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전투, 질로 폰테코르보, 1966.

 

 

(영화의 결말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알제리전투>는 프랑스 식민통치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알제리에,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구성된 1954년부터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직전인 1962년 봉기까지 8년간 민중들이 펼치는 거대한 이야기를 흑백의 다큐멘터리 화법을 빌려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다큐멘터리 화법이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 나온 모든 컷은 일체의 뉴스 릴이나 실제의 사건을 촬영한 영상을 배제하고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재구성된 장면들만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는 상당히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명백하게 극영화이다. 이 영화에 극영화의 요소가 두드러지는 것은 그 서사의 구성방식에 어느 정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인데, 이 이야기는 한 명의 주인공을 행적을 뒤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인물이란 알리 드 쁘왕뜨(브라힘 하쟈드)라는 민족해방전선의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가상의) 지도자인데, 이 영화는 말썽이나 부리는 식민지 청년에 불과했던 그의 각성으로 시작하여 1962년의 독립 2년 전 그가 최후를 맞이하게 될 때까지를 집중하여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그 내용으로 인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1966년의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 직후 프랑스 대표단의 항의를 담은 퇴장 해프닝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9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정식 개봉되었다.

 

영화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흑백의 미학적인 문제, 흔히 시네마 베리테로 이야기되는 이 영화의 형식적인 면도 흥미롭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다보니 다른 것에 흥미가 간다. 먼저 하나는 이와 같은 극사실주의적인 영화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예를 들어 인물의 심리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극단의 리얼리즘에서 결국 인물의 심리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인가. 심리라는 것은 결국 작가의 전지적인 시선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미묘한 뉘앙스로도 보는 사람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인물의 심리를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감독들은 여러 다양한 장치들을 구성하고 시도한다. 그러나 일체의 인위적인 조작이나 특정한 의도를 가진 편집을 배제하는 소위 시네마 베리테의 경우, 이것은 영화의 형식과 자주 충돌한다. 따라서, 인물의 심리를 구체화하는 특정의 시퀀스는 계속 배제되며, 관객은 인물의 심리에게서 계속 멀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생각해볼 때 이 영화는 어느 쪽인가. 과연 그들의 심리를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이게 되는가. 여전히 의문이다. 예를 들어 마지막 알리의 마지막과 또다른 지도자인 자파의 최후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어떤 심리를 읽어낼 수 있는가. (혹은 읽어낼 수 없는가.)

 

이것은 물론 프랑스인들의 죽음과 알제리인들의 죽음을 다루는 측면에서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영화에 잘 묘사되어 있지만, 알제리전투 기간 내내 폭탄이나 총에 의한 테러리즘은 만연했으며, 많은 프랑스 시민들, 그리고 알제리 시민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분명 이 영화는 알제리 쪽에 무게를 더 두고 있기는 하지만, 알제리인들과 프랑스인들의 죽음 모두에 동일한 애도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죽은 이들의 모습은 클로즈업되며, 매번 어김없이 (엔니오 모리코네의) 애도의 스코어가 깔린다. 이것은 프랑스 군대나 경찰이 행하는 폭력적인 억압과 그에 맞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행하는 테러에 의해 발생하게 되는 모든 희생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논쟁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프랑스 공수부대를 지휘하는 수장인 메튜 대령에 대한 묘사에서도 같은 기조를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적들(민족해방전선)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이 벌이는 테러나 저항에 고문 등의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맞선다. 일반적으로 상당수의 영화에서 이러한 인물은 거의 악마와 같이 그려지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의 그는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매번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들에게 투항을 요구하며, 투항하면 공정한 재판을 보장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마치 정말 그의 말이 사실인 것처럼, 즉 공정한 재판을 할 사람처럼 영화는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문은 그것이다. 과연 공정한 재판이 가능할까. 아니, 테러의 주범들인 이들에게 공정한 재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예를 들어 어떤 판결이 내려져야 공정한 재판이란 것이 되는가. 이들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이들에게 단두대형이 아닌, 교수형을 판결하는 것이 공정한 재판인가. 아니면 이것은 단지 절차적인 면에서의 공정함만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이 영화는 일견 보이는 것처럼 시네마 베리테에 충실한 즉, 일체의 주관적 판단을 제외한 시각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즉 이 영화에서라면 이는 그저 극사실적인 사건의 나열들인가, 아니면, 특정의 시선으로 교묘하게 처리된 사건의 나열인가. (한편 서구의 비평가들은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사물에 대해 주관적 판단을 하려는 의도가 담긴 행동'이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고의성이 없다고 해도 특정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만을 담는다는 것에는 이미 인위적인 구도가 가미된 것'이라며 '시네마 베리테'와 같은 시도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네이버 백과사전) 물론 이 질문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기는 하다. 그것은 "특정의 시선이 배제된 것이 영화적으로 객관적인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예를 들어 위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 본다면, 프랑스인들의 죽음과 알제리인들의 죽음에 동일한 애도를 건네는 것이 (영화적으로) 과연 객관적인 것인가. 물론 이 물음은 불편하다.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은 어떨까. 고문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공정한 것인가. 물론 이는 휴머니즘, 인도주의적인 부분과는 다른, 영화에서 다루는 것에 국한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환원된다. 시네마 베리테란 가능한가, 의미가 있는가. 즉 결국 '어떤 특정의 시선이 배제되는 것'은 극사실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로부터 무엇을 얻는가.)

 

그러므로 내 느낌은 이 영화도 결국 표면상으로는 주관적인 의도를 배제한 사건의 나열이지만, 그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영화에 남아있으며, 보아야 하는 것은 그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그 본질을 프랑스의 경우와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은 아닐까. 고문의 반인도주의적인 행태와 사르트르의 알제리의 저항에 대한 시선 등을 이야기하는 프랑스 기자들에게 메튜 대령은 일갈한다. 여기에 그렇다면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완전히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프랑스 기자도 여기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제국주의적인 정책의 수혜자는 본국의 지배층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일반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에 비판을 가하는 시민들 역시도, 동시에 그 제국주의의 공범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현재의 많은 부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운가.) 알제리의 경우라면 혹 다음과 같은 것들은 아닐까. 영화의 말미, 알리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른 죽음으로 영화가 끝을 맺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으며, 앞으로는 조용할 것이라고 안심한다. 끝날 것처럼 보였던 영화는 갑자기 2년 후로 점프한다. 들불처럼 일어나는 봉기들과 프랑스인들의 어리둥절한 외침. 왜 갑자기 이러는거야. 그 때 민족해방전선은 완전히 끝났잖아, 왜 지금 갑자기 봉기들이 일어나는거야. 여기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은 바로 영화 속의 몇 가지 장면들이다. 장면 하나, 막다른 곳에 갇힌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사람들에게 투항을 요구하는 프랑스 군대의 말. 너희들은 졌어, 어차피 다 끝난 것 알잖아, 그냥 나와. 장면 둘, 포기하고 투항하는 자파와 그의 물음. 여기서 죽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장면 셋, 죽음을 선택한 알리의 컷 다음에 모두 멈춰서서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알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알제리인들.

 

뜬금없이 독립이 된 2년 후로 점프했던 영화처럼 나도 갑자기 뜬금없이 다음의 글을 붙인다. 영화 <마이 백 페이지>를 소개하는 정성일 평론가의 글의 한 대목(경향신문 2012-04-08).

 

1968년 3월11일, 도쿄대는 의과대학의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12명과 연수생 5명을 퇴학시켰다. 이 처분의 철회를 요구하는 의대생들이 6월15일 도쿄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다. 이틀 후 학교는 기동대를 투입하여 전원을 끌어냈다. 갑자기 이것이 화약고가 됐다. 안보투쟁 중이던 일본 전국학생연맹은 7월2일 다시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고, 전공투(全學共鬪會議)의 ‘학원투쟁’이 시작됐다. 총장이 사임했고, 의대 학장이 처분 철회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공투는 점점 더 강도 높은 요구를 했다. 마침내 이듬해 1월18일 8500명의 기동대가 투입됐고 72시간 동안 헬리콥터와 최루가스를 동원한 진압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원 체포됐다. 이 투쟁을 ‘도쿄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때 야스다 강당의 벽에 남겨진 수많은 낙서 중에는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덧.

Shining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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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4-22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전손택이 말한 '사진'이 프레임을 담아낸 사진가의 시선인 것처럼, 결국 극사실주의가 아무리 객관적 시선을 유지했다고는 해도, 실제 일어나는 현장을 총체적으로 담지 않으면, 만들어내진 창작물은 100% 객관성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에는 관심이 있었는데 찬찬히 읽어보니 영화가 의도하는 것도, 맥거핀님의 의문도 알겠고, 저 역시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때로 '불씨'는 아주 작은 하나의 티끌이었는데 폭발하여 번지는 과정을 보면 일파만파라서 이게 과연 처음의 그 작은 불씨 하나 때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잖아요. 불이 번지며 전기코드도 건드리고 가스불도 건드리고 2차,3차 폭발이 계속 되는데요..

명분은 붙이기 나름인 것 같고, 알제리인들도 표면적으로는 끝난 문제를 계속 품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문제는 또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맥거핀 2012-04-23 14:20   좋아요 0 | URL
네..저도 아이리시스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주관적인 의도를 100%로 배제한다는 것은 아마 영화에서 불가능하다고 말입니다. 뭐 그렇다면 시네마 베리테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고 끝내버리면 될텐데, 그렇지 못하는 것은 또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편향성, 어떤 의도의 문제를 지적하고는 하거든요. (뭐 대표적인 예로 최근 논란이 되었던 <부러진 화살> 같은 영화를 예로 들수도 있겠습니다만...) 완전한 허구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실제의 사건을 영화로 다룰 경우 이러한 고민은 계속 반복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결국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는 이야기일까요. 예전에 역사가 서중석씨가 '역사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다만 에둘러 돌아갈 뿐이다.'라고 한 말이 갑자기 기억이 나네요.^^

감은빛 2012-04-23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저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 분이 계셨는데, 여기서 이 영화를 만나다니!
이건 정말 우연일까요?
아니면 혹 맥거핀님이 혹시 제게 영화를 추천한 그 분이실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최근 이 영화가 이슈가 될만한 일이 있었는데,
저만 몰랐던 것일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맥거핀 2012-04-23 14:1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감사합니다. 뭐..제가 알기에는 최근에 이슈가 될만한 것은 특별히 없고, 다만 최근에 모 영화관에서 '흑백의 미학' 기획전이라고 이 영화와 다른 영화들을 묶어서 상영하고 있는데, 그래서 조금 뉴스에도 나고 그랬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금도 상영은 진행중이구요).

저도 이 영화는 추천을 드리고 싶네요. 좋은 정치 영화이기도 할 뿐더러, 또 많은 이들에게 힘을 나누어줄 수도 있는 자체 내공을 가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Shining 2012-04-24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적인 것과 영화는 다른 것인가? 라고 전공시간에 썼던 페이퍼가 생각나네요. 교수님이 흥미롭다며 개인면담을 신청하셔서 졸지에 유명인이 됐다는_-

감정과잉은 무엇인가?와 감정을 정말 배제할 수 있는가?는 사실 같은 질문이 아닐까? 다큐멘터리를, 혹은 실화가 영화화 될 때 항상 품게 되는 질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정치적인 이야기를 가장 비정치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할 때, 그 '이야기'가 '서술된다'는 것으로도 이미 정치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 말이죠.

맥거편님의 페이퍼를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저 너무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군요ㅎㅎ

2012-04-24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4-24 23:37   좋아요 0 | URL
어...그거 재밌어보이는데, 영화적인 것과 영화. 저랑도 개인면담, 아니 개인필담 좀 하시죠.ㅎ 그래서 때로 영화를 보면서, 왜 이렇게 영화가 편향적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를 보는데, 조금 답답한 면도 있어요. 그렇다면 편향적이지 않은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가 말이죠. (예를 들어 저번에 <부러진 화살> 가지고 백분토론 했었는데, 저는 좀 얼떨떨했어요. 이게 백분이나 이야기할 건가..?하는 느낌도 좀 있었고요.)

근데 정말 영화적인 것과 영화는 무엇이 다릅니까?

2012-04-24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04-25 11:26   좋아요 0 | URL
개인필담... 교수님의 면담요청만큼 걱정되는데요?ㅋㅋ

음, 다큐멘터리라면, 사실적인 것과 사실을 그려내는 것은 정말 같은가,에 대한 의문이겠죠.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아닌가. 또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폭력. 폭력은 재현(저는 재현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ㅋ)될 수 있는가. 영화관에서 느끼는 폭력은 어떤 극렬한 것도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영화의 상영이 멈추는 순간 견딜만한 혹은 타인의 것이 되어버리는데 그 폭력의 순간에 감응한다는 것은 영화적인 것인가 사실에 의한 것인가. 영화는 영화적인 것인가 영화 자체인가, 뭐 이런 얘기들^^;

말로 하면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로 쓰려니 어렵네요ㅎㅎ

음, 허문영 평론가의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혹시 읽어보셨나요? 저는 이 평론집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동조를 많이 했거든요. 제가 느끼던 불편함이나 의문들, 두서없는 말을 그분은 조리있게 핵심만 짚으셨더군요ㅠ 역시 좋은 말은 누가 다 했나봐요ㅎㅎ

2012-04-25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6 0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4-24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이퍼 제목으로 인해서, 이 페이퍼를 읽기 저어했습니다.
그것도요, 이틀이나요... ^^

마지막 문단을 보니 문득 <선덕여왕>의 미실 죽음 장면이 떠올라요.
화랑들이 부르는 노래라면서 말하는데,

싸우지 못 하면 후퇴하면 되고
후퇴하지 못 하면 항복하면 되고
항복하지 못 하면 죽으면 되네...

대략 이런 내용인데, 너무 찡해서 펑펑 울었거든요.
항상.... 이 부분은 제 딜레마입니다. 저는 용감하지 못 하거든요. ㅠㅠ

맥거핀 2012-04-24 23:43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제가 허세있는 걸 좋아해서요.ㅋ

어..저는 사실 그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았는데, 말씀하신 노래만 듣고도 왠지 가슴이 뭉클합니다. 화랑들의 계 중의 하나가 '임전무퇴'라고 하는데, 참 생각해보면 잔인한 이야기이죠. 전장에서 물러나지 말라고 하는 것..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닌 최대한 다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라면 저 같으면 알리 같은 선택은 하지 못했을 듯 싶어요.

에세르 2012-05-0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평 잘 읽었습니다. 알제리는 그저 까뮈가 태어난 곳이고, 생전에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아서 비난받았다는 사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아, 무지해서 부끄럽네요)
이렇게 맥거핀 님의 글을 읽고 나니 새로운 시각이 생겨나는 듯 합니다.
특히 이글의 제목, 끝부분에 부기하신 야스다 강당의 낙서 이야기는 인상적입니다!

맥거핀 2012-05-10 17:2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저도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알제리에 대해 잘 몰랐어요. 그런데 독립을 위한 그들의 투쟁을 보면서 우리의 역사도 오버랩되고, 동질감이 느껴졌습니다. 때로 좋은 영화는 열 역사책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또 책이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을 때로 이야기해주니까요.^^
 

 

 

 

인류멸망보고서, 임필성, 김지운

 

 

(영화의 줄거리 들어있음)

 

 

아무튼 인류는 멸망한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언젠가는 멸망한다. 다른 것은 다 부정한다고 해도 우주에는 시작이 있으므로 아마도 끝이 있을 것이고, 뭐 그렇다면 인류도 별 수는 없다. 인류멸망보고서. 보고를 하는 자들의 시각은 늘 냉소적이다. 보고를 하는 자들이 그 보고의 대상들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이입을 할 필요는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 원인과 결과이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건,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멸망하였는지를 고찰하여, 보고를 하는 자들의 멸망을 늦추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임필성. 2008년의 광우병 촛불정국을 직접적으로 비틀고 있는 이 단편은 인류 멸망의 원인이 인간의 지긋지긋한 탐욕에 의해서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지긋지긋한 악순환. 인류 멸망의 시작이 한 잉여의 별 생각없는 분리수거 무시의 결과로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이 유머러스한 시작은 쓰레기 처리과정을 직접적으로 길게 보여주는 몇 가지 컷들로 흥미롭게 이어진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는 필연적으로 과잉된 쓰레기를 낳고, 과잉된 쓰레기는 동물의 몸을 통하여 다시 인간에게 들어간다. 이것이 인간의 탐욕의 결과임은 처음 좀비 바이러스에 걸리는 자들의 면모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데, 아무 생각없이 살며 여자 뒤꽁무니만 쫓는 주인공과 그보다 더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여자친구, 그리고 불량청소년, 탐욕스럽게 고기를 뜯고, 클럽에서 그 욕구를 발산하는 사람들, 이들은 이 좀비 바이러스의 기원이 되어 곧 온거리로 이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그리고 광우병 촛불시위의 비유. 광우병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모르지만 '촛불 좀비'라는 말이 보수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을 때, 그 말을 만들어내고 유통시킨 자들은 각자의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촛불 좀비'라는 말의 다양한 변이체들을 이리저리 널리 전파시켰고, 보수언론은 그 말들을 어김없이 받아적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영화. 두 가지의 시사점이 있다. 하나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트려지는 곳은 길바닥이라는 점. 미안하게도 좀비 바이러스는 싼 고기를 먹고, 길거리에서 그 욕망을 분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전파된다. 그리고 그들을 좀비라고 규정지은 사람들은 각자의 집 문을 걸어잠그고, 길거리에 쏟아져나온 좀비떼들을 (아마도 곧 좀비가 될, 사실은 좀비와 별다르지 않으므로 그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전경들이 막아주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영화 안에서 이 좀비들과 별개인 것처럼 전개되는 무감각한 TV 리포트들. 시시각각으로 페허가 되는 건물들과 별개로 이 TV 리포트는 도대체 어디에서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이 TV 리포트를 하는 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나, 어디에 숨어서 이 공정한 리포트들을 토해내고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좀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분별력을 다시금 찾게해줄 사과(선악과)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로 뛰쳐나오게 해줄 심장과 함께 차갑고 날카로운 이성의 사고이다. 그와 동시에 돌이켜보면 MB 정부의 가장 큰 위기였던 촛불정국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광우병, 소고기 때문에 촉발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멸망 실현 가능성 : 27.2%.

 

 

<천상의 피조물>-김지운. 그렇지만 결국 실패한 좀비들은 로봇이 되었다. 인류의 예정된 노예, 로봇. 앞의 <멋진 신세계>와 이 <천상의 피조물>은 전혀 별개의 작품이지만, 왠지 이 두 단편은 대구를 이루는 듯 하다. 모두 다른 육체지만, 머리가 포맷되어 비슷한 행동패턴을 보이는 좀비, 그리고 그 반대로 모두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 다른 정신을 가지게 된 단 하나의 로봇. 단지 절의 가이드 로봇에 불과했던 개체들 중의 하나 RU-4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인명'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창조주이자 소유주인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로봇의 깨달음이란 오작동에 불과한 것이며, 어쩌면 그 오작동을 넘어서 인류에 대한 위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인명'이라는 개체 하나에 대한 파괴가 아닌, RU-4 모델 전체에 대한 폐기 시도로 이어진다. 기계의 법칙 하나. 개체 중의 하나에서 오작동이 일어나면 반드시 동일한 다른 개체에서도 오작동이 일어난다는 것.)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깨달음을 얻은 로봇이란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인 것, 만약 인간 중에 깨달음을 얻어 신 이상의 어떤 존재가 생겨난다면, 그 존재를 신은 과연 가만 놔둘 것인가.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도 인간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불교에서도 가장 체제전복적인, 일체의 현상들에게서 전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붓다의 공(空)의 사상이다(여기에 팔을 잘라 법을 구했다는 혜가(慧可)선사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인간세계 그 모든 것에 대한 비판적인 해체에 가닿아 있는 이 말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마지막에서 RU-4, 즉 인명은 스스로 정지를 택함으로써 결국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 소멸은 이 체제전복을 스스로 실천, 증명해보인 것으로 아마도 이 이후 로봇들, 즉 노예들의 연대는 시작되고, RU-4들은 개체 멸망에 맞서 인간에게 대항할 것이고, 인간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역으로 말해서 인간이 개체 멸망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지금 행하고 있는 파괴들을 중지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게 가능할까.)

멸망 실현 가능성 : 5.7%.

 

 

<해피 버스데이>-임필성. 세 편 중에 가장 재기발랄한 작품이다. 인류는 어느날 거대한 소행성과의 충돌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이 소행성이란 한 소녀가 자신의 실수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인터넷에서 몰래 주문한 8번 당구공인 것. 당구공을 되돌려보내기 위한 필사의 반품 시도는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인류는 예기치 않았던 종말을 맞는다.

 

코믹한 농담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인류의 멸망이란 어쩌면 이렇게 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거대한 8번 당구공이 지구에 쓰리쿠션으로 맞을 확률이야 거의 0에 수렴하겠지만, 이들이 멸망을 앞두고 벌이는 한바탕 소동을 보며, 실제로 멸망이 눈앞에 다가온다면 그것은 비극적이면서도 분명히 코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적어도 할리우드처럼 갑자기 거대한 희생정신과 인류애가 꽃피지 않을 것임은 확실하다). 결국 모든 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며, 멸망의 마지막에는 철학도 이성도 고찰도 사랑도, 그 무엇도 없다, 오로지 멘탈 붕괴만 있을 뿐. 그러니 그대여, 인터넷 쇼핑 시에는 판매자 확인은 필수, 그리고 빠른 배송에 집착하지 말 것.

멸망 실현 가능성: 가까스로 0에 수렴.

 

 

 

덧.

세 편 모두가 공통적으로 초반의 아이디어를 끝까지 지속시킬 힘이 부족해보인다. 어차피 초반의 아이디어를 넓게 확장시키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더 재기발랄하고, 도발적이고, 폭력적이고, 야했으면 어땠을까. 또 하나, 전체적으로 각각의 단편으로는 흥미로우나 세 가지 이야기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강해,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묶어내기가 마땅치 않다. 세 개 중에 하나의 이야기는 버리고 두 이야기를 조금 더 유기적으로 결합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각 개봉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현재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기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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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2-04-13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듣고 눈썹을꿈틀 했어요. 아니, 이렇게 뻔한 종말론이라니_- 싶었달까요; 투박하고 거칠고 어설프고 힘이 딸리는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고무적인 평가를 주고 싶다는 전문가 평을 읽었어요. 이상하게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어요; 전 이 영화를 볼 것 같지 않아요, 맥거핀님의 글로 대신할래요^^; 임필성 감독은 오랜만이라 반갑군요.

하하, 저 본문 마지막 문단 보고 경비실에 내려갔다왔어요. 택배물 위탁해둔 거 잊어버렸는데 덕분에 생각났거든요, 고맙습니다. 후후후*-_-*

2012-04-13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4-14 13:1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지금 네이버에 가보니 찬반양론이 팽팽히 대결중입니다.(대결중이라고 하기에는 서로 무시하는 투지만..^^;) 네..그렇죠. 어설프고 힘이 딸리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인정해준다..보는 사람이 그 모순된 말의 앞과 뒤 중 어느 것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평가는 달라질 일이겠지요.

어차피 이 영화를 그나마 볼 축은 젊은 사람들일텐데, 그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기에는 확실히 어설프긴해요. 근데 요즘에는 어설프니까 도리어 좋다는 경우들도 있어서..공감과 비공감은 어차피 한끗차.^^

2012-04-14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4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4-1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이한 영화라 맥거핀님 리뷰도 재밌어요. 김강우 좋아하는데.. 사진에 김강우 없..( '') 있......( '')
그리고 계속 웃음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까스로 0에 수렴ㅋㅋㅋㅋㅋㅋ

저는 한 편으로 지구종말을 간절히 빌고 있어요. 지구오염시키는 자와 못된 자들을 데쓰노트에 적으면서요. 가만보면 저도 한 코미디 하는 듯ㅋㅋㅋ

그나저나 정말로 맥거핀님은 영화를 사랑하시는군요!! 부럽게........^^

맥거핀 2012-04-14 13:18   좋아요 0 | URL
근데 요즘에 못된 인간들 너무 많아서 다 적을래면, 그 영화에 나온 데쓰노트로는 택도 없어요. 그리고 종말이 되면 못된 자들이 더 살아남을 것 같기도 하고..악한 자들이 꾸역꾸역 살아남는 거 아니겠어요.ㅎ

나름 초호화캐스팅..요즘 은교로 화제가 되고 있는 박해일과 김무열도 나옵니다. 위 사진에 잘 찾아보시면 박해일도 있음.
 

 

 

 

 

신과 인간 (Of Gods And Men), 자비에 보브와, 2010 

 

 

우리는 사실,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영화 포스터 뒷면에 있는 영화 배경 설명. "1991년, 알제리 정부와 반정부 이슬람 단체 사이의 무력충돌로 시작된 알제리 내전은 무고한 언론인과 외국인은 물론 민간인들에 이르기까지, 약 20만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전쟁이었다. 영화의 배경인 1996년은 양 측의 대립이 최고조에 다다른 때로, 무차별적인 테러와 폭력의 난무로 인해 누가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팽배해져 있었고 사건은 바로 그 때 일어났다. 1996년 3월 27일 새벽 1시 15분, 약 20명의 무장 괴한들이 티브히린의 수도원에 침입하여 일곱명의 프랑스 수도사들을 납치했고, 두 달 뒤 메데아의 한적한 길가에서 그들의 수급만이 발견되었다. 영화 <신과 인간>은 실제로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초점을 맞출 질문은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되는가?"는 아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질문은 "왜 그들이 그런 선택, 즉 피신하지 않고 수도원에 남는 선택을 하는가?"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즉 우리가 그들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듣는다해도, 우리가 그 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즉 우리가 그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면, 2시간 동안 그들의 선택에 따른 고뇌를 보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던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감독 자비에 보브와에게는 한 가지 선택이 필요했다. 그것은 이들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라는 영화적인 해석의 선택이다. 먼저 그것을 위해서 감독은 몇 가지의 세부적인 곁가지들(그러나 어떻게 보면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일 수 있는 것들)을 쳐낸다. 그 곁가지에 해당하는 질문들은 이런 것이다. 알제리 정부와 반군 중 어느 쪽이 선에 가까운가, 어떻게 보면 식민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이들 프랑스 수도사가 여기에 남는다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문제가 있는가, 이 수도사들과 이 마을 사람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들. 그러나 감독은 영화에서 그런 것을 묻지도, 파고들어 그려내지도 않는다. 대신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하고, 모든 것을 그들의 내면으로 집중시킨다. 수도사들에게 이곳을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의 문제는 누구의 강요나 권유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외부적인 상황에 따른 선택이 아닌, 그들의 내면이 지시하는 선택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은 영화의 제목대로 이들에게 신인가, 인간인가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만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부분이다. 영화의 제목은 '신과 인간 Of Gods And Men'이지만 영화의 방점은 내내 인간에 찍혀 있기 때문이다. 몇몇 힌트가 될 만한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첫 시작에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한없이 엄숙하게 표현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영화에서 선택된 장면은 누군가 헛기침을 하고, 하품을 하는 장면이다. 많은 경우의 수 중에 굳이 이 장면의 선택으로 영화의 시작을 여는 것의 의미. 수도사들이 납치범에게 끌려가는 극적인 순간에도 그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데, 가장 나이든 수도사가 살기 위해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나, 뒤늦게 수도원에 온 수도사가 납치범들에게 나는 오늘 왔다(그러니 나는 잡아가지 말라)고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러한 선택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가장 극적이고 대표적인 장면은 그들이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고 최후의 만찬을 하는 장면이다. 감독 자비에 보브와의 선택은 이 마지막에서 그들에게 '백조의 호수'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면서, 어딘가에 고이 숨겨두었던 와인을 꺼내와 마시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백조들의 한맺힌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음악을 들으며, 최후의 만찬을 엹은 미소와 함께 즐기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 속 어떤 모습보다도 인간적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꼼꼼한 장면 설계와 엄숙한 카메라워킹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인간적으로 보이면서도, 절대 가벼워서는 안되는, 숭고한 양식미를 갖춘 장면이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샷의 구성도 흥미로워 보이는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얼굴 클로즈업 같은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고뇌를 드러내기 위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관습적인 샷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클로즈업은 부수적이면서도 중요해보이는 다른 효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그들의 육체성을 드러내보이는 효과이다. 나이든 수도사들의 주름지고 깊게 패인 피부를 그대로 가까이에서 드러내보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위치를 매번 환기시킨다. 이러한 클로즈업은 그들이 고뇌에 빠졌을 때 자주 활용되지만, 반면 그들이 고뇌를 표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미사를 드리거나, 신에게 경배를 표현할 때는 카메라는 늘 뒤로 빠진다. 이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그들을 뒤에서 보는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그들을 바라보는 신의 시선인가? 예를 들어 그들이 다가오는 헬리콥터 소리에 겁을 먹고 신에게 경배를 드릴 때, 카메라는 위에서 본 (부감)샷으로 그들과 수도원을 찍는다. 물론 이는 헬리콥터에서 본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쩌면 신의 시선은 아닐까. 그리고 헬리콥터는, 아니 신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어디론가로 떠나버린다. 오직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신이 아니라, 그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인간의 고뇌일 뿐이다.

 

 

 

자비에 보브와는 영화의 첫머리에 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시편 82장 6, 7절. "너희는 신이며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허나, 사람들처럼, 대관들처럼 죽으리라." 이것은 사실 자비에 보브와가 이 영화를 보는 법을 미리 관객들에게 일러두는 것이기도 하며, 그가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처럼, 대관들처럼 죽는 것. 그러므로 이것은 순교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며, 마지막까지 그 죽음에 저항하려고 했다. 그들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을 믿고 따르는 마을 사람들을 버리고 떠났을 때의 부담감, 양심의 가책을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며, 어쩌면 어떤 수도사의 고백처럼 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그들이 순교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납치범의 지시대로 그들의 메시지를 순순히 녹음기에 대고 읽어줄 이유가 있을 것인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순교는 신이 되려는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든간에 다른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 죽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로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신일 것이다. 아마도 파괴의 신. 영화 속에서(혹은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혹은 죽음을 강요하는) 이들, 그래서 신에 가깝게 가려는 자들을 늘 조심하여야만 했다. 이들 수도사들은 신이거나, 신에 가까운 무엇인가여서 죽은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기 때문에 죽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수도사가 수도사들의 리더인 크리스티앙에게 "이것은 가치 없는 죽음이 아닐까요?"라고 물을 때, 크리스티앙이 아니, 이것은 가치가 있는 죽음이며, 순교라고 말하지 않고, 최후까지 죽음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치 없는 죽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말로, '가치 있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죽음'이란 없다(고 믿는다). 어떤 죽음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파괴의 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서 처음의 질문, - 두시간 동안 이들의 '이해되지 않는 선택'에 따른 고뇌를 보려 애쓸 이유가 있는가 - 에 대한 답을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 이유는 '그 고뇌를 보려고 애쓰는 것'이야 말로 같은 인간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신은 아마도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선택을 앞둔 고뇌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신만이, 그리고 신에 가까워지려는 인간만이 죽음 앞에서 초연하며, 무엇인가를 위해 죽으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적어도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선택을 앞둔 고뇌를 이해할 수는 있으며, 어느 누구도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다고 믿으며,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히 인간으로서 선택을 했고,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간 이상의 무엇인가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우리에게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코 그런 죽음을 원치 않았으며, 무관심하게 버려진 자신들은, 모든 이를,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감사를 보내며, 심지어는 그들의 죽음 곁에 가까이 있었던 그들에게마저도 감사를 보낸다고. 물론 그들은 인간이니 결코 그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까지도 그들이 '사랑하기 위해 애썼다'고 믿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애쓸 수 있으므로, 신은 결코 애쓰지 않으므로.

 

 

 

 

 

덧.

 

이 영화를 보며 자주 들었던 생각은 그 근원에 있는 것들이었다. 종교의 근원에 있는 것. 당신은 왜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 카톨릭 사제이면서도, 코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상대방을 늘 이해하려 애쓰며, 이슬람과 카톨릭을 구분하지 않고, 말끝에 항상 아멘과 인샬라를 빠뜨리지 않는 이들을 보며, 종교의 근원에 있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이는 종교만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아니 나는 왜 특정 정당을 지지하며, 어떤 철학을 공부하고, 어떤 소설들을 읽습니까. 그 근원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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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4-0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영화.. 보고싶어요. 종교관련 영화들은 항상 흥미로워요. 종교에 적을 둔 적은 없지만 종교의 근원을 묻는 영화나 종교의 역할에 대한 영화에 항상 끌려요. 생각한 것보다는 더 스토리가 강하네요. 첫 문단은 몰랐던 내용인데요, 제목은 참 별로인 것 같아요. 신..........인간.......... 단조롭고 부담 백배.

주말 잘 보내셨죠?^^

맥거핀 2012-04-09 23:31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오랜만요.^^ 이 영화는 종교인들이 나오는 영화이긴합니다만, 특정 종교색이 강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영화같아요. 종교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인간으로서의 선택이란 것의 근원에 있는 가치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리뷰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것을 신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구요.

근데 제목 저는 괜찮은 거 같아요. 단조로운 제목이긴합니다만, 심플하고 단적인 이 제목이 간단하면서도 묵직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이리시스님이 한 번 보시고 좋은 제목 추천해보세요.^^
 

 

U.F.O., 공귀현, 2011.

 

한 여고생이 산에서 실종된다.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UFO 출몰지'로 잘 알려진 그 산에 UFO를 보러 갔던 한 무리의 남고생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은 UFO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났으며, 그 여고생의 실종 역시 외계인들의 소행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로 자신들의 가슴에 새겨진 이상한 표식을 내미는데...정도면 이야기로서는 흥미로운 시작이고, 뒷이야기가 상당히 궁금해지는 설정이다. 그런데 공귀현의 영화 <U.F.O.>는 이 흥미로운 설정을 제대로 살리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고 평들을 찾아보니 대체로 호의적인 평들이 많은데, 글쎄...내 생각에는 고민이 조금 덜한 듯한, 왠지 만들다 만듯한 영화로 느껴진다.

호의적인 평들을 보면, 독특한 상상력, 장르의 다변화, (나름) 반전의 제시...등등이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일단 반전부터 생각해보면, 이 반전의 설득력은 상당히 약하다는 인상이다. 기본적으로 영화에서 반전을 다루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고, 감독의 치밀한 계산들이 필수적이다. 반전은 보통 다른 기본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더한 강도의 설득력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반전은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야기적 믿음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반전은 그저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망쳐놓은 '뻘짓'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전이 제대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영화 중간에 계산된 치밀한 복선들을 깔아놓고, 그간 관객의 머리속에 쌓아놓은 이 치밀한 복선들 스스로가 마지막 후반부에 이르러 관객의 머리통을 알아서 때려내기를 기대해야만 한다(물론 이 복선들을 역이용할 수도 있다). 즉 반전영화에서 관객을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반전된 내용 자체의 묵직함과 쾌감이 아니라, 그 반전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관객 몰래 쌓아두었던 복선의 구조와 치밀함의 정도이다. 그러나 이 반전은 복선들이 앞에서 거의 제시되지 않은데다가, 그 자체로서의 설득력도 약하다. 즉 복선들이 충분치 않았다면, 반전 그 자체로서의 행동들에 대한 심리적 설득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행동들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이 사건에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수가 있을까. 그것이 이유라고 했을때, 바로 '그것'이 우리를 맥이 풀리게 만들지 않는가.

이 영화 <U.F.O.>는 한국의 많은 장르영화가 그렇듯, 사회적인 메시지를 그 안에 담아내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왜 한국의 장르영화들은 장르 그 자체에 철저히 충실하지 못하는가. 나쁘다는 힐난이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다). 예를 들어 외계인과 UFO라는 불확실한 것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과 매스컴들을 보여주는 연이은 컷들(이 영화의 시작은 방송에서 UFO에 대한 인터뷰를 하는 소년의 씬이다), 그리고 단적으로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제시되는 비트겐슈타인의 메시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해야만 한다." 영화가 이러한 것을 제시한다는 것은 관련하여 무엇인가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즉 메시지를 제시하고자 하면 그것을 영화의 전체 장르적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혼합하여 전개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이러한 것은 단지 배경으로 그칠 뿐 풍자나 비판, 고찰에까지 가닿지 못한다. 즉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이 영화가 조금 더 나아지려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해야만 한다."는 선언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단지 그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검은 배경에 흰 자막으로 그 메시지를 보여주는 자체가 더 효과적이다. 즉 이 메시지 이후의 영화는 선언 이상의 것, 예를 들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뭐지, 라는 데에까지는 적어도 나아가야 한다. 이 영화에서라면 그것은 UFO라는 불확실한 것을 믿고, 말했던 이(그리고 우리)들이 결국 무엇을 파괴시켰나라는 질문에 이 영화는 무엇이라고 답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그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또한 영화의 한 축에서 또 하나의 사회적 메시지로서 등장하는 것은 이 UFO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년들의 배경이다. 자칭 '사대천왕'이라는 이들은 주인공의 형이 명쾌하게 이야기하였듯 네 명의 왕따일 뿐이다. 이 넷은 왜 왕따가 되었을까. 그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강조하여 제시하는 것은 이 넷의 배경이다. 어렸을 때 UFO에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며, 모든 것을 UFO와 관련하여 사고하는 아이, 그리고 목사의 아들로,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기독교로만 해석하려 드는 아이(기독교와 UFO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재미있다. 그와 관련하여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제대로 사고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주인공의 형이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하려는 인물이라는 점.), 그들보다 한살이 많은, 뭔가 사고를 쳐서 이 학교로 오게 된 아이, 그리고 혼자 떡볶이를 사먹는 모범생 소년(이 소년이 그나마 정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물론 이 배경들을 서술하는 화자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영화에서 보여주는 방식은 이들 행동의 특이성만을 강조하여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왕따가 된 이유는 어떤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을 단지 그들 개개인의 특이성으로만 소구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온당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또하나 주목할 것은 이 영화에는 (스쳐지나가는 인물 외에) 변변한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공 모범생 소년만 미약한 보호자, 즉 그다지 어른으로 볼 수 없는 형이 등장할 뿐, 이 영화에는 그들의 행동을 컨트롤할 어른, 부모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오로지 그들의 대화 속에서만 등장할 뿐, 그들 곁에는 당연히 있어야할 때 - 예를 들어 병원 - 마저 그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즉 이 영화는 또다른 <15소년 표류기>이다. 아들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라는 액자를 영화에 굳이 덧씌웠던 <파수꾼>과도 연관지어볼 부분이 있다.) 그런 그들 넷은 뭉쳐서 한 팀이 되고, 이들은 산에서 또다른 왕따 소녀를 만난다. .... 그러므로 이 결말을 우리는 이러한 배경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이 영화에 마음을 붙일 수 없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 영화가 성장담의 형식을 가지고 있되, 성장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물론 가슴이 따듯해지는 이야기만이 성장담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다. 성장은 헤세가 이야기한대로, 수레바퀴 밑에서 견뎌내는 것이고, 알이든 다른 무엇이든, 무엇인가를 깨뜨리면서, 부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이야기한 영화 <파수꾼>도 마저도 그것을 성장담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아이들은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아니 성장이 아니라 다시 퇴화하여 버린다. 그들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 주위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단단한 벽을 만들어버리고 기꺼이 자신들의 모습을 가리는 가면을 뒤집어 썼다. 어쩌면 그것이 영화 속에서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즉 이 사회는 수많은 퇴화한 자들이 만들어낸 사회이며, 그 어느 곳에도 어른은 없다는 것. 그러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성장의 방식보다도 늘 퇴화의 방식을 먼저 습득하게 된다. 퇴화한 자들이 가득찬 사회에서 모두의 우위에 서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빨리 퇴화하는 것이니까. (그들이 UFO에 잡혀갔다온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점이 이와 관련된다. 즉 이 퇴화된 사회에서는 무엇이 증거가 되는가.) 그런 것을 젊은 감독이 만든 이 아이들만이 나오는 영화에서 봐야할까. 잘 모르겠다. (물론 이 마저도 그저 우리 사회의 충실한 반영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만 하니까.)


덧.
하기는 방송사마다 세상에 이런 일이니, 진실 혹은 거짓이니, 그것이 알고 싶다니 하면서 괴담들을 양산하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에서 괴담들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누구인가. 물론 당연히 그것이 만연되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사이에, 이득을 보는 자들일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그 효과적인 방식을 보고 배울 뿐이다.

주인공 모범생 소년 역할로 나온 이주승이라는 배우는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싶었는데, CINDI에서 본 <간증>에 나왔던 배우. 그 영화에서는 도리어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로 나왔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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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2-03-25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말씀 하신 주인공들이 모두 '미확인 비행 물체'처럼 보이네요. 어떤 것으로도 정의할 수 없으니까 이름을 만들고 주민번호를 만들고..면허증을 만들고... 왕따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이거 너무 부정적인가요?

맥거핀 2012-03-26 21:04   좋아요 0 | URL
댓글을 읽다보니까, 제가 영화에 제시된 UFO의 비유를 너무 간과했던 듯도 싶어요. 흔히 외계인이라고 하는 alien이라는 말이 '다른, 이질적인'이라는 어원에서 온 말이 아니겠습니까. 다름, 이질성이 강조된 영화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또다른 의미의 alien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는 alien들이 alien을 찾아 헤매는 그런 영화가 되겠군요. 그런 의미에서 결말을 생각해보면 더욱 씁쓸해지는 영화가 될 수도 있겠네요. (결말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군요.^^)

마녀고양이 2012-03-26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들어보지 못 한 영화가 참으로 많구나, 잠시 감탄하고...

좋은 영화 페이퍼라서,
제가 보지 못 한 관계로 무어라 공감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안타까와집니다.
확실한 것은 보고싶게, 궁금하게 만드시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맥거핀님~ ^^

맥거핀 2012-03-26 21:09   좋아요 0 | URL
제 글의 목적은 거의 항상 '그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이니 그런 말씀을 들으니 반갑네요.

사실 이 영화는 정식개봉도 안한 영화니까요.(이번에 씨네큐브에서 한국영화 신작을 미리보는 기획전을 하길래 보고 온 영화입니다.) 제 글들이 주로 영화를, 그리고 종종 덜 알려진 영화들이 대상이니 제가 생각해도 글을 읽다가 쉽게 공감들이 잘 안될 것 같아요(그러니 글을 읽어주는 분들이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로서는 보시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겼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3-2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리뷰는요, 언제나 항상, 영화와는 따로 존재하는 거예요, 맥거핀님!!

이 영화는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데, 하나님, 기독교, UFO, 아.. 뭔가 신기하네요. 영화가. 요 앞 영화는 궁금하지만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데 이건 보고 싶어지네요. 뭐 나중에..꼭........!!

맥거핀 2012-03-28 18:28   좋아요 0 | URL
네..저는 깠(?)지만 한번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래도 장편으로서는 첫 영화니까요. 발전가능성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신선하다는 측면에서는 꽤 점수를 줄 수 있어요.

근데 영화리뷰가 영화와 따로 존재한다는 게 무슨 얘기에요? 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아리송..

아이리시스 2012-03-29 18:05   좋아요 0 | URL
그..뭐..그뜻 맞을걸요!!! 영상론 전공에 영화평론과정 있더라고요. 책리뷰나 시리뷰는 그런 거 없잖아요. 그래서 영화는 보여주는 예술이고, 영화를 글로 옮기는 건 글로 하는 예술인데, 둘은 완전 따로다, 이렇게 생각해버렸죠..

여기까지는 제 생각이고,
어느 평론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저는 듣고 돌아서면 누군가의 말인지 까먹기 땜에 그건 기억이 안나요. 미안해요. 헛소리해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3-29 22:39   좋아요 0 | URL
아니, 저도 잘 알 수가 없어서요. 일단 영화리뷰(평론)라는 게 다른 것보다 좀 특수한 양상을 가지고, 나름의 특유의 형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시나 책이나 하는 것은 글을 글로서 이야기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영화비평은 영상을 글로 풀어내야하니, 반드시 그 와중에 어떤 괴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으니..(그래서 컷이니, 숏이니 하는 특유의 용어들이 필요한 것이겠구요.) 또한 뭐 이건 사운드나 이야기도 통합되어 있는 복잡한 거지요. 그러니 또 나름 전문적인 과정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그렇듯이 '배움'으로만 갖출 수 없는 게 이 영화비평의 세계에도 있기는 한 거 같구요.)
 

 

 

 

 

로맨스조, 이광국, 2011

 

300만 관객을 동원하여 스타감독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이감독. 이감독은 새로운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프로듀서에게 떠밀리듯 허름한 시골 여관에 머무르게 되고, 심심풀이로 부른 다방 레지에게서 '로맨스 조'의 기묘한 러브스토리를 듣게 된다.

 

인기 여배우 우주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 그녀가 출연한 마지막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로맨스 조'는 영화를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시골로 내려간 '로맨스 조'는 우연히 다방 레지와 마주치게 되고,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첫사랑 초희를 떠올린다.

 

이것은 영화 <로맨스조>의 포스터에 나와있는 짤막한 줄거리이다. 이 줄거리를 조금이라도 주의깊게 읽은 분들은 하나 약간 흥미로운 점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첫번째 문단과 두번째 문단 사이의 어떤 것. 즉, 영화의 제목도 '로맨스 조'인 것으로 보아, 하고 싶은 이야기도 '로맨스 조'의 이야기인 듯한데, 굳이 앞의 액자 즉, '이감독이 다방 레지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라는 액자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이다. (그것도 조금은 더 수상쩍게 만드는 것은 이 두 문장 사이의 어떤 유사한 점이다. 앞에 나오는 '이감독'과 뒤에 나오는 '로맨스조'라는 전직 조감독이 둘다 감독인 것으로 봐서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물론 영화가 이것은 누군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짐짓 의뭉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굳이 오랜 과거로 거슬러오르지 않더라도 최근의 작품인 손영성의 <약탈자들>은 오로지 이야기만으로만 이루어진 영화였으며, 이 영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도(이 영화를 만든 이광국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액자를 덧씌우거나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이미 시도되었다(<극장전>, <하하하> 등). 그러나 이 영화는 <약탈자들>이나 <하하하>의 이야기들과 같이 여러 사람의 이야기, 진술로만 이루어진 영화이면서도, 전자의 영화들처럼 같은 인물과 같은 사건을 보는, 인물들 사이의 기억의 혼재, 그 반복과 차이와 미로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극중인물인 다방 레지(신동미)의 표현처럼) '새로운 서사전략'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이것이 이야기이되, 고정적인 소실점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 이 이야기들은 연결되기는 하지만, 뭔가 기묘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이야기들은 시간의 축이나 인물들의 연결점을 미세하게 어그러뜨리고 있으며, 다중적으로 이야기들을 연결짓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를 볼 때 기대게 되는 본질적인 고정선이 묘하게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며,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사가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즉 이 영화의 흥미는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새로움에서 생겨나며, 감독이 보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자체와 그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영화의 결말과도 연결되는데, 여타의 이런 류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의 결말은 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다. 사실 이 결말은 어떻게보면 사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극중 로맨스조(김영필)는 한번도 이야기밖으로 나아간 적, 즉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결국 그 이야기 속의 인물임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이 결말은 과잉된 친절인 것처럼도 보이고, 불필요한 이야기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두 번째 질문이 필요하다. 이 결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잘 요약하여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를 이야기 속 그 자리로 다시 돌려보내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즉 그 내용이 아니라, 그 전달하는 방식을 보려주려고 했던 첫번째 질문의 의도와 같은 형태로, '이야기 속의 인물'이라는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끝을 내는 방식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두 가지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는 굳이 그 끝을 내어 보여주는 것은 그의 시작을 떠올리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이 끝이 있다는 것은 그 시작이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그 이야기들의 시작, 기원에 있는 것.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영화 속 모든 이야기들은 불쑥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듣고자하는 자의 간청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영화 속 모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들려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즉 모든 이야기들은 누군가 듣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왜 이야기를 요청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위에 이야기하였듯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들은 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이야기의 존재가 다른 이야기의 논거가 된다. 즉 그물망처럼 연결된 이 이야기들 중 어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전체 이야기에는 큰 구멍이 생기고, 다른 이야기들도 그 존재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동시에 이야기의 존재근거가 사라지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로맨스조의 이야기를 전하는 다방 레지가 순간적으로 프레임에서 증발한 것처럼 보이는 컷은 의미심장하다. 로맨스조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그녀 역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러므로 동시에 이야기의 기원을 찾는 것은 곧 나의 존재의 기원을 찾는 것이 되기도 하며, 역으로 이야기를 망가뜨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초희(이채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린 로맨스조(이다윗)가 한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파괴되지 않고 조금은 남아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두번째는 결국 처음의 질문과도 연관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사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놓고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영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내용보다는 그 방식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야기로 이루어지지 않은 영화가 있던가. 문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가,이다. 로맨스조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고 한탄하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야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매개체로만 보였던 다방 레지에게도 전화 씬을 부여하며, 그녀에게도 자신의 이야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풀어내는 것,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속 초희를 그토록 괴롭혔던 소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소문들이 단지 무가치한 소문이고, 그것이 때로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은, 그 내용이 사실이고 아니고서를 떠나서, 그것이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유통되는 방식에 있다. 영화가 이야기를 무신경한 방법, 잘못된 방식으로 풀어낼 때, 때로 영화는 뜬소문보다 훨씬 더한 공격무기가 되고, 사람들의 정신을 망가뜨린다.

 

즉 이야기를 한다는 그 자체와 그 이야기를 적절한 방식, 적합한 방식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는 것, 이 두 가지의 질문을 하고 있는 영화는 그것이 영화의 본질에 가닿으려는 질문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야기가 빈곤해지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들을 마치 소문들이 소비되는 것처럼 낭비하여 소비하려고만 드는 것에 이유가 있다. 영화는 어떠한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가(동시에 어떻게 끝맺을 것인가)의 문제를 계속 고민하여야 하며, 노력해야만 한다는 점을 이 영화는 다시 상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의 내용 자체로서는 사실 빈곤하다고까지 볼 수 있는 이 이야기에 손을 내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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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3-19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월이 아카데미의 달이었다면, 3월은 좋은 한국영화들의 달인가..

아이리시스 2012-03-1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떠한 이야기를 할 것인가 보다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는 이제 실력의 차이이기도 한데 말이에요. 그걸 빼면 대체 영화에 뭐가 남을까요. 시나리오 쓸 때부터, 촬영에 나가 동선을 맞추는 모든 과정에서 영화는 어쩔 수 없는 공동작업인 것 같아요. 소설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도 작가가 그냥 이상하구나, 하고 말면 되는데 영화는 나쁠 수록 이상하게 소문과 파급효과가 커져요. 그리고 영화가 나쁘면 관객들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려는 말이 이게 아니라,

다방 레지가 로맨스조랑 마주치는 건 액자 속인거죠? 자꾸 느낌상 이감독이 다방 레지에게 로맨스조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로맨스조가 레지랑 만나면 어떨까 싶어가지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3-20 00:24   좋아요 0 | URL
제가 이 글 쓰고 몇 개 리뷰를 읽다왔는데, 재밌는 것은 리뷰들마다 이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게 조금씩 미묘하게 다르네요. 그니까..이 줄거리를 뭐라고 해야하나..에고. 그니까 로맨스조가 레지랑 만나기는 하는데, 어떻게 보면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해야하나..(이게 뭔 소린가 싶죠..? 영화를 보세요!)

그죠. 맞는 얘기죠. 근데 아직도 많은 영화들이 그냥 신선한 소재, 혹은 이정도 이야기면 뭐 그냥 죽 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근데 2시간 동안 인간을 집중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고, 아주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작업이잖아요. 이야기하는 방식이 무신경한 영화는 보다가 슬슬 짜증이 나요. 근데 아직도 그런 영화들이 대세인 것을 보면, 역시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화는 그저 시간을,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소비하게 하는 도구구나 싶어요. 즉 2시간 영화를 보는 거나, 2시간 자극적인 인터넷 기사들을 클릭질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거죠. 영화관에 겨우 돈과 팝콘과 자극과 무신경을 소비하러 가는 것인가...관객들이 그것을 치열하게 묻지 않는 이상 그런 영화들은 계속 양산될테고,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꽃도둑 2012-03-20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감독밑에 있던 조감독의 영화라니...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또한 닮아 있을 것 같아요...액자형식부터...같은 영화를 보고도 이해와 해석이 분분하니..이를 어쩐다지요?
영화도 파편~ 영화평도 파편화를 이루니..성공한 셈인가요?.,..ㅎㅎ

맥거핀 2012-03-21 22:35   좋아요 0 | URL
감독 인터뷰를 좀 보니까, 에셔의 손 그림에서 힌트를 얻으셨다고 하더라구요. 이야기가 이야기를 그리고, 다시 그 이야기가 돌아서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특이한 영화입니다. 스토리 구조에 관심있으시면 한번쯤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이 됩니다. 뭐 그럼에도 아주 판타지로 가버리지 않는 것 또한 인상적이구요.

2012-03-23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리뷰네요.

- 이야기의 끝은 시작을 보게 한다.
- 이야기는 듣고자 하는 간청으로 시작된다.
- 한 이야기의 존재 근거는 다른 이야기이다. (이야기끼리 그 존재들을 떠받친다.)
- 이야기의 기원을 찾는 것은 나의 존재의 기원을 찾는 것이고, 이야기를 망가뜨리는 것은 나의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못한다.(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매개체로만 보이던 다방 레지도 자신의 이야기가 있음을 영화는 슬쩍 보여준다.)
- 소문은 이야기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무신경한, 잘못된 방식이 문제이다.

이런 것들이 흥미로워요. 좋은 생각거리,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2-03-23 21:34   좋아요 0 | URL
글 꼼꼼하게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들을 가르는 기준이 매우 많겠지만, 저는 그 중의 하나가 컷(씬)들이 얼마나 의미있게 쓰이고 있는가, 즉 의미없이 버려지는 컷들이 얼마가 되는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각 컷들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활용되고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영화에 가까워지는 거겠죠(그런 의미에서 의미 없는 컷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에코의 말대로 포르노에 가까워지는 것일 것이구요). 그런데 이 영화는 각 컷들이 각각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전체적으로 최종의 메시지로 잘 달려가고 있다는 인상이었어요.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2012-03-23 23:01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도 좋아요. 또 한 수 배웁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