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윤종빈, 2012

 

 

윤종빈 감독의 새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인상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주저하게 되지만, 꽤 흥미롭다고 느껴지는 시작을 보여준다. 실화가 아니라는 자막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바로 몇 개의 사실, 실화들, 즉 실제가 기록된 사진이나 컷들을 붙인다. 그것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정치깡패 이정재가 길거리에 끌려다니는 모습이며,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삼청교육대가 만들어져, 깡패들(그리고 많은 무고한 이들)이 목봉을 잡고 있는 모습이고, 이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노태우가 정권을 잡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 남자가 폭력배들에 의해 물고문을 당하고, 뭔가를 이야기할 것을 강요당한다. 남자가 거부하는 듯 하자, 이번에는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진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지는 컷. 주인공 최익현(최민식)이 감옥에 갇혀있고, 검사가 그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한다. 최익현이 의뭉거리는 대답을 하자, 검사의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한다. 처음에 보여지는 이 기록된 '사실'들과 이 두 장면의 대비. 실화가 아님을 애써 자막으로 밝히고 시작하지만, 윤종빈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미 여기에서 다 드러난 것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1982년으로 시간을 돌려 그 질문 - 너는 누구인가 - 의 기원에 있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즉 이 영화는 최익현이라는 존재의 기원과 무엇이 현재의 그를 만들었는가를 묻는 영화다. 영화 속 몇 번 반복되는 최익현에게 반복되는 질문들이 있다. 검사도 묻고, 그와 동업하는 최형배(하정우)도 묻고, 그와 잠을 자는 여자도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러나 이 대답은 끝까지 명쾌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반달(반건달)이라는 의뭉스러운 대답만 살짝 제시될 뿐, 질문만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그러므로 영화 속 최익현이 들고다니는 '총알이 없는 총'은 마치 그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그 혼자서는 결코 트리거를 당길 수 없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최익현은 안이 비어있는 기표라는 사실에서도 그렇다. 그는 그 내부에 어떠한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피와 뼈>의 김준평) 그가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한편으로 그 스스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묻지 않고, 고민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최익현이라는 인물은 오로지 눈앞의 것만 보고 달려갈 뿐이다.

 

윤종빈 감독은 아마도 최익현에게 건달도, 공무원도, 반달도 아닌,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부여한 듯 하다. (<씨네 21> 839호 윤종빈 감독 인터뷰: "최익현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보통 아버지이지만 보수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말하자면 아까 없다고 했던 아버지의 자리에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뒤 깡패들이 정치권에 힘을 보태준 게 우리라며 막 설쳐댔다.") 뭐 '아버지'라는 말이 마음에 안들면 '형님'이라고 해도 좋다. 윤종빈 감독이 그려내는 이 영화의 세계는 그러므로 기표만 남은 아버지들의, 형님들의 세계이며, 총알이 없는 빈총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감독의 말대로 하나의 거대한 '쇼'인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텅빈 기표이기도 하다. 공무원인지 건달인지, 반달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최익현과 마찬가지로, 군인인지, 정치인인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노태우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묻지 않았고, 오로지 눈앞의 것만 보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국민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삼청교육대니, 범죄와의 전쟁이니 하는 아무 의미 없는 텅 비어있는 쇼들이었을 것이다. 즉 이것은 학연, 지연, 혈연, 종교연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가족 사회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코믹한 재롱극이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일종의 느와르로 보는 시선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들이, 형님들이 벌이는 가족을 위한 재롱잔치였다. 아무리 극이 벌어져도 아버지들은, 형님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계속 그 자신의 정체성을 내보이지 않은 채로. (그러므로 최익현이 총알 좀 구해달라고 징징댈 때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설혹 총알을 구한다해도 결코 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총알을 쏘는 것은, 즉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이 되므로. 그가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윤종빈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동시에 보여줄 수 밖에 없는 한계는) 그 빙빙 돌아가는 회전문이고, 쳇바퀴이다. 아무리 세상이 돌고, 극이 몇 번 장과 막이 바뀌어도(누가 집권하든)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 영화 <부당거래>와 비슷한 세계(그리고 동일한 결말). <부당거래>가 회전문이 돌아가는 현재의 공간을 그려냈다면, 이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그 회전문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멈추지 않는 시간을 그려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 영화는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의 선포 그리고 느슨하게 현재까지를 다루고 있지만, 굳이 이 시대일 이유는 없다. 그것은 이승만의 시대이어도 되고, 박정희의 시대이어도 되고, 전두환의 시대이어도 되고, 물론 MB의 시대이어도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김대중이나 노무현의 시대이어도 된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영화에서 시대는 양념일 뿐이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형님들과 아버지들이다. 그러므로 이용철이 <씨네21>에 남긴 20자평인 "시대를 버리는 대신 인물을 확실하게 부여잡는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이 말은 역으로 생각해 볼 때, 이 영화가 그 시대의 공기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윤종빈 감독은 정밀하게 보여주는 데 능한 세공술사이기는 하지만, 그 세공술은 인물들에 국한될 뿐, 특정한 시대적 공기를 정밀하게 그려내는 데에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런 장면들. 최형배가 상대 조직원의 습격을 받는 것과 시위학생들의 경찰서 습격이 어우러지는 장면 같은 것. 이는 보다 풍성한 함의를 담을 수 있는 장면임에도, 거의 별개의 무의미한 시퀀스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써니>에서 여학생들이 시위대와 어우러지며, 'Touch By Touch'가 깔리는 장면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윤종빈 감독 스스로가 이 장면에서 내가 추구한 것이 그런 코미디였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리고 이것은 그의 전작들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이다. 윤종빈 감독의 영화들은 한국 사회의 남성들에게 드리워진 음울한 그림자들, 군대 문화, 밤의 문화, 형님 문화 등을 다루면서도, 그 그림자들을 정밀하게 해부하는 데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그 메커니즘을 정밀하게 해부하여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기 보다는, 그 메커니즘의 세밀함 혹은 그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는 그 메커니즘을 이루는 부속물들의 세밀함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전작들에서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이 전체의 메커니즘이나 그 메커니즘의 이면에 있는 것들이기 보다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의 디테일이라는 것이 그의 반증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영화를 잘 만든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몰라도, 좋은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저하게 된다. 그의 장편 극영화들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 결국 마지막에 깔리는 체념의 정조들과 보이지 않는 쳇바퀴의 출구들. 영화는 여전히 그 쳇바퀴의 정밀한 묘사에만 천착하고 있다. 그의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글의 처음에 이야기한 초반의 장면들에서도 그렇고, 윤종빈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조금 더 거대한 것을 담고 싶었던 듯 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도 전작들이 가졌던 어떤 한계가 조금은 드러나고 있으며, 비슷한 문제들을 조금은 드러내보이고 있다. 이동진씨의 표현을 역으로 비틀어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현미경은 있지만, 망원경은 없다. 그러나 물론 희망적인 것은 윤종빈 감독의 이번 영화는 아직 세번째 장편 극영화이며, 그에게는 앞으로 찍어야할 많은 영화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세계가 더욱 자라나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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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2-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 때 빨리 후다닥 쓸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이게 뭐하는 건지..확실히 제목이 훅 떠오르는 글이 쉽게 써지는 듯..

네오 2012-02-1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가 없어서 후다닥 읽어봤는데요~ 그러니깐 좋은영화에요? 나쁜영화예요? 희망적인다 그 이야기죠?? 윤종빈은 뭘랄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리얼하기 묘사하는데 그 재주가 있는듯 합니다~ 군대, 화류계 ㅋㅋㅋㅋ 정말 사실같지 않나요?? 군대는 다 아는거니깐 그렇고 윤계상이 윤진서에게 공사당할까리고 덜덜 떠는 모습에 ㅋㅋㅋㅋ 그리고 도박좋아하면서 린치당하면서까지 하정우 정신못차리는거 하며 ㅋㅋㅋㅋ 그런데 결말이 다 안좋잖요` 군대도 그런게 때리고 조인트가이고해도 다 살아남는데 유독 무슨 사유하는 자아를 가지고 반항하는 모습보면 별로 그렇던데요 자랑스러운 예비군으로서요 ㅋㅋㅋㅋ 물론 제가 그랬다는건 아닙니다..적응은 필수라 이거죠 ㅋㅋ

맥거핀 2012-02-14 14:31   좋아요 0 | URL
음..그니까 뭐랄까 윤종빈이 이보다 훨씬 잘만들 수 있는데 이 정도에 머무른듯한 아쉬움? 뭐 그런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이 영화가 만약 감독의 데뷔작이었다면 아낌없는 칭찬을 보냈을 겁니다. 그런데, 위에도 썼지만 3번째 장편영화인데 그가 그려낸 처음의 영화세계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더 나아갈 수 있고, 더 나아갈 능력을 갖춘 감독이라고 보여는지는데도요.

윤종빈 감독 영화들은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지요(아무래도 여성분들 보다는). 그려내는 세계들이 남자들이 공유하는 세계니까. 그래서 또 많이들 그 장면의 디테일함들을 서로 이야기하기도 하구요. 근데 이 영화들의 끝에 남는 어떤 짙은 허무나 체념들이 너무 매몰되는 느낌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비스티보이즈>의 그 결말은 거의 체념의 끝에 다다른 듯했어요.

cyrus 2012-02-1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영화, 난리나더군요. 극장에 가게 되면 꼭 보고 싶은 영화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라딘 영화 서비스가 종료되었다던데 맥거핀님처럼 영화를 즐겨 보시는
분들에게는 아쉽겠습니다. ^^;;

맥거핀 2012-02-14 14:34   좋아요 0 | URL
네 챙겨서 볼만한 영화에요. 뭐 의미를 다 떠나서 일단 재밌으니까. 최민식의 훌륭한 연기를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훅 잘 지나갑니다.
뭐 없어졌어도 그냥 쓰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재는재로 2012-02-13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던데 좀 공감가는 현실인게 슬프네요

맥거핀 2012-02-14 14:3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재는재로님. 그쵸? 이런 영화는 공감이 안가는 현실이 되어야 하는데..아직도 그모냥 그대로니 공감이 안 갈 수가 없네요.

마녀고양이 2012-02-1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네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 잘 알거 같습니다.

현미경은 지녔으나 망원경은 없다는 평가는 아주 뼈아픈데요. 그것은 치명적인 한계, 영화로 보나 개인으로 보나, 그런거잖아요. 그렇지만, 시대가 어찌 바뀌든, 그들은 거기에 있다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이 영화가 보고 싶군요. 안 그래도, 하정우씨와 최민식씨 때문에 구미가 당기는 영화기는 했습니다.

맥거핀 2012-02-14 14:39   좋아요 0 | URL
제 영화평이 어쩌다보니(?) 조금 비판하는 쪽으로 흐른 면이 있지만, 깨알같은 재미들이 있고, 캐릭터를 잡아내는 것이 아주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현미경 어쩌구 했는데, 현미경만이라도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어느정도는 괜찮은 영화죠. 그것마저도 안되는 영화들이 태반이니까.

하정우 씨와 최민식 씨의 연기앙상블을 보는 재미도 물론 좋구요. 뭐 근데 최민식이 워낙 세서 하정우가 좀 뭍히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요. 근데 두 배우도 배우지만 보고나면 조연들도 상당히 인상에 남는 영화에요. 상당수의 조연들이 또 결정적인 한 장면씩을 가지고 있기도 하구요.^^

Shining 2012-02-1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영화관 갈 시간이 마땅하지 않아서(결국 핑계겠죠;)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흥미는 충분한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토리구조나 배경 등에 무심하고_-; 연출과 연기면에서만(!) 굉장히 궁금한 영화에요.

그나저나, 이렇게라도ㅠ 맥거핀 님의 리뷰를 만날 수 있다는게 다행스럽군요.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2-02-17 00:54   좋아요 0 | URL
연출과 연기 면에서 관심을 가지신다면, 이 영화가 어느 정도는 만족스럽지 않으실까 생각을 해봅니다. 최민식이라는 연기 괴물이 다시 부활한 느낌이고, 윤종빈 감독의 세밀한 연출력은 확실히 인정해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비스티보이즈> 때 말아먹었다는 평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영화 좋아합니다.ㅋ)

저야말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2-1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으로 겪지 못한 시대를 그리려는 감독의 한계일 수도 있어요! 전작 두 편도 아쉽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더 스케일이 큰 느낌이니까요. 하정우 카드를 좀 버리면 좋겠고, 여자들에게도 좀 다가오면 좋겠어요. 이 영화는 안봤지만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는 어느 순간부터 한국형 범죄액션 영화를 극장에 가서 안보게 됐어요. <사생결단> 이후로요ㅋㅋㅋ 그 많은 영화들을 한데 싸잡아 묶는 건 좀 미안하지만. 맥거핀님 리뷰는 여전히 소중해요^^

맥거핀 2012-02-17 00:59   좋아요 0 | URL
아..그런가요?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확실히 이야기로만 알고 있는 시대를 그려내는 것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는 없겠군요. 뭐 아무리 어른들이 육이오때가 어쩌구 해도 우리가 감이 안오는 것처럼요. 이 영화에서는 하정우 씨가 최민식 씨 연기를 받치기에는 약간 버거운 느낌이 없잖아 있어요. 하긴 최민식 같은 괴물을 받치는 게 영 힘든 일이기는 합니다만. 한국형 범죄액션들에 대한 피로함도 어느정도는 알거 같기도 하구요. 근데 지금까지 보여줬던 세계에서 이제는 어떤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작년에 <황해>부터 시작해서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데이빗 핀처, 2011 

 

 

(영화의 결말이 부분적으로 들어 있음)

 

 

 

원작소설과 원작영화도 보지 않고, 별다른 정보 없이 데이빗 핀처의 새 영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하 <밀레니엄>)을 보았다. (그러니 아마도 아래 글의 몇몇 부분은 원작과 이어지는 나머지 연작들을 보면 자연히 묻지 않아도 될 의문인지는 모르겠다. 미리 그것을 보신 분들이 있다면, 뻘소리가 나오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데이빗 핀처는 확실히 스타일리스트에 가깝다. 이 영화는 영화관에 차가운 북구의 칼바람이 몰아닥치는 듯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냉랭한 기운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으며, 흰색의 눈과 대비되어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세기말(밀레니엄)의 어두운 색조도 잘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것은 야심차보이는 타이틀롤에서부터 잘 드러나는데, 이 타이틀롤은 상당히 기묘하면서도 교묘한 인상을 준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제작되어 계속 검푸른 진액들이 인간의 형상을 가진 물체, 혹은 키보드와 같은 디지털 물건들에 넘쳐흐르는 이 타이틀롤은 뭔가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것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적인 것의 결합, 욕망과 차가움의 결합, 이성과 반이성의 결합, 과학과 초자연의 결합과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 타이틀롤의 기조와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져 영화의 전체적인 부분을 지배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이 영화의 내면에 담겨 있는 어떤 주제의식까지 가닿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 영화는 이 스타일이 조금은 과하다 싶은 부분들이 있으며, 핀처 감독이 나름 내리누르려고 한 것 같지만, 미처 제어되지 않은 폭주와 같은 부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본 전체적인 감상은 스타일을 한껏 살린 양질의 스릴러물이긴 하지만, 어딘지모르게 기묘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다.

 

먼저 가장 의아하게 느껴지는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는 전체적인 이야기가 분절되어 있는 양상으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글쎄, 원작소설이나 원작영화에서의 구성을 그대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핀처 감독이 새로 고안한 구성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버디 무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보통의 '버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버디 무비에서 주인공들은 이미 결합되어 있거나, 아니면 극 초반에 결합되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거의 한 시간이 훌쩍 넘어서기까지 두 주인공의 조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에게 나름의 사건들이 진행된다. 이 시간들을 일종의 주인공들의 '캐릭터 만들기'라고 보아도, 이 긴 시간의 분리된 진행은 독특한 인상을 준다. 여기까지가 1부라면, 2부는 두 주인공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이들이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여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숨어 있는 적과 대결하고, 마침내 적을 쓰러뜨리고 사건을 해결하는 일반적인 버디 무비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영화 <밀레니엄>은 이 결말에서 예기치못하게 3부의 잉여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것은 헨리크 방예르에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부패한 워너스트롬의 비리를 폭로하고, 리스베트(루니 마라)가 그의 돈을 빼돌리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가 하리예트의 실종이 해결된 이 마당에, 사족처럼 끝에 따라붙는 것은 약간은 수상쩍다. (아마도 원작소설에서는 조금 더 밀접한 결합이 있었던 듯 싶지만) 하리예트의 실종과 워너스트롬의 부패에 대한 폭로가 거의 별개의 사건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그 이유인데, 이 영화에서 거대한 하나의 사건 해결 후, 뭔가 미완적으로 보이는 추가적인 사건이 그 뒤에 붙을 이유가 있을까. 아마도 그 이후에 이어질 다음 편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 듯도 싶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로 볼 때, 이 3부로 나뉘어진 듯한 구성은 어딘지모르게 엉성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몇몇 해결되지 않은, 혹은 어렴풋하게 제시된 이야기들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복선으로 깔아둔 듯한 인상을 준다. 그것은 이 영화는 사실 사건만 제시할 뿐,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왜'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은 3부작이 마무리될 즈음에 가서야 말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에도 뭔가 해답이 나올지 의문이다. 어디선가 보았는데, 이 소설의 원작자가 원래 10부작으로 계획하였는데, 중간에 급작스럽게 사망하여 현재와 같은 3부작의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들이 왜 여자를 증오하게 되었는지는 애써 캐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화 속 실마리를 통해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첫번째 이야기에서 복선처럼 깔아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치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실종된 하리예트의 아버지를 비롯한 방예르 가문의 여러 남자들은 나치 추종자인 것으로 등장하며, 화면 곳곳에도 이와 연관된 상징적인 부분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미카엘(다니엘 크레이그)의 집앞에서 죽은 고양이의 모습은 마치 나치의 갈고리십자(하켄크로이츠)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범인의 집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가스실의 모습 등이 그러한 일부분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 등장한 나치추종자의 모습인데, 그는 자신의 나치 시절 사진들을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있으며, 자신이 스웨덴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떳떳하다고 주장한다.

 

 

즉 이 이야기는 한편으로 유럽의 어떤 지워지지 않는 외상적인, 부끄러운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청산하려 애썼지만, 완벽히 청산되지 않은 나치 부역의 역사, 과거의 기억이며, 거대한 제노사이드의 기록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영화 속 어떤 남자들은 여자를 증오한다. 그러나 그들이 증오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속칭 '더러운' 여자이다.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 믿음이 부족한 여자, 생활이 방탕하고, 타락한 여자. 즉 그들이 여자를 증오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깨끗하지 못하기',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나치즘과 연관된 어떤 한 부분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에도 등장하지만, 영화 속 살해된 여자들은 동시에 유대인이며, 나치 추종자들은 유대인이 더럽기 때문에, 그들 종족을 말살하여야 하며, 아리아인의 순수한 혈통을 그러한 말살을 통하여 지켜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실제로 유대인 제노사이드는 나치가 유대인의 경제권을 빼앗아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건설 후 1차 세계대전 실패의 책임을 그들에게 돌려 정국의 주도권을 획득하려는 문제 등과도 연관되어 있지만, 표면적으로 그들이 내세운 것은 이러한 순수에의 추구, 순결에의 갈망,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추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나치의 모습은 한편으로 리스베트의 방탕함을 비난하면서도, 도리어 그보다도 훨씬 정신적, 육체적으로 망가져있는 악질 후견인 닐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의 반대편에 아마도 리스베트가 있을 것이다. 리스베트는 순수와는 아마도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며, 동시에 사회에 의해서 '미쳤다'고 규정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편으로 유럽에서 중세에 (사실이건 아니건) 생활이 방탕하다고 지목된 여자들이 마녀로 규정된 것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즉 중세에는 종교법정에서 그녀들을 '마녀'라고 규정했다면, 지금은 우리가 그녀들을 사회적으로 '미친 여자'라고 규정하여 낙인찍을 뿐이다. 예를 들어 성적소수자- 영화 속 리스베트의 모습처럼 -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가? 성적소수자들은 성적으로 타락했다고 여겨지며, 때로는 정신적으로 '문제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한다.) 그것은 문신과 피어싱이 가득한 리스베트의 모습에서부터 상징적으로 보여지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 남성 위주의 사회 구조에서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나가는 강력한 여성 주체의 모습, 그것이 리스베트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리스베트의 주무기는 컴퓨터 해킹, 즉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즉 현재의 사회시스템은 남성 위주의 시스템이며, 나치와 같은 이들이 순수한 혈통, 고전적인 균형미를 그토록 부르짖은 것은 이 남성 위주의 공고한 사회 지배 시스템, 아버지의 법을 그야말로 '순수하게' 유지시켜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하얀 리본>에서 잘 보여진다.) 그 시스템을 리스베트는 해킹하여, (시스템의 눈으로 보면) '더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영화 속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딸에 대한 성(性)적인 집착과 간음이다. 하리예트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며, 리스베트 역시 예전에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부르짖는 이상한 순수혈통에의 집착과 연관된다. 이러한 근친상간은 역설적이게도 고대로부터 순수함을 지키기위한 방편(예를 들어 왕실에서)으로 이야기되기도 했으며,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즉 이것은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딸(여자)에 대한 지배이다. 그러나 이의 반대편에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섹스가 있다. 영화 속에서 기이하게 보였던 것은 이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관계 역시 이상한 부녀관계의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이다(영화 속에서 미카엘은 리스베트에게 자신들의 나이차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자(前者)의 관계들과 다른 점은 이의 주도는 미카엘이 아니라, 리스베트라는 점이다. 이들의 첫 섹스는 미카엘이 가장 약해졌을 때 이루어지며, 리스베트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영화 속 두번의 섹스가 모두 여성상위임은 아마도 상징적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결국 미카엘을 구해내는 것은 다름아닌 리스베트이다. 즉 리스베트는 새로운 밀레니엄에서 나약한 아버지를 구원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여전사이다.

 

그러나 순수를 부르짖던 전자의 아버지들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 그들은 딸에 의해 살해당했거나, 거의 반불태워졌거나, 가슴에 '강간범'이라는 표식을 새겨야만 했다.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들은 더러운 여자, 유대인들을 심판하려 했으나 심판당한 것은 그들 자신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딸들에 의해 이루어진 과거에 대한 청산, 과거에 대한 심판이다. 나치에 대한 부역, 유대인들의 제노사이드라는 부끄러운 과거, 청산되어야 하는 역사에 대한 심판이다. 과거의 천년 동안 끔찍하게 사람들을 얽어매었던 아버지의 법들, 그것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열기 전에 청산되어야 한다. 무엇에 의해? 문신과 피어싱에 의해, 혼돈과 귀를 찢는 오토바이의 소음에 의해, 그리고 차가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질적인 결합에 의해(리스베트의 방식과 미카엘의 방식의 차이), 과학과 초자연, 이성과 반이성, 욕망과 차가움, 그 모든 잡종적인 것의 혼합에 의해. 우리는 그 첫째 장을 이제 겨우 열어젖혔을 뿐이다. 아직 청산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카오스를 찬양하라. 이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

 

 

 

덧.

 

근데 헨리크 아저씨는 그 사십여 년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셨길래, 그 비밀을 풀지 못하고, 이제서야 미카엘을 불렀을까. 영화의 시작부 이것을 보며, 이 사십여 년이라는 시간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영화 <올드보이>처럼) 별 게 없군요. 혹시 원작에는 뭐라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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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2-02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웨덴판만 1부를 봤는데 다음 편이 전혀 보고 싶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래도 책은 읽어보고 싶은데 사고 싶지가 않네요( '') 어쨌든 리뷰를 보면 다 재밌는데 그 중에서도 맥거핀님이 젤 좋아요ㅋㅋㅋㅋ

40년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 '') 그런데 이거 핀처 감독이 2,3부도 계속 만드나요?

맥거핀 2012-02-02 22:27   좋아요 0 | URL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근데 왠지 핀처 감독 스타일로 봐서는 1부만 하고 물러날 거 같기도 하구요. 저는 아직 미국판만 본 상황인데, 네티즌들 사이에 스웨덴판이 더 좋다는 말들도 있어서 찾아서 보려고 생각중입니다. 근데 생각해보니 또 그렇게 하면 스웨덴판 3부작, 미국판 3부작을 다 보게 될 것 같아서..고민이네요. 다음 편이 보고 싶지 않았다는 아이리시스님 말도 그렇고..

꽃도둑 2012-02-03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왠지 끌리는데요..
근데 남자 주인공을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혹 007?
맞나요? 으그,,,

맥거핀 2012-02-05 01: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007로 나왔었죠. 그런데 007과는 캐릭터가 상당히 달라요, 그래서 재밌죠. 007에서는 마초맨이었는데, 여기서는 은근히 약해보이는 캐릭터이긴 합니다.^^

네오 2012-02-10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았습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정말 맥거핀님의 비평글에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네요 ㅋㅋ 왜 영화평론가로 직업을 안가지니 조금은 의아하네요 ㅋㅋ 디지털의 잡종 신화가 뭐야 처음에 제목보고 그랬는데 영화를 보니 이해가 되네요 ㅋㅋ 다만 저는 <소셜네트워크>도 그랬지만 인물들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참 안되서 안쓰러워 보였어요 흑~ 슬픔의 정조가 마구 흐른다고나 할까요~ 좀 잘됐으면 좋겠는데 그건 아쉽네요~ 저 사진요 일부러 첨부한건가여?? ㅋㅋ 그 미카엘이 약해지는 그 분분이잖아요 ㅋㅋ 영화가 낮 비내리는 부분에서 시작해서 어두운 밤에 끝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네요 ㅋㅋ

맥거핀 2012-02-12 01:10   좋아요 0 | URL
마지막에 리스베트가 쓸쓸히 돌아서는 모습이 저도 마음이 안좋았습니다. 스웨덴판 볼려구 하고 있는데, 계속 보지를 못하고 있네요. 비내리는 낮에 시작해서 밤에 끝난다라..그러고보니 밤에 끝나는 영화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밤에 끝난다라..
쉽게 술술 읽히면서도, 뭔가 내용을 담는 글쓰기를 하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하지만 늘 지향합니다.^^

맥거핀 2012-02-13 15:37   좋아요 0 | URL
아..그리고 사진은 일부러 저 사진 고른 거 맞아요.^^ 리스베트가 멋있게 나온 사진을 고르고도 싶었지만..

마녀고양이 2012-02-1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이거야 원, 오늘 헤르메스님과 맥거핀님의 리뷰를 차례로 보니
밀레니엄 소설을 다시 읽고픈 욕망에 시달리네요. 영화는 소설보다 못 하다는 평이 많아서 그다지 끌리지 않은데, 어떨지.. 다시 생각해봐야겠어요. 소설은 참 괜찮거든요.

제가요, 얼마전에 굿다운로드 영화를 TV에 연결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뒤로,
영화관 가기가 영 심드렁해졌답니다. 그렇다면, TV로 영화를 봐야하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미적거리는거 보면,,,, 이 모든 것을 겨울 탓으로 돌립니다! 아, 추워! ^^

맥거핀 2012-02-13 15:43   좋아요 0 | URL
뭐 땡기시면 보시면 되죠. 영화는 괜찮았어요. 핀처 감독이 그래도 급(?)이 있어서, 어느 정도 이상은 합니다. 뭐 그렇다해도 소설을 좋게 본 사람들에게 리메이크한 영화가 좋은 평을 받기는 거의 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쵸..요새 티비나 컴퓨터로 얼마든지 영화들을 볼 수 있게 되면서는 가끔 유혹에 빠질 때도 있어요. 영화관 가는 게 사실 꽤나 귀찮은 일이긴 하죠. 시간 맞춰야 되고, 갈 때 올 때 왔다갔다하는 것도 그렇고, 옆에 누가 앉나도 신경쓰이고..근데 저는 이상하게 TV나 디비디로 본 영화들은 뭔가를 더 생각하기도 귀찮고- 그러니 리뷰같은 것도 안쓰게 되고, 또 후회하게 되는 때가 꽤 많더라구요. 아..이 영화는 극장에서 봤어야 하는데 그러고 있죠. 그래서 가능하면 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극장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도 이번 추위가 거의 끝물이 아닐까요. 봄이 곧 올 것 같기도 한데...
 

 

 

 

<르 아브르>에 대한 짧은 평. 이 영화는 소위 말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착한 일에 대한 보답을 받는다. 불가능은 가능해지고, 기적은 (말그대로)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는 그 내용만 동화와 비슷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형식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동화 혹은 아주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한 만화와 비슷해진다. 그것은 영화의 첫장면에서부터 감지할 수 있는데, 무표정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뭔가 코믹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사건은 과장된 효과음으로만 제시되며, 그것은 이들에게 (그리고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도)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위한 만화에서 등장인물이 크게 얻어맞아도 우리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만화(동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톰과 제리>에서 우리는 결국 톰의 모든 악행이 제리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할 것을, 그리고 결국 톰이 제리를 잡아먹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것은 따스하고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뭔가 약간은 기괴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동화가 결국 아주 기괴한 이야기임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아주 힘든 이야기가 결합된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유럽으로의 (아마도 불법적인) 밀항(인간 거래), 그리고 그 와중에서 한 소년의 탈출. 많은 이들이 결코 상상하지 않는, 아주 먼, 뉴스에서나 나올, 아니, 뉴스에서도 잘 나오지 않을 그런 이야기. 동화적인 분위기와 이 힘든 서사가 결합하였을 때 어떤 이야기가 탄생할 것인가. 그런데 이 영화는 이 힘든 서사가 결국 한계에 부딪혔을 때마다 쉬운 선택을 한다. 이 아주 힘든 서사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이를 때마다 쉬운 동화적 데우스마키나가 출현하여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몇몇 장면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년이 컨테이너에서 탈출할 때의 동화적인 시퀀스들, 감옥에서 소년의 할아버지를 만나야 할 때 동화적 거짓말이 먹혀드는 것, 혹은 소년의 탈출 비용으로 3000유로가 필요했을 때 남편과 아내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워보이는 동화적 화해.

 

글쎄. 이것이 어떤 영화적 솔직함이라고, 현실을 과장하거나 기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늘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이야기되는 것과, 그와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들을 분리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또한 한편으로 늘 동화라는 것이 그 표면에서 이야기하는 권선징악 외에 다른 층위에서 중요한 진실을 이야기하여 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인물들의 소박한 진심이 서사적인 커다란 벽에 부딪혔을 때, 그 커다란 벽이 그저 간단한 동화적 처치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면서, 불편함을 조금 느낀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찾아오는 몇 개의 작은 (거짓과 같은) 기적들 속에서 마침내 찾아온 진짜 기적, 그 기적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던 것은 아마도 나뿐이었겠지.

 

 

덧.

 

같은 이야기를 다르덴 형제의 <약속>은 소년과 아프리카 여인을 지하철 속의 출구없는 통로에 가둬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지하철의 소음은 화면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주 아름다워 보이나, 그것을 애써 들여다보기 불편한 세계가 <르아브르>의 세계라면, 처절하고 고통스러워보이나, 기꺼이 들여다봐야할, 그리고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 세계가 <약속>의 세계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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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3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 보고 참 좋았었는데, 그와는 별도로 맥거핀 님 비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의견이군요. 이 글은. (-대부의 조악한 패러디ㅋ)
마지막 문장 좋습니다. <약속>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문장입니다.

맥거핀 2011-12-13 21:42   좋아요 0 | URL
음..그럼 악인은 저군요. 대부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은 늘 조금 더 나쁜 쪽이니.^^
제가 연말도 되었고 한데 마음이 불량스러워서 그런가봐요. 이런 영화보고 감동도 좀 받고, 마음도 좀 따스해지고 그래야하는데..뭐 못만든 영화도 아니고, 아키 카우리스마키니까..기꺼이..이래야하는데, 그 기꺼이가 안되네요.^^;

꽃도둑 2011-12-1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 저는 듣도보도 못한 영화네요.
하기야 영화 보는 거 연말결산해봐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표면과 또 그 이면에서 드러내고자 한 진실을 보고자 한 리뷰 매력적입니다.

맥거핀 2011-12-14 23:27   좋아요 0 | URL
뭐 꽃도둑님이야 영화 외에 다른 문화생활 많이 하시니..^^(절에도 다녀오시고..책도 열심히 읽으시고..) 저도 올한해 여러 영화를 봤지만, 기억에 아직 남아있는 영화는 몇 편 안되요.

표면과 이면의 진실 같은 거라기 보다는, 위에도 썼지만 제가 마음이 악해서..

아이리시스 2011-12-14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제 하니까 말인데, 다르덴 형제와 코엔 형제와 스콧 형제 중에 저는 단연 스콧이거든요! 영화들도 좋아하고, 미드시리즈 <넘버스>도 좋고! 코엔 형제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보고 나가 떨어졌고, 다르덴은 아예 관심도 없어요. 최근에 나온 게 맥거핀님 메인사진 포스터 저 약속이죠? <약속>이 다르덴 형제 것이고, 이 영화가 같은 이야기라길래 안보고도 "어른들의 동화"를 보기에 저는 때가 많이 묻었다는 생각이, 흙흙. 우리 기꺼이 하지 마요. 마음을 따라야죠. 크리스마스에만 따스해지란 법 있나요? 히히히히.

맥거핀 2011-12-14 23:35   좋아요 0 | URL
아아..스콧형제! 뭐 형이야 이미 거장이 된지 오래고, 동생은 스타일리쉬한 그만의 작품 세계를 이미 가지고 있지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다르덴에 소심하게 한표를..) 영화도 확실히 유전인가봐요. 우리나라에도 정가형제도 있고, 곡사형제도 있고, 조금 다르지만, 류승완, 승범 형제도 있고..그러고보니 이 영화 <르 아브르>의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도 그의 형 미카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있죠. 아..나도 영화 잘 찍는 형이라도 있었음 좋았을 것을...^^

저도 이미 마음이 썩었어요. 동화를 보면 뭔가 이상하고, 기괴한 것부터 눈에 들어오니..기적을 들려줘도 그 기적을 의심하고 앉아있으니, 아마도 기적은 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아이리시스 2011-12-15 18:20   좋아요 0 | URL
형제들이 많네요! 그렇다면 저도 다르덴에 꼭 한 번 도전해보겠습니다. 웬만하면 매니아적으로 좋아하는 것만 보는 취향을 고치려고요. 저는 오래전부터 노력했는데, 다양성을 인정하려는 노력과도 연관되구요. <르 아브르>도 형제라니 이건 정말로 전혀 모르겠는 거네요. 제가 졌음ㅋㅋㅋ

맥거핀 2011-12-16 12:16   좋아요 0 | URL
형제 배틀에서 승리 Get!!(아..이건 아니고..;;) 저는 개인적으로 사실 영화는 편협하고, 매니아적으로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멜로, 판타지, 액션, 스릴러, 공포, 다큐멘터리 뭐 이렇게 다양하게 보는 것도 좋지만..매니아적으로 한 분야만 또 열심히보다보면, 거기에서 영화를 보는 시각도 좀 길러지는 듯하고, 조금 더 깊이있게 볼 수도 있게 되겠지요. 아무래도 같은 영화라도 장르(장르라고만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마는..)에 따라 문법과 구성이 많이 달라지니까요.
뭐 책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 분야를 넓게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 한 분야를 깊게 보는 것이 더 필요할 때가 많지요.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조금 더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든 사람들이기도 하겠구요.;
 

 

소년의 학교는 상당한 고급 아파트촌과 그저그런 주택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소년들은 거의 정확히 두 세계로 나뉘었다. 그것은 소년들의 입성과 도시락 반찬들만 보아도 대략은 짐작할 수 있었다. 교복은 아무 것도 감추지 못하고, 점심을 알리는 종소리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사실 그것을 정확히 나뉜 두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한 세계가 다른 한 세계 안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소년들은 사실 많은 것을 안다. 어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 그들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알며, 어디가 가장 약한 지점인지도 안다. 한 세계의 소년들은 끼리끼리 몰려다녔고, 다른 한 세계의 소년들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차례로 타겟이 되었다.  

그저그런 주택가에 살며, 그마저도 변변치 못한 축에 들었던 소년은 그래도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으니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소년들의 학력 수준은 당연하게도 부모의 부의 종속변수가 된지 오래였다. 나뉜 두 세계는 그들의 현재만을 말해주지 않았고, 우악스럽게도 미래의 세계를 펼쳐내보이고 있었다. 운이 좋은 소년이었지만, 타겟의 운명을 그렇다고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몇번인가 책을 잃어버렸으며, 노트에 찢어진 자국을 발견했고, 한 두 번은 가벼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나 아무튼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조건에 속했다. 그래도 쥐꼬리만한 선생님의 관심을 받았고, 그것은 그나마도 없는 소년들에 비하면 꽤나 든든한 방패에 속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던 수많은 소년들은 차례로 타겟이 되었고, 다음 새로운 흥미거리가 생겨나기까지 그 극장의 배우로서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바톤을 넘기고는 어느새 그 극장의 관객이 되었다. 

소년은 사실 많은 것을 잊으려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실제로 많은 것을 잊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때 일어난 일들 자체만큼, 그 때에 가졌던 느낌과 생각들도 잊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 가지를 기억한다. 그 그룹의 소년들 중 자신을 유달리 괴롭혔던 S군과 그가 갑자기 교문 앞에서 따귀를 날리고 지었던 미소를. 갈색의 철봉들로 만들어졌던 그 교문과 그 교문을 둘러싸고 있었던 담쟁이 덩굴들을. 그 그룹의 소년들 중 그래도 소년에게 가장 친절을 보여줬던 J군을 졸업식날 기어코 찾아가 사진을 찍자고 했던 것과 그 때 그가 지었던 또다른 의미에서의 어색한 미소를.  

1992년의 어느 풍경들. 그 짧고도 짧은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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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된 글이지만, 영화 <숨>을 보게 된 계기가 된 글이기에 옮겨둔다. 
 

   
 

뒤틀린 몸과 시선을 이해하다 [한겨레 21 2011.09.05 제876호] 

[문화] 장애인 시설 다룬 두 편의 영화, 조금 다른 접근법… 선악구도 선명한 <도가니>와 장애인의 주체적 욕망 중시한 <숨>

장애인 시설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잇달아 개봉한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도가니>와 전북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 사건을 모티브로 한 <숨>이 개봉할 예정이다. 두 영화는 장애인 시설의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삼지만 접근법이 다르다.  


직설적이고 계몽적으로 사건 알려

인화학교는 청각장애 기숙학교로, 교장과 교직원들이 장애학생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가했다. 아이들은 침묵 속에 갇혔고, 교사들은 모른 척했다. 가해자들은 지역 유지로, 이들과 연루된 교육청·시청·경찰 등은 재단을 감사하거나 조사하지 않았다. 2005년 일부 교직원이 장애인 성폭력상담소에 제보하고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가 꾸려지며 오랜 침묵의 카르텔이 깨졌다. 문화방송 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단은 임원을 해임하지 않았다. 해임을 촉구하는 대책위의 천막농성이 해를 넘기고 등교 거부와 천막 수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학생들이 교장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일이 발생했다. 교장은 학생들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고, (1991년 정원식 총리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재단은 성폭행 혐의로 직위 해제되었던 교직원들을 복직시켰고, 대책위에 참여한 교사와 보육사를 파면·해임했다. 2007년 법원은 교장과 행정실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평교사 한 명만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학교로 돌아온 교장은 나중에 암으로 사망했고, 다른 가해자들은 지금까지 인화학교에서 근무한다.

‘인화학교’ 사건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질 즈음, 공지영의 르포 소설 <도가니>가 나왔다. 소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떤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지를 냉철하게 그렸다. 영화 <도가니>는 소설을 원작으로 비교적 충실하게 사건을 고발하고,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심경을 조명했다. TV <인간극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외 입양인의 문제를 그린 영화 <마이 파더>를 찍었던 황동혁 감독이 연출을 맡고, 끔찍한 진실을 파헤치려고 분투하는 교사와 인권센터 간사 역할을 공유와 정유미가 맡았다. 영화의 시선은 직설적이고 계몽적이며, 장르영화의 기법 속에 선명한 구도와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숨>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극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질감의 화면에, 명쾌함이 아닌 애매함을 지향한다. 2007년 한국방송 전주총국과 전북장애인시설인권연대의 조사로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의 성폭행과 횡령 사건이 밝혀졌고, 이란 프로그램에 세 차례 방영되었다. 사건이 알려지기 전 ‘기독교 영광의 집’은 원생들끼리 합동결혼식을 시켜주는 훈훈한 시설로 언론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운영자인 목사가 지적장애 여성을 15년간 성폭행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게 한 사건이 알려진 뒤, 시설은 폐쇄되었고 피해여성은 쉼터로 보내졌다. 2009년 목사는 성폭행 혐의로 징역 3년에, 부인인 원장은 횡령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다.


고발이 놓치는 지점의 리얼리티

<숨>의 감독은 당시 한국방송의 자료를 토대로, 시설과 쉼터를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영화는 고발이 아니라, 고발이 놓치는 지점에 주목한다. 수희는 뇌병변장애로 언어장애와 약간의 운동장애가 있으며, 지적장애는 없다. 노동능력이 있는 수희는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 한다. 그녀는 지적장애인 민수를 몰래 보일러실로 데려와, 여느 연인처럼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로 알몸을 비추어보며 성관계한다. 수희는 과거에 목사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민수의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안 목사는 수희에게 민수와 결혼시켜 시설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수희는 희망에 부푼다. 그러나 원장의 아들이 지적장애 여성을 성폭행해 임신시킨 것을 알게 된 외부 사회복지 관계자들이 시설에 들이닥치고, 임신한 수희를 ‘보호 조치’한다.

영화는 <도가니>가 취하는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판단 유보의 지점을 보여준다. 임신 사실을 안 원장이 수희를 강제로 데려간 곳은 산부인과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웨딩숍이었다. 원장 부부의 약속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는 오랫동안 같이 산 가족이고, 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원장의 말은 표독스럽게 들리지만, 한편으론 진실처럼 느껴진다. 시설은 폭력적인 곳이지만, 그곳에서 수희는 ‘노동하는 주체’였다. 반면 쉼터는 극도로 친절하지만, 수희는 ‘보호 대상’일 뿐이다. (시설에서 수희는 다른 사람을 목욕시켰지만, 쉼터의 상담사는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수희를 끌고 가 목욕을 시킨다.) 쉼터 상담사는 부드러운 어투를 사용하지만, 수희의 말을 듣지 않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상담사는 수희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단정하며, 가해자를 계속 추궁한다. 말을 하는 도중 수희가 “안 할래”라고 하지만, 상담사는 성폭행 당시의 거부 의사로 알아들을 뿐, 말을 그만하겠다는 뜻으로 듣지 못한다. 상담사는 언어장애가 있는 수희를 당연히 지적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적장애인의 경우 어린아이와 같은 무성적 존재로 취급한다. 장애여성은 성 문제에서 오로지 성폭행의 피해자로만 사유될 뿐, 성적 욕망과 행위의 주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이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사고할 때 흔히 빠지는 오류이자, 장애여성의 성폭력 피해 문제를 이슈화하는 영화들이 놓쳐온 지점이다. 피해자성이 강조될수록,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핵심적 화두는 멀어진다. 장애여성은 모성의 권리도 무시된다. 장애여성은 보살핌의 대상이지 보살핌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성이 배제된다. 수희가 인형을 껴안는 행위는 모성적 욕구의 표시지만, 유아적 행위로 간주된다. 수희가 육아 책을 본다는 사실은 간과된 채, 상담사는 수희에게 어린아이를 대하는 말투로 아이는 입양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인-되기’로 장애인과 눈 맞추기

<숨>은 시설과 쉼터를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수희의 뒤통수에 카메라를 밀착시킨 채 그녀의 눈높이와 시선으로 사건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녀가 본 만큼 알고, 그녀가 답답한 만큼 답답해하며, 시설과 쉼터의 태도가 똑같이 폭력적이란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중요한 성과다. <도가니>와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명확해진다. <도가니>가 처한 상황에서는 시설은 악이고, 선생님과 인권활동가라는 외부 세력은 선이다. 절대 악의 폭력에 시달리는 무고한 장애인들과 이들을 구출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외부인의 고군분투를, 외부인의 시점에서 그려나간다.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선명한 선악의 구도 속에서 관객은 착하고 잘생긴 비장애인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장애인은 순결한 피해자로 객체화될 우려를 안고 간다. 물론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장애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뒤틀린 장애인의 몸과 시선을 일치시키며, 남루하지만 열정적인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납득하게 하고, 그녀가 일상적으로 겪는 소외를 경험케 함으로써 시설이나 쉼터나 동일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숨>의 관람 체험은 소중하다. ‘장애인-되기’를 통해 장애인의 주체성을 사고할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수희의 마지막 대사와 표정에서 결기를 느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장애인과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는 첫 관문에 닿은 것이다. <숨>은 9월1일, <도가니>는 9월22일에 개봉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황진미 평론가의 글은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코멘트에는 동감한다. (다만, 이 영화의 목표 지점이 '장애인-되기'인가,라는 점에는 의문이 든다.)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자주 하는 그런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던 관객이 조금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의 시작은, 시설 원장이 임신한 수희를 (낙태를 목적으로 한) 병원이 아닌, 웨딩샵에 데려가는 장면일 것이다. 물론 아주 간단하게만은 말할 수 없다. 원장 부부의 호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사건을 간단하게 무마하려는 그들의 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이 시설에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수희가 그간 겪어왔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는 시설에서 목사가 행한 '어떤 일'들이 단정적으로 있었으리라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적어도 영화상으로는 그것은 뉘앙스로만 짐작될 뿐, 세부적인 정황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관객들이 원하는 명확한 진실은 관객들에게 끝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위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의 시점이 거의 철저하게 주인공인 수희의 시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희가 모르는 것은 관객도 모르며, 수희가 짐작하게 되는 것은 관객도 짐작한다. 그런데 거기서 영화가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관객인 '우리'가 수희가 아는 것은 적어도 알고 있는가, 즉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수희가 처해 있는 상황과 거기서 그녀가 취하는 미세한 반응들만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될 뿐, 그것에 있어서 수희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잘 모른다. 물론 우리는 대강의 어떤 것을 짐작하게 되고, 누군가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영화를 보면서 심판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 그 때 그녀도 그렇게 느꼈을까, 혹은 우리가 저 위치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물론 수희가 처할 수밖에 없는 위치와 우리가 현재 처한 위치가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스크린을 앞에 둔 우리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방관자이고, 방조자일 수밖에 없음에 그 이유가 있다.

위의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모호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마도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이 사회에는 아직도 나쁜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대체로 나쁜 것들이 오래 지속되고, 그 생명력을 질기게 이어나가는 것은 그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이므로. 눈에 쉽게 보이는 상처는, 카메라가 쉽게 잡아내 그 명확한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악은, 사실 많지 않다. (물론 나는 이 문장이 명확한 악이란 없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보다는 보이지 않는 악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읽히는 것 또한 경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똘히 고민하게 되며, 조심스럽게 그 환부를 헤치고, 몇 가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 의문에는 아마도 이런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 일들에 대해서 일종의 공범이 아닐까. 우리 역시도 장애인이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에 갇혀서 적당히 '보호'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는 긍정하고 있었던 것,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욕망이란 없다고, 그들의 욕구란 없다고, 그들은 단지 인큐베이터 안에 잘 담겨져 있어야 할 대상이라고 어느틈에 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보고 느끼는 우리의 분노란, 어쩌면 아주 조금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돌렸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질문은 이런 것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한 두 차례 등장하는 주인공 수희의 노출 장면을 보면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이 영화에서 그런 것이 필요했을까 라는 물음으로 치환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질문은 온당할까. 그것을 불편해하는 나의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다른 이의 악들을 들여다보기 전에, 나의 내면부터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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