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 주세요.

 

시작할 때는 따뜻한 봄날이었는데, 끝날 때에는 어느덧 가장 추운 날이 되었다. 뭐든지 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아쉬움만 남는 것 같다.

 

여러 가지가 생각이 나는데, 일단 아쉬운 것은 예술 분야의 책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처음 서평단을 하려고 했을 때도 원래는 예술 파트를 하려 했었고, 예술 파트가 인문 파트에 통합되어 이 인문 파트 쪽에 지원할 때도 예술 관련한 책들, 특히 영화와 관련한 책들을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한 권도 보지 못했다. 물론 이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여건이 맞아야 가능한 것이겠으나, 조금 더 적극적으로 책도 추천하고, 좋은 책들을 찾아봤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같이 서평단을 하는 다른 분들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이 서평단 활동은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읽는다라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그 좋은 조건을 별로 활용하지 못한 듯 하다. 단순한 감상의 교환도 좋고, 비판적인 의견의 제시도 좋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물어도 좋은데, 결국 시간은 다 지나가고, 이제는 그저 몇 편의 글 밖에 남지가 않았다.

 

물론 가장 아쉬운 것은 성실히 읽고, 성실히 쓰겠다,라는 초반의 다짐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서평단 활동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책을 읽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글을 쓰는 일은 다른 일들 뒤로 하염없이 미뤄졌고, 결국 거의 매번 마감시간을 넘겨 글을, 그것도 별로 좋지도 못한 글을 올려야만 했다. 서평단 활동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약속인 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인데, 이 자리를 빌어 알라딘 서평단 담당님과 우리 인문/사회/과학/예술 서평단을 위해 수고해주신 가연님에게 인사를 동시에 전하는 바이다. (고맙고, 죄송합니다. 꾸벅.)

 

이번 11기 서평단을 통해 읽었던 책을 뒤돌아보면 개인적으로 책의 편차가 조금 느껴졌다. 좋은 책은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그렇지 못한 책은 읽는 것 자체가 고문에 가까웠달까. 좋았던 책 5권을 뽑아달라고 하신 것 같은데, 고심 끝에 골라본다. 나머지 책들은 공동 6등으로 해두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 자음과모음

 

저자의 글쓰기라고 할까, 말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그러면서도 적절한 깊이가 있는 내용과 메시지를 담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저자는 그 어려운 일을 성취해내고 있다. 

 

 

노동의 배신 / 바바라 에런라이크 / 부키

 

결국 글의 힘이란 체험에서 나온다. 물론 어떤 일들은 체험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과 연대의 문제에 있어서라면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결국 '그들'을 상정하여 그들과 자신을 갈라놓겠다는 것일게다. 그녀의 <희망의 배신>이나 <긍정의 배신>도 기꺼이 찾아보겠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 하비 리벤스테인 / 지식트리(조선북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예상외로 재미있게 읽었고, 새로운 관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음식을 먹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홍상수의 말을 빌리자면 네가 그렇다니까, 그런 것.) 출판사 외에는 다 마음에 든다.

 

 

광기 / 대리언 리더 / 까치글방

 

그간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여러 개념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러 풍성한 예를 통해 별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분야의 책임에도 '앎의 즐거움'을 느끼며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정신병자를 사회에서 걸러내기 위해, 은연중에 정신병적인 구조를 사용한다. 이는 물론 정신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얽힘의 시대 / 루이자 길더 / 부키

 

책의 마지막 저자 인사글을 보면 저자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랄까, 세상을 대하는 자세같은 것이 느껴졌다. 양자물리학을 다루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만들어낸 물리학자들에게 기꺼이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을 한명한명의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대하는 애정같은 것이 느껴져 더 매력적이다.

 

* 가장 좋았던 책

 

 

서평단 활동을 통해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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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2-12-0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습니다(짝짝짝짝).

그렇네요, 너무 느슨하게 통합된 거 아닌가요; 인문,사회,과학,예술이 한 카테고리...선택의 폭도 넓고 대신 채택될 확률도 엄청 적군요; 맥거핀님의 예술 책 리뷰도 몹시 궁금한데 말입니다+_+ (저는 대놓고 권유.....)

전 노동의 배신, 좀 불편했습니다. 뭐랄까, 이런 '체험'을 하고 있지만 나는 언제든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는 어조가 어떤 얇은 막처럼 계속해서 느껴졌거든요. 다름을 인지하는 자와 다름에 관심없는 자 중 어느 쪽이 더 잔인할까, 생각도 들었고요. 저자의 추진력과 기획에는 감탄하지만 글쎄, 전 오히려 격차만 느껴졌어요. 차라리 긍정의 배신 쪽이 더 공감가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시네마 톡>이라는 책을 읽었고 오늘은 영화이론(Robert Stam)이란 책을 빌릴까 합니다. (맥거핀님이 소개해주신 씨네21 추천도서에 있었던 건데 혹시 읽으셨는지요?)

...근데 왜 저는 이런 내용을 댓글에 쓰는걸까요; 그냥..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하하).

맥거핀 2012-12-05 01:08   좋아요 0 | URL
노동의 배신..무슨 말씀이신지 조금은 알듯도 싶습니다. 얇은 막..그렇죠. 얇은 막 같은 게 있죠. 아무튼 간에 역설적이게도, (아니 역설적이 아닌가요?) 그녀는 이 책들로 명성을 얻게 되었으니까요. 그녀의 책속의 한때 동료들은 계속해서 힘든 파고들을 지나야만 하겠죠. (저는 이것이 한편으로는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 도용 혹은 표절 논쟁의 이면에 박힌 어떤 포인트와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책에서 유머를 구사하는 방식이랄까, 글을 쓰는 방식이라는 측면에서는 특히 그 얇은 막은 더욱 두꺼워지는 듯한 인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책을 읽는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그만큼도 즉, 그 막을 조금이나마 얇게 만드는 데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책을 쓴다는 지식인들이 '그만큼도' 해내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을 그래도 그녀는 저는 조금은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견해도 충분히 존중합니다만...

이제 서평단 활동 끝냈으니 제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작정입니다. 대놓고 권유하시니 읽고나면 뭔가 남겨보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스탬의 영화이론은 몰라요. 하하. (씨네21이 추천했지, 저는 추천한 적 없다고 발뺌을 해봅니다.)

2012-12-0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인문사회분야를 신청하신 내막엔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한권도 읽지 못했다니 아쉽네요. (저는 왕년에 예술 분야 서평단을 했었는데, 영화관련 책 딱 한 권 읽었었지요. 근데 그 책은 정말 별로였어요.)
'출판사 빼고 다 맘에 든다'에서 킥- 웃음이 났네요. 막달의 두권이 모두 5위를 차지했군요. '얽힘'이 1위라니, 책은 못 읽어도 맥거핀님 리뷰라도 잘 읽어보렵니다..ㅎㅎ
저도 서평단 끝나니까 읽고 싶은 책을 맘껏 읽자! 하는 자유로운 느낌이 있어서 좋아요. 실제 독서량은 미미하지만..

맥거핀 2012-12-06 18:25   좋아요 0 | URL
알라딘 측에서 이왕하는 거 분야를 독립시켜줬으면 좋겠는데, 한번 통합되었으니 다시 나누기도 힘들겠죠. 과학과 예술이 결합되어 따로 파트가 나오면 좋을 것 같지 않나요? 근데 어떤 영화관련 책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섬님 영화 얘기 읽으시는 거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근데 말은 그렇게 해도 아무래도 독서량도 줄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래도 일단은 그동안 미뤄놓았던 책을 중심으로 좀 보기는 해야죠. 안 읽고 버려둔 책이 너무 많아서...
 

 

 

 

 

 

 

 

 

 

 

 

터치, 민병훈, 2012

 

 

 

민병훈 감독의 영화 <터치>는 영화 그 자체보다 다른 것으로 화제가 된 안타까운 영화다. 뭐 그것은 알려진대로 교차상영과 그에 반발한 감독의 종영 선언과 관련한 이야기. 교차상영에 관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끄적거릴 이야기도 그렇게 영화의 내용과 관련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튼 웃긴 것은 이 교차상영은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만은 아니고, 모든 책임을 배급사나 멀티플렉스에 돌릴 수도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멀티플렉스는 많은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명분으로 탄생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여러 사람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요즘의 관객들이 '이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단 간단하게는 요즘에는 거의 모든 것들이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요즘에는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도중에, 심지어는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영화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며, 판결은 수치화되어 바로 점수와 랭킹이 매겨진다. (최근에 들어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트위터에 그 영화의 단평을 남기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어떠한 영화이든 간에 영화는 보는 이에게 머물러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바로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어 급속하게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보다 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요즘의 '이해'가 보여주는 어떤 양상들이다. 이상하게도 요즘의 관객들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관대하지만, 주인공들의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점점 관대해지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좀 바꿔보자. 요즘의 관객들은 이야기가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보다 잘 견디지만, 주인공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것에는 보다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 사람들의 이해도, 이해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싶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이해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의 능력보다는 이해의 태도가 문제가 되니까.) 이야기가 복잡하거나, 일부러 결락을 만들어 놓은 영화들을 보고 나서는 여러 다른 것들을 찾아보며 어떻게든 이야기의 얼개를 맞추려는 관객들은 많아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어떤 행동, 생각을 보여줬을 때 그것이 나의 생각과 다르면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보다는 바로 낮은 평점으로 징벌을 내리는 관객들 또한 많아졌다.

물론 이것의 책임을 다른 여러 곳에 돌리거나 영화 그 스스로에게 물을 수도 있다. 요즘에는 이야기는 한껏 복잡해지지만, 주인공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너무 쉬운 방식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점차 심해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작품들은 설명하는 씬들, 잉여의 씬들이 너무 많아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주인공의 감정은 과도한 클로즈업과 구슬픈 음악들로 설명조로 제시되고, 그것도 모자라 대사로서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다시 설명하고야 만다. 반면 이야기는 소위 반전을 만든다거나, 관객의 허를 찌른다는 이유로 쓸데없이 복잡해지고 있으며, 멀쩡히 놔두는 것이 훨씬 나은 이야기들을 억지로 뒤집고 자르고, 숨기고 있다. (한편으로 드라마나 영화는 아니지만, 예능 프로그램들을 가지고도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요즘의 예능들은 보는 이들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컨트롤하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내용을 보고 그 내용에 감동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에 커다랗게 쓰여진 '감동!'이라는 글자를 보고 감동하는 것일까. 물론 예능들은 아예 대놓고 자신들은 시청자가 10세 이하의 아동이라고 생각하고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10세 이하의 아동들에게도 "여기서 감동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이 관객들의 인내심을 혹은 역치를 점점 낮추는 것은 아닐까. 상당수의 관객들이 그것에 놓여져 있는 어떤 공백의 상태(사실 정확히 말하면 공백인 경우는 없지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런 것들을 쉽게 설명해주는 방식에 너무 길들여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도대체 왜 견뎌야 하지, 영화는 견디지 않기 위해서 - 그러니까 즐기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닌가. -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는 답해줄 말이 없다. 아니 우리의 인생도 그런 수많은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이 영화라는 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민병훈 감독의 영화 <터치>에서 주인공들은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이 영화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주인공들에게는 계속 퀘스트가 주어지고, 계속해서 악마의 시험이 들이닥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괴롭다. 괴로운 99분의 체험. 그러나 그 1시간 39분을 견디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그 시간 동안을 견디며 앉아있는 것이 필요하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만약 30분 견디고 10분 쉬고 하는 것이 영화의 감상에 더 좋다면, 모든 영화를 그런 식으로 상영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그런데 그렇게 견디다 보면 이상한 감동이 온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내몰린 사람들이 영화의 어떤 시점에 이르러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선택으로 나아갈 때에 그것을 보는 감동. 정성일 식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내내 내몰려 있다가 비로소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결국 비범한 선택을 한다(그러니까 그들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초반의 설정들은 사실 선택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으니까. 정성일의 말대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선택'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선택은 선뜻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분명히 나도 그런 위치에 놓여지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러니 나는 그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때서야 비로소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겨우 이르렀기 때문에, 즉 다른말로 하면 그 선택은 그들이 선택할 수 없는 체험의 끝에 결국 주어진 것이므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때로 영화는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그것에 대한 어떤 감동의 필수조건은 이해가 아니다.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주인공의 어떤 행동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의 범주 안에 들어있다는 이야기이다. 즉 그것을 흔히 리얼하다거나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류의 감동은 때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때 우리 안에 나타난다. 영화는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견뎌내는 것이기도 하며, 그렇게 견뎌냄으로써 우리는 도리어 현실에 가깝게 다가선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이 현실을 벗어남으로써 도리어 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화, 혹은 예술의 가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의 이해 여부와 예술의 가치는 무관하다. 아니 도리어 예술은 이해를 벗어남으로써 예술로서 나아간다. 예술은, 아니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관객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 (이것은 관객을 계몽하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관객이 무지몽매하니 그들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는 더더구나 아니다. 이야기를 잘라내거나 복잡하게 꼬아버림으로써 앞질러 나가는 것, 혹은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입하여 앞질러 나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앞질러 나가려는 하나의 시도는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이 아닐까. 최근에 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에서 자크 리벳의 <도끼에 손대지 마라>를 보았다. 19세기 프랑스 귀족사회에서 앙투아네트(랑제 공작 부인)와 아르망 장군의 사랑을 그린 발자크의 소설 <랑제 공작 부인>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영화의 어떤 특이한 형식적인 시도가 눈에 띈다. 그것은 자막의 활용인데, 이는 화면과 병치하여 존재하는 영화적인 시도로서의 자막이 아니라, 검은 바탕화면에 흰글씨로 나오는 무성영화, 혹은 오페라나 연극식의 자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의 자막은 이야기의 진행을 돕는 보조도구로서 기능하는데 '다음날', '그날 저녁' 식의 자막은 물론이고, 며칠이 지나 어디로 이동했다거나, 몇 시간째 그를 기다렸다거나 하는 자막이 계속하여 나온다(즉 '이동한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리고 싶으면 이동수단을 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대사로 처리하는 일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그것을 그저 자막으로 처리하여 버린다). 그것은 극의 진행을 넘어서, 사랑으로 괴로워했다는 식의 간략한 감정을 설명하거나, 지금까지 본 부분은 사랑의 사회문화적 양상이니 이제 사랑의 종교적 양상을 보자는 식의 논평적인 부분까지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 영화야말로 관객에게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관객을 바보 만드는 영화의 전형적인 예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가장 큰 흐름, 아르망 장군과 앙투아네트의 사랑에 담긴 게임적인 요소의 미스테리는 이것으로서 도리어 강화되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서의 자막들은 영화의 중간중간 관객에게 그저 보여주는 감독의 패이다(어떤 게임도 패를 아예 보지 않고서는 게임을 진행할 수 없다. 아니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패의 일부는 보여주어야만 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사소한 전개에 관계된 내용들은 간단하게 전달하겠다는 감독의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며칠이 지났는지, 어디로 이동했는지 같은 것에 왜 쓸데없이 머리를 써, 그보다 이 영화에 머리를 쓸 것은 이 두 사람의 관계라는 감독의 대답이라고 할까. 즉 전적으로 이것의 힘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 자막들은 관객이 이 두 사람의 관계에 주목하게 하고, 이들의 관계의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우리는 그 자막들로서 영화에 조금 더 가깝게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 쓸데없이 그만 좀 비틀고, 관객을 어떻게하면 좀 더 영화에 들어오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필요없는 수식들로 영화를 잔뜩 포장한 후 영화를 보고나서 그 내용에 대한 질문을 인터넷에 올리게 하는 것은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을 점점 밀어내는 것이다. 영화를 어떻게 하면 사람들 안에 오래 머물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영화는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뭐 그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나, 자막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실험이나 시도일 수 있다. 아무튼 할 수 있는 마지막 이야기는 하고 글을 끝내야 겠다. 이 <도끼에 손대지 마라>는 1928년생 영화감독이 2007년에 만든 영화이다. 그리고 <터치>는 교차상영으로 종영하기에는 상당히 아까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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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1-2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예요! 그러니까 좋은 영화인데 그걸 보는 인간들은 맘에 안 들더라..그런 얘기 맞죠? 이 영화..김지영이 일생일대의 연기변신을 시도했고 이걸 찍으려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난 번에 [광해] 보고 온 이후로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으악 정이 뚝 떨어져버려서.. 극장공포증에 걸린 것 같아요. 여기서는 멀티플렉스 아닌 극장을 찾기 힘들고 저는 백화점/쇼핑몰/시내에 가기가 싫어요.

그러니까 내용도 좀 알려주시면 안돼요?(라고 묻는다..관객의 제일 나쁜 자세!)

맥거핀 2012-11-22 17:12   좋아요 0 | URL
제 중언부언을 이렇게 간단하게 줄여주시다니, 님좀짱인듯.^^ 어 그니까 이 영화가 무슨 내용이냐면, 사슴이..그러니까, 사슴을..아니 사슴이 나오는데..(궁금증 유발전략)

아무튼 김지영 씨나 유준상 씨 역할이 기본적으로 계속 힘들어하는 역할이라 연기를 하기에도 좀 힘들었을 듯 한데, 아무튼 이런 식으로 영화가 묻혀 버리면 주연배우로서는 화가 좀 나기는 할 것 같아요. (감독은 물론이구요.)

저도 멀티플렉스 안 좋아해요. 특히 영화시간 많이 남았을 때 시간 때워야하는데, 멀티플렉스는 대부분 너무 시끄러워서, 조용히 책 볼 데도 없고..난감할 때가 많죠. (도대체 극장 안에 오락기는 왜 설치하는 것임?)

다락방 2012-11-2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저도 이 영화 토요일날 보려고 예매해두었어요. 저 역시 말씀하신 그 기사를 보았거든요. 그 기사를 보기전까지 이 영화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지 못했던 터였는데, 뭐랄까, 저는 반발심이 생겼어요. 나만큼은 송중기를 보는 대신 터치를 선택하겠어, 하는 그런 심정 말이죠. (이것은 영화를 관람하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일까요?)

제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교차상영으로 종영하기에는 아까운영화라고 하시니 기대를 해봐야겠어요.

맥거핀 2012-11-24 16:54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어서 이미 영화를 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거의 상영하는 극장이 없어서 혹 저랑 같은데서 보실지도 모르겠고..(저는 필름포럼) 저도 사실 우연하게 보게 되었거든요. 이 영화 말고 다른 영화보려다가 어찌어찌한 몇 개의 일들이 겹쳐서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위에 글에도 있지만, 이해의 능력이 아니라 이해의 태도니까요. 다락방님 나름대로 영화를 받아들이시면 되죠. 혹 보시고 가능하면 글 남겨주세요.^^

프레이야 2012-11-22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준상, 김지영을 연기자로 믿으니 볼 예정인데, 힘든가요??
그래도 볼래요. 왜 주인공들이 이해가 안 되었던 건지 나도 사람들처럼 그런지
확인해 볼까 싶기도 하고... '이해'라는 것, 꼭 필요할까요? 어차피 주관적인 것.
삶에서 무수한 것들이 이해불가한 것들인 걸. 맥거핀님의 생각에 동감이에요^^

맥거핀 2012-11-24 16:57   좋아요 0 | URL
네..사실은 좀 힘들기는 합니다. 쉴새없이 앉아있는 사람을 몰아붙인다고나 할까요. 근데 저는 그 몰아붙임의 마지막에서 뭔가가 왔거든요.

맞는 말씀이에요. 사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혹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삶에서 무수한 오해와 왜곡 속에 둘러쌓여 있잖아요. 영화에 대해서도 조금 더 관객들이 관대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Arch 2012-11-2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게 제맛인데 언제부턴가 극장에서 영화보는게 불편해졌어요. 저 역시 사람들이 나오면서 이런 저런 평들이 들릴 때 참 곤혹스러워요. 뭐랄까. 나는 그 부분이 잘 정리가 안 됐는데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모자란 것인지 그토록 영화가 선명한건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두달 전에 '여행자'를 봤는데 영화의 롱테이크로 찍은 창문씬이 계속 기억에 남아요. 사실 별로 특별할게 없는 장면이거든요. 카메라가 창문을 원경과 근경으로 잡고 있는데 주인공이 총에 맞아 죽는.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나요. 그 장면과 그 분위기, 그 느낌이 어떤건지 명확하진 않지만 '그녀에게'를 보면서 두 여자가(이마저 정확하지 않지만) 누워서 해를 쬐는 장면처럼 기억에서 떠나지 않아요. 요즘 영화는 그런 장면, 뭔가 환기시키는 분위기는 없어요. 관객들의 눈높이기도 하겠고 영화가 예술이기보다 산업으로 받아들여져서인 것 같기도 해요.

막연하게 왜 영화를 본 사람들은 저런 소리를 할까 싶었는데 맥거핀님 얘기를 들으니까 그렇구나, 싶어요. 정성일씨 책은 참 재미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데 자꾸 보면 나도 씬과 쇼트, 사운드를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고.

Arch 2012-11-22 23:02   좋아요 0 | URL
댓글이 너무 길어요 ㅡ,.6

맥거핀 2012-11-24 17:04   좋아요 0 | URL
실제로 몇 주전의 경험인데, 작은 극장들을 가면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통상 불을 안키거든요. 근데 어떤 분이 휴대폰을 꺼내서 무엇인가를 적으시더라구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불빛이 워낙 세서 어쩌다보니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트위터에 감상을 올리고 있더라구요. 아이쿠나 싶었죠. 뭐 바로 생생한 감상을 남기는 것이 왜 나쁜가..그럴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요즘에 어떤 영화들을 보면 너무 매끄럽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영화를 보다가 말씀하신대로 툭 걸리는 지점이 없어요. 위에 든 <도끼에 손대지 마라>도 보면 초반 장면에 수도원을 확대해서 잡는 장면이 있는데, 통상 줌을 쓰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상하게도 점프컷을 쓰거든요. 그게 이상하게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근데 아무튼 요즘에는 공식대로 간달까, 말 그대로 스무스하게 진행하는 영화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 영화들은 눈에 걸리지 않고, 어딘가로 죽 빠져나가는 느낌들이 들어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꼭 정성일 씨 뿐만이 아니라, 가끔 씬과 쇼트에 대해 분석해놓은 글들을 보면, 대단해보이기도 하지만, 좀 징글맞기도 하죠..^^

Mephistopheles 2012-11-2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발전하는 만큼 관객들도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맥거핀 2012-11-24 17:06   좋아요 0 | URL
아..제가 하고싶은 얘기가 그 얘깁니다. 좋은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도 좋은 관객이 되야겠죠.

2012-11-23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3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4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넙치 2012-11-23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이 날다>를 보면서 그야말로 런닝타임을 견뎌 냈던 터라;; 민병훈 감독 작품은 무의미한 실험이라 단정짓고 쳐다도 안 보게 되었는데 글 읽으면서 뜨끔해지면서 영화가 궁금해지네요.


맥거핀 2012-11-24 17:26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민병훈 감독의 영화를 이번에 처음 보았습니다. 근데 여러 의견을 보니 이번 영화는 예전 영화들보다 스토리라인의 구조가 훨씬 살아난 영화라는 견해들이 있더군요. 제 생각에도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지루한' 영화는 아닙니다. 도리어 사건이 너무 많이 들어있어서 계속 이야기에 휘둘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어렵거나 현학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우리 스스로를 주인공과 동일시했을 때 어느 정도는 '견뎌내야'하는 부분들이 있겠죠.^^

아이리시스 2012-11-2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사슴에 대해서 우리는 토론을 해야 해요!!! 사슴 나올 때마다 멘붕됐어요ㅠ.ㅠ

맥거핀 2012-11-27 23:43   좋아요 0 | URL
근데 그 사슴 꽤 이쁘지 않았습니까. 제가 위에 사슴 어쩌구 얘기할 때 비유인줄 알았죠?

아이리시스 2012-12-03 19:37   좋아요 0 | URL
비유일 수도 있고 사슴농장이 나오나 보다..라고 생각을 하긴 했었어요. 그런데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비극이죠. 저는 사슴인가 봐요(응?).

맥거핀 2012-12-04 00:32   좋아요 0 | URL
근데 저도 중간에 골목길에서 사슴이 나올 때는 멘붕이 왔어요. 그 사슴이라면 되게 좋은 의미 아닐까요? 그러니까 사슴 하세요.^^
 

 

간만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살만한 책이 있는지 휘휘 둘러보았으나, 그다지 건질만한 책을 발견할 수 없었다. 왠지 예전보다 책이 좀 줄었다는 느낌이었는데, 알라딘이 서울 여러 곳에 중고서점을 열면서 책도 그만큼 분산되는 것일까?

 

그래서 타겟을 돌려 DVD와 음반을 집중적으로 보았는데, 운좋게도 한동안 절판되어 찾기 어려웠던 <질투는 나의 힘> DVD를 발견, 득템. 이 <질투는 나의 힘> DVD는 영화 본편도 본편이지만, 박찬옥 감독과 배우들의 코멘터리 외에도 박찬옥 감독이 봉준호 감독을 초빙하여 진행한 코멘터리가 들어있다는 것이 특징(이번에도 "아니, 도대체 저 장면은 어떻게 찍었죠?"를 얼마나 날려줄지 기대중). 그밖에 박찬옥 감독의 단편 <느린여름>이 스페셜 피처로 들어 있으므로, 박찬옥 감독의 팬이라면 상당히 챙겨볼만한 DVD임.

 

 

 

이라고 생각하며, 8000원에 득템했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 심심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다가 멘붕이 왔다. 이 <질투는 나의 힘> DVD를 3000원대에 새 것을 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필요이상으로 과잉공급된 내 돈도 돈이지만, 우리 찬옥찡의 이 좋은 영화가...하며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클릭질을 하며 판매제품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일단 '역수입 한국영화 할인'이라는 미스테리한 말머리가 붙여져 있는데다가, 이렇게 팔고 있는 한국영화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눈에 띄는 작품만 해도, 윤종찬의 <소름>,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 이정향의 <미술관 옆 동물원>, 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 등등.

 

궁금해서 좀 더 캐보니 이 영화들은 '씨네라인(Cine Line)'이라는 외국의 미스테리한 회사에서 제작되어 국내로 들어온 것들. (http://kongkwak.blog.me/140159202975  http://dvdprime.donga.com/bbs/view.asp?bbslist_id=1650203&master_id=20 등 참고.) 2-3년 전부터 판매되다가 단속으로 판매가 중단되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계속 팔리고 있는 듯(심지어 교보 같은데서 판매하는 할인 DVD에도 종종 끼어있는 듯). 제품의 화질과 음질, 그리고 자켓의 인쇄상태 등이 조악하다고 하니 '씨네라인(Cine Line)'이라는 제작사의 DVD는 구입을 조심하시길.

 

다행히 내가 구입한 것은 '스타맥스'에서 제작된 정품(<질투는 나의 힘>의 경우 'KD미디어'에서 나온 아웃케이스 판이 있음. '스타맥스'것은 킵케이스).

 

 

추가.

 

근데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알라딘에서도 이 '씨네라인'의 DVD를 판매하고 있군요. 대표적인 예가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인데, 이 씨네라인 DVD를 알라딘 특가라는 이름으로 2900원에 판매하고 있네요. 정가 16500원인데, 82%할인이라는 명목으로 말이죠. 그런데 16500원은 '덕슨미디어'에서 국내정식 출시한 DVD 가격입니다. 제조사가 다른데 동일한 제품이라고 할인해서 판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사기죠(더구나 '짝퉁'에 가까운 제품을요). 뭐 알라딘에서 좀 의심스러운 DVD를 파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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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2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라인, 조심해야겠군요. 할인품 중 어떤 건 음량이 너무 낮아 볼륨 최고로 올려들어야 돼서 별로더라구요. 김명민, 장진영 초기작 소름, 좋게 봤어요. 디비디 구매한 지 오래전에요. 좋은하루 보내세요, 맥거핀님.^^

맥거핀 2012-11-21 15:40   좋아요 0 | URL
사실 그래도 재생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재생조차 안되는 경우가 있어요. DVD 1장 짜리 경우에는 듀얼레이어인 경우가 많은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할인품들은 거의 싱글레이어죠. 그러니 화질과 음질이 나빠질 수 밖에요.

저도 소름은 좋아하지만, 가슴이 아픈 영화이기도 합니다. (소개팅녀와 이 영화를 봤다가, 연락이 끊어짐..;;)

프레이야 2012-11-21 19:18   좋아요 0 | URL
꽈당ᆢ 소개팅녀와 볼 영화론 너무 센대요.
맥님이 잘못하셨어요. ㅠ 아까워라. ㅎㅎ
왜 제가 다 아깝죠ㅋ

맥거핀 2012-11-22 16:43   좋아요 0 | URL
네..제가 잘못했습니다(보기 전에 검색만 열심히 했어도..)ㅋ
그분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계시겠죠.^^

2012-11-21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라인 조심! 좋은 정보네요.ㅎ 2900원짜리를 조심해야겠군요.
그나저나 소개팅녀와 소름을 보시다니 왜 그러셨어요~. 그런 영화는 친구랑 봐야져..ㅋㅋ

맥거핀 2012-11-22 16:45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친구도 친한 애랑 봐야지, 안 친한 애랑 보면 괜히 사이가 나빠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ㅋ

암튼 알라딘도 그렇고 다른데도 그렇고 싸게 파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조심하시길..

Shining 2012-11-2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DVD 잘 사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특히 온라인은 조심해야하는..
이벤트 당첨되어서 받은 DVD들도 어쩐지 수상해보이는 것들이 많은 걸 보면(그것도 영화쪽에 응모한 거였는데요) 조심해야합니다_- 최근에 제가 산 DVD는 <더 문>이었습니다(그냥 말해봅니다ㅎㅎ).

맥거핀 2012-11-22 16:48   좋아요 0 | URL
아..무슨 영화인지 몰라 찾아봤어요. 의외의 영화네요. SF는 안보실 듯한데..최근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출시되었죠. 살까말까 고민중..

근데 속마음을 좀 더 말해보면 사실 싸구려 리핑판이라도 좋으니 구하고 싶은 DVD들이 좀 있기는 해요. 출시만 되면 감사합니다..그런 영화들. 좋은 온라인몰 아시는 데 있으면 공유 좀.

Shining 2012-11-23 12:27   좋아요 0 | URL
예, 제가 SF를 잘 안 보긴 합니다만ㅎㅎ 이 영화는 좋더군요, 샘 록웰(락웰?)이 연기를 잘 한다는 걸 잘 몰랐는데 이 영화 보고 재발견한 기분이었어요. 하필 <뉴 문>과 같은 해에 나와서 다들 "아, 그 영화?"이러길래 "뉴 문 말고"라고 말하는 게 버릇이 된 영화였어요_- 제가 참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네, 그런 영화 있어요-_ㅠ 해피 투게더, 구스 반 산트, 타르코프스키 영화, 가 그래요 저는. 이놈의 나라는 음반 아카이빙 뿐 아니라 DVD 시장도 조악해요_-

좋은지는 모르겠고 가끔 들어가는 데가 있긴 한데 집에 있는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어서; 찾아보고 알려드릴게요 :)

맥거핀 2012-11-24 18:02   좋아요 0 | URL
아..그래요? 저도 한번 영화를 찾아서 봐야겠군요. SF를 잘 안보시는 분이 좋아하는 SF란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DVD로 출시되지 않은 많은 영화들...어떤 영화들은 파일로 가지고 있는 영화들도 있는데, 자막이 없거나, 영어자막만 있는 영화들이 있어서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어요.(영화보면서 영어공부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Shining 2012-11-29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제가 말했던 사이트는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까 제가 맘에 안 드는 DVD를 사고 홧김에 사이트를 지워버린 기억이...-_- 지금 제 노트북에 즐찾 된 영화 관련 사이트는 KMDB와 Kofic, 한국영상자료원, 아마존DVD 이렇게군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으셨죠?-_ㅠ 혹시 기다리셨다면 죄송, 도움이 되지 않아서 더 죄송한 바입니다ㅠ

맥거핀 2012-11-30 14:46   좋아요 0 | URL
저도 혹시나하고 여쭤봤던 건데요.^^ 하긴 근데 알아도 최근에 DVD를 사게되도 거의 중고를 사는 편이라..(DVD라는 게 뭐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중고를 사는 게 더 좋더라구요.) 집에 있는 DVD도 구매 후 보지 않은 게 수두룩 하고요.

책도 그렇고, DVD도 그렇고, 요새는 있는 것부터 일단 보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칭 포 슈가 맨, 말릭 벤젤룰, 2011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안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영화의 전체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며칠 전 이 영화 <서칭 포 슈가 맨>을 얘기한 리뷰에 나는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페이크 다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댓글을 썼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어쩌면 페이크 다큐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진짜처럼 만들어진 가짜가 가짜처럼 만들어진 진짜를 밀어내는 시대에 만들어진 잡동사니형 인간. 그 인간은 그래서 위키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인터넷 시대에는 아무리 가짜여도 많이 언급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진짜가 되니까. (그래서 누구나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즉 많이 수정되면 수정될수록 더 진짜일 확률이 높다고 받아들여지는 이 위키라는 것은 현생 인터넷이 만들어낸 최고의 물건이자 최고의 판정가가 아니겠는가.) Rodriguez 혹은 Sixto Diaz Rodriguez 혹은 Jesus Rodriguez라는 이 인물은 곧 위키가 판정을 내려준다. 1942년 7월 10일이라는 태어난 날이 기록된 진짜. 죽은 날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살아있는 뮤지션이라는 판정.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여전히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몇 가지의 이상한 얘기들이 여기에는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기록되어 있고, 위키에도 기록되어 있는 몇 가지의 이상한 이야기. 그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미국에서 몇 명의 프로듀서에 의해 발굴된 후 <Cold Fact>와 <Coming From Reality>라는 두 장의 앨범을 냈으나, 그 앨범은 거의 사장되어 버렸고, 그는 그대로 묻혀버렸다. 뭐 여기까지는 흔히 있는(뭐 그에게 앨범을 내준 레코드사 사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참담한 실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는 그의 앨범이 미국에서 총 6장이 팔렸다고 주장하니까) 그저 그렇고그런 실패담이다. 그런 그가 다시 되살아난 것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이다. 알 수 없는 경로로 들어온 그의 앨범은 당시 폭압적이고 체제에 의한 검열이 횡행하는 남아공에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각광받았고, 그는 남아공에서 비틀즈나 앨비스 프레슬리 못지 않을 정도로 알려진 뮤지션이 되었다. 단, 무대 위에서 오래전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미스테리 뮤지션으로서 말이다. 물론 위키에서도 친절하게 요약하고 있듯이 그가 죽었다는 것은 잘못된 소문이고,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채로 1990년대 말의 어느날 남아공에서 걸려온 한 전화를 받게 된다. 당신은 남아공에서 비틀즈만큼 유명하며, 수십만장의 앨범이 팔렸으며,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있다는 그런 전화를 말이다.
 

이 이야기 자체에는 표면적으로 몇 가지의 이상한 사실들이 들어있다. 남아공에서는 그가 이미 죽은, 그것도 무대에서 분신을 꾀한 전설적인 뮤지션으로 알려져 있었던 사실이나, 로드리게스 역시 남아공에서 자신의 앨범이 그렇게나 많이 팔리고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는 점을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그 로드리게스가 그 이후 남아공에 지속적으로 머물지 않고, 단 몇 번의 공연 후 건설노동자라는, 음악 실패 후 20년 동안 생계를 지탱하게 해준 직업으로 돌아갔다는 사실도 그렇다. 물론 가장 놀랍고도 믿기 어려운 사실은 그의 앨범이 남아공에서 수십만장 넘게 팔리며 큰 인기를 얻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영화의 힘은 바로 그 부분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바로 그의 노래가 체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검열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과 그의 삶을 병치하여 보여주는 이 영화의 후반부 구성이 만들어내는 힘 말이다. 그가 다시 평범한 노동자라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증명하는(우리네 상식으로는 이제 남아공에서 추억팔이 공연이나 하면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 같은데도) 그의 삶에 대한 태도로 만들어진 노래가 남아공에서 체제의 검열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부분 말이다. 즉 그는 차갑고 비참하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디트로이트의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의식을 그대로 그의 노래에 반영했고, 그의 노래들은 그러므로 노동의 노래, 노동자의 노래, 도시빈민의 노래, 가난한 자들의 노래였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지구 반대편이라는 거리와 20년이라는 시차를 넘어 더 나은 삶을 희망하던 남아공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에게 따스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상한 일이면서 동시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참하고 억압된 삶을 살지만,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들은 비슷한 것을 공유하니까 말이다.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대체로 디트로이트의 차가운 풍경을 부감으로 찍은 화면이나 남아공의 과거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여 흐르나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의 음악이 현재의 그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여 흐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노동일을 하러 나가면서도 정장을 갖춰입는 그, 더 나은 삶을 만들어내기 위해 실현가능성이 별로 없음을 알면서도 시장 후보에 출마하고, 가난하게 살지만 문화적으로는 풍성하게 딸들이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박물관, 도서관에 늘 딸들을 데리고 다녔던 그가 비틀비틀 쓰러질 듯한 걸음걸이로 일을 하러 나갈 때 울려퍼지는 그의 음악들과 그의 현재의 삶이 겹치는 순간을 보는 것 말이다. 희망을 잃지 말자고, 언젠가는 그 희망이 삶이 될 거라고 말하는 수십년 전 그가 만들어낸 음악들이 현재의 그에 겹치는 것을 보는 것은, 극도의 보수적인 체제 억압에 시달리던 남아공 사람들에게 진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영화 전반부의 사실 외에도, 동시에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의 성취를 결국 본 현재의 그에게도 일종의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됨을 받아들이게 된다(크리스마스 2주 전에 실직될 것을 예언하던 그의 노래처럼 말이다). 물론 이 자기충족적 예언은 로드리게즈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십여 년만의 남아공 공연에서 로드리게즈가 단지 무대에 서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쏟아지는 기립박수들, 그 박수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타나준 로드리게즈에게 보내는 박수이자, 지난 십여 년간을 잘 버텨낸 자신들에게 보내는 박수이며, 십여 년전에 자신들이 로드리게즈에게 위안받았듯이, 이제는 로드리게즈가 자신들에 의해 위안받음을 알고 있는 박수이다. (아마도 로드리게즈가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 것은 그 박수들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만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온전히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 노래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합쳐서 이루어진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러므로 그도 돌아가 자신의 삶을 계속할 밖에. 위안은 어딘가에서 얻어질 수 있으나, 그 위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자신이므로.) 그렇게 지구 반대편의 거리와 몇 십년간의 시차를 두고 위안은 반복되며 결국에는 되돌아온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러니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 관객들도 위안받지 혹은 위안을 보내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위안은 반복되니까. 지금 우리가 받는 혹은 보내는 어떤 위안은 언젠가, 어느 곳에서나 알 수 없는 형태로 돌아와 우리에게 위안이 되거나, 우리가 누군가의 위안이 되도록 할 것이다.  

 

 

덧.

다만 한두 가지 정도는 더 언급해두고 싶다. 먼저 한 가지는 이 영화의 어떤 선택에 대한 부분이다. 로드리게즈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며, 그런 로드리게즈가 어떠한 뮤지션이었나를 추적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초중반부까지의 흐름에 대해서 말이다. 즉 현재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시점에서는 감독과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로드리게즈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고, 이미 그와의 재회도 이루어진 후다. 즉 이것을 일종의 추적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것(그리고 제목을 'Searching for Sugar Man'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선택이 유용했는지, 그리고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물론 후반부의 극적인 효과를 더 강화하며, 전반부에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후반부의 로드리게즈의 삶의 궤적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면도 있다. 즉 로드리게즈가 죽었다고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말 그대로 음악적인 활동을 완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노동자라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여기는 그의 어떤 삶의 태도와도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관객을 로드리게즈의 미스테리에 대해 궁금해하며 그의 삶을 추적하던 남아공의 그의 팬들과 동일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들이 로드리게즈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았을 때 받게 되는 위안을 관객들 역시 고스란히 경험하도록 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후반부에 남아공에서 그의 공연이 펼쳐질 때 우리도 눈물을 흘리며 그들 남아공 관객들과 같이 박수를 보내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금은 비정직한 방식이 만들어낸 어떤 위안, 서사적인 강화가 만들어내는 힘이 다큐라는 것에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다큐를 보는 것은 극영화를 보는 것과 달리 환영 바깥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것이며, 환영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게끔 하는 것에 일반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다큐도 '그것이 거짓'이라고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 그런 환영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그 환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다큐의 서사가 작동할 때, 우리는 그 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그 환영인가, 아니면 그 환영의 작동방식인가, 아니면 그 환영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인가. 우리가 환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계속 그 환영의 형태만을 구체화해나갈 때 우리는 분명 위안을 받기는 하지만, 그 위안은 점점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 위안마저도 환영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와 많은 다큐멘터리들은 이야기를 점점 서사적인 방향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들의 서사화가 가끔 의심스러워지는 때가 있다. 극영화의 환영은 적어도 그들 자신이 환영임을 밝히는 데 비하여 다큐의 그것은 종종 그것 자신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잊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조금 다른 의문인데, 이 영화를 보고 남아공의 당시의 현실에 대해서 조금 궁금해지기는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로드리게즈의 공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모두 백인들이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잘 알려져 있듯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제도로 극심한 흑백차별이 존재하던 국가였다. 그들에게 위안이 된 이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오로지 백인들만의 한정된 위안이었나? 영화에서 극도로 보수적인 남아공의 당시 상황, 검열과 억압, 그에 따른 젊은이들의 저항에 대해 나오는데, 이것과 흑백차별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또 현재 남아공의 상황은 어떤지 (젊은이들의 분노와 저항은 무엇을 위한 분노와 저항이었나, 그 저항은 흑백문제와는 또다른 위치에서 존재하고 있었나) 잘 모르겠다. 관련 책을 찾아서 좀 들춰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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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1-12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 안 읽었어요. 오해마세요, 추천도 안 눌렀어요(푸핫)
이 댓글은 뭐냐면요, 저 살아있다는 표시예요!!


맥거핀 2012-11-12 21:09   좋아요 0 | URL
좋아요.^^ 우리 인간적으로다가 살아있다는 표시는 합시다.

Shining 2012-11-12 23:32   좋아요 0 | URL
옳소!

아이리시스 2012-11-13 20:03   좋아요 0 | URL
에이..어제 그 리뷰밖에 없네..

(살아있음!)

맥거핀 2012-11-14 13:05   좋아요 0 | URL
으걀걀

(저도 살아있음!)

Shining 2012-11-1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영화 아직 안 봤고 언제고 볼 것 같긴 하지만 리뷰 읽었습니다(하하).

그러니까, 이 영화는 페이크 다큐가 아니고 진짜 다큐멘터리란 말이죠? 실제하는 사람 실제하는 이야기, 인 거죠?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하나같이 호평이라 저는 영화의 정체(?)도 모르면서 막연히 궁금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생각한 후에도 사실 영화에 대해선 모릅니다. 그러니까, 맥거핀 님의 리뷰로 처음 접하는 건데 이 이야기가 정말 다큐입니까? 라고 묻고 싶어지네요_-; 영화도 궁금하구요.

어떤 사실적인 이야기도, 사실적인 이야기일수록, 사실적으로 보일수록. 영화라는 매체를 투과하면 결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영화가 주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행위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의심의 싹만 틔울거면 나는 대체 왜 영화를 보는 것일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다큐멘터리를 유난히 오랫동안 불편해했던 이유도 아마 그런 까닭이겠죠.

남아공, 이라면 저는 여전히 월드컵이나 다이아몬드보다 <디스트릭트9>이 생각나네요.

맥거핀 2012-11-14 13:15   좋아요 0 | URL
그렇죠? 아마도 '진실 혹은 거짓' 같은 코너에 이 이야기가 나왔다면 "어디서 브라질, 아니 구라질이야..그게 말이 되니?"했을듯. (저도 영화보기 전 대강의 내용만 알았을 때는 페이크 다큐인줄 알고 포스터를 보고는 "참 배우를 써도.." 그랬죠.) 근데 뭐 아무튼 사실이랍니다. 물론 어떤 것은 영화적 사실일수도 있겠죠. 잘 아시겠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감동의 총량에는 영화적으로 만들어진 감동이라는 것도 분명히 더해져 있겠죠. 그러나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분명 그 자체로 매우 놀랍고도 이상한, (그래서 기적이라는 말이 남발되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지만) 소위 말하는 기적에 가까운 이야기, 그 자체로서 매우 힘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디스트릭트9> 봤어요. 풍자정신을 기괴한 형식으로 되살린 괴랄한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괴랄한 맛이 싫지 않은 작품이었죠.

2012-11-1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리뷰 읽을 거라서, 살아있고 다녀간다는 표시만 하고 갑니다.ㅎㅎㅎ
-아이님 모범 따라.^^

맥거핀 2012-11-14 23:02   좋아요 0 | URL
요새 유행이 살아있다는 표식을 남기는 겁니까?^^

영화를 보실 생각이 있으시면 안 읽으시길 잘한겁니다. 나중에 기회되시면 꼭 챙겨보세요. 강추 영화!

감은빛 2012-11-21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를 볼 일이 없을 듯하여 열심히 읽었습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다큐로군요.
저런 사람이 실재한다는 것을 믿기가 어렵군요.
마지막에 제시한 의문은 저도 공감이 가네요.

맥거핀 2012-11-21 15:43   좋아요 0 | URL
음..근데 제가 사실 여기저기에 이거봐라, 저거봐라라는 소리를 많이 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꼭 한 번 챙겨볼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고나면 힘이 난달까..에너지를 전해주는 영화입니다.^^ (내용 자체로도 흥미롭기도 하구요.)
 

 

 

 

바비, 이상우, 2012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싸늘하게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히는 것은 아귀의 말이나 화투장 뿐만은 아니다. 가끔 어떤 영화들은 눈과 귀와 머리를 통과하여 그대로 가슴으로 날아오기도 한다. 나는 물론 영화의 우열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들이 어디에 머물러있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가 눈이나 귀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것도 없고, 가슴에 머무른다고 해서 그렇게 인상적일 것도 없다. 다만, 어떤 영화들은 이상하게 밀고 들어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밀고 들어오는 영화들은 눈이나 귀에서 특정의 장면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나, 가슴을 가지고 심장을 가지고 숨쉬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예를 들어 <바비>와 같은 영화. 마지막 순자(김아론)가 공항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 때, 그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순자는 누구에게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가. 그것의 어떤 상징적인 것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장면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위치를 돌아보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국 무력한 우리를 자각하도록 이 영화는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부, 우리는 한 작은 중소도시 공항에 도착하는 미국인 부녀를 본다. 그리고 곧 그들이 이곳에 한 소녀의 입양을 위해 왔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좀 이상하다. 입양을 위해 이 초라해보이는 도시에 잘 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왔다는 설정도 이상하거니와 조금은 사려깊어 보이는 딸 바비와 달리 아버지 스티브는 입양하려는 순영(김새론)의 가족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언행을 서슴치 않는다. 더구나 입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순영의 작은아버지(이천희)와 달리 순영과 순영의 아픈 동생 순자, 그리고 장애를 가져서 어린아이와 같은 그들의 친아버지는 이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원하지도 않는 듯이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비밀은 이들 미국인 부녀가 데려오지 않았던 또다른 딸에게 있다. 그 딸은 심장에 문제가 있었던 것.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순영이 혹은 순자가 필요했다. 새로운 딸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심장으로서 말이다. 

이 사실을 애초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미국인 아버지 스티브와 작은아버지 뿐이다(딸 바비는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물론 순영과 순자와 그들의 아버지는 모른다. 아니 이 사실을 중간에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은 한 명 더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이라는 존재 말이다. 그러므로 순자를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되어서(원래 미국에 보내려고 했던 것은 순영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미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순자가 결국 가게 된다) 슬퍼서 우는 순영과 친아버지에게 순자가 몇 번 반복하여 내뱉는 "내가 미국에 죽으러 가? 울긴 왜 울어!"와 같은 대사들은 그들에게 하는 대사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우리의 위치를 일깨우기 위해 하는 말들처럼 들린다. 그것을 보는 우리들은 망연해지기 때문이며, 아득해지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영화에서 관객은 실제로 물러나 있으며, 관객이 물리적으로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그러므로 '관객'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는 그 물리적인 불가능성과는 별개로 동시에 이야기와 미장센을 구축하며 관객과의 거리설정을 하며 관객은 때로 주인공이 되거나, 주인공의 곁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상당히 먼 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 <바비>에서 이상우 감독이 택한 것은 관객이 한층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에 순영이 낯선 남자로 인해 위기에 빠지게 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뒤로 물러나 있으며, 이 물러난 위치에서 카메라와 그 뒤의 관객들은 지켜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영이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어서 단지 불안한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위치에 처하게 된다(그러므로 조마조마하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 이상우 감독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상우 감독은 <엄마는 창녀다>, <아버지는 개다>와 같은, 제목으로 한 번 놀랐다가, 영화 내용으로 더 놀라게 되는 단지 제목만 도발적이 아닌 영화들을 찍었다. 이 중 내가 본 것은 <아버지는 개다>인데, 이 영화를 보면, 카메라는 이들 형제에게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이들을 관찰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관음의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일종의 사육의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는 어떤 날 것의 어떤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초기의 김기덕 영화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으나, 그 영화들과의 차이점을 한편으로 도드라지게 한다. 즉 이미지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는 김기덕의 초기작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인물들의 가까이에서 보는 이를 한껏 불편하게 만들었던 김기덕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보기에 보다 덜 불편하며, 그것은 사육자나 관찰자의 위치에 관객을 머무르도록 하는 이 영화의 거리설정에 그 하나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바비>에서의 가족관계를 전작의 기묘한 가족들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바비>에서의 아이들과 어른들은 뒤바뀌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장애를 가져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친아버지와 돈을 받고 아이를 팔아넘기려는 작은아버지는 어른이라 볼 수 없으며, 꼬박꼬박 극존칭의 존대말을 쓰고, 다른 두 가족을 건사하는 순영과 일반적인 어른보다 훨씬 영악하게 행동하는 순자는 어린아이의 몸을 가진 어른과 같다. 아무도 어른이 되줄 수 없을 때 아이들은 스스로 어른이 된다.) 

즉 우리가 이 영화 <바비>에서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딸 바비가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태에서 이들을 멀리서 관찰하는 우리들은 유일하게 미국인 부녀의 딸 바비에게 희망을 걸게 된다. 그러나 그 바비가 괴로워하다가 결국 아버지의 뜻을 뒤늦게 추인했을 때, 우리의 기대는 헛되이 무너지게 되며, 영화의 마지막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는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상우 감독은 관객과 이들 자매의 사이에 거리를 만들지만, 전작과 다른 점은 그 거리의 길이를 관객에게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거리의 길이는 마지막의 에스컬레이터의 길이만큼의 길이이다. 공항의 출국 게이트가 있는 이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의 끝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순자와 그 에스컬레이터의 밑에서 그 인사를 받고 있는 우리와의 거리. 즉 이 마지막에서 우리는 무력해질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바비가 기꺼이 공범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순자를 미국으로 보낸 공범이 된다. 무력한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무력한 우리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느낌으로써 말이다. (물론 이를 정치적인 어떤 것으로 치환하여 말할 수도 있다. 미국이라는 아버지는 그들의 약한 딸, 그러니까 그들의 취약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서 이 작은 땅에서 무엇인가를 도려내간다. 물론 도려내는 지점은 늘 그렇듯이 가장 약한 지점이다- 나는 FTA가 결국 서민에게 피해가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더 나아가면 이런 얘기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누군가가 그들을 돈을 받고 팔아넘겼기 때문인가. 그것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때로 영화의 순자와 같이 기꺼이 미국인이 되고싶어 하니까(혹은 미국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을 지지하니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바비인형이 그려진 가방, 그러니까 맨 처음 딸 바비가 들고왔던 가방에 이제 순자의 이름표가 붙은 것을 본다. 그렇게 순자는 스스로 바비인형이 되었다. 물론 인형에게는 심장이 필요가 없으며, 혹은 심장을 도려내어도 그 바비인형들은 여전히 웃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제 가장 어렵고 큰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그렇다면 그 무력한 자신으로 남아 순자의 인사를 받는 것, 그 구원불가, 구조불가의 거리를 느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할 수 있는 답은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말은 때로 영화의 윤리는 가장 비윤리적인 것을 '보는' 순간에 작동한다는 것. 그 영화의 윤리라는 것이 이 현실에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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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2-11-05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의 힘이 우리도 공모자며 무기력하다는 걸 깨닫게 하는 거 같아요.
김소영 감독의 <나무 없는 산>(보셨는지?)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데 <바비>보다는 좀 따스하지만 근본적으로 당사자가 아니면 인척도 친척도 다 영화 관객과 같은 처지를 이해시켜요. 그래서 더더욱 누군가를 비난하는 게 쉽지 않고 그렇다고 앞장 서서 칸트식 선행을 베풀기는 더 어려운, 뭐 그런 상황이 벌어지니, 그저 눈 질끈 감는 비겁한 어른이 돼 버려서 기분이 영 찝찔해요.

맥거핀 2012-11-06 14:38   좋아요 0 | URL
<나무 없는 산> 오래전에 보기는 했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 아이들이 밥먹는 장면이었던가..기억에 조금 남아있습니다. 뭐 결국 무기력한 것을 보게 하는 것은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니까요. 자신이 비겁한 어른임을 자각하는 것은 적어도 비겁하지 않을 희망이 남아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천희 씨는 확실히 독한 연기를 해도 그렇게 독해보이지 않더군요.)

Arch 2012-11-0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내용과 상관이 없지만 저는 자꾸 이 구절이 떠오르네요.

'영화에서 그 무엇인가를 볼 때 사실 그것은 거기 없는 것이다... 영화는 우리들의 자발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재의 상대방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 상대를 성립시키기 위해 영화 안의 대상과 그 대상의 대상으로서의 영화 대신 그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절차로 발전하였다. 영화는 언제나 그것을 비판하려 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을 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을 익힌 예술이다.'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중에서>

저는 이 감독의 전작을 휙휙 돌려서 본 터라, 휙휙 돌려본 와중에 뭔가 좀 뻔하다는, 제대로 보지 않은 사람이 가질만한 생각을 했어요. 영화에 대해 말할 때면 자꾸 정성일씨의 말들과 음성이 생각나요.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한걸까.

댓글을 안 다는게 가장 좋은 방법같은데 맥거핀님의 글을 읽고 있다는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맥거핀 2012-11-06 20:55   좋아요 0 | URL
인용하신 그 부분 아마 김선일 씨 비디오 관련하여 나온 이야기 중에 한 부분이었죠?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노무현 정부의 다른 모든 것, 비정규직이나 FTA 같은 것을 이제는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해도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 정부를 지지할 수가 없어요.) 영화는 결국 누군가가 그것을 '본다'고 전제하여 만들어진 것일테니..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죠. 물론 정성일 씨가 말한대로 영화가 그것을 어떻게 구축해내느냐 같은 거도 중요하구요.

(아마도 이 책에도 쇼트에 대한 부분이 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예를 들어 숏을 나누는 것 같은거요. 숏을 나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을 보는 사람을 이 영화에 참여시키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숏과 그것에 대한 반응숏이라고 할 때 그 숏은 반응숏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객의 반응'이라는 것도 불러오니까요. (감독의 전작 얘기를 하셨는데, 저는 그 <아버지는 개다>에서 식탁숏이 생각이나요. 마주 앉은 네 가족을 잡은 초반의 숏-그 옆모습을 그대로 고정해놓고 지속시키는 그 장면의 어떤 무서움.)

정성일 씨의 글은 가끔 무엇인가(예를 들어 자의식)가 과잉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걸 쉽게 비판할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영화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그 과잉된 부분만큼 묻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영화는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투로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가(아마도 제가) 이야기한다면 욕을 먹겠죠.

댓글 달 수 있으면 달아주시면 좋죠.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2-11-0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낮 보려고 찜한 영환데 아직입니다. 다음주에 봐야될 거 같아요. 영화의 윤리는 가장 비윤리적인 걸 보는 순간 작동한다ᆢ 자꾸 이 문장이 맴도네요. 영화보고 저도 생각 정리 좀 해봐야겠어요.

맥거핀 2012-11-06 20:53   좋아요 0 | URL
아..그러고보니 영화를 안 본 분들에게는 제가 너무 줄거리를 많이 늘어놓았군요. (경고문을 써놓기는 했지만요.) 근데 사실 그 비밀(?)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니까..영화 전단지에 줄거리 소개글에도 사실 영화의 거의 모든 줄거리가 들어있더군요. 보시고 나서 마지막에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실지 궁금합니다. (그러니 후에 글을 남겨주세요.^^)

그리고 그 옆에 포스터 반갑네요. 서칭 포 슈가맨! 저도 볼려고 마음만(?) 먹고 있는 영화입니다.

프레이야 2012-11-07 20:13   좋아요 0 | URL
네, 전 줄거리 다 알고 봐도 전혀 제 감동과는 무관하니 상관 없어요.^^
슈가맨,은 한 번 더 볼까 합니다. 참 좋아요.
음악이 너무 좋아 음반 구매했어요. 좀전에 도착해서 지금 플레이중입니다.^^

2012-11-0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대해서나 영화에 대해서나 늘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다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글이 흥미롭네요. 늘 그런 글 쓰시지만.^^)

맥거핀 2012-11-11 13:04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늘 공감과 공감에 따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글을 흥미롭게 읽어주시는 것은 섬님이 그만큼 풍성하게 읽으시기 때문이죠. 기회 되시면 영화도 꼭 한 번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