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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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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1.  

오에 겐자부로는 고쳐쓴다. "나는 평생 젊은 나이에 시작해 버린 소설가로서의 삶에 본질적인 곤란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자신이 쓴 것을 고쳐 쓰는 습관으로써 그것을 극복해 왔음을 깨닫습니다. (p.744 '오에 겐자부로 후기') 중기 단편의 연작들을 제외하고라도, 묶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즉 주제를 변주하면서 어떤 세세한 것들을 고쳐서 이루어진 듯한 소설들이 있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 혹은 <남의 다리>와 <인간 양>, <사육>과 <돌연한 벙어리>, 후기 단편의 <벨락콰의 10년>과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2.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단편들은 어떤 은유들이다. 먼저 <기묘한 아르바이트>에서 <사자의 잘난 척>으로 이어지는 세계. 다시 말해서 개를 도살하거나, 혹은 사자(死者)를 처리하는 것. 죽음을 기다리는 미약한 존재들을 차례로 도살하는 것이나, 이미 죽은 이들을 처리하는 것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한 행위다. 그러나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하는 이 일을 그들은 그만둘 수 없다. 아니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중요한 문제는 그 일에 그들이 '자원'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 혹은 그 수치심과 죄책감을 보기 위해 그 곳에 갔다. 개를 도살하는 개백정이 있는 도살장에, 혹은 시체를 처리하는 관리인이 있는 시체처리실에. 

 

물론 1957년에 쓰인 이 소설들은 당시의 일본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 전쟁에 패배했고, (죽지 못하고 패배한 상태로 살아남았다는) 묘한 수치심과 죄책감이 지배하는 사회, 그들은 그 속에 무력하게 갇혀 있다. 남아 있는 무력한 것을 죽이거나, 혹은 이미 죽은 것들을 재확인하면서. '나'가 그곳에 자원하는 것은 어쩌면 한 켠에 물러서지 않고, 그 수치를 정면으로 봐야겠다는 의지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래야 볼 수 있는 것들, 혹은 드러나는 것들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 그것은 개에게 물린 상처이거나, 뱃 속의 아기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거나 지켜내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소설들은 무의미해보이는 아이러니로 끝나는데, 수치심과 죄책감은 무의미한 아이러니로 남았을 때 더욱 강력해지는 법이니 말이다. 

 

3.   

<남의 다리>와 <인간 양>에서는 이것이 그래서 더욱 강력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점액질의 두꺼운 벽, 혹은 교외로 나가는 막차 버스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그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퇴화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니까. 다시 말해서 다리가 없거나, 혹은 '인간 양'이 된 상태니까. 여기에 균열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는 듯이 보이는 이들이 등장하지만, 그 균열은 사실 정확히 말해서 균열이라기 보다는 그 수치심을 재확인하는 것이거나 보다 강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치심이란 결국 비교할 수 있는 외부의 무엇인가(그 균열을 내려고 시도하는 내외부에 보이는 무엇인가)가 존재할 때 더 맹렬하게 내 안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일테니 말이다.

 

이러한 초기작들에 등장하는 '나'들은 (이런 표현이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예민한 수치심의 소유자들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외부가 일으키는 균열을 민감하게 바라보며, 그 외부에 한걸음 내딛는 것을 주저하는 이들이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의 '나'들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 일에 자원했으며, <남의 다리>와 <인간 양>의 '나'들은 '수치심'이라는 것을 마주보며, 그것의 작동방식을 지켜보는, 그 메커니즘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자신 안에서 또다른 공고한 벽을 쌓는 이들이다. 그 벽들은 <사육>이나 <돌연한 벙어리>에서와 같이, 변하지 않는 폐쇄된 상태로 지속되는 공간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것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는 <세븐틴>처럼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 있다. (<세븐틴>의 소년(나)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에게 '우익'이라는 갑옷을 입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4.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나'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는 점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이 수많은 가상의 '나'들을 끼워넣었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여러 적당한 가상의 '나'를 끼워넣은 채 거리를 유지하며 그 '나'를 통해서 수치심이 가득한 사회, 혹은 수음(手淫)을 공유하는 사회, 거대한 점액질의 두꺼운 벽으로 둘러쌓인 일본 사회를 은유하며 들여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두개골 이상을 가진 장남 히카리가 태어났다. 다른 가상의 '나'를 끼워넣을 수 없는 거리, 나(오에 겐자부로)와 장남 히카리(이요) 사이의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 그는 그 가까운 거리 속에서 꽤나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공중 괴물 아구이>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자신의 장애가 있는 아들을 죽게 만든 음악가 D는 그것의 죄책감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의 세상을 정지시키고, 거기에 '아구이'라는 죽은 아들의 환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겨우 자신의 거리 균형을 유지해낸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음악가 D가 '나'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소설 속 '나'가 등장해 그가 음악가 D를 지켜본다는 설정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오에 겐자부로는 이 소설에서 자신과 '아구이' 사이에 이 음악가 D를 지켜보는 또다른 가상의 '나'를 끼워넣으려 어떻게든 애쓰는 중이다. 그리고 그 '나'는 소설의 말미에서 음악가 D가 만들어낸 가상의 '아구이'를 실제로 경험한 다음, 그 댓가로, 그러니까 어떻게든 가상의 '나'로서 그 자리에 끼어들었던 댓가로 실명한다. 이 실명. 그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소설 세계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5.   

오에 겐자부로는 그렇게 실명시킴으로써, 자신이 지금까지 구축해왔던 은유의 세계를 중지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 즉 '나'라는 가상의 존재를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서 거대한 은유의 세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의 비겁함과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겁게 여겨지는 장남 히카리라는 실재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연작에서 보여지는 것은 첫 번째 문제에 대한 극복 시도이다. 먼저 여기에서부터 감지되는 것은 극도로 가까워진 소설 속 '나'와 실제의 오에 겐자부로라는 소설가의 거리이다. 실제와 허구가 어지럽게 뒤섞인 이 연작에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부분은 이 '레인트리'를 '나'가 보지 않거나, 혹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실재를 보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해지기는 한다. 그는 이 '레인트리', 그러니까 이 레인트리라는 거대한 메타포를 정말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것일까. 

 

그것의 의미를 이 연작들은 페니 샤오링 다카야스의 입을 통해 집요하게 캐묻는다. 금방 말라버리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잔뜩 우거진 손가락만한 잎사귀에 물방울을 저장해 두는 생명의 나무, 그 레인트리를 정말 보지 못했는가,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이 때 오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려놓는 이러한 방식의 서술도 정당한 방식인지, 그리고 그 생명의 나무를 진정으로 제대로 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현실과 허구를 흩뜨리는 서술 방식도 여전히 이 서술들에 내재된 근원적인 의문 -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나'는 오에 겐자부로인가 아니면 또다른 '나'인가 -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레인트리를 '나'가 만나게 되는 공간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그 장소, 바로 하와이라는 점에서, 그의 반전과 반핵에 대한 호소는 그 전에 일으킨 전쟁의 책임, 전쟁피해자가 아닌 최초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먼저 논하지 않는 한 궁극적인 의미는 획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반성이 치열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한 레인트리는 불탈 것이고, 또한 거꾸로 선 '레인트리', 그러니까 반대의 의미로 지옥으로 내려보내는 '거꾸로 선 세피로트 나무'가 작동하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오에 겐자부로는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6.  

레인트리는 불탔지만, 그 돌파구는 다른 하나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으로 조금씩 열린다.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연작은 아버지 '나'와 장애를 가진 이요와의 이야기이다. 은유로서 비껴서 있는 것처럼, 아들의 문제에서도 '나'는 비껴서 있다. 이요가 태어났을 때의 일화, 이요가 물에 빠졌을 때의 이야기를 보면 나약한 또는 비겁한 아버지로서 '나'의 모습(그가 그 순간에도 결국 하고 있는 것은 글 속에 숨은 '인용'이다.)이 극명하게 드러나있는데, 이를 두고 '나'의 어머니는 며느리(즉 '나'의 아내)에게 말한다. "저런 인간이니까, 우리는 의지할 수가 없겠구나. 네 힘(으로), 이요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p.473)

 

이 나약한 아버지에게 맴도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이다. 어린 시절 강 상류 바위 사이 소(沼)에서의 죽음 충동, 다카야스의 죽음, 친구 H의 죽음...이를 요약하는 키워드는 비탄(grief)이다. 이 비탄은 어디에서 연유하였는가. '나'는 이 비탄이 이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잘못 생각한 것이었음을, 어쩌면 그 비탄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세상을 이미 몇 번이고 파괴한 자들은 이요의 세대가 아니라 그 전의 세대이고, 반면 이요와 그의 세대들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 힘을 이미 기르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생명의 힘이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건강한 성적 충동이기도 하다. 

 

7.  

그러므로 레인트리는 불탔을지 모르지만, 그것에게는 아직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다. 어떤 가능성이? 부활의 가능성이 말이다. '나'는 쇠할지 모르지만, '나'라는 존재가 이요에게 연결되는 것처럼, '레인트리'는 생명의 나무로서 부활한다. 이는 단지 생물학적인 연속성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나'가 평화의 세계, 공존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폭력으로 점철된 한 세대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상을 여는 노력일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비록 그 육체는 존재하지 않아도 과거 세대는 다른 방식으로 부활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반전 반핵을 위해 노력하는 '나'의 자세는 미래 세대를 위한 노력이며, 동시에 이요와 공존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이요를 비롯한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오에 겐자부로는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신과 이요에게 동시에.  

 

'생명의 나무'로부터의 목소리가 모든 인류에게 격려로 고하는 말을 이윽고 노년을 맞이하여 죽음의 고난을 겪어야 할 나의 운명에 맡기고. '두려워하지 마라 앨비언, 내가 죽지 아니하면 너는 살지 못한다. /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내가 부활할 때 너와 함께하리라.' (p.566)

 

8.  

전망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평화와 공존과 공생의 원리는 아직도 멀다. 다음의 세대는 어떠한 세상을 살게 될 것인가? <조용한 생활> 연작에서와 <하마에게 물리다> 연작에서 드러나듯이 세계는 아직 양편의 가능성으로 나뉘어 있다. 광신자와 쾨헬번호 311 피아노 소나타가 교차하고, 이요는 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고, 적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극단적인 폭력과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하려는 희망이 병존한다.

 

오에 '나'는 보다 희망쪽에 걸어보고 싶은 것 같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이든 적그리스도이든 동생 마짱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는 이요와 오빠가 누구이든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이요와 함께 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마짱이 있으며, 죽은 언니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애쓰는 젊은 여자(라베오)가 있고(<익사>의 우나이코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하마에게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물린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왓, 왓!"하고 부르짖으며 그 상황을 벗어난 젊은이가 있다. 또한 '울보' 느릅나무를 오에의 아버지-오에-이요에게 연결되는 생명의 나무 '레인트리'로 탈바꿈시킨 아이들의 노력도 있다. (<'울보' 느릅나무>)

 

이 다음의 세대들을 위해 그렇다면 오에 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겨우, 그러나 사실 무엇보다도 결연한 이것 아닐까. 그것은 <익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대정신에 물든 한 세대를 기꺼이 익사시키고, 다음의 세대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에 자신에게는 안락한 삶이나 기존의 방식에 은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하마에 물려 왓, 왓 하고 내뱉는 절규, 다른 말로 하면 <익사>에서와 같이 글 조각 하나에 의지한 '붕괴의 양상'을 날카롭게 지켜보는 것이다.

  

9.  

노년의 '나' 오에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캐묻는다. 반전과 반핵, 아들 이요를 이야기하던 '나'에 그는 머물러 있지 않고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이제 오로지 읽는 '나'만이 남는다. 현실의 타인들이 와 있던 그 빈자리에는 이제 책 속의 인물들이 실제가 되어 나타난다. <벨락콰의 10년>,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현실에 나타난 벨락콰와 마고 왕비. 책 속에서 현실의 젊은이로 나타난 그들에게는 아직 갈림길이 남아있고,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그 앞에서 머뭇거린다.

 

물론 오에 '나'는 머뭇거리는 자신에게 잊지 않고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초기 단편, 중기 단편, 후기 단편의 마지막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초기 단편의 마지막 <공중 괴물 아구이>에서 '나'는 아이들이 던진 주먹만한 돌을 맞고 실명한다. 중기 단편의 마지막 <'하마 용사'와 사랑스러운 라베오>에서는 엉덩방아를 찧고, 자신이 내부의 하마에게 물려 절규하고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또한 후기 단편의 마지막 <불을 두른 새>에서는 전철을 기다리다가 아들의 몸을 껴안은 채 쓰러지며, 피를 흘린다. 머뭇거리는, 그 다음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는 자신에게 기꺼이 날리는 카운터펀치들.

 

그 카운터펀치를 맞고 어질어질한 속에서도 오에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아니 '나'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으로 다른 방식의 희망을 끌어내고자 한다. <불을 두른 새>에서 그것이 잘못된 해석임을 깨닫지만 그 영혼과의 공생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휘파람새, 그러니까 불을 두른 새와의.

 

10.  

오에는 그렇게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소설의 내용면에서도, 소설의 형식면에서도 그는 과거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하나의 작가를 읽고 다음의 작가로 나아가며, 과거의 어떤 것을 반추하여, 그것에 얻은 것을 통해 익숙해진 것을 새롭게 바꾸어 나간다. 그의 말대로 그것이 아마 그의 소설 쓰는 습관일 뿐만 아니라, '삶의 습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강조하여 말할 수밖에 없다. 오에 겐자부로는 '고쳐쓴다'.  

 

 

 

덧-1.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번호를 붙여서 글을 쓰는 것을 조금 '편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생각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고 그것을 연결할 능력이 안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글도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버렸는데...언젠가는 이 리뷰를 '고쳐 써' 보고 싶다. 현재로서는 그럴 여력도 안되고, 너무 늦기도 해서...

    

덧-2.  

작품의 발표년도를 제목 옆에 병기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책의 말미에 리스트의 형식으로 덧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작가의 전 생애를 가로지르는 단편집이라면 어떤 년도라는 것도 의미가 꽤 있는 법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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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11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자체를 바꿔뵜음...그런데 조금 더 다양한 글자체가 있었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cyrus 2016-04-12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저도 번호와 부제를 붙여서 문단을 구분한 형식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글의 분량을 많이 잡았을 시절이라서 나름대로 읽는 사람을 위한(?) 눈속임이었습니다. ^^;;

이제는 분량을 조절하면서 쓰게 되다보니 숫자와 부제를 다는 글쓰기를 버렸어요.

맥거핀 2016-04-12 16:54   좋아요 1 | URL
저는 분량의 문제라기보다는 글을 하나의 완결로 묶어낼 수가 없어서 어찌하다보니 이런 형식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분량은 예전에는 많이 신경썼는데 뭐..이제는 별로 신경을 안 쓰려고 합니다. 길어도 읽을 분들은 읽으시고, 짧아도...cyrus님이야 글이 길든 짧든 항상 내용이 단단하니 뭐 분량에 특별히 신경 안쓰셔도 될 듯 합니다.^^

우끼 2016-04-1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는데… 정말 훌륭한 해석입니다 ㅠㅠ 이렇게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정말 그럴 것 같아요. 공중과물 아구이에서 초기작이 끝나고, 분위기가 바뀐 이유가 잘 설명된 것 같습니다. 만약 현실과 유리된 이야기를 쓰는 데서 죄책감을 느꼈다면, 충분히 다음 작품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을거라고... 어떻게 여기까지 생각을 하셨는지 .. 시간을 두고 조금 더 차분히 리뷰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4-14 18:41   좋아요 1 | URL
저는 특히 <공중괴물 아구이> 그 작품이 좋았어요. 작가의 어떤 고뇌랄까요..그런 것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초기작들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한발짝 숨어있는데, 그런 자신에 대해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사실 많이 늦은, 시간에 쫓겨서 쓴 리뷰라 칭찬을 들을 리뷰는 아닌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위에 쓰대로 다시 읽고 고쳐써보고 싶은(분명히 다시 읽으면 고쳐서 쓰게 될 부분이 많으리라고 생각되는데) 리뷰입니다.

에이바 2016-04-12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훌륭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오는 리뷰입니다. 맥거핀님의 깊이 읽기에 다시 감탄합니다.

맥거핀 2016-04-14 18:43   좋아요 0 | URL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바 님 리뷰도 (그리고 우끼 님 리뷰도) 읽었습니다만, 이 소설은 다들 나름의 독특한 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잡으신 듯 하여 흥미롭더군요.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읽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2016-04-14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4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5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8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4-2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번호를 붙여쓰거나 부제목을 붙여 쓰면 말씀하신 것처럼 단편적인 생각들을 연결시키지 않고도 쓰기가 용이하고, 그게 읽는 사람에게도 훨씬 명료한 것 같습니다. 편법의 편법으로 일단 두서없는 생각을 (번호를 매겼다고 생각하고 ) 따로따로 써내려간 다음에 전체적으로 다시 배치하거나 귀찮은 경우 그냥 냅두는 것도 방법이더군요. 공백이 연결을 만들어준다고나 할까요. ㅇ

그건 그렇고, 이렇게 어려운 소설을 이렇게 깊이 있게 풍부하게 해석해내시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중반 이후로는 읽는 게 힘들었어요. 다시 차근차근 읽어봐야겠어요. 일정도 너무 촉박했었다는...

맥거핀 2016-04-27 12:20   좋아요 0 | URL
아..네 좋은 방법이네요. 머리 속에서 문단을 배열하는 것보다 미리 토막토막 써둔 뒤 다시 재배열하는 것..일단 쓰고 난 뒤에 고치는 게 더 편할 때가 많죠. 살을 붙여나간다고 할까요..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이번에 나온 하루키 씨 책을 보니 하루키씨도 일단 쓰고 난 뒤에 다시 살을 붙여나가서 고치는 식으로 한다고 하더군요.

이미 좋은 리뷰 쓰셨던데요, 뭐.^^ 제가 읽을까 생각했던 책들에 쓰신 리뷰들이 많아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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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일1식을 하고 있다. 몸이 가벼워지는 듯도 하고, 먹는 데에 그다지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어서 편리한 점도 있다. 그것만으로는 괜찮다고 할 수도 있는데, 사실 문제는 있다. 그것은 이 1일1식이 철저한 사전계획에 의한, 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어쩌다 참으로 애매해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가. 어떻게 보면 1일1식이 아니라 1일다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정해진 식사는 한 번 뿐이지만, 그 이외 시간에 자꾸 뭔가 자잘한 것을 먹게 되거나 먹는 것을 상상하고 있으니까. (지금도 이 글을 쓰기 직전, 냉장고를 뒤져서 나온 초코파이 한개와 에이스 과자 소포장 한개를 베지밀 에이(담백한 맛)를 곁들여 먹었다. 먹지 않으려 했지만, 먹지를 않으니 자판을 칠 힘이 없어서 먹었다...라고 합리화 중.)


어쩌면 정말 문제는 먹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도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그나마 조금 규칙적으로 살 때에는) 아침 저녁으로 책을 잡고 읽을 때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하루에 한 번 책을 잡기도 힘들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시간에도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책 - 그러니까 서평단 도서같은 것을 붙잡고 있으니, 이건 어쩌면 강제적 1일1식, 아니 1일1독 같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니까 그 부작용 내지 반대급부로 가끔 남는 시간에는 독서를 하지 않고 책상 옆에 쌓여 있는 '근시일내에 읽으려고 산 책들 1번 더미'를 바라보며 저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거나, 1번 더미에서 어떤 책을 빼서 2번 더미로 옮겨 놓을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아니, 그게 아닌건가. 강제적 1일1식이 장점도 있는 것처럼 이런 강제적 독서에도 장점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무엇인가를 읽어야만 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무엇인가를, 그것도 아마도 이번 기회가 아니었으면 읽지 않을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것은 사실일테니 말이다.


지금의 강제적 독서, 그러니까 하루 한끼는 이번 서평단 도서인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집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집은 사실 서평단 도서로는 적절치 않은 것 같은데, 그것은 이 단편들이 하나 끝날 때마다 어떻게든 떼어내고 다음의 단편으로 넘어가려는 나를 끈덕지게 붙잡고 놔주지 않은채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빨리 시간에 쫓겨 먹어야 하는 강제적 1일1식보다는 조금 더 공들여 먹어야 하는 손님들과 함께 하는 저녁만찬에 가깝다.) 일주일 전에 시작했을 때에는 7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책이니 하루에 100페이지씩 읽으면 되겠군,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주일이 지난 오늘, 그러니까 파트장님께 리뷰를 올리겠다고 말씀드린 오늘에 겨우 소설집의 반에 해당하는 '레인트리 연작'까지를 읽었을 따름이다. 나머지 반을 그보다 훨씬 빠른 시간안에 읽을 수 있을까. 더구나 이미 난삽해질대로 난삽해진 메모를 그러모아(서평단 도서를 읽을 때는 늘 메모를 남기지만, 이번 메모는 아직 반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다른 때 메모의 두 배다.) 리뷰까지 쓴다고? 아...누가 이 책을 골랐단 말인가...누구긴 누구인가, 바로 나지.


지나간 내 선택을 원망하든 아니든, 아무튼 마지막 선택을 해야하는 시기가 왔다. 지금까지 징징거린 걸로 봐서는 분명히 이 중의 몇 권은 빼야지 싶은데, 나란 인간은 원래 한두 번 당했다고 정신을 차릴 인간이 아니니, 지르자 질러. 어차피 이러든 저러든 마지막이니.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열린책들


시작부터 832페이지짜리 책을 고르고 앉았다. 그래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개봉하기 전에 이 책을 읽고 싶은 소망이 있으니...어쩐다.



홀, 편혜영, 문학과지성사


편혜영의 전작들을 생각해봤을 때 표지의 저 집은, 아니 저 홀(hole)이 '행복한 나의 집'일 리는 없다. 저 구멍에는 무엇이 들어서서 빠져 나오려는 우리를 으스스하게 잡아당길까.



아머 - 개미전쟁, 존 스티클리, 구픽


거대 개미의 모습을 한 외계생명체가 지배하고 있는 행성에서의 전쟁이라고? (책 소개에 나온 대로) 설정만 봐서는 그 유명한 <스타쉽 트루퍼스>가 확실히 연상되는데, 그와 달리 조직보다는 개인의 심리에 초점을 더 맞췄다니 흥미로울 것 같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문학동네


이름부터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연상시키는 이 작가는, 마르케스 이후 콜롬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는데, 한 남자의 죽음과 과거를 통해 마약과 폭력, 광기와 야만으로 점철된 콜롬비아 현대사를 반추한다고 한다. 예전에 EIDF에서 본 다큐 <나는 암살당할 것이다>도 생각나고, 얼마전에 본 영화 <시카리오>도 생각나고...



저항의 미학, 페터 바이스, 문학과지성사


3권 통틀어 1500페이지가 넘는다. 문제는 단지 페이지 수만이 아닌 것 같은데...

지르자, 질러.(라고 써놓고, '어차피 안될거야.'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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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16-04-05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에 겐자부로 책은 정말 ㅠㅠ 생각할 거리는 많은데 서평은 써야겠고 해서. 이건 제가 지금 서평할 수준의 책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안들더라구요... 그렇다고 다른 글을 만족스럽게 쓴 건 아닙니다만..최소한의 의견만이라도 적어야 겠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썼습니다ㅠㅠ 맥거핀님 리뷰가 기대됩니다.

맥거핀 2016-04-05 23:02   좋아요 2 | URL
아니..기대를 하시면 안되고요.^^; 오에 겐자부로 책은 조금 더 여유있게 시간을 가지고 만났으면 좋을 책이었습니다. 중간중간 서로서로 의견도 많이 나누고, 같이 독서회하듯이 읽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또 각자 소설에서 받아들이는 부분이 다를 것으로 생각되구요. 아무튼 서평단을 통해 오에 겐자부로를 만나게 되어서 좋군요. (아마 이런 기회가 없었으면 읽지 않았겠지요.)

2016-04-05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5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의딸 2016-04-05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책들 메모의 두 배... ^^ 그렇게나 기운을 빼는 책을 왜 읽어야하지 할때가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맥거핀 2016-04-05 23:05   좋아요 1 | URL
그래도 이런 책을 읽게 되면 꼭 성취감이라고만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또 제 안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서 (진은 빠지지만) 또 좋은 점도 있는 것 같아요. 메모라는 건 별건 아니고, 그저 제 여러 질문들이죠,

CREBBP 2016-04-05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욕심에 저항의 미학을 넣고 싶은 걸 꾸우욱 참았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하루에 100쪽씩 읽기도 힘겹더군요...위에 하신 말씀 모두모두 동감~

맥거핀 2016-04-05 23:06   좋아요 1 | URL
아마 저 책은 선정은 안되지 않나 싶구요. 선정이 안되더라도 내용을 보면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책은 모두들 힘드셨던 것 같아서 저도 마음이 놓이는(?)군요.

cyrus 2016-04-05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신간평가단 활동을 안 하는 이유가 강제적 독서가 부담스럽고, 새 책을 고르는 일도 힘들어서 그래요. 그냥 신간평가단 회원분들의 글만 봐도 좋네요. ^^

맥거핀 2016-04-05 23:07   좋아요 1 | URL
cyrus님이야 원래 자발적인 독서를 엄청 하시는 분이니..이런 것은 저같이 강제가 필요한 사람(?)이 해야죠. 솔직히 어떤 면에서는 신간평가단 책이나마 읽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에이바 2016-04-06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 저만 힘든 줄 알았어요. 모임에서 읽고 토론하면 좋았으리란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도 저항의 미학 읽고 싶어서 일단 장바구니 넣어놨는데 세 권 다 역자가 다르더라고요. 대산문학총서는 번역가들이 지원하고 그 중 선정, 작업 후 출간되는 걸로 아는데 이 경우는 워낙 양이 방대하고 까다로울 수 있는 번역이라 재단 측에서 직접 의뢰한 건지 어떤건지 궁금해지더군요. 암튼 이런 책들은 나왔을 때 주문해야 하는데 요즘 읽으려고 주문한 책들이 쌓여서... 마지막 도서이니 저항의 미학이 선정되어 서평단 여러분이 읽으며 장렬히 산화하는 걸로... 안 되겠죠? ㅎㅎ

우끼 2016-04-06 14:58   좋아요 0 | URL
장렬히 산화 ㅋㅋㅋㅋ 멋져요..

맥거핀 2016-04-08 14:37   좋아요 1 | URL
아..그건 몰랐는데요. 세 권이 역자가 다르다니 조금 이상하네요. 세 권이라 해도 한편의 소설인데 역자가 다르면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요? 학술서 같은 데서는 나눠서 번역하는 게 흔하지만, 소설에서 그렇게 나눠서 번역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군요. 그래도 여전히 읽고 싶기는 합니다만..저도 장렬히 산화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선정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혹 선정이 된다면 나중에 리뷰쓸 때 조금 고생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는 합니다만...

에이바 2016-04-09 15:24   좋아요 1 | URL
다시 책소개글을 읽으니 아래에 나와있더라고요. 십년 걸렸대요. 6년 여 번역, 2년 다듬기, 일년반 편집... 독문학자 세 분이 뭉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이뤄낸 쾌거라 봐야겠더군요. 책소개를 보면 영어권에서는 1권만, 프랑스와 터키에서만 완역됐대요. 그렇다면 이 책을 엄청 홍보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데 왜 잠잠한건지...ㅜㅜ

우끼 2016-04-09 17:05   좋아요 0 | URL
엄청난 책이군요!! ㅠㅠ 기대된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요? 왜 잠잠할지 이유도 궁금하네요.. 선정이 안된다해도 꼭 읽고 싶은..

에이바 2016-04-10 12:45   좋아요 1 | URL
우끼님 대산문학총서는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소개하는데 의의를 두고 번역작업을 지원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상품가치랄까 그런데 연연하지 않아서 홍보도 미디어 소개 정도에 그치는 듯 해요. 저항의 미학 같은 경우도 완역은 프랑스, 터키 밖에 없고 한국어 번역도 10년 걸렸다는 문구 같은 걸 맨 앞으로 빼도 될텐데 책소개 저 아래에 숨겨놨고.. 내용은 파시즘에 저항하는 유럽 좌파 운동인데 운동가보다는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강조했다... 그런 거래요. 암튼 이 책은 기념비적인 작업이라 수요가 꾸준할 것 같은데 대체로 고전으로 꼽히는 (인기가 없는?) 책들은 절판될 가능성이 높아서 나왔을 때 미리 사둬야 한다는게 제 생각...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도 개정판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어서 넘나 슬퍼요...ㅜㅜ 암튼 평가단 도서에 기대를 걸고 있어서(말도 안 되는?) 발표나면 구입하려고 해요

맥거핀 2016-04-11 23:59   좋아요 1 | URL
아..그런 내부사정이 있었군요. 뭐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그렇게 번역가가 다른 것도 이해할만은 합니다. 그렇기는 해도, 한 사람이 번역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 아마도 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은 것 같기는 하군요. 아무튼 에이바 님 덕분에 저도 좋은 책 알고 갑니다. 대산문학총서에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온 것 같아요. 이번에 오에 겐자부로 책에서도 나온 맬컴 라우리의 <화산 아래서>도 이 시리즈로 출판되었죠. (저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 보지를 못했네요. 오에 겐자부로 책을 읽으면서 후회했습니다. 읽어둘 걸..) 한번 도전한다는 자세로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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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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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지난 번 서평단 도서로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고, 이번에 연이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를 읽으니,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었다. 오츠의 <그들>이 1937년의 디트로이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그보다 시간을 조금 더 앞당겨 1889년의 시카고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이어 두 개의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읽다보니 두 개의 소설이 (여러 면에서 또한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소설들이 마치 어떤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읽힌다는 점인데, 오츠의 <그들>이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친 미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세밀하게 묘파하고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미국 사회 초창기의 여러 단면들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인다. 19세기 중반, 철도교통의 발달은 대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고(이 소설에서도 철도교통이 중요한 지점을 담당하고 있는데, 캐리를 컬럼비아시티에서 시카고로 이끈 것은 철도였고, 그녀는 그곳에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드루에를 만난다. 또한 허스트우드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차 운전이었다.), 대도시에는 이른바 '부의 씨앗'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중반의 미국이 부의 대물림이 어느 정도 그 고착화의 양상을 드러내는 시기였다면, <시스터 캐리>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의 미국은 조금 더 불확실한 가능성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순식간에 성공의 길로 접어들 수도, 혹은 몰락의 길도 들어설 수도 있는 가능성 말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성실히 묘사하면서, 동시에 성공과 몰락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마치 날 것의 생생한 사회학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풍부한 서사가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묘사되는 것은 가난한 캐리와 부유한 드루에 혹은 허스트우드의 대비이다. 여러 변변치 않은 구직처를 전전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공상과 욕망을 놓지 못하는 캐리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좋은 집에 살며, 모든 좋은 것들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드루에와 허스트우드 일가의 모습은 효과적인 대비를 이룬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이것이 역전된다. 연극배우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캐리와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허스트우드의 모습은 소설 초반부의 대비보다 훨씬 극적이며, 독자에게 보다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게 한다. 물론 드라이저는 이 대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두 세계를 가능한한 세밀하게 교차하며 묘사하는 것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캐리가 잠깐 들어가 일하게 되는 공장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비교되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심지어 허영마저도 넘쳐나는 허스트우드 가족 풍경의 대비, 또는 후반부에서 허스트우드가 전차 파업의 대체운전수로 잠깐 일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과 캐리가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되는 모습의 극적인 교차. "이 배우들한테는 원래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지만 허스트우드가 전차 차고의 윗방에서 잠을 자던 바로 그날 밤, 그날따라 유난히 흥에 취한 주연 희극배우가 관객들을 좀 웃기고 싶었는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p.555~556)" 이 묘사들은 이 이야기를 보다 극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당대의 미국 사회에 대한 세밀한 분석보고서로의 기능을 한다. 

 

(일종의 분석보고서로 위에 얘기한 오츠의 소설 <그들>과 이 소설 <시스터 캐리>를 연결지어 보면 재미있다. 예를 들어 허스트우드의 몰락. 어떠한 사회안전망도 없이 허스트우드는 그대로 순식간에 추락하여 빈민, 혹은 그 이하가 된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갑자기 스타로 부상하는 캐리가 있다. 캐리의 성공 - 그녀의 성공은 재능 이상의 어떤 기묘한 무엇인가가 작동한다 - 은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 않게 허스트우드의 몰락도 아이러니하다. 이 가파른 상승과 하강. 반면 <그들>에서 로레타 가족에게는 가파른 상승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파른 하강도 없다. 로레타는 복지시설의 사람들에게 불평을 퍼붓지만, 그녀가 그녀의 삶을 조금이라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복지정책의 덕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비교도 가능할 것 같다. 전차 파업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군중의 기묘한 연대와 분노. 반면 현대 사회의 군중들은 누구에게 분노하는가, 혹은 분노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아무튼 이 전차 파업에 대한 묘사 부분에서 드라이저의 필력은 가장 빛을 발한다.)

 

(내가 느끼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은 일종의 중간 지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근대 산업혁명 시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배경적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엄격한 도덕률이 남아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과 앞에서 예로 든 <그들>과 같이 작가가 여러 장치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현대적인 문학과의 중간 지점 말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두 가지 부분에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드라이저 작가 본인의 목소리다.   

 

이런 분위기는 금세, 쉽게 느낄 수 있다. 웅장한 저택, 화려한 마차, 번쩍번쩍 빛나는 상점, 레스토랑, 온갖 술집들 사이를 걷고, 꽃과 비단과 와인의 향기를 맡고, 사치스러운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도전적인 창끝의 빛처럼 뿜어져나오는 시선을 느끼고,...(중략) 세상이 이런 것들에 매혹되고 인간의 마음이 이를 꼭 도달해야 하는 바람직한 왕국으로 보는 한, 이것은 위대함의 왕국으로 남을 것이다. (중략) 아! 채워지지 않는 꿈. 정신을 갉아먹고 유혹하는 이 허망한 환상은 우리를 손짓하며 부르고, 손짓하고 또 부르다가 마침내는 죽음과 소멸이 그 힘을 녹여버리고 눈먼 우리를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보낸다. (p.383)

 

그 모든 향락이 결국 '우리를 유혹하는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이 목소리는 물론 캐리의 목소리도, 허스트우드의 목소리도 아니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내려다보는 작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는 중간중간 이렇게 서사나 묘사가 불현듯 멈추고, 작가의 날 것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때가 있다. 이것은 <그들>과 같은 소설의 어떤 트릭이나 장치와는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들>과 같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작가 본인의 목소리는 이야기를 보다 더 다의적, 다층적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에서는 일종의 중화제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 중간중간 이루어지는 작가의 개입은 당대의 도덕률에 반하는 이 소설을, 당시 독자들이 읽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사람들 문제 있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니 죄책감 가지지 말고 읽으세요, 이런 느낌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작가의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러 논란을 피할 수 없었지만...) 

 

다른 하나는 이 소설에서 과거의 소설들과 다른 보다 현대적인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욕망의 화신(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그 욕망이 서사를 추동해나간다. 그런데 이 소설의 캐리가 다른 과거의 인물들과 다른 점은 (뒤의 작품 해설에서 잠깐 언급되듯이) 그녀는 욕망하되,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녀가 좇는 꿈은 부인가, 명예인가, 인기인가, 혹은 사랑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캐리는 이 소설에서 흔히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지막에서도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위치에서도 캐리는 불행했다.(p.652)" 그녀는 행복을 갈망하지만, 과연 무엇을 채워야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결국 이룰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그것을 어쩌면 '욕망하는 것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욕망 그 자체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욕망의 화신으로서.

 

이제 앞으로 많은 현대소설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게 될, 아니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보게 되는 그런 인간형의 탄생, 아니 어쩌면 현대사회 인간들의 특질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것의 등장을 여기에서 목도한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는 사람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작 무엇을 좇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좇는다'는 사실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재미있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보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더 사랑받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금 드라마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도, (약간의 양념만 더해진다면) 상당히 인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소설은 영화화된 적이 있다. <로마의 휴일>, <벤허> 등을 만들었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에 의해 1951년 <캐리>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다. 주연 캐리 역은 제니퍼 존스가 맡았는데, 살짝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찾으려들고, 그것에 자신의 모습이 언뜻 비쳤을 때 그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아니 적어도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는 채, 여전히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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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1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1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토리냥 2016-04-02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스터 캐리에서 현대적 인물로 그려지는 캐릭터는 캐리 하나뿐인 것 같아요.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은 그 시대적인 인물들로 틀에 박힌 전형성을 띠고 있으니까요.

욕망의 화신이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캐리랑 잘 어울려요ㅎㅎ

맥거핀 2016-04-04 01:30   좋아요 0 | URL
캐리가 주인공이니까 더 그렇겠죠.^^ 남자들이 조금 단순하기는 한데..뭐 사실 어떻게 보면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현재의 남자들이 소설 속에 그려진 남자들하고 별로 달라진 건 없는듯...

한주의 시작이군요. 좋은 한 주 보내세요.
 

지금막 알라딘 부천점에서 찍은 사진.
누군가가 방금 팔고 간 오체불만족.
행동하는 알라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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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6-03-2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 오체만족의 삶이라고 누가 댓달았길래 엄청 웃었습니다만 ㅎㅎㅎ

책한엄마 2016-03-25 18:10   좋아요 0 | URL
오체 full만족이었다고 하더군요.ㅎ

맥거핀 2016-03-25 19:03   좋아요 2 | URL
며칠 사이에 아주 기상천외한 드립들이 난무하더군요. ㅎ 그 중에 몇 개는 그분의 장애와 연결지은거라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지만...

기억의집 2016-03-25 19:10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오체대만족이라고 쓴 댓글보고 한참 웃었어요. 동시에 사람 참 바보 만들기 쉽구나 하는 생각도..

cyrus 2016-03-2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를 부탁해>가 심심해하지 않겠어요. ㅎㅎㅎ

맥거핀 2016-03-25 19:05   좋아요 0 | URL
아마 곧 알라딘 중고서점에도 이책들이 꽤 늘어나지 않겠습니까..나중에는 안받아줄지도...근데 지금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과연 사실 분이 있을지..

기억의집 2016-03-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자기계발서책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여서....

맥거핀 2016-03-26 01:07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나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akardo 2016-03-25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핫. 저는 애초에 저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았으니 이 사태가 참으로 흥미로울 뿐입니다. 산 분들은 속이 좀 쓰리실 듯.

맥거핀 2016-03-26 01:22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akardo님. 근데 책을 쓸 때의 또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100% 알 수 없으니까요. 그 책으로 인해 읽은 누군가가 좋은 영향을 당시에 받았다면 그것은 그렇게 모든 것이 나쁘다고 할 수 만은 없겠죠.^^ 아무튼 대체로 책을 읽으신 분들은 꺼림칙만 면이 더 있으실 듯 합니다.

희선 2016-03-2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뭔가 사기를 쳤나 하는, 팔 다리가 없는 걸 본 적 있으니 그건 아닌가보다 했어요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몰랐군요 안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아봤어요 무슨 일인지... 왜 그랬을까 싶네요 사람이 잘 되다보면 뭔가 잃어버리는지도 모르겠어요(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 잊어버린다고 해야 할지...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던데 그러다니, 지금까지 좋게 생각한 사람은 배신당한 느낌이 들겠습니다 예전에 책 한권 보고 대단하구나 했는데... 그때는 그게 진짜였을 텐데, 그것까지 안 좋게 되었네요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 늘 애써야 하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희선

맥거핀 2016-03-26 01:23   좋아요 1 | URL
아무튼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이번 사건만 보아도), 알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장애와 연관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장애와는 또 별개로 보고 싶습니다. 장애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쌓아온 모든 일들이 또 이번 일들로 다 폄하되는 것도 그렇게 옳지는 않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이번에 저지른 일은 분명히 나쁜 일이지만요.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애 애쓰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도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들처럼 어떤 면에서는 나약한 인간이었던 게지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영화천국> 3/4월호에 '영화여행을 시작하는 시네필을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쓴 몇 편의 글이 실렸다. 100편의 영화, 영화사(史)의 순간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의 저자 구회영(김홍준 감독의 필명)과의 대담 등등 흥미로운 글들이 많은데, 그중 '10권의 책'에 대한 글이 있어, 나중에라도 찾아보기 쉽게 여기에 목록과 소개의 일부를 옮겨둔다. 모두 한글로 출판된 책이다. 개중에는 절판된 책도 있지만, 중고서점에서라도 찾아볼 수는 있겠지.

 

먼저 이 책들은 '바로 시작하면 좋은 책'으로 추천한 책들이다.

 

 

트뤼포, 앙투안 드 베크 & 세르주 투비아나, 을유문화사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치 소설처럼 읽기에 딱 좋은 수준의 독서라고.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키, 민음인

영화는 결국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할 것.

 

 

쇼트, 엠마뉴엘 시에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시점, 조엘 마니,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몽타주, 뱅상 피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출간된 일종의 가이드 형식의 책들. 가방에 넣고 들고 다니기에 부담없는 책들이다.

 


위대한 영화, 로저 에버트, 을유문화사

화장실에 꽂아두고 하루에 세 번(혹은 좀 더 자주) 틈틈이 그저 손 가는 대로 제목이 잡히는 대로 두서없이 읽으라고. (아..근데 큰 일을 하루에 세번이나 보지는...이라는 쓸데없이 더러운 첨언.)

 













세계영화사, 데이비드 보드웰 & 크리스틴 톰슨, 시각과 언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상에 앉아서 볼 책.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의 난점이 있는데, 하나는 이 책이 3권으로 분절되어 있고, 게다가 절판이라는 점...그렇다면?

 

 

세계 영화 대사전, 제프리 노웰 스미스 책임 편집, 미메시스

위의 책의 대안. 정성일의 충고.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처음부터 읽지 말 것. 당신이 관심 있는 영화들의 시대를 중심으로 읽을 것.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허문영, 강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당신이 본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써보라. 할 수만 있다면 그 글을 길게, 그 영화에 대한 생각을 밀고가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끝까지 가보는 경험을 해보라고 정성일은 충고한다. 이 책은 일기처럼 쓰여진 영화비평이라고...(그러나 '나'는 이 글이 일기처럼..이라는 데에는 그다지 동의를 하기가..)

 

 

필름메이커의 눈, 구스타보 메르카도, 비즈앤비즈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도 일종의 다른 방법의 독서. 이 책은 거기에 매뉴얼 같은 역할을 할 것.

 

 

그리고 아래의 책들은 '지금은 독서를 말리고 싶은 책'. 물론 여기에서 방점은 '지금은'에 있다.

 

 

 

시네마 1 : 운동-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시네마 2 : 시간-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당신이 철학 프로그램에 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제목과 영화감독 이름에 질릴 것이다. 반대로 시네필들은 첫 장부터 베르그송에 관한 긴 주석으로 진이 빠질 것이다." 두 권의 책의 번역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도 이유라고.

그러니까 먼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시네마>(동문선)를 읽을 것.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길

"브레히트로부터 받은 영향과 나치 시대의 파시즘 영향들을 바라보면서 영화와 대중 관객의 역할을 '기대하는' 미래의 영화를 위한 '서설(序說)'"이나 그 전에 좋은 안내자를 만나 먼저 설명을 들을 것.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시각과 언어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슬라보예 지젝, 한나래

진짜 눈물의 공포, 슬라보예 지젝, 울력

"이 책들은 영화책인 척 하면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용어를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먼저,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비, 도서출판b)를 먼저 읽으라고. 자신(정성일)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쉽고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영화의 맨살, 하스미 시게히코, 이모션북스

"이 책은 몹시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무시무시한 책"이며 "읽고 나면 괴상하게도 하스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지"나 "그건 하스미 '센세이(先生)'의 견해이지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고. 하하.

 

 

덧.

물론,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일 테다. 어제 조금 지나간 영화, 오승욱의 <무뢰한>을 보았다. <무뢰한>은 몇 가지 것들(예를 들어 어떤 허세들 같은 것, 혹은 불친절한 생략들)을 견뎌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남자감독이 만들어내는 여성 캐릭터' 김혜경(전도연)인데, 영화 속에서 끝내 바닥에 이르르는, 그래서 그 바닥으로 내려보내지는 것이 너무 잔인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여성캐릭터가 영화가 끝난 후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영화의 중심축은 정재곤(김남길)에게 끝까지 머물러 있는데도. 어스름에서 시작해서 어스름으로 끝나는 영화. 그러나 전혀 다른 두 개의 어스름이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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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0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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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4 1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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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2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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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4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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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5 2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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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14: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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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ll-yuran 2018-02-06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뢰한 정말 좋은 영화죠!

맥거핀 2018-02-19 15:23   좋아요 0 | URL
아직도 마지막 그 김남길의 쓴웃음이 생각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