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모스타파 사르와르 파루키, 2012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한 시골마을. 촌장의 절대권력이 작용하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은 급기야 매스컴의 주목까지 받게 된다. 그 이상한 일이란, 이곳은 모든 이미지가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 이슬람 율법의 철저한 신봉자인 촌장은 영혼이 없는 것을 보고 그것을 우상화하여 따르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일체의 영혼없는 이미지를 금지시킨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영혼없는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다. 그곳에서는 반입되는 신문의 모든 사진은 하얀 종이로 가려지고, 텔레비전 시청은 금지되며, 사진찍기는 금기시되고, 컴퓨터, 노트북과 얼굴책('페이스북'을 촌장은 그렇게 부른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휴대폰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고, 그것의 공습을 물리적으로 막는 것, 그리고 또한 정신적으로 막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떤 소동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영화는 그런 소동을 유쾌한 터치로 다룬다. 물론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미지로 보고 있다는 것. 즉 영화라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혼없는 이미지에 기꺼이 영혼을 내맡긴 가련한 상태에서 이 영혼의 수호를 위한 어떤 예정된 패배의 사투를 보고 있는 것.

 

물론 이것 중에 가장 핵심에 놓여진 것은 영화의 제목으로도 제시된 '텔레비전'이다. 이 영혼없는 이미지들의 총체인 텔레비전의 공습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이슬람교가 아닌 힌두교 신자라서 어쩔 수 없이 허용해준 바부 선생의 텔레비전에 곧 온마을 사람들이 그 영혼을 기꺼이 가져다 바친다. 바부 선생의 집에는 온마을 사람들이 몰려들며, 마을의 어린아이들은 수학 선생인 그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다른 수학선생님들이 실력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의 집에 수학 과외를 받으러 간다. 촌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이를 막기 위해 텔레비전을 강물에 내던지지만, 텔레비전의 위력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급기야 일종의 혁명이 일어나는 등 소동은 끊이지 않는다. 모스타파 파루키의 영화 <텔레비전>은 이 소동극을 유쾌한 유머와 풍자를 섞어 결코 무겁지 않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눈앞에 드러나는 사건들 이외에도 이 소동들이 어떤 이미지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로서, 혹은 그런 이미지들의 마치 일종의 작동방식인 것처럼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은 세상의 재현 혹은 어떤 시뮬라크르의 총체이다. 그것은 어떤 기술(技術)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동시에 기술(記述)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즉 촌장의 말대로 현재 TV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미지는 당연히 그 인물 자신이 아니고, 그 인물의 어떤 기술(技術)적인 모사물이다. 동시에 TV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재현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영화 같은 것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에서 그 인물은 기술(記述)되는 그 인물이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촌장'역을 연기한 그 배우는 그 촌장이라는 가상의 혹은 실제의 인물을 모사하고 있는 것이지, 그 인물 자신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을 대체할 만한 오락거리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마을의 일종의 극장 - 이것의 무대는 실제의 텔레비전처럼 만들어져 있다 - 에서 이것을 지적해낸다. 즉 역사극에서 역사속 인물을 재현하는 것은 결국 결과적으로 영혼이 없는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를바가 없으며 엄격한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텔레비전은, 특히 마을 사람들이 환장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영화는, 이중의 기술적인 시뮬라크르라는 기술(奇術)이다.

 

이 영화가 독특해지는 지점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촌장이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여권이 필요하므로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어야할 때 그 곤경을 극복하는 기발한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촌장과 그의 수하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촌장의 쌍둥이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개발해낸다. 즉 촌장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촌장의 쌍둥이형이 사진을 찍는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 이것은 이중의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영화와 사실 그다지 차이가 없다. 아니면 촌장의 아들이 연애를 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재미있는 것은 이 연애에도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실제와 실제의 모사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기술(技術)적인 것이 두 사람이 몰래 숨겨둔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그 목소리만으로 가상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이라면, 기술(記述)적인 것은 여기에도 두 명의 인물, 즉 촌장의 아들과 그 아들의 수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실제 연애를 하는 것은 촌장의 아들이지만, 이 연애를 작동시키는 것, 즉 두 사람을 노트북 화상채팅을 통해 몰래만나게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촌장아들의 매우 코믹하게 등장하는 수하의 몫이다. 이 연애에서 촌장아들의 수하는 촌장아들의 거의 모든 연애를 대신해주며, 심지어는 그가 실연했을 때 그 실연의 아픔까지도 대신해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수하가 실제로 그 촌장아들의 연애 상대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촌장아들이라는 원본과 촌장아들의 수하라는 시뮬라크르는 동일한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적어도 여기에서는 원본과 복제물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감독은 이를 조금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 소동극을 마치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는 것. 이 영화는 몇 가지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부 선생의 학생이 불어나는 장면을 음성과 시각으로 연결하는 것이나, 휴대폰 음성만으로 이미지를 상상할 때 카메라를 360도 회전시키면서 실제의 이미지로 변하게 하는 등의 장면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특정의 장면 외에도 영화는 유독 인물들을 어떤 창이나 틀 안에 배치시키는 것을 자주 활용함으로써 마치 이것이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즉 이 영화 <텔레비전>의 이 소동이 일어나는 폐쇄된 마을에서 이 마을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소동극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시뮬라크르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이 원본인지, 복제물인지 모른채, 때로는 진심을 다하여 일상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 시뮬라시옹은 때로는 너무나도 정교해 자기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사람들을 속인다. 다시 말해서 소동이 일어나는 이 마을은 현대사회의 작은 축소된 복제물이다. 이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연기하며, 그것은 이미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 그것은 물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것을 구별해내는 것, 즉 원본이 복제물이 되고, 복제물이 원본이 되는 시대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이 혹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것을 어쩌면 이 마지막은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사기를 당해 성지순례를 가지못한 촌장은 끙끙 앓아눕다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성지순례 중계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내내 텔레비전을 배척하던 촌장은 그제서야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라고 반복하며 말이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내내 독선적이고 독단적이었던 촌장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다르게 읽혔다. 결국 얼마나 진심을 다하여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인 것. 결국 성지순례라는 것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지 않을까. 아무리 현재의 성지를 지금 순례해도 그곳은 옛날의 성인이 있던 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과거의 성지의 일종의 모사물이다. 그러나 그곳을 정말 성지라고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서 참배하는 것, 그 모사물을 원본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에 중요한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 마지막에 터져나오던 애타는 울부짖음처럼 말이다. 그것이 복제물인지 원본인지를 가려내는 눈은 결국 자신의 안에 있다. 시뮬라크르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영화라는 환상을 더 이상 환상이 아니게 하는 것,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Use your ill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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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F 쇼케이스 2013' 영화제에서 관람. 좋은 영화를 볼 기회를 주신 <씨네21>에 감사드립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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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5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6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3-01-1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플갱어 소동 한마당이군요.

맥거핀 2013-01-16 14:33   좋아요 0 | URL
재미있네요. 이 세상에는 도플갱어가 사실 너무 많죠.
 

 

 

 

 

 

 

 

 

 

 

 

라이프 오브 파이, 이안, 2012

 

 

 

(영화의 전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내용을 보니, 원주율이 주소명인 사이트가 있다. 일본의 한 기업에서 만든 '3.1415926535898.com'이라는 주소를 가진 이 사이트는 외계인에게 지구를 홍보하는 사이트인데, 다른 건 몰라도 그 주소의 발상이 재미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적어도 원주율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는 것. 다시 말해서 비록 숫자라는 제한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값 만큼은 우주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일종의 우주의 소통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미지와의 조우>에서 '화음'이 일종의 언어였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1977년 쏘아 올려져 하염없이 외계로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호에는 55개의 언어로 된 인사말과 함께 아름다운 화음이 담긴 여러 음악과 원주율(파이)을 포함한 수학기호들이 실려있었고, 외계의 지적인 신호를 찾는 SETI 프로젝트 같은 것에서도 원주율은 일종의 소통언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수라즈 샤르마)가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의 어떤 아름다운 수영장에서 수학기호 파이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의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하게 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심지어 외계인도 알고 있는 보통의 언어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서 외계인에게 보내는 우리가 당신들과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던 원주율(파이)로 그의 이름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이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제 '리처드 파커'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호랑이에 대해서 말해보자.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이 '리처드 파커'라는 이 이름은 원래 호랑이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외계인도 알 수 있는 보통명사를 이름으로 가진 한 소년과 어떤 고유의 내막을 가지고 있는 특정의 이름을 가진 호랑이가 같이 지내는 227일 간의 공존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만을 놓고 보면 사실 이 두 개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이 두 개체가 사실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호랑이는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러므로 사실은 '호랑이'와 같은 보통명사 형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는 이성에 바탕을 둔 메시지, 즉 인간과 짐승은 다르다는 메시지와 조금은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던 것은 일종의 동물의 생존본능이다. 즉 호랑이가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이는 종교나 인간의 감성으로 재단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을 아버지는 이야기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생태계라는 큰 계는 그런 식으로 유지가 된다. 더 힘이 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으며, 대신에 약한 동물은 왕성한 번식력에 따른 많은 개체수로 보상받고, 또 먹이사슬의 구조에 의해 그 개체수는 일정하게 유지가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수없이 많은 날치떼가 더 큰 고래에게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바다는 곧 날치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 반례가 영화 속 미어캣으로 뒤덮인 섬이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그 섬이 식인의 섬, 죽음의 섬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그것은 미어캣의 존재로도 설명이 된다. 그 수많은 미어캣의 존재는 그곳이 생태의 섬이 아님을, 생태계의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곳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것에는 영역의 문제가 있다. 이런 수많은 힘이 다른 동물들이 이 지구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게는 배 위에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공존하기 위해 각자의 영역이 필요했음을 통해서 볼 수 있기도 하고, 크게는 바다 위에 던져진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존재로도 알 수 있다. 즉 바다라는 짠물은 그들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다라는 지금까지 지냈던 곳과 전혀 다른 영역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어야만 했다 

 

 

즉 이 파이라는 인간과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의 바다 위의 227일은 다른 여러 가지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공존의 원리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에는 생태계의 균형과 영역의 확보가 들어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호랑이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성적인 믿음으로 생각해보면 둘 중의 하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라졌어야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래서 이야기를 들은 이성적인 일본인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파이에게 다른 이야기를 요청한다. (예를 들어 그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지적했듯이 사실은 두 이야기는 형태는 같다.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에는 종의 차이가 있었고, 두 번째에는 같은 인간 종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긍한 것은 결국 두 번째 이야기이다. 즉 같은 종 사이에서 벌어진 지극히 배타적인 이야기가 사실은 이성적인 그들이, 어쩌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태계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라. 사실은 다른 종이 다른 종을 잡아먹는, 공격하는 이 첫 번째 이야기가 실제 생태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아주 지극히 특수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그로테스크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므로 사실 첫 번째의 이야기,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본 이야기는 지구에서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이에나는 오랑우탄이나 얼룩말을 공격하며, 물론 그런 하이에나는 호랑이 앞에서 꼼짝을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즉 개체가 멸종하고 있지 않는 것은 이들이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이것에는 위에서 말한 절묘한 생태계의 공존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생태계는 너무나도 절묘하게 짜여져 있어 그것에서 우리는 그것을 관장하는 어떤 다른 존재, 예를 들어 신을 상상하게 된다. 이 신이 정해준, 각자의 영역에서 적절한 숫자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커다란 동물원, 그것이 어쩌면 배, 혹은 지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이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 둘의 기적적인 생존에도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물에서 건져주었고, 파이는 그가 되뇌이듯 리처드 파커가 있었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또한 파이가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큰 배에서 살아남은 것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선상으로 나왔기 때문이며, 그가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을 때 신은 그에게 떠다니는 섬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계속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공존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신 외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공존이라는 것에는 '매우 다름' 혹은 '차이'가 이미 들어 있다는 것. 우리가 '호랑이와 인간의 공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둘이 이미 매우 다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즉 공존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것은 물론 호랑이와 인간만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파이 안의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의 종교의 공존, 혹은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와의 공존 같은 경우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흔히 공존보다는 비공존을 믿는다. 즉 서로 다른, 그것도 아주 이질적인 호랑이와 인간이 공존했다는 이야기는 믿지 않지만, 같은 종인 인간 끼리 비공존했다는 이야기를 결국에는 믿으며, 절대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믿을 수 없는 공존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는 벌어지고 있다. 생태계라는 거대한 계에서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그러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말이다. 그것은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잘짜여진 계라 가끔은 우리는 그 계 위의 어떤 것, 그 계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아의 방주' 같은 이야기들. 그 비가 쏟아지는 동안 노아의 방주 속 한쌍의 동물들은 어떻게 서로서로를 잡아먹지 않고 버텼을까,라는 질문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다른 버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다시 결국 믿음의 문제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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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3D로 감상하였기에, 몇 가지의 이야기를 붙여둔다. 3D는 영화라는 매체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사실 이 3D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물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기술상의 문제이다. 가장 기본적인 3D의 형태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면 3D는 두 대의 카메라의 2D 이미지를 붙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이 붙여진 두 개의 2D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컴퓨터의 계산이 메꾸고 있다. 그러나 이 컴퓨터의 계산이 아무리 빨라도, 즉 아무리 사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도,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계산, 눈이 실제로 지각하는 이미지의 층을 완벽하게 메우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종종 3D 영화에서 인물이나 물체는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일종의 포토샵에서 사용되는 레이어와 같은 것이랄까. 여기에는 몇 개의 층이 있어서 인물이나 물체는 이 사이 어딘가에서 입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순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놀랍게도 이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는 이상한 위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떠 있음'이 만들어내는 이중의 부력은 이 영화의 3D를 종래의 다른 3D와 다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의 3D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안 감독의 이 3D 영화가 가장 놀랍게 하는 것은 이 영화는 그것을 보는 자에게 종종 3D임을 잊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못 만들어진 3D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란, 어쩌면 역으로 그것이 3D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런 영화들에서는 종종 3D의 효과를 과시하듯 내보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끼어드는 그런 장면들이 3D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나, 동시에 그것은 영화의 이야기를 종종 잊게 만든다. 즉 이 장면을 3D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넣었군, 이라고 관객이 생각하는 순간 관객은 그 영화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에서 처음 소리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 혹은 음악이 거슬릴 때와 비슷하다. 지금의 우리는 영화에서 소리(음성)가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하지 않는다. '..지금 배우의 목소리가 나오는군'이라고 (당연히)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처음 소리가 등장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에는 한편으로 영화에 소리를 통합하는 영화적 문법이(기술이 아니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영화에서 음악이 계속 거슬린다면 그것은 감독이 영화에 음악을 넣는 문법을 잘못 적용한 탓이다.) 3D가 완전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아..이거 3D효과군,을 더 이상 인식하지 않는 미래의 어느 때, 당연히 3D안경도 필요없는 미래의 어느 날이다.

 

그런 면에서 이안 감독의 이 3D영화가 3D영화로서 좋은 점은 그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는 지금부터 3D가 나와요, 그 효과를 만끽하세요,라는 과시의 장면이 없다. 3D효과는 상당부분 이야기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종종 나는 이것이 3D영화임을 잊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예전 안경을 쓸 때의 버릇처럼 코를 계속 문질렀지만 어느틈에 나는 코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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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1-1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 감독은 참 신비한 사람이에요. 타이완 사람인데 서양의 냄새가 가득한 영화도 잘 만들고 그렇다고 동양적인 영화를 못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 양반은 지리적, 심리적, 인종적인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니까요. (하지만 헐크는 빼고요.)

맥거핀 2013-01-11 14:28   좋아요 0 | URL
아..이안의 헐크는 별로였나요? 저는 다른 버전의 헐크, <인크레더블 헐크>를 봤습니다. 그렇죠. 필모를 보면 참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취향의 영화를 만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영화들이 모두 일정 수준에 올라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러면서도 이 영화들에는 이안 감독 특유의 인장, 특유의 영상미가 또 나름 살아있어요. 예를 들어 <색,계>의 정사씬이나, <와호장룡>의 대나무 숲에서의 결투 같은 것..<음식남녀>의 그 음식들의 비주얼은 또 어떻구요.

Mephistopheles 2013-01-11 15:1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전 역시나 "음식남녀"가 제일 좋았던 기억,,,
(서기(과연?)때문이 아니라 먹을 것에 약하다는..)

맥거핀 2013-01-12 00:58   좋아요 0 | URL
한때 서기가 남자들의 로망(노망이 아니라..)인 때가 있었죠. 근데 <음식남녀>는 오천련이 아닌가요? 근데 오천련은 요새 뭐하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Mephistopheles 2013-01-13 12:04   좋아요 0 | URL
어라..오천련이었는데 전 어디서 서기라는 착각을...뭔가 다른 영화와 혼선을 빚었나 봅니다..

맥거핀 2013-01-14 00:06   좋아요 0 | URL
어..근데 서기하고 오천련이 이미지가 좀 통하는 데가 있기는 해요. 오천련도 한 때는 인기가 쩔었는데...

마녀고양이 2013-01-1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고 싶은데, 아이맥스 밖에 개봉을 안 한거예요.
그런데 코알라가 아이맥스는 싫다고 버티고 있어서, 아이맥스 3D를 보고나면 머리가 너무 아프거든요.... 아흑, 정말 고민스럽네요. 영화 너무 괜찮다면서요..... ㅠㅠㅠㅠ

맥거핀 2013-01-15 01:20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아이맥스 3D를 한번도 본적이 없어서..근데 저도 사실 3D를 왠만하면 피하려고 하거든요. 3D가 비싸고 그런 것 보담도 그 안경이 너무 신경쓰여서, 영화감상에 계속 방해가 되더라구요. 아무튼 안좋은 환경이네요. 보는 사람에게 선택권을 줘야지 아이맥스 밖에 개봉이 안하면 곤란하죠.

Shining 2013-01-14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요한 건 무얼 말할지보다 무얼 말하지 않는지이고, 뭘 집어넣을지가 아니라 뭘 뺄 것 인가라는 생각이 요새 자주 듭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꾸 설명하고 부연하고 집어넣고 그러면서 필연적으로 길어지고 늘어지는데 진짜 예술가들은 과감하게 빼고 현명하게 배치한다는 생각이요.

이안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아주 깔끔한 백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려하고 다양한 기술과 시각영상이 있지만 멋을 부리거나 뽐을 내는 게 아니라 능숙한 손길로 단단하게 다듬어진 예쁜 백자, 라는 느낌이요. 3D 측면에서 재밌는 게 많았어요, 저는 :)

맥거핀 2013-01-15 01:26   좋아요 0 | URL
근데 사실 빼는 게 무척이나 어렵잖아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 빼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구요. 어떤 부분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대체로 구조가 앙상하기 때문에 뭔가를 가리려는 시도인 경우가 많죠. 아무튼 선택과 집중이, 영화에서도 중요하죠. (물론 리뷰를 쓰는 것에도 중요하구요.)

암튼 스튜디오의 요청이 아니라 본인이 3D로 찍겠다고 나섰다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명확한 직조의 자신감이 있었겠죠.

Arch 2013-01-2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읽으면 확 와닿을 것 같아요.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자꾸 이 영화에 다른 이야기가 있다고 강조하는 바람에 '어떨까'에서 '보고 싶다'로 바뀌었어요. 이안 감독 영화는 헐크 빼고 다 봤어요. <색,계>가 참 좋았어요.

맥거핀 2013-01-22 15:56   좋아요 0 | URL
늘 영화소개프로그램을 보다보면은 양가적인 감정, 그만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와 더 보고 싶다,의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도 이안의 <와호장룡>이 제일 좋아요.

영화 보시고 글 읽어주시면 더 고맙구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탐 후퍼, 2012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펙터클(spectacle), 즉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관, 혹은 볼거리라는 것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특히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쪽에 가깝지만, 이 영화 <레미제라블>의 스펙터클은 확실히 인상적인 데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에서 스펙터클이라 불릴 수 있는 장면은 특이하게도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 두 군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두 장면의 스펙터클은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된 씬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실 내용상으로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첫 장면의 스펙터클은 대규모의 죄수들이 큰 배를 독으로 끌어당기는 장면이다. 돛이 부러지고, 거의 침몰 직전의 배는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의 스펙터클은 광장에 드넓게 펼쳐진 바리케이트와 그 바리케이트 위와 뒤편의 군중들이다. 그 바리케이트의 재료들, 그러니까 가득 쌓아올려진 각종 가구들은 이것이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 만들어진 바리케이트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한 가지의 공통 요소가 있다. 그것은 대규모의 인력이다. 이 대규모의 인력이 만들어내는 어떤 거대한 힘은 분명 보는 이를 압도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이 두 장면은 반대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첫 장면의 죄수들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채로 존재한다. 그들의 육체는 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머리속은 모두 어떻게든 이 지옥같은 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반면 마지막 장면의 군중은 누군가 시켜서 그곳에 나와 바리케이트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이의 대비는 이것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장면에 바닥에 끌리는 프랑스 국기와 마지막 장면의 바리케이트 위에서 나부끼는 프랑스 국기의 차이. 즉 이 두 장면은 일종의 대구이다.

 

이 스펙터클은 혁명이라는 것의 어떤 보이지 않는 것, 말로만 이야기 되는 그 실체의 어떤 실루엣을 아주 조금은 드러내보인다. 이를 이런 질문으로 바꿔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영화를 보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여 대답하면 그것은 그러니까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다. 영화의 중간, 마리우스(에디 레드메인)와 일단의 청년들이 만든 집 앞에 존재하는 바리케이트와 그 마지막 바리케이트를 비교하여 보자. 마지막 장발장(휴 잭맨)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혹은 천국에서 존재하는 그 거대한 바리케이트와 실제의 봉기 - 뭐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혁명'과 '봉기'의 용어상의 차이에 대한 논의들이 있지만, 솔직히 그 간극이 그렇게 넓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에서 만들어진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가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즉 혁명은 직관적으로는 크기의 문제이다. 포악한 제정, 혹은 독재 정권은 거리에 쏟아진 수많은 시민들의 '크기'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겁을 집어 먹는다. 그러나 마리우스와 일단의 공화파 청년들이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서 계획한 영화 속 봉기 - 역사적으로는 1832년 6월의 봉기 - 는 영화 속에서 이야기하듯이 그 크기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즉 민중들의 호응을 불러오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 실패와 성공을 이 영화는 직관적인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 '민중'이라는 존재에 대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를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민중'이라는 용어는 단일한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지만, 그 민중이란 사실 수많은 욕망들의 집합이다. 이 영화는 그런 수많은 욕망들의 집합이 움직이는 양상을 때로는 약간 부정적으로 보여주는데, 대표적인 예가 판틴(앤 헤서웨이)이 공장에서 쫓겨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결국 겉으로 보여지는 판틴을 공장 밖으로 내보내는 존재들은 판틴과 공장 안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여공들, 그러니까 민중들이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판틴이 공장 밖으로 쫓겨나는 것에는 물론 동료 여공들의 시기심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시스템'이 있다. 그러나 이 트리거가 동료 여공들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판틴이 거리의 여자가 되어서도 계속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동정과 시기심과 체념과 질투와 같은 것들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이러한 민중이라는 존재의 어떤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두 갈래가 나오는데, 하나는 여관을 운영하는 부부이고, 하나는 자베르 경감(러셀 크로우)이다.

 

여관을 운영하는 부부는 이런 민중의 욕망이 극대화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주위 사람을 등쳐먹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데, 물론 이들의 주위 사람들이란 같은 민중들이다. 자베르 경감은 보다 복잡한 캐릭터인데, 자베르 경감은 이 <레미제라블>의 전체 구도 속에서 장발장의 거울상이다. 자베르 경감이 법의 영역을 상징한다면, 장발장은 그 법의 이면에 있는 휴머니즘(인간)의 영역을 상징하는데, 이 둘이 거울상임은 예를 들어 이 두 인물이 모두 영화상에서 한번의 기회를 얻지만 그 기회를 배반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장발장은 신부님이 재워주고 먹을 것을 주지만 성당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며, 자베르는 장발장이 죽이지 않고 살려주지만, 다시 그런 장발장을 잡으러 나타난다. 그러나 무릇 거울상이라는 것이 그렇듯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점이다. 자베르 경감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감옥에서 자라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자베르 경감이 자라나 결국 장발장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민중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인데, 자베르 경감은 자본주의적으로 말하면 중간관리자이고, 봉건주의적으로 말하면 마름이다. 중세의 지배계층은 이 봉건제도를 만들어 내며, 또하나 결정적인 것, 후세에도 계속 영향을 미칠 어떤 것을 발명해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마름의 존재이다. 영화 <정복자 펠레> 등에서도 잘 보여지듯이 이 마름, 중간관리자는 그들 역시 지배 계층이 아니면서도 거의 대부분 지배 계층보다 훨씬 더한 잔학성을 보여주며, 이것에는 물론 마름들 자신의 지배계층을 향한 욕망, 그리고 작은 권력의 쾌감이 작용을 한다. 즉 지배계층은 결국 뒤에 멀찍이 서서 손안대고 코를 풀게 되는 것은 마름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며, 이 마름의 활용은 그 이후에도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까지 지배의 한 원리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에게 곤봉을 날리던 전경, 혹은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르고 건물에 오르던 경찰 특공대원, 아니면 그것을 지시한 한 기업의 중간관리자 출신인 MB의 경우라면 어떨까.

 

그런 자베르 경감이 결국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은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다시 '민중'이라는 것. 그런 자베르, 즉 민중이 민중을 괴롭히던 것의 상징인 자베르가 강물에 몸을 던질 때 결국은 던져지는 (낯간지럽지만) 메시지 같은 것.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리케이트의 크기와 통한다. 왜냐하면 결국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런 나쁜 민중일지라도, 즉 판틴을 내쫓고, 숙박자들의 몸을 털고, 설혹 자베르와 같은 민중일지라도, 그런 모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죽어가는 청년들 앞에서 문을 닫고 그들을 외면하는 민중들이 바로 동시에 혁명의 주역들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베르 경감의 죽음이, 그리고 그 거대한 상상의 혹은 천국의 바리케이트가 보여준다. 그 거대한 가재도구의 집합이 말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자베르 경감은 법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불변성'을 거의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든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그의 믿음.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장발장의 믿음이 있고, 그것을 장발장은 단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려 했다. 그런 원칙의 상징인 자베르가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질 때, 이는 그 원칙이 깨질 수 있음을 장발장과 동일하게 단지 믿음이 아니라 어떤 삶으로서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이 두 가지는 연결된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은 이 민중들이 변할 수 있다는 점, 그 불가능성을 믿어야 한다는 것. 그것의 불가능성을 어떻게든 믿으려 애써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민중들을 믿어야만, 그들이 무엇인가를 위하여 공동으로 움직일 때에만 무엇인가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금 2013년에 <레미제라블>이 필요하다면 그런 이유다. 그 '고통받는 사람들', 그렇게 고통받으면서도 때로는 같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한 고통을 안겨주는 그 사람들을 왜 끌어안아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면 그건 <레미제라블>이고 '장발장'이다. 새벽 5시에 투표장에 나와서 투표하고, 고엽제로 고통받으면서도 그 고엽제를 뿌리는 곳으로 보낸 사람의 딸을 지지하고, 방이 추워서 어쩔 수 없이 탑골공원에 나오면서도 그 방값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멍청해서, 혹은 콘크리트라서, 라고 말한다면 그건 자베르 경감의 다른 버전이다. <레미제라블>의 숭고함은 그러니까 절대 변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변할 수 있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믿음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숭고함이다. 그것을 영화는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 바리케이트로서 말이다. 그들이 없으면 바리케이트를 만들 수 없다.

 

 

덧.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이 글은 <레미제라블> 영화만을 본 이후에 썼으며, 원작은 참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작과 비교해서 뭔가 잘못 쓴 부분이 있다면 아직 원작을 보지 못한 내 게으름과 우둔함 탓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이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가는 관심이 없으며, 또한 사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를 얼마나 스크린에서 잘 보이고 있는가가 아니라, 왜 이 이야기가 2013년인 지금에 필요한가, 영화는 어떤 부분에서 이 이야기의 방점을 찍는가, 어떻게 재해석을 하고 있는가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새롭게 재해석해도, 무엇인가 끄집어낼 것이 있는 것, 그것이 고전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가 보다 정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직접적인 메시지의 힘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그 대사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나마 노래이기 때문인데 - 그 노래가사들을 직접 대사로 한다고 생각해보라 - 뮤지컬 혹은 오페라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영화화했을 때의 장점 역시도 놓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이야기한 대규모 스펙터클은 물론이고, 여관에서 부부가 등쳐먹을 때 이어지는 그 현란한 편집은 쾌감이 느껴질 정도. 평론가 듀나 씨는 이 영화의 영화로서의 힘을 도리어 빈번한 클로즈업에서 찾던데 그건 생각해 볼만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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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8분...꼬리뼈가 부실해진 요즘 저에겐 꽤나 부담스런 시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맥거핀 2013-01-04 13:26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 꼬리뼈가 점점 자라고 있어서 힘들어요. 그래도 생각보다는 시간이 빨리 가는 편이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3-01-02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미제라블 보고 싶어요, 흑.....

저는 민중이란게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민중, 민중, 과연 그런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집합체가 있을까요. 그건 가끔 이루어지는 우연 아닐까요. 모두의 욕망은 다르지만, 가끔 너무나 구석으로 몰리게 되면 함께 뭉칠 수 밖에 없는 그 순간, 그게 민중이고, 그것은 찰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함께 누군가를 지지해도,
끝나고 나니 동상이몽이구나 싶은 이런 때는 더욱 그렇네요.

하지만 자베르와 장발장이 거울상이라는 표현, 인상깊고 그렇구나 공감하게 됩니다.

맥거핀님, 편안하고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한 새해 되셔요.

맥거핀 2013-01-04 13:38   좋아요 0 | URL
역사적으로 봐도 민중이라는 존재는 참 알 수가 없는 존재지요. 결정적일 때 이상한 선택을 한다거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행동을 한다거나 하죠. 말씀하신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집합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정적인 오류를 낳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믿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혁명, 그리고 혁명의 다른 버전인 선거 같은 데에서도 믿지 않으면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저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 그러니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면서 해나가는 거겠죠. 특히 소위 진보라고 불리는 진영에서는요. 소위 말하는 활동가들이 그걸 믿지 못하는 순간, 그 활동가는 끝장나는거겠죠.

저는 그래도 우리 사회가 조금은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대선들만 보아두요. 김대중이 김종필이라는 극보수 세력을 끌어들이고 겨우 승리했고, 노무현은 정몽준이라는 매우 다른 세력(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통했지만요)과 연합하고 이인제가 상대방 표를 깎아먹어주었음에도 겨우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문재인은 48%를 얻었죠. 그건 숫자상으로보면 노무현이 얻은표보다 200만표나 더 많았습니다. 그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겠지요. 저는 느리게 무엇인가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해 정초부터 잡설을 늘어놓았군요. 달여우님도 행복한 새해 되시고,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시길 바랍니다.^^

차좋아 2013-01-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걸레처럼 끌리던 프랑스 국기를 보며 설핏, 뭘까? 생각을 했는데 명쾌하네요. 정답은 아닐지라도 제가 품었던 의문에 대한 최고의 해석인 듯 합니다. 이야기에 깊이 빠져 보지못한 이미지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 기쁘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3-01-04 13:38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 안녕하세요. 아마도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보며 처음의 그 장면을 떠올리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글 좋게 봐주셔서 매우 감사드리구요. 저번에 차좋아님이 선거 끝나고 썼던 글 인상깊게 봤습니다. 뒤늦게나마 말씀드리네요.^^

프레이야 2013-01-0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새롭게 재해석해도, 무엇인가 끄집어낼 것이 있는 것, 그것이 고전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 이 문장 동감합니다.
맥거핀님, 저는 이 영화 보며 장발장이 풀어준 쟈베르가 강에 투신하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이 영화를 대선 다음 날 본 후 티비에서 리암닐슨이 장발장으로 나온 97년 영화를 하던데 거기선 장발장이 좀더 인간적(^^)으로 나오더군요. 휴 잭맨보다 좀더 사람(^^)에 가깝게요.리암 닐슨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요.
사람에겐 선과 악의 양면성이 공존하고, 어느 쪽을 더 발현하고 살 것인가의 태도에 삶의 성패가 달렸을까요? 이런 점 이외에도 많은 생각이 든 영화에요.
전 원작을 사서 읽을 참이에요. ^^

맥거핀 2013-01-04 13:43   좋아요 0 | URL
아..티비에서 했었군요. 하는 줄 알았으면 저도 챙겨보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 영화를 보지 않아서 인간적이라는 게 정확히 감이 오지 않지만 리암 니슨도 나름 잘 어울렸을 듯 합니다. (<쉰들러리스트>의 이미지랑 겹치기도 하구요.)

<레미제라블>은 첫 장면에서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괜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장발장은 신부가 그렇게 호의를 보여줬음에도 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을까요. 그리고 신부는 어떻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줄 수 있었을까요. 인간 악에 대한 고찰, 그리고 결국 그럼에도 인간을 다시 믿어야 한다는 교훈을 이야기해주는 이 작품을 저도 책으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늑대소년, 조성희, 2012

 

 

 

(영화의 전체적 내용이 들어있음)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다. 조성희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철저하게 '동화'라는 컨셉을 가지고 시작을 했으며, 조성희 감독은 그 컨셉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플롯이 아니라, 단선적인 기승전결의 구조와 캐릭터들의 활용이 그런 부분일텐데, 예를 들어 엄마(장영남)나 마을 사람들의 캐릭터, 악역인 지태(유연석) 등을 보면, 이들은 철저하게 기능적인 활용에 머물러 있으며, 적시적소에 나타나,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고 나가는 데에만 도움을 줄 뿐, 그 활용이 제한되어 있다. 즉 외로운 산골 마을에서 딸 둘을 데리고 사는 엄마의 어려움이나, 지태의 내면적 갈등 같은 것은 이 영화가 동화를 표방하고 있는 한, 이 영화에는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동화 <빨간모자>에서 늑대가 소녀를 잡아먹을까, 말까 내적갈등을 겪는다면 그건 이미 동화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이를 한편으로는 순이(박보영)와 철수(송중기), 이 두 메인 캐릭터에게 덧씌워진 어떤 적절한 한계와 같은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이 두 메인 캐릭터는 사랑을 하되, 그것은 동화적인 사랑이어야만 한다. 즉 이 영화는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 혹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처럼, 두 메인 캐릭터가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는 데에까지 나아갈 생각은 없다.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설혹 사랑을 이루어냈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왜? 동화니까. 동화는 '그 후로 오래도록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야지, '그 후에 섹스도 하고, 애도 낳고, 부부싸움도 하면서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늑대소년>은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고,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도 그런 부분이다. 앞과 뒤에 액자를 씌워 놓고, 여기에 할머니가 된 순이를 등장시킨다는 것. 이게 명백히 동화를 표방하고 있다면, 이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동화 <백설공주>가 다 늙은 백설공주가 나와 과거를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할 때를 상상하는 그 이질감 말이다. 즉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시작과 끝은 그 판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독이든 혹은 제작사이든 이것이 판타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판타지를 강화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일단 하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마지막 씬들에서 과거의 모든 것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골집도, 카라멜도, 심지어는 철수도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보존된 공간이 순이에게 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전과 완전히 똑같아, 라고 말해줄 때, 이것이 어떤 판타지를 강화한다고 보는 것일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꿈이 깼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꿈속의 인물이 나타나, 아니야 너는 아직 깨지 않았어, 라고 말하는 것이 그 꿈을 억지로라도 지속시킨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여기에 어떤 영화의 잠재된 핵심, 그러니까 여기에 영화의, 혹은 감독의 무의식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이 앞과 뒤의 액자들은 영화의 주플롯과 분리되어 있으며, 당연히 그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 아름다운 동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모든 영화제작사들은 1분이라도 영화에서 줄어들기를 바라므로, 이 액자가 사라지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리뷰들을 보면 상당수의 관객들도 이 액자를 그렇게 바라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필요치 않은 것을 억지로 집어넣었다는 이 사실이, 다른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늑대소년>을 다룬 글(씨네21)에서 철수를 '어정쩡한 타자'로 규정한다. 즉 철수는 '10대 소녀의 백일몽(김혜리)'이라는 견해와 '근대의 정상성에 맞선다(이용철)' 라는 견해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10대 소녀의 꿈속에 나타날 수 있는 미소년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기도 하다. 철수라는 늑대와 인간 사이에 위치한 이 존재는 도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이 질문은 영화의 마지막 철수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했다. 지태나 군인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이므로 - 그 자체로 위험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해서 -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박사나 순이의 가족, 마을사람들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가 아니므로 이곳 인간세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타자를 만났을 때 제기되는 즉각적인 질문, 이 타자는 나에게 위험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화가 의도한 바대로 대부분의 관객은 순이의 편, 그러니까 철수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에 동조하게 된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철수의 '길들여짐'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철수는 위험한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순이의 조련으로 인해 길들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철수는 기다리라는 순이의 간절한 외침에도 다시 야수성을 드러내 보이고, 철수의 인간세상에로의 편입은 실패한다.

즉 이 영화 <늑대소년>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 간단하게 말해 '괴물'을 인간과 비슷한 어떤 것으로 길들이려다 결국에는 실패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생긴다. 인간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몇십 년 후 순이가 돌아왔을 때, 그 괴물은 스스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 길들여짐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완성이 된다. 그것도 조련사의 도움이 없이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괴물은 조련사가 길들이는 데 실패하였지만, 기어이 스스로 길들여졌고, 더 나아가 조련사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서 있다. 즉 조련사는 늙고, 괴물이 되었지만, - 영화의 첫 대사를 기억해보라. 할머니는 거울을 보며 말한다. "이런 괴물을 봤나..." - 괴물은 잘생기고, 뽀송뽀송한 예전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묻는 것은 물리적인 가능성이라기 보다는, 이 영화에 깔린 어떤 전제이다. 즉 철수는 길들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괴물인 적은 없지 않았나, 이미 시작부터 이 영화는 철수를 인간이라는 틀 안에 집어넣고 시작하지 않았나,하는 물음이다. 즉 순이의 길들이기는 어쩌면 '가짜 길들이기', 아장아장 소꿉장난과 같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물음이다. 

몇 가지의 힌트들이 있다. 철수와 순이의 첫 조우. 예를 들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철수는 왜 순이를 공격하여 잡아먹지 않았나. 그가 늑대라면 도리어 인간인 순이를 공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철수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인간'이라구요. 그래서 철수는 순이와 엄마가 내민 감자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감자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그런데 우리는 그 전에 사실 철수의 먹이를 이미 본 적이 있다. 철수를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인물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고 있던 양동이에 가득담긴 생고기 조각들. 그런데 이제 와서 감자와 밥과 국과 잡채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뭐 좋다, 늑대인간은 잡식성일 수 있으니까. 다음의 장면. 김혜리는 짤막한 글(씨네21)에서 예리하게 다음의 장면을 집어낸다. 철수가 마을의 염소를 해쳤다는 누명을 쓰자 순이가 "네가 그런 거 아니지?"라고 캐묻는 장면. 그러면서 설명을 단다. '그녀도 영화도, 늑대소년을 슬픈 인간으로 볼 뿐, 그의 수성(獸性)까지 받아들이진 못한다.' 김혜리의 지적대로 늑대소년이 염소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 도리어 당연한데도, 그녀도 영화도, 나를 포함한 관객들도 그가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는다. 지태가 저지르는 일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것도 그것이지만, '처음부터' 그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반농담으로 돌아가자면, 그가 처음부터 감자를 먹었기 때문이다. 즉 그가 괴물이라는 가능성은 순이에게도, 마을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송중기니까.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정쩡한 타자 늑대소년을 보며, 그의 밝은 면만 들여다본다. 늑대소년의 기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박사에게 엄마가 "아..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구요."라고 말하는 영화 속 장면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관객이 나빠서가 아니라, 영화의 구조가 그렇게 짜여진 탓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서 '늑대소년'이라는 사실 이 복잡한 타자는 무엇인가가 제거되어 있고, 소녀도, 영화도, 관객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예를 들어 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타자가 가지는 불온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 - 가 제거된 늑대소년, 혹은 송중기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된, 심지어는 당연히 변해야 할 늑대소년마저도 그대로 보존된 공간을 본다. 그래서 이를 과거로의 타임머신, 혹은 과거의 박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제를 하겠다는 것은 그것을 어떤 상징으로 만들고, 그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들의 동물 박제이건, 북한의 김일성 박제이건 간에 그 박제물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굳이 액자로 만들어낸 과거의 박제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은 혹시 시간의 망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북한의 김일성 박제가 시간을 망각시키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시작부 "이런 괴물을 봤나...'라고 중얼거리는 할머니를 보며, 그것은 어떤 중의적인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늙고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한탄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어떤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을 담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과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은 과거 자신과 늑대소년을 둘러싼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욱 완벽히 제거되어 완전히 인간이 되어버린 괴물, 아니 그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은, 아름답고 뽀송뽀송하게 스스로 정화된 과거의 어떤 박제물이다. 즉 이 과거에는 과거 그 시간 이후로 사십 여년이 넘게 흐른 그간의 세월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깨끗하게 보존된 김일성의 박제에 몇십 년 간의 인민들의 고난의 행군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 늑대소년은 김일성이 아니라 송중기다. 과거의 괴물에게는 이미 어느정도 이 수성이 제거되어 있기는 했지만, 다시 퇴행하여 돌아간 이 현재적 과거에서는 그 수성의 흔적조차 이제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소녀의 성장담도 아니고, 철수의 성장담도 아니고, 그저 박제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액자의 시작부분에서 그녀의 대사 "이런 괴물을 봤나...'에만 정신이 팔려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녀가 거울을 보며 그 대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싸이보그지만 (예쁘니까) 괜찮아. 괴물이라도 잘생겼으면 괜찮아. 인간이라도 늙었으면 괴물인걸. 늙음, 그 늙음이 보여주는 시간은 그렇게 망각되어 다시 타자들을 분리해낸다. 물론 여기에는 근대가 만들어낸 '정상성'이라는 기제가 여전히 작동된다. 아름다운 아리아인, 아름다운 육체, 아름다운 인간성. 

아..물론 글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이야기는 동화다. 동화는 물론 동화로 남겨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동화는 동화 이면의 기담을 담고 있음이 또 사실이 아니던가. 한 잉여의 늑대소년 기담, 쯤이라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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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2-12-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아마 이 영화가 동화이기 때문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중년여성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거누어쩌면 첫사랑에 대한 또 다른 건축학개론이 아닐까, 여전히 나를 예쁘다고 해주는 지금의 당신. 이라는 요지의 칼럼을 신문에서 읽었거든요(중앙일보였나..). 전 이 영화를 안봤는데, 이 말이 꽤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래서 나이가 든 순이와 재회하게 했구나, 판타지를 깨서 판타지를 지켰군 싶은 느낌(안 보고도 잘도 말하는군요^^;).

전 지난 주말 <심플라이프>를 봤습니다, 아, 유덕화는 정말 멋지더군요..

맥거핀 2012-12-13 14:07   좋아요 0 | URL
아마도 그런 측면도 있겠죠. 중년여성들의 판타지를 건드린다, 뭐 그런. 그런 측면에서 젊은 관객을 버리고, 보다 더 나이든 관객을 타겟으로 삼았다고 볼 수도 있겠구요. (젊은 관객들은 이 액자를 대체로 안 좋아하는 듯.)

근데 또 한편으로 철수는 타자니까요. '타자'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듯, 알 수 없는 어떤 것. 그런데 이 영화가 결국 선택하는 것은 그 알 수 없는 타자를 뽀샤시한 이미지, 예쁜 어떤 것에 박제, 고착시키는 거라고 봤어요, 저는. 타자가 위험하니까 배척하여야 한다도 위험하지만, 타자가 이쁘니까 받아들여야 한다(어떤 이미지를 씌우는 것)도 마찬가지로 저는 위험하다고 봐요. 예를 들어 현재 우리사회에서 대표적인 타자가 외국인 노동자들일텐데, 이들이 범죄만 저지르는 위험한 사람이다고 낙인찍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동시에 '러브 인 아시아' 같은 데서 하는 식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다라고 이미지만을 씌우는 것도 저는 마찬가지로 조금은 위험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그들도 나쁜 짓도 하고, 이상한 생각도 하고, 동시에 선의도 있고, 때로는 좋은 일도 하는 우리랑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자에게 조금은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간에 그런데 이 영화에서 철수에게 어떤 이미지를 고착화하여 씌워버리는 것, 마지막에 그를 박제시켜 버려두는 것은 판타지를 강화했을지 몰라도, 저는 그런 판타지가 그리 반갑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동화이기 때문이라는 Shining님의 말씀도 공감하지만요. 사실 상당수의 동화가 따지고 들어가면 좀 이상한, 그러니까 꺼림칙한 부분들이 있잖아요.^^;

유덕화 씨는 나이가 들어도 왜 그렇게 멋진지..동안 뭐 그런 거 보다도, 어떤 사람의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게 멋있는 것 같아요.

저는 개봉영화들 중 일단 <레미제라블>, <신의 소녀들>, <아무르> 이 세 편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볼 예정입니다. (원래 대선국면에는 대선이라는 워낙 잼있는 영화가 하는터라, 영화에 관심이 떨어지는데, 이번 대선은 양쪽이 하는 행태들을 보니 그만 관심이 뚝 떨어져서 영화나 열심히 봐야할 듯.)

맥거핀 2012-12-13 14:32   좋아요 0 | URL
다시 보니 댓글이 필요이상으로 너무 기네요. 댓글이 반가워서 그래요..^^;;;

Shining 2012-12-14 15:48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만날 댓글 완전 길게 달잖아요ㅎㅎ 음, 맥거핀님의 글에 댓글이 적은 건...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일겁니다ㅠ 추천을 누르는 것 외엔, 대체 무슨 말을 쓰지, 하는 느낌 말이죠. 저도 그럴때 많거든요ㅠ 밑의 영화 <생선 쿠스쿠스>는 몇 년 전 영화제에서 봤습니다. 알모도바르의 <귀향>에 비견된다는, 프로그래머님의 말씀에 홀딱 넘어갔는데 전 다소 지루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귀향>이라니, 제가 완전 사랑하는 영화예요!

동의합니다. 타자인만큼 어떤 의미로든 필터를 씌우는 건 위험하지만, 어쨌든 사람은 타자(넓은 의미로서)를 바라볼 때 필터로밖에 볼 수 없으니까요, 라는 생각이 드네요(영화랑은 무관하게 댓글을 읽다 떠오른 생각입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을 볼 때도 필터링을 하는데, 남을 볼 때는 좋든 나쁘든 좋다고 여기든 나쁘다고 여기든 어떤 타자화, 가 작용되는 게 별 수 없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듭니다.

전 <가위손>에 비유한 누군가의 평에 넘어갈 뻔, 했는데 친구가 코웃음 치더라구요;(아마 그 친구에겐 <귀향>에 비유된 <생선 쿠스쿠스>였나요...) 맞아요, 동화는 기본적으로 뭔가 그로테스크하죠.

유덕화 씨, 젊을 땐 좀 느끼하다고 생각했는데. 아, 완전 멋졌어요. 외모가 아니라 느낌이, 풍체나 눈빛이나 표정에서 오는 느낌이.. 완전 멋지던데요ㅠ

<신의 소녀들>은 개봉 안하고; 나머지 두 개는 저도 볼 겁니다*-_-*

맥거핀 2012-12-16 23:23   좋아요 0 | URL
아시듯이 원래 프로그래머들이 좀 과장하는 경향이 있죠. 하긴 뭐 그러라고 있는 자리니까요. 저도 영화제에서 소개하는 영화 소개글 같은 거 열심히 읽는 편인데, 사실 읽고나도 이게 뭔 소리인가..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근데 문제는 그렇게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라는 영화에 더 끌린다는 점입니다만.

아..근데 이 영화 <가위손>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기는 해요. 물론 가위손이나 그 원형인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에서처럼, 주인공 괴물이 어떤 내적인 갈등을 겪는 부분이 없지만요. 그런 부분에서 모티브를 따오기는 했는데, 그걸 그냥 동화적으로만 이용하고 있죠.

<심플라이프>도 보러가야 하는데, 늘 새로운 영화가 출현하고, 기존에 보려던 영화는 늘 기억 속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리지요. :)

Shining 2012-12-17 14:15   좋아요 0 | URL
아하, 그래서 맥거핀님은 어워드 대신 한 해 동안 놓쳐서 아쉬운 영화들을 정리하시는 건가요?+_+

어제 <호빗>을 봤습니다. HFR 3D로 봤는데 3D 효과는 약간 아쉽고(아직까지 3D로는 <아바타>에 버금가는 영화가 없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스토리도 약간 쳐지는 인상이었는데 액션씬이 정말 멋지더군요. 게다가 이게 1편, 도입과 전개라고 하니 역시 피터 잭슨이다, 싶네요. 확실히 정교하더군요, 색채며 움직임이 부드럽구요. 어지럽다는 일부 평이 있다던데 전 어지럽지는 않았는데 몇몇 장면에서 <트랜스포머> 처음 볼 때 생각이 났어요. 프레임 전환이 너무 빨라서, 어떤 장면들은 인지하기도 전에 지나간다는, 그런 느낌이요. 이걸 네거티브 필름으로 현상한다면 엄청 신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그냥 그렇다구요^^;

맥거핀 2012-12-17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 늘 이렇게 기술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시도하는 영화들을 보면 흥미가 가기는 합니다. 다만 문제는 제가 잘 적응을 못한다는 게 문제기는 한데요, 사실 3D를 못견뎌하는 편이라서 그냥 3D도 아닌 HFR 3D를 잘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재미있기는 해요. HFR이라는 게 프레임수를 늘린다는 거죠? 게다가 3D니까..즉 그만큼 '현실에 가까운', '눈앞에서 보는 어떠한 것'에 가깝게 다가간다는 건데, 영화가 점차 이렇게 되어가는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사실 이중의 모순된 심리를 가지잖아요. 그러니까, 현실에 가까운 화면을 보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안도를 하지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번에 개봉하는 <타워> 같은 재난영화를 봐도, 그 재난은 최대한 실감이 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관객이랑 분리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 중간 어딘가에 영화가 서 있는 것인데, 이것이 자꾸 현실에 비죽비죽 가까이 갈 때 균형점을 어디서 잡아야 하는건가, 같은 것.

그러니까 예를 들어 아주 오래전 스크린에서 기차가 달려올 때 관객들이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놀라서 피하려던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영화의 감상에 도움을 줄 것인가, 아닐 것인가의 문제. 혹은 영화에서 물이 튀는 장면같은 것이 있을 때 실제로 물을 관객에게 뿌리는 것이 실제의 영화관람에 도움을 줄 것인가의 문제-극단적인 4D 같은 것.

비근한 예로 '언캐니 밸리'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디지털 캐릭터가 너무 인간에 가깝게 되면 도리어 관객들이 그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 그런 비슷한 것이 아마도 이 3D, HFR 3D를 둘러싼 문제에도 여전히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현실적으로 눈의 피로와 같은 문제도 있을 것이고요. 프레임 수를 높인다는 것은 게임에서 사용하는 고프레임과 비슷해진다는 건데, 게임 오래하면 눈이 많이 아프잖아요, 뭐 그런 문제도 있을 거고...아무튼 정지해있는 물체를 위해 고프레임을 쓰지는 않으니까요. <호빗>이 좀 길다고 하던데, 3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그 고프레임의 물체의 이동을 지켜보는 것이 피로감을 어느정도 불러오는가의 문제도 있겠죠.

(물론 이는 관객의 측면에서만 본 것이고, 영화 제작의 측면에서 보면 더 심한 변화가 많이 일어나니까요. 얼마전 <카페느와르> DVD 코멘터리를 보니 디지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데, 배우들 말이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변화가 배우들의 연기패턴에도 여러 변화를 불러온다고 하더라구요. 3D, HFR 3D로의 변화도 비슷한 강도의 변화를 불러오겠지요.)

아무튼 어쩌면 이런 것도 신기술에 대한 일차적인 거부감에서 유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영화에서 소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왜 영화에서 소리가 필요하죠?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요.

Shining 2012-12-19 01:34   좋아요 0 | URL
필름영사기는 정말 신기해요.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원리지만 어떤 면에선 굉장히 섬세하죠. 필름을 편집할 때는 더 조심스럽죠. 하나하나 잘못된 컷을 손과 눈으로 잡아내지 않으면 잘못하면 필름을 통째로 버리게 되거든요. 20번대 프린트와 200번대 프린트(블록버스터 영화는 200벌 이상을 만들죠)는 당연히 화질이 다르고 거의 복불복인데; 200번대 프린트가 200번 이상 상영을 하기도 하구요. 쇼박스의 상징인 하얀 얼굴이 회색이 되고, 음질도 늘어나고 무엇보다 이건 상영을 접으면 무조건 쓰레기가 되거든요(재활용이 불가능한, 그저 처치곤란한..). 반면에 디지털은 외장하드만 딸랑 오는데다 몇 백번을 상영하든 똑같으니까요. 그런데 재밌는 건, 디지털이 사고나면 더 파장이 커진다는 거. 사고날 확률은 적지만 사고나면 줄줄이 이어질 확률이 높거든요. 저는 영사기가 엄청 신기했고 지금도 신기해요. 그래서, 좀 낡고 늘어져도 그 자체로도 참 좋았거든요. 기술적인 면이 아닌 어떤 감상적인 면에서 말이죠.

아이맥스는 관람한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3D는 자리선정이 아주 중요하죠. 사실 <호빗>보고 나와서 약간 눈이 뻑뻑한 느낌은 들었어요. 집중을 한 탓도 있겠지만 워낙 정교하다보니 눈을 깜빡이는 속도도 더뎌진것 같았거든요. 프레임 수가 늘어난다는 말에 가장 처음 생각난 건 필름의 무게였어요. 필름을 하나하나 봐도 참 신기한데 이게 두 배라면 거의 미동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겠다는 것과 필름으로 따지자면 양이 어마어마할 거라는 거. 그런 느낌을 받고 디지털이란 참 편하고 유익하고 쉽다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그렇네요. 영화란 판타지를 가장한 현실을 믿으러 가는 곳이며 현실인 척 하는 판타지를 보러 가는 곳이니까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며 비판하다가도 지나치게 현실적이면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

<휴고>가 생각나네요. 마틴 스콜세지는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구나, 몇 십년 전에도 지금도 똑같이 사랑하고 경애하는구나, 라는 느낌. 맥거핀님 글과는 약간 무관하지만(쓰다보니;) 글을 읽다보니 드는 마음들을 적어봅니다 :)

맥거핀 2012-12-20 02:36   좋아요 0 | URL
네..하신 말씀을 들으니 재밌네요. 사실 필름같은 아날로그는 조금씩 마모되고 망가지고 하기는 하지만, 어떤 물리적인 실체가 있으니 복구의 여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디지털은 이것이 철저하게 가상의 공간에만 있으니 한번 문제가 생기면 그냥 휙 날라간다는 것...그러니까 미래의 어느날에 지구에 엄청난 전자기파가 몰아닥친다면 디지털 공간의 자료들은 아무 티끌도 없이 한 방에 휙 사라지게 되는 것이잖아요. 책이나 필름이 불에 탄다면 탄 자국이라고 남지만, 디지털은 뭐 그냥 날라가게 되니. 디지털 백업도 중요하지만, 아날로그 백업도 그래서 여전히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 Shining님은 아무래도 아날로그를 사랑하시는 아날로그형 인간이신 듯 해요. 프레임 수가 늘어난 영화를 보면서 필름의 무게를 생각하신다니요. 사실 디지털 같은 것을 생각할 때는 대체로 그런 물리적인 무게 같은 것은 생각안하잖아요. 그러고보니 궁금하긴 하네요. 1M 파일과 1G 파일은 물리적으로 무게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같은 것.

갑자기 야밤에 쓸데없는 생각이 듭니다.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디지털 상에만 있는 내 글이 다 날라가면 어떡하지, 지금 미리 프린터로 따로 뽑아두어야 하나 같은 것...-_-;

Shining 2012-12-20 12:49   좋아요 0 | URL
2분 30초, 4분 짜리 예고편 필름을 몇 개 갖고 있는데요. 그걸 촘촘하게 말아도 크기가 꽤 되거든요. 당연히 무게도 있구요. 필름을 한 번 접하면, 그 무게를 먼저 짐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네요. 디지털은 부피, 아날로그는 질량일까요.

저는 중요한 문서를 온라인, 외장하드, usb에 똑같이 복사해뒀는데요. 하지만 잃을라고 하면 세 개로 나눠나도 방법이 없겠지, 라는 생각이 들 때는 있습니다. 저희 집에는 프린터가 없는데, 저는 어떻게 하죠?

맥거핀 2012-12-20 13:16   좋아요 0 | URL
Shining님은 머리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굳이 프린터 해놓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2013-01-13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4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생선 쿠스쿠스, 압델라티프 케시시, 2007

 

 

 

(영화의 결말부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영화를 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영화의 마지막, 이제 새롭게 선상(船上)식당을 시작하려는 늙은 슬리만의 배 위에서 시범 운영 겸 개업 축하 파티가 벌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대접하여야 할 전처가 만들어준 생선 쿠스쿠스는 자식들 간에 벌어진 소동 끝에 어디론가로 없어져 버리고, 슬리만은 그것을 찾으러 나가지만,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생선 쿠스쿠스가 아니라 아들과 며느리의 부서질듯한 관계와 자신의 오토바이를 몰고 달아나는 어떤 아이들이다. 손님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고, 그녀의 새 딸, 그러니까 새로 만나고 있는 여자의 딸인 림은 그런 손님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갑자기 밸리댄스를 춘다. 그런 밸리댄스는 손님들의 열광 속에 농밀하고 아슬아슬하게 하염없이 이어지고, 슬리만은 자신을 거의 데리고 노는 듯한 아이들의 뒤를 쫓다가 그만 쓰러지고 만다. 그런 쓰러진 슬리만의 모습과 이국적이고도 이질적인 밸리댄스의 음악이 겹치며 엔딩크레딧이 오른다. 

이 마지막은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프랑스 사회를 살아가는 슬리만 가족을 비롯한 아랍계 이민자들의 모습과 그들의 문화가 들어 있으며, 예전 세대의 퇴장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의 문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화합의 문제가 들어 있고, 구성된 가족과 가족의 해체, 분열, 그리고 새로운 가족의 결합과 그런 가족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의 문제가 나타나며, 동시에 계층과 계급의 문제, 즉 그 선상식당의 수많은 손님들의 다양한 동상이몽이 드러난다. 이것을 감독 압델 케시시는 거의 마법과 같은 솜씨로 마지막에 압축시키며, 드러내 보이면서 동시에 감춘다. 즉 이 수많은 문제들은 수면 아래에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수면 위에는 오직 두 가지만을 드러내 보인다. 그 하나는 밸리댄스, 그 중에서도 밸리댄스를 추는 림의 풍만한 - 아니 이 표현으로는 사실 다 담기 어렵지만 - 배이며, 다른 하나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와서 가져가보라고 조롱하는 아이들의 뒤를 쫓는 슬리만의 달리기이다. 이 두 가지가 교차하며, 여기에 밸리댄스의 흥겹고도 농밀한 음악이 겹쳐질 때, 그것은 어떤 이상한 축제가 된다. 예를 들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가 축제가 아닌 축제, 그럼으로써 더 축제가 된 어떤 마법과 같은 풍경을 보여주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마지막은 산적한 문제들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이상하게도 활력과 축제의 힘이 만들어내는 희망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힘, 여성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힘과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아들, 그리고 결국 길에 쓰러지는 아버지와 달리, 이 축제를 지속시키는 것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밸리댄스를 춤으로써 모든 이들의 곤경을 누그러뜨리는 림의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새 딸인 림과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딸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림의 밸리댄스로 약간은 해소되는 것처럼도 보이고, 그 사이에 슬리만의 새 여자는 다른 음식을 해가지고 가져온다. 그리고 동시에 슬리만의 전처는 남은 생선 쿠스쿠스를 어느 노숙자에게 전해준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마지막에 생선 쿠스쿠스를 유일하게 맛보게 되는 것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다. 물론 이것이 수렴되는 것은 위에서 얘기했듯이 밸리댄스를 추는 림의 풍만한 배이다. 이는 어떤 성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다산성이나 모성과 같은 느낌인데, 이 림의 배와 슬리만의 달리기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어떤 이미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슬리만의 아이들을 뒤쫓는 달리기는 마치 그의 생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닿을듯이 닿을듯이 오토바이에는 닿을 수 없지만, 그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 그 오토바이는 그때 그가 가진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가족들을 건사한다는 목표로 한평생 공장에서 일했지만, 공장에서는 버려졌고, 성적으로는 불능의 상태가 되었으며, 이제 선상식당을 시작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지만, 그 목표는 이제 위기에 처해있고, 그는 그 목표가 가장 가까이에 와 있을 때 달리기의 끝에서 예정된 쓰러짐을 맞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길한 마지막이고, 안타까운 결말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여전히 슬리만의 다음 세대, 그러니까 그의 자식들과 그들이 만들어낼 세계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선상식당의 밸리댄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 딸 림이 축제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추는 춤, 그것으로 조금은 가까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가족들간의 화해, 그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나갈 발걸음을 이 마지막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 곳 프랑스는 그들이 계속 이어나가 살아야할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중반부 슬리만은 선상식당을 하기 위해 낡은 배를 구입하고, 그것을 고쳐나간다. 그리고 선상식당을 열기 위해 여러 복잡한 절차, 그러니까 식당허가를 받고, 투자를 받고, 위생에 대한 감독을 받는 등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이 배는 그러니까 어쩌면 슬리만이라는 사람의 재현일지도 모른다. 그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이 이민자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느라 점점 낡아졌으며, 그 마지막에서 그는 새롭게 수리되어 새로운 용도로 사용하려는 배처럼,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배와 달리 완전히 고쳐질 수 없는 것. 대신 사람은 배와 달리 다음의 세대를 낳고, 그들에게로 삶은 이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전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새롭게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민자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은 새로운 땅에 들어온 낡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기잡이 배가 식당용 배가 되려면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처럼 낯선 땅에 적응하기 위해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과거의 습관, 과거의 문화를 완전히 버릴 수가 없다. 그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과거의 어떤 것들은 새로운 땅에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그 일부는 또 새로운 세계로 긍정적으로 수렴되어 새로운 문화가, 새로운 삶의 양식이 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이 영화에서의 '생선 쿠스쿠스'와 같은 것이다. 쿠스쿠스(couscous)는 파스타의 일종으로 그것에 채소를 곁들이면 채소 쿠스쿠스, 생선을 곁들이면 생선 쿠스쿠스 등이 되는 음식이다. 이는 슬리만 가족과 같은 튀니지 이민자들에게는 흔하디흔한 음식이지만, 그것을 접할 기회가 흔치 않은 선상식당의 손님과 같은 프랑스 인들에게는 조금은 낯설고 이질적인 음식이며, 따라서 그 선상식당에서 처음으로 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음식은 한편으로는 이민자 사회의 상징, 즉 전통의 보존과 새로운 규칙의 습득 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긴장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긴장들은 다음의 세대들로 여전히 이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 압델 케시시는 이러한 것을 그들의 육체로서 효과적으로 드러내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음식, 그 음식을 소비하는 육체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영화의 모티브는 음식이면서, 그 음식을 소비하고 활동하는 육체이기도 하다. 압델 케시시는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인물의 곁을 바싹 따라붙는 클로즈업에 가까운 화면들의 교차로 채우고 있는데, 이는 인물들간의 갈등과 그들의 미묘한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육체를 선명하게 드러내보이며, 이는 마치 세대들의 육체성의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여성들의 가슴이나 배를 스치고 지나가는 씬이 많고, 이것과 연관한 이야기 등이 나오는데, 이는 성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어떤 세대간의 연속성을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있다. 예를 들어 뚱뚱하고 축 늘어진 전처의 몸매는 한편으로는 영화에 등장하는 슬리만의 여러 자녀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림이 그 몸매를 흉보는 것은 그 자식들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 슬리만의 자녀들 세대 역시도 이미 그 다음 세대의 어머니, 아버지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 계속 등장하는 아기들이나, 더 나아가 그 림의 풍만한 배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싫든 좋든 이민자 사회는 새로운 세대를 이어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슬리만이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도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복잡한 규칙들을 배우고, 또 새롭게 생겨나는 문제들에 적절히 대응하여야만 할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영화는 축제가 아닌 축제를 보여주며, 그리 쉽게 해결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따스함을 읽지만, 누군가는 폭력을 읽고, 또 누군가는 밸리댄스에 흥겨워할 테지만, 다른 누군가는 사라진 생선 쿠스쿠스에 답답해 할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쉽게 희망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단지 이어나갈 뿐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들은 그렇게 싸우고, 화해하고, 의심하고, 험담하고, 애정을 보여주고, 서로를 돕기도 하면서 그렇게 별다른 도리 없이 다음 세대로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슬리만을 위해 연주를 해주는 노인들의 대화가 이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는 전세대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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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2-0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간결하게 쓰는 것과 괄호를 만들지 않는 것. 이번에는 실패.

아이리시스 2012-12-1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선 쿠스쿠스가 어떤 맛일지 맥거핀님은 알 것 같아요? 프랑스 영화인데 남미 분위기 물씬나는 이 영화는 당연히 튀니지 사람들이 이민 와서 그런 거죠? 근데 튀니지는 아프리카일 뿐이고. 튀니지 음악은 어떨까요. 영화 속에서 다양한 문화적 향기를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꼭 챙겨봐야겠어요. 갑자기 생각났는데 얼마 전 읽은 <스웨덴을 가다>에서 스웨덴 음식이 맛없고 먹는 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대요. 그래서 줄이 길게 늘어진 어느 가게에 가서 음식을 먹어도 우리나라의 제일 맛없는 집 음식맛 같다고 했어요. 스웨덴 가서 분식집 열면 대박날 것 같다고 저자분이 우스갯소리 하던데 그것도 스웨덴 이민자가 보는 모습과 스웨덴 여행자가 보는 모습이 많이 다르겠죠. 튀니지 가족도 프랑스에서 생선 쿠스쿠스를 파는데 스웨덴 가서 라면장사 못하란 법이 없죠. 근데 제가 라면도 못 끓인다는 게 문제죠.

여튼 이 영화는 찜했습니다.

맥거핀 2012-12-16 23:32   좋아요 0 | URL
영화 속에서보면 그 사람들이 되게 맛있다고, 그러면서 신나게 먹거든요. 근데 사실 제가 먹으면 별로 맛이 없을 것 같기도 해요. 대체로 우리가 먹는 외국음식들도 거의 '우리화'된 외국음식들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먹는 정통식 그대로 먹으면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 게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먹는 그대로 분식 장사를 스웨덴에서 하면 분명히 망할거예요.^^ 라면도 못 끓이는 아이리시스님 식으로 끓이는 라면이 혹 스웨덴에서는 통할 수도...

아무튼 그러면서 생선 쿠스쿠스라는 것도 변하겠지요. 1세대가 만들어내는 쿠스쿠스는 다음의 세대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뭔가 '우리화'가 되는거고, 그것을 싫어하면서도, 받아들여야만 하고, 또 어쩔 수 없게 조금은 변화시키면서도, 그 변화시킨 쿠스쿠스를 어떻게든 꾸역꾸역 먹는 게 이민자들의 삶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싶어요.

세계 여러 곳을 순례하시기 좋아하는 아이리시스님에게 딱인 영화입니다. 프랑스+튀니지, 1타 2피.