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2005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이자, 복수 연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중간에 한 번 영화가 탈바꿈을 한다. 엄밀한 용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을 톤(tone)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중간의 기점은 금자(이영애)가 백선생(최민식)이 가지고 있던 다른 아이들의 상징물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이 때부터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던 이 영화는 급속하게 지상으로 내려와 관객들에게 달라붙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중간까지의 분위기의 형성에 큰 몫을 담당하던 나레이션(내용상으로 볼 때 이 나레이션은 금자의 딸 제니가 후일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목소리는 라디오 '밤의 플랫폼' 등으로 익히 알려진 성우 김세원 씨가 맡고 있다)이 이 중간을 기점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이 중간 이후로 등장하지 않던 나레이션은 마지막에 단 한 번 등장한다). 물론 내용상으로 볼 때도 이 중간부터 이야기는 다른 양상을 띤다. 전반부까지는 금자가 복수를 위해서 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이다. 무엇인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공간(물론 이는 여성교도소라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공간이 주무대인 점에도 이유가 있다)에서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비현실적인 톤으로(예를 들어 기도하는 금자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장면 같은 것) 이루어진다. 그런데 금자가 거의 복수에 성공하고 그것을 완결지으려 할 즈음에 금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아이가 원모 한 명이 아니었던 것. 그리고 이 때부터 이른바 '집단의 복수'가 등장하고, 문제의 학교에서의 씬이 이어진다. 그리고 박찬욱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 후반부의 학교에서의 일들이었던 것 같다.

다른 이야기에 앞서서 먼저 몇 가지의 자잘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박찬욱의 미장센 구성 능력과 형식적인 시도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박찬욱이 특히 <스토커>에서 쉴새없이 보여줬던 평행편집의 원형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화를 섞어서 새로운 제3의 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대비되는 두 사건을 교묘하게 엮어서 독자의 이해의 쾌락을 증폭시키는 것 등이 그런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금자와 백선생이 다른 인물(목사(김병옥)와 박이정(이승신))들을 이용하여 서로를 추적하는 장면이나 영화의 중간 금자 사건의 담당 형사가 빵집에서 금자를 대면하는 장면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빵집에서의 씬에서 금자와 같이 일하는 근식과 금자의 대화, 그리고 형사와 형사 아내의 대화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간단하게 금자와 형사를 동일 선상에 위치시킨다. 즉 금자의 사건에서 금자가 가지게 되는 죄의식의 어떤 부분을 형사도 공유하고 있음을(왜냐하면 그도 결국 당시에는 진범을 잡아내지 못했고 금자를 범인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나중에 학교에서 금자를 돕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도리어 주목하여야 할 것은 대화보다도 어둡고 축축해보이는 긴 지하도를 통과하는 형사와 그의 아내의 모습이다)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미묘한 것들도 살짝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형사의 아내는 금자가 만든 케이크를 내던지며 "이걸 어떻게 먹어!"라고 형사에게 소리치는데, 이 대사가 (근식에게) 예전에 아이를 살해했다고 말하면서, "걱정 마. 먹지는 않았으니까."라고 덧붙이는 금자의 대사 뒤에 붙음으로서 '먹는다'라는 표현이 말하는 미묘한 뉘앙스가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있다(그리고 이 장면 뒤에 금자와 근식이 관계를 맺는 장면이 붙는데, 이는 '먹는다'라는 대사와 맞물려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예를 들어 금자와 근식의 관계, 혹은 형사와 금자의 관계, 백선생과 금자의 관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것은 또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후 금자의 딸 제니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금자의 죄'라고 할만한 것이 나온다. 그런데 사실 영화를 보다보면 이 금자의 죄라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금자는 아마 아이를 꾀어냈을 뿐, 범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복수의 구조는 성립한다. 금자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백선생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고, 그 결과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죄일 뿐, 사실 어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속죄'와 같은 것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가 결코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녀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준비하는 복수는 철저히 그녀만의 것이고, 형식상으로는 원모의 원한을 갚는다는 식의 형태를 띠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복수(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에 가깝다. 즉 원모의 부모에게 속죄하고, 죽은 아이를 대신하여 백선생을 처단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일종의 퍼포먼스이고, 이는 한편으로 이 복수를 어떤 가벼운 놀이극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친절하다'. 그녀가 친절한 것은 자신들의 복수를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교도소에서 '친절한 금자씨'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친절하기도 했지만, 공공의 적 마녀를 쓰러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럼으로써 타인의 신뢰를 얻지만, 동시에 마녀의 지위를 물려받기도 했다. 즉 그녀는 친절하지만, 이 친절함은 왠지 가면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녀는 감옥에서 나와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변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 '변했다'는 것은 일종의 복선이다. 왜냐하면 금자는 실제로 변했으니까 말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의 복수를 대신해서 처리했던 금자가, 그래서 심지어는 자신의 복수마저도 일종의 놀이극처럼 보이게 만들었던(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정작 그 자신의 복수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버린다는 사실이다. 즉 이 마지막의 학교에서 금자는 이 복수에서 살짝 '비껴서' 있다(그녀는 결국 죽은 백선생의 시체에 총알을 날렸을 뿐이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야기한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연쇄이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낳고, 복수를 행한 당사자는 다음 번의 다른 복수에 의해 쓰러진다. <올드보이>에서 이야기한 것은 복수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살고자 하는 노력, 혹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즉 복수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해하는 것이며, 복수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 뿐임을 말한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진다. 복수, 즉 처벌은 결국 자신을 해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처벌을 그만둘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백선생과 같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선생은 일종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이다. 이것에는 어떤 윤리적인 의미나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이 없다. 백선생은 안이 텅 비어있는 입출력기계, 어떤 신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계와 같다(예를 들어 그가 밥을 먹다가 박이정과 거의 강간에 가까운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의 입력(먹는 것)과 배출(로서의 성행위)은 거의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최민식은 흥미롭게도 <악마를 보았다>에서 이런 캐릭터를 한 번 더 연기하기는 했다).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연관되어 있으며(그는 요트를 사기 위해 아이들을 죽였다고 했다), 또한 예전에 말한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음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백선생과 같이 (현대 자본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에 맞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영화에서와 같은 대리 처벌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면서도 필요한 복수를 행하는 것, 그것이 대리 처벌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이 사회가 구현하는 방식이다. 결국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처벌은 사회적인,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처벌이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것의 실행과 집행은 공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맥락과 실행으로 볼 때 <친절한 금자씨>에서 '돌아가면서 칼로 찌르기'나 우리 사회에서 '재판을 통해서 사람을 목을 매다는 것'이 거의 동일한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복도의 긴 의자에 우비를 입고, 비닐장갑을 끼고, 손에 단도를 들고 어떻게 하면 손이 다치지 않고 잘 찌를 수 있는지에 대해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떠올린 낱말은 '신산스러움'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내재된 그 '신산스러움' 말이다. 우리 사회의 재판과 형의 집행은 그것을 조금 더 간편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즉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있는 이들에게는 이 '신산스러움'과 '다가올 복수의 쾌감'이 공존한다. 우리 사회의 대리 처벌은 이 중 '신산스러움'을 상당부분 제거했고, 그 결과 복수의 쾌감이 더 크게 남았다(물론 이 과정에서 복수의 쾌감도 줄어들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단하게 남겨져 현재 비교적 간단하게 실행되는 이 과정에서 은연중에 잊게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죄를 처벌하는 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사실 그에 대한 많은 함의를 잊어버렸다.) 그 밑바탕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친절한 금자씨>는 위에서 이야기했듯 백선생의 죄가 원모의 죽음 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금자가 알게 되는 것이 기점이다. 즉 이야기는 이를 기점으로 그 전까지의 금자의 개인적인 복수에서 후반부의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간다.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가는 까닭은 금자가 이 아이들의 부모의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비디오를 보고 나서야, 혹은 그 비디오를 보고 부모들이 보이는 엄청난 강도의 '애끓음'을 보고 나서야 금자는 백선생이 자기가 간단히 처리해야 할 장난감이 아님을 깨닫는다. 간단히 말해서 백선생은 자기 혼자 간단히 먹을 작은 케익이 아니라 커다란 케익의 한 조각인 것이다. 물론 그녀가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녀의 딸 제니의 존재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 왜 <친절한 금자씨>에 딸 제니가 중간에 등장하고,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는 양부모가 등장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것을 보아야만 금자가 공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그래서 그녀는 이 복수에서 '비껴선다'. 그러므로 사회적 복수, 혹은 사회적 처벌의 근원에 있는 것은 공감하는 마음, 혹은 동정하는 마음이다(물론 이는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복수의 선행 이전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회적인 처벌, 일종의 대리 처벌이 이루어질 때 악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을 이루어내서는 안된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이 악은 맥락이 없는 악이다. 그것을 우리가 나쁜 놈이니까, 혹은 죽어야 할 놈이니까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 맥락없음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 근원에 놓인 맥락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악과 우리가 다른 점이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은 이렇게 조금씩 진화한다. 뭐 간단하게 말하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마지막 모든 인물들이 죽었고, <올드보이>에서는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으나 정신분열을 피하지 못하였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마지막 나레이션이 이를 이야기해 준다). 그것은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공감이나 동정에 이르지 못하였고, <올드보이>의 인물은 여전히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였으나(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전편에서 혀를 자르는 징벌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는 이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입에 재갈이 물려진 채로 큰 스피커로 들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 말에 대한 불신은 계속 이어지는데, 금자씨가 백선생을 잡아 가장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는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으며, 어른인 채로 금자씨 앞에 나타난 원모(유지태)는 금자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하자 재빨리 재갈을 물려버린다), 금자씨는 어렵게나마 약한 공감, 혹은 동정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얘기가 조금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영화의 배우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쓰이고 있다. 위에 든 최민식이나 유지태도 그러하려니와 금자와 제니에게 나타난 두 명의 킬러, 송강호와 신하균은 어떤가. 그렇다. 사실 이들은 동일한 한패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간에 금자씨 역시도 영혼의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박찬욱에게 구원은 그렇게 쉽게 오는 문제가 아니다. 정성일도 지적했지만 마지막 빵집에서 샹들리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를 나홍진의 <추격자>와 비교할 수 있는데, <추격자>에서 가장 의아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교회를 둘러싼 설정들이다.) 예를 들어 미친 자이거나 남의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는 자들에게는 영혼의 구원이란 없을 것인가. 그것의 양상들을 우리는 박찬욱의 다음 영화들에서 보게 될 것이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3-05-2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반부를 백선생의 처단하는 모습에서 "생생한"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필 제가 맥거핀님의 이 글을 보기 바로 직전 "검단산 여대생 살인청부 사건"의 전말을 봤답니다. 복수..혹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게 불필요하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맥거핀 2013-05-27 20:12   좋아요 0 | URL
네..그 장면들이 그 소설의 그 부분과 통하는 부분들이 있죠.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 따라했느니 하면서 여러 말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근데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그 사건은 뭐죠? 관련내용을 찾아보겠습니다. 글쎄요..근데 인류 역사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죠. 그것을 되돌리면, 우리는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아님 무엇인가(예를 들어 정의)를 '회복'하는 것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확인해보니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나온 사건이군요.)

Shining 2013-05-2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좋아요. 약속을 지키는 맥거핀님이 공정사회를 만드실겁니다요-_-b(...뭐지;;)

저는 이 영화를 생각하면, 희미하게 드는 어떤 예감같은 것,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균질하지 못한 감각, 같은 게 느껴지는데 어쩌면 그게 맥거핀님이 말씀하신 톤,일지도 모르겠어요. 이상할만큼 불쾌해지는 영화예요. 잔인함이나 주제나 방식과는 별개로. 어떤 묘한 불쾌감.

불쾌감, 하면 말씀하신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도 떠오르네요. 비오는 날 풍기는 어슴프레한 비린내나 수초 표면에 낀 이끼자국, 지하실의 습기 같은게 떠오르는 영화. 컷이나 연출보다는 뚜렷한 후각,으로 기억되는 영화거든요 저한테는.

덧) 윗 댓글에, 그것이 알고 싶다, 지난주 우연히 틀었다 광분과 혐오의 도가니에...하아.

맥거핀 2013-05-30 01:02   좋아요 0 | URL
저는 불쾌해진다는 느낌보다는 이상한 공포감을 많이 느꼈던 영화예요. 이 영화, 조금 무서운 구석이 있어요. 전반부는 영화가 이상하게 장난스러운 부분들이 있잖아요. 여러가지 테크닉적인 장난들, 혹은 내용상의 어떤 장난스러운 부분들 - 예를 들어 교도소에서 금자는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으로 보여지죠. 마치 거의 로봇을 보는 것 같은데, 이것을 로봇을 볼 때의 어떤 이질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 이 있고, 금자의 복수는 어떤 게임과 같이 혹은 장난과 같이 이어지죠. 금자가 원모의 부모님에게 사죄하는 방식 같은 것을 보아도 말이죠.

그런데 그런 영화가 후반부에 갑자기 확 틀어버려요. 장난을 하던 영화가, 이제 갑자기 "그래도 이게 장난같아보여?"하고 관객에게 묻는 거죠. 아이들이 울부짖는 비디오를, 그리고 그것을 보는 부모들이 울부짖는 것을 억지로 보게 하면서 말이죠. 그런 다음 영화는 부모들이 계좌번호를 주섬주섬 적고, 금자가 케익에 머리를 묻으면서 이상하게 다시 장난으로 돌아옵니다. 장난을 치던 아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그 장난에 숨은 무서운 걸 보여주다가, 아니 사실은 그것도 장난이었어 하고 말하는 격이랄까요. 저는 그게 조금 무서웠어요. 아니 사실은 많이 무서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들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뭐 그냥 제가 그렇다는 겁니다.^^

아이리시스 2013-05-3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읽었는데 이제 댓글 달아요. 공정사회는 저 같이 약속안지키는 사람도 있어서 만들어질 수가 없어요. 그냥 맥거핀님의 바른 자세가 이 세상을 영차영차 하면서 끌고 올라와 저를 희석시키는 거;; 영화는 '너나 잘하세요'나 기억날 뿐이지만, 이 영화는 유독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닌 게, 저는 이영애가 너무 별로;; 근데 이영애만 기억이 나고 다른 배우들은 거의 기억이 안나지만 내용(감독의 철학)은 확실히 처음보다 점점 발전하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리뷰 보니까 더더욱.

그런데 나홍진 감독에게는 왜 동의안해요? 이건 Shining님 대신에 제가 궁금해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도 보실 건가요?ㅋㅋㅋ

맥거핀 2013-06-03 14:34   좋아요 0 | URL
공정사회는 뭐..일단 제가 공정하지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을 거예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이번에 순서대로 다시 보니까,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흐름이랄까, 어떤 내용의 단계적인 발전이랄까 같은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후에 아마 기회가 기회가 있으면 쓰게 되겠지만, 이 흐름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박쥐>, <스토커>까지 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들은 뭐랄까, 인물들이 너무 가혹하게 버려진다는 느낌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미학적인 아름다움, 혹은 일시적인 감정을 주기 위해서 인물들이 가혹하게 다루어질 때, 아니 감독이 창조한 인물을 스스로 갑자기 구겨버릴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그리고 저번에 제가 질문했는데 왜 질문에 답 안달아줌? ㅋㅋ

아이리시스 2013-06-04 16:00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요, 그거 제 댓글 아래 댓글 그거 맥거핀님이 맥거핀님 글에다가 비밀댓글로 단 거 아니예요? 이상하게 비밀댓글인데 그게 제 답글같단 말이죠.. 제가 좋은 정보도 알려주고 간만에 일본어도 사용했는데 왜 답글 안달아줌? 이게..전부터..좀 의심스러웠음..ㅋㅋ

그게 아니라면 무슨 질문?


2013-06-04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4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7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5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5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3-06-3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커> 별로였는데요-.,- 그래서 다음부터 박찬욱 아니올시다 라고 결정지으려다가 음,,님 글때문에 갈등때리네요 하~ 어쭙잖은 갈대의 방황 ㅋㅋ 박찬욱의 세계다음에 이제는 누구차례인가요? 조금은 저는 맥거핀님의 박찬욱을 다루고자 하는 글들을 봤으면 하는 소망도 있지만요,,이렇게 작품 따로 따로 떼어내지 말고 전체적인 작가론은 볼수 없나요? ㅋㅋ 왠 요구사항이 이렇게 많을까요^^ 아 그런데 올해 상반기 베스트로 어떤 영화를 선정했나요? 저는 음 한국영화제외하고 베스트원은 <제로다크서티>, 그다음은 <코스모폴리스>, 음 그리고 그리고 <링컨>, <장고>, <문라이즈 킹덤> 요렇게요,,

맥거핀 2013-07-02 00:33   좋아요 0 | URL
하하..네오님 오랜만. 근데 아직 박찬욱이 안 끝나서요. 싸이보그..도 써야하고, 박쥐나 스토커도 다시(특히 <박쥐>는 예전에 쓴 리뷰가 지금 읽어보니 엄청 이상하더군요.) 써야하는데..사실 필요가 있어서 작가론을 하나 쓰기는 했는데, 그거를 쓰다가 남는 부분들을 이렇게 리뷰들로 재활용(?)을 하고 있어요.ㅋ

근데 상반기 베스트는 일단 최소한 어느정도 챙겨본 사람들이 뽑는 거라서, 제가 뽑으면 그냥 본 거 다 써야할 것 같은데요.ㅋ 저는 위에 뽑으신 거 사실 하나도 안 봤어요. <링컨>은 꼭 보고자 마음먹었건만...<제로다크서티> 리뷰 쓰셨던가요? 찾아봐야지.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2012.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타비아니 형제는 조금은 특이한 형태의 구성을 하고 있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관객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연극의 절정을 지나고 마무리 단계에 이른 장면이다. 시저를 암살한 모의에 동참한 브루투스가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장면 말이다. 그리고 결국 브루투스는 죽고 연극은 관객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끝나고 배우들은 성공에 기뻐하며, 퇴장한 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때 화면은 흑백으로 전환되고 시간은 6개월 전으로 플래시백 된다. 이 배우들이 '줄리어스 시저'를 처음 시작하던 그 때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연극의 제작발표에서부터 배우들의 오디션, 그들의 연습과정을 차례대로 짚어가기 시작한다.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것은 이 때부터다. 영화가 선택하는 것은 이들의 연습과정을 극의 순서에 맞추어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들은 이들의 연습을 보면서, 동시에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을 본다. 이들의 연습은 브루투스 일파의 시저 암살모의에서부터, 점쟁이의 시저 운명에 대한 암시, 시저의 암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과 같은 순서로 우리들에게 보여지며, 이로써 우리는 이들의 연습을 볼 뿐만이 아니라,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한편의 연극을 이 영화를 통해서 오롯하게 감상한다.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연습과정만을 보여줌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 이들이 침대에서 (자신들이 '천장관찰자'라며)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이 영화를 한편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생각해본다면 시저의 암살 장면 전에 들어가 있는 장면이다. 즉 이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실제상황(물론 이는 짜여진 '실제'이다)'을 마치 거사의 실행 직전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브루투스 일파의 모습처럼 비춰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연날 철문이 열리며 관객들이 우루루 들어오는 모습이 브루투스 세력과 안토니우스 세력의 전투 장면의 전초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나, 무대를 새로 제작하는 동시에 새로운 배우가 이 연극에 투입된다고 하면서 그가 옥타비아누스 역을 맡게 된다고 했을 때 생겨나는 효과들도 마찬가지이다(왜냐하면 '줄리어스 시저'라는 극의 내용에서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은 그 자체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면서 동시에 사태의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연극은 동시에 재소자들의 교정교화의 일환으로 상영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배우들은 모두 조직폭력, 살인, 마약밀매 등으로 최소 15년에서 40년 이상을 선고받은 중범죄자들이며, 이들이 연습을 벌이고 있는 이 공간은 교도관의 엄중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교도소이다. 그러므로 이 연습은 단지 연습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들의 어떤 개인사들과 겹쳐지는데, 예를 들어 한 재소자는 연습을 하다말고 연극의 어떤 소도구로 기억하게 된 자신의 옛일을 생각하느라 연기를 이어가지 못한다. 즉 이들에게 이 연극을 하는 실질적인 중요한 문제는 관객에게 좋은 연극을 보여준다는 것보다도 이 연극에 참여함으로써 자신 내부의 무엇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됨으로써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상연하는 연극이 바로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사실일 것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이유는 시저가 왕이 되려한다, 즉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 되리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즉 자유를 찾으려는 이들의 거사가 바로 자유가 없는 교도소 재소자들에 재연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이들이 벌이는 연극 '줄리어스 시저'는 단지 역사극이 아니라, 마치 이곳 현재의 이야기처럼 보이며, 이들은 단지 연기로서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이들 역사적인 인물이 빙의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가 죽은 시저의 시체를 광장에 데려다 놓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선택을 할 것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면, 창살에 갇힌 다른 재소자들을 마치 로마시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자유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를 묻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현재의 한 장면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이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들이 오디션을 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오디션은 오랫동안 떨어져야만 하는 가족에게 자신의 신상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과 수사기관에서 강요에 의해 자신의 신상을 말해야 하는 상황, 두 가지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즉 이들은 나름의 슬픈 사연을 가진 개별의 인간일 수 있지만, 동시에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장면은 보여준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역할을 실제의 재소자들이 맡은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픽션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고(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다큐로만 보기는 힘들다. 이들 중범죄를 저지른 재소자들이 교도소에서 연극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는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 보다 가까이 들어온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시작부에서, 연극의 마무리와 연극이 끝난 후 이들이 다시 하나하나 수감되는 장면을 보여준 후, 다시 6개월 전으로 돌아가서 이들의 6개월을 한편의 연극으로 보여지도록 한 다음에 연극이 끝나고 이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각자의 방에 수감되는 장면이 되풀이되며 끝난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서 두 번 보여지는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나고 마지막에 수감된 한 재소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하는 대사이다.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이제서야 감옥이 되었구나."

 

 

이 두 가지를 보면 타비아니 형제가 결국 우리에게 보여주려던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다. 즉 두 번이나 반복하여 보여지는 것이 이 영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저를 사랑했지만, 시저보다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브루투스의 자결, 즉 자유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난 후 각자의 방에 갇히는 이들 재소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마지막 재소자의 말로 반복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드디어 감옥으로 느껴진다는 그 말은 예술이라는 것에 담긴 자유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들은 연극이 마침내 끝났기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는 것일 뿐이지만, 연극을 통해서 브루투스가 되어 자유라는 것을 간절히 외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술 그 자체에서 자유를 맛봤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들이 이곳에 갇혀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즉 타비아니 형제는 이 교도소에서 이루어지는 연습 자체를 하나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만들어 이 교도소라는 갑갑하고 막힌 공간을 로마의 거리, 로마의 광장으로 확장했지만, 이 마지막에 이르러 연극을 종결시켰고, 로마의 거리와 광장을 다시 교도소로 되돌려 놓았다. 그것에 담긴 의미를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 브루투스의 자결과 재소자들의 수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에 들어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마지막 메시지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연극적인 효과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지만(연극은 관객을 정면으로 향하고 발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것은 꽤 특수한 경우이다), 이미 연극은 끝났고, 그들 앞에 남아있는 것은 우리 영화를 보는 관객들 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연극의 연습, 실제의 연극, 재소자들의 현실이라는 이 3중의 이야기가 우리 관객들에게 던지는 또 한겹의 메시지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이 '줄리어스 시저'의 결말 이후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죽였고, 그들은 그들의 희생으로 자유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결국 이루어진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제정이었다. 즉 '줄리어스 시저'에는 공화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선택한 것이 결국 황제의 즉위를 불러왔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며, 그것은 로마의 시민들이 결국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교도소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 관객들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기꺼이 위정자를, 아니 왕을 모시고 있으니까. 또한 우리는 여전히 예술을 모르고 그런 우리들에게도 각자의 작은 방은 각자의 감옥일 뿐이니까.

타비아니 형제의 이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77분의 미니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장치로만 이루어진 영화이다(물론 이 영화가 미니멀한 장치로만 전개되는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교도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도소라는 곳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은 필요없는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미니멀한 장치를 가진 이 곳이 거대한 로마의 거리, 광장처럼 보이는 것은 타비아니 형제의 마법이 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공간을 확장시켰던 타비아니 형제는 다시 기어이 그것을 좁은 방으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우리 관객들에게 각자의 좁은 방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다시 이 이야기를 교도소의 담장을 넘어 우리 각자의 현실로까지 재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좁은 방이 각자의 감옥임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을 알아야만 하고, 그제서야 우리는 그 제목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그 의미를 말이다. 우리의 '시저'는 누구입니까.


덧.
지난 금요일, 만료를 앞둔 롯데시네마 포인트를 사용하려했지만, 영화를 선택하기가 참 어려웠다. 예를 들어 롯데시네마 건대입구는 특별관 샤롯데와 아르떼관을 포함해 총 12개관이 있지만, 9개관에서는 <아이언맨>이 2개관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이 상영중이었고, 다른 모든 영화는 그 작은 아르떼관에 몰빵되어 있었다. 그렇게 온 국민이 그 철갑덩어리를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 무슨 흥행신기록이니 뭐니 하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참 난감하다.

나는 대신에 일산에서 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보았는데, 덕분에 좋은 영화도 보고, 일산의 밤거리도 구경하고, 갔다왔다하면서 장시간 독서도 했으니 롯데시네마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hining 2013-05-0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잡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휘리릭 읽고 지나갔는데 맥거핀님 보셨군요. 전 <장고>이후 영화관 근처에도 안 갔는데; 아무래도 다음에 볼 영화는 <위대한 개츠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이 한 군데에서라도 개봉하길 기다리는 마음_- 하아, 멀티플렉스의 물량공세는 질리고 지치군요. 아, 저 최근에 <화차>다시 읽고 영화(한국)도 봤습니다. 화차 페이퍼로 가서 댓글 달까요?(웃음)

덧) 이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읽기만 하고 다른 얘기만 하네요; 음, 배경을 바꾸셨군요! 라고 끝까지 다른 얘기......

맥거핀 2013-05-08 15:25   좋아요 0 | URL
날씨도 따스해지고 해서 산뜻하게 바꿔봤습니다. 괜찮나요?

저는 사실 바즈 루어만이 별로 취향도 아니고, 왠지 디카프리오 연기도 안봐도 알 것 같고(...), 너무 원작의 감동을 알아야, 어쩌구 하는 책 광고도 왠지 비호감(...)이어서 아마도 보러가게 될 것 같지는 않군요.^^;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요새는 멀티플렉스에 가면 아이언맨 밖에 없는 게 너무 짜증이 나서, 막상 개봉하면 바즈루어만이든 뭐든간에 볼 것 같기도 합니다만..아무튼 요즘의 멀티플렉스는 도를 넘었어요. 많이 팔리는 영화, 많이 거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그것도 정도와 상식이란 게 있죠. 최근에 멀티플렉스에서 한 영화가 일정비율을 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준비중이라 여러모로 찬반양론에 말이 많은 걸로 아는데, 법 들이대기 전에 알아서 상식을 가동해주면 참 좋을텐데 말이죠.

Shining 2013-05-10 11:35   좋아요 0 | URL
산뜻하기도 하고 왠지 좀 더 감성적인 느낌이에요. 말랑말랑?(웃음)

저도 바즈 루어만은 취향이 아니고 디카프리오 캐스팅에는 동의할 수가 없어요(...내가 뭔데 여전히ㅋ). 닉 캐러웨이 역의 토비 맥과이어와 캐리 멀리건의 데이지는 듣는 순간부터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디카프리오가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항상 예상 가능한 연기를 하는 느낌이에요. 이런 얼굴로 화를 내겠지, 이렇게 윽박지를거야, 이런 식으로 절망하겠군, 등등의 예상 가능한? (제가 언젠가도 이렇게 똑같이 말했죠?큭큭) 아내가 죽은 남자 3부작(레볼루셔너리 로드 - 셔터 아일랜드 - 인셉션) 보고 짜증이 확 나더라는_- 마찬가지로 이 얘기도 전에 했던 것 같은데 저는 개츠비 이미지를 (개인적으로는) 마이클 패스빈더나 피터 사스가드에 가장 가깝게 상상했거든요(애먼 이야긴데, 마이클 패스빈더 왜 이렇게 섹시하죠....쿡쿡).

아이언맨, 돌풍이라는데 저는 2보고 너무 실망해서_- 꿋꿋이 안 가렵니다.

상식, 상식 없는 사회로는 대한민국이 최고죠. 하아.

맥거핀 2013-05-10 22:14   좋아요 0 | URL
저도 디카프리오 연기가 어째 비스무레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캐릭터들이 비슷한 걸까 보면 그것도 딱히 아닌 것 같은데, 뭐랄까 배우가 캐릭터를 잡아먹는달까요. 디카프리오가 주연인 'J. 에드가' 같은 영화를 봐도요, 무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의 영화인데, 이스트우드의 색깔은 별로 안느껴지고, 이건 뭐 디카프리오의 영화이군 하는 생각만 들어요. 캐릭터가 인상에 많이 남긴 하는데, 남는 건 캐릭터밖에 없으니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혹은 이걸 의도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개츠비 원작을 보지 않아서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네요. 마이클 패스빈더라면 매끈하지만 뭔가 너무 매끄러워서 좀 이질적인 느낌이 있죠. 그리고 피터 사스가드는 대머리 아저씨 아닙니까?! 하긴 대머리도 섹시할 수 있다는 것은 일찌기 키퍼 서덜랜드에 느꼈습니다만...

아이언맨은 나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왠지 망했음..싶은 것이..-_- 물론 망하지 않고 잘 나가고 있습니다만...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오멸, 2012

 

 

 

최근 어떤 글에서 허문영은 세르쥬 다네의 말을 빌려 세상의 영화를 역사적 영화와 지리적 영화로 구분지었다. 허문영의 설명에 따르면 역사적 영화는 사건의 영화이고, 지리적 영화는 장소의 영화이며, 예를 들어 서부극이 미국의 건국신화라는 설명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서부극이 역사적 영화라기보다 지리적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비슷한 구분법을 영화 <지슬>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지슬>은 역사적 영화인가, 지리적 영화인가.

일단 영화 <지슬>은 역사적인 요소와 지리적인 요소를 둘다 가지고 있다. <지슬>은 흔히 4.3사건이라 불리는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정과 우리군에 의해 저질러진 제주도민 학살사건, 혹은 그에 맞선 민중들의 항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동시에 이는 제주도라는 좁고 한정된 고유의 지역성을 크게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지슬>이 역사적 영화이자 지리적 영화라고 답한다면 굳이 이 구분법을 끌고 들어온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슬>은 지리적 영화다. 이는 역사적인 이 사건이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동시에 이 영화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감독 이하 제주도 사람들이 만든 제주도 말로 진행되는 영화라고 하는 말도 아니다. 그저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역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있지만, 그래서 4.3사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고도 이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이 영화에서 지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제주도 방언으로 진행되고, 표준어 자막이 계속 밑에 따라붙는 특이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제주도를 지운다면, 즉 예를 들어 이 배우들에게 표준어로 연기하도록 했다면, 이 영화는 어떤 형태를 띄었을까, 아니 이 영화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거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N사이트 같은데서의 20자 평에는 지리는 없고 역사만 있다. 아니 역사는 없고, 이념만 있다. 그것도 이상한 이념만 있다. 지독한 인간들.)

앞에서 허문영의 구분을 따르자면, 그러므로 이는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장소의 영화이고, 그러므로 보아야 할 것은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이어지는 일련의 장소들이고, 장소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있는 집과 이들이 있는 동굴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 바닥에 나뒹구는 제기(祭器)들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 보여주듯이 군인들이 머물고 있는 이 집은 제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집이다. 그리고 군인들은 태연하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시체 혹은 원혼의 옆에서 태연하게 과일을(아마도 제사상에 올라가 있었을 과일을) 깎아서 먹는다. 시체와 원혼과 군인들이 함께 머무는 집. 그래서 이 집은 한없이 으스스하고, 그들이 설혹 귀신들린 행동을 해도(예를 들어 이 부대의 지휘관인 김상사는 마약에 취해 흙바닥에서 헤엄를 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때로 의도적으로 인물의 포커스를 지워버리고, 그들을 종종 흐릿하게 보이도록 한다. 즉 이들을 일종의 영화적인 유령으로 만든다.

반면 이들이 숨어 있는 동굴은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영화는 형식적으로 신위-신묘-음복-소지라는 전통 제사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음복을 하고(무동 할머니가 죽으면서 남긴 감자를 나누어 먹고), 소지를 한다(군인들이 동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날려보내는 매운 연기는 소지의 연기이고, 동시에 울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실제의 제사에서 소지를 하는 것, 그러니까 죽은 이를 적은 신위를 불사르는 것은 동시에 울기 위함이 아닐까). 물론 이는 앞서의 으스스한 집과 다르게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곳에서 감자를 나누어 먹고, 서로를 걱정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을 북돋운다. 그것은 감독이 이 좁은 동굴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이 동굴에서 인물들은 길게 늘어 앉아있고, 카메라는 그들을 각각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모두 꽉 들어차도록 잡으며, 그들 모두에게 포커스를 배분한다(딥포커스). 그것을 그들이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대화하는 씬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때는 대화를 이루어내는 몇 개의 무리를 잡되, 그 대화의 상대자가 매번 바뀌며, 앉는 위치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고, 카메라는 마치 끝없이 계속 패닝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 때의 카메라는 이 좁은 동굴을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마법을 부리고 있으며, 그것은 이 좁은 공간에 가득 담겨진 그들의 공동체성, 그 무한의 힘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의 비교를 변성찬은 영화와 연극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것 역시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변성찬의 구분에 따르면 군인들의 장면은 영화적인 장면들이고, 주민들의 동굴에서의 장면은 연극적인 장면들이다. 기법상으로 보면 이는 영화적인 기법을 주로 활용한 군인들의 장면과 연극적인 기법을 많이 활용한 주민들의 장면이라는 대비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어떤 죽음과 관련한 은유들(유령들이 뛰노는 스크린과 죽어 있는 관객들)과 연극이라는 매체의 어떤 살아있음의 대비로 볼 수도 있다. 즉 <지슬>은 하나의 제의이자 연극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 제의이자 연극은 죽은 영화 속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우리 관객들)이 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의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제의는 온전히 죽은 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살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죽은 혼령을 달램으로써 살아 있는 후손에게 나쁜 기운이 아니라 좋은 기운을 보낸다는 관점에서도 그렇고, 동시에 제의는 죽은 이들이 우리와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점을 일깨우고(죽은 이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남은 하루하루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제의는 죽은 이와 우리를 연결지으면서도 동시에 선을 그음으로써,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케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로 이루어지는 제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고, 동시에 그것은 지슬(감자의 제주도 방언)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제목이 '지슬'인 이유일 것이다. 지슬은 누구에게나, 즉 주민에게나 군인에게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지슬>이 역사적인 영화가 아니라 제주도라는 땅에서 나는 지리적 영화, 아니 감자적 영화이고, 동시에 역사로서의 과거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현재를 다루는 영화이기도 한 이유다. 삶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으니까. 그러므로 제의(祭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덧.
이 말은 덧붙이고 싶다. 이 영화의 이미지는 때로 아름답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살인, 학살의 장면 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 자연의 모습을 마치 한편의 수묵화처럼 비춘다(물론 살인 장면도 그다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 혹은 오멸 감독의 '어떤 태도'라는 것일 터이다.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 아무도 이 죽음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이 자연, 자연의 정령만큼은 이것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처참함 이후에 이런 아름다움을 보아도 좋은 것일까. 아니 처참한 것을 아름답게 찍어도 되는 것일까. 처참한 것은 처참하게 보이도록 찍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남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 영화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사실 우리는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처음에 보인 거의 모든 주민이 죽을 것을 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4.3 사건이라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대로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제의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이 영화가 이들에게 바치는 제의가 되려면 그전에 이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어떤 우스꽝스럽고 순박한 모습을 보면서도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마치 이들이 진짜 죽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제의 제주도 사투리를 쓰고, 자막을 넣는 것이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배우를 쓰는 것은 이 영화를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이게 했으며, 더욱 웃음을 짓지 못하게 했다. 곧 죽을 사람들을 보는 것, 혹은 그들의 죽음을 실제처럼 받아들이는 어떤 불편함이 나를 지배했으며, 그것은 어떤 실제의 죽음 혹은 학살을 보는 것, 혹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쇼아)를 다룬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에서 실제의 자료화면(죽음의 장면)을 쓰는 것을 '외설스런 짓'이라며 피하고, 오로지 인터뷰만으로만 영화를 구성하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전쟁 다큐 <아르마딜로>에서처럼 의도적으로 실제의 죽은 시체, 혹은 죽어가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 - 등에 담겨진 질문들과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게 했다.

앞에서는 제의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이라 말하고, 그것을 보라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거기에서 죽음이 먼저 보이나 보다. 이렇게 이성과 감정의 거리가 머니 제대로 영화보기는 아직도 멀고도 멀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3-04-1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논란의 대상에 올라설 수밖에 없는 영화의 한 자리에 위치해버렸네요.

영화를 영화로만 이해하고 그 후 해석을 해도 늦지 않을텐데 지나치게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제법 많더군요. 여전히..(과연 네오나치와 일본 극우세력들과 이땅의 속칭 "일베"들과의 차이점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맥거핀 2013-04-18 23:18   좋아요 0 | URL
논란의 대상이 되도 본 사람들끼리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좋을텐데요. 뭐 하긴 늘 말이 많은 사람들은 안 본 사람들이긴 했습니다만...

그들의 전략이 꽤 나름 성과를 거두는 것 같아요. 그런 세력들이 주류언론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교과서를 고치고, 국사를 축소시키고, 아무튼 노무현 정권 말기부터 MB정부 때까지 꾸준히 노력을 해왔고, 그의 일종의 성과가 예를 들어 '일베'같은 것이겠죠. ('일베'를 일종의 돌연변이나 같은 세력으로 보는 것은 좀 아니라고 봅니다. 꾸준하고 나름 세밀한 전략의 결과죠.) 아무튼 이제 그런 세력이 정치판에도 점점 발을 들이고 있구요. 분명 이번 정권 하에서 안좋은 방향으로 세력을 넓힐 거라고 봅니다. 앞으로 이런 논란은 꾸준히 그리고 더 큰 폭으로 이어질 것 같아요.

Shining 2013-04-1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말이 마지막 상영이었는데 결국 시간을 못 내서 못봤어요ㅠㅠ
여태껏 그랬듯(아직까진 저 약속 어긴 적 없죠?ㅎㅎ) 영화 보고 난 후 이 글과 씨네21(영화 보고 읽으려고 잡지 사두고 접어놨거든요;) 둘 다 읽고 댓글 달게요 :-]

맥거핀 2013-04-18 23:20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지슬>이 더 상영관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어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가능하면 오멸 감독의 전작들도 좀 찾아서 보려구요. 전작들을 보고 보는 것이 또 많이 느낌이 다르다고 하더라구요. 나중에 영화보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구요.^^

아이리시스 2013-04-2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영화보러 가고시퍼요.오오오오.
맥거핀님, Shining님 저 놔두고 무려, 2박3일이나, 여행갔어요! 이거 혹시 저만 아는 거였어요? 다 소문낼거예요, 혼자갔다고. 화내겠죠? 어쩔 수 없죠.힝힝.

경주(경주 맞나? 전에 자랑(!)했잖아요)갔던 얘기 해주세요. 저는 봄여행 못가요ㅠ.ㅠ

아이리시스 2013-04-23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맥거핀님 아직까지 안왔어요?(안왔군, 흠, 쳐들어가볼까;)(아니야;)(좀 더 기다려)(곧 올거야)(그래?;)(그래--;)

비와요, 비 맞지 말고 살아요, 맥거핀님.

맥거핀 2013-04-25 00:54   좋아요 0 | URL
요 며칠간은 좀 정신이 없네요. 지금도 뭐하다가 잠깐 들어와서 댓글 달고 있음.^^; 어차피 서울에 벚꽃이 펴도 볼 수가 없어서 얼마 전에 경주에서 벚꽃보고 와서 다행이예요. 아이리시스님은 봄여행을 못 갔으면 여름여행을 가면 되죠. 그래도 요새는 밖에 나가면 공기가 따스한 걸 느껴요. 곧 여름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나중에 아이리시스님 글도 읽으러 갈께요. 잘 안들리는 아이리시스님이 저보다 글은 더 쓰는 듯.^^

아이리시스 2013-04-26 14:57   좋아요 0 | URL
오, 여름여행!
사람없는 곳으로 한적하게,
따스한 공기속으로.

그런데 여전히 침대위에 전기매트를 켜고 잔다는 게,
아직 여름도 봄도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어요.

아..일어나보면 막 등에 땀이나..있는데도 끄고 잘 수가 없어요, 어쩐지..

글 더 쓸 거예요, 4월이 가기 전에 리뷰 세 편쯤?ㅎㅎㅎ

2013-04-27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3-06-12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봤고,
(지슬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봤습니다.)
심지어 공동체 상영시간을 맞추지 못해
시작부분을 못봤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좀 답답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어느정도 감독의 의도가 읽히고,
영화와 이 글에 대해 공감이 갑니다.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3-06-15 15:08   좋아요 0 | URL
아..보셨군요. 제의라는 형식을 영화에 도입함으로써, 단순히 이야기가 아닌, 영화 이상의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저도 듭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오멸 감독의 영화들을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의 감상에 이 리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즐겁습니다. 저도 감은빛 님의 글들을 보며 늘 배우고 있어요.^^
 

 

 

(<안나 카레니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스포가 들어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조 라이트, 2012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랭 레네, 2011  

 

  

 

 

 

  

 

 

 

 

        

 

1.

아마도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번역에 따라서 약간 뉘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버전) 그리고 이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이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레빈의 고뇌에 찬 질문에 대한 일꾼의 뭐 그런 것을 묻느냐는 식의 간단한 답과 함께 끝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지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조금 바꿔서 이야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실은 불행한 가정에 나름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행복한 가정에도 나름나름의 이유가 있다(혹은 사실은 둘다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나름나름이 아니라, 고만고만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행복에는 아무도 그 이유를 캐묻지 않기 때문이다. 즉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어떤 자세가 그 행복을 행복한 것으로 만들거나, 그 불행을 불행한 것으로 만든다. 불행한 사람이 더욱 불행해지는 것은 그 불행에 무엇인가 이유를 계속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불행한 자는 그 불행의 근원을 찾아, 어떻게든 그것을 해결하려 하고, 대부분의 불행은 사실 해결할 수 없거나, 사실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즉 본인이 이유라 생각한 것은 대부분 이유가 아니므로) 그런 생각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악순환에서 겨우 벗어나게 된 실마리를 찾게 된 레빈과 달리 안나 카레니나(키이라 나이틀리)는 그 불행의 이유를 찾는 것이 더욱 불행이 되는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을 끝끝내 찾지 못했고, 결국 뱅글뱅글 도는 기차바퀴에 몸을 던졌다. 그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에서 계속 ''에 방점을 찍고, ''가 또다른 ''를 낳는 순환지옥, 끊임없이 뱅글뱅글 도는 악순환의 기차바퀴. (이 영화에서 계속 이 돌고도는 이미지가 반복됨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것이 내가 이해한 이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이다.

 

 

2.

물론 이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는 이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들도 들어있으며, 그 이야기 자체 외에도 주목할 만한 형식적인 부분이 있다. 많이 이야기되었듯이 이 영화는 연극 기법의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의 어떤 것을 생각해 보게 하며, 따라서 이 영화를 도리어 일종의 영화적인 텍스트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즉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부재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우리가 영화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야기가 전환될 때 카메라와 배우는 그대로 둔채 무대 배경을 바꾸거나, 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배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씀으로써, 영화에서의 씬의 전환, 즉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씬과 씬의 연결의 기이함(즉 예를 들어 우리는 영화에서 누군가 집 안에서 잠자리에 들고, 바로 다음 장면에 그가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장면을 보더라도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즉 그가 잠자리에 든 다음에 일어나는 장면이 없더라도, 그가 당연히 일어나서 집밖으로 나왔겠거니 하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혹은 충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씬과 씬의 연극적인 연결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도 펼쳐지는데, 예를 들어 무도회 장면에서 안나와 브론스키(애런 존슨) 커플을 부각시키거나, 극장에서 안나가 여러 사람들의 경멸어린 눈초리를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영화에서라면 한 커플을 부각시키는 방법은 카메라를 활용한다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다. 원경에서 줌으로 잡거나, 혹은 클로즈업을 활용하면 된다. 그러나 연극을 보는 관객의 눈에는 줌 기능이란 없고, 그러므로 연극에서라면 다른 방식을 써야할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그 커플에만 조명을 주거나, 이 영화에서처럼 다른 커플을 정지시키고 안나 커플만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나가 극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경멸어린 주목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의 경멸적인 수군거림과 안나의 미세한 떨림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 것이 일반적인 영화의 방법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대신 다른 사람을 정지시키고, 안나의 히스테리컬한 반응만이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을 쓴다. 이는 물론 '실제'가 아니지만, 훨씬 더 극적이고, 적어도 보는 이를 자극시킨다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다.

 

 

3.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종종 바깥으로 멀찍이 물러나 이 영화가 연극 무대라는 하나의 공간 위에서, 계속 사실은 하나의 연극으로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명이 둘러져 있는 단 위의 무대, 그 안에서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주드 로)은 위태로운 치정극을 펼친다. 그리고 카메라는 종종 뒤로 물러나 그것이 하나의 무대임을 다시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치정극 속의 주인공들만은 아니다. 그 무대 바깥에 위치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나는 기차 객실 안이라는 무대 안의 공간과 그 바깥에서 안나가 마주치게 되는 검댕을 잔뜩 뒤집어쓴 기차 화부의 대비. 즉 그 무대 안에 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이 있다면, 그 무대 밖에는 그 치정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가 흥미로운 것은 무대 안의 이들을 보여주면서도 그 무대 밖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레빈과 같이 일하는 레빈 집의 일꾼들이나 레빈에게 낮은 신분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충고하는 아마도 사회주의자이거나 혹은 공산주의자일 듯한 레빈의 형과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올림으로써 그 무대 밖에서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상기시킨다. (<씨네21>에서 보니 제작비 및 기타 문제로 러시아 현지 로케이션이 무산되자 감독 조 라이트가 주요 배경을 (스튜디오에서 찍을 수 있는) 극장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이는 도리어 영화에 상당한 플러스로 작용하고 있다.) 즉 무대 위에 이들 구체제의 귀족들이 있다면, 그 무대 바깥에는 그 무대에 오르지 못한 러시아 하층민이 있다. 즉 이들 러시아 하층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처절한 치정극은 있는 자들의 한판 연극이며, 환한 불이 켜진 무대 위에서 펼치는 한편의 꼭두각시놀음이다. 영화에서도 잠깐 스치듯 지나갔지만, 낭만적 사랑, 혹은 한껏 격식을 갖춘 사랑놀음은 구체제의 유물이다. 사교계의 어지러운 밀당은 하층민의 입장에서 보면 있는 자들의 감정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브론스키가 죽은 화부에게 건넨 한움큼의 돈은 한순간의 시혜이고 가난한 자들이 아주 잠깐 보는 화려한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연극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고, 언젠간 끝난다. (안나의 오빠는 카레닌에게 이혼은 하더라도 식사는 하고 가라고 한다. 그렇다. 이혼은 해도 식사는 해야한다, 누구나.) 영화를 보다보니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치정극이자, 혁명극이기도 하다.

 

 

 

 

4.

물론 그 무대의 바깥에는 러시아 하층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연극을 혹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이 있다. 무대 위에 귀족들의 사랑싸움이 있고, 무대 밖에 그것과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하층민들이 있다면, 그 더 바깥에는 스크린 밖의 우리들이 있다. 즉 우리는 사실 무대와 혹은 영화와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아까 씬과 씬의 연결, 혹은 숏과 숏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므로 숏과 숏의 연결은 한편으로 무대 밖의 우리를 어떻게든 참여시키려고 하는 영화의 전략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의 대화를 본다고 했을 때 우리가 아주 최선을 다해 좋은 위치를 잡아도 두 사람의 옆모습을 볼 수 밖에 없고, 우리는 그 대화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화는 대신 당신에게 숏과 반응숏(리버스 숏)을 제공한다. 어떤 반응숏을 보여준다는 것은 여러가지 효과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것을 보고 있는 당신이 그 반응에 반응하라는 것이다. 이런 노골적인 반응숏 외에도 아까의 예를 다시 가져와본다면 누군가가 잠을 자고, 그 다음에 그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씬을 붙인다면 영화는 이 때 당신에게 그 중간에 당신이 참여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즉 그가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집밖으로 나가는 장면에 대한 당신의 상상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눈속임이고 미봉책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그 영화에서 분리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당신이 개입하지 않아도 영화는 계속 씬을 이어나갈 것이고,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영화관은 당신에게 나갈 것을 요청할 것이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5.

그것의 하나의 대답은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와 같은 것이 아닐까. 저명한 극작가 앙트완이 죽고 생전에 그의 연극 '에우리디스'에 참여했던 여러 배우들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들을 모아놓고 대형화면에 등장한 앙트완은 그들을 이자리에 모이게 한 이유가 있다며, 그들이 그의 유작인 젋은 배우들로 새롭게 구성된 연극 '에우리디스'의 리허설을 보고 이것을 무대에 올려도 괜찮을지 판단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 촬영된 연극 '에우리디스'가 스크린에 상영을 시작하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이 참석한 배우들이 상영하는 화면에 맞춰 연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이 화면과 참석한 배우들의 연기가 혼합되고, 배우들이 앉아있던 장례식장은 연극 '에우리디스'의 무대로 확장되고, 없던 공간들이 생겨난다. (이와 비슷한 것을 <안나 카레니나>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이 열리고, 없던 눈밭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것은 이와 거의 유사하다.) 즉 이 앙트완의 장례식장에서 상영되는 연극의 관객이 될 것을 이 배우들은 요청받았지만, 이들은 단지 관객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이 연극의 배우가 됨으로서 관객의 지위를 벗어난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영화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모순된 지위를 부여한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영화는 관객이 영화의 무엇인가에 개입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 개입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즉 그 개입은 영화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일반적으로 어떠한 영화감독도(동시에 어떠한 옆자리 관객도) 주인공의 대사에 맞춰서 당신이 연기를 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영화에 들어올 것을 끊임없이 유혹받지만 동시에 그 영화에서 물러날 것을 끊임없이 요청받는다. 그러므로 스크린 위에서 존재하는 것은 유령들이다. 우리는 환영들, 유령들을 보며, 두 시간 동안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빠져있고, 사실은 그 두 시간 동안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홀려 거의 죽어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일종의 임사체험이다. 영화가 끝난 후 밖으로 나왔을 때 뭔가 세상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당신이 그 사이에 잠깐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당신이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홀려 있던 사이에 스멀스멀 기어나왔다가 겨우 다시 기어들어갔기 때문이다.

 

 

6.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시작은 거의 임사체험의 시작이다. 알 수 없는 상대방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이 반복의 시작은 임사체험을 알리는 포고다. (그 화면은 참으로 으스스하다.) 그리고 그들은 앙트완의 장례식, 현계와 선계의 사이에 있는 듯한 오묘한 공간에 들어와 죽은 자의 환영을 받는다. 자 나는 유령일세, 자네들도 나처럼 유령이 되어보지 않겠는가. 유령이 되어보라는 것은 이 영화의 관객이 되라는 말이다. 관객이 되어 이 유령들이 펼치는 향연을 맛보는 유령이 되어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참석한 배우들은 앙트완의 청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연기를 하기 시작하고, 곧 그들은 이 영화의 관객이 아니라, 이 영화의 배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지금 죽음에 대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 번 죽어보라는 요청에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다. 필사적으로 연기를 함으로써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붙이면 더 재미있다. 바로 이들이 벌이는 연극이 '에우리디스'라는 것. 흔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로 알려져 있는 그 이야기. 저승의 신 하데스가 데려간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으로 내려간 오르페우스가 하데스를 감복시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오는데 성공하지만, 거의 지상에 다다랐을 무렵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약속을 어겨 다시 저승으로 에우리디케가 영영 사라져버린다는 슬픈 이야기. 어쩌면 우리가 여기에서 방점을 찍어야 되는 것은 그들의 슬픈 사랑이나 그 얼마를 참지 못한 오르페우스의 인내심 부족이 아니라 혹시 '돌아본다'는 사실은 아닐까. 그 본다는 것. 우리가 돌아보았을 때 다시 환영이 되고 마는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튼 그랬다. 오르페우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발놀림이었지, 결코 보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면 조금 이상한 질문. 혹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갑자기 무서워진 것은 아닐까. 자기 손을 잡고 따라오고 있는 이것이 혹시 괴물은 아닐까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에우리디케인지 뭔지 모를 그것을 저승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뒤를 돌아본 것은 아닐까. 아무튼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서 앙트완은 저승에서 귀환했지만, 그는 결국 다시 저승으로 끌려들어갔고, 어쩌면 앙트완이 주최한 임사체험에서 달콤한 죽음의 유혹에 맞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친 이들은 앙트완의 장례식장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저렇게 가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러나 안심은 이르다. 스크린 속의 유령은 그들의 옆에서 몰래 몸을 숨기고 있으니까.)

 

 

7.

알랭 레네는 말한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이것은 아마도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곧 놀라운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 하나, 아니면 영화를 다 본 당신에게 건네는 조소. 당신은 무엇인가를 보기는 했으나, 사실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당신이 바보처럼 그 곳에서 넋놓고 앉아있는 동안 사실은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당신은 그저 잠깐 죽어있던 것 뿐인걸.

 

영화는 2-3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깜깜한 극장에서 좁은 의자에 앉아서 봐야한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진다. 그러므로 영화는 보는 이에게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의 마법을 쓴다. 예를 들어 플래쉬백을 사용하는 것은 시간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이고, 분할화면으로 여러 공간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은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종의 마술, 눈속임일 뿐,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공간은 극복되지 않는다. 알랭 레네는 시간과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것은 기억과 상상이다. 기억은 과거의 시간을 당신에게 돌려놓으며, 상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공간을 당신에게 제공해준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이 기억과 상상을 당신에게 요청하는 영화, 죽음으로 유혹하지만, 그 죽음에 발버둥치라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아직도 기억하고, 상상할 것은 많으니까. 우리는 그럼으로써 무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맥거핀 2013-04-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편집기가 바뀌었구나..근데 줄간격 먹이는게 제멋대로인듯?

프레이야 2013-04-0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저도 이번 안나카레니나를 특별한 감흥을 가지고 봤어요.
기대 이상인 점도 있고 기대보다 못한 점도 있고,
아무튼 기대는 저의 주관적인 것이었으니 차치하고요.
꽤 감각적이었어요. 레빈과 키티, 안나와 브론스키를 내용상 두 축으로 두자면
'이유'를 찾는그들의 모습을 돌아보아 맥거핀님의 글이 와닿습니다.
사랑엔 이유가 없다고 대답한 브론스키,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 레빈에게 반박하는 농노의 말 등이요.
무엇이 선일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마무리한 점은 원작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한 것 같아요.
키이라는 정말 새로운 안나였어요.
카레닌의 마지막 모습도 여운이 있더군요.

맥거핀 2013-04-04 13:36   좋아요 0 | URL
<안나 카레니나>가 등장인물만 해도 150명이 넘는 소설이라고 하니까요. 단순히 연애, 치정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보기 보다는 당대의 풍속을 세밀히 묘사한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듯 싶습니다. 안나나 카레닌, 브론스키도 인상적이었지만, 저는 그래서 영화의 다른 인물들이 더 흥미로웠고, 눈여겨 보게 되었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역사서 같은 느낌으로 보았다고 할까요. 영화의 어떤 감각적인 부분이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은데, 저는 그것이 영화의 어떤 주제의식과도 연관이 되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었고, 괜찮게 보앗습니다.^^

저는 예전 버전의 안나 카레니나를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이번 영화의 카레닌은 예전 영화의 카레닌들과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처음에 주드로를 못 알아보고 주드로 나온다던데, 왜 안나오삼, 이러고 있었어요.


2013-04-12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토커, 박찬욱, 2013

 

 

 

(<스토커>에 대한 전체적인 스포,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박쥐>,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부분적인 스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들을 보신 분이 읽으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토커. stalker. (그러나 이 영화 <스토커>의 영문 스펠링은 우리가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는 어떤 이미지와는 달리 'Stoker'이다.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으면 몇 가지의 뜻이 나온다. 명사로는 '남을 괴롭히는 사람', 혹은 '(슬그머니 접근하는)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익히 알려진 이런 의미 외에도 stalker라는 단어는 다른 것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명사로는 '(식물의) 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동사로는 '몰래 접근하다'는 뜻 외에도 '성큼성큼 걷다' 혹은 '활보하다', '만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영화 <스토커>는 이의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어떤 총체인 것처럼 보인다.

 

1. 괴롭히는 자 혹은 사냥꾼

 

이미 많은 리뷰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먼저 이 영화를 흔히 말하는 '스토킹'으로 생각한다면 그 스토킹은 삼촌 찰리(매튜 구드)에 의해 행해지는 조카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를 향한 행위이다. 그것은 영화 초반부터 여러 결로 반복하여 이루어지는데, 인디아에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깜빡이지 않는 시선으로, 혹은 그녀의 뒤를 밟고, 그녀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방식으로,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같은 모양의 구두를 보내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을 예를 들어 인디아의 신체에 달라붙은 거미의 모습으로 보여진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영화의 초반부 인디아의 발목 근처에서 맴돌던 포식자 거미는 점점 그녀의 신체의 은밀한 부위로 조금씩 그 발걸음을 옮긴다. 물론 거미는 모두가 알다시피 기다림의 아이콘이다. 아주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그물을 펼쳐놓고 목표한 무엇인가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거미는 사실 박찬욱 영화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캐릭터다. (앞으로도 종종 이야기할테지만) 박찬욱의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 <스토커>에서 우리는 수많은 전작의 그림자들,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의 무늬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영화 <스토커>는 그런 박찬욱의 격자무늬들이 촘촘이 수놓아진 영화이고, 오랫동안 특정의 목적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박찬욱의 인물들이 그 영화에는 있었다. 예를 들어 <올드보이>의 무엇인가를 위해 15년간이나 기다린 우진(유지태), 혹은 오랫동안 기꺼이 음식에 락스를 몰래 탔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이영애), 아니면 축축하고 어두운 방에서 핏기하나 없는 얼굴로 죽어가고 있었던 <박쥐>의 태주(김옥빈). 그리고 그 인물은 이 영화 <스토커>에서 삼촌 찰리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삼촌 찰리가 이 집으로 하필이면 인디아의 생일날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되고, 그동안에 그가 그토록 같은 모양의 끈달린 구두를 보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물론 한편으로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박찬욱의 전작 <올드보이>의 그림자를 다시 한번 발견할 수도 있다. 오대수(최민식)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던 이유가 있으니까.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오대수가 <올드보이>에서 사태를 정확하게 추론하는데 실패한 이유는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즉 오대수가 아니, 우리가 계속 신경써야만 했었던 것은 그 빌어먹을 '이유'가 아니라, '15'이라는 사실이었으며, 그것은 한편으로 어쩌면 이 <스토커>에서도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있을 때 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일단 그 구두에 주목하자. 구두? 그 구두 역시 사실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박쥐>에서 신부 상현(송강호)은 맨발로 거리를 헤매던 태주에게 구두를 신겨주었다. 그리고 그 구두는 <박쥐>에서 태주의 욕망을 깨우는 트리거였다. 그 구두를 신었을 때, 비로소 태주는 그 어둡고 축축한 공간만이 세상을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구두는 결국 그녀를 이상한 욕망의 롤러코스터로 이끌었고, 그 욕망의 롤러코스터는 그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상현에 의해 제어되는데, <박쥐>의 마지막에서 바스러지는 발끝에서 툭 떨어지던 그 한 켤레의 구두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영화 <스토커>에는 중간에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는데, 인디아는 그 가득 놓여진 구두를 이제 벗고, 하이힐로 갈아신는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스토커>는 구두로 시작해서 구두로 끝났던 그 전작을 넘어서, 하이힐로 갈아신는 진화된 캐릭터를 보여준다. 즉 그녀는 제어되지 않고, 다른 다음의 단계로 넘어갔고, 그것을 '사냥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담을 한 마디 붙여두자면, <스토커>에서 그녀의 공격방식을 떠올려보라. 날카로운 물건으로 푹 찌르는 것. , 하이힐을 신은 당신이 적을 만났다. 당신은 어떻게 해야할까.)

 

인디아의 아버지는 어린 인디아에게 사냥을 가르치면서 말한다. 나쁜 짓을 하게 되어야, 더 나쁜 짓을 안하게 된다고. 물론 이 말을 듣고 일차적으로 관객이 떠올리게 되는 사람은 그녀의 삼촌 찰리지만,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박찬욱의 전작의 캐릭터가 하나 있었다. <박쥐>의 신부 상현은 영화 속에서 한가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것은 그가 신부이면서도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그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피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의 피를 먹고, 자살하려는 사람의 피를 먹고, 심지어는 인터넷으로 사람을 모집한다는 등의 별별 생각을 하지만, 끝내 이 딜레마를 넘어설 수 없었고, 옆에서 폭주하는 태주를 더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끝내 결단을 내렸고, 그 결단이란 마지막 차의 보닛 위에서 태주를 꽉 껴안은 그의 손이었다. 즉 그에게도 역시 나쁜 짓과 더 나쁜 짓이 있었고,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의 피를 먹거나, 자살하려는 사람의 피를 먹는 것은 더 나쁜 짓을 하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나쁜 짓이었다. 물론 그런 상현이 대단한 것은 그가 나쁜 짓으로 더 나쁜 짓을 멈추려던 그녀의 아버지와 달리(한편으로 그녀의 아버지 역시도 이 집안의 한 사람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쁜 짓마저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인디아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물론 그는 구두로 끝난 캐릭터가 아니라, 구두에서 하이힐로 진화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분명히 상현 같지는 않을 것이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그의 삼촌 찰리와 같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성일의 말대로 본편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

 

 

2. 성큼성큼 걷는 혹은 활보하는

 

이 영화의 영화적인 가장 큰 특징은 박찬욱 본인과 많은 리뷰들에서 말한 것처럼 교차편집(네이버 주: 교차편집은 서로 대조적인 독립된 장면을 엇갈리게 보여주는 편집 기술을 가리킨다. 글자 그대로 말해, 동시에 혹은 다른 시간대에 발생하고 있는 서로 다른 행위들 사이의 커팅)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하나의 기교로서가 아니라 영화의 특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이 영화는 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셀 수도 없는 교차편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교차편집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장면들 사이의 긴장과 서스펜스, 혹은 묘한 조응을 넘어서 대체로 제3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상상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그것은 영화 속에서 인디아가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림을 빠르게 넘겨보는 것과 비슷하다(혹은 영화 속에서 이야기된 자신이 절대 찍을 수 없는 각도에서 찍힌 자신의 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림이 겹쳐서 아주 빠르게 번갈아 보여지는 순간 그것은 다른 제3의 무엇인가가 된다(원이 그려진 그림과 역삼각형이 그려진 두 장의 그림을 아주 빠르게 번갈아 본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역삼각형 위에 원이 있는 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 속 장면을 예로 들어 보자면, 인디아가 엄마의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에서 엄마의 머리가 갈대밭으로 바뀌며 사냥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부분을 말할 수 있는데, 이 장면에서 머리를 빗겨준다는 장면이 사냥하는 장면과 겹치면서 그것은 단지 머리를 빗기고, 사냥하는 것을 넘어서, 서스펜스와 긴장을 낳는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을 관객에게 묻게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어느 것이 나쁜 짓이고, 어느 것이 더 나쁜 짓인가,와 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 질문은 옳은 질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오해한 질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교차편집은 너무 남용되면 관객이 이야기의 전체 구도를 잘 이해할 수 없도록 하거나, 혹은 관객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 수 있는데, 박찬욱이 좋은 감독인 것은 이와 함께 신의 길이와 카메라의 움직임을 적절히 이용하거나, 혹은 몇 번의 재미있는 트릭을 씀으로서 관객의 이해를 돕고, 피로를 중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찰리와 인디아의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만)이 몰래 밤에 처음 밀회를 가지는 장면을 보면 이런 훌륭한 움직임을 잘 볼 수 있는데, 인디아가 문 옆에서 몰래 엿듣다가 밖으로 나가서 창밖에서 몰래 지켜보게 되는 이 장면을 숏의 커팅으로 구성하지 않고, 롱테이크로 가져가면서 카메라를 움직이는 방법을 씀으로써 관객을 새롭게 즐겁게 함과 동시에, 긴장감을 적절하게 구축한다. 또한 반대로 영화의 후반부 이블린과 찰리가 맞서는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캐릭터가 폭발하여 움직이는 이 결정적인 장면을 이번에는 반대로 두 개의 문을 고정하여 놓고 촬영하면서 양 문을 한번씩 여닫는 것으로 각각의 캐릭터만 보여지게 함으로써 그들을 한 번씩 번갈아 주목하게 하면서(아마 연극이라면 양 캐릭터에 한번씩 헤드라이트를 주는 방식을 택했을 것 같다) 동시에 관객을 인디아의 입장에서 번갈아 상상하도록 한다. 즉 이런 간단한 트릭을 통해, 관객은 이 삼각형 구도에서 인디아와 찰리의 관계, 혹은 인디아와 이블린의 관계, 혹은 찰리와 이블린의 관계를 각각의 다른 범주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3. 스토커라는 가문 혹은 줄기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지금까지 한 가지를 오해하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스토커란 stalker가 아닌 영어 철자로는 대문자 S를 가진 Stoker이며, 그것은 영화의 시작부 이 가문의 이름으로 설명이 된다는 점. 즉 인디아는 인디아 스토커이며, 찰리는 찰리 스토커이다. 즉 이들은 Stoker라는 거대한 줄기에서 나온 각각의 열매들이고, 그 속에는 비슷한 피가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스토커>는 이 Stoker 가문의 어떤 잔혹한 피의 속성에 대한 일종의 인트로이다. 영화의 마지막부, 인디아는 그 가문을 상징하듯 아버지의 벨트와 어머니의 옷과 이제 그 자신만의 하이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Stoker라는 성을 가지는 유명한 이가 한 사람 더 있다. 1847년 태어나 1897년에 <드라큘라>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해진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이다. 그리고 물론 박찬욱은 이 저주받은 가문의 이름을 그 작가에게서 가지고 왔다.

 

사실 그러므로 <스토커>는 또 하나의 뱀파이어 영화이며, <박쥐>의 후속편이다. (다시 여담, 아까 전에 그녀가 공격하는 방식, 그러니까 푹 찌르는 그 방식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그 부위에 주목하자. 그녀는 마지막 어디를 쏘고 어디를 찌르는가.) 그것은 영화의 설정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는 찰리나 인디아의 모습이나, 두 캐릭터가 모두 비슷하게 공유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는 점은 명백한 뱀파이어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한편으로 자신의 힘을 활용할 줄 모르는(혼자 외롭게 자신만의 내면에서 침잠하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뱀파이어가 다른 뱀파이어에 의해 자신의 힘을 각성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그러므로 이 마지막은 사실 조금은 상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뱀파이어 서사에서 한 뱀파이어를 각성하게 해준 다른 뱀파이어는 이제 주인공 뱀파이어에게는 더 이상 그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피를 놓고 경쟁하여야 한다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그 존재의 무분별한 활동은 자신의 존재를 쉽게 드러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스토커>에서도 찰리는 그렇게 현명한 뱀파이어는 못되었고(그러므로 그는 오랜시간 그가 원하는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인디아라면 보다 다른 방식으로 사냥을 실시했을 것이다.

 

 

4. 오인(誤認) 혹은 오해

 

어쩌면 그것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스토커가 Stoker인가, stalker인가, 혹은 괴롭히는 자인가, 사냥꾼인가, 스토커 가문인가, 혹은 뱀파이어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Stoker가 아니라 stalker로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 즉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오해' 혹은 '오인'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혹은 우리가 했었어야 하는 질문. 그 이유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하필이면 왜 그런 긴 시간이어야 했나,라는 것.

 

오인은 박찬욱의 영화에서 그렇게 낯선 키워드는 아니다. 박찬욱의 영화에서는 꽤나 흔치 않게 그런 오해들, 오인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런 오인들은 때로는 그 캐릭터들을, 때로는 그 관객들을 이상한 아이러니나 혹은 (심리적인) 파멸로 이끌고 갔다. 그것은 때로는 한 씬에서 나타나고, 전체 영화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기억나는 몇 가지의 씬들이 있다. 예를 들어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한 장면. 청각 장애인 류의 누나가 극심한 병의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를 몰래 벽에 붙어서 듣고 있는 옆 방의 남자들은 자위 행위를 한다. 음성 정보의 오인. 아니면 다음의 장면, 허문영이 말한 <박쥐>에서의 오인. <박쥐>에서 태주를 죽인 상현은 라여사(김해숙)의 눈빛을 본 후 그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린다. 시각 정보의 오인. 이러한 오해 혹은 오인은 박찬욱의 영화들에서는 씬에서만이 아니라 전체 영화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위에서 말한 <올드보이>의 오인 같은 것도 그렇고,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경우에서도 동진(송강호)은 류의 여자친구의 말을 단지 허세 혹은 거짓으로 들음으로써 파멸적인 최후를 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시 반복하자면 이미 영화들은 끝났고, 오해는 모두 영화에서 단지 오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실물로,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에서라면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으로 혹은 <올드보이>에서라면 모든 것이 담긴 보라색 상자로 되돌아온다. 즉 여기에서 오해하거나 오인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오해인가, 오인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오인이 단지 우연이었는가, 혹은 의도된 오인인가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이다.

 

<스토커>도 역시 몇 가지의 오인 혹은 오해의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이 저질러진 후 인디아가 샤워를 하는 씬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녀의 어떤 넋이 나간 표정과 이상한 움직임을 보면서 인디아가 어떤 죄책감을 가지거나, 혹은 후회하고 있거나, 혹은 공포에 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은 살인의 쾌감에 정신을 못차리는 중이다. 중간에 진 할머니가 살해되는 장면도 일종의 오인의 구성인데, 우리는 교차편집과 맞물려 여기에서 이번에는 범인을 오해한다. (이 오인에 교차편집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다. 즉 이 영화에서의 교차편집은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제3의 다른 의미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그것을 보는 우리를 오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아니면 (박찬욱의 표현을 빌리자면) 앞과 뒤가 같은 북엔드처럼 동일한 장면이 앞과 뒤에 위치한 서두와 마지막을 보자.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장면을 볼 때는 영화가 시작할 때 보았던 감정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가지게 된다. 즉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의 그 장면은 우리의 단순한 오인이거나, 혹은 매우 정교하게 의도된 오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단순한 오인, 혹은 정교하게 의도된 오인은 몇 가지 씬에서만이 아니라 영화의 전체 플롯에서도 드러나는데, 우리는 처음에 이 영화의 어떤 주플롯을 오인한다. 즉 우리는 이것을 어머니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는, 혹은 아버지의 대체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린 소녀의 서사와 묘하게 비슷한 것으로 오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까지 우리에게 어떤 무엇인가를 묻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것은 자, 그렇다면 이제 인디아는 누구를 사냥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전작과 다른 점은 이 오해가 실물로서 되돌아왔던 전작과 달리 <스토커>에서 이 오해는 아직 어떠한 것으로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해가 어떤 무엇으로 되돌아왔던 전작들, 그러니까 사건이 돌고돌아 자신에게 돌아왔던, 그래서 그 사건을 스스로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스토커>의 사건은 이제 시작이다. <스토커>의 마지막은 닫힌 파멸만이 있었던 전작들과 달리 이제 넓고 먼 세상으로 나서는 소녀에서 여인이 된 캐릭터의 시작이다. 그 오해가 무엇으로 되돌아올지는 이제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상당히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박찬욱 캐릭터의 다음 진화를 볼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넙치 2013-03-1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디아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지 않아요.ㅋ
영화 언어적으로는 깊은 맛의 와인같은 영화지만 저는 캐릭터에 대한 깊이는 느끼지 못하겠더라구요.

맥거핀 2013-03-13 16:30   좋아요 0 | URL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박찬욱의 인물들이 복수 3부작이 시작되면서부터 의도적이랄까 일부러 좀 붕 뜨는 듯한 경향이 있죠. 일종의 만화적인 캐릭터랄까(그러니까 말 그대로 '캐릭터성'이 심하게 강화된).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캐릭터는 사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로 좀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캐릭터의 그 빈 부분을 어떤 상징이나 미장센 같은 걸로 채워넣는 게 박찬욱의 화법이었는데, 그게 사실 이번 영화에서 지나치다는 지적이 많죠. (넙치님도 글에서 지적하셨지만요.) 그래서 박찬욱의 영화는 늘 수많은 분석가, 혹은 상징지상주의자들의 난도질의 현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은 그런 '낚임'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박찬욱 감독이 워낙 훌륭한 강태공인지라, 여지없이 걸려들었네요.

아이리시스 2013-03-13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보이 때는 그 혀와 말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게 좋았고 멋졌는데 어쩐지 이 영화를 의무감으로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썩 끌리지가 않은 게 말씀하신 내용들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좀 일러서 박쥐도 안 봤;; 박쥐가 개봉할 때는 제가 영화 자체를 멀리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나저나 니콜 키드먼이 줄리아 로버츠 보다 더 좋아요!! 미아보다 더 예뻐요!! (근데 맥거핀님은 줄리아 로버츠 싫어하잖아요, 좀 좋아해봐요ㅋㅋㅋ)

맥거핀 2013-03-14 21:30   좋아요 0 | URL
음..조금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뭐랄까, 요즘의 영화를 둘러싼 말들이 넘쳐나고 있기는 한데, 정작 영화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말들은 많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 말은 넘쳐나는데, 생각은 줄어드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듯 해요. (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무비위크> 폐간이라는 또하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보니..) 혀와 말이라...

니콜 키드먼은 진짜 그 눈을 보면 좀 무서워요. 아쁘기는 참 이쁘다..라는 생각을 하기는 합니다만. 근데 여전히 줄리아 로버츠는 정이 안가요.ㅋ 내가 왠만하면 여배우들 좋아하는데..


Shining 2013-03-18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매끄러운 글이 있으니 저 같은 사람은 기죽어서 못 쓰는 겁니다! 전 스토커, 만으로 단상만 쓰기 잘했네요ㅎㅎ <스토커>, 이상하게 저는 마음에 들더라구요. 쫀쫀한 미장센도 유려한 컷의 진행도 멋지고. 고전영화 같은 아우라 자체가 묘하게 맘에 들었어요_-b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나날이 관심이 가네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때만 해도 쏘쏘였는데(이건 영화가 워낙 별로인 탓...) <레스트리스>도 그렇고 이번엔 무려 <보바리 부인>이라니! 고전적인 느낌이 강한 얼굴이에요, 소녀적이면서도 중성적인 느낌도 들고. 신기하게도 배두나씨 얼굴이 떠오르는 표정이나 장면들이 있어서 흥미로웠어요.

맥거핀 2013-03-18 17:17   좋아요 0 | URL
엄살은 안 통합니다요.ㅋ 저는 저 배우 '제인 에어'에서 처음 봤었는데요. (그러고보니 고전 전문 배우인가 봅니다.) 그 때도 뭔가 묘한 느낌이 있었고, 이번 영화에서도 어떤 상반되는 이미지를 잘 버무려서 표현해냈다고 봅니다. 확실히 마지막 씬에서 인상적이었어요. 음..생각해보니 배두나와도 뭔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머지 얘기는 Shining님 서재에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