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봉준호, 2013

 

 

(<설국열차>, <괴물>, <마더>, <살인의 추억>의 내용과 결말이 일부분 들어 있습니다.)

 

 

 

1.

봉준호의 영화는 늘 다른 층위, 혹은 다른 범주의 이야기를 동시에 해왔다. 예를 들어 이 영화 <설국열차>는 설국열차의 엔진을 차지하려는 열차 스펙터클 서사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비유이자, 인류역사의 축소판이며, 다시 거대한 시스템과의 대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만,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은 각각의 다른 카테고리이지, 일종의 수준이나 단계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그러니 '층위'라는 말보다는 '범주'라는 말이 나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이것을 자꾸 어떤 정치로 읽는 사람들은 그 속도나 질주를 즐기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돌아가 결국은 꼬리와 머리를 만나게 할 것이니, 그것 또한 한편으로는 딱한 일이다. 아무튼 그래서 봉준호의 영화들은 각각의 범주 안에서 각각 즐길만한 거리들이 있었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보다 넓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봉준호의 영화들은 늘 시스템과 시스템에서 부서져 나온 개인들의 투쟁을 다룬다. 그 영화들은 항상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추적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여자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를 추적하고, <괴물>에서는 한강에서 태어난 거대한 괴물을 추적하며, <마더>에서는 아정이를 죽인 진짜 범인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핀트가 어긋난 결과물들이다. 연쇄살인마로 믿었던 남자는 연쇄살인마가 아니었고, 괴물의 퇴치에는 환호나 즐거움보다는 쓸쓸함이나 이상한 허무가 감돌며, 죄는 몇 바퀴를 돌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때 영화는 우리에게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준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에서 여자들을 죽인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으슥한 산길과 추수가 끝난 논바닥, 혹은 학교 뒤편의 야산, 하수구 속의 터널...여자들은 영화 속에서 결코 보이지 않는 범인의 손길에 의해 어디론가로 끌려들어가며, 다시는 그곳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어두운 심연은 여자들을 집어삼켰고, 이때 여자들은 특정의 누군가가 아니라, 마치 영화 속 어딘가에 도사리는 무엇인가에 의해 잡아먹힌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한국의) 80년대라는 폭압적인 괴물에 의해. 그러니까 <괴물>에서도 그 괴물은 80년대라는 괴물이 진화한(몸집을 키운) 2000년대의 괴물이며, 시스템의 마스코트이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 속에서 시스템이 내내 쫓는 것은 괴물이 아니라 강두(송강호)와 그의 가족이다. 같은 편을 무엇하여 쫓겠는가. 그리고 다시 <마더>에서 여자아이는 희생당하고, 시체는 마을이 온통 내려다보이는 옥상에 화려하게 전시된다. 왜 이 때 도진(원빈)이는 시체를 옥상까지 끌어올렸을까. 아니 굳이 왜 마을의 가장 높은 곳까지 끌고 올라가 마을을 굽어보게 했을까.

 

 

2.

그러므로 <설국열차>는 사실 어떻게 보면 너무 쉬운 떡밥이고, 너무 물린 양갱이다. 우리는 그 양갱을 하도 씹어먹어서 그 말랑말랑한 갈색의 직육면체만 들여다보아도 그 맛과 먹고난 후의 느낌마저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설국열차라는 폐쇄된 시스템 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꼬리칸에서 머리칸까지 갈 테지만, 그 마지막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리 쉽게 내주지는 않을 터였다. 봉준호의 다른 영화들이 늘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달린 떡밥을 물고기가 외면할 수는 없는 법(아니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단백질블록이라도 안 먹을 수 없는 것). 어차피 떡밥을 먹고 죽을 운명이라면, 이왕이면 다양한 떡밥을 다양한 방식으로 먹고 죽는 것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먼저 첫번째 판본, 반복되는 아우슈비츠의 악몽. 영화의 문을 여는 것은 수용소의 풍경들이다. 좁은 공간안에 짐짝처럼 포개진 사람들과 제복을 입고 총을 맨 관리자들의 대비, 앉아번호로 하는 인원체크 점호와 식량배급과 바이올리니스트의 차출은 익숙한 광경들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 예술가들의 바이올린곡을 들으며,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제복을 입은 독일 장교들의 모습들이나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의 모습 위로 겹쳐지는 괴벨스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절멸의 위협에 맞서서 어떻게든 생존하는 것 말이다. 커티스의 고백도 여기에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극한의 생존의 위협에서 작동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두 번째는 윌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것을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그 한정된 자원마저 독점하는 소수의 집단에 대한 비유로서 말이다. 즉 지구라는 하나의 생태계에 대한 은유로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영화 초반부의 설정도 역시 그러한 것에서 시작된다. 인류는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CW-7이라는 물질을 살포하였지만, 그것이 도리어 지구의 빙하기를 초래했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재난의 시작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결국 자연도 조절할 수 있다는 인간의 탐욕 혹은 오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 번째 판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조절할 수 없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여기에서 윌포드의 인구조절 같은 것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은 다른 것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핵(혹은 비슷한 것으로서 원자력발전소)과 같은 것은 어떨까. CW-7의 살포로 빙하기가 도래했다는 것에서, 핵무기의 사용과 그로 인한 핵겨울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즉 CW란 'Clear Weapon'의 약자이고, 핵무기, 즉 Nu(New)Clear Weapon 이전의 보다 강력한 무기이다. 혹시 설국열차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 위에 가득 쌓인 눈더미가 핵전쟁이후의 가득 쌓인 핵먼지로 보이지 않았는지?

 

네 번째 판본은 많이 이야기된 것처럼 이를 인류역사의 하나의 축소모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기차칸들의 배열에 관한 문제인데, 처음 꼬리칸을 벗어난 인류가 먹을 수 있는 것이란, 고작 곤충들 정도이다. 곤충을 먹으며 한숨 돌린 인류는 암흑 속에서 자연과의 대결(복면을 쓴 자들은 물론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을 통해 (오만한 표현으로) 정복에 성공한다. 바로 불의 발견 및 사용을 통해서 말이다. 그 댓가로 인류는 바다와 산과 들에서 물고기, 야생동물, 식물과 같은 것들을 먹을 수 있게 되는데, 인류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더 많이 잡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과 더 많이 잡을 것을 기원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2차 전쟁, 그리고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전쟁이 이어진다. 그것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싸우는 대결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와 교육(문명)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이었고(총을 쏘는 여교사와 달걀을 나눠주는 수도승 분위기의 남자), 보다 발달된 무기(총)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많은 희생을 낳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각종 다양한 문화 - 수영장, 사우나, 미용실, 카페 - 를 습득하며 오늘날까지 생존해왔다.

 

 

3.

그런데 많이 이야기되는 이 마지막 판본으로 영화를 본다면 몇 가지 잔여물이 생긴다. 그 하나는 이 싸움은 이제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즉 2차 전쟁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보게 되는 것은 점점 타락해가는 인류이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환각(크로놀)에 취한 사람들. 엔진칸 앞에서 그들이 만나게 되는 것은 이 환각에 빠진 이들과의 마지막 전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마지막에서 그들과 대결하는 사람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아니라 역시 마찬가지로 크로놀에 취한 남궁민수(송강호)이라는 점이다. 즉 이 마지막의 싸움은 환각에 취한 자들의 대결이고, 이 설국열차를 끝장낼지도 모르는 싸움, 혹은 지구를 끝장낼지도 모르는 싸움은 이미 환각에 취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광기를 가진 자들의 손에 지구의 운명을 내맡겨야 하는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봉준호가 이를 혁명의 과정과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인류 역사의 과정이라고 본 이것은 영화의 표면적으로는 커티스의 엔진칸 확보를 위한 혁명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혁명의 완수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엔진칸으로 '직선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곧 혁명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 발전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나아감을 말하는 것일까.

 

물론 봉준호가 영리한 것은 그는 결국 이것을 혁명이 아니라, 반(反)혁명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즉 커티스가 엔진칸에서 만나게 되는 윌포드의 이야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커티스의 혁명은 다른 여타의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거대한 조절의 다른 이름이라는 바로 그 얘기. 즉 커티스 일행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환각들, 그리고 환각들이 벌이는 싸움에는 혁명의 결과물이 아니라 반혁명의 결과물들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커티스의 혁명이 '그것 자체로는' 결국 반혁명에 머물 수 밖에 없음을 윌포드의 입을 통해서 재확인 시켜준다.

 

 

4.

즉 이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지독한 처음으로의 반복. <설국열차>에서 커티스는 엔진칸 앞에서 느닷없이 과거의 기억, 그러니까 꼬리칸의 탄생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히고(이 커티스의 고백은 왜 영화의 이 시점에서, 그리고 바로 이 공간에서 흘러나오는가), 엔진칸을 열고 들어가 만나는 것은 윌포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윌포드의 이름을 가진 길리엄이기도 하다. 끝에서 끝으로 들어간 유일한 자, 커티스 앞에 놓여진 것은 꼬리칸이라는 끝이 아니라, 엔진칸이라는 또 하나의 끝이며, 그는 여기에서 다시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이야기적으로도 영화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그 설국열차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한다면 그가 갈 곳은 결국 되돌가는 것밖에는 없다. 엔진칸 다음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처음의 반복은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처음의 논 한가운데에 있는 어둡고 질척한 하수구,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 들어찬 그곳을 나이가 든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는 풀리지 않는 범인의 윤곽, 어떤 미스테리가 도사리고 있고, 형사는 조용히 스크린 밖을 응시하며 영화가 끝난다. <괴물>의 마지막은 언뜻 강두가 처음의 그곳에서 현서(고아성)가 대체된 다른 아이를 키우는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곳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그 컨테이너 박스는 어둡고 눈내리는 밤 한강 둔치에 홀로 남아 있다. 언제 그 검은 강에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야기는 하수구에서 시작하여 하수구로 끝나거나, 컨테이너 박스로 시작하여 컨테이너 박스로 끝난다. 즉 이야기들은 돌고 돈다. 돌고돌아 다시 처음의 위치에 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더>에서도 비슷한 양상이다. <마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은, 그리고 사실 봉준호의 영화를 통틀어서도 가장 이상한 장면 중의 하나는 처음 마더(김혜자)가 유치장에 있는 도진이를 찾아갔을 때 도진이가 넋이 나간 상태에서 중얼거리는 이상한 대사이다. 죄가 몇 바퀴를 돌아 자신에게로 온다는 그 말. 죄가 몇 바퀴를 돌아서 온다...그것은 사실 <마더>라는 영화, 혹은 봉준호의 이야기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말이다. 죄는 몇 바퀴를 돌아서 도진이에게 왔고, 마더는 필사적으로 그 고리를 다시 돌려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돌리려 했다. 그리고 춤을 춘다. 영화의 시작부에 있던 춤과 이제 고리를 필사적으로 돌린 후 돌린 자신을 잊으려 고속버스에서 마지막에 추는 춤. 그렇게 영화의 시작과 끝은 다시 만난다.

 

 

5.

봉준호의 영화에서 '죄'라는 놈은 그렇게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 헤맨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동네의 지체장애인, 가난하고 힘없는 사내, 손이 부드럽고 이질적인 타자를 맴돌다가 어두운 터널 안에서 미스테리로 남겨졌고, <괴물>에서는 강두의 가족이 표적이 되었으며, <마더>에서는 돌고 돌아, 엄마가 없는 아이에게로 갔다. 그리고 희생당하는 사람들 역시도 어떻게 보면 가장 약한 고리들이었다. <살인의 추억>의 가난한 동네의 여자들(살인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여자를 묘사하는 장면을 보라), <괴물>의 현서, <마더>의 아정이. 즉 시스템은 가장 약한 고리가 부서졌을 때 그 약한 고리를 또 하나의 약한 고리를 부서뜨려 메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열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달려야만 하는 기차의 부품(아마도 가장 약한 부품)이 부서졌을 때 그것을 메우는 것은 기차의 다른 의미에서의 가장 약한 고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을 부숴야 하는 이유가 된다.............라고 쉽게 쓰고 싶지만 과연 그럴까?

 

어쩌면 가장 무서운 점은 마지막 윌포드의 이야기들이 어쩌면 맞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 아닐까? 열차 안에서의 자원은 한정되었고, 한정된 자원으로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구 밀도를 줄이는 방법 밖에는 없다. 열차는 달려야만 하고, 그런 열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 밖에는 없다. 그것으로서 남은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다...그러한 것들은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논리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커티스는 거기에서 주춤거렸을 것이다. 그것은 커티스도 논리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이나 요행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다. 정확한 정보(단백질 블록안의 정보)와 치밀한 계획(문이 열리는 4초의 시간 계산)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런 커티스에게 윌포드의 그런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고, 그것은 길리엄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 나는 미안하지만 윌포드의 이야기에 좀 혹했다.)

 

그러나 논리가 있다면, 논리의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 혹은 논리로서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괴물>에서 강두 가족에게 괴물이라는 결코 맞서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시스템(정부마저 싸움을 거의 포기한)과 싸울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은 가족이라는 '불가해함'이다. <마더>에서 마더의 마지막 선택을 영화를 보는 우리가 결코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리로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끝까지 명철한 정신으로 고민한다고 해도 나올 수 있는 답이 아니다. 그리고 <설국열차>에서 거기에서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것 역시,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커티스가 그나마 그 지점에서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에서 결국 필요한 것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논리의 바깥에 있는 휴머니즘, 혹은 사랑이다. 사랑 없이는 혁명이 완수될 수 없다. (다시 자본주의의 끝으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공산주의가 이상한 결말을 내비친 것은 그것이 폭력으로 점철된 비논리적인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 도식적이고 논리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산주의가 '발전'이라는 말을 쓰게 된 순간, 그것은 이상한 결말의 단초를 내비치고 있었다.)

 

 

6.

그러므로 위에서 이야기한 우리가 내몰린 처지, 즉 환각을 가진 자들의 대결이란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도리어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논리를 벗어났을 때, 우리에게는 시스템을 벗어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각을 가진 남궁민수는 시스템을 기어코 열어제친다. 그러나 물론 환각만으로 시스템을 벗어날 수는 없다. 바로 가장 강력한 환각(크로놀의 집합체)에 인류 문명의 결정체(불)을 결합하여야만 시스템을 벗어날 길이 열린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봉준호의 영화답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열차 안에서 커티스와 그의 혁명군 일행이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끝을 보여줬다면, 두 아이는 다시 인류 역사의 시발점 앞에 섰다. 이것은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두 다 죽고나면 도대체 혁명인가, 아니면 반혁명인가는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너무나도 당연해 보여서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그러나 사실은 생각해보면 볼수록 조금 이상한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답을 찾고 싶다. 설국열차는 왜 달려야하는가. 그리고 달린다고 해도 왜 예카테리나 다리를 1년마다 만나야 하는가. 즉 왜 설국열차는 1년을 주기로 같은 궤도를 '반복'하며 달려야만 할까.

 

용케 운이 좋다고 해도 아마도 인류는 다시 무엇인가를 반복할 것이다.

 

 

 

덧.

쓸데없이 써보는 봉준호와 박찬욱의 차이. 박찬욱의 영화는 특히 최근작으로 가면 갈수록 어둡고 파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이상한 긍정의 기운을 내비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에, 봉준호의 영화들은 가면 갈수록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헤어나올 수 없는 음울한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반복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기어나올 수 있을까.

 

며칠 전에 우연히 임순례의 <남쪽으로 튀어>를 봤는데, 이거야말로 <설국열차>의 이야기구나, 간단한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하게 했구나 싶어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임순례의 입김이 조금 덜한 것 같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은 <설국열차>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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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23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두 스틸컷이 하나의 영화 안에서라니.

Mephistopheles 2013-08-23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미지의 빅브라더는 존재하며 가까히 도달했을 때 강제성을 띈 도돌이표를 한대 쳐 맞는 것이 봉준호 영화의 공통점인가 보군요..

(덧, 줏어 들은 이야기지만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가 감독의 임깁이 덜한 이유는 주연 배우의 지나친 간섭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요.)

맥거핀 2013-08-24 00:48   좋아요 0 | URL
댓글이 너무 재밌어요. 강제성을 띈 도돌이표를 한대 쳐맞는다라..(좋은 요약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봉준호 영화의 마지막들에서 대체로 망연해지죠. 우리는 이미 한바퀴를 돌아봤으니 말이죠. 그리고 앞으로 몇 바퀴를 더돌아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네..저도 김모 주연배우와의 불화설 같은 얘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물론 저도 사실인지는 모르구요. 아..그런데 엔딩크레딧의 시나리오 부분에 그 김모 배우님의 이름이 들어가 있기는 하더군요.


2013-08-23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4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3-08-24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전 봉준호가 '남쪽으로 튄 것'보다는 낫던데요. '남쪽'은 상상적 즐거움만 주지 성찰이 부족해보입니다. 갑자기 80년대 화염병이 나오는 신파는 그렇다구 쳐도요. 바틀비를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정작 문제는 그 바틀비적 즐거움 역시 재입찰 시켜야한다는 것이 요체로 보입니다.

논리 바깥을 '과잉'이라고 하는데, 그 과잉은 중요한 정치적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적이 사라진 자리, 즉 자본주의로서의 영원한 중지라는 현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은 그런 비-합리성, 과잉의 정치학 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또한 근대 기획으로서의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구멍을 내는 길이기도하구요. 결국 완벽한 합리성은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의 신화가 반복이 됩니다. 윌포드의 합리적 담화와 그 속에 내재될 수 밖에 없는 근원적 심연사이의 간극을 커티스가 본 것으로 이해합니다.

... 그러니까 국내 몇 대 없다는 마이바흐를 볼 때 그 뒤에 가려진 것들을 보면 엔진칸 아래의 뚜껑을 한번은 열어본 셈이지요. 꼭 열었다고 커티스처럼 반응하는 것은 아닐테고. 대개는 모른 척 다시 닫습니다.(이게 진짜 짜릿한 정치적 지점 아닐까 하는데요. 제가 영화를 만들었으면 그렇게 했을지도.ㅎㅎㅎ )

전 사랑이나 휴머니즘은 봉준호가 그 '과잉'의 대중적 형식으로 사용한 것으로 전이하여 이해합니다.맥거핀님의 말씀처럼, 봉준호는 진짜 소박한 휴머니즘으로 썼을 겁니다. 봉준호의 첫 장편 <플란더스의 개>에서도 배두나는 그런 소박함의 진정성으로 강아지를 구출하니까요.

인류가 설령 반복한다고 할 지라도, <지구를 지켜라>의 외계 왕자 백윤식처럼, 폭발시키지는 말아주세요. 반복을 허무주의로 받아드리지 않는게 제가 사는 길인지라.ㅎㅎ 회색빛 희망도 없는것 보다는 나을 테구, 반복은 차이를 만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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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25 15:29   좋아요 0 | URL
아..네 맞습니다. 반복은 분명히 차이를 만들지요. 봉준호가 반복을 만들기는 하지만, 마지막 놓여진 위치가 처음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에는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박두만 형사의 시선이 있고, <괴물>은 현서가 현서가 목숨을 걸고 살려낸 아이로 대체되었습니다. 즉 가족이 확장되었죠.

그리고 또하나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곳에 여전히 있는 것은 일종의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살인의 추억>의 나이든 형사는 일부러 그곳에 다시가고, <괴물>의 강두는 총을 옆에 두면서까지 여전히 한강변의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전히 그 지점을 바라보겠다는 시선은 남아있습니다. (반면 <마더>의 양상은 조금 다르죠.)

또한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비록 거대한 것에 희생당하는 희생자들일지라도, 그들은 그렇게 나약한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마더>에서 범인으로 결국 지목된 소년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마더에게 "울지마라"고 했었죠. <괴물>의 아이를 보호하는 현서나 <살인의 추억>의 형사와 대화하는 소녀도 그렇게 나약한 캐릭터만은 아니었습니다. <설국열차>에서 처음 커티스와 협상(?)을 벌이는 그 흑인소년은 또 어떻습니까.

합리성에 맞서는 작은 용기들이 여전히 봉준호의 영화들에는 남아있습니다. 모른 척 다시 닫지않고 기어코 그 뚜껑을 열어 맞서는 개인들이 그 영화 속에는 그래도 아직 조금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죠. 계산하면 답이 안나오는 싸움이죠.

남쪽으로 튀어에서 김윤석의 싸움도 결국은 계산해도 답이 안나오는 싸움 아닐까요. 물론 실제로는 바틀비적 즐거움의 끝에 남쪽의 미지의 섬이 없을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겠습니다만...하지만 사실 설국열차도 나가보기 전에는 정작 추운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7분이면 팔이 완전히 얼어버리는 곳이 당연히 무서운 혹한이 아니겠는가,라고 이 영화의 (메이슨 무리의 계산을 빌어) 대답한다면 그건 합리적인 설명에 스스로 투항하는 것이겠죠.

Shining 2013-08-2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말은 고작...... 맥거핀 님은 이런 글 어떻게 쓰시는거죠? 라니_- 이 빈곤함이라니.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얼마나 많은 시각차, 온도차, 시간차가 존재하는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전 이 영화가 여러모로 참으로 이상한, 사실 괴상한 영화구나 싶었어요_-

최근 <마지막 4중주>를 봤는데, 이 영화 하나도 안 슬픈데 전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요(하하). 나쁜 캐릭터와 전형적인데다 나쁜 갈등구조에 꽤 뻔한 이야기. 그런데도 이상하게 뭉클해지는게 있더군요. 엉뚱하게도 감정의 권력구조를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여름감기라니. 그건 원래 저의 특기였는데... 왠지 억울하고 민망하고 꽤 힘들지 않나요?-_ㅠ 빠른 회복을 바랄게요(응?) 어서 나으세요 :)

맥거핀 2013-08-28 19:28   좋아요 0 | URL
저는 조금 실망하기는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봉준호의 결과물임을 감안하고 하는 얘기입니다. 영화의 어떤 분절되는 리듬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영화 외부적인 면, 특히 CJ식의 밀어붙이기에 이 영화가 올라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하기는 요즘 이 영화만 뭐라고 할 것도 아니지요. 저는 요새 영화 배급들이 약간 미쳐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좋은 영화라는 뜻 아닐까요. 저는 아무튼 보는 이에게 한 번이라도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면 감히 좋은 영화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뻔하고 전형적인데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면 무엇인가 전형적이지 않은 게 한개라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건 고도의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여름감기는 이제 거의 나았습니다만, 요새는 거의 일년내내 감기의 증상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도시의 공기는 정말 나쁘다는 게 느껴집니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Shining님의 특기를 뺏아간 것이기를 바랍니다.^^
 

 

 

 

 

 

 

 

 

 

 

더 테러 라이브, 김병우, 2013

 


(스포일러)

 


1.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은 '더 테러'가 아니라, 아무래도 '라이브'인 것 같다. 영화에서 거대한 규모의 '테러'를 보여주는 것은 이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 되었다. 문제는 그러므로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 영화에서 선택한 방법론은 '라이브'이다. 이 '라이브'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볼 때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영화의 내용상, 이것이 테러를 방송국에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 테러를, 이 이야기를 관객이 거의 실시간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이 두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들이 조금 있는데, 이것이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 라이브를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다. 예를 들어 미드 <24>는 드라마 전체를 'Real Time'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는데, 이 때 한정된 시간을 보충해주는 것은 동시 화면, 혹은 화면 분할이다. 즉 이 드라마에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전매특허처럼 사용하는 것은 여러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시에 보여주는 분할 화면이다. 그런데 이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한정된 시간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공간마저도 한정시켜 버린다. 즉 카메라는 윤영화 앵커(하정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부스만을 비추고, 모든 사건들은 그 공간을 거쳐서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관객들은 모든 사건을 윤영화의 눈을 통해서 본다. 다리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라디오 부스의 창을 통해서, 혹은 거기에 설치된 TV화면을 통해서 보게 된다. 이는 영화의 끝까지 이어지는데, 카메라는 다른 장면들을 보여줄 법도 하지만, 끝끝내 그 라디오 부스 안에서 머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한편으로 연극과 같아지는 부분이 있다.)

이를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영화라는 것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과거의 사건을 보거나, 혹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볼 때, 그것은 일종의 관객을 향한 속임수이다. 실제의 사건이라면 절대 볼 수 없는 것을 그 순간 영화는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객도 그 속임수에 대해서 화를 낼 이유란 없다. 우리는 영화관에 속으러 가며, 기꺼이 그 속임수를 즐기기 위해서 가기 때문이다. 도리어 어떤 속임수도 없다면, 우리는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종의 영화가 가지는 장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영화의 장점'이라는 것을 시원하게 내던져 버린다. 물론 이는 이 영화가 선택한 것이다. 아마도 그럼으로써 감독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도박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다. 관객은 이 영화에서 계속 윤영화와 같이 이 라디오 부스에 갇혀있다. 즉 관객은 그가 알게 되는 것만을 알며, 그가 모르는 것은 영원히 계속 모른다. 그런데 관객에게 장소와 시간을 한정시킨다는 것은, 그들에게 정보를 제한시킨다는 의미도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대한 사건이 터졌을 때 TV속 앵커가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왜냐하면 사건의 초기 정보는 제한적이고, 우리는 계속 다음 정보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의 심리가 이 영화에도 작용을 한다.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며 이 끝나지 않는 뉴스('NEW'S)를 계속 들여다본다. 이것은 또한 부차적인 효과를 낳는데, 관객을 윤영화에게 쉽게 동화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윤영화 앵커가 되어 매순간 판단을 해야하는 위치에 놓인다. 테러범도 잡고, 사람들도 구하고, 자신의 위치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한정된 공간과 시간이라는 도박이 성공을 거두게 하는 것은 이어지는 사건의 치밀한 구성이다. 아무리 예능이나 여러 프로그램들에서 라이브와 핸드헬드를 관객들에게 연습시켰다고 해도, 단지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것 뿐이라면, 이는 사실 관객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고 흥미를 잃게 만들 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야구 중계를 보는 것을 실시간으로 찍어 영화로 보여준다면 일부 시간 많고 호기심 많은 심리학자들의 흥미를 끌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어지는 사건들을 밀도 있게 구성하여 관객을 기어코 계속 영화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즉 관객은 각각 나름의 윤영화 앵커가 되어 이 테러에, 혹은 테러의 중계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얻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간에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앞에서 이 영화가 스릴, 혹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 '영화라는 것의 장점'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영화가 쉽게 내던져 버린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인물은 별안간 등장하고, 별안간 사라진다. 즉 이 인물들에게는 그 앞의 이야기(전사)도 없고, 그 이후의 이야기(후사)도 없다. 주인공 윤영화 앵커부터 방송국 국장(이경영), 테러 대책반장(전혜진) 등등의 주요 인물들 및 모든 인물들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거기에 이미 존재하거나, 나타나고,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할 일들을 마치고는 또 아무런 설명이나 뒷 이야기 없이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이 영화가 실시간과 한정된 장소를 표방하고 있다면 당연한 부분이고, 아마도 한편으로 이 영화는 그것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스릴 있게 테러를 보면 되었지, 인물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런 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라며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인 것처럼도 보인다. 우리가 순간 어떤 인물을 만났을 때 가지는 인상만으로도 스릴을 구축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도 인물들의 전사나 후사 혹은 다른 디테일 없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영화에 속도감을 부여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누군가를 알아달라고 말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테러범이 테러를 벌인 이유는 영화의 시작부에 이미 관객들에게 반복하여 주입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하나,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애도를 보내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 부품처럼 처리되어 버려진 인간들, 그들을 단지 버려진 부품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고귀한 생명으로서, 인생사를 가진 고유한 인간으로서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자신의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단지 하나의 기계 톱니바퀴처럼 다룬다. 인물들은 어떠한 디테일도 없이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적당한 임무를 수행하고, 또 적당하게 떠나버리고, 영화는 잘짜여진 톱니를 가지고 스무스하게 굴러간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 혹은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극적인 언론에 대한 부분이다. 사건을 혹은 자살을, 혹은 누군가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는 이 (실제의) 일부 언론들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거의 도덕적인 붕괴에 가깝게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예를 들어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사건의 어떤 자극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켜 부풀리며, 정작 사건의 중요한 부분들이나,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이 보는 이들에게 먹히기 때문이며, 일단 닥치고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뉴스를, 혹은 자신들의 보도 프로그램을 감각적인 자극에 빠져있든,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에 빠져있든 끝까지 보게 하는 것이며, 단지 높은 시청률 혹은 구독률 수치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영화의 전략도 그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위에서도 썼지만 이 영화를 관객이 몰입하게 만드는 힘은 관객을 주인공에 이입시키는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이어지는 사건들에 있다. 사건은 점점 확대되고, 강도는 점점 강해지며, 테러의 규모는 확대되고, 자극적인 죽음은 점점 눈앞에서 전시된다. 이것이 결국 영화를 끝까지 보도록 만든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언론의 모습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자극적인 뉴스를 볼 때와 동일한 무엇인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방송국 국장은 78%의 시청률을 찍은 후 웃음을 지으며 퇴장한다. 그때 그 웃음이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 78%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방송국 국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방송을 본 시청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혹여 이 영화가 780만을 찍게 된다면 감독은 웃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미 이 영화를 본 나는 왠지 그 웃음이 좀 껄끄러울 것 같다.

 

 
3.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건 뉴스를 보는 것이고, 이것은 영화를 보는 것이잖아요. 누군가의 진짜 죽음을 실시간 뉴스로 보는 것과 누군가의 가짜 죽음을 영화로 보는 것은 다르지 않겠어요? 물론 그것은 맞는 얘기다. 그건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즐기러 때로 영화관에 가기도 한다. 그것이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죽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맞는 얘기다. 단 그것은 영화가 명백히 판타지를 표방하고, 그것으로 나아가려 발버둥칠 때만이 그렇다. 정해진 틀 안에서 이미 약속한 규약을 가지고 게임을 해 나가는 것이 영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술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속임수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신체분리마술에 속임수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나 어떤 영화들은 기어코 현실이 되려고 애쓴다. 현실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속임수를 지우는 것이다. 주인공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보게 할 것, 그가 알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게 할 것, 그가 흐릿한 화면으로 무엇인가를 본다면 관객들도 흐릿한 화면으로 보게 할 것, 그가 죽는다면 영화도 끝날 것, 어떠한 위안이나 위무도 없이. 그러니까 여기에서 질문을 다시 해보자. 왜 라이브로 봐야 하나요?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답은 이렇다. 그것이 극도의 스릴을 주니까. 너는 그 순간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니까. 그러나 영화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관객에게 스릴을 주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을 쓰면 된다. 그것은 그에게 칼을 쥐어주고 실제의 누군가를 죽이게 하거나, 혹은 그의 반대로 관객의 등 뒤에서 칼을 손에 쥔 누군가가 쫓아오게 만들면 된다. 그도 아니라면 관객의 앞에 누군가를 불러 놓고 그를 '라이브'로 죽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고, 나는 기분나쁜 농담을 하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가 된 형태는 있다(그것을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것은 스너프 필름이다(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닌가는 내가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극도의 스릴이라는 끝에는 스너프 필름이라는 지옥에서 온 망령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과연 스너프 필름이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는 합법적인 스너프 필름이 도처에 널려 있다. 미국의 경우 범죄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전 한 종편 방송이 자살 소동을 생중계함으로써 위대한 첫발을 내디뎠다. 이런 것들이 과연 스너프 필름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스너프 필름을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가 스너프 필름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그런 합법적인 스너프 필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테러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언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내용을 그 비판하고자 하는 형식으로 다룰 필요가 있었을까. 다시 말해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언론을 비판하기 위해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이 필요했을까. 나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비판이라기보다는 당황에 가깝다. 사회에 만연한 모순의 화법들, 예를 들어 남의 신상을 까발리는 해커 그룹이 본인들은 '어나니머스(anonymous)'라는 이름을 쓰거나, 독설을 비판하면서 독설을 퍼붓거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걸러 내면서 정신병적인 차별 논리를 사용할 때 나는 사실은 조금 당황스럽다.

4. (영화의 결말에 대한 부분이 집중되어 있으니 보지 않으신 분은 패스하시길.)
물론 그런 모순의 화법은 이것만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부분 즉 인물을 단지 하나의 닳아지면 버리면 되는 톱니바퀴로 보지 말자고 하면서, 기계부품처럼 다루는 것도 해당되며,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명확한 선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였던 윤영화 앵커와 테러범은 마지막에 이르러 감정적인 연대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연대는 조금은 수상쩍다. 그 연대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윤영화를 테러범의 위치에까지 끌어내려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윤영화는 사회적인 지위도 잃고, 가족마저 잃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가족을 잃은 테러범과 동일한 위치가 되어 감정적 연대에 성공한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끊어진 마포대교에서 겨우 걸쳐져 있는 차 안에서 아이들을 필사적으로 주위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끌어내고 물에 빠진 가장의 모습과 같다. 전쟁터와 같은 사회 속에서 결국 최종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은 자신의 가족 뿐이며. 그것 마저도 약자들의 연대 없이는 최소한의 성공도 이루어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연대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결국 실패한다는 것. 테러범은 기어이 추락했고 그들은 여전히 깨진 TV속에서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윤영화가 홀로 남아 빈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이것을 테러의 완수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처음으로의 되돌이표이다. 사실 처음에 우리는 이미 이 영화의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한다. 테러는 어쨌든 끝날 것이고, 테러범은 잡히거나 죽을 것이다(그리고 잡혀서도 결국에는 사형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왜 이런 뻔한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는지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도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가족을 잃은 윤영화에 의해 마저 수행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우리는 비슷한 결론을 예상할 수 있다. 윤영화는 죽을 것이고, 혹여 운좋게 살아남아도 그는 사회적으로 죽은 상태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테러범이라는 삐끄덕거리는 톱니바퀴를 또하나의 윤영화라는 삐끄덕거리는 톱니바퀴로 대체한 것이다. 작업은 조금 지연되겠지만, 공정에는 그다지 큰 문제는 없다. 나는 이것이 그러므로 일종의 체념이자 자살로 보인다. (이는 또 한편으로 그 남은 마포대교가 결국 무너지고 그렇게 애써 구해낸 아이들도 결국 물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여기에서 다른 질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는 하필이면 마포대교에 폭탄을 설치한다는 것일까? 그가 대통령의 사과를 받으려하면서 마포대교의 시민들과 윤영화를 인질로 잡는 것에 담겨진 것들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문제가 남는다. 물론 우리는 이 체념이자 자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가 거기에 담겼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분노라고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런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누군가가 말한다. 내가 여기서 죽을테니, 당신은 나의 죽음을 널리 알려달라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가늠해야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가질 파급력의 강도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가늠해야 하는 것은 그를 구하기까지 남은 시간이다. 실제의 사건이라면 달려가서 우리는 그를 구해야만 하고, 이것이 영화라면 그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대신 일종의 명령에 가깝다. 

5.
그런 영화적인 구원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영화가 줄 수 있는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마술과 비슷하다. 마술의 어떤 속임수를 낱낱이 알게 되면 처음에는 즐겁겠지만, 결국에는 모든 마술이 시시해진다. 그저 적당히 속아넘어가 주는 것이 필요하다. 단 그렇다고 해서 너무 몰라서도 안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신체를 칼로 자르는 것이 속임수임을 아예 모른다면 그는 공포에 질려 이 마술을 아예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현실을 다루지만, 그 현실은 영화적인 현실이다. 이것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지면 개연성이 없다고 하거나, 아무리 영화지만 지나치게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영화는 현실에 가깝게 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 어떤 영화들이 너무 현실에 비척비척 가까이 갈 때 무서워진다. 보지 않아야 되는 것, 예를 들어 실제로 몸이 잘린 마술사를 보게 될 것 같아서다. 몸이 잘린 마술사를 보는 것이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웁니까, 그렇습니까? 줄곧 나쁘다고 말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화를 즐기게 만들다가 끝내 그 주인공을 체념시키는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열어서 안되는 것을 점점 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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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8-0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신기하게도 하정우는 신작을 보기도 전에 또 신작이 나와요. 그래서 알았는데 저는 영화를 아주 사랑하는 편은 아닌가봐요. 요즘은 그냥 귀찮지만요. 미..미안합니다. 이런 댓글이라서..

맥거핀 2013-08-06 17:35   좋아요 0 | URL
본문에는 안썼지만 하정우 연기가 전체적으로 꽤 괜찮기는 해요. 사실 이 영화에 맞는 다른 배우를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는 생각도 들구요. 굳이 따지면 이병헌 정도..? 근데 이병헌도 앵커 캐릭터로는 좀 그래서..

그런 댓글?도 좋아요. 아이리시스님 아니면 댓글 달아줄 사람이 없다니까..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2012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5년만의 신작 <마스터>는 대체로 '어렵다'는 것이 중평인 것 같다. 그 어려움의 이유를 여러가지 많은 것들, 예를 들어 <마스터>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유달리 마스터 씬이 없는 것 등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이 영화가 현혹되지 않아야 하는 대상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 중의 하나 랭케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한다는 '코즈' 연합회의 창시자이자, 그 자신의 소개로는 작가이자 의사이며 핵물리학자이자 이론 철학자이며, 우리가 보기에는 사이비 교주이다. 사실 영화 속에서 쏟아지는 그의 말들을 곰곰이 뜯어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없다. 우리의 현재의 어떤 두려움, 혹은 심리상태가 과거의 무엇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며, 그 과거로 돌아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여야만 현재를 치유할 수 있으며,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며, 웃음이 많은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 등등의 말들 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뭐 사이비가 틀린 말들을 해서 사이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비들일수록 말들은 더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한 법이다. 사이비가 사이비인 것은 그들이 하는 말들과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다르다, 혹은 전혀 반대의 방향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사람에게 과거를 돌아보라고, 혹은 과거로 일순간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랭케스터 그 자신의 과거는 이 영화의 다른 누구보다도 미스테리하다. 몇 명의 전부인들이 있었던 것 같고, 어떠한 계기로 일정 정도의 부, 혹은 후원자들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사상의 근원에 있는 뿌리를 잡아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또한 그는 인간을 동물과 애써 구분지으려 애쓰면서도 동물적인 욕망, 예를 들어서 프레디(호아킨 피닉스)가 만들어내는 정체 불명의 술이라든가 성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랭케스터가 무엇인가 말들을 쏟아내게 한 다음에 그의 반대되는 씬을 붙임으로써, 예를 들어 그의 프로세싱 이후에 그와 프레디가 프레디가 주조한 술을 같이 나누어 먹는 장면을 연결하거나, 웃음과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 이후에 그가 자신의 이론에 대한 의구심 섞인 질문을 받자 화를 벌컥 내는 씬을 붙임으로써 그의 어떤 면모를 우리가 간파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의 서사(실패를 보기 위한 서사)라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 대체로 이런 영화에서 어떤 성공의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고뇌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주인공이 어떤 '마스터'를 만나고 그의 영향으로 새로운 단계로 성숙하여 나아가는 것, 사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런데 나는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이 마지막이 조금은 의심스럽다. 그가 마지막에 무엇인가를 성공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영화의 내내 프레디는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욕망의 끄트머리에 다다르는 것, 그러니까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프레디는 모래로 만든 여자와 섹스를 하고, 흥분을 못이겨 바다에서 자위를 하고, 모든 이미지에서 성적인 요소만을 찾는 등 거의 섹스중독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는 정작 그런 성적 욕망을 해소할 기회가 주어짐에도 스스로 거부하는 것 같다. 사진관에서 여자와 성적인 접촉의 기회가 생겼을 때에도, 그리고 랭케스터의 딸이 유혹했을 때에도 그는 그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이상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처음의 실패 직후에는 그는 사진관에서 이상한 폭력성을 보여줬고, 두 번째 실패 직후에는 성적인 환상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던 그가 마스터를 떠나온 후 마지막에 여자와의 섹스에 성공하는 것, 예를 들어 이것을 그의 어떤 변화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질문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시계바늘을 조금 앞으로 돌려야만 한다. 우리가 그의 변화 혹은 성숙을 믿는다면, 그의 성숙의 기점은 그가 바이크를 타고 평원에서 사라진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가 과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은 비어있는 과거, 혹은 돌아가야 할 대상(도리스)의 부재이며, 그는 그 이후에 다시 랭케스터가 원했던 담배를 손에 들고, 그러니까 그가 원했던 술을 주조해주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페기(에이미 애덤스)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는 것은 고작 사진을 찍어드릴 수 있다는 대답이다. 그러나 물론 알고 있듯이 사진찍기는 일찍이 그가 실패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랭케스터에게 과거의 그 둘의 인연을 들은 후 그곳을 돌아나온다(물론 과거의 이 둘의 인연, 즉 랭케스터가 얘기해 주는 두 사람의 전생은 의미심장하다. 파리 코뮌 중 외부와의 연락도구였던 비둘기, 그 중에서도 랭케스터가 얘기하는 것은 실패한 두 마리의 비둘기이다. 즉 랭케스터는 이들의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여전히 술을 끊지 못한 상태에서 술집에서 여자를 만나고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미심쩍은 것은 그 마지막이다. 프레디가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벌이는 모습 말이다. 프레디는 바이크를 타고 평원을 달리며 랭케스터를 위시한 이 수상한 단체를 스스로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마지막 그 여자에게 '프로세싱'을 하고 있다. 즉 그는 랭케스터를 흉내내고 있다. 그가 여자에게 말한 '가장 용감한 여자'라는 말은 처음 프로세싱이 끝난 후 랭케스터가 그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마스터를 버리지 못했다. (이는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을 일종의 유사 부자관계로 보는 입장에서도 어느정도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와 다른 모습이 되고자 하나 결국에는 아버지의 어떤 모습들을 자신도 모르게 흉내내게 된다. 물론 그 중에는 흉내내야만 하는 것들도 있고, 결코 흉내내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다. 조금은 다른 얘기겠지만, 이러한 관점이라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워지는 것은 어린 새엄마 페기의 위치다.)

 

 

물론 프레디만이 랭케스터를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랭케스터 역시 프레디를 버리지 못했다. 일견 프레디와 랭케스터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욕망에 따라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술을 만들어 먹는 프레디가 동물에 가까운 캐릭터라면, 동물 위에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다고 설파하는 랭케스터는 그를 길들이는 사육사처럼 보인다. 그들의 어떤 물리적인 운동 양식도 다른데, 창과 벽을 반복하여 오가게 하는 랭케스터의 치료 과정이나 어떠한 지점을 설정해놓고 그곳으로로 달려간 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바이크를 타는 장면을 보면 랭케스터의 지배적인 물리 운동은 시계추와 같은 반복이다. 그러나 프레디는 다르다. 프레디는 폐소공포증을 가지고 있고, 되돌아가지 않는다. 노래를 불러준 도리스에게 되돌아가지 않았고(뒤늦게서야 돌아갔지만 그녀는 없었고), 역시 마찬가지로 노래를 불러준 랭케스터를 뒤로 하고 그는 떠났다. 물론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그가 바이크를 타고 점이 되어 사라지는 장면이다. 그는 영원히 어딘가를 떠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다름들에도 그들은 또 한편으로 비슷해보이고 서로에게 서로가 매우 필요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적으로 볼 때 정신적인 두려움과 상처 속에서 정신적인 버팀목으로서 랭케스터가 필요했던 프레디나 열렬한 추종자 및 영적 치유의 증거로서 다른 신도들에게 본보기로 내세울 프레디가 필요했던 랭케스터, 각각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른 면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그들은 프로세싱을 하면서는 마스터와 추종자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프로세싱이 끝나면 주조한 술을 나누어 먹는다(그러므로 마치 이것을 즐기기 위해 프로세싱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둘이서 나란히 감옥에 갇혔을 때에는 처음 프레디를 분석하려 드는 랭케스터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하게 설전을 벌인다. 과연 그 두 사람은 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위에서 얘기한 랭케스터를 흉내내는 프레디의 모습도 그 한 단면일 것이고 이는 동시에 그의 실패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왜 이 영화를 실패의 서사로 마무리 지으려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현재의 미국인들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대로는 앞으로도 실패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시계추처럼 반복하여 보자.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어떤 부분을 되짚어야만 현재의 어떤 두려움, 상처, 잘못된 행동 등을 치유할 수 있다는 랭케스터의 '프로세싱'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자체로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그렇다면 모든 정신분석이 잘못된 것이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가 막 시작되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이 <마스터>의 이야기도 결국에는 같은 방식의 것이니까.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내놓고, 한 마스터, 혹은 한 사이비 마스터와 그를 추종하는 상처받은 어린 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현재의 미국인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목소리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미국인들은 상당수 정신적인 공황과 두려움,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아주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어떤 것으로 표출되어, 폐쇄적인 대외정책과 내부의 매카시즘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근원에 있는 것이 과연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이었을까, 혹시 그것은 다른 어떤 더욱 거대한 근심, 마음 깊은 곳에 그 근원이 있는 거대한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쉽게 치환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그것을 쉬운 적으로 치환하지 않고 근원으로 돌아가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예를 들어 술에 쩔어 있는 프레디에게 술을 끊으라고만 말하는 것은 술이라는 쉬운 적으로 전선을 몰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디가 술을 마시는 것은 물론 술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고, 그 과거에 있는 무엇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 프레디가 결국 보게 되는 것은 과거의 부재이고, 과거로 돌아간 미국인들이 보게 된 것은 인디언의 학살이나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같은 부재하는 것만도 못한 과거,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재한 과거이다(과거로 돌아간 프레디가 만나게 되는 것은 도리스의 부재이자 동시에 배우의 이름과 같은 '도리스 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즉 여기에서 한편으로 부재하는 과거는 배우, 그러니까 매끄러운 하나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이미지...예를 들어 과거의 서부극들은 인디언 학살이라는 실제를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치환하는 데에 얼마나 기여했던가).

예민한 예술가는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예리하게 현재를 생각하게 함은 물론 오지 않은 미래마저 예측하도록 만든다. 2013년 두 편의 근심어린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있다. 한 편은 이미 지나간 폭풍이자 과거의 근심 <마스터>이고 다른 한 편은 아직 오지 않은 폭풍이자 미래의 근심 <테이크 쉘터>이다.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치유하려는 방법은 (영화 속에서) 실패했고, 이 실패들은 영화의 모델이 된 싸이언톨로지 같은 형태로 여전히 현재 미국인들의 정신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면 미래를 봄으로써 현재를 치유하려는 방법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전혀 올 것 같지 않은 폭풍이 두려워 방공호를 짓는 남자의 이야기, <테이크 쉘터>를 봐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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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3-07-20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실패의 서사가 아니라 완벽한 성공의 서사로 받아들였어요. 다만 그 성공의 모습이 전형에서 벗어나고 있고요. 말씀하셨듯이, 우리한테 익숙한 성공은 랭카스터한테 조명이 맞춰지는 거지만 랭카스터한테 성공은 자신의 정신사고 세포를 이식하는 게 아닐까요...엔딩장면에서 프레디는 여자한테 랭카스터의 복제물임을 증명하는데, 전 식겁했습니다.

맥거핀 2013-07-20 16:32   좋아요 0 | URL
말장난에 가까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예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술 먹고 가족을 때리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난 아이가 나중에 술먹고 가족을 때리는 가장이 되었을 때 그것을 성공한 것으로 봐야할 것인가,라는 물음 말이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랭케스터의 입장에서 본다고 해도, 과연 흉내내기를 '전수'로 봐도 될까 싶기도 하구요. 마지막 프레디의 행위는 어설픈 흉내내기에 가까웠죠. 물론 어떻게 보면 랭케스터 자신의 행위들도 다른 무엇의 (실체가 없는) 흉내내기라는 점에서 이를 복제라고 볼 수도 있겠죠.

좋은 주말 되세요.:)

네오 2013-07-20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이렇게 좋은 글이 빨리 알라딘 서재에서 내렸갔네요 ㅋ 이글을 읽고 그냥 이 비평문에 대한 마스터에 대한 글을 재빠르게 쓸려고 했는데요 ㅋ, 그런데 사실 저는 뭐 실패든 서사든,,어느 것 하나도 마음에 안들었다는 거죠,,최악까지는 아니지만,,언제나 앤더슨의 편집리듬은 마음에 안들더군요,,왜 잘라야 할때 안 짤라서 서사의 실패학이라는 소리듣겠되는지 ㅋ 그냥 저는 허트로커와는 같은 테마인데 끝이 다르게 했구나정도,,물론 허트로커가 더 좋지만요,,원래 주인공도 제레미 러너였다면서요,,스케쥴이 안맞아서 하차했다던데요,

맥거핀 2013-07-21 00:17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가 본 지가 참으로 오랜만이라, 그가 원래 어떤 스타일인지 기억이 안나요. <데어 윌 비 블러드>도 기억이 가물가물...미국 내에서도 평이 상당히 상반되었다고 하죠, 이 영화? 저도 중간중간 리듬을 잃게 하는, 그러니까 말그대로 지루하게 만들거나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부분이 조금 있었어요. 제레미 레너라면 아마 호아킨 피닉스 대신일텐데, 글쎄요. 저는 제레미 레너보다는 호아킨 피닉스가 더 나았을 것이라 봅니다. 제레미 레너는 왠지 정이 안가서..^^
 

 

 

 

 

 

 

 

 

 

 

박찬욱,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2006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2006년 12월 박찬욱은 복수 연작의 어떤 변주, 혹은 색다른 복수를 보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 소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내놓고 돌아왔다. 기괴한 행동과 말들을 거듭하는 캐릭터와 반질반질하고 아기자기하고 키치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괴이하게 보였던 정신병원이라는 공간도 그렇지만, 사실 가장 이상해보였던, 그러므로 불친절하게 보였던 것은 그 이야기의 방식이었다. 박찬욱 영화에 으레 있으리라고 기대되었던 충격적인 사건도 없었고, 충격적인 반전도 없을뿐더러, 사실 변변한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것조차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에 있는 것은 오로지 이상한 틀니를 끼우고 멍한 눈으로 손끝에서 총알을 발사하는 여자주인공과 이상한 토끼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금살금 걸어다니는 남자주인공과 그들 못지 않게 이상해보이는 행동을 거듭하는 주위의 다른 정신병을 가진 인물들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도 영화의 거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시작은 그들의 정신병이 왜 촉발되었는지, 특히 여자주인공 영군(임수정)이 왜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그녀가 왜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를 그리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미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고 있는 영군을 본다(박찬욱 영화의 오프닝이 대체로 멋진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 어떤 다른 영화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정신병(우리가 그것을 '정신병'이라고 부른다면 말이다)의 원인을 대강 추론하여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한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많은 정신병자들이 그러하듯이 이 영군도 나름의 확고한 논리의 체계가 있으며 그 체계에 따라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군은 영화 내내 밥을 먹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영군이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기계장치를 몸 안에 가진 싸이보그가 밥을 먹을 이유는 없다(그래서 영군은 남들이 밥을 먹을 때 건전지를 입에 대고 충전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밥을 먹지 않는 것에는 무의식적인 다른 것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존재 말이다. 영군은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며, 무만 갉아먹었던 할머니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며 틀니를 놓고가서 더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쩌면 영군의 단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즉 자신이 틀니를 전달해주지 못해 할머니는 굶고 있는데, 자신만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죄책감이 여기에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표면상으로 이 죄책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를 더 괴롭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을 지탱하게 해줄 편리한 하나의 논리체계를 만들어냈다(그것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극단적인 경우에 이 죄책감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리고 박찬욱은 이미 <올드보이>에서 죽는 것보다는 정신병을 가지고라도 살아남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즉 그녀에게 '싸이보그라는 망상'은 그녀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다). 싸이보그는 밥을 먹을 필요가, 아니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것 중 싸이보그일까. 싸이보그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의 겉모습과 안이 다르다는 것, 즉 원래의 인간의 내장이 다른 것, 즉 싸이보그의 경우라면 기계장치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를 연상시키는데, 예를 들어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는 할머니의 틀니 같은 것이다. 틀니는 원래 있던 이의 대체품이다. 즉 틀니는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지고 기계장치적인 어떤 것이 인간의 신체 일부를 대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망상이 실재를 대체하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그것은 망상이 어떤 의미에서는 (죽지 않고) 그 망상을 가진 존재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그것이 오랜기간 실재를 대체할 경우, 그 실재를 망가뜨린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할머니는 영군에게 충고한다. 틀니를 끼우지 말라고, 왜냐하면 자꾸 끼우면 진짜 이가 망가지니까). 그러나 아무튼 영군은 안을 기계장치라도 좋으니 무엇인가로 채워넣어야만 했다. 그것은 할머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안이 비어버린 영군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일단 무엇인가 안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아니 이상한 농담은 그녀의 어머니가 순대를 만드는 일을 한다는 점이다. 순대란 돼지의 창자에서 원래 있던 것을 비워내고 당면을 채워넣은 음식이다. 한 마디로 싸이보그와 같은 음식.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저 그녀의 빈 것을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 채워넣기를 바란다.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고백하는 진지한 영군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입에 순대를 밀어넣으며, 그녀가 받아먹자, 그럼 되었다고, 싸이버..인지 뭐인지는 상관이 없으니 먹으니까 되었다고 답한다. 이는 정신병원의 하얀맨(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사실 영군의 망상이 무엇이든, 즉 그녀가 싸이보그인지 뭐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강제로 주입하여 그들이 믿는 치료를 행하는 것이다. 그 강제로 주입되는 것들, 예를 들어 그것은 대통령이 누구야, 와 같은 질문들이고, 답을 하지 못하는 영군은 원래 그것을 몰랐다고 답한다. 물론 사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결국 밥을 먹게 만드는 것은 하얀맨들이 아니라 일순(정지훈)이다. 일순의 접근법은 하얀맨들과 다르다. 하얀맨들은 그녀 고유의 망상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입의 방식을 택했지만(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의 방식은 그녀의 망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이 고유의 망상에 음식을 기계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를 몸 속에 집어넣었다는 망상을 추가하는 것,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멋지게 성공을 거둔다(이 일순의 수술(?) 장면은 평론가 김혜리 씨가 박찬욱 영화들의 가장 로맨틱한 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두 배우를 모두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에는 적극 동의한다. 일순은 이 수술로 영군을 치료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어머니가 남기고 간 물건을 그녀 안에 심음으로서 그것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럼 일순에게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의 단초는 일순이라는 캐릭터의 어떤 특성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정신병적인 부분이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서 훔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훔치는 것이 어떤 '물질적인 물건'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한 환자에게는 탁구를 치는 능력을 훔치기도 하고, 다른 환자에게는 타인에게 매우 미안해하는 마음을 훔치기도 하며, 영군에게는 그녀의 부탁으로 동정심을 훔치기도 한다. 즉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면, 그의 정신병이란 무엇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어떤 특성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의 정신병이란 '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한 가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타인이 되어 보는 것, 그것은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주인공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동진(송강호)은 영화 속에서 결코 타인이 되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므로 어떠한 동정심도 갖추지 못했으며, 그 댓가로 배에 칼이 꽂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 동진을 살릴 수도 있었던 동정심, 이것은 일순에게는 이미 갖춰져 있다. 그것은 그가 타인의 입장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화 속에서 영군이 밥을 먹지 못할 때, 그녀가 독방에 홀로 갇혀있을 때 누구보다도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그녀를 돕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런 캐릭터는 일찍이 박찬욱의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영군은 반복되는 메시지를 듣는다(물론 이것은 그녀가 그전에 듣던 라디오에서 혹은 공장의 기계적인 지시음에서 유래한 망상이다). 동정하지 않기, 망설이지 않기,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슬퍼하지 않기 등등의 메시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 중의 으뜸은 동정하지 않기라고 이야기해준다. 즉 이것은 일종의 그녀가 만들어낸 스스로의 금기이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 지금부터 금기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에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즉 그녀가 스스로에게 그것을 금하는 것은, 그녀가 망설이고,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도 동정하는 캐릭터임을 말해준다. 즉 영군 역시 일순 못지 않게 동정심을 갖추고 있다. 다른 모든 가족은 할머니를 어딘가로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했지만, 그 할머니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한 것은 영군 뿐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각해보면 복수 연작들과 동떨어져 보였던, 그래서 상당히 기괴한 소품으로만 보였던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사실 이 복수 연작의 거울 선상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복수 연작에서 수많은 인물들은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점점 미쳐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미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이미 미쳐 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영군과 일순은 미쳐 있었지만, 다시 미치지 않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거나, 사실은 처음부터 미치지 않았던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복수 연작의 어떤 인물도 갖추지 못한(금자씨는 미약하게나마 갖추게 되었지만), 동정을 가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영군과 일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다른 주변 인물들 역시 동정심을 갖추게 된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영군이 억지로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 식당의 모든 환자들은 영군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며, 그녀가 밥을 먹기를 응원한다. 어떠한 하얀맨도 없이 이루어지는 이 장면에서 모든 정신병자들은 이미 타인이 되어가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신병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좁은 의미로 보면 '싸이보그지만 (먹어도) 괜찮아'라는 것이지만, 사실은 '싸이코지만 괜찮아'이다. 비록 그들은 싸이코지만 괜찮다. 그것은 '그들의 그 미쳐 있는 상태'가 그들에게 크게 안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약간은 좁은 의미에서도 그러하지만(즉 그들은 '미치는' 상태가 아니라, '미친' 상태이며 이는 망상을 가지고서도 그것이 그들의 삶의 유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 보면 그들이 도리어 '정상'이라고 말해지는 사람들보다 낫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싸이코지만 (싸이코가 아닌 자들보다) 괜찮아'이다. 그러므로 영군의 할머니는 영군의 환상 속에서 나타나, 그녀가 10만 볼트의 충전을 하여 핵폭탄이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 핵폭탄은 동정의 파편들을 세상 천지에 넓게 퍼뜨리는 핵폭탄일 것이다. 박찬욱은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이상한 우화를 통해 우리가 걸러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지켜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미완의 해결이다. 남들보다 유난히 뛰어난 동정심을 가진 이들이 이미 이야기를 정신병원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즉 이 사회는 '남들보다 뛰어난 동정심'을 원치 않는다. 사회는 여전히 등가교환과 그에 따른 대체로 이루어져 있다. 영군이 처음 싸이보그라는 망상을 가지게 된 것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 외에도 그녀를 단지 하나의 싸이보그로밖에 여기지 않는, 그녀가 처음 일했던 공장의 시스템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줄지어 늘어선 여공들이 같이 동작을 되풀이하는 이 처음의 장면에서 영군은 그 공장의 거대한 부속물이고, 영군이 빠지게 된 자리는 아마 다른 부속물, 다른 여공이 대체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몸이 기계로 대체되었다고 믿는 것에는 이러한 공장에서 얻게 된 것들도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지나친 동정심은 등가교환을 무너뜨린다. 일순이 말한 평생보장 AS는 이 사회에 없다. 즉 어떠한 관점에서는 동정심은 등가교환하는 자본주의적인 원칙을 어지럽히는 일종의 바이러스이며, 그런 측면에서 바이러스는 하얀맨들에 의해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 바이러스의 보균자들은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또다른 바이러스가 있다. 아니 어쩌면 두 가지의 바이러스'들'이 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에서 복수는 돌고 돈다. 즉 복수는 교환되고, 그 교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그들에게 영혼의 구원이란 없다. 그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우화로 숨고르기를 한 박찬욱은 그 등가교환과 대체의 지독한 고리를 끊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을 이 바이러스들의 탐구를 통해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영화 <박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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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7-1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 영화는 다 봤는데 생각해보니 이 영화는 안 봤네요. 사실 여전히 별로 끌리지는 않아요; 이상하게도. 안 본 영화지만 맥거핀님이 이렇게 연작으로 페이퍼 써주시니 좋네요 :) 박쥐로 이어지는 거죠? 끝에 예고까지 써주시고 안 쓰면 반칙입니다ㅎㅎ

맥거핀 2013-07-15 00:58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은데(저는 좋더군요), 박찬욱의 팬들에게마저 일종의 서자 취급을 받는 영화지요. 조금 더 글을 타이트하게 써야 하는데, 이렇게 띄엄띄엄 쓰니, 좀 그렇기는 하지요?

박쥐는 예전에 개봉시에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 쓴 리뷰가 있어서 짤막하게 쓰고 지나갈 것 같습니다. 그 리뷰가 좀 엉망이긴 하지만.

2013-07-13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5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리 크뢰이어>와 <월드워 Z>의 스포가 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최근에 평론가 정성일씨는 트위터에 프랑스 평론가 도미니크 파이니의 글을 인용하여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감각이란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가 몹시 힘들다."라고 남겼다. 뭐 사실 이를 흔한 영화평론가의 흔한 '영화부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를 조금 더 진지한 마음으로 보고 싶다면 일종의 훈련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훈련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훈련이란, 좋은 영화들을 꾸준히 보는 것이다. 어떤 영화들이 나쁜 이유는 어떤 나쁜 생각이나 사상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생각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두 시간 동안 눈을 스쳐 지나갔다가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어떤 영화들은 보는 사람들을 거의 두 시간 동안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주 오랫동안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칭송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두 시간 동안 기꺼이 죽어있겠노라 선언하는 셈이다.) 또한 동시에 영화는 두 시간 남짓되는 제한된 시간동안 이루어지는, 시간의 제약을 가지고 있는 예술이다. 그 짧은 시간을 집중하는 것은 단지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루틴의 결과물이다. 꾸준히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집중의 산물이 아닌 일종의 루틴이 자신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아마도 일종의 '(자신만의) 영화를 보는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 자신의) '영화를 보는 감각'이란 것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것은 분명히 좋은 영화를 보지 못한 탓이다. 올해의 상반기에 좋은 영화로 꼽히는 영화들, 예를 들어서 <코스모폴리스>, <홀리모터스>, <장고>, <테이크쉘터>, <스타트렉다크니스>, <우리에게 교황이 있다>, <문라이즈킹덤>, <링컨> 등등의 어느 영화도 보지 못했다. 아니 여기 언급되지 않은 어떤 영화들도 좋았던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그것이 좋은 영화였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타인의 리스트만 늘어놓는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좋은 영화들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 감각이 무뎌진 탓이다. 그저 지나간 몇 편의 영화들에 대한 잡설을 늘어놓는 것이 그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까? (이 두 가지의 영화가 짧은 리뷰의 대상인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저 가장 최근에 본 두 편일 뿐이다.) 


 

 

<마리 크뢰이어>, 빌 어거스트, 2012

야구에는 '우완정통파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다.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자유자재로 제구하는 오른손 투수에 대한 선망. 그러나 물론 이들이 로망의 대상인 것은, 이런 친구들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빠른 볼을 던지기는 하나 제구가 안되는 투수들은 비일비재하고, 결국 투수코치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다. "구속을 좀 떨어뜨려서 제구를 잡자!" 그러나 여기에는 실패의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다. 다이조부 박사는 현실에 없다. 구속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제구는 들쑥날쑥하고 빠른 볼을 던지던 미완의 대기는 그저그런 패전처리 투수가 된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타자를 현혹시키는 키킹 동작을 추가한다, 볼을 끝까지 숨겨나오도록 투구폼을 교정한다, 특정의 변화구를 장착한다, 구속을 조절하는 방법을 습득한다, 타자의 리듬을 빼앗는 불규칙한 인터벌 조절법을 습득한다 등등의 다양한 방법들 말이다. 아니면 아예 극단적으로 쓰리쿼터나 언더스로로 폼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심지어 어린투수의 경우에는 우완에서 좌완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 즉 이들은 어느 틈에 기교파 투수가 된다. 우완정통파와 좌완기교파. 즉 어릴 때부터 기교파가 목적인 투수는 (거의) 없다. 누구나 160km를 던지는 정통파가 되고 싶지만, 그것의 길은 멀고, 대신에 살아남기 위해 여러 다른 기교를 배운다. 즉 수많은 기술들은 살아남기 위한 산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고 우완정통파는 기술 없이 던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적당한 키킹으로 머리 위에서 손을 내리꽂아 빠른 속도로 공을 던지는 우완정통파의 투구폼 역시 야구의 역사에서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단 1km의 속도를 더 내기 위해서 그간 연구된 수많은 방법들이 이 우완정통파 투수의 강속구에 녹아들어가 있다. 즉 이는 기본기지만, 이 기본기 역시도 수많은 기술들의 집약체이다.

별 쓰잘데기 없는 야구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정복자 펠레>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감독 빌 어거스트가 우완정통파 투수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유명한 <정복자 펠레> 등의 영화에서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별다른 기교가 없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한 장례식장에서 아기를 안고 서 있는 한 미망인의 모습을 비춘다. 아기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린걸까? 영화는 별다른 설명없이 시계바늘을 돌려 그녀의 아주 오랜 옛날로 돌아간다. 그리고 우직하게, 별다른 카메라워킹도 없이 이야기를 천천히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이 순탄하지 않은 마리 크뢰이어의 삶을 조용히 따라가며 수많은 분기점들에서 그녀의 선택들을 지켜본다. 그러므로 사실 이 영화의 가장 위험한 부분은 마지막에 있다. 관객이 "나는 이 여인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 여인의 선택들, 혹은 그녀가 처하게 된 마지막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영화로서 끝난 것이다. 단지 그저 두 시간 동안 '화성인 바이러스'를 본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보는 동안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서 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단지 당신은 동물원 우리 속의 동물로서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녀의 삶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녀의 어떠한 선택들이 가능한 선택의 범위 속에 들어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비록 그런 삶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는 조금이나마 얻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즉 구속을 1km라도 끌어올리기 위해서 빌 어거스트는 몇 가지 전통적인 장치를 효과적으로 구성한다. 예를 들어 복선의 장면들이 그것이다. (복선은 물론 가장 효과적인 서사전략 중에 하나다. 그러나 요즘의 어떤 영화들은 관객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복선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후에 어떤 장면을 던져버리고, 어리둥절해진 관객들은 인터넷에 "그런데 그 장면의 의미가 뭐죠?"라고 질문을 올린다.)  예를 들어 마지막 딸 빕스의 선택이 이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전에 어머니가 대체된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리 크뢰이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카메라는 마리 크뢰이어의 등 뒤에서 집의 모습을 비춘다. 집은 평안하고, 어머니는 집안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으며, 한때 어머니였던 마리 크뢰이어는 손님의 위치가 되어 집안을 조심스레 살핀다. 아니면 다음의 장면. 영화의 시작부, 아버지의 어떤 행동들을 두려워하는 딸 빕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감하게 됨은 물론, 지금까지 반복된 수많은 일들, 그리고 그것에서 딸과 마리가 감내야하여야만 했던 일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중에 마리 크뢰이어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는, 혹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복선의 구실을 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휴고의 처음 등장과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의 처음 등장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즉 차곡차곡 쌓여진 장면들은 구속을 조금씩 끌어올려 기어코 당신이 삼진을 당하게 만든다. 그래서 당신은 덕아웃으로, 아니 집으로 돌아가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무게중심은 마리 크뢰이어에서 어느새 빕스 크뢰이어로 옮아간다. 그러므로 영화를 다시 다르게 보는 하나의 방법은 마리 크뢰이어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빕스 크뢰이어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다. 마지막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빕스의 모습을 보며 마리의 남은 삶보다는 빕스의 남은 삶이 궁금해지는 것은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정복자 펠레>의 마지막이 오버랩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감독의 삶을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자세이기도 할 것이니까. 삶은 그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조금씩 나아간다.

 

 

 

<월드워 Z>, 마크 포스터, 2013

마크 포스터는 적어도 액션 장면들에서 긴박함을 끌어낼 줄 안다. 이 영화는 액션들의 백과사전과 같다. 좁은 공간에서의 폐쇄적 액션, 거대한 군중들의 동시다발적 액션, 도로의 카체이싱, 비행기 안에서의 액션, 무소음 액션, 밀폐된 공간에서의 일대일 대결 등등 여러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액션들이 이 영화에는 총망라되어 있으며, 마크 포스터는 각각의 장면들에서 적당한 컷과 편집과 리듬으로 각 장면들의 긴박함을 살려낸다. 그리고 액션들 사이에 중간중간 적절한 휴식처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관객들에게 숨을 돌릴 틈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즉 다시 야구로 말하면 그는 매우 다양한 기교를 갖추고 있다. 인터벌 조절도 능하고, 이중키킹을 구사하며, 공을 끝까지 손에서 숨기면서 릴리스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그가 끝끝내 나를 삼진으로 돌려세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용큐놀이를 하고 있다. 물론 안타를 쳐내지 못하는 용큐놀이란 투수만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놀이를 하는 당사자도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에라 모르겠다,하고 나는 배트를 휘둘러 버린다. 영화로 돌아와서 말하자면, 나는 결국 이 제리(브래드 피트)가 죽든지 말든지 별로 상관이 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의 남은 삶이 전혀 궁금해지지 않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좀비의 어떤 바이러스적, 혹은 박테리아적 속성이다. 즉 이 영화에서 말하는 좀비는 어떤 주술이나 신비한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이고 과학적인 방식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만약 좀비에 물렸더라도, 그 부분을 도려내는 등의 빠른 처치가 이루어진다면, 좀비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비 바이러스는 아주 파괴적이고, 전염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감기 바이러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이 영화를 스티븐 소더버그의 감기 재난 영화 <컨테이젼>과도 비교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어떻게 보면 비슷한 시작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중첩되는 뉴스 리포트들로 시작했던 <월드워 Z>와 비슷하게 <컨테이젼>은 바이러스가 처음 전파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들은 점점 분기되어 나아가기 시작한다. 끝까지 다큐멘터리 혹은 뉴스 프로그램의 기조를 유지하는 <컨테이젼>과 다르게 이상하게도 <월드워 Z>는 농담을 하기로 마음먹고, 그 농담을 점점 강화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중간에 끼어있는 예루살렘과 북한에 대한 농담, 혹은 마지막에 들어있는 그 WHO에서의 액션 같은 것 말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온 몸에 퍼진 상태에서 연구동을 유령처럼 떠도는, 한때 전세계의 건강과 보건을 위해서 분투했을 그들의 기괴한 액션(어떤 블로거 분은 이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라고 탁월한 설명을 해주셨다)을 선사하는 것이 농담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아마도 이 제목 <월드워 Z>의 Z는 좀비의 Z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능성 없는 것으로서의 Z일지도 모른다. 즉 현실성의 정도를 A에서 Z까지 나눈다면, '월드워 A'는 소더버그 식의 이야기, 그리고 '월드워 Z'는 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영화의 안쪽이 아니라, 영화의 바깥쪽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단지 농담을 하기 위해서  이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본다는 것에 담겨진 의미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매 전쟁을 뚫고 표를 힘들게 구한다음 주말저녁 힘들게 차를 타고 나가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용케 자리를 찾아서 앉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두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견뎌낸 대가가 고작 농담이라고 말해질 때의 그 어떤 허탈감 말이다. 농담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이 가장 바보같은 것이라는 점은 고금불변의 진리지만, 그 농담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댓가라면 우리는 그 농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왜 보는지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아이고, 왠 오바질이야, 진짜 죽은 거 아니잖아요, 그거 다 아주 잘 만들어진 가짜 죽음이잖아요.

사실 문제는 그 '가짜 죽음'이다. 영화 기술이 발달하면서 특히 발달한 부분 중에 하나는 죽음의 묘사이다. 요즘의 눈으로 옛날 영화를 본다면 가장 눈에 띄는 어색함은 누군가가 죽을 때이고, 그것은 그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미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올수록 죽음의 묘사는 점점 정밀해지고, 그것은 마치 실제의 죽음처럼 보인다. 과거의 영화가 카메라 눈속임으로 배에 칼이 꽂히는 장면을 묘사했다면,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으로 배에 칼이 쑥 들어가는 장면을 클로즈업하여 자연스럽게 슬로우로 보여줄 수도 있다. 즉 죽음은 거의 진짜와 같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인식이다. 그것이 너무 정밀해지다 보니 그 죽음들은 거의 농담처럼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거의 실물과 같은 죽음을 보고도 그것이 진짜 죽음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혹은 거대한 대규모의 죽음을 영화관에서 보면서도 웃고 있다. 그것이 가짜임을, 혹은 거대한 농담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예전의 영화들에서 이상하게 진화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어떤 죽음들은 기술적으로 어설펐지만, 우리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동의하지 않으면, 그 죽음들이 너무 어설프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영화보기'라는 행위 자체가 이어질 수 없었다). 즉 우리는 그것을 눈에서 가짜라고 받아들였지만, 머리 속에서는 진짜라고 인식했다.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눈에서는 진짜라고 인식하지만, 우리는 머리 속에서 그것을 가짜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이게 도통 좋은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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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3-07-0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곡차곡 쌓여진 장면들은 구속을 조금씩 끌어올려 기어코 당신이 삼진을 당하게 만든다. 그래서 당신은 덕아웃으로, 아니 집으로 돌아가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 이런 상황은 허무하죠 ㅋㅋ 빌 어거스트나 마크 포스터가 영화잘만든다는 생각은 안했는데 그게 계속해서 드러나나 보죠? 월드 워z는 촬영감독이 로버트 리챠드슨이라서 볼 마음은 있지만 기대는 그게 다네요 ㅋ 오히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데이젼>이 짱이죠~<매직 마이크>, <헤이와이어>는 지금 생각해도 올해의 영화란 말이죠~ 그런데 요새 mlb좀 보시나요? 아주 본격적으로 달려들면서 보고 있는데,,정말 재미있더군요,,전에는 kbo가 최고의 재미를 선사했는데,,이맛을 알고 난다음 도저히 못보겠던요,,진심으로 엘쥐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요 ㅋ 저는 뉴욕 메츠의 맷 하비가 지금 오른손 정통파워에 계를 있을 것 같던데요,,피츠버그의 신인 게릿 콜도 괜찮던구요, 아직 3경기만 했지만요,,지금 리그 통틀어서 가장 좋아하는 투수는 왼손 정통파 클레이튼 켜쇼지만요 ㅎㅎ

맥거핀 2013-07-03 15:01   좋아요 0 | URL
스티븐 소더버그는 정말 '영화 장인'이라는 말이 잘 어울려요. 많은 영화를 만들면서도 각 영화의 수준이 (높은) 일정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니..<헤이와이어> 뒤늦게 집에서 보았는데, 영화가 좋더군요. 여주도 맘에 들고...

저는 아직 막장 한국야구에 빠져 있습니다. 엘지팬이면 요새 야구를 안보실 수가 없을껀데..ㅋㅋ 매년 엘지팬들의 패턴이 있잖아요. 처음에 시즌이 시작할 때는 부푼 마음을 안고 야구에 열중하여 보다가 6월이 넘어갈 시점에 슬슬 mlb로 넘어가죠. 저도 작년까지는 그런 패턴으로 갔었는데, 올해는 아직까지 엘지의 게임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에 나온 굇수들은 잘 모르겠고(게릿 콜이 쩐다면서요? 요새 피츠가 잘 나가서 왠지 기분이 좋아요. 피츠가 망가지면 엘지도 망가질 것 같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우완정통파하면 제가 좋아하던 애들은 저스틴 벌랜더나 망가지기 전의 팀 린스컴 같은 애들이었는데...저는 사실 잊을 수 없는 그런 애는 케리 우드예요. 걔 데뷔전 보다가 어찌나 입이 딱 벌어졌던지...참 그러고보면 불꽃같이 태우고 사라진 투수들이 얼마나 많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