읽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아, 다만 그렇다면 제 글 중에 맥거핀님이 관심 가질만한 글이 몇 개 없을거라는 생각은 드네요ㅎㅎ

맥거핀 2012-06-19 13:02   좋아요 0 | URL
아마도 분명히 홍상수씨는 이런 리뷰를 보면 허허허, 참 잘도 갖다붙여놨네...그럴 겁니다. 이동진씨와 한 관객과의 대화를 보니, 이동진씨가 홍상수 영화에 자주 나오는 줌의 활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긴 의미를 붙인 질문을 했는데, 홍상수의 답은 한 줄이더군요. "그 때 왠지 줌을 당기고 싶더라구요.."

아니에요. 그래도, 소설 글 꽤 봤어요.^^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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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더하기 25 -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해의 기록 / 조은 / 또하나의문화

 

조은의 영화 <사당동 더하기 22>는 기념비적인 다큐였다. 1986년 사당동 철거재개발 지역에서 쫓겨난 한 가족의 삶에 22년간이나 카메라를 들이댄 끝에, 그는 깊은 성찰을 남기는 이 다큐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후 3년이 지났고, 빈곤은 여전히 지속 중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 자음과모음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다만, 여기서의 책과 혁명은 별개가 아니라 책을 읽고 쓰는 것, 책 그 자체가 곧 혁명이라는 말이다. 모든 책 읽는 자들을 위한 변론, 그리고 서시. 어떤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혁명을 행하고 있다. 

 

 

잔혹 영화 / 앙드레 바쟁 / 현대미학사

 

바쟁 曰 "비평가의 임무는 있지도 않은 진리를 편리하게 만들어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지성과 감성을 바탕으로 작품이 주는 충격을 최대한 연장하는 것." 1995년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다.

 

 

도시 예술 산책 - 작품으로 읽는 7가지 도시 이야기 / 박삼철 / 나름북스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 앞 거대한 <해머링 맨>을 보면서 왜 이것은 여기에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가,를 늘 생각하곤 했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한번쯤 읽어볼 때가 되었다. 오늘도 예술작품을 보고, 그 옆을 지나가고 있으니까.

 

 

미하일 바쿠닌 / E.H.카 / 이매진

 

바쿠닌이 세력을 얻고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소비에트는 달라졌을까, 아니면 탄생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것은 애초 불가능한,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나. E.H.카의 평전이라면 믿을만 하겠지. (<68년, 5월 혁명>이라는 만화를 놓고 고민하다가 최종적으로 낙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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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5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6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2-06-0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을 추천했는데, 여담이지만 혁명이라는 말은 참.. 묘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항상.

맥거핀 2012-06-06 22:49   좋아요 0 | URL
대장님, 바쁘시네요. 이번에는 대장님이 추천하신 책이 한권쯤 선정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아이리시스 2012-06-08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심지어 표지도 없는 책이..영화..쭉 밀고 나가요, 영화!!!
오랜만에 안부 물어요^^

2012-06-08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9 0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9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돈의 맛, 임상수, 2012

 

 

(영화의 결말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돈의 맛은 어떤 맛일까.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짠맛에 가까운 맛일 것이다. 짭조름한 땀의 맛. 돈이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돌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그것이 쾌락의 땀이든, 고통의 땀이든 간에)이 그것들에는 아마도 깊숙이 배여들어가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아마도 그래서 같은 짠 것인 돈과 소금의 어떤 비슷한 점을 유추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금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너무 많아지면, 그것은 우리의 일부분에 악영향을 미치고 망가뜨린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그 짠맛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그것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그것은 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비슷해진다. 돈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돈은 우리를 '망가뜨리고', 우리는 결국 돈에 '길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보통의 돈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임상수의 영화 <돈의 맛>에 나오는 윤회장(백윤식)의 집 금고에 가득 쌓여있는 반질반질한 새 돈뭉치들, 그것에서도 짠맛이 날까.

임상수의 전작 <하녀>의 느슨한 후속편, 혹은 스핀오프, 혹은 이본(異本)인 이 영화 <돈의 맛>은 <하녀>처럼 인상적이지는 않으나, 꽤나 흥미로운 시작을 보여준다. <하녀>는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는 여자를 보여주면서 시작했고, 카메라는 수직하강하여 땅 위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는 잠깐의 흥미거리 이상은 아니었다. 그것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돈의 맛>은 마찬가지로 윤회장과 그의 비서 주영작(김강우)의 수직하강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그러나 이 수직하강은 돈을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하강이다. 하늘에서 돈가방을 들고 내려오는 왕의 강림.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그 돈을 전달하러 유유히 가는 중이다. 말 그대로 유유히. 그리고 동시에 임상수는 흥미롭게도 다른 차들을 그저 달리는 불빛들로 처리해버린다. 그 빠른 이동과 대비되어 유유히 달리는 이 윤회장. 그것은 아마도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는 윤회장은 다른 차들처럼 그렇게 한푼의 돈이라도 더 벌려고 아등바등 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윤회장의 눈에는 아마도 실제 다른 차들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점. 인간이 타고 있는 자동차가 아닌 그저 수평으로 내달리는 불빛으로. 

2.

그래서 윤회장의 집에서 주영작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영화 초반부의 씬들은 꽤 흥미롭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윤회장의 집은 참으로 흥미로운 공간이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집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진 이 집은 집보다는 거대한 갤러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러니까 하녀들은 흥미롭게도 갤러리 직원들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갤러리와 다른 점은 이 갤러리의 양식을 정확히 짚어내기가 꽤 어렵다는 점이다. 모던한 장식들과 동양적인 여백의 공간, 복잡한 이중계단과 심플한 벽면이 혼재되어 있는 이 공간은 고전예술과 현대예술이 만나고 서양의 것과 동양의 것이 조인트 콘서트를 하는 공간이다. 그 맥락을 알 수 없게 짬뽕된 이 공간은 그래서 도리어 키치적이 되어간다. 그것의 상징은 아마도 윤회장의 장인, 즉 백금옥(윤여정)의 아버지인 노회장의 모습일 것이다. 그 부의 끝에서 만들어진 그 키치, 그 우스꽝스러움(그래서 현실세계의 모 회장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쁘띠'의 상징이 되어 귀여움을 받는 것인가).

물론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들을 찍는 방식, 그리고 그것에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얻게 되는 어떤 심상에 관한 부분이다. 나는 초반의 이 장면들이 어떤 동물원을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으르렁대는 동물원의 맹수들처럼 이들 가족들은 세상을 향해 으르렁댄다. 돈만 밝히는 것들, 어떻게든 우리 돈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저 아랫것들, 교수고 정치인이고, 사업가이건 간에 모두들 똑같아 돈이라면 환장들을 하지. 그리고 그 맹수들을 우리는 사육사 주영작의 안내에 따라 차례로 관람한다. 그러나 이 관람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을 저  멀리서 지켜본다,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 초반부의 씬들이 흥미로운 것은 그 내용적인 면보다도 임상수는 관객을 이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보도록 허락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동선은 그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대부분 설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그들을 우러러보거나, 아래에서 내려다본다. 즉 우리는 그들을 감시하는 입장이 되거나, 아니면 '피핑 톰'이 된다. (이 영화에는 동시에 감시카메라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 이는 물론 우리와 그들의 어떤 계급적 차이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이로써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일종의 불유쾌한 경험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돈의 맛>이 상당수의 관객들에게 불유쾌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어떤 특정의 장면들이 낳은 효과도 있겠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관객을 일종의 몰래 숨어서 보는 자, 때로는 감시하는 자로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감시가 유쾌할리가 있겠는가. (아마도 임상수의 의도는 후자쪽,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을 감시해야 한다,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3.

이러한 윤회장 가족 중에서 조금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나미(김효진)다. 그렇다, <하녀>의 그 '나미'다. 지난 <하녀>를 보고 쓴 리뷰에서 나는 '나미'가 아마도 괴물이 되지 않을까,라고 썼고, 임상수의 의도도 아마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돈의 맛>과 관련한 인터뷰를 보니 본인도 나미가 괴물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충고에 따라 나미를 이 영화에서 조금 다른 인물로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나미도 사실 주영작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는 어떤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자신에게는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주영작에게 말하면서도 이는 한편으로 어떤 반응을 떠보는 것처럼도 느껴진다(아마 주영작의 머뭇거림도 그런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인간들을 대하는 것, 그러니까 다시 동물원으로 돌아간다면 처음보는 동물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떠보는 것이라고 할까.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오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어떤 (좋게 말하면) 지향점, (나쁘게 말하면) 체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는 괴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괴물이 아니라고 해서 그녀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여기서의 '인간'은 '니가 인간이냐!'라고 말할 때의 그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이른바 홍상수의 구분법을 쓰고 싶다. "우리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 말할 때의 그 구분법, 그 인간.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늘 '찌질한 인간'들이 나온다. 그러나 상당수의 경우 우리는 그들을 찌질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찌질한 말을 내뱉고 찌질한 짓거리를 벌이는 '찌질이'일 뿐이다. 아마도 (초창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홍상수의 영화에서 좀처럼 죽음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홍상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죽음을 마주할 용기마저도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도 '찌질이'라는 말이 나오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주영작은 자신이 찌질이라고 체념하듯 내뱉는다. 그러나 이 때의 '찌질이'라는 대사는 자조적인 맥락에서 내뱉어진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관객에게 도리어 이 인물은 괴물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주영작은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살짝 갈등하지만, 결국에는 거울 뒤편에 돈다발을 쌓아두고,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그저그런, 보통의 그저그런 인간, 결코 A급은 아닌, 그런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런 인간. (그러나 이것이 쉬울까.)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결말에까지 이어진다. 주영작과 나미의 비행기에서의 섹스씬. 이 섹스씬을 행복한 결말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 아래에는 에바의 시신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막을 수도 있었던 에바의 죽음.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이 섹스씬을 보며 못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이것은 결국 어떤 자신들의 찌질함, 그 체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에바의 관 속에는 주영작이 던져넣은 돈다발마저 들어있으니까. (에바가 그 돈을 보고 어찌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의 '찌질함'을 추인하는 것으로 괴물이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임상수(그리고 비슷한 이름의 홍상수)가 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희망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도 싶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것.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고 다짐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결말이 께름칙한 이유는 이 마지막은 결국 재생산이기 때문이다. 나미와 주영작의 이 결합은 전개 과정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 백금옥과 윤회장의 결합의 되풀이니까.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윤회장을 말하는 백금옥도 처음에는 윤회장을 이렇게 만난 것이 아닐까. 나미와 주영작은 그들과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희망을 걸어봐도 될까.) 

4.

그렇다, 그런 세상이다.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한 세상. (그것과 관련하여 영화에 재미있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무례한 말들을 내뱉는 윤회장의 아들 윤철(온주완)과 싸우려드는 주영작. 겁을 먹은 듯이 보이는 그 아들을 주영작은 자신만만하게 차에서 끌어내리지만, 도리어 얻어터지는 것은 주영작이다. 그 (아마도 돈으로 만들어진) 싸움의 기술. 돈은 없지만, 주먹과 깡을 믿고 살아가는 사나이들의 세계는 이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다.) 그 거대한 지옥도, 최대한 좋게 말해 어느 정도의 '체념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자신의 몸에 불을 싸지르는 것으로 끝내버렸던 그 <하녀>에 가득한 체념과 이 <돈의 맛>의 같지만 다른 체념을 결국 결말에서 보게 되는 것. 그러니까 스핀오프, 혹은 이본.

우리의 최선은 결국 찌질해지는 것일까. 그 체념을 결국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그 체념한 자신을 견뎌내는 것 말이다. 그러나 물론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타인을 견뎌내는 것보다 자신을 견뎌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그 견뎌냄의 끝에는 결국 인간이 되는 길이 있을까. 



덧.
이 영화를 본 서울극장 8관은 손님을 받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우퍼가 울릴 때마다 무대가 심하게 흔들리며 천둥치는 소리가 나는 데다가, 스크린 오른쪽의 일부분은 검은 얼룩이 크게 있었다. 서울극장 관계자는 빨리 조치를 취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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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2-06-0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은 보는 책들이 독자들을 아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많은데...이 영화도 그런 쪽에 속하나봐요. 영화관으로 달려가지는 못하더라도 챙겨보게 만드시네요.

맥거핀 2012-06-06 22:51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흥미롭게 보았다는 쪽에 가깝겠네요. (이렇게 얘기하면 저의 심리가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네오 2012-07-06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영화 좋아합니다만 ㅋㅋ

맥거핀 2012-07-06 17:21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해요. 임상수의 냉소적 유머(와 분노) 좋아요.
 

 

이번 알라딘 1인시위를 둘러싼 몇 가지 단편적인 생각. 먼저 그 내용에 대한 견해를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전체적으로 크게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타이밍에서나 프레임에서나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좋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1인시위라는 방식을 택한 것은 일종의 고육지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1인시위라는 것은 정상적인 루트가 가능하지 않았을 때 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번에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뭐 그것을 마무리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되었는지를 이미 익히 보았으니까. 정상적인 문제제기 루트가 가능하고, 그것이 어떤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으면 그런 방식을 취할 이유도 없겠지.

 

물론 1인시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편함을 만드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여러가지로 비판받을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다. (당연히 그런 것을 감안하고 시작하셨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것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다고 보지만, 공격적인 대응, 폭력적인 비판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은 든다. 이번 경우는 온라인이지만, 예를 들어 오프라인에서라면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는 사람에게 그 내용에 대한 부분에 대해 반박을 하거나 논리적인 비판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보지만, 욕설을 하거나, 인신공격을 하거나, 계란을 던지고, 그 피켓을 뺏아 들고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필요할까. 그냥 지나치면 안되는 걸까. 적어도 그 시위로 인해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한편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와같은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어쩌면 나와 같은 반응이 더 무서운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1인시위라는 것의 목적 중의 하나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고, 이슈를 만드는 것이니까. 이것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서재 내에서 더 큰 문제가 된다면 알라딘 입장에서도 가만히 있기는 어려울 테지.

 

다만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반응에 섞인 어떤 진보적인 가치들에 대한 것. 어느 곳에서도 주류가 되는 가치는 동시에 또 공격무기로 기능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극보수 사회에 가까운 우리사회에서 좌파라고 낙인찍는 것이 어떤 공격무기가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도리어 역으로 진보의 가치가 주류가 되어있는 이곳 알라딘 사회에서는 우파(혹은 가짜 좌파)라고 낙인찍는 것이 또다른 공격무기가 되는구나.

 

덧.

이 글이 또 하나의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고,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나는 멘탈이 너무 약하다. 나의 서재에만 노출시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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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05-28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는 길에 인사 남기고 갑니다. 위 글의 입장이 저의 의견과 같으며 동의를 표하는 추천합니다.

2012-05-26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2-05-26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입장에 동감해요.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기도 하고.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게 일정 부분 어떤 정치적 코드를 '잘 알지도 못하고' 써선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어요.

맥거핀 2012-05-27 12:27   좋아요 0 | URL
네..맞는 말씀입니다. '코드'라는 것은 좀더 주의해서 쓸 필요는 있겠죠. 괜히 역풍을 맞을 수 있으니까. (뭐 저도 엉망이긴 합니다만) 모든 논쟁에선 일종의 '프레임'을 잘 짤 필요가 있겠죠. 그러나 설혹 그렇다고 해도, 지나친 것이 지나치지 않은 것이 되지는 또한 않겠죠.^^

마녀고양이 2012-05-26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
즐거운 연휴되시기를 바래요.

맥거핀 2012-05-27 12:27   좋아요 0 | URL
어..벌써 연휴의 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들도 잘 보내세요.^^

2012-05-27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8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9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30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31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31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